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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너지 드링크 열 캔을 한 방에 마신 기분!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아니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기분. 하지만 뭘 하지?

   당신은 3.11 동일본 대지진 직후에 발생한 히키코모리들의 자살에 대해 알고 있는가? 집에서 나오지 않던 그들은 지진이 일어나자 집 밖으로 쏟아져 나왔고 길거리를 헤매고 다니다가 아무 건물에나 올라가 뛰어내려 죽었다. 너무 많은 사람, 너무 많은 차, 너무 많은 빛, 너무 시끄러운 페트병 구기는 소리. 모든 자극이 그들을 흥분시켰다. 에너지 드링크 열 캔을 한 방에 마신 기분.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초조함. 하지만 뭘 하지?
   그들은 뛰어내렸다.

   에너지 고조+방향성 부재
   우리도 그들과 같다. 우리도 갈 곳을 잃었다. 여자들이 우리에게서 사랑을 앗아갔다. 그렇다면 이제, 사랑에 투여되던 우리의 에너지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농구는 아니다.
   압력증기배출이론은 모욕이다. 세상은 명령한다. 농구하라. 빡 쳤는가? 농구하라. 때려 부수고 싶은가? 농구하라. 울고 싶은가? 농구하라. 압력솥이 폭발하지 않도록 증기배출구를 통해 증기를 배출하듯이, 농구를 통해 남성 내부에 고여 있는 화의 기운을 배출해 파국을 막아야 한다는 발상은 이성적 존재로서의 우리를 무시하는 처사다. 우리의 이성을 퇴화시키려는 이데올로기이다. 그들은 농구하는 우리를 보며 생각한다. 밥통 같은 놈! 보스턴 마라톤 테러가 AAMA(American Anger Management Association)가 압력증기배출이론을 주창한 직후에 일어났다는 것은 우연일까? 농구에 저항하라.

   그럼 어쩔 텐가. 누워만 있을 텐가. 가만히 누워 오직 상상만 하며 살까? 왜냐하면 상상은 안전하니까. 나쁜 상상과 나쁜 행위는 다르니까. 상상 ‘속’에서는 죽이고 강간할 수 있지만, 상상‘으로’ 죽이고 강간하지는 못하니까. 택시기사의 목을 뒤에서 조르는 ‘상상’을 하는 것은 괜찮다.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두 줄 서기 하는 사람을 밀어버리는 ‘상상’을 하는 것은 괜찮다. 사고행위융합오류는 오류일 뿐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상상이 우세할까. 상상이 끝나고 행동이 시작되는 시점. 작은 불씨가 확 번져 걷잡을 수 없는 산불이 되는 순간. 결국 회칼을 들고 초등학교 교문 앞에 서게 하는 그 격발의 타이밍이 영원히 오지 않으리라 누가 감히 보장할 수 있는가. 상상이 커지고 커지다 퍽 터져 현실까지 줄줄 흘러들길 내심 기대한 적 없는가?

   여자를 믿는다는 기획. 여자들이 믿을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우리의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우리는 사랑을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이제 사랑도 잃고, 사랑하는 사람도 잃은 우리에게 남은 것은 뭐든지 할 수 있는 상태뿐이다. 그 ‘뭐든지’를 무엇으로 채울지 생각하라. 뭐든지의 무한성과 에너지의 폭발성이 스스로를 절벽으로 몰지 않도록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 계속 인간이어라. 우리가 인간이기를 포기할 때, 우리의 방황하는 에너지는 우리 자신을 죽이거나, 여자들을 죽이거나, 여자들을 죽인 후 우리 자신을 죽인다.

   우리가 왜 여자들을 죽이면 안 되는가. 여기, 나의 답이 있다. 나의 매니페스토(manifesto)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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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살인자들의 무덤이 있다면,
   그곳은 두 구역으로 나뉠 것이다. 여자를 죽인 자들의 구역(A)과 남자를 죽인 자들의 구역(B). 나는 살인자들의 묘만을 모아둔 묘지공원을 상상하며 내가 그곳에 묻힌다면 어디에 묻히고 싶은지 매일 생각한다.

   만일 살인자들의 무덤에 매표소가 있다면,
   매표소 밖, 주차장과 매표소 사이, 관람객이 차에서 내려 잔돈을 준비하며 걸어가는 작은 마당. 거기, 영아 살해자들의 무덤이 있다. 거기에 묻힌 여자들은 모두 자기 아기를 죽였다. 그곳은 10만 아기 군대의 밥이다. 아기 군대는 살인 마마의 무덤을 맨발로 밟고 다니며 온종일 패싸움한다. 서로에게 똥을 던지며 끝없이 서로를 놀리는 놀림 노래를 부른다.
   마비키 아기 패가 피임약 아기 패에게 똥을 던진다. 오, 가엾고 가여운 아기! 홀쭉한 볼에서 똥이 흘러내린다. 엄마가 너를 죽였네, 피임약을 호주머니에 넣고 깜빡해서. 오, 가여워라, 피임약 아기! 화가 난 피임약 아기 패가 로 대 웨이드 아기 패에게 화풀이한다. 오, 가엾고 가여운 아기! 나무 아래는 온통 똥투성이다. 엄마가 너를 죽였네, 뱃속에서 죽이는 걸 깜빡해서. 오, 가여워라, 로 대 웨이드 아기!
   아기들은 믿고 싶다. 피임약만 있었어도 우리 엄만 날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임신에서 도중하차할 수만 있었어도 우리 엄만 날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기들은 기도한다. 엄마에게 한번의 기회가 더 없었기를! 여기? 서글픈 아기들이 천진하게 노래하는 여기? 온종일 똥 지린내 나는 여기? 계집들이나 묻히는 여기? 그런 여자라도 여자는 여자이니 그 한가운데 의자왕처럼 눕고 싶다고? 제발,
   더 나은 묫자리를 지향하라.

   만일 살인자들의 무덤에 일인 시위가 있다면,
   그리고 당신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지금부터 피켓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매표소 지나, A구역 입장, 거대한 빌딩숲 구간. 거기, (전) 애인/부인 살인자들의 무덤이 있다. 중간이 끊긴 고가도로를 아내와 자식을 태우고 질주한 실직 가장의 묘보다도 비천한 곳에.
   묘지 측은 20세기 이후에 입소하는 (전) 애인/부인 살인자에게는 묘지를 제공할 수 없으며 납골당 빌딩을 이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천 명이 찰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 명이 다 차면 한꺼번에 화장해 천 명의 뼛가루를 한 통에 담는다고 한다. 그래서 일인 시위 중인 것이다. 우리에게도 뼛가루 통을 한 통씩 달라! 1인, 1통! 손으로 무너져가는 팔꿈치를 받치고. 묘지기 뒤로 뼛가루가 섞인 검은 연기가 쉴 새 없이 타오른다. 개성이……
   묘지기가 말한다. 수도 순데, 개성이……
   너희는 개성이 없다. 뼛가루 한 통 어치의 개성도 없다. 묫자리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고, 너희가 너무 많은 것도 사실이고, 아무도 너희 묘를 궁금해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상업성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너희가 유영철이나 정남규는 아니잖니. 양심이란 게 있다면 너희가 한번 말해 봐라. 너희는 (전) 애인/부인 살인자의 이름을 하나라도 댈 수 있나 댈 수 있다면 내, 통 하나 주지. 그렇다고 자기 이름을 대면 어떡하나.
   나는 너희가 ‘일인’ 시위를 하는 것에 아이러니를 느낀다. 너희는 살아서도 개인이 아니라 경향이었다. 경향으로 존재했다. 복잡한 살해 동기도 독특한 살해 수법도 없이 그저 막대그래프로 존재했다. 그러니 묻힐 때도 같이 묻히는 게 맞다. 같이 속죄하는 게 맞다. 너희가 경향인 바람에 죽은 사람도 경향으로 만들어버린 것이 대해. 우리에게도 뼛가루를 담을…… 닥쳐라, 645번이여! 줄을 서라! 여기? 정말, 여기? 개별성이 말소된 여기? 제발,
   더 나은 묫자리를 지향하라.

   만일 살인자들의 무덤에서 묘터 선구입이 가능하다면,
   유영철의 무덤 옆은 얼마일까? 휴 헤프너가 산 마릴린 먼로의 무덤 옆보다 비쌀까? 왜냐하면 유씨는 살인의 수재, 살인자들의 영웅이니까. 많이 죽였고, 잔인하게 죽였으니까―큰 덩치 18조각, 작은 덩치 16조각, 1.5시간 완성. 사람들은 유씨의 무덤이 일찍 등장해 실망한다. 고만고만한 살인자들의 무덤을 지나 클라이맥스로 등장할 줄 알았는데 고작 A구역이라니. 그러나 유씨는 어려운 초등학교 산수 문제를 푼 고등학생일 뿐이다.
   가족도 찾지 않는 여자의 목을 잠시 쥐었다가 놓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하물며 망치로 머리를 박살 내는 건 얼마나 더 쉬운가. 인간의 머리는 모기보다 크다. 모기의 날갯짓을 따라 허공에 손뼉을 치며 돌아다녀 본 적 있는가. 모기를 죽여본 적 있는가. 그럼, 인간 머리통쯤은 일도 아니다. 용기를 가져라.
   모기와 인간은 다르다. 모기를 때려잡듯 인간을 때려잡을 순 없다. 휴머니즘이라는 완고한 경계가 있다? 심장의 차가운 부분(노인이 무릎을 짚고 버스 계단을 내려가는데 문 닫힘 버튼을 누르는 부분)을 계속 확장하고, 심장의 따뜻한 부분(공중목욕탕에서 자폐 아동이 물에 침을 뱉어 모두가 욕조를 나갈 때 아이와 같이 있어주는 부분)을 계속 축소하면, 우리도 금세 유씨를 따라잡을 수 있다. 그래 봐야 A구역. 멈추지 마라. 더 큰 꿈을 꾸어라. 더 나은 묫자리를 지향하라.

   만일 살인자들의 무덤에서 무덤 하나를 파구분할 수 있다면,
   나는 총잡이의 묘를 고를 것이다. 살인의 미학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누구를 죽이느냐, 몇 명을 죽이느냐, 도 중요하지만 무엇으로 죽이느냐, 도 중요하다. 무기는 사랑, 거리, 집중의 문제다.
   1960년, 야마구치 오토야는 성공했다. 1974년, 문세광은 실패했다. Y는 칼―30cm 협도―을 썼다. MSG는 총을 썼다. Y는 단상 위로 뛰어 올라갔다. MSG는 단상 아래서 허둥댔다. Y는 일본 사회당 위원장과 쾅 부딪혔다. MSG는 박정희의 머리카락에도 닿지 못했다. Y의 칼은 위원장의 복부를 깊이 찔렀다. MSG의 총알은 자기 허벅지, 연단, 여자의 머리―일부 설에 의하면 이마저도 아니지만―에 산발해 꽂혔다. Y는 남자를 죽이겠다고 했고, 남자를 죽였다. MSG는 남자를 죽이겠다고 해놓고, 여자를 죽였다. 그런데 왜 MSG가 A구역이 아니라 A구역과 B구역을 가르는 경계석 아래에 묻혀 있나? 나는 납득할 수 없다.
   묘지 측은 정상참작 운운한다. 어쨌든 남자를, 그것도 큰 남자를 죽이려고 했다. 여자를 죽였지만, 제법 큰 여자였다. 나는 의구심이 든다. MSG는 처음부터 남자를 죽일 생각이 없었던 게 아닐까? 나, 남자 죽일 거요, 말만 해놓고 자신도 자신의 맹세를 믿지 못한 게 아닐까? 봤죠? 나, 하긴 했어요, 결과야 어찌 되었든 간에…… 식의 소시민적 예의 바름! 그런 부류가 되고 싶은가? 남자를 죽이기로 해놓고 여자를 죽이는, 아버지를 때리고 싶지만 어머니를 패는, 영원히 하향 지원하는, 제발,

   쥐겹다!
   나는 짜증을 내며 A구역을 벗어난다. 쥐꼬리만한 야심들! 그리고 B구역 초입에 널린 홧김/술김 살인자들의 무덤을 지나, 토끼풀을 뜯어, 지존파의 무덤에 바친다. JJ파는 B구역의 응달에 묻혀 있다.
   크게 되고 싶었지만 크게 되지 못한 이들. 자신들이 정한 이름으로도 불리지 못한 광산 노동자, 건설 노동자, 노름꾼, 전과자. JJ파의 본래 이름은 마스칸. 야망이란 뜻의 희랍어. 그들은 야망 찼고, 정신도 무장했다―칼 한 자루, 물 한 병, 지리산에서의 일주일―. 근데 부자를 몰랐다. 부자의 눈빛, 부자의 패브릭, 부자의 거주지 지리를 몰랐다. 그리하여 엉뚱한 사람들만 죽이고 다녔다. 부자인 줄 알고 잡으면 부자가 아니었다.
   그들의 재능은 다른 곳에서 발현되었다. 건설 노동일을 하며 익힌 기술로 시체 소각로―길이 2m, 높이 1.5m―를 끝내주게 만들었다. 시체를 끝까지 밀어넣기 쉽게 소각로의 천장과 바닥 사이에 철근 롤러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는 누가 냈을까? 건물 밖에 난 송풍기의 조적과 미장 솜씨는 훌륭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들은 무능했다. 능력이 야심을 따라잡지 못했다. 야비했다. 실수를 인정할 줄 몰랐다. 부자인 줄 알고 잡았는데 부자가 아닌 이들도 무르지 않고 모두 죽였다. 나는 그들을 연민하지만, 그들 옆에 묻히고 싶지 않다.

   ……그리고 당신은 B구역의 기라성 같은 살인자들의 묘를 차례차례 지나 마침내 가장 좋은 자리에 묻힌 자를 발견한다. 우리의 별 같은 영웅들. 야마구치 오토야, 마크 채프먼, 시르한 비샤라 시르한…… 그 끝에 그가 잠들어 있다. 퍼져 있던 시선이 집중되는 소실점, 소박하고 위엄 있는 나무 아래.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갈 차례다. 당신은 어디에 묻히고 싶은가? 당신은 각오했을 것이다. 어차피 나도 죽는다. 죽을 거, 한 명 데리고 가리라. 어떤 한 명을 데리고 갈 것인가. 지옥 길 동반자로 택한 그 한 명에 너의 온 존재를 걸어라. 모든 에너지를 폭발시켜라. 타협하지 말라. 더 높고, 더 귀하고, 더 아름다운 묫자리를 지향하라.
   나는 정했다. 나는 남자를 죽일 것이다. 모두가 죽이고 싶었지만 죽이지 못한 남자를 죽일 것이다. 그 남자를 죽인 사람은 B구역의 가장 넓고 양지바른 곳에 묻히게 될 것이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 남자 중의 남자가 될 것이며, 감옥으로도 무덤으로도 팬레터가 날아들 것이며, 옥중 결혼뿐 아니라 옥중 재혼도 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 사람의 야심과 추진력과 철두철미함이었다면 여자 스물둘, 아무도 찾지 않는 여자라면 서른쯤은 일도 아니게 죽일 수 있었을 거라고. 그런데도 여자를 죽이지 않고 남자를 죽였으니, 대략 서른 명의 여자가 그의 손에 살아남아 오늘도 크고 작은 일상을 꾸리고 있는 거라고. 그는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음으로써, 하지 않음을 베풂으로써, 결국 해버린 자들을 우습게 만들었다고. 이것이 진정한 살인의 마스칸이 아닐지. 신실한 벗으로서 당신께 요청하나니, 이 말을 기억할 것.

   적의 수준이 곧 나의 수준이다.

   -당신의 구남O-


   “레이디, 밑줄을 그으면 어떡해!”
   나는 밑줄을 치지 않기로 약속하고 챕터0에 이어 챕터1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챕터1을 읽는 동안 사장은 내가 어디에 밑줄을 그었는지 꼼꼼히 살폈고, 보이는 내가 챕터1을 넘기기 만을 기다리며 한스 올센 식탁에 기대 프리츠한센 이케바나 화병의 꽃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보이와 나는 수요일마다 도서관에 갔다. 도서관은 우리가 사장이라고 부르는 남자가 폐업 위기의 동네 책방을 인수해서 만든 곳으로 밤에만 열고 이름만 도서관인 서점이었다. 사장은 책을 빌려주는 게 아니라 팔면서 이름은 도서관이라고 지었다. 우리는 사장의 작명을 우습게 생각했는데 쇼핑몰에 org 도메인을 다는 것처럼 상업에 공익을 어색하게 끼워 넣은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org 쇼핑몰이 .com 쇼핑몰보다 기부나 후원을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듯, 도서관 서점이 서점 서점보다 인심이 넉넉했다. 지나가던 부랑자가 창문을 두드리면 사장은 창밖으로 와인을 따라준다. “프랑스는 겨울에 노숙자에게 도서관을 개방한다잖아. 도서관은 원래 모든 시민에게 열려있으니까.”

   사장의 설명은 선을 넘지 않는다. 한번은 왜 도서관이라 이름 붙였냐 물었는데, 사장의 설명은 “도시의 서늘한 관찰자?” 딱 거기까지였다. 보이와 내가 사장의 고리타분한 재치의 향연에도 골이 따분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이런 절제력 덕분이었다.
   사장은 꽤 부자로 보였다. 책을 파는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우리에게 값비싼 와인을 공짜로 주며, 서점의 가구도 모두 유럽산 빈티지였기 때문이다. 손님 중에는 도서관에 들어오자마자 의자로 돌진해 앉아만 있다가 가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의자에 앉아 팔걸이를 쓰다듬으며 “이게 이런 느낌이구나……” 감탄하다 나갔다. 사장이 부어주는 와인을 얻어먹을 때, 우리도 그 의자에 앉아 마셨다.
   우리가 사장이 펼치는 양대 공익사업(와인 보급과 의자 체험)의 최대 수혜자이기는 했지만, 공짜는 아니었다. 사장은 “들어간 건 부추뿐인 기름 축축하고 싼 맛 나는 부침개”를 좋아한다고 자주 말했다. “등가 교환일 필요는 없어. 교환 자체가 중요해. 관계에 있어서 자존의 기초랄까.” 그래서 우리는 도서관에 가기 전에 수요 부침개 전도회에 들렀다. 교회 계단에 앉아 땀을 흘리며, 어떻게 저게 가능할까 싶게 느리게 부치는 부침개를 기다렸다. 전도사는 부침개를 부치며 찬송하고 봉독하고 동성애를 혐오했다. 우리는 잠자코 들었다. 그리고 뒤집개에서 부침개가 흘러내리자마자 두말없이 돌아나왔다. 그들이 우리를 붙잡아 놓을 수 있는 시간은 부침개를 부치는 시간뿐이었다. 밤이 되면 나와 보이와 사장은 도서관에 모여 와인을 부침개 기름으로 더럽히며 책에 관해 이야기했다.

   내가 「살인자들의 무덤」을 발견한 건 ‘벌거벗은 노트북에 스티커’ 박스 옆에 있는 ‘자유투GO’ 박스에서였다. “진짜 여기에 뭘 던지고 가는 사람이 있긴 있네.” 내가 쪼그리고 앉아 박스에서 건져 올린 낡고 구겨진 소책자를 건성으로 넘기며 말했다. 그냥 지하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교 홍보물이었다.
   “그 박스 무시하지 마.” 사장이 말했다. 커피 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도서관이 커피 향으로 가득 찼다. “국정원 직원도 가끔 와서 보고 가는 박스야.” 사장이 입 모양으로 ‘커피?’하고 물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국정원?” “응, 거기에 지금의 가장 급진적이고 미친 정신이 다 들어있거든.” 급진과 미친…… 나는 리플릿 사이에서 종이컵 두 개를 솎아냈다. 가장 흔한 것 중 하나가 혈서였다. 사람의 상상력이란 거기서 거기다.
   “여기 있는 거 다 읽었어?” 내가 「나, 안달리 강박최의 아들, 시간 저항자, 비숙달 autoerotic asphyxiation을 옹호하며」를 넘기며 물었다. 핸드폰 문자를 읽을 때도 오탈자와 비문이 거슬려 스트레스를 받는 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거기 있는 것들은 존재하는 데 의의가 있어. 읽을 순 없지. 문장이 엉망인걸.”
   “요즘 애들은 영화를 너무 봤어.” 내가 안달리 강박최의 아들 도봉구 e.w.w의 글을 읽으며 말하자 보이와 사장이 꼰대라고 뭐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자격이 있었다. 적어도 그 둘보다는. 보이와 사장은 서른둘이고, 나는 작년에 마흔을 지났다. ‘마흔을 지나다.’ 나는 사람들이 우리 커플에게 나이를 물으면 그렇게 대답하곤 했다. 마치 조리를 신고 동네 슈퍼마켓 앞을 터덜대며 지나듯 생물학적 나이도 그렇게 무심히 지난다는 듯이.
   보이와 나는 트위터에서 만난 연인이 되었다. 사장이 나를 레이디로, 성필을 보이로 부르는 이유는 우리의 트위터 네임이 각각 하드보일드 레이디, 콜드블러드 보이였기 때문이다. 처음 만났을 때, 이름을 들은 사장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저의 고등학교 홀리 트리니티도 스티븐 킹, 대실 해밋, 트루먼 커포티였답니다.”라고 했는데 우리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집에 가자마자 홀리 트리니티부터 검색해보니 성 삼위일체라고 나왔다.
   간신히 이름을 외워 온 세 소설가의 책을 그 후로 오랜 기간에 걸쳐 부지런히 빌려 읽었다. 보이와 내가 운명이라면 그래서 운명이었다. B를 알면 A를 아는 게 당연한데 A도 모르고 심지어 B도 모른 채 마구잡이로 A와 B를 알아서, 그 알 듯 모를 듯한 상태로 용어 C, 은어 D를 미리 꿔 쓰고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갚아나가지만 여전히 모르기도 해서. “……그게 대체 뭔 소리예요?”라며 사장이 웃어서 나도 웃으며 말했다. “저라고 알까요?” 우리가 찧고 까부는 동안에도 보이는 멍하게 있었다. 보이는 원래 말이 없다. 내가 “연하남의 과묵함에는 나이 차이를 상쇄하는 효과가 있다지?”하고 놀려도 웃기만 할 뿐이었다.
   “왜 밑줄 못 치게 해? 어차피 비매품 아니야?” 내가 「살인자들의 무덤」을 펄럭이며 말했다. 보이는 서가를 둘러보고 있었다. 뒷짐을 지고 서가에서 약간 떨어져 책을 보았는데, 그 거리 때문에 어렴풋한 부근만 알 수 있을 뿐 보이가 정확히 어떤 책등을 보고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혹시 모르잖아.” 뒤에서 들려온 사장의 목소리에 보이의 몸이 굳었다. 사장은 의자에서 몸을 빼고 보이를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보이가 자리로 돌아왔고, 사장은 태연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의 구남O가 정말 전두환을 죽일지. 그럼 「살인자들의 무덤」 값이 얼마나 뛰겠어. 근데 오늘 자기가 원본을 훼손한 거라고. 다행인 건 그날이 와도 내가 그걸 안 팔 거라는 거지. 안 팔고 액자에 넣어서 기증.”
   “이게 전두환 얘기라고?”
   사장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모두가 죽이고 싶었지만 죽이지 못한 남자’라고 적힌 문장을 짚으며 말했다. “전두환 죽이러 가자는 얘기잖아.” “난 여자가 쓴 글인 줄 알았는데?” 나는 서둘러 정정했다. “아, 물론 여자라고 전두환 죽이러 가자는 얘길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웬 여자?” “여기.” 나는 마비키 아기, 피임약 아기, 로 대 웨이드 아기 문단에 동그라미를 쳤다. “이건 프로 초이스가 아니면 쓸 수가 없어.” 사장이 핸드폰을 건넸다. 화면에 1999년 7월 22일 자 동아일보 기사가 떠 있었다.

   신창원 ‘전쟁’ 상대는 전두환·노태우씨.
   신씨가 경찰 조사에서 ‘그들에게 전쟁을 선포한다.’고 밝힌 대상은 전직 두 대통령이며 그들의 집을 알아내기 위해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일대도 한 시간 정도 둘러보았으나 경찰의 삼엄한 검문검색에 위협을 느껴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다들 한 번쯤 담갔다 나오는 통과의례 같은 거구나, 전두환은.” 나는 ‘인정욕구’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은―인정욕구라는 말은 너무 거창하다―범죄자들의 쎄 보이고 싶은 마음에 신물이 났다.
   “그거 알아?” 사장이 보이와 내가 가지고 온 책을 뒤적이며 말했다. “예전에는 망상도 정치적이었어. 귀에 도청 장치를 달아 놨다, CIA가 감시한다, 그 정돈 했지. 자존심이 강했다고나 할까? 마비키가 있었지. 적어도 자신을 정부가 도청하고, CIA가 감시할 만한 거물로 상상할 줄 알았던 거야. 살인도 그래. 봐, 90년대까지만 해도 곧 죽어도……” 나는 마치 정신질환과 범죄 사이에 관계가 있다는 양 자연스레 둘을 붙여 말하는 사장이 거슬렸고 그래서 와인을 마셨다. “요샌 꿈들이 너무 작아. 요즘 애들이 살인에서 야심 부려 봐야 뭐겠어, 아이돌 죽이기밖에 더 하겠어? 정신이란 게요, 사회의 공기를 직방으로 흡수해. 기대감소 시대가 살인에까지 영향을 미친 거지. 구남O의 말대로 적의 수준이 곧 나의 수준인데 적의 수준도 나의 수준도 폭망한 거야.” 사장은 실컷 죽이고도 자신이 죽인 게 성에 안 차 자괴감에 빠진, 자신이 죽인 것도 경멸하고 그것을 죽인 자신도 경멸하는 기대감소 시대의 살인자처럼 우리와 자신을 바라봤다. 그렇게 통찰한 얼굴로 도서관 공기를 경멸로 가득 채우나 싶다가 경쾌하게 덧붙였다. “공항처럼 아이돌 팬 사인회에도 알몸 투시기를 설치해야 한다니까!”
   아직 와인이 많이 남아 있었다. 보이와 나는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부침개가 먹고 싶다면 부침개가 다 부쳐질 때까지 전도사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와인이라고 다를까. 우리는 책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장이, 보이가 우리끼리 있을 때 “사장 새끼 책 점 치는 거 진짜 짜증 나”라고 했던 바로 그 행동을 했다. 사장이 물었다. “그래서, 이 책에선 어떤 부분이 제일 좋았어?” 보이는 그걸 ‘책 점’이라고 불렀다. 사장이 독후감을 빙자해 우리의 사연과 현재의 심리 상태를 알아내려는 수작이라는 것이었다. “점? 점쟁이, 할 때, 그 점?” “어.” “사장이 왜? 우리가 뭐 특별하다고?” “심심하니까.” “뭔 소리?” “심심해서. 우리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심심해서 그런 짓 하는 거라고.”
   나는 보이가 어리다고 생각했다. 사장이 우리에게 책에서 마음에 드는 장면과 구절을 물어 그것으로 우리의 내면을 부당하게 읽는다 한들, 뭐 그리 대순가 싶었다. 그러나 보이는 프라이버시에 예민했고, 보통 사람보다 프라이버시의 범위가 넓었다. 나는 정말 신경이 쓰이면 제대로 된 신호 대신 소음을 보내면 된다는 주의였다. 그러나 보이에게는 책에서 어디가 좋았다는 신호뿐만 아니라 대놓고 아무 말이나 하는 소음도 프라이버시에 속했다. 나는 사장이 책 점을 치면 바로 답했다. 보이가 딴짓하는 듯 보여도 사장이 책 점을 치면 보이의 피가 끓어오르기 때문이었다.
   “여기.”
   내가 마이클 코넬리의 『라스트 코요테』 267쪽에 붙은 포스트잇을 떼자 사장이 코를 박고 읽었다. 해리 보슈 시리즈의 하나인 『라스트 코요테』에서 주인공인 해리 보슈 형사는 30년 전에 살해된 어머니의 미해결 살인 사건을 해결 중이다. 보슈의 어머니인 마저리 로우는 쓰레기통에 처박힌 채 시체로 발견되었다. 보슈는 단서를 얻기 위해 당시의 담당 형사였던 제이크 매키트릭을 찾아간다. 그는 은퇴하고 고향에서 조용히 낚시하며 살고 있다. 두 사람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고……
   “아아, 여기!”
   사장이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눈을 반짝이며 앞뒤를 발췌독했다. 불쑥 찾아온 해리 보슈. 그를 의심하는 전직 형사 매키트릭. 속없이 둘에게 낚시를 권하고 샌드위치까지 싸주는 매키트릭의 아내 메리. 조류를 따라 평화로이 흘러가는 배. 검찰총장과 포주와 부패 형사의 어쩌고저쩌고. 튀어 오르는 돌고래. 보슈에게 겨누어진 매키트릭의 베레타 22.
   
   “재밌는 델 골랐네.”
   끓어오르는 보이의 피. 나는 보이의 잔에 와인을 부었다. 그러곤 짠, 소리를 내며 잔을 부딪쳤다. 우리는 와인의 시간 아래 있었다. 보이가 와인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내가 물었다.
   사장이 문장을 짚어나가기 시작했다.

   “아 참, 잊은 게 있군. 메리를 실망시키고 싶진 않아.”
   “……”
   “제이크, 권총을 겨눌 때는 저를 누구로 생각했습니까?”
   매키트릭은 아무 대답 없이 비닐봉지를 깨끗하게 접어 냉장 박스 안에 도로 넣었다. 허리를 펴고 보슈를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몰랐어. 그냥 여기로 싣고 나와 저 샌드위치처럼 바다에 던져버릴 생각이었지. 남은 평생 동안 여기 숨어 살면서 누군가가 나를 죽이려고 보낼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아.”


   “하나, 둘, 셋, 하면 말하는 거야.”
   사장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보이와 나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만약 당신이 살해당한다면, 누구에게 당하시겠습니까, 하나, 둘, 셋, 지금, 바로 떠오른 그 얼굴을 말해!”
   보이가 와인 잔을 뒤집었다.
   “큭.”
   사장이 멋쩍게 웃으며 『라스트 코요테』 옆에 「살인자들의 무덤」을 놓았다. “내가 오버하는 걸 수도 있지만, 오늘 이 두 글을 만났다는 게 운명 같지 않아? 저기 어디서.” 사장이 서가 쪽으로 손을 휘저었다. “책의 신이 우리에게 이 둘을 내려준 걸 모르겠어?”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보이의 와인 잔을 다시 뒤집었다. 테이블 아래에서 새 와인을 꺼내려다가 책 뒤에 숨겨둔 와인을 가져왔다. 보이의 잔에 와인을 따르며 입 모양으로 ‘먹어 봐.’ 하고 말했다.
   “「살인자들의 무덤」이 장차 내가 누구를 죽일 것인가에 관한 글이라면 『라스트 코요테』는 누가 나를 죽이러 올 것인가에 관한 글이잖아. 앞의 질문이 미래를 향해 있다면, 뒤의 질문은 과거를 보고 있지. 매키트릭은 망망대해를 보며 끝없이 자문했어. 누가 나를 죽이러 올 것인가. 그건 죄를 묻는 질문이지. 내가 누구 손에 죽을지 상상하는 건, 내가 누구에게 죄를 지었는지 돌아보는 것과 다르지 않아.”
   사장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상상해본 적 없어? 재활용 쓰레기를 잘 버리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뒤도는데 앞에 그 사람이 있는 상상. 보는 순간 아, 왔구나, 묘한 안도감이 드는. 그래, 네가 나를 죽이러 온다면 나는 인정, 하는 사람의 얼굴을.”
   책 점만 치면 작두를 타고 절제의 선을 넘어버리는 사장의 지루한 참회가 이어졌다. 나는 40년 뒤에 보이가 사장을 찾아오면 사장이 예상이 적중했다며 신나할지, 어이없어할지 궁금했다. “아아, 브루투스, 너라면!”일까, “아니, 브루투스, 네가 왜?”일까. 보이는 그때도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속으로만 생각할 것이다. 넌 결국 책 점 때문에 죽는구나. 남이 책장에서 무슨 책을 보나 엿봐서 함부로 남의 마음을 짐작하고 수준을 가늠해서 너는 죽는구나. 그때 나는 어디에 있을까. 똑똑똑.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상상이 아니라 진짜 왔었어. 군대 후임이 칼을 들고……” 보이는 참회를 선택했다. 아직은.
   후임은 보이의 집 앞 공원 벤치에 앉아 보이를 기다렸다. 눈이 내렸고, 벤치에 앉은 맨 엉덩이는 차가웠다. 칼을 쥔 새빨간 손. 후임은 보이와 오래 이야기했고, 칼을 내려놓고 마시던 맥주 캔을 비틀다 손을 베었다. 보이는 그의 손을 붙들고 함께 응급실까지 걸었다. 끝없이 내리던 눈. 후임은 여름 조리를 신고 있었다. 그래. 네가 나를 죽이러 온다면 나는 인정할 수 있어…… 사장이 엄숙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긴? 자긴 누구야?”

   나는 재활용을 분리수거한다. 페트병을 밟자 콰직 소리가 난다. 계속 들으면 정말 사람이 돌아버리겠구나, 뛰어내리겠구나, 싶게 거슬리는 소리다. 분리수거를 마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이케아 가방을 메고 돌아서는데 그가 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내 과거, 내 잘못, 내 인생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망치를 들고.

   마이클 코넬리는 메리가 샌드위치를 싸는 장면을 묘사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의 상상으로 메워야 한다.

   메리: (기쁜 일이야! 남편에게 손님이 찾아오다니! 어제도 제이크는 치통 때문에 잠을 설쳤어. 침대에서 조용히 일어나려 했지만, 난 느낄 수 있었지. 하지만 닥터 브로더릭은 분명 남편의 이에 아무 이상도 없다고 했는데…… 우울증이 아닐까? 클로이 부인의 두통처럼. 아니지. 클로이 부인은 정말 뇌수술을 했지. 우울증이 아니라 머리에 진짜 문제가 있었어. 어쩌면 남편도 정말 이가 아픈 걸지도 몰라. 감자 샌드위치가 좋겠어. 햄은 질겨서 이에 무리를 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손님도 으깬 감자를 좋아할까?)

   샌드위치는 바다에 던져졌다. 남편은 아내의 샌드위치를 뱃전 밖으로 던지고 말한다. 누구든 저 샌드위치처럼 바다에 던져버릴 생각이었어. 나는 그런 구절을 읽을 때, 샌드위치가 된다. 보이와 사장은 참회하고 보슈와 매키트릭은 추리하는데, 나는 샌드위치가 된다. 구남O는 선언하고 사장은 전두환을 발견하는데, 나는 샌드위치가 된다.

   하드보일드 레이디가 뛰기 시작한다. 거대한 샌드위치가 그녀를 쫓고 있다. 바다 이끼로 덮인 샌드위치. 무엇도 그녀를 붙잡지 못한다. 그녀는 점점 더 빨라진다. 무감해진다. 잔인해진다. 자유로워진다. 머리 위에선 물방울이 영원히 똑똑똑. 그녀가 달리면서 고개를 든다. 천장이 길게 찢어져 있다. 터진 하늘에서 고개를 내민 여자들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눈물을 흘린다. 그 너머로 뒤집힌 무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미상

하드보일드 소설을 그다지 많이 읽지 않았지만, 하드보일드 소설을 사랑하는 여성 독자의 딜레마에 대해 종종 생각해보곤 한다. 그런 여자들은 누구에게 동일시해야 할까. 독주를 마시는 형사에 동일시하던 여자들은 책을 덮고 카페를 나오며 생각한다. 너무 늦었군. 이쪽 골목으로 가지 말아야겠어.

2019/08/27
2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