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지금 JFK 공항 라운지에 앉아 있다. 시간은 오전 11시 17분. 테이블 위에는 조금 전 주문해온 피자 두 조각이 놓여 있다. 삼 분 전쯤 아이패드를 꺼내 타이핑을 하기 시작했는데 앞에 앉은 아내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 배가 아픈가? 아니면 두통? 피자가 별로인가? 슬쩍 넘겨보니 아내는 아직 피자에 손도 대지 않았다. 너무 맛없어 보이는 피자의 비주얼만으로 기분이 상한 걸까? 내 피자 이론에 따르면 겉으로 맛없어 보이는 피자도 실제로 먹어보면 얼마든지 맛이 있을 수…… 아니다. 방금 한입 먹어봤는데 이건 쓰레기다. 워싱턴 스퀘어 파크 근처에 있는 벤스 피자가 생각난다. 3달러면 끝내주는 페퍼로니 피자를 먹을 수 있는데. 지금 입안에서 돌아다니는 건 싸구려 냉동 치즈와 돌덩이 같은 도우 뿐이다. 그때 갑자기 아내가 울먹거린다. 아무래도 저건 피자 때문이 아닌 것 같다.

   2. 이 여행을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공항으로 운전을 해오면서부터다. 우리가 사는 뉴저지에서 뉴욕 끄트머리까지, 거의 두 시간 가까이 도로 위에 지뢰처럼 파여 있는 악명 높은 포트홀들을 피하면서 곡예 운전을 하는 동안 아내는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장인어른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에 가는 길이니 그럴 법도 했다. 아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내만 마음이 복잡한 건 아니었다. 코비드19 팬데믹 상황이라 재택근무 중이기는 했지만 나도 회사에 남은 휴가를 다 몰아 써서 나왔다. 15일. 웃긴 건 우린 외국인이라 한국에 도착하면 2주간 어딘가에서 격리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쿼런틴 끝나면 바로 돌아와야 하는데 가는 게 의미가 있을까? 내가 묻자 아내는 덤덤하게 말했다. 부모가 죽었을 경우는 격리 안 해. 나는 항변했다. 아직 장인어른이 돌아가신 건 아니잖아. 아내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돌아가실 거야. 우리가 가는 동안.

   3. 따라서 이 로그는 장인어른의 죽음을 향해 떠나는 아내와 나의 여정에 관한 기록이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언젠가 쓸모가 있겠지. 화성에서 조난당한 식물학자도 로그를 써서 지구에서 떼돈을 벌지 않았는가. 멋있는 말을 덧붙이자면, 기록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의무라고 누가 말한 것 같다. 뭐 아무러면 어때. 하지만 화성 식물학자의 로그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든다. ‘아무래도 좆됐다.’

   4. “이제 보딩해야 하지 않아?”
   아이패드 너머로 아내가 말한다. 눈화장이 살짝 번졌는데 말해줄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아내가 마스크를 쓰고 먼저 일어난다. 반 이상 남은 피자는 아내 손으로 쓰레기통에 옮겨진다. 나는 보딩 패스를 찾기 시작한다. 있어야 할 자리에 보이지 않는다. 보딩 패스에는 늘 발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젠장, 이걸 어디에 뒀지?

   5. 발 달린 보딩 패스는 아내의 가방 앞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다. 아내는 제멋대로 도망친 보딩 패스를 혼내기는커녕 공개적으로 나를 비난했다. 사람들이 동양 여자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 중 하나는 그들이 순종적이고 나긋나긋할 거라는 것이다. 나 역시 아내를 만나기 전에 그런 편견이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보라. 내 눈앞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자신의 모국어로 나를 저주하고 있는 이 매력적이고 위협적인 호랑이를. 호랑이가 언어를 바꿔 말한다.
   “당장 아이패드 꺼.”

   6. 팬데믹 이후 비행기를 타는 건 처음이다. 뉴스에서만 봤던, 좌석 사이가 한 칸씩 비워진 비행기의 실내 풍경이 낯설다. 마치 유령을 위한 자리 같다. 산 자들은 대개 죽은 자들을 배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지독히 이기적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탄 비행기는 절반의 승객과 절반의 유령을 태우고 날아가는 중이고, 나는 이 절반의 비어있음이 썩 마음에 든다.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공중에 있는 것도 아니고 땅에 있는 것도 아닌, 미국도 아니고 한국도 아닌 이 시공간. 마침 기내의 조명이 꺼지고 인위적으로 만든 밤이 시작된다. 오직 비행기 안에서만 지속되는 어둠. 죽음을 향해 미끄러져 가는 기분이 든다. 살짝 차가워진 공기에 팔뚝 위로 구스 범프스가 오도독 올라온다. 나는 비로소 호철에 관해 생각한다.

   7. 미스터 호철 리. 장인어른은 1942년에 태어났다. 도시 이름을 잊어버렸는데(G로 시작한다는 것만 기억난다), 지금은 북한에 있는 도시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내 예상과 다르게 장인어른은 자신의 유년 시절을 선명하게 기억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에게 G라는 도시는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그러나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어떤 공간을 의미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술을 마시면 그는 종종 어릴 때 자주 불렀다는 노래를 한국어로 흥얼거렸다. 하나 둘 셋 넷……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오직 숫자뿐이었는데, 그는 이 노래 제목이 ‘칠드런 마치’라고 했다. 1950년에 나도 알고 있는 그 유명한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그때 호철은 북한군을 피해 남한으로 피난을 내려왔다. 가족이 다 같이 내려온 거라서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동 중에 동생 하나를 잃어버렸고 그게 호철에게는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전쟁이 끝난 뒤 호철의 가족은 휴전선과 가까운 항구 도시(한 칸 건너 옆자리에서 아내가 도시의 이름을 알려준다.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공항 이름인데 그것도 몰라?” 그러나 그녀의 발음은 정확히 들리지 않고 나는 또 놓쳐버리고 만다)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거칠고 혼란스러운 사춘기를 보내고 난 뒤 그는 20대 후반에 미국으로 혼자 건너왔다.

   8. “근데 호철은 미국에 왜 온 거야?” “파더-인-로라고 해줄래?” “오케이. 파더-인-로. 와이?”
   “나도 몰라. 물어볼 때마다 맨날 바뀌니까. 언제는 성공하고 싶어서, 언제는 실연을 당해서, 언제는 미국 영화 때문에…… 왜 물어보는 건데?”
   “아, 그냥 궁금해서.”
   “그놈의 아이패드 이제 좀 덮지 그래? 잠이라도 자둬.”

   9. 실은 나도 물어본 적이 있다. 왜 미국에 왔냐고. 호철은 웃으며 말했다. “메이비 투 미트 유.”
   그때 표현은 하지 못했는데, 호철의 말은 꽤 감동적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호철이라면 정말로 미래를 내다보고 미국행을 결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기 위해. 그게 꼭 내가 아니라도.

   10. 미국에 도착한 한국 청년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가 처음 머물렀던 곳은 뉴욕 퀸스의 플러싱. 지금은 중국인들이 더 많지만 예전에는 뉴욕 사는 한국인들 대부분이 플러싱에 살았다. 그는 왜 하와이나 LA로 가지 않았을까?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는 뉴욕에서 미국 생활을 시작했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도 이 뉴욕-뉴저지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많은 이민자들이 그렇듯 그도 식당 버스 보이부터 이런저런 허드렛일을 하다가 홀서버가 되고, 웨이터가 되고, 마침내 매니저가 되는 과정을 겪었다. 한인 가게에서만 일을 했기 때문에 영어는 거의 늘지 않았고 대신 현금은 빠르게 늘었다. 당시 호철은 살던 월셋집이 몇 개월, 몇 년 사이로 점점 더 넓어지는 재미에 일을 했다고 말했다. 돈이 모이자 나중에는 ‘따블백’(그는 더플백을 꼭 이런 식으로 발음했다)에 지폐를 가득 넣어가지고 자동차 딜러샵에 가서 그 자리에서 메르세데스를 몰고 나오기도 했다고 자랑삼아 늘어놓은 적도 있다. 그러다 함께 식당을 차리자는 동업자를 만나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그는 사기꾼이었다. 호철은 그 ‘악마’(이 단어를 말할 때 호철의 눈동자는 항상 불타올랐다) 때문에 그때까지 모은 돈을 전부 날렸다.

   11. 호철이 태권도 사범 일을 하게 된 것은 그즈음부터였다. 한국에서 태권도라고는 군대 시절 배운 게 전부였지만, 동네 태권도장에서 급하게 사범 보조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수련을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태권도로 돈을 벌어 먹고살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는데 궁지에 몰리니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무도가 깊어지면서 육체뿐 아니라 병들었던 마음도 조금씩 회복되어갔다. 무엇보다 식당으로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얼마 후 때마침 미국에서 태권도를 비롯한 동양 무술 붐이 일었고, 호철이 ‘Sabum’으로 일하던 도장도 크게 확장을 하게 되었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한 덕분에 관장의 신뢰를 얻고 있었던 호철은 새 도장 하나를 통째로 맡게 되고, 몇 년 후 하루에 말보로를 두 갑씩 피우던 관장이 폐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미국 담배가 그렇게 독해. 적당히 피웠어야 했는데……”) 다른 몇 개의 도장들까지 물려받아 경영하기 시작했다. 60세에 모든 도장을 정리해서 격투기 프랜차이즈 사업체에 넘기기 전까지 그는 오랜 시간을 태권도 사범이자 관장, 그랜드 마스터로 살았다.

   12. 하지만 내가 아는 호철은 슈퍼마켓 가이였다. 북부 뉴저지의 레오니아라는 한적한 동네에 가면 〈grand master’s grocery〉라는 청과물 가게가 있는데 거기 가면 언제나 낚시 조끼 비슷한 걸 입고 카운터에서 캐셔를 보고 있는 호철을 만날 수 있었다. 가게는 늘 한국 사람들로 붐볐고 호철은 물건을 사서 나가는 손님들의 뒤통수에 대고 특유의 호탕한 목소리로 외치곤 했다. 해버 원더풀 데이!

   13. 컬럼비아 대학에서 조이를 만나 연애를 시작하면서 나는 종종 레오니아에 있는 조이네 집에 초대를 받아 놀러가곤 했다. 호철과 호철의 아내는 그때마다 나를 환대하며 한국식 정찬을 대접했다. 갈비찜과 잡채라는 내 인생 최고의 음식을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호철의 아내는 말이 거의 없었지만 호철은 쉬지 않고 떠들었다. 처음 그의 집에 갔을 때, 호철은 초록색 병에 들어 있는 한국식 위스키를 권하면서 취하면 자고 가라고 했다. 나는 위스키를 잘 마시는 편이었으므로(아이리시를 절대로 무시하지 말라!) 호기롭게 그가 주는 잔을 받아마시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잃고 말았다.

   14. 눈을 뜨자 낯선 침대에 내가 누워 있었다. 창밖으로 어슴푸레 푸른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나는 머리를 흔들며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내가 자고 있던 방은 2층 손님방인 것 같았다.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향긋한 냄새가 나서 홀린 듯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계단 벽마다 ‘그랜드 마스터 호철 리’의 이름이 새겨진 트로피와 상장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소리와 냄새의 진원지는 키친이었고, 키친에서는 미세스 리가 계란 요리를 하고 있었다. 내가 헛기침을 하자 그녀가 나를 돌아보더니, 처음으로 말을 했다.
   “굿모닝.”

   15. 여기까지 썼는데 불이 켜졌다. 조이는 이불을 목 바로 아래까지 끌어올린 채 눈을 감고 있다. 앞쪽에서 승무원들이 기내식을 준비하는 듯 소란스럽다. 나는 이제야 잠이 쏟아진다. 젠장……

   16. 조이가 내 오른쪽 귀를 세게 잡아당기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잠깐 눈을 감았던 것 같은데 몇 시간을 잤는지 모르겠다. 눈앞의 스크린에서 내가 탄 비행기는 어느새 한반도를 통과하고 있다. Incheon. 영어의 인치 같기도 하고 독일어의 1인칭 대명사 같기도 한 이름이다. 인쉐언. 인치온. 맞는 발음을 찾기 위해 이렇게 저렇게 말해본다. 알파벳 표기를 해놓은 한국어는 읽기가 쉽지 않다. 내가 조이의 한국 이름을 아직까지도 정확히 발음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딩 패스를 다시 확인한다. 내가 정확하게 발음할 수 있는 표기는 하나뿐이다. ICN.

   17. Junghee Lee. 조이의 한국 이름이다. 중히? 융이? 쩡후이? 조이는 내가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발음해도 무조건 틀렸다고 했다. 그냥 하지 마. 저스트 콜 미 조이. 조이는 모음을 길게 늘여 발음했다. 플리이이이즈. 뭐야, 나더러 애인의 이름조차 발음 못하는 바보가 되라고? 처음에는 오기가 생겨서 계속했지만 결국 그만두고 말았다. 조이가 그걸 진심으로 원하지 않는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느낌이 확신으로 바뀐 건 결혼 전 찾아간 호철네에서였다. 평소처럼 기분 좋게 갈비찜에 코리안 위스키를 먹고 마시고 있는데 조이가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며 2층 자기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날 저녁까지 조이의 컨디션은 매우 멀쩡했기 때문에 의아했지만, 호철과 미세스 리는 신경쓰지 말고 계속 먹으라고 했다. 눈앞에 놓인 고기와 술을 거의 다 먹어 치웠을 때쯤, 미세스 리마저 피곤하다며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호철과 단둘이 식사를 한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날은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잇츠 타임 투 텔 유.”
   꽤 많은 술을 마셨지만 한 번도 취한 모습을 본 적 없는 호철이 말했다. 여전히 형형한 눈빛이었다. 비밀이라니, 알코올 덕분에 잔뜩 이완됐던 몸이 긴장했다. “조이는 우리가 입양한 딸이야. 이십오 년 전에.”
   오랫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호철 부부는 한국에서 아이를 입양했다. 사진 속 아이의 눈빛을 본 순간 호철이 확신했고, 한국에 가서 아이를 안은 순간 아내가 확신했다. 아이의 이름은 이정희. 심지어 성도 같았다. 부부는 둘이 가서 셋으로 돌아왔다. 아이의 개명에 관해 작은 의견 다툼이 있었지만, 언젠가 아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해주자는 아내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부부는 아이에게 기쁨이라는 새 영어 이름을 붙여주는 것으로 자신들의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괜찮겠나?”
   호철이 물었고 나는 솔직히 조금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조이가 호철 부부의 생물학적 딸이 아니라는 사실이 우리의 결혼에 어떤 문제가 된단 말인가? 나는 대답 대신 내가 정말 궁금한 것에 관해 물었다.
   “정말 대단한 우연의 일치군요. 성이 같았다니.”
   그러자 호철은 약간 당황한 듯 머뭇거리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한국 사람의 절반은 이 씨라고.”

   18.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벌써 오 년이 흘렀다. 그사이 큰일이 두 번 있었다. 하나는 삼 년 전에 조이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신 것. 췌장암 진단을 받고 일 년을 넘기지 못했다. 호철과 조이는 당연히 크게 상심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음식만 받아먹을 게 아니라 미세스 리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야 했다. 더 자주 먼저 말을 건네지 않은 것이 너무 후회스럽다.
   다른 하나는 작년에 호철이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당연히 조이는 아버지를 말렸다. “아빤 이제 미국 사람이야. 한국은 아빠가 알던 한국이 아니고. 아무리 고국이라지만 몇십 년 만에 돌아가서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아? 제발 말 좀 들어. 코로나 끝나면 여행이나 다녀오라고.”
   그날 저녁에는 미세스 리를 대신해 내가 갈비찜을 했는데 맛이 영 별로였다. 레시피는 그대로였지만 뭐가 빠진 건지 가운데가 텅 빈 것 같은 맛이었다. 식사 내내 우리는 호철과 말씨름을 했고 호철은 늘 두 그릇 이상씩 먹던 밥을 반 공기도 먹지 못하고 남겼다.
   “다 끝났어. 한국에 돌아가야 해.”
   설거지하려고 그릇을 싱크에 넣고 있는데 등 뒤에서 호철이 말했다. 조이는 화장실에 갔는지 자리에 없었다.
   “노 웨이.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그동안 미국에서 장인어른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해냈어요? 그랜드 마스터, 태권도 도장, 슈퍼마켓, 가족, 사업, 네트워크, 기부, 봉사, 그리고 조이까지…… 장모님 돌아가신 건 마음 아프지만 그래도 장인어른에겐 장인어른만의 인생이 있잖아요. 이렇게 포기할 거예요?”
   다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말하다 보니까 감정이 올라와서 약간 화난 것처럼 톤이 높아졌다. 호철은 정물처럼 놓여 있던 코리안 위스키를 한 잔 따르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낫띵. 브래드, 유 노?”
   호철은 잔을 비웠다. “디스 이즈 오올 낫띵.”

   19.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기 시작한다. 공기의 압력과 흐름이 달라지고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하강의 과정. 나는 늘 이 순간이 미묘하게 불쾌하다. 죽을 것 같은 두려움과 새로 태어나는 설렘이 좁디좁은 내 안에서 앞다투어 날갯짓하는 느낌이다. 마침내 기체가 땅에 닿고 우리는 한반도 남쪽의 작은 섬에 도착한다. 소프트 랜딩을 하는 것으로 보아 기장은 한국 사람임이 분명하다. 살았다는 안도 속에서 한 자리 건너 옆자리를 돌아보니 핸드폰을 들고 있는 조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 저 마음을 알 것 같다. 더블린에서 엄마가 죽었다는 이메일을 열던 순간의 내가 떠오른다. 문자와 댓글, 이메일과 DM으로 누군가의 부고를 전할 수 있게 된 세계란 얼마나 잔인한가. 마침내 조이의 핸드폰 화면에 불이 들어온다. 조이는 말없이 자신의 핸드폰을 나에게 건네고, 나도 문자를 확인한다. 보낸 사람은 호철의 여동생, 그러니까 조이의 고모다.
   ─아빠 상태 호전됐어. 돈 워리.

   20. 공항에서 서류 확인과 PCR 검사를 마치고 격리 시설로 이동한다.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빨간색 종이가 들어 있는 명찰을 나눠주고 우리와 처지가 같은 외국인들을 버스에 태워 어딘가로 데려간다. 한 시간쯤 달렸을까? 도착한 곳은 낯선 호텔이다. 다시 인적 사항을 확인하고, 체온을 재고, 소독하고, 격리 관련 모니터링 앱을 깔고, 방을 배정받는다. 하얀 방호복과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들만 보면 나는 마치 한국이 아니라 화성에 도착한 외계인 같다. 우리를 현실로 돌아오게 해주는 것은 카드 결제다.
   “숙박 비용은 하루에 100달러씩, 2주간 총 1,400달러입니다.”

   21. 식사는 하루 세 번 준다. 아침 8시, 점심 12시, 저녁 6시. 안내 방송이 나오면 문 앞에 놓인 도시락을 가지고 들어와 먹는다. 객실 내 흡연은 금지. 수건은 10개만 주고 추가할 수 없다. 사실 다른 건 다 필요 없다. 한 가지만 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와이파이.

   22. 급성 패혈증으로 중환자실에 들어갔던 호철은 일반 병실로 옮겨질 만큼 상태가 호전되었다고 했다. 다만 면회를 하려면 우리가 격리 해제되어야 하는데, 호철의 국적도 아직 미국이라서 법적으로 한국 내 가족으로 인정되지 않는 게 문제였다. 돌아가신다 해도 격리 면제를 받아 나가는 게 가능할까 싶었다. 어쩌면 조이는 처음부터 이 모든 걸 알고 있었을까?
   내 옆방에 배정된 조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나에게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해서 화풀이를 했다. 정부 관계자에게 계속해서 연락을 해봐도 별다른 수가 생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청와대에 국민청원이라도 해보시던가요.
   아내는 특히 이 말에 뚜껑이 열렸는지, 똑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곱씹으며 분통을 터뜨렸다. 청와대가 뭐야? 통화 중에 내가 묻자 아내는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니네 나라에도 있잖아. 화이트 하우스. 우린 블루 하우스라고. 몰라?
   조이의 나라도 미국이기 때문에 이 말은 시작부터 틀렸지만, 어쨌든 나는 그 이름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블루’ 하우스라니. 누구든 하루라도 들어가 있으면 우울해질 것만 같은 집이었다.
   그날 저녁, 넷플릭스를 보다 지쳐 텔레비전을 틀어보니 현지 뉴스는 온통 코비드19 소식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한국 대통령이 등장하더니 그가 사는 집 사진이 화면에 잡혔다. ‘블루 하우스’의 지붕 색깔을 보자마자 나는 중얼거렸다. 뭐야, 저건 블루가 아니라 틸(teal)이잖아.

   23. 우리는 호텔에서 2주간의 격리(라기보다는 휴식)를 마쳤고, 나는 <오징어 게임>을 비롯해 넷플릭스 드라마 열 시즌을 클리어했으며, 호철은 퇴원했다. 휴가는 15일이고 복귀 날에는 클라이언트 회사와 중요한 미팅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바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다. 조이는 어쩔 수 없이 한국에 혼자 남아 호철을 돌보기로 했다. 계속 옆방에 묵고는 있었지만 퇴소 날 2주 만에 얼굴을 본 조이가 반가웠다. 나를 보자마자 그녀는 말했다.
   “내가 인천 공항까지 바래다줄게.”

   24. 뉴욕을 떠날 때처럼 우리는 공항 식당가에 들어가 함께 밥을 먹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조이는 남고 나는 떠날 거라는 것, 그리고 지금 눈앞에 맛없는 피자 대신 갈비찜과 흰 쌀밥, 그리고 코리안 위스키가 놓여 있다는 것이었다. 조이는 밥맛이 없다면서 내가 열심히 갈비를 뜯는 동안 내 아이패드를 가져가더니 그동안 써놓았던 이 로그를 찬찬히 읽었다. 원래 내가 붙여두었던 제목은 ‘홈메이드 바이오그래피’ 였는데 아내는 아이패드를 돌려주면서 말했다.
   “비행기 타고 왔다갔다만 했는데 무슨 홈이야? 에어라고 해야지.”
   나는 거기 동의했고, 문서 맨 위로 올라가 제목을 수정했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코리안 위스키 한 잔을 입에 털어넣었다.

문지혁

우리는 모두 이민자고, 현재의 삶은 망명의 형태로만 가능하다.

2022/03/29
5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