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골드버그 장치의 개선
모두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흐리멍덩한 얼굴로 졸고 있는 오후였다. 영재는 홀로 진지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새로 들어온 주문을 살피고 재고를 파악한 뒤 공장에서 생산에 들어가야 할 완구류의 품목과 수량을 작성하는 일이었다. 요 근래 실수 없이 꼼꼼히 일하고 있었지만 그를 잘 아는 팀장은 그래서 외려 더 큰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쉬엄쉬엄하자고.”
팀장이 영재에게 다가가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월요일이니 잠깐 커피를 마시며 주말 보낸 이야기나 하자는 팀장의 제스처이기도 했다.
“어? 이게 왜 이러지?”
앉아서 사무를 보던 경리가 당혹스런 얼굴로 일어나서 의자를 살피기 시작했다.
“의자가 안 내려가네요.”
높낮이 조절 레버가 고장이라도 난 것인지 솟아오른 의자가 도로 내려가질 않았다. 그걸 본 영재는 어느새 옆으로 바짝 다가가 살피고 있었다.
“오래돼서 그런가 봐. 나중에 남는 의자로 바꿔 앉아.”
팀장의 말이었다. 하지만 영재는 한 가지 일을 오래 하다보면 얻을 수 있을 법한 장인의 진중한 표정으로, 하지만 난생처음 보는 물건을 발견한 듯한 영장류의 어설픈 손길로 레버와 의자 몸체를 움직여보고 있었다.
“놔둬. 그러다 더 고장……”
팀장이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영재는 의자를 뽑아버리고 말았다. 몸체에서 분리된 의자 다리는 제자리에서 팽그르르 돌다가 곧 멈췄다. 이 광경을 본 팀장은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빗나가지 않고 적중했다는 것에 내심 안도하는 눈치였다. 고작 이 정도 실수라면 오히려 다행이었다.
“다치진 않았지?”
당황한 영재를 살피며 팀장은 별일 아니라는 듯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영재가 다시 의자 몸체를 다리에 끼우자 의자는 기우뚱하게 쓰러질 듯하더니 아슬아슬하게 곧 균형을 잡았다. 영재는 엉거주춤하게 서서 의자가 왜 고장 났을까에 대해 얼마 동안 골몰한 후 자리를 떴다.
“정말이에요? 갑자기 회사가 어려워져요?”
“알잖아. 윗선에서 잘못하면 휘청휘청하다 결국 직원들만 거덜 나는 거.”
곧 구조조정이 있을 거란 소문이 파다했고 대개 안 좋은 소문은 곧잘 들어맞는 편이었다. 팀장은 자기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보란 듯이 한숨을 쉬곤 했다. 다른 사원들처럼 을의 입장이란 걸 강조하려는 속셈이었는데 실은 이런 위기 때마다 미묘한 입장 차이가 있다는 걸 모르는 직원은 없었다.
탕비실에서 잠깐 휴식하고 돌아온 사무실에는 문서철 넘기는 소리,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멈추질 않았다. 잠잠했던 전화기를 붙잡고 통화하는 목소리는 앞다투어 커졌고 너나 할 것 없이 동작들은 기민해졌다. 화장실을 다녀온 영재는 변함없이 진지한 얼굴로 화면에 적힌 숫자들을 체크했다.
“이봐, 오후에 영재가 출장 가기로 한 거 아니었어?”
팀장의 말에 영재는 비로소 생각난 듯이 벌떡 일어섰다. 죽은 줄 알았던 전구가 팟 하고 켜진 것처럼 그 모습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짓는 사람도 있었다. 영재는 목을 내밀고서 다급히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러더니 곧 다시 자리로 돌아와 가방을 챙겨 나갔다. 그의 부산함에 팀장은 작게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영재는 회사 앞에서 십오 분 간격으로 오는 시내버스에 올랐다. 초가을 바작바작 내리쬐는 햇볕을 받으며 앉아있자니 금세 졸음이 밀려왔다. 영재는 연신 고개를 꾸벅였다. 결국 내려야 할 곳을 두 정거장 지나쳐버린 그는 얼마간 다시 걷고 나서야 전자상가에 도착했다. 회사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겠다며 완구용 3D 프린터를 만들 업체를 찾고 있었다. 가능성 있는 몇 군데 업체를 방문해서 확인하는 것이 이번 일이었다. 건물 실내의 공기는 서늘했다.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 좁은 복도를 따라 영재는 걸었다. 복도 끝자락에서 리스트의 첫 번째 업체를 체크하는 도중 한 입간판의 글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골드버그 장치의 개선’
입간판 옆으로는 허름한 철제문이 살짝 열려있었고 그 틈으로 작은 쇠구슬 하나가 굴러나왔다. 슬쩍 안을 들여다보니 삼십여 명 정도가 모여 세미나라도 진행 중인 모양이었다. 삼삼오오 모여 분주하기도 하고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지는 통에 대체로 소란스러웠다. 영재는 자기도 모르게 이끌리듯 안으로 들어가 구경을 시작했다.
곳곳에 나무판자나 우드락이 세워져 있었고 온갖 잡동사니는 난잡하게 얽혀있었다. 사람들은 팔짱을 낀 채 열띤 모습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쇠구슬이나 도르래가 움직일 때면 눈을 빛내며 그걸 지켜보았다. 예상치 못하게 작동을 멈추면 탄식을 내뱉기도 하고 어떨 땐 박수를 치기도 했다. 단순히 봐서는 무엇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판이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곳에서 한참을 구경하던 영재는 팀장의 전화가 걸려왔을 때에야 비로소 허둥지둥 발길을 돌릴 수 있었다.
며칠 뒤 영재는 회사에서 자신의 의자가 사라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엉거주춤 서 있는 그를 못 보았을 리가 없는데 다들 그를 못 본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앉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그는 지금 경리가 앉은 의자가 원래 자기 의자라는 걸 알아차렸다.
“팀장님이 급한 대로 이 의자 가져다 앉으라고……”
영재가 팀장을 바라보자 팀장은 성큼 걸어오더니 그에게 속삭였다.
“사장님이 부르실 거야.”
그 말대로 곧 사장과의 면담이 있었고, 돌아온 영재에게 팀장은 쉴 틈도 주지 않고 말했다.
“자네 같은 인재가 또 없는데. 회사가 어렵긴 어려운가 봐. 필요하면 얘기해. 내가 다른 데 좀 알아봐 줄게.”
괜히 머쓱했는지 팀장은 필요 이상으로 많은 말을 했다. 영재는 자리로 돌아와 구석에 놓여있던 기우뚱한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리고 평소처럼 컴퓨터를 켠 후 키보드를 두드렸다. 전과 같은 모습에 시선을 끌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흘금흘금 그를 곁눈질하거나 씁쓸한 표정을 짓고서 쳐다보았다. 사무실엔 더이상 소리 내어 문서철을 넘기거나 기민하게 전화기를 들어 올리는 사람이 없었다.
영재는 두 달 치의 급여와 퇴직금을 받고 방 안에 틀어박혔다. 꼬박 사흘간을 그렇게 있으며 깨달은 것은 이 집에서는 마땅히 할 게 없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발장, 냉장고, 옷장 등이 다 빌트인 된 오피스텔은 딱 출근과 퇴근 사이 거쳐 갈 용도로만 쓰일 만큼 조그마했다. 그동안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에 영재는 스스로 놀랐다. 그 집의 정체와 목적을 깨달은 그는 이제 그곳에 질렸고 그 안에 있는 일이 갑갑하게만 여겨졌다. 마침내 영재는 집으로부터 탈출하기로 했다.
그는 부동산에 방을 내놓고 이전과 다른 장소를 물색했다. 마침내 찾아낸 곳은 회사 공장이 있는 시골 동네의 작은 창고였다. 원래 농기계를 보관하는 데였다고 하는데 텅 빈 공간 한편엔 목재 팔레트와 건초 다발 따위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영재에겐 높은 천장에다 간혹 구멍 난 벽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에 비쳐 풀풀 날리는 먼지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없었다. 전세금을 돌려받은 걸로 그 창고에다 같이 딸린 집까지도 살 수 있었다. 보통 사람들에겐 집에 창고가 딸려있구나 여겼겠지만 그에겐 반대였다. 맘에 드는 건 오로지 창고였다. 부동산 중개인이 요 앞의 땅은 안 사냐고 물어왔을 때 영재는 땅을 왜 사냐고 반문하여 그를 당혹게 했다. “농사지으려면 땅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하는 부동산 중개인의 말에 영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그를 더욱 무안하게 만들었다.
고작 몇 박스 되지 않는 이삿짐을 모두 집으로 들여놓은 후 그는 창고 한가운데 야전용 침대를 펼쳤다. 드넓은 공간에 실수인 듯 놓인 야전용 침대 위에 드러눕자 높은 천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치 나무 구멍에 둥지를 틀고 들어앉은 새가 된 기분이었다.
그날 밤 그는 담요를 꺼내들고 창고 안 야전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그렇게 어설프기 짝이 없는 보금자리에서 턱 끝까지 담요를 끌어당긴 채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영재는 한동안 집 주위를 서성거리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시간을 만끽했다. 집 주변은 개망초와 코스모스가 무성했고 버려진 철조망이나 흙더미에 파묻힌 세발자전거 따위가 나머지 풍경을 장식했다. 고개를 들어 멀리 살피면 회사의 공장이 보였고 그사이를 넓은 논밭과 함께 파란 지붕의 낮은 집들이 드문드문 메우고 있어 역시 아무래도 농업에 종사하는 게 이 풍경에 합당한 일을 하는 것으로 여겨질 법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당분간 뭘 할 생각도, 무얼 해야 하나 생각할 생각조차 그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떤 지속되는 궁리 따위 하지 않기로 마음먹고서 그는 하루의 시간을 다 보냈다.
한밤중 야전 침대에서 자던 영재가 눈을 뜬 것은 어디선가 반복해서 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휴대폰 불빛을 비춰가며 겨우 소리의 근원지를 찾자 무언가 창고 귀퉁이를 빠르게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곧 구석에 뚫린 구멍으로 쏙 사라져버린 걸 보면 들쥐였나 싶기도 했다. 그러나 소리는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그가 건초 더미를 뒤져보자 눈앞에 드러난 것은 족제비 새끼들이었다. 모두 네 마리였는데 눈도 다 못 뜬 채 입을 벌리고 꼬물꼬물 움직이고 있었다. 갈색 털이 보송하게 나 있지만 그 아래로 분홍의 피부가 더 선명했다. 영재는 족제비 어미가 사라져버린 구멍을 건너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참 동안 새끼들을 내려다보았다. 조심스럽게 건초 더미를 정리해두고 침대로 돌아온 그는 두근거리는 마음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영재는 일어나자마자 건초 더미로 갔다. 새끼들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그는 집으로 건너가서 냉동 만두와 소시지를 데워 접시에 담아 왔다. 그런 후 창고 구석의 구멍 앞에 내려놓았다. 어미가 먹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런 다음엔 이제 자신이 먹을 것들을 사러 슈퍼에도 다녀왔고 인터넷으로 필요한 것들도 하나둘 주문했다. 오후는 주변의 풀을 베고 잡동사니들을 치우면서 시간을 보냈다. 되도록 창고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려 애쓰다가 땅거미가 질 무렵 창고로 돌아갔다. 아침에 둔 접시는 그대로였다. 건초 더미 속에 새끼들은 이따금 힘없이 움직일 뿐이었다. 그는 불안했다. 이대로 두다간 죽을지도 몰랐다. 영재는 우유를 데워와 손끝에 묻혀 한 방울씩 족제비 새끼들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우유를 먹은 뒤 배가 부른 새끼들은 둥글게 몸을 말고서 잠이 들었다.
당분간 영재는 족제비를 키우는 일에 몰두했다. 마을에서 건초를 좀 구해와 푹신한 잠자리를 마련했고 매일 분유를 타서 주사기로 먹이는 건 일상이 되었다. 어느덧 눈도 뜨고 털도 제법 자란 새끼들을 그가 쓰다듬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여동생이었다.
“오빠 어디야?”
그는 그동안의 일을 동생에게 설명했다.
“하, 그렇다고 시골로 내려가?”
어쩐지 큰 잘못을 저지른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더 설명해야 할 것은 없었다. 족제비 새끼들이 그의 손가락에 관심을 보이며 물려고 하자 간지러움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음이 나와 지금? 다 커서도 장난감 좋아하다가 겨우 회사 들어간다고 해서 철드나 싶었는데, 그걸 그만뒀다고?”
더 할 말을 찾지 못해 그는 어물거렸다. 동생에게 한참 잔소리를 듣던 그는 할 일이 있다고 한 후 전화를 끊어버렸다.
만약 동생이 찾아와서 족제비들과 놀고 있는 자신을 보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게 분명했다. 때론 부모의 역할까지 도맡아 하던 동생이었다. 영재는 고심하며 몸을 움직였다. 뭐라도 해야 한단 생각이었다. 밖을 두리번거리다 버려져 있던 세발자전거를 들고 왔다. 바퀴를 떼어내고 타이어를 벗겨냈다. 프레임을 펜치와 가위로 잘라냈다. 그는 햄스터가 쳇바퀴를 돌리는 모습을 떠올렸다. 언젠가 족제비들이 자라면 이것을 열심히 돌려줄 거라 믿으며 그는 쳇바퀴를 만들기 시작했다. 몸을 움직이고 손을 놀려 열심히 뭔가를 만드는 동안 그의 마음엔 금세 안도감이 스며들었다. 좀처럼 맛볼 수 없던 작은 평화였다. 그게 시작이었다.
가장 먼저 그를 찾아온 것은 팀장이었다. 영재가 공장이 있는 동네로 갔다는 소식을 어렵게 전해 듣고 일부러 찾아온 것이었다. 영재가 퇴사하기 전 잘못 넣은 주문 때문에 꾸엑 소리를 내는 장난감 닭과 스펀지 막대 손이 회사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의 정리해고에 대한 책임을 느끼는 사람으로서 뒤늦은 책망이란 아무런 소용없는 것임을 그는 알았다. 대신에 근황도 듣고 일자리라도 알아봐 줄 요량으로 내려온 것이었다.
“이야, 이게 다 뭐야?”
팀장은 창고에 들어서자마자 감탄했다. 창고 곳곳에 영재가 만들어놓은 물건들이 널려있었다. 최초로 만든 족제비용 쳇바퀴부터 반자동 개폐식 창문 블라인드와 족제비 타워, 그리고 놀이공원의 관람차처럼 천 조각들이 집게에 걸려 돌아가는 등의 용도를 알 수 없는 것도 여럿 있었다.
“이거 그거 맞지? 골드버그 장난감?”
골드버그 장치는 단순한 일을 아주 복잡한 연쇄 반응 후에 해내는 기계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영재가 만든 물건들 중 일부는 맞고 몇 가지는 맞지 않았다. 이를테면 빗물이 새는 자리에 놓아둔 양동이에 물이 가득 차면 나무망치가 종을 때리도록 고안한 것이 골드버그 장치에 가까웠다.
“역시 보통은 아니라니까. 자네 재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그는 내심 이때까지의 영재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수정해야 한다고 느꼈다. 하고많은 비슷한 실수를 반복해 골칫거리였던 인간이 이제야 무언가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족제비 타워를 구경하는 동안 족제비들이 몰려와 주위를 감싸고 재빠르게 돌아다녔다.
“담비도 길러? 자네 취향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팀장은 구석구석의 잡동사니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곧 예감했다. 이곳에서 뭔가가 나온다. 설명할 수 없지만 늘 그런 직감을 믿으며 살아온 그였다. 그냥 지나쳐버려선 안 되는 무언가가 분명 이곳에 있다. 한참을 구경하다 가야겠다며 돌아서는 팀장은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듯했다. 친구 집에 장난감을 두고 가는 어린아이의 눈빛처럼 슬픈 기운마저 비치는 듯했다.
“늦으면 마누라한테 혼나. 다음에 또 올게.”
팀장 다음으로 온 것은 사무실 경리였다.
“일을 그렇게 해놓고 가면 어쩌란 거예요?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경리는 단단히 벼르고 온 듯이 그를 타박했다. 식은땀을 닦으며 그녀의 말을 듣던 영재는 그제야 자신이 시제품 열 가지를 모조리 열 박스씩 주문 넣었다는 걸 깨달았다.
“회사는 직원도 줄여놓고서 일은 또 어찌나 시키는지. 월급은 쥐꼬리만큼 주면서 말이죠. 그래서 이번에 아예 관뒀어요.”
영재는 그녀의 옷차림이 늘 보던 것과 다르단 것도 이제야 눈치챘다.
“몰랐어요? 이 동네가 제 고향이에요.”
회사에선 그런 대화를 나눈 적 없으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뭔가 대단한 걸 만들고 있다던데, 팀장님 말대로 회사 그만둬도 일은 그만두지 못하시네요.”
영재는 그녀가 그렇게 쏟아내는 말들에 조금 놀랐다. 우선은 이렇게 와서 말을 쏟아내는 경리가 평소보다 당당해 보였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자신이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단 사실 때문이었다.
“근데 뭐, 단순히 잡동사니를 모아놓은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네요.”
금세 그녀의 엇갈린 평가에 그는 조금 의기소침해졌다. 그녀도 팀장처럼 여기저기를 만져보고 둘러보았다. 족제비 집 주변에 설치된 경보 장치에 이르러서는 호기심을 보이고 이내 시험 작동을 해보더니 말했다.
“진자 운동의 형태론 이 블록을 완전히 밀어내지 못해요. 위치를 더 높이거나 톱니를 사용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어리둥절해 하는 영재에게 그녀는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구체적으로 보완해야 할 부분을 일러주었다. 미처 생각조차 못 했던 방식이었다. 그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저 원래 공대생이었잖아요.”
영재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더 많겠단 생각을 했다.
“가끔 놀러 올게요. 잘 해봐요.”
그녀가 돌아서며 말했다. 그 순간 그는 뭔지 모르겠지만 정말 잘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팀장이 다시 찾아왔을 때 그는 박스 여러 개를 차에 싣고 가져왔다.
“회사 창고에 있던 것들이야.”
박스엔 영재가 무더기로 주문해버린 장난감 닭과 스펀지 막대 손, 그리고 갖은 학용품들, 나무 블록, 알루미늄 레일, 플라스틱 도르래 따위가 들어있었다. 영재가 다른 작은 박스를 가리키자 팀장은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혹시나 해서, 내가 보관하던 장난감도 좀 가져와 봤지.”
변신 로봇과 손가락 크기의 모형 자동차들이었다. 그는 박스에서 물건들을 차례로 꺼내놓으며 영재가 만든 장치들 앞에서 조금 벅차오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골드버그 장치라면 더 복잡해야지. 게다가 지금은 좀 우연적인 구석이 있어. 확실하게 하자고.”
그는 현재 영재가 해놓은 것만으론 하나의 독보적인 작품이 되기엔 결함이 많다고 생각했다. 크기도 키우고 작동 단계를 더 늘일 필요가 있었다. 그 과정을 자신이 돕겠단 얘기였다. 그는 분명한 작동 원리와 선명한 구조를 원했다. 실패하지 않을 명확함 속에 결과가 필연적으로 도출되도록 하고자 했다. 이를테면 지금처럼 족제비 타워에서 점프한 어느 족제비가 운 좋게 특정 발판을 밟았을 때 관람차가 움직이게 하는 식은 곤란하단 얘기였다.
“차라리 자네가 앉아서 이걸 움직이면 관람차까지 움직이게 하는 건 어때?”
그는 휑뎅그렁하게 놓인 목마를 두고 말했다. 목마는 영재가 가끔 올라타서 생각을 하는 장소일 뿐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팀장이 물건을 가져다주며 개조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창고 안의 물건들은 조금은 더 근사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는 때로는 영재보다 더 땀을 뻘뻘 흘리며 좀처럼 손에서 드라이버와 접착제를 놓지 않았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마누라한테 혼난다며 서둘러 돌아가곤 했다. 다시 다음날 퇴근 후엔 그가 어김없이 나타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자, 오늘도 잘해보자고.”
경리는 그보다 더 불규칙하게 영재의 창고를 찾았다. 그녀가 하는 일은 주로 작업이 진행되는 장치들에 대한 품평과 조언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 방법 실패하기 딱 좋네요.”라거나 “여긴 더 작은 구슬을 써도 될 거예요.”, 또는 아주 가끔 “어머 귀엽네.” 하는 식이었다. 전에 비해 별다른 작업의 진척이 없으면 그녀는 창고 밖에서 멍하니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시간을 보내다 돌아가곤 했다.
그렇게 팀장과 경리가 번갈아 찾아오기 시작하자 영재는 외로워할 틈조차 없게 되었다. 창고가 온갖 물건들로 가득 차고 장치가 부피를 키워가는 동안에도 틈틈이 족제비들의 물과 먹이도 챙겨야 했다. 이렇게 그가 회사를 다니던 때보다 더 바쁜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어머 담비 투는 이빨이 났나 봐요. 자꾸 깨물려고 하네.”
경리는 족제비들을 쓰다듬고 있었다. 팀장이 일러준 뒤부터 그녀도 담비 원, 투, 쓰리, 포로 이름 붙여 부르고 있었다. 영재는 담비와 족제비가 전혀 다른 생김새를 가졌다는 걸 알았지만 때를 놓쳐버린 뒤 굳이 말하진 않았다.
“담비 포는 진작 났어. 근데 늘 싸돌아다녀서 잘 안 보여.”
그렇게 말하며 팀장은 앞치마를 벗어 던져두었다. 일찍부터 작업을 시작했지만 그날은 비도 오고 일이 더디게 진행되던 참이었다. 팀장도 경리가 쭈그려 앉아 있는 입구로 나가 그녀와 마찬가지로 지긋하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영재는 건초 다발을 풀어 족제비들이 잠드는 곳에 두툼히 깔았다. 그런 뒤 우유를 따른 컵을 데운 후 두 사람에게 가져갔다.
“마침 좀 쌀쌀했는데 고마워요.”
경리가 두 손으로 컵을 받아들었다.
“원래 담비 주려던 건 아니지?”
팀장의 의심에 영재는 뜨끔했지만 어물쩍 넘어갔다. 다들 우유를 마시며 바깥을 내다보던 중 경리가 먼저 입을 뗐다.
“영재씨는 참 대단한 것 같아요. 처음엔 되게 무능하게 봤었거든요.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좀처럼 말수도 없고. 아, 물론 지금도 조용하지만요.”
“지금 칭찬하려는 거야, 욕하는 거야?”
팀장이 웃으며 경리의 말을 받았다. 영재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일을 벌이고 있잖아요. 솔직히 좀 놀랐어요. 이렇게 진짜 좋아하는 일에 매달리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그녀의 말에 팀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영재는 한창 회사가 성장할 때 들어온 여러 직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렇게 쓸모없는 사람도 들어올 수가 있나 새삼 놀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 보자면 이 사람의 잠재력이 제대로 평가받을 수 없었던 게 아닐까, 하고 팀장은 생각했다.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요. 저한테 자극도 되고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나서서 돕고 있는 거 아니겠어.”
영재는 어디서부터 말을 풀어내야 할지 몰랐다. 약간의 오해가 있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걸 해소할 길을 찾는 것도 아물아물하게만 느껴졌다.
그날은 그렇게 얼마간 잡담을 나누다 모두 돌아가고 일찍 작업이 끝났다. 혼자가 된 영재는 창고에 조그만 불만 켜둔 채 목마 위에 앉았다. 목마는 느리게 삐거덕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불연속적으로 건너뛰는 소음 속에서 이제는 희미한 과거의 추억을 더듬었다. 어릴 적 그의 손에 쥐어지던 장난감, 어김없이 들려오던 다툼의 말들, 귀를 닫은 그가 끝없이 반복해야 했던 놀이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담비 포가 불빛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영재가 일어나자 마치 마중 나오듯이 껑충 뛰어서 내달려왔다. 영재는 흩어져있던 건초를 다시 모아 담비들의 보금자리를 덮어주었다. 세 마리는 이미 잠들어서 서로에게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영재가 돌아가자 담비 포도 금세 다시 안으로 들어가 머리를 웅크렸다.
매일 아침 영재는 창고에 불을 환히 켜고 담비 원 투 쓰리 포를 위한 물부터 갈았다. 사료를 확인하고 밥그릇을 채워 넣으면서 녀석들의 보금자리를 확인했다. 벽에 혹시 못 보던 구멍이라도 뚫려있지 않나 둘러보는 식의 일들이 그의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좀 더 지나면 겨울을 대비해 창고 곳곳을 보수할 필요도 있었다. 영재는 장을 볼 겸 밖으로 나섰다.
그가 돌아왔을 때 창고에는 팀장과 경리가 와있었다. 주말인 덕에 일찍부터 온 듯했다. 그런데 둘은 서로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있었다.
“아니라니까, 이건 기본적으로 장난감이야. 장난감 회사에 어필해야지.”
“또 취직해서 사무실 앉아서 일하라고요? 또 그러다 잘리고?”
잘리고, 라는 말에서 경리는 팀장을 흘깃 쏘아보았다. 그에게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하려는 다분히 의도된 행동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럼 이걸로 뭘 해?”
“다른 분야에 써먹을 수도 있잖아요. 이 정도 만들 능력이면 사람들은 얼마든지 관심 가질 거예요.”
“관심 가지면 뭐?”
“뭐, 뭐, 광고에 쓴다든지.”
마지막 말은 그녀도 자신이 없었다. 두 사람은 이 골드버그 장치로 영재에게 어떻게 새로운 활로를 열어줄 수 있을까에 대해 의논하던 참이었다. 결국 이 프로젝트의 목적이 무얼 향해야 하는가의 문제였다. 영재는 흥분해있는 두 사람의 눈치를 봐가며 가져온 사료를 정리하고 건초 다발을 한쪽에 쌓아두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팀장이 의견을 정리하려는 모양이었다. 심각했던 경리의 표정은 그의 말에 차츰 풀어지기 시작했다. 영재도 궁금했지만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한 채 기다렸다.
대화가 끝나자 팀장은 앞치마를 졸라맨 채 어딘가 비장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경리는 밖으로 나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돌아온 뒤 더욱더 꼼꼼하게 조언했다. “멋없어요. 레일로 끼우는 게 나아요.” 그러면 팀장도 조언에 맞춰 세심하게 다시 작업을 했다. 그날은 미처 끼어들 틈이 없어 영재는 옆에서 구슬을 주워 주거나 박스에서 도르래를 가져다주는 일만 해야 했다.
둘의 계획은 영상을 찍자는 것이었다. 모두 하나의 골드버그 장치로 연결하여 완성이 되면 작동하는 모습을 카메라로 담는다. 그런 후 영재의 의견에 따라 장난감 회사에 내보내든 유튜브에 올려 관심을 끌든 하자는 얘기였다.
팀장은 만들어둔 각각의 개별 장치가 오차 없이 작동하는지부터 우선적으로 확인하기로 했다. 그다음 사이사이를 레일이나 도르래, 쉽게는 도미노의 형태로 동력을 이어주면 되는 일이었다. 팀장에겐 쳇바퀴가 쳇바퀴로만 끝나선 안 되었다. 중요한 건 연결이었다. 매번 같은 식으로 반복되며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상적 작동으로부터 그 너머의 무한한 가능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연결에 달려있었다. 최종적으로 어떠한 결말로 기계가 멈추게 될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결국 마지막은 영재에게 맡기는 게 옳을 터였다.
경리는 몇 가지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하나는 일회성의 효과 장치를 넣자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팟 하고 물감을 흩뿌린다든지 중간에 폭죽이나 풍선을 터트리면 훨씬 더 극적인 효과를 낼 것이란 얘기였다. 그 외에도 미적으로 신경 써야 할 부분들은 경리가 도맡기로 했다. 그녀는 관람차에 담비들의 얼굴부터 그려 넣었다. 어느 것보다 정성을 들여 그림을 완성한 뒤 바닥에는 구슬이 지나갈 레일에 맞춰 커다란 물결무늬를 그렸다. 페인트 통에 붓을 넣어 휘젓고 자유롭게 곡선을 그려나가는 동안 그녀는 이토록 그림을 좋아했었는데 결국 공대를 졸업한 자신의 행로에 대해 생각했다. 지나고 보면 어느새 변곡점이 되어있는 삶의 순간들이 있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이 작업들은 또 무엇을 위해 마련된 걸까, 그녀는 골똘해졌다.
영재는 평소와 같이 홀로 담비들을 돌보며 양쪽의 심부름을 거들었다.
“드디어 내일이에요. 긴장되지 않아요?”
일주일의 작업이 끝나고 영재의 방에 들어와 앉은 경리가 물었다. 그녀의 얼굴엔 페인트 자국이 남아있었다. 영재는 평소처럼 데운 우유를 컵에 따라 내밀었다.
“실패할 수도 있어요. 어쩌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수도 있고요.”
그렇게 말한 그녀도 사실 그럴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한 번으로 족했다. 또다시 이 일에 매달려있을 자신의 모습은 잘 상상되지 않았다.
“우리가 이렇게 같이 노력한 거, 그것만으로도 의미는 있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고단한 기색으로 웃으며 말했다.
“잘 될 거예요. 힘내요, 우리.”
방문이 열리고 팀장이 들어왔다. 그는 비닐봉지에서 술과 안주를 꺼내보이며 말했다.
“집엔 잘 말해뒀어. 오늘 여기서 자고 일어나서 내일 아침 바로 시작하자고.”
팀장은 기쁜 얼굴로 말했다. 누구보다도 내일을 고대하고 있을 사람이었다. 늘 회사 일로 찌들어 있었으면서도 이 일은 이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며 작업 때마다 미소를 보이던 그였다. 그는 간만에 마신다는 술에 금방 취해서는 곯아떨어졌다. 경리도 피곤했던 모양인지 벽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영재도 녹초가 된 건 마찬가지였지만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는 일어나서 창고로 갔다. 그러곤 자신의 목마 위에 앉아 그간 해온 작업의 결과들을 차근히 바라보았다. 새삼 놀라웠다. 텅 비었던 창고가 불과 한두 달 새 이렇게 가득 찬 것이다. 가까운 곳부터 순서대로 장치들을 바라보던 영재는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곰곰 생각에 빠져들었다.
팀장의 말처럼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린 문제였다. 바라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만들 수 있었다. 그는 처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지고 화려해진 기계 장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두운 불빛 아래 빛나는 꼭대기쯤을 올려다보자 그 위용에 압도되는 듯했다. 흡사 웅크려 잠든 거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을 서서 바라보던 영재는 가까이 다가가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마지막 단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한참을 바삐 움직인 다음 장치들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야전 침대로 돌아왔다. 담요 속에 몸을 누이자 곧 아늑해지는 기분에 빠져들었다.
“준비됐지?”
팀장이 물었다. 목이 쉬었는지 걸걸했다. 경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잠이 덜 깼는지 창틈으로 비치는 햇살에도 눈을 찡그려 보였다. 영재는 말짱한 정신으로 손에 사료를 쥐고 있었다. 사료는 이미 쳇바퀴 쪽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듬성듬성 흘려놓았다. 어느 담비든 나와서 쳇바퀴를 돌리게 되면 그것으로 시작이었다. 우연에 기댄다며 팀장은 내키지 않아 하던 방식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스럭거리며 담비 포가 기어 나왔다.
“오빠 어디 있어?”
익숙한 목소리였다. 영재는 깜짝 놀라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는데 전화가 걸려온 것은 아니었다. 그의 여동생 목소리였다. 그녀가 직접 영재를 찾아왔단 얘기였다.
“지금은 제가 나가서 얘기할게요. 영재 씨는 이거 찍어요.”
경리가 카메라를 넘겨주고 밖으로 나갔다. 그 사이 담비 포가 쳇바퀴에 올라 뛰기 시작했다. 연쇄 운동의 시작이었다. 튀어나온 구슬이 물결무늬 속 레일 위를 힘차게 구르며 묵직한 소리를 냈다. 앞쪽의 나무막대를 툭 하고 건드리자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의자 다리가 넘어지면서 줄을 당겼다. 감아뒀던 줄이 풀리며 천천히 관람차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경리가 그려 넣은 조그만 담비들의 얼굴도 함께 돌아갔다. 이윽고 관람차가 바닥의 덮개를 밀어젖히자 스프링이 당겨지며 거기 올려두었던 테니스공이 튀어 올랐다.
“이거 문 안 열어? 당신! 안에 있지? 이번엔 대체 어떤 년이야?”
또 다른 목소리였다. 팀장의 아내였다. 당황한 팀장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는 장치의 진행을 계속 지켜봐야 할지 아니면 아내에게 해명을 해야 할지 쉽게 정하지 못하는 듯했다. 곧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영재의 어깨에 손을 얹고서 말했다.
“성공할 거야.”
그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온 창고 문 쪽으로 달려갔다. 서둘러 문이 열리지 않도록 온몸을 기대면서 소리쳤다.
“이번엔 아니야. 여보, 진짜 나중에 다 설명할게. 지금은 안 돼.”
날아간 테니스공이 나무판자에 적중하면서 위로 높이 매달아둔 상자를 밀어 넘어뜨리자 그 아래로 장난감 닭들이 쏟아져 내렸다. 저쪽에서 볼링공이 굴러오면서 꾸엑 하는 닭들의 비명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오빠! 무슨 일이야. 문 좀 열어봐!”
문밖에선 계속해서 소란이 벌어졌지만 영재는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볼 틈이 없었다. 장난감 자동차가 굴러가며 딸깍하고 스위치를 눌렀다. 창고의 블라인드가 내려오며 창문을 가려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곧이어 폭죽이 한차례 터지며 공중을 수놓았다. 매달았던 페인트 통이 떨어짐과 동시에 스펀지 손가락이 건반을 누르자 일렬의 조명이 차례로 켜졌다.
영재는 이 장치들이 오차 없이 작동하는 게 기뻤다. 미처 확인할 수 없었던 것들도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창고 안팎의 소란함 속에서도 두 눈으로 이 광경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경이로운 순간이란 걸 알았다. 그와 동시에 영재는 자신이 카메라를 들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경리에게 넘겨받은 카메라를 그대로 목마에 놓아둔 탓이었다.
탁구공이 바닥에 깔렸다. 이제 장치의 작동은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운동 속도가 줄어들면서 다시 조그마한 움직임으로 집중되는 단계였다. 영재는 심호흡을 했다. 깔때기 속으로 천천히 회전운동을 하던 쇠구슬이 마침내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유리병이 깨지며 팽팽히 묶여있던 두 가닥의 줄이 풀렸다.
이제 영재가 고안한 마지막 단계였다. 줄로 묶여있던 노란색 스펀지 막대 손 한 쌍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서히 움직이는 막대 손은 건초 더미를 향했다. 마치 고장 난 듯 힘없이 덜그럭거리는 노란 손 한 쌍이 건초를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문을 밀고 창고로 들어선 사람들은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이 무슨 난장판인가, 하는 표정으로 다들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동시에 유일하게 움직이고 있는 장치로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모아졌다.
영재가 궁리한 것은 담비들을 위한 장치였다. 그가 고심 끝에 만들기로 한 것이었다. 이보다 나은 무언가는 생각하기도 힘들었다. 애초에 계획이랄 것도 없이 시작한 일이었다.
그 순간 두 막대 손이 엇박자로 급격히 기울어졌다. 감겼던 줄이 예상보다 일찍 전부 풀려버린 탓이었다. 그 반동 때문에 들어 올린 건초들은 그대로 공중에 흩뿌려지는 꼴이 되고 말았다. 먼지를 풀풀 날리며 여기저기로 흩어지는 지푸라기가 햇살 속에 반짝였다. 그 와중에 다행인 건 아무렇게나 흩날리던 지푸라기 몇 가닥이 담비들의 보금자리에 내려앉았단 것이다.
건초를 깔아주기 위함이었던 의도는 고작 몇 가닥의 지푸라기로 표현되고 있었다. 이를테면 한 줌의 성공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영재는 해냈다는 생각에 벅차오르는 마음을 참기 힘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기뻐해야 할지 당황해야 할지 분간조차 못 한 모양이었다. 마찬가지로 구석에서 어리둥절해 하며 빼꼼 고개만 내밀고 있던 담비 투가 이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곤 흩뿌려진 지푸라기들을 하나둘씩 제 입으로 물어 보금자리로 옮겨오는 것이었다.
어느새 영재는 두 손을 높게 들어올린 채로 서 있었다. 그런 그를 모두가 바라보았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손을 내릴 줄을 몰랐다.
“쉬엄쉬엄하자고.”
팀장이 영재에게 다가가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월요일이니 잠깐 커피를 마시며 주말 보낸 이야기나 하자는 팀장의 제스처이기도 했다.
“어? 이게 왜 이러지?”
앉아서 사무를 보던 경리가 당혹스런 얼굴로 일어나서 의자를 살피기 시작했다.
“의자가 안 내려가네요.”
높낮이 조절 레버가 고장이라도 난 것인지 솟아오른 의자가 도로 내려가질 않았다. 그걸 본 영재는 어느새 옆으로 바짝 다가가 살피고 있었다.
“오래돼서 그런가 봐. 나중에 남는 의자로 바꿔 앉아.”
팀장의 말이었다. 하지만 영재는 한 가지 일을 오래 하다보면 얻을 수 있을 법한 장인의 진중한 표정으로, 하지만 난생처음 보는 물건을 발견한 듯한 영장류의 어설픈 손길로 레버와 의자 몸체를 움직여보고 있었다.
“놔둬. 그러다 더 고장……”
팀장이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영재는 의자를 뽑아버리고 말았다. 몸체에서 분리된 의자 다리는 제자리에서 팽그르르 돌다가 곧 멈췄다. 이 광경을 본 팀장은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빗나가지 않고 적중했다는 것에 내심 안도하는 눈치였다. 고작 이 정도 실수라면 오히려 다행이었다.
“다치진 않았지?”
당황한 영재를 살피며 팀장은 별일 아니라는 듯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영재가 다시 의자 몸체를 다리에 끼우자 의자는 기우뚱하게 쓰러질 듯하더니 아슬아슬하게 곧 균형을 잡았다. 영재는 엉거주춤하게 서서 의자가 왜 고장 났을까에 대해 얼마 동안 골몰한 후 자리를 떴다.
“정말이에요? 갑자기 회사가 어려워져요?”
“알잖아. 윗선에서 잘못하면 휘청휘청하다 결국 직원들만 거덜 나는 거.”
곧 구조조정이 있을 거란 소문이 파다했고 대개 안 좋은 소문은 곧잘 들어맞는 편이었다. 팀장은 자기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보란 듯이 한숨을 쉬곤 했다. 다른 사원들처럼 을의 입장이란 걸 강조하려는 속셈이었는데 실은 이런 위기 때마다 미묘한 입장 차이가 있다는 걸 모르는 직원은 없었다.
탕비실에서 잠깐 휴식하고 돌아온 사무실에는 문서철 넘기는 소리,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멈추질 않았다. 잠잠했던 전화기를 붙잡고 통화하는 목소리는 앞다투어 커졌고 너나 할 것 없이 동작들은 기민해졌다. 화장실을 다녀온 영재는 변함없이 진지한 얼굴로 화면에 적힌 숫자들을 체크했다.
“이봐, 오후에 영재가 출장 가기로 한 거 아니었어?”
팀장의 말에 영재는 비로소 생각난 듯이 벌떡 일어섰다. 죽은 줄 알았던 전구가 팟 하고 켜진 것처럼 그 모습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짓는 사람도 있었다. 영재는 목을 내밀고서 다급히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러더니 곧 다시 자리로 돌아와 가방을 챙겨 나갔다. 그의 부산함에 팀장은 작게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영재는 회사 앞에서 십오 분 간격으로 오는 시내버스에 올랐다. 초가을 바작바작 내리쬐는 햇볕을 받으며 앉아있자니 금세 졸음이 밀려왔다. 영재는 연신 고개를 꾸벅였다. 결국 내려야 할 곳을 두 정거장 지나쳐버린 그는 얼마간 다시 걷고 나서야 전자상가에 도착했다. 회사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겠다며 완구용 3D 프린터를 만들 업체를 찾고 있었다. 가능성 있는 몇 군데 업체를 방문해서 확인하는 것이 이번 일이었다. 건물 실내의 공기는 서늘했다.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 좁은 복도를 따라 영재는 걸었다. 복도 끝자락에서 리스트의 첫 번째 업체를 체크하는 도중 한 입간판의 글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골드버그 장치의 개선’
입간판 옆으로는 허름한 철제문이 살짝 열려있었고 그 틈으로 작은 쇠구슬 하나가 굴러나왔다. 슬쩍 안을 들여다보니 삼십여 명 정도가 모여 세미나라도 진행 중인 모양이었다. 삼삼오오 모여 분주하기도 하고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지는 통에 대체로 소란스러웠다. 영재는 자기도 모르게 이끌리듯 안으로 들어가 구경을 시작했다.
곳곳에 나무판자나 우드락이 세워져 있었고 온갖 잡동사니는 난잡하게 얽혀있었다. 사람들은 팔짱을 낀 채 열띤 모습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쇠구슬이나 도르래가 움직일 때면 눈을 빛내며 그걸 지켜보았다. 예상치 못하게 작동을 멈추면 탄식을 내뱉기도 하고 어떨 땐 박수를 치기도 했다. 단순히 봐서는 무엇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판이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곳에서 한참을 구경하던 영재는 팀장의 전화가 걸려왔을 때에야 비로소 허둥지둥 발길을 돌릴 수 있었다.
며칠 뒤 영재는 회사에서 자신의 의자가 사라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엉거주춤 서 있는 그를 못 보았을 리가 없는데 다들 그를 못 본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앉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그는 지금 경리가 앉은 의자가 원래 자기 의자라는 걸 알아차렸다.
“팀장님이 급한 대로 이 의자 가져다 앉으라고……”
영재가 팀장을 바라보자 팀장은 성큼 걸어오더니 그에게 속삭였다.
“사장님이 부르실 거야.”
그 말대로 곧 사장과의 면담이 있었고, 돌아온 영재에게 팀장은 쉴 틈도 주지 않고 말했다.
“자네 같은 인재가 또 없는데. 회사가 어렵긴 어려운가 봐. 필요하면 얘기해. 내가 다른 데 좀 알아봐 줄게.”
괜히 머쓱했는지 팀장은 필요 이상으로 많은 말을 했다. 영재는 자리로 돌아와 구석에 놓여있던 기우뚱한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리고 평소처럼 컴퓨터를 켠 후 키보드를 두드렸다. 전과 같은 모습에 시선을 끌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흘금흘금 그를 곁눈질하거나 씁쓸한 표정을 짓고서 쳐다보았다. 사무실엔 더이상 소리 내어 문서철을 넘기거나 기민하게 전화기를 들어 올리는 사람이 없었다.
영재는 두 달 치의 급여와 퇴직금을 받고 방 안에 틀어박혔다. 꼬박 사흘간을 그렇게 있으며 깨달은 것은 이 집에서는 마땅히 할 게 없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발장, 냉장고, 옷장 등이 다 빌트인 된 오피스텔은 딱 출근과 퇴근 사이 거쳐 갈 용도로만 쓰일 만큼 조그마했다. 그동안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에 영재는 스스로 놀랐다. 그 집의 정체와 목적을 깨달은 그는 이제 그곳에 질렸고 그 안에 있는 일이 갑갑하게만 여겨졌다. 마침내 영재는 집으로부터 탈출하기로 했다.
그는 부동산에 방을 내놓고 이전과 다른 장소를 물색했다. 마침내 찾아낸 곳은 회사 공장이 있는 시골 동네의 작은 창고였다. 원래 농기계를 보관하는 데였다고 하는데 텅 빈 공간 한편엔 목재 팔레트와 건초 다발 따위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영재에겐 높은 천장에다 간혹 구멍 난 벽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에 비쳐 풀풀 날리는 먼지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없었다. 전세금을 돌려받은 걸로 그 창고에다 같이 딸린 집까지도 살 수 있었다. 보통 사람들에겐 집에 창고가 딸려있구나 여겼겠지만 그에겐 반대였다. 맘에 드는 건 오로지 창고였다. 부동산 중개인이 요 앞의 땅은 안 사냐고 물어왔을 때 영재는 땅을 왜 사냐고 반문하여 그를 당혹게 했다. “농사지으려면 땅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하는 부동산 중개인의 말에 영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그를 더욱 무안하게 만들었다.
고작 몇 박스 되지 않는 이삿짐을 모두 집으로 들여놓은 후 그는 창고 한가운데 야전용 침대를 펼쳤다. 드넓은 공간에 실수인 듯 놓인 야전용 침대 위에 드러눕자 높은 천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치 나무 구멍에 둥지를 틀고 들어앉은 새가 된 기분이었다.
그날 밤 그는 담요를 꺼내들고 창고 안 야전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그렇게 어설프기 짝이 없는 보금자리에서 턱 끝까지 담요를 끌어당긴 채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영재는 한동안 집 주위를 서성거리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시간을 만끽했다. 집 주변은 개망초와 코스모스가 무성했고 버려진 철조망이나 흙더미에 파묻힌 세발자전거 따위가 나머지 풍경을 장식했다. 고개를 들어 멀리 살피면 회사의 공장이 보였고 그사이를 넓은 논밭과 함께 파란 지붕의 낮은 집들이 드문드문 메우고 있어 역시 아무래도 농업에 종사하는 게 이 풍경에 합당한 일을 하는 것으로 여겨질 법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당분간 뭘 할 생각도, 무얼 해야 하나 생각할 생각조차 그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떤 지속되는 궁리 따위 하지 않기로 마음먹고서 그는 하루의 시간을 다 보냈다.
한밤중 야전 침대에서 자던 영재가 눈을 뜬 것은 어디선가 반복해서 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휴대폰 불빛을 비춰가며 겨우 소리의 근원지를 찾자 무언가 창고 귀퉁이를 빠르게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곧 구석에 뚫린 구멍으로 쏙 사라져버린 걸 보면 들쥐였나 싶기도 했다. 그러나 소리는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그가 건초 더미를 뒤져보자 눈앞에 드러난 것은 족제비 새끼들이었다. 모두 네 마리였는데 눈도 다 못 뜬 채 입을 벌리고 꼬물꼬물 움직이고 있었다. 갈색 털이 보송하게 나 있지만 그 아래로 분홍의 피부가 더 선명했다. 영재는 족제비 어미가 사라져버린 구멍을 건너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참 동안 새끼들을 내려다보았다. 조심스럽게 건초 더미를 정리해두고 침대로 돌아온 그는 두근거리는 마음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영재는 일어나자마자 건초 더미로 갔다. 새끼들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그는 집으로 건너가서 냉동 만두와 소시지를 데워 접시에 담아 왔다. 그런 후 창고 구석의 구멍 앞에 내려놓았다. 어미가 먹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런 다음엔 이제 자신이 먹을 것들을 사러 슈퍼에도 다녀왔고 인터넷으로 필요한 것들도 하나둘 주문했다. 오후는 주변의 풀을 베고 잡동사니들을 치우면서 시간을 보냈다. 되도록 창고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려 애쓰다가 땅거미가 질 무렵 창고로 돌아갔다. 아침에 둔 접시는 그대로였다. 건초 더미 속에 새끼들은 이따금 힘없이 움직일 뿐이었다. 그는 불안했다. 이대로 두다간 죽을지도 몰랐다. 영재는 우유를 데워와 손끝에 묻혀 한 방울씩 족제비 새끼들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우유를 먹은 뒤 배가 부른 새끼들은 둥글게 몸을 말고서 잠이 들었다.
당분간 영재는 족제비를 키우는 일에 몰두했다. 마을에서 건초를 좀 구해와 푹신한 잠자리를 마련했고 매일 분유를 타서 주사기로 먹이는 건 일상이 되었다. 어느덧 눈도 뜨고 털도 제법 자란 새끼들을 그가 쓰다듬고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여동생이었다.
“오빠 어디야?”
그는 그동안의 일을 동생에게 설명했다.
“하, 그렇다고 시골로 내려가?”
어쩐지 큰 잘못을 저지른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더 설명해야 할 것은 없었다. 족제비 새끼들이 그의 손가락에 관심을 보이며 물려고 하자 간지러움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음이 나와 지금? 다 커서도 장난감 좋아하다가 겨우 회사 들어간다고 해서 철드나 싶었는데, 그걸 그만뒀다고?”
더 할 말을 찾지 못해 그는 어물거렸다. 동생에게 한참 잔소리를 듣던 그는 할 일이 있다고 한 후 전화를 끊어버렸다.
만약 동생이 찾아와서 족제비들과 놀고 있는 자신을 보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게 분명했다. 때론 부모의 역할까지 도맡아 하던 동생이었다. 영재는 고심하며 몸을 움직였다. 뭐라도 해야 한단 생각이었다. 밖을 두리번거리다 버려져 있던 세발자전거를 들고 왔다. 바퀴를 떼어내고 타이어를 벗겨냈다. 프레임을 펜치와 가위로 잘라냈다. 그는 햄스터가 쳇바퀴를 돌리는 모습을 떠올렸다. 언젠가 족제비들이 자라면 이것을 열심히 돌려줄 거라 믿으며 그는 쳇바퀴를 만들기 시작했다. 몸을 움직이고 손을 놀려 열심히 뭔가를 만드는 동안 그의 마음엔 금세 안도감이 스며들었다. 좀처럼 맛볼 수 없던 작은 평화였다. 그게 시작이었다.
가장 먼저 그를 찾아온 것은 팀장이었다. 영재가 공장이 있는 동네로 갔다는 소식을 어렵게 전해 듣고 일부러 찾아온 것이었다. 영재가 퇴사하기 전 잘못 넣은 주문 때문에 꾸엑 소리를 내는 장난감 닭과 스펀지 막대 손이 회사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의 정리해고에 대한 책임을 느끼는 사람으로서 뒤늦은 책망이란 아무런 소용없는 것임을 그는 알았다. 대신에 근황도 듣고 일자리라도 알아봐 줄 요량으로 내려온 것이었다.
“이야, 이게 다 뭐야?”
팀장은 창고에 들어서자마자 감탄했다. 창고 곳곳에 영재가 만들어놓은 물건들이 널려있었다. 최초로 만든 족제비용 쳇바퀴부터 반자동 개폐식 창문 블라인드와 족제비 타워, 그리고 놀이공원의 관람차처럼 천 조각들이 집게에 걸려 돌아가는 등의 용도를 알 수 없는 것도 여럿 있었다.
“이거 그거 맞지? 골드버그 장난감?”
골드버그 장치는 단순한 일을 아주 복잡한 연쇄 반응 후에 해내는 기계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영재가 만든 물건들 중 일부는 맞고 몇 가지는 맞지 않았다. 이를테면 빗물이 새는 자리에 놓아둔 양동이에 물이 가득 차면 나무망치가 종을 때리도록 고안한 것이 골드버그 장치에 가까웠다.
“역시 보통은 아니라니까. 자네 재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그는 내심 이때까지의 영재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수정해야 한다고 느꼈다. 하고많은 비슷한 실수를 반복해 골칫거리였던 인간이 이제야 무언가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족제비 타워를 구경하는 동안 족제비들이 몰려와 주위를 감싸고 재빠르게 돌아다녔다.
“담비도 길러? 자네 취향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팀장은 구석구석의 잡동사니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곧 예감했다. 이곳에서 뭔가가 나온다. 설명할 수 없지만 늘 그런 직감을 믿으며 살아온 그였다. 그냥 지나쳐버려선 안 되는 무언가가 분명 이곳에 있다. 한참을 구경하다 가야겠다며 돌아서는 팀장은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듯했다. 친구 집에 장난감을 두고 가는 어린아이의 눈빛처럼 슬픈 기운마저 비치는 듯했다.
“늦으면 마누라한테 혼나. 다음에 또 올게.”
팀장 다음으로 온 것은 사무실 경리였다.
“일을 그렇게 해놓고 가면 어쩌란 거예요?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경리는 단단히 벼르고 온 듯이 그를 타박했다. 식은땀을 닦으며 그녀의 말을 듣던 영재는 그제야 자신이 시제품 열 가지를 모조리 열 박스씩 주문 넣었다는 걸 깨달았다.
“회사는 직원도 줄여놓고서 일은 또 어찌나 시키는지. 월급은 쥐꼬리만큼 주면서 말이죠. 그래서 이번에 아예 관뒀어요.”
영재는 그녀의 옷차림이 늘 보던 것과 다르단 것도 이제야 눈치챘다.
“몰랐어요? 이 동네가 제 고향이에요.”
회사에선 그런 대화를 나눈 적 없으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뭔가 대단한 걸 만들고 있다던데, 팀장님 말대로 회사 그만둬도 일은 그만두지 못하시네요.”
영재는 그녀가 그렇게 쏟아내는 말들에 조금 놀랐다. 우선은 이렇게 와서 말을 쏟아내는 경리가 평소보다 당당해 보였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자신이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단 사실 때문이었다.
“근데 뭐, 단순히 잡동사니를 모아놓은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네요.”
금세 그녀의 엇갈린 평가에 그는 조금 의기소침해졌다. 그녀도 팀장처럼 여기저기를 만져보고 둘러보았다. 족제비 집 주변에 설치된 경보 장치에 이르러서는 호기심을 보이고 이내 시험 작동을 해보더니 말했다.
“진자 운동의 형태론 이 블록을 완전히 밀어내지 못해요. 위치를 더 높이거나 톱니를 사용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어리둥절해 하는 영재에게 그녀는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구체적으로 보완해야 할 부분을 일러주었다. 미처 생각조차 못 했던 방식이었다. 그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저 원래 공대생이었잖아요.”
영재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더 많겠단 생각을 했다.
“가끔 놀러 올게요. 잘 해봐요.”
그녀가 돌아서며 말했다. 그 순간 그는 뭔지 모르겠지만 정말 잘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팀장이 다시 찾아왔을 때 그는 박스 여러 개를 차에 싣고 가져왔다.
“회사 창고에 있던 것들이야.”
박스엔 영재가 무더기로 주문해버린 장난감 닭과 스펀지 막대 손, 그리고 갖은 학용품들, 나무 블록, 알루미늄 레일, 플라스틱 도르래 따위가 들어있었다. 영재가 다른 작은 박스를 가리키자 팀장은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혹시나 해서, 내가 보관하던 장난감도 좀 가져와 봤지.”
변신 로봇과 손가락 크기의 모형 자동차들이었다. 그는 박스에서 물건들을 차례로 꺼내놓으며 영재가 만든 장치들 앞에서 조금 벅차오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골드버그 장치라면 더 복잡해야지. 게다가 지금은 좀 우연적인 구석이 있어. 확실하게 하자고.”
그는 현재 영재가 해놓은 것만으론 하나의 독보적인 작품이 되기엔 결함이 많다고 생각했다. 크기도 키우고 작동 단계를 더 늘일 필요가 있었다. 그 과정을 자신이 돕겠단 얘기였다. 그는 분명한 작동 원리와 선명한 구조를 원했다. 실패하지 않을 명확함 속에 결과가 필연적으로 도출되도록 하고자 했다. 이를테면 지금처럼 족제비 타워에서 점프한 어느 족제비가 운 좋게 특정 발판을 밟았을 때 관람차가 움직이게 하는 식은 곤란하단 얘기였다.
“차라리 자네가 앉아서 이걸 움직이면 관람차까지 움직이게 하는 건 어때?”
그는 휑뎅그렁하게 놓인 목마를 두고 말했다. 목마는 영재가 가끔 올라타서 생각을 하는 장소일 뿐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팀장이 물건을 가져다주며 개조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창고 안의 물건들은 조금은 더 근사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는 때로는 영재보다 더 땀을 뻘뻘 흘리며 좀처럼 손에서 드라이버와 접착제를 놓지 않았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마누라한테 혼난다며 서둘러 돌아가곤 했다. 다시 다음날 퇴근 후엔 그가 어김없이 나타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자, 오늘도 잘해보자고.”
경리는 그보다 더 불규칙하게 영재의 창고를 찾았다. 그녀가 하는 일은 주로 작업이 진행되는 장치들에 대한 품평과 조언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 방법 실패하기 딱 좋네요.”라거나 “여긴 더 작은 구슬을 써도 될 거예요.”, 또는 아주 가끔 “어머 귀엽네.” 하는 식이었다. 전에 비해 별다른 작업의 진척이 없으면 그녀는 창고 밖에서 멍하니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시간을 보내다 돌아가곤 했다.
그렇게 팀장과 경리가 번갈아 찾아오기 시작하자 영재는 외로워할 틈조차 없게 되었다. 창고가 온갖 물건들로 가득 차고 장치가 부피를 키워가는 동안에도 틈틈이 족제비들의 물과 먹이도 챙겨야 했다. 이렇게 그가 회사를 다니던 때보다 더 바쁜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어머 담비 투는 이빨이 났나 봐요. 자꾸 깨물려고 하네.”
경리는 족제비들을 쓰다듬고 있었다. 팀장이 일러준 뒤부터 그녀도 담비 원, 투, 쓰리, 포로 이름 붙여 부르고 있었다. 영재는 담비와 족제비가 전혀 다른 생김새를 가졌다는 걸 알았지만 때를 놓쳐버린 뒤 굳이 말하진 않았다.
“담비 포는 진작 났어. 근데 늘 싸돌아다녀서 잘 안 보여.”
그렇게 말하며 팀장은 앞치마를 벗어 던져두었다. 일찍부터 작업을 시작했지만 그날은 비도 오고 일이 더디게 진행되던 참이었다. 팀장도 경리가 쭈그려 앉아 있는 입구로 나가 그녀와 마찬가지로 지긋하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영재는 건초 다발을 풀어 족제비들이 잠드는 곳에 두툼히 깔았다. 그런 뒤 우유를 따른 컵을 데운 후 두 사람에게 가져갔다.
“마침 좀 쌀쌀했는데 고마워요.”
경리가 두 손으로 컵을 받아들었다.
“원래 담비 주려던 건 아니지?”
팀장의 의심에 영재는 뜨끔했지만 어물쩍 넘어갔다. 다들 우유를 마시며 바깥을 내다보던 중 경리가 먼저 입을 뗐다.
“영재씨는 참 대단한 것 같아요. 처음엔 되게 무능하게 봤었거든요.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좀처럼 말수도 없고. 아, 물론 지금도 조용하지만요.”
“지금 칭찬하려는 거야, 욕하는 거야?”
팀장이 웃으며 경리의 말을 받았다. 영재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일을 벌이고 있잖아요. 솔직히 좀 놀랐어요. 이렇게 진짜 좋아하는 일에 매달리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그녀의 말에 팀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영재는 한창 회사가 성장할 때 들어온 여러 직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렇게 쓸모없는 사람도 들어올 수가 있나 새삼 놀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 보자면 이 사람의 잠재력이 제대로 평가받을 수 없었던 게 아닐까, 하고 팀장은 생각했다.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요. 저한테 자극도 되고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나서서 돕고 있는 거 아니겠어.”
영재는 어디서부터 말을 풀어내야 할지 몰랐다. 약간의 오해가 있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걸 해소할 길을 찾는 것도 아물아물하게만 느껴졌다.
그날은 그렇게 얼마간 잡담을 나누다 모두 돌아가고 일찍 작업이 끝났다. 혼자가 된 영재는 창고에 조그만 불만 켜둔 채 목마 위에 앉았다. 목마는 느리게 삐거덕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불연속적으로 건너뛰는 소음 속에서 이제는 희미한 과거의 추억을 더듬었다. 어릴 적 그의 손에 쥐어지던 장난감, 어김없이 들려오던 다툼의 말들, 귀를 닫은 그가 끝없이 반복해야 했던 놀이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담비 포가 불빛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영재가 일어나자 마치 마중 나오듯이 껑충 뛰어서 내달려왔다. 영재는 흩어져있던 건초를 다시 모아 담비들의 보금자리를 덮어주었다. 세 마리는 이미 잠들어서 서로에게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영재가 돌아가자 담비 포도 금세 다시 안으로 들어가 머리를 웅크렸다.
매일 아침 영재는 창고에 불을 환히 켜고 담비 원 투 쓰리 포를 위한 물부터 갈았다. 사료를 확인하고 밥그릇을 채워 넣으면서 녀석들의 보금자리를 확인했다. 벽에 혹시 못 보던 구멍이라도 뚫려있지 않나 둘러보는 식의 일들이 그의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좀 더 지나면 겨울을 대비해 창고 곳곳을 보수할 필요도 있었다. 영재는 장을 볼 겸 밖으로 나섰다.
그가 돌아왔을 때 창고에는 팀장과 경리가 와있었다. 주말인 덕에 일찍부터 온 듯했다. 그런데 둘은 서로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있었다.
“아니라니까, 이건 기본적으로 장난감이야. 장난감 회사에 어필해야지.”
“또 취직해서 사무실 앉아서 일하라고요? 또 그러다 잘리고?”
잘리고, 라는 말에서 경리는 팀장을 흘깃 쏘아보았다. 그에게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하려는 다분히 의도된 행동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럼 이걸로 뭘 해?”
“다른 분야에 써먹을 수도 있잖아요. 이 정도 만들 능력이면 사람들은 얼마든지 관심 가질 거예요.”
“관심 가지면 뭐?”
“뭐, 뭐, 광고에 쓴다든지.”
마지막 말은 그녀도 자신이 없었다. 두 사람은 이 골드버그 장치로 영재에게 어떻게 새로운 활로를 열어줄 수 있을까에 대해 의논하던 참이었다. 결국 이 프로젝트의 목적이 무얼 향해야 하는가의 문제였다. 영재는 흥분해있는 두 사람의 눈치를 봐가며 가져온 사료를 정리하고 건초 다발을 한쪽에 쌓아두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팀장이 의견을 정리하려는 모양이었다. 심각했던 경리의 표정은 그의 말에 차츰 풀어지기 시작했다. 영재도 궁금했지만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한 채 기다렸다.
대화가 끝나자 팀장은 앞치마를 졸라맨 채 어딘가 비장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경리는 밖으로 나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돌아온 뒤 더욱더 꼼꼼하게 조언했다. “멋없어요. 레일로 끼우는 게 나아요.” 그러면 팀장도 조언에 맞춰 세심하게 다시 작업을 했다. 그날은 미처 끼어들 틈이 없어 영재는 옆에서 구슬을 주워 주거나 박스에서 도르래를 가져다주는 일만 해야 했다.
둘의 계획은 영상을 찍자는 것이었다. 모두 하나의 골드버그 장치로 연결하여 완성이 되면 작동하는 모습을 카메라로 담는다. 그런 후 영재의 의견에 따라 장난감 회사에 내보내든 유튜브에 올려 관심을 끌든 하자는 얘기였다.
팀장은 만들어둔 각각의 개별 장치가 오차 없이 작동하는지부터 우선적으로 확인하기로 했다. 그다음 사이사이를 레일이나 도르래, 쉽게는 도미노의 형태로 동력을 이어주면 되는 일이었다. 팀장에겐 쳇바퀴가 쳇바퀴로만 끝나선 안 되었다. 중요한 건 연결이었다. 매번 같은 식으로 반복되며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상적 작동으로부터 그 너머의 무한한 가능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연결에 달려있었다. 최종적으로 어떠한 결말로 기계가 멈추게 될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결국 마지막은 영재에게 맡기는 게 옳을 터였다.
경리는 몇 가지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하나는 일회성의 효과 장치를 넣자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팟 하고 물감을 흩뿌린다든지 중간에 폭죽이나 풍선을 터트리면 훨씬 더 극적인 효과를 낼 것이란 얘기였다. 그 외에도 미적으로 신경 써야 할 부분들은 경리가 도맡기로 했다. 그녀는 관람차에 담비들의 얼굴부터 그려 넣었다. 어느 것보다 정성을 들여 그림을 완성한 뒤 바닥에는 구슬이 지나갈 레일에 맞춰 커다란 물결무늬를 그렸다. 페인트 통에 붓을 넣어 휘젓고 자유롭게 곡선을 그려나가는 동안 그녀는 이토록 그림을 좋아했었는데 결국 공대를 졸업한 자신의 행로에 대해 생각했다. 지나고 보면 어느새 변곡점이 되어있는 삶의 순간들이 있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이 작업들은 또 무엇을 위해 마련된 걸까, 그녀는 골똘해졌다.
영재는 평소와 같이 홀로 담비들을 돌보며 양쪽의 심부름을 거들었다.
“드디어 내일이에요. 긴장되지 않아요?”
일주일의 작업이 끝나고 영재의 방에 들어와 앉은 경리가 물었다. 그녀의 얼굴엔 페인트 자국이 남아있었다. 영재는 평소처럼 데운 우유를 컵에 따라 내밀었다.
“실패할 수도 있어요. 어쩌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수도 있고요.”
그렇게 말한 그녀도 사실 그럴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한 번으로 족했다. 또다시 이 일에 매달려있을 자신의 모습은 잘 상상되지 않았다.
“우리가 이렇게 같이 노력한 거, 그것만으로도 의미는 있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고단한 기색으로 웃으며 말했다.
“잘 될 거예요. 힘내요, 우리.”
방문이 열리고 팀장이 들어왔다. 그는 비닐봉지에서 술과 안주를 꺼내보이며 말했다.
“집엔 잘 말해뒀어. 오늘 여기서 자고 일어나서 내일 아침 바로 시작하자고.”
팀장은 기쁜 얼굴로 말했다. 누구보다도 내일을 고대하고 있을 사람이었다. 늘 회사 일로 찌들어 있었으면서도 이 일은 이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며 작업 때마다 미소를 보이던 그였다. 그는 간만에 마신다는 술에 금방 취해서는 곯아떨어졌다. 경리도 피곤했던 모양인지 벽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영재도 녹초가 된 건 마찬가지였지만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는 일어나서 창고로 갔다. 그러곤 자신의 목마 위에 앉아 그간 해온 작업의 결과들을 차근히 바라보았다. 새삼 놀라웠다. 텅 비었던 창고가 불과 한두 달 새 이렇게 가득 찬 것이다. 가까운 곳부터 순서대로 장치들을 바라보던 영재는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곰곰 생각에 빠져들었다.
팀장의 말처럼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린 문제였다. 바라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만들 수 있었다. 그는 처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지고 화려해진 기계 장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두운 불빛 아래 빛나는 꼭대기쯤을 올려다보자 그 위용에 압도되는 듯했다. 흡사 웅크려 잠든 거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을 서서 바라보던 영재는 가까이 다가가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마지막 단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한참을 바삐 움직인 다음 장치들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야전 침대로 돌아왔다. 담요 속에 몸을 누이자 곧 아늑해지는 기분에 빠져들었다.
“준비됐지?”
팀장이 물었다. 목이 쉬었는지 걸걸했다. 경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잠이 덜 깼는지 창틈으로 비치는 햇살에도 눈을 찡그려 보였다. 영재는 말짱한 정신으로 손에 사료를 쥐고 있었다. 사료는 이미 쳇바퀴 쪽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듬성듬성 흘려놓았다. 어느 담비든 나와서 쳇바퀴를 돌리게 되면 그것으로 시작이었다. 우연에 기댄다며 팀장은 내키지 않아 하던 방식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스럭거리며 담비 포가 기어 나왔다.
“오빠 어디 있어?”
익숙한 목소리였다. 영재는 깜짝 놀라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는데 전화가 걸려온 것은 아니었다. 그의 여동생 목소리였다. 그녀가 직접 영재를 찾아왔단 얘기였다.
“지금은 제가 나가서 얘기할게요. 영재 씨는 이거 찍어요.”
경리가 카메라를 넘겨주고 밖으로 나갔다. 그 사이 담비 포가 쳇바퀴에 올라 뛰기 시작했다. 연쇄 운동의 시작이었다. 튀어나온 구슬이 물결무늬 속 레일 위를 힘차게 구르며 묵직한 소리를 냈다. 앞쪽의 나무막대를 툭 하고 건드리자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의자 다리가 넘어지면서 줄을 당겼다. 감아뒀던 줄이 풀리며 천천히 관람차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경리가 그려 넣은 조그만 담비들의 얼굴도 함께 돌아갔다. 이윽고 관람차가 바닥의 덮개를 밀어젖히자 스프링이 당겨지며 거기 올려두었던 테니스공이 튀어 올랐다.
“이거 문 안 열어? 당신! 안에 있지? 이번엔 대체 어떤 년이야?”
또 다른 목소리였다. 팀장의 아내였다. 당황한 팀장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는 장치의 진행을 계속 지켜봐야 할지 아니면 아내에게 해명을 해야 할지 쉽게 정하지 못하는 듯했다. 곧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영재의 어깨에 손을 얹고서 말했다.
“성공할 거야.”
그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온 창고 문 쪽으로 달려갔다. 서둘러 문이 열리지 않도록 온몸을 기대면서 소리쳤다.
“이번엔 아니야. 여보, 진짜 나중에 다 설명할게. 지금은 안 돼.”
날아간 테니스공이 나무판자에 적중하면서 위로 높이 매달아둔 상자를 밀어 넘어뜨리자 그 아래로 장난감 닭들이 쏟아져 내렸다. 저쪽에서 볼링공이 굴러오면서 꾸엑 하는 닭들의 비명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오빠! 무슨 일이야. 문 좀 열어봐!”
문밖에선 계속해서 소란이 벌어졌지만 영재는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볼 틈이 없었다. 장난감 자동차가 굴러가며 딸깍하고 스위치를 눌렀다. 창고의 블라인드가 내려오며 창문을 가려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곧이어 폭죽이 한차례 터지며 공중을 수놓았다. 매달았던 페인트 통이 떨어짐과 동시에 스펀지 손가락이 건반을 누르자 일렬의 조명이 차례로 켜졌다.
영재는 이 장치들이 오차 없이 작동하는 게 기뻤다. 미처 확인할 수 없었던 것들도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창고 안팎의 소란함 속에서도 두 눈으로 이 광경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경이로운 순간이란 걸 알았다. 그와 동시에 영재는 자신이 카메라를 들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경리에게 넘겨받은 카메라를 그대로 목마에 놓아둔 탓이었다.
탁구공이 바닥에 깔렸다. 이제 장치의 작동은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운동 속도가 줄어들면서 다시 조그마한 움직임으로 집중되는 단계였다. 영재는 심호흡을 했다. 깔때기 속으로 천천히 회전운동을 하던 쇠구슬이 마침내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유리병이 깨지며 팽팽히 묶여있던 두 가닥의 줄이 풀렸다.
이제 영재가 고안한 마지막 단계였다. 줄로 묶여있던 노란색 스펀지 막대 손 한 쌍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서히 움직이는 막대 손은 건초 더미를 향했다. 마치 고장 난 듯 힘없이 덜그럭거리는 노란 손 한 쌍이 건초를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문을 밀고 창고로 들어선 사람들은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이 무슨 난장판인가, 하는 표정으로 다들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동시에 유일하게 움직이고 있는 장치로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모아졌다.
영재가 궁리한 것은 담비들을 위한 장치였다. 그가 고심 끝에 만들기로 한 것이었다. 이보다 나은 무언가는 생각하기도 힘들었다. 애초에 계획이랄 것도 없이 시작한 일이었다.
그 순간 두 막대 손이 엇박자로 급격히 기울어졌다. 감겼던 줄이 예상보다 일찍 전부 풀려버린 탓이었다. 그 반동 때문에 들어 올린 건초들은 그대로 공중에 흩뿌려지는 꼴이 되고 말았다. 먼지를 풀풀 날리며 여기저기로 흩어지는 지푸라기가 햇살 속에 반짝였다. 그 와중에 다행인 건 아무렇게나 흩날리던 지푸라기 몇 가닥이 담비들의 보금자리에 내려앉았단 것이다.
건초를 깔아주기 위함이었던 의도는 고작 몇 가닥의 지푸라기로 표현되고 있었다. 이를테면 한 줌의 성공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영재는 해냈다는 생각에 벅차오르는 마음을 참기 힘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기뻐해야 할지 당황해야 할지 분간조차 못 한 모양이었다. 마찬가지로 구석에서 어리둥절해 하며 빼꼼 고개만 내밀고 있던 담비 투가 이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곤 흩뿌려진 지푸라기들을 하나둘씩 제 입으로 물어 보금자리로 옮겨오는 것이었다.
어느새 영재는 두 손을 높게 들어올린 채로 서 있었다. 그런 그를 모두가 바라보았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손을 내릴 줄을 몰랐다.
강명균
나아진다는 말이 아득하고 막막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소설을 쓴다는 건 제게 나아가는 일 그 자체이지만 이 또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거든요. 다만 소설 한 편을 매달려서 쓰고 나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누군가를 발견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나와 닮아있음을 발견하는 게 작은 즐거움입니다.
2019/09/24
2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