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차를 타보았다면 한번쯤 보았을 거야. 늦가을 타작 끝나고 커다란 하얀 둥근 덩어리로 뒤덮인 논바닥. 뭘 모르는 사람 눈에는 참 신기한가 봐. 저게 뭐냐고, 스마트폰을 해봐도 잘 모르겠나 봐. 어떻게 해야 쟤들이 나오지?
   내가 가르쳐줄게.
   소를 오백 마리쯤 키우면 겨울이 없지. 이듬해 식량을 장만해야 하니까. 소는 사료만 먹는 게 아니야. 짚도 꼭 먹어야 해. 사료가 밥이라면 짚은 김치라는 말로는 부족해. 김치 포함 유일무이 반찬.
   짚을 헤집는 기계로 허처, 허처! 허치다, 표준어가 아녀. 우리 동네서 누구나 쓰는 사투리. ‘흩어지게 하다’라는 뜻이야. 기계 이름? 알 필요 없어. 외울 것도 아니잖아. 실은 나도 몰라. 나는 ‘허치게’라고 불러. 허치게로 뒤집을 때 발효제를 뿌리기도 해. 눈살 찌푸릴 것 없어. 그냥 조미료 같은 거야.
   짚 묶는 기계로 묶어, 묶어. 베일러인데 나는 ‘짚묶게’라고 불러. 둥글게, 둥글게. 한 뭉치는 5백 킬로그램. 상상이 안 가지. 나 같은 애 100명 욱여넣은 무게. 어미소 40마리가 하루 먹을 양. 소 오백 마리가 한 해 먹을 걸 가늠해봐. 저 거대한 뭉치가 몇 개나 필요할까. 계산 불가.
   비닐 묶는 기계로 감아, 감아. 나는 ‘비감게’라고 불러. 서른두 번이나 감는 까닭은 공기 완전 차단, 40도 유지. 그게 적정 보관 온도래.
   그는 타짜, 하루에 200개를 묶지. 새벽에 나가서 오밤중에 들어와. 비가 오면 논바닥, 짚이 마를 때까지 무기한 정지. 그 기계들이 비싸요. 1억짜리도 있어. 잘못 다뤄서 망가지면 수리비가 까마득. 혼자서 해내야 할 일. 게다가 그는 감투 대장. 감투 쓴 게 열 손가락 채우고도 남아. 한 달에 회의를 몇 번이나 나가는지. 회의만 하고 돌아오나? 꼭 술을 드시지. 술 안 마시는 날도 있지만, 기어이 회의 끝나고 들어와. 다 묶지도 못했으니 언제 운반할지는 기약 없어. 그래서 겨울 들판에 하얀 둥근 덩어리가 수놓아진 거야.
   “저 공룡알들 어쩔라고 그런댜?”
   “치울 겨, 걱정하지 마!”

   2
   농촌 최고의 신문은 조중동이 아니라 ‘농민신문’이야. 농협 조합원이면 준강제로 봐야 하거든. 그는 우리 동네 최초로 농민신문에 실렸어. 2003년 7월, 마흔네 살 때였지. 성명 석 자만 달랑 실린 거 아냐. 흑백사진 속의 그, 깔끔한 차림으로 소들에게 밥을 주네. 지금이나 그때나 말랐어. 뒤쪽에 머리를 바짝 쳐든, 아마도 사진기자를 바라보는 엇부르기(아직 큰 소가 되지 못한 수송아지)의 표정이 흥미롭네. 소에게도 표정이 있냐고? 당연하지. 우리 사람이랑 다르지 않아.
   농민신문에서 ‘한우 사랑 나라 사랑’이라는 기획으로 전국의 한우 농가를 찾아다녔지. 그는 여섯 번째로 소개된 인물이야. 소제목이 ‘임신우 사양 관리’였어. 기자는 ‘축사 천장에 환풍기를 설치해 (…) 쾌적한 축사 시설 환경관리도 돋보인다.’고 칭찬했어. 그때 그 기사를 그대로 소개하면 짜증날 거야. 너무 딱딱해. 하기는 사람 말을 그대로 옮기면 기사가 되겠나. 그가 원래 했던 말은 이랬어.
   “현재 축사는 세 개 동인데 다 합쳐서 350평쯤 돼요. 암소는 80여 마리 정도. 임신한 애들, 분만한 애들, 수정 가능한 애들, 비육소 등으로 나눠났죠. 당연히 컴퓨터로 관리하죠. 21세기인데. 한두 마리도 어떻게 수기로 헙니까. (…) 임신소는 일반 소랑 달러요. 사람이나 똑같다고요. 임신소도 세 동아리로 나눠요. 세력 센 녀석들, 세력 약한 녀석들, 중간 녀석들. 세력요? 힘세다고요. 임신한 유세로 종일 다른 소들을 들이받는 놈들이 있거든요. 여기 있는 애들은 점잖은 애들예요. 거기 가셨다간 기자님 취재 못 하셔. (…) 어미소로 쓸 수 없는 애들이 나와요. 수정액을 아무리 맞아도 임신이 잘 안 되는 녀석, 낳긴 낳는데 송아지 체중이 적게 나가서 새끼 꼬라지가 말이 아닌 녀석, 젖이 안 나와서 새끼를 굶기는 녀석, 미안하지만 이런 녀석들은 비육소로 쓸 수밖에 없어요. 고기소로 판다고요. (…) 저도 이제 소 키운 경력이 이십 년 넘잖아요. 저만의 기준이 생겼죠. 그 기준에 합격한 암소만 번식용 밑소로 씁니다. 암소의 평균 산차를 4~5산으로 유지하고 있죠. 네다섯 번 낳으면 낳을 만큼 난 겁니다. 쉬게 해줘야죠.”
   왜 사투리를 안 썼냐고? 기자 앞에서 사투리 안 쓰려고 애쓴 거 생각하면 지금도 오금이 저린대. 사실 자기가 뭔 말 했는지도 기자가 써 놓은 걸 보고 기억이 났대.

   3
   그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부터 60년대까지 삼동네가 알아주던 전설적인 일꾼. 부지런한 농사꾼으로 호가 난 이도 아버지 앞에서는 명함을 못 내밀었지. 아버지가 돌연 쓰러진 것은 예순 무렵. 말로만 듣던 중풍. 그가 중3 때. 형만큼은 아니었지만 공부 좀 했던 그는 공부 종 쳤지. 고등학교에 다니는 조건으로 농사일을 도맡았지. 학교에 있는 시간보다 논바닥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어. 마당 한구석 의자에 앉아 풍경 같던 아버지.
   군대 갈 때 얼마나 좋았던지. 방위로 떨어져서 지긋지긋한 집에서 출퇴근할까 봐 얼마나 떨었던지. 금강산 건너다뵈는 단장의 능선, 그곳이 얼마나 흡족했던지. 군대에서는 칭찬만 받고 살았어. 완전 군대 체질. 말뚝 박을까 심각히 번민.
   제대하고도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했네. 너도 나도 도시로 떠나던 때. 못 떠나면 머저리 소리 듣던 때. 없는 집 자식은 떠나기도 쉬웠지. 아버지 논 20마지기가 발목을 잡았네. 회복될 가망조차 없어진 아버지. 아버지가 가까스로 줄곧 읊조리던 소리.
   “따앙 파알믄 안 되이야.”
   집착하는 아버지를 무시하고 팔아서 형제끼리 나눠가질 수 있을까? 옛날처럼 머슴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품앗이는커녕 품을 사기도 어려워졌고, 호락질 아니면 불가능했어. 어머니는 가라고 했지만.
   “가라, 젊은 놈이 시골서 살다간 장가도 못 간다. 옛날처럼 탄광이라도 있다면 모르겄다. 뭐 해먹을 게 있어야, 있어보라고 붙잡지. 농사일 별거 있냐? 네 아버지 젊어서 공사판 다닐 때도 나 혼자 농사 졌다. 너 군대 있을 때도 내가 다 진 거 아니냐. 닷 마지기나 짓고 나머지는 다 도지 주고 있다만. 도지 농사는 농사 아니야? 아무리 농사꾼이 없더라도 도지로 짓겠다는 사람은 항시 있으니께 하나 걱정할 거 없다.”
   그는 마침내 결심했네. 큰 농사꾼이 돼보겠다고. 농촌에서도 대사업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이겠다고. 도지로 내놓았던 논을 거두어들였네. 최신 기계를 장만했네. 대출은 쉬웠어. 담보가 있잖아. 너도 나도 기계 가진 젊은 농사꾼에게 도지를 맡겼네. 떠나는 데 논은 남겨서 뭐하나. 팔려는 사람도 늘어났지. 그가 아니면 살 능력 되는 사람도 없었어. 그는 넙죽넙죽 샀어. 아버지를 닮아 땅 욕심이 있었나 봐. 현금이 없으면 대출을 해서라도 사고 봤어. 농협에서도 그에겐 무조건 대출. 담보가 짱짱했으니까.
   논농사로는 전망이 안 보였어. 우루과이 라운드 쌀 개방이 아니더라도 갑갑했어. 기계 할부값, 기름값, 농약값 다 제하고 50마지기 농사 져서 순수익으로 연봉 이천만 원도 안 된다니 말 다 한 거 아니겠어. 애들 대학이나 보내겠냐고.
   답을 소에게서 찾았지. 광천시장, 화성시장, 우시장 찾아다니며 송아지를 사 왔어. 3년 만에 50마리를 마련했지.
   소 키우는 보람, 재미 같은 거 맛볼 만하니까 아이엠에프가 닥쳤어. 천지사방에 망하는 사람이 속출, 돈 있는 사람도 민망해서 소고기 못 먹었지. 소가 팔릴 리가 있나. 그래도 소는 먹여야지. 사료 가게들이 망하기 시작했어. 아직 안 망한 가게들은 현물만 받았어. 현금이 아니면 쌀이라도 가져가야 사료를 줬지. 쌀가마를 싣고 가서 사료 포대랑 바꿔왔어. 다른 소는 몰라도 새끼 막 낳은 소한테는 사료고 짚이고 팍팍 줬는데 줄였어. 소보다 더 못 먹고 죽어간다는 북한 사람 소문 정말일까? 빼빼 말라가는 소들아, 미안해, 미안해.

   4
   농민신문에 났을 때로부터 4년 뒤, 이번엔 지역신문 기자가 그를 찾아왔어. ‘군대 다녀온 3년을 빼고는’ 고향을 지켜온 ‘토박이 농사꾼’. 우리 면 한우회 회장과 농업경영인협회 회장직을 겸임 중이었어. 기자는 찾을 사람을 찾은 거였지. 일주일에 한 번 나오는 주간지 같은 신문이었지만, 그 고장의 유일무이한 신문. 나름 대접받는 신문.
   그의 첫마디는 지금도 유명해.
   “축산 농가 문상 오셨슈?”
   신문에는 ‘오셨나요?’로 적혔지만. 사회·경제면에 실린 기사야. ‘젊고 경험 많은 축산인(47세)을 만나 한-미 FTA 타결에 대한 축산업 종사자로서의 속사정을 들었’대.
   “아이엠에프 때보다 더 어려워요. 아이엠에프 시절에도 희망을 잃지 않았는데 말예요. 한-미 FTA 타결 내용을 살펴보니 방법이 없어요. 신토불이고 국산애용이고 싼 거에는 못 당헙니다. 유예기간 15년? 15년 후엔 우리의 입맛까지도 싹 바뀔걸요. 생산원가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고 우리나라 축산업은 붕괴할 겁니다. (…) 총·칼로만 나라를 지키는 게 아니고 식량자원을 지키는 것도 애국이라 생각하고 살아왔어요. 근디 아닌가 봐요. 올 초에 기술센터 영농교육 사례 발표를 제가 했거든요. 제 주제에 뭐라고 다른 분들 앞에서 용기를 내자고 역설을 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없네유. 읎어.”
   “근데 제가 정말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어서 그러는데, 그렇게 어렵다면서 한미 에프티에이에도 불구하고, 축산 농가는 왜 늘어만 갈까요? ‘절대 농지에도 축사 건축을 허용하겠다’는 것도 축산하고 싶어 하는 농민이 늘어나니까 불가피하게 허용하는 거 아닌가요?”
   “몰라서 물어유? 논농사 지어서는 절대로 먹고살 수가 없으니까요. 당장은 축산이나 먹고살 수 있으니까. 큰일은 큰일예요. 논농사 줄으니 그 자체로 국가적 손해고, 수입 쇠고기 들어온다는 판에 축산 농가가 늘어나니 제 살 뜯어먹기로 다 같이 죽는 거죠.”
   “무슨 대책이 없을까요?”
   “뭐, 어떻게 되겠죠. 이제까지 그래왔듯. 이렇게 대책 없이 말해 놓으면 기자님이 쓰실 말이 없죠? 기자님 쓰실 말 좀 드려야지요. (…) ‘저인원 고효율을 위한 기계화 축산’이니 ‘호밀 같은 대체 사료 확보’니 말로만 하라고 할 게 아니라 확실한 지원책을 달라. 뭘 설치하라고 해서 설치하고, 무슨 기계를 사용하라고 해서 그 기계 사면, 몇 년 되지도 않아서 다른 뭐로 설치하라고 또 무슨 기계를 들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반복되는 재투자 비용도 상당하죠. 누가 뭐라 해도 국가안보의 기본은 농업임을 믿어유. 정부와 지자체에서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주는 수밖에 없죠. 축산농가가 망하면 지자체도 망하고 나라도 망하는 거니까. 일각에서 핸드폰이나 자동차를 수출한 대가로 농업쯤은 포기해도 된다고 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예요. 하루아침에 접었다 시작했다 할 수 있는 게 ‘농사’가 아니라고요…… 이 정도면 대충 됐죠? 전, 나라도 안 믿고 정부도 안 믿고 지자체도 안 믿습니다. 우리들만 믿습니다.”
   “우리들이라뇨?”
   “소 키우는 사람들 말입니다. 동병상련이니까.”
   기자는 말미에 기사가 딱딱하다보니 인상적으로 뵈는 문장을 덧붙였어.
   〈마침 수송아지가 태어났다.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축산업의 어두운 미래를 전망한 후여서인지 새롭게 태어난 송아지로는 그의 표정을 바꿀 수 없었다. (…) 1남 2녀라며, 막내가 7살이라고 말했다. “늦둥이 재롱이 너무 예뻐요. ‘이순신’을 본 후 이름을 이순신으로 바꿔 달라 하고, ‘주몽’을 보더니 활을 등에 메고 다닙니다.” 자녀 이야기에서야 ‘진짜’ 웃음을 보이는 축산인이었다.〉

   5
   기자 덕분에 재산 내역도 천하에 밝혀졌지. 이런 문장을 허락도 받지 않고 써버린 거야. ‘중학교 때 부친의 건강이 나빠져 본의 아닌 축산인의 길을 걷게 됐고 현재 (…) 한우 2백여 두와 논농사 1만5천 평을 부인(44)과 억척스레 일궈가고 있다’
   1만5천 평은 75마지기. 도시로 떠날 마음을 완전히 버리고 농사꾼으로 살겠다고 맹세했을 때 물려받은 아버지의 재산이 20마지기 한우 다섯 마리였어. 논이야 서너 배밖에 못 불렸지만, 소는 40배잖아. 이 정도면 자수성가까지는 아니더라도 자력 번창 정도는 되는 거 아냐. 근데 폄훼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그때 그는 우리 면 중학교 총동창회장이기도 했어.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감투 참 많이 쓰셨지. 동창회장 아무나 되는 게 아냐. 함부로 성질내는 사람은 절대로 못해. 그가 왜 술자리 끝까지 남아있는 줄 알아. 조율자거든. 자기 할 말 또박또박 다 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말도 잘 들어주거든. 웬만하면 화도 안 내고 진짜 웃음은 아닐지라도 가짜 웃음을 아끼지 않았어. 온화한 그도 참지 못하고 막 화를 낼 때가 있지. 아까 했던 말. 부모한테 물려받은 거 조금 불린 것뿐이라는 말 들을 때. 섭섭한 거야, 그는.
   그런 말하고 다니는 게 하필이면 우리 동네 사람들이라는 게 더욱 섭섭했던 거야. 그는 30대 초반에 이장을 맡았어. 말 안 듣는 노인네들 모시고 동네 발전시켜보려고 무진장 애를 썼지. 이장 자리를 그만뒀지만, 청년회 주역으로 마을에 헌신, 헌신, 또 헌신해왔어. 그가 없으면, 그가 안 나서면 되는 마을 일이 하나도 없었어. 젊은 사람 찾기가 제대로 된 국회의원 찾기보다 어려웠고, 소수 정예 젊은이 중에서도 일 처리가 가장 빠르고 가장 적확했거든. 돈도 엄청 썼다고. 소똥 냄새피우는 게 미안해서 추석, 설날 때 꼭 소고기 두어 근씩 끊어다 집집마다 돌렸고, 노인회건 부녀회건 놀러 간다고 하면 찬조를 아끼지 않았어. 내가 아는 정도가 이 정도인데 모르는 일은 얼마나 더 많겠어. 경조사도 남들 5만 원 할 때 10만 원 하고 남들 10만 원 할 때 20만 원 했어. 그러니 큰아들 장가갈 때 들어온 부조가 수억대였지.
   근데 듣기 좋은 말 놔두고 왜 꼭 그런 말을 하냐고.

   6
   그가 상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어.
   마흔셋 때는 우리 고장 교육 발전을 위해 노력해 온 5명의 학교 운영위원에 포함되어 표창을, 마흔네 살 때는 농업 경영인 가족 화합 전진 대회에서 축산협동조합장 표창을 받았지. 마흔아홉 살 때는 처음으로 개최된 우리 면민 화합 대회에서 ‘자랑스런 면민’으로 선정돼 표창을 받았고 상금 20만 원은 저소득층 위한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기탁했었지. 표창들은 받았다고 자랑스러워하기엔 한참 부족했지.
   우리 고장에는 시 차원에서 주는 농어업인 대상이 있어. 별의별 상이 다 있지만 고장에서는 최고의 상이지. 매년 거론만 되고 타지는 못하던 그가 마침내 수상자가 되었어.
   2011년 10월, 만 50세 때였지. 쌀 생산 및 원예 특작, 어업 부문, 과학 농어업, 축산 및 임업 중에 물론 한우 부문으로 받았지.
   그는 ‘버섯 한우 사육으로 한우 품질을 향상시키고 충남브랜드 토바우를 도입해 축협을 통한 계통출하로 유통비를 절감하는 등 과학적 축산기술 도입과 유통 선진화로 소득 증대에 기여하고 있다.’는 평이었어.
   토바우들이 언제부터 버섯까지 먹었지? 그건 나도 신문 보고 알았어.
   시장이 축사할 때 그랬어.
   “여러분 큰 바위 얼굴 얘기 아시죠? 우리가 어렸을 때 배웠습니다. 거기에 실린 얘기인데 (…) 여기 계신 분들이 바로 큰 바위 얼굴 아니겠습니까? 이분들이 진짜 우리 고장을, 우리 마을을 발전시켜온 분들입니다.”
   그때부터 우리 고장에 ‘큰 바위 얼굴’이란 말이 유행했어. 근데 좀 길잖아. 바위 떼고 얼굴은 한자 면으로 바꾸고 해서 큰면이 되었대. 그도 언제부턴가 ‘큰면’으로 불렸어.
   큰면 같은 사람을 정치꾼들이 그냥 놔둘 리가 없지. 지방선거 때마다 시의원 후보 물망에 오르지. 시장 두 번 되신 분도 그를 무던히 아꼈지. 어머니가 살아계시는 동안 말렸어. 어머니는 정치하겠다고 나섰다가 망한 사람을 너무 보아왔거든.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는, 후배한테 양보하는 형국이 되었고. 선거 때마다 바람이 불어와 그를 흔드네. 늘 그랬듯이 그는 바위처럼 이겨낼 거야.

   7
   2019년, 그의 이름이 신문에 꾸준히 올랐네. 일주일에 한 번 나오는 고장신문에는 읍면 소식란이 있어. 우리 면 소식에는 항상 그가 등장해. 우리 면 지역사회보장협의체(약칭 협체) 민간위원장이거든. 협체는 ‘통·리장과 새마을지도자, 주민자치위원, 복지기관 종사자, 자원봉사단체 회원 등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로 구성된’ 조직이야.
   1기 때도 주요 실무 일꾼이었지만, 2기 들어 ‘장’으로 총대를 메게 되었지. 칭호가 좀 길잖아. 우리 면에서는 싹 줄여서 ‘큰면장’이라고 불러.
   〈협의체 위원, 면 직원 등 14명이 함께 지역의 장애인, 독거노인 등 50가정을 방문해 쌀 10kg 25포, 라면 25박스 등 130만 원 상당의 위문품을 전달했다. 큰면장은 “어려운 이웃에게 겨울은 난방비까지 걱정해야 하는 계절”이라며, “이번 나눔이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훈훈하게 녹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우리 면의 출향인사 아무개 씨(어디어디 대표)는 (…) 지난 22일 고향 방문차 내려왔다가 지역에서 추진 중인 사회복지사업을 듣고 500만 원 성금을 쾌척했다. 아무개 씨는 “타지에서 어렵게 생활했지만, 현재는 여건이 좀 나아져 고향 생각이 많이 나 도울 수 있을 것이 무엇인가 고민하다가……”라며, “어려운 이웃들이 조금이나마 힘을 얻을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큰면장은 “이번에 전달받은 성금은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이웃을 위해 소중히 사용하겠다.”며, “앞으로도 면민과 출향인사, 민관협의체를 통해 작지만 큰 나눔이 실천되는 문화를……”라고 말했다.〉
   〈우리 면 출신 선후배(아무개 씨, 체육회장 큰면장, 면장 누구)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달라고 (…) 각 오백만 원씩 일천오백만 원의 성금을 쾌척했다. 큰면장은 “연합모금사업을 발판으로 금년에 여러 가지 사업을 실시하는데 더불어……”고 말했다.〉
   〈큰면장은 3월부터 관내 소외계층을 위한 지역특화사업으로 ‘찾아가는 행복 돌보미’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 독거 어르신 등을 위한 반찬 배달, 생신상 차려드리기, 목욕탕 이용 도와주기 등 4개 사업으로 구성돼 있으며, 첫 출발로 (…) 10가정을 방문. 밑반찬을 전달하고 안부를 확인했다.〉
   〈협체는 관내 저소득 어르신을 대상으로 면사무소 회의실에서 장수 사진 찍어드리기 행사를 개최했다. (…) 총 100명의 어르신을 대상으로 2차에 걸쳐 진행될 예정이다. 큰면장은 “…… 희망과 용기를 주는 훈훈한 면 만들기에 앞장서겠다.”고 했다.〉
   하도 큰면장으로 불리다 보니까 처음 듣는 사람은 그가 면장이거나 면장 했던 사람이거나 면장의 형이나 아버지인 줄 알아. 진짜 면장 같았으니까. 하기는 그야말로 진짜 면장이었지. 이장일 때도, 학부형위원장일 때도, 중학교 동창회장일 때도, 주민자치위원회 회원일 때도 감투가 있든 없든 그가 알짜배기였으니까. 그가 실무 일꾼이었으니까. 위원장 임기 끝나면 다시 ‘큰 바위 얼굴’로 돌아오겠지. 비공식 면장 노릇은 파파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피할 수 없을걸.

   8
   올겨울 큰면장은 또다시 동네 노인네들을 헐헐헐! 하게 만들었어. 아들을 위하여 절대 농지에 대형 최신식 축사 지어주는 거야 그럴 수 있지. 아들이 축산해보겠다는데, 가업을 계승하겠다는데 500마리 넘는 소 중에 절반쯤 나눠줄 수도 있지, 뭐가 문제야.
   그의 늦둥이 딸. 어렸을 때부터 유명했던 애지. 걔가 래퍼가 되고 싶어해. 시골 소녀라고 그런 꿈 못 꾸나? 시골 고2라고 서울 기획사 다니면서 오디션 못 보나? 큰면장이 그 딸애를 위해 작업실을 지어준 거야. 두 번째 축사 한 구석에. 방음벽까지 설치한. 아무리 크게 노래해도 소들도 안 놀라게 할. 귀 밝은 소들은 조금 놀랄지도 몰라.
   그 작업실에서 첫번째로 작업한 노래야. 그에게 바치는 노래야.
   미국 어느 시골 동네, 터무니없는 전설.
   앞산에 사람 얼굴 닮은 크나큰 바위.
   언젠가 큰 바위 얼굴 빼박은 인물이 찾아와,
   마을을 왕창 발전시킬 거라는 얘기.
   그 전설을 굳게 믿고 그 인물을 기다리던 아이.
   청년이 되고 중년이 되고 장년이 되어도
   그 인물은 오지 않았어. 오지 않았어.
   기다리다 늙어버린 그 사람.
   기다리다 토박이로 남아 동네 일 다한 사람.
   그가 없으면 동네가 굴러가지 않아.
   반장, 이장, 동창회장, 한우회장, 협체장……
   감투가 있든 없든 뭐든 앞장 일꾼.
   언제부턴가 면민들이 입을 모았어.
   당신이 바로 우리 동네 큰 바위 얼굴이라고.
   당신이 바로 우리 동네가 기다리던 사람이라고.

김종광

1998년 『문학동네』에 단편 소설로 데뷔.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당선. 신동엽창작상 수상. 소설집 『경찰서여, 안녕』 『모내기 블루스』 『낙서문학사』 『처음의 아해들』 『놀러 가자고요』 등 시골 소설을 꾸준히 써왔다. 농가 인구 5%의 농촌 사회를, 이 시대 농촌 사람들의 평전으로 기록하고 싶다.

2020/02/25
2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