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는 독일어지만 호프집은 한국어다



   꿈을 꾸니 이승훈 선생이 앉아 있었다 선생님 장례식에 가질 못해 죄송해요 군에 있느라 그랬어요 선생은 멸치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마른안주에는 멸치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군 선생의 장례식장은 선생이 주인이다 하지만 선생님 여기 과일도 드셔 보셔요

   그날도 선생은 멸치를 찾았다 어느 저녁 진흥아파트(선생님 사시던 곳) 단지 내의 호프집에서 선생은 맥주를 마셨다 시는 더 멀리 나가야 해 노인들은 나가는 게 무서운가 봐 선생은 개가 나오는 내 시 이야기를 했다 젊은 친구가 내가 쓸 것 같은 시를 썼어 그곳에도 멸치는 없었다

   인사동 어느 술집에도 멸치가 없었다 일행이던 신동옥 시인이 멸치를 사러 밖으로 나갔는데 한참을 돌아오지 않았다 이것은 이승훈 선생의 시 「모든 게 잘 되어 간다」에 적힌 일 나는 처음에는 그 시를 읽고도 거기서 말하는 동옥이 신동옥 시인을 가리키는 줄을 몰랐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내 착각이고 둘이 다른 인물이라는 경우도 있겠지

   그러나 여전히 꿈속이다 멸치도 없고 선생도 없고 선생의 장례식장에서 선생의 장례식장에 가지 못해 죄송하다 선생에게 거듭 사과하고 선생은 여전히 멸치를 찾고 있다 이런 일은 꿈속에서나 가능하다 아니면 시에서나 이 모든 일은 다 시에 적힌 일이다

   멸치도 없이 맥주를 다 마시고 선생은 흥이 나셨는지 강남역까지 배웅을 나왔다 괜찮아요 선생님 아무리 말해도 아냐 괜찮아 선생은 그 후로 며칠을 앓아누웠다고 한다 그게 선생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뵌 것이었고 이후로 다시는 뵙지 못했다





   밝은 방



   사실 나는 유령이 보인다 지금 네 옆에는 할머니의 유령이 서 있고 그 뒤로는 개의 유령이 떠다닌다

   그렇게 말하면 너는 믿을까

   사진사는 말한다 눈을 크게 뜨라고 하지만 나는 대답한다 이게 다 뜬 거예요

   눈을 다 뜨면 너무 많은 것들이 보이니까

   조금 전 묻고 온 아끼던 새가 거실을 날아다니고, 유령이 등에 업힌 줄도 모르는 친구와 만나고, 그곳에는 놀이터가 없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저기 멀리서 인사하는 것이
   사람인지 아닌지 알아보기란 항상 어렵고

   때로 네가 내게 말을 거는 때도 있다 자기가 유령인 줄도 모르고
   아직도 나를 사랑한다고 믿고 있다

   너를 데리러 온 천사들은 공중을 선회한다 잠시 눈을 감으면 모든 것이 사라지겠지

   하지만 눈을 감아도 사라지는 것은 없다

   사진사는 말한다 눈을 크게 뜨라고 하지만 나는 대답했지 더는 뜰 수 없어요

   죽은 새가
   네 입속에서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황인찬

‘밝은 방’은 롤랑 바르트의 책이기도 하지만, 이승훈 선생의 시이기도 합니다. 사진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는 케케묵은 것인데, 요새는 거기에 마음이 자주 갑니다. 사실 마음 같은 것보다는 손이 더 자주 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2020/05/26
3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