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내 방의 시간은 다른 곳과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아니, 멀리 갈 필요 없이 오늘 아침 내 방의 시간과도 다르게 흘러갔다.
   뜬금없이 내 방 침대 옆에 놓여 있는 냉장고를 무어라 해야 할까. 레트로 냉장고로 유명한 코스텔 제품으로 원 도어에 모서리가 동글동글한 새빨간 냉장고. 발칙하고 섹시한 빛깔의 소형 냉장고 위에는 토기 화분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내가 집을 잘못 찾아왔나. 아니면 내일부터 시작될 여름휴가를 시원하게 보내라고 산타클로스가 주고 간 선물인가. 땀에 젖은 채 퇴근하고 집으로 들어온 나는 문지방 위에 꼼짝 않고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고는 얼마 후 내 키보다 작은 저 냉장고를 어디서 봤더라 기억을 더듬으며 좁아진 방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COSTEL이란 이니셜 아래의 크롬 손잡이로 팔을 뻗으려는데 발에 무언가가 달라붙었다. 포스트잇이었다. 냉장고에 붙어 있던 것이 접착력 부족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허리를 수그려 슬리퍼 밑창에서 분홍색 포스트잇을 떼어내 뒤집었다.

   동하씨, 냉장고를 부탁해. 화분도. -세주

   세주라면 1년 전 헤어진 내 여자친구였다. 그러고 보니 세주와 헤어지고 현관문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포스트잇을 들여다봤다. 내가 아는 세주의 글씨체는 단정하고 반듯한데 옆으로 눕고 흘겨 써서 어떤 글자는 앞뒤 음소의 맥락으로 겨우 알아맞혔다. 쫓기듯 급하게 쓴 메모가 분명했다. 구체적인 상황 설명이나 더 남길 말이 있는데 하지 못하고 마무리 지은 것 같았다. ‘화분도’ 뒤에 쓰려다 만 자음 ‘ㅁ’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다 관둔 것일까. 차마 못한 것일까, 시간이 없어서 못한 것일까. ㅁ으로 시작하는 말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했다. ‘미안해’라고 하려고 했을까. ‘만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하고 싶었을까. ‘많이 당황스럽겠지만’이라고 시작하는 게 이 상황에 가장 맞는 말이겠지.
   냉장고 위에서 화분을 내렸다. 이제 막 싹을 틔워서 죽순 형태의 연한 새순이 흙을 뚫고 나와 있었다. 무슨 식물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잎사귀 형태가 뚜렷하게 자랐대도 무슨 식물인지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화분을 도로 올려두고 포스트잇을 냉장고에 붙였다. 떨어지려고 해서 엄지손가락으로 잠시 꾹 누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이 냉장고는 세주의 집에서 본 적이 있었다. 세주와 6개월을 사귀었고, 사귀는 동안 세주의 집에 가 본 건 한 번뿐이었다. 세주는 누추하다며 자신의 집에 초대하는 걸 꺼렸는데, 딱 한 번 나를 위해 그 문을 열어주었다. 중소기업 경리과에 취직한 지 세 달쯤 됐을 때 직원들 월급을 잘못 지급하는 큰 실수를 저질러서 징계위기에 놓인 적이 있었는데 그날 세주가 나를 위로해 준다며 단골 막창집으로 데려가 소주를 사주었다. 술자리는 새벽 2시까지 이어졌지만 불안한 마음은 사그라지지 않았고, 세주가 2차로 자신의 집에서 한 잔 더 하자고 해서 따라갔다. 6시까지 술을 마셨고, 세주는 낮에 콩나물 해장국까지 칼칼하게 끓여주었다.
   당시 저 냉장고에는 온갖 종류의 술이 잔뜩 들어 있었다. 아예 술 보관용으로 구매한 냉장고로 보였다. 근데 세주는 왜 술이 든 냉장고를 내 집에 두고 갔을까. 그것도 부엌에 두지 않고 안방에. 엄지손가락을 떼자 포스트잇은 도로 떨어져 버렸다. 땀에 흠뻑 젖은 나는 일단 샤워부터 하고 나와 맥주 한 캔을 마셔야겠다고 생각하고 욕실로 향했다. 내일부터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름휴가다.

   개운한 기분으로 창밖을 내다봤다. 그새 해가 져서 공기는 어두웠지만 어둡기에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밤은 낮에 꾹 감고 있던 창문들이 눈을 뜨는 시간. 노랗게 눈 뜬 창문들이 하나둘 늘어나면 누군가 저기 있구나 싶어서 괜히 그 눈들을 오래 쳐다보게 되었다. 그때 후덥지근한 바람이 훅 끼치자 목이 마르면서 차가운 것을 마시고 싶어졌다. 아, 맞다. 세주 냉장고!
   나는 안방으로 신나게 달려가 냉장고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런데 안을 들여다본 내 얼굴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저건 뭔가. 냉장고 안에는 내가 찾는 술은 한 병도 없고 엉뚱하게 책이 들어 있었다. 냉장고를 열어둔 채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안에서는 묵은 책 냄새가 계속 흘러나왔다. 급하게 휴대폰을 찾아 집어들었으나 세주의 휴대폰 번호는 삭제된 지 오래였다. 안다고 해도 전화를 받지 않을 것이고, 받을 거면 애초에 메모를 남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주는 왜 내 집에 몰래 들어와 냉장고를 두고 갔을까. 물건을 훔쳐가는 경우는 도둑이라고 하는데 두고 갈 때는 뭐라고 불러야 하나. 당황스러워서 샤워를 다시 해야 할 정도로 땀이 흘렀다. 술이라면 이해하고 받아들였을 텐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이라서 당황한 건 아니었다. 책이나 좀 읽고 살라는, 세주가 과격하고 무거운 방식으로 전하는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으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헤어진 지 1년이나 지났는데 왜 인제 와서 그런 말을 남기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갑자기 좁아진 방이 짜증났다. 나는 휴대폰을 다시 집어들어 세주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찾아서 들어갔다. 습관이 되어 헤어지고 나서도 며칠 방문한 적은 있지만 그 이후로 맞팔도 끊었다. 세주의 마지막 게시물은 일주일 전에 스타벅스에서 찍은 커피잔 사진이었다. 사진을 스크롤 하니 나와 사귈 때 올렸던 피드들도 삭제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나는 다 지웠는데. 이미 헤어진 사이에 함께했던 시간의 흔적을 안 지운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나는 세주와 가장 절친했던 친구의 계정으로 디엠을 보냈다.

   10분 후 세주의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세주가 집에 물건을 놓고 갔다고 하자 친구는 자기는 오늘 옷이 잔뜩 든 캐리어와 화분 하나가 아파트 현관문 앞에 놓여 있더라고 말했다. 화분과 화장품을 받았다는 친구도 있었고, 세탁기와 화분을 택배로 받은 사람도 있다고 말해주었다. 화분은 어디나 공통인 것 같았다.
   “혹시 안 좋은 일이 생긴 건 아니겠죠?”
   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걔가 원래 어디 가면 간다고 말 안 하는 애잖아요.”
   친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무 말 없이 훌쩍 사라지는 게 한두 번이냐는 뉘앙스였다. 하긴 나 또한 세주와 사귀는 동안 세주의 그런 행동 때문에 애를 많이 먹었고, 오해도 했으며, 싸우기도 했었다. 결국, 그것은 우리가 헤어진 이유가 되고 말았다. 나는 연인 사이가 되면 서로를 구속할 수밖에 없는 부분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주는 연애를 하더라도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이었다. 나는 그때, 자유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고 날 선 목소리로 비판했다. 이번 너의 행동은 자유가 아니라 제멋대로에 해당된다며 그럴 거면 속 편하게 혼자 살지 왜 복잡한 연애 같은 건 하느냐고 물었다. 그 말끝에 세주가 복잡한 연애 이쯤에서 끝내자 했고, 우리는 바로 그렇게 했다. 세주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헤어지고 났더니 나는 속이 편했다.
   “세주가 1년 전에 식물 상점 낸 건 아시죠?”
   친구가 물었다.
   “아니요.”
   세주가 식물을 좋아하는 건 알고 있지만 상점까지 낸 건 몰랐다. 1년 전이면 아마 나와 헤어지고 나서 상점을 낸 모양이었다.
   “가게를 내놓은 걸 보면 재정적인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도 싶고.”
   식물 상점을 닫게 되자 들여놓은 화분을 말라 죽게 할 수 없고, 돌봐 줄 사람도 없어서 지인들에게 맡긴 것일까. 화분이 주체고 그것에 딸려온 세주의 물건은 식물을 키워주는 수고와 시간에 대한 대가 같은 것일까. 세주가 지불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라 자기 물건을 떼어서 새 화분 주인에게 내주었을까. 그것을 ‘처분’이라고 표현해도 될까 잠시 고민했음에도 나는 친구한테 그 말을 곧바로 써버렸다. 그러자 친구는 식물을 처분해준 대가로 세주가 내 집에 두고 간 물건이 무엇인지 염탐하듯 물었다.
   “냉장고요.”
   나는 조금 망설이다 대답했다.
   “냉장고요?”
   “아니, 책이요. 아니 냉장고에 책이 들어 있었어요.”
   나는 세주의 메모를 다시 떠올렸다. 세주는 ‘냉장고를 부탁해’라고 했고, 그 뒤에 ‘화분도’라고 했다. 그러니까 메모에 따르면 주체는 냉장고이고 화분이 덤으로 딸려온 것이다. 그때 친구가 말했다.
   “지지배.”
   조금 언짢아하는 목소리에 나는 왜요? 라고 넌지시 물었다.
   “세주가 가장 아끼는 게 책이잖아요. 얼마 전에 책 정리한다고 난리법석이더니, 엑기스가 동하씨한테 갔네요.”
   친구는 나한테 밀린 것을 믿을 수 없어 하면서 세주에게는 섭섭해했다. 나는 다시 생각했다. 그렇다면 주체는 냉장고가 아니고 책인가. 책을 담기 위한 책꽂이 용도로 냉장고가 필요했고, 그 큰 걸 맡기려니 미안해서 아직은 새순에 불과한 화분을 애교로 슬쩍 끼워 넣은 것인가.
   나는 친구와 전화를 끊고 세주의 인스타그램에 다시 들어갔다. 책 정리하는 사진이 보름 전에 업로드되어 있었다. 필요한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을 분류하고, 그렇지 않은 책을 헌책방이나 폐지상에 내다 팔 거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는 냉장고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세주에게 필요한 책들이 양식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야채 칸과 도어 수납 칸에도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작은 도서관이나 서점 같은 인상을 주었으나 그 의미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없었다. 내 생각대로 단순히 처분인가.

   이번 여름휴가 계획은 딱 하나였다. 친구들과 바다가 예쁜 휴양지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징글징글했던 사람들과 더위를 피해 집에서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놓고 IPTV로 영화를 몰아쳐서 보는 것. 물론 휴대폰은 꺼놓고 배고프면 배달 앱으로 음식을 시켜 먹고 졸리면 실컷 자서 피둥피둥 살을 찌우는 것. 이렇게 찌운 살은 어차피 회사 업무에 며칠 시달리다보면 금세 빠질 것이므로 괜찮았다.
   그런데 계획이 조금 변경되었다. 나는 휴대폰을 끄고 냉장고 위 화분에 물을 흠뻑 준 뒤 볕이 하루 종일 드는 베란다에 내다 놓았다. 에어컨을 켜고 TV 리모컨 대신 냉장고 크롬 손잡이를 잡아당겨 책 한 권을 꺼냈다. 세주에게 필요한 책이란 어떤 것인지 궁금했고, 읽고 나에게 필요한 책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도로 넣어둘 것이다.
   책이란 걸 읽을 시간도 없이 살아왔고, 독서가 취미도 아니라서 과연 읽어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세주가 애정을 갖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인지 집중이 잘됐다. 한번 꺼낸 책은 중간에 덮고 도로 집어넣는 일은 없었다. 세주가 정성들여 연필로 그어놓은 밑줄을 따라가고, 다음에는 어떤 문장에 밑줄이 그어져 있을까 그 밑줄을 기다리며 읽다보니 페이지가 생각보다 쉽게 넘어갔다. 읽다가 배가 고프면 음식을 배달 시켜 먹었고, 졸음이 오면 잠깐 잤다가 살이 쪘다는 기분으로 일어나 마저 읽었다. 세주한테 필요한 문장은 나한테도 필요한 문장이었다.
   어느 순간 생각은 세주의 냉장고로 향했다. 세주는 단순히 책을 맡기려고 냉장고를 두고 간 것일까. 맡기면서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도 한 켠에 있었을까. 혹시 맡긴 게 아니라 나에게 아예 처분한 거라면. ‘부탁해’라고 하긴 했으나 준다고 하면 거부할까 봐 잠시 맡겨둔다는 의미의 표현을 썼다면. 자신한테 필요한 엑기스를 준 것은 나랑 다시 잘해보고 싶다는 뭐 그런 뜻일까. 진짜 순수하게 맡긴 거라면 헤어지고 났더니 나만큼 믿음 가는 남자도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아서 그 많은 사람을 제치고 내가 선택된 것인가. 그 답이란 게 이 책 속에 있는가. 아니 그보다 세주가 읽었던 책을 읽으면 세주에 대해 몰랐던 것을 알게 되거나 이해하게 될까.
   세주는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지만 되는 일이 없는 애였다. 취중에 왜 나만 사는 게 이렇게 힘드냐고 하소연도 했다. 맨정신에는 절대로 하지 않는 말이었다. 그래서 술을 좋아하는 건가 싶었다. 가족에 대해 들은 바는 없었다. 물어도 회피하기 바빴고, 가족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사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도움을 주어야 하는 입장도 아닌 것 같았다. 독립해서 산 지 꽤 오래되었다는 것만 알았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학습지 교사 생활을 10년 정도 했고, 나와 만났을 때는 학습지 교사를 관두고 카페에서 알바를 하며 다른 일을 찾고 있었다. 그 일이란 자기가 진짜 좋아하고 간절하게 하고 싶은 일이었을 것이다. 세주는 술과 책과 식물을 좋아했다. 그래서 낮에는 식물과 책을 팔고, 밤에는 간단한 술과 안주를 파는 가게를 내고 싶은 게 꿈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식물 상점을 냈다고 하니 꿈을 3분의 1 정도 이룬 셈이지만 안타깝게 이번에도 되는 일이 없어서 오래 하지 못하고 접은 모양이었다.
   비교적 얇은 소설책 세 권을 읽고, 틈틈이 세주 생각을 하는 사이 밤이 되어 있었다. 정리 과정을 거쳐서인지, 세주의 독서 취향과 맞아서인지 오늘 읽은 세 권 다 마음에 들었다. 모두 신선한 상상력과 싱싱한 문학성을 갖추고 있어서 독서의 맛과 실패 없는 독서 시간을 선사해 주었다. 남은 밤에는 치맥으로 독서의 피로를 풀었고 바깥에 둔 화분을 안으로 들여놓았다. 그러고는 턱을 괴고 앉아 그것을 조금 오래 쳐다보았다. 어제보다 얼마나 자랐는지 알 수 없었다. 행복한지도 알 길이 없었다.

   행복하지 않다는 걸 3일째 되는 날 알게 되었다. 물을 주려고 아침에 화분을 들여다봤더니 새순이 싱싱해 보이지 않고 노란빛을 띠고 있었다. 물도 많이 주고 햇볕도 잘 쬐어주었는데 왜 시들한지 알 수 없어서 가까운 꽃집으로 데려갔다.
   주인 여자는 새순을 꼼꼼하게 살핀 후 식물의 이름이 문샤인 산세베리아라고 알려주었다. 건조에 강한 반그늘 식물이라서 실내에서도 잘 자라고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강한 햇살은 오히려 잎에 상처를 입힐 수 있으므로 한여름의 직사광선은 피하는 게 좋다는 것이었다. 뿌리 부근의 잎이 노랗게 변하는 건 과습 증상이니 흙에 남은 물기 정도를 확인해 가며 물을 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내가 기른 방식은 다 잘못됐던 것이다.
   주인 여자는 문샤인이 어떤 모양과 빛깔로 자라는지 보여주려고 가게 안쪽으로 나를 안내했다. 특이한 모양의 큰 잎사귀가 작은 잎사귀를 둥그렇게 감싸 안으며 자라는 식물로 빛깔은 달빛처럼 은은한 녹색을 띠고 있었다. 선을 따라 색을 입혀 놓은 듯 이파리 테두리는 진한 녹색으로 둘려 있어서 상대적으로 은은한 초록빛이 무척 고급스럽게 빛나는 식물이었다.
   “일반 식물과 달리 밤에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배출해서 침실에 놓고 기르기 좋은 식물이에요.”
   그래서 세주가 화분을 안방 침대 옆에 두고 간 모양이었다.
   “드물게 아이보리빛 꽃이 피는 경우가 있는데 그 꽃을 보면 행운이 찾아온다고 해요. 꽃말은 관용이에요.”
   주인 여자는 그러면서 식물에게 필요한 건 흙과 물과 햇볕이 전부는 아니라고 말했다. 나는 화분 받침대를 하나 사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자 괜히 이 식물을 잘 기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우선은 잘 살려낸 뒤,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자라는 만큼 얘도 자라게 하고 싶었다. 얘가 자라는 모습으로 내가 보낸 시간의 길이와 넓이를 확인받고 싶었다. 나는 볕과 물을 조절해서 주고 밤에는 창가에 나란히 서서 노랗게 눈 뜬 창문들이 하나둘 늘어나는 걸 같이 지켜봤다.
   “넌 좋겠다. 흙에 뿌리를 잘 내리면 물과 햇볕만 있어도 살아지니까. 물은 내 돈이 들지만 햇볕은 무한 리필에 무한 공짜잖아. 물론 비가 오면 물도 공짜가 되지만. 아, 비나 오면 좋겠네.”
   뱉고 났더니, 첫 대화로는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 돈돈거려서.”
   나는 멋쩍어서 찬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오늘은 다른 밤과 달리 에어컨 없이 창문만 열어두었는데도 참을 수 있을 만큼 더웠다.
   “사람은 살아가려면 필요한 것들이 너무 많단다. 직업도 있어야 하고, 고기도 먹어야 하고, 가끔은 야식도 먹어야 돼. 여자도 필요…… 아니, 요즘은 꼭 그런 것도 아니야. 이성 없이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가 되어버렸거든. 혼자 살아도 필요한 것들은 많아. 혼자라 더 많은 것도 같아. 너처럼 단순하지 않지. 그 많은 걸 혼자 쓴다는 건, 솔직히 낭비야.”
   나는 창틀에 놓인 문샤인을 들여다봤다. 좀 자랐을까. 싱싱해졌을까. 주인 여자 말대로 사람의 말을 주었으니. 사람의 말도 영양분이 된다고 하니. 그러나 말도 적당해야겠지. 너무 수다를 떨거나 부정적인 말을 들으면 피곤해하겠지, 라는 생각이 들어서 입을 다물고 맥주를 다 마신 뒤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로 옮겨놓았다. 자려고 불을 끄고 누우니 숨 쉬는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내뱉은 숨을 마시고, 내가 들이마실 숨을 뱉어주는 존재. 세주가 생각났다. 관용.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냉장고와 화분을 맡기고 떠나버린 자신한테 관용을 베풀어달라는 것일까, 맡긴 물건을 관용으로 돌봐달라는 것일까. 아니면 나와 사귈 때 내게 가장 부족한 것이 관용이었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던 걸까. 자기 것을 다 맡기고 떠난 세주는 지금 어디를 걷고 있을까. 나는 화분 쪽으로 돌아누워 눈을 감았다.

   신기하게도 다음 날 아침,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내 말을 먹은 문샤인은 눈에 띄게 키가 자라 있었다. 그리고 초록빛으로 행복해 보였다. 숨을 쉬고 먹고 자라는 것들은 모두 말이 필요한 것이다.

   냉장고 속에는 다양한 분야의 책이 보관되어 있었다. 시집, 소설, 에세이, 미술, 철학, 과학 등등. 골라 읽는 재미가 있었고, 실용적이기도 했다. 먹을 것들이 잔뜩 든 냉장고처럼 어떤 책은 생크림 케이크처럼 달콤했고, 어떤 책은 청양고추처럼 날카롭게 매웠다. 보약처럼 쓰디쓴 책도 있었고, 갓 수확한 야채와 과일처럼 싱싱하기도 했으며, 느끼할 정도로 기름지기도 했다. 눈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슬픈 맛이 나는 책이 있는가 하면 얼음처럼 차가운 책도 있었고, 첫사랑처럼 두근대는 맛도 있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책이란 것도 음식일 수 있겠구나 싶었다. 눈으로 먹어서 머리와 가슴을 살찌우는 음식. 나는 두세 권의 책을 번갈아가며 읽기도 했는데, 어떤 책은 읽고 너무 좋아서 구매하고 싶은 욕구도 생겼다. 나중에는 모든 책이 욕심나서 세주가 잠시 맡긴 게 아니라 아예 준 것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주가 나중에 돌려달라고 하면 모른 척해야지, 라고 마음먹기도 했다. 허락도 없이 맡긴 물건이니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 아닐까. 이사를 가버려도 되는 거 아니겠는가.
   근데 세주는 책을 왜 굳이 냉장고에 담아서 맡겼을까. 일반 책꽂이에 꽂아서 줘도 충분하지 않은가. 지식이든 감성이든 지혜든 냉장고에 오래 보관해두듯 오랫동안 싱싱하게 가지고 있으라는 의미인가. 아무리 좋은 책을 읽었어도 읽고 얻은 걸 제때 사용하지 않거나 먹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것일까. 너무 오래 방치하면 썩어 없어지니 잘 보관해두고 있다 필요할 때 꺼내 쓰라는 메시지인가. 나는 책을 읽다 말고 냉장고를 열어 안을 들여다봤다. 플러그를 꽂지 않아 불이 들어오지 않는 냉장고는 냉기 없이 적막했다. 그래서 냉장고 문을 계속 열어두었다. 열어두니 그냥 평범한 책꽂이 같았다.
   나는 휴대폰을 켜서 세주의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세주에게 연락 온 게 있는지, 내막에 대해 아는 게 있는지, 그리고 세주가 물건을 맡기면서 남긴 메모가 있는지. 친구는 세주로부터 문자를 받았다고 했다. 내용은 ‘캐리어를 부탁해. 화분도.’였다고 했다. 메시지 또한 모두 같은 것 같았다. 각자 다르면 그 틈으로 세주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짐작해 볼 수도 있을 텐데. 친구는 세주가 물건을 잠깐 맡겨둔 것이 아니라 아예 준 거라 믿고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평소 자신이 예쁘다며 욕심냈던 옷들이 캐리어 안에 전부 들어 있었다며 요즘 한 벌씩 꺼내 회사에 입고 출근한다고 했다. 세주는 그 사람에게 가장 필요해 보이는 물건을 준 것일까. 그렇다면 나한테는 책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인데, 내가 책과 담쌓고 살기는 했지. 친구는 화분을 잘 기르고 있다고도 말했다. 친구가 받은 화분은 역시나 반그늘 식물로 마란타라는 이름의 식물이었다. 찾아보니 꽃말은 우정이었다.
   세주에게는 꿈이 하나 더 있었는데, 세계 일주였다. 마흔이 되기 전에 돈을 많이 벌어서 세계 여행을 떠나는 것. 세주에게 세계 일주의 꿈을 심어준 사람은 할아버지였다. 가족에 관한 얘기를 일절 하지 않던 세주가 할아버지를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이름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는 손녀딸이 세계 일주를 하는 용감한 사람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세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주는 많은 사람들이 세계의 끝이라고 말하는 곳이든, 가고 가고 가봤더니 이곳이 끝인 것 같다고 느껴지는 곳이든 그 끝에 닿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세계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곳을 보고 온 사람의 눈빛은 어떤 빛깔일까, 말을 할 때는 어떤 음색으로 떨릴까를 상상했다. 그런 사람이 옆에 있다면 그 끝에 조금이라도 물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세주의 이름을 여러 번 불러봤다. 세주, 세주, 세주. 그러자 세계 일주를 한 듯한 기분이 들면서 숨이 가빠왔다.
   세주는 세계 여행을 떠나도 될 만큼 돈을 많이 모았을까. 이곳에 없는 동안 집세를 내지 않으려고 물건들을 지인들한테 골고루 맡기고 나눈 것인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그런 거면 좋겠다. 진짜 먼 곳으로 떠난 게 아니라면. 그동안 신세 졌거나 고마운 사람들에게 유산처럼 남긴 것이 아니라면.
   책을 정리하는 건 무슨 의미가 담긴 행동일까를 생각했다. 인생의 일부를 정리한다는 의미일까. 필요 없는 것들을 버리거나 잊고 새 출발 한다는 의미일까. 무슨 일이 있으면, 어떤 마음이 생기면 필요한 게 아무것도 없는 인생이 될까. 그걸 알고 싶어서 세주가 읽었던 책을 세심한 마음으로 읽어나갔다. 읽으면서 막연하게 든 생각은 세주가 삶을 좀 더 단순하게 보려고 한다는 점과 나아가 더이상 삶에 끌려다니지 않으려고 노력했을 거라는 것이었다. 책들이, 페이지 속 밑줄 그어진 문장들이 가리키는 방향의 의미가 그런 것 같았다. 크게 뭉뚱그려 말하면 인생무상 같은 것인데, 인생무상을 통해 깨달은 바가 비극적인 단념인지 부드러운 포용인지는 아직 알기 어려웠다.

   여름휴가는 달팽이처럼 느린 듯 일개미처럼 부지런하게 흘러갔다. 나 또한 느린 듯 부지런하게 세주의 책을 읽었다. 냉장고는 닫아두면 꼭 세주가 빨간 원피스를 입고 내 방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책이란 게 그 사람의 영혼을 이루는 한 성분이라면 냉장고는 세주라고 볼 수 있었다. 세주 영혼의 엑기스가 저 안에 모두 들어 있는 거니까. 술을 보관했던 곳이라 그런지 어떤 책은 읽으면 술맛이 났고, 다 읽고 났을 때는 취한 것처럼 얼굴이 냉장고 색으로 달아올랐다.
   와인 맛이 나는 에세이집을 읽다 페이지를 넘기는데 갈피에 끼워져 있던 사진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래되어 주름이 져 있는 필름 사진이었고, 찢었다가 풀로 다시 붙인 흔적이 있었다. 세주가 초등학교 때 찍은 가족사진으로 보였다. 고깔모자를 쓴 세주가 10개의 촛불이 켜진 생일 케이크 앞에 앉아 카메라를 응시하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양쪽으로 엄마와 아빠, 언니와 오빠가 앉아서 축하해주는 장면이었다. 한때겠지만 부유하고 행복해 보였다. 세주로부터 듣지 못한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책장 사이에서 빠져나와 조용히 들려주는 것 같았다. 어떤 추억은 버릴 수 없는 게 있다. 버렸어도 다시 찾고 싶은 기억이 있다. 사진 뒤에는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세주는 돌아가고 싶었거나 기억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이 가장 예뻤던 때를. 어떤 마음이 사진을 찢게 하고 어떤 마음이 사진을 다시 붙이게 했는지 궁금했지만 왠지 알 것도 같았다.
   나는 책을 내려놓고 세주의 인스타그램에 들어갔다. 그때는 몰랐는데 세주의 얼굴이 나온 사진은 한 장도 없었다. 신체 일부라고 한다면 어쩌다 손이 찍힌 사진만 있었다. 세주는 자신의 가장 예뻤던 이후로 더는 예쁘지 않다고 여겨서 얼굴이 나온 사진은 찍어본 적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나와 사귈 때도 얼굴은 찍지 않고 소매나 옷에 달린 단추, 신발 그런 걸 찍어서 SNS에 올렸다. 얼굴이 없기에 헤어진 후에도 나와 같이 찍은 사진을 지우지 않고 남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추억이나 기억을 찢어버리는 일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으려고, 얼굴을 찍지 않는 편을 택한 것이다. 그것이 세주가 사람과 추억을 버리지 않고 보관하는 하나의 방법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주가 세계의 끝을 찾아가는 길이라면 그 끝에서 찾아오고 싶은 것은 자기 얼굴이 아닐까. 예쁜 얼굴이 아니라 끝을 본 눈과 끝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얼굴.
   나는 와인 맛 에세이집을 집어넣고 냉장고를 닫았다. 냉장고 오른쪽에 테이프로 붙여놓은 포스트잇이 보였다.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에 포스트잇 아래쪽이 들썩일 때마다 세주의 분홍빛 심장이 뛰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딘가를 향해 열심히 걷고 있다면 세주의 심장도 저렇게 뛰고 있겠지. 그때 두근대는 심장 위에 흘겨 쓴 ‘냉장고를 부탁해’가 ‘내 증거를 부탁해’로 읽혔다.

   문샤인이 내 곁에 있는 밤. 창밖으로 보이는 달빛이 고요하게 내 방으로 비쳐들었다. 문샤인은 햇볕이 아니라 달빛을 먹고 은은한 깊이로 자라는 녀석 같았다. 어쩌면 달빛 아래서 내가 건네는 은은한 말이거나.
   “네 주인은 언제쯤 돌아올까?”
   일주일 동안 문샤인은 씩씩하게 잘 자랐고, 냉장고 때문에 좁아진 방도 익숙해졌다. 오늘은 시집을 두 권 읽었다. 나 또한 일주일 동안 냉장고 속 책을 꺼내 읽으며 잘 자랐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일주일 동안 세주와 연애를 했다는 기분도 들었다. 세주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있는지, 남다르게 이해하게 된 것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있어도 그게 세주라고 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세주가 지나갔던 시간의 일부를 나 또한 지나갔다는 것이었다. 냉장고가 내 방에 오래 머무는 한 지나갈 수 있는 세주의 시간이 더 많이 남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주가 조금 그리워지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네가 꽃을 피울 즈음에 행운처럼 세주가 찾아올까?”
   나는 어제보다 차오른 달을 보며 말했다.
   “찾아와서 돌려달라고 하면 줄 수 있을까?”
   문샤인의 대답이 달빛을 타고 은은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내 여자친구, 아니 전 여자친구인 세주의 냉장고와 책과 화분이 함께 했던 여름휴가의 마지막 밤이 고고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장은진

어디를 걷든 어디쯤 걷든 방향은 1, 결과 혹은 결론은 10.

2020/05/26
3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