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슬



   의자를 옮기고자 합니다 먼저 의자를 만들어야 합니다 목재를 구하는 일부터 차근차근 시작하면 좋겠지만 따분한 차례가 될 겁니다 테이블 위에 컵이 있듯이 이 집에 의자가 있습니다 제가 사용하던 의자입니다 지금은 다른 사람이 앉아 있네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나경이라 부릅니다 ‘나경이’라고 세 음절을 부드럽게 발음해도 좋습니다 나경아 그거 내가 매일 사용하는 의자야 나경이는 물 채운 컵과 같이 과묵합니다 그렇지만 컵에 든 물을 마시면 컵에서 물이 사라지는 것과 같이 나경이는 제 말을 알아듣습니다 제 표정을 살피기도 합니다 의자를 점하고자 합니다 나경이를 살피면서 나경이가 일어서는 걸 기다려야 합니다 앉아 있는 나경이가 고민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만 관심 밖의 일입니다 목재와 같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켜본바, 적어보자면

   나경이는 의자에 앉아 밥도 먹고 책도 보고 가끔 휘파람도 붑니다 나경이는 마른 컵과 같이 조용할 따름입니다 나경이가 잠들기라도 하면 곤란할 수도 있습니다만 나경이는 깨어 있고 나경이만 지우면 의자를 옮기는 건 수월한 일입니다 나경이를 부르고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면 됩니다 제가 권태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언제부터인지 다리가 아팠습니다 의자에 앉아 밥도 먹고 책도 보고 이따금씩 턱을 괴는 나경이를 줄곧 바라보고 있었거든요 가볍게 주먹을 쥐고 허벅지를 툭툭 두들겼습니다 창밖에선 새가 돌아다닙니다 새가 울 때는 다리가 시원해집니다 왜 그럴까요 감감히 떠올려 보았습니다 잠시 저를 내려놓고, 생각해보면

   나경이를 옮길 기회가 있었습니다 나경이는 잠도 안 자고 저만 혼자 잠들 때도 있었습니다 고개가 푹푹 떨어진 다음에는 꿈에서도 봤어요 나경이가 앉아서 꼬박꼬박 밥 먹고 노래 부르고 공부도 한다고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의자를 옮기고 싶다고 의자를 옮겨야 한다고 타이르기도 했습니다 나경이가 스스로 일어나면 좋겠지만 나경이는 물끄러미 창가를 바라보듯 제 얼굴을 바라봅니다 나경이에게는 아직 시간이 필요한가 봅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방향을 틀어서 의자를 새로 가져오고자 합니다 그리고 나경이와 마주 앉아서 이제부터는 나경이와 밥도 먹고 공부도 하고 영화도 보면서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나경이가 저를 뭐라고 부를지 궁금합니다 무엇보다 지금부터는 의자를 소중히 다뤄야 합니다





   리듬 잔치에서 네가



   리듬 잔치에서 모두가 리듬 팔찌를 차고 흰 칸에서 검은 칸으로 원 투 쓰리 차차 룸바 자이브 왈츠 리듬이 리듬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잔치에서 네가

   자기만의 리듬을 잊어버리고 혼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흰 칸이나 검은 칸에서 바닥에서 리듬이 세모 별 네모로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리듬 처음 본 리듬 들이 들어서 익히 알법한 리듬끼리 뭉쳐 다니면서 쳐다보았다 리듬은 박자도 못 맞추고 안 그래도 뻣뻣한 리듬에게 더 심각하게 굳어가는 리듬이

   쓸모없고 딱하기도 해라 리듬 잔치에서 리듬이나 껴입고 리듬을 쓸어넘기고
   리듬을 하얀 플라스틱 칼로 자르고
   리듬이 풍선을 부는데 결국에는 리듬이 빵 터져서 깜짝 놀라는 잔치에서

   나는 너에게 리듬을 묻혀 주었다

   가벼워진 너는 이제부터 리듬에 알맞은 차림과 잔치를 갖추고 비슷한 태도를 따라 한다 리듬의 모습이 되어간다 우리가 마시거나 우리가 어긋날 수 있는 리듬으로

   차차 리듬이
   리듬 사이를 어색하게 비집고 들어간다

   어제도 그랬는데
   어제도 여기 리듬이 있었는데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는데

   거짓말 같은 건 관두고 태연하게 리듬이나 조립하면서 리듬을 분지르고 리듬의 볼록한 부분을 리듬의 오목한 부분에 끼워 맞추면서

   리듬이 된 간판과 리듬으로 길어지는 건물과 리듬 말고는 딱히 살 게 없는 인물이 나오는 원고로 책을 묶고 있었다

   이제 같은 색깔끼리

   리듬을 책장에 꽂아두고 가끔 리듬이나 펼쳐보자 뭐부터 읽을지는 나중에 정하고 리듬이 진짜 책이 되기 전에 두 번이 없는 리듬 잔치로

   리듬이나 칠하고 나갈까? 나갈래?
   그렇게 말하는데

   리듬 잔치에서 네가 리듬을 어기고 있었고
   지치지 않는 리듬이 밀가루 반죽을 꼼꼼하게 섞고 있었다 잔치를 휘두르고
   바를 곳을 찾고 있었다

김동균

의자에 앉아 밥도 먹고 책도 보고 이따금씩 턱도 굅니다. 꽃도 새도 여전하지만 늘 바라볼 순 없습니다. 어디선가 어떤 사람은 의자도 없고 꽃도 새도 없이 지내고 있을 겁니다. 가끔은 하던 일을 나중으로 미루고 의자에 앉아 시를 씁니다.

2020/11/24
3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