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우산의 내력
그런 날이 있다.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는 날. 눈도 다 뜨지 못한 채로 알람을 끄고 나서 몸을 일으키는 대신 그대로 돌아눕고야 마는 날이. 그런 날엔 꼬리를 물 듯 줄줄이 해서는 안 되는 결정들이 이어졌다. 이미 회사에 도착해 사원증을 출퇴근기록기에 가져다 댔어야 할 시각에 눈을 떴다면, 긴 머리를 감고 말리는 것보다는 질끈 묶어야 할 것이다. 그 회사가 서울에서도 강남 테헤란로에 있다면, 택시를 잡는 것보단 지하철역을 향해 뛰어야 한다. 당연히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고, 치마보다는 바지를 입고. 그랬어야 한다는 걸 같은 신호등을 통과하지 못하고 세 번째 정지신호에 걸려 정차한 택시 안에서 올이 나간 스타킹을 바라보면서 깨닫는 일 같은 건, 없어야 한다. 그래야 한다는 걸 누가 모를까.
그러니 지금 채 말리지 못한 축축한 머리카락으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지우를 이해해야 한다고 희진은 생각한다. 알았겠지. 알면서도 어쩌다 보니,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이렇게 되어버린 거겠지.
“지우씨, 회의 준비는 다 했어?”
“그럼요, 대리님! 제가 그건 어제 퇴근하기 전에 다……”
자신만만하던 지우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희진은 알고 있다. 지우가 어제 퇴근하기 전, 정확히 말하면 자정이 지나 오늘 새벽에 퇴근하기 전까지 회의 자료를 출력하다가 사무실 프린터가 ‘잉크 부족’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멈춰버렸다는 사실을. 비품실에서 여분의 잉크 카트리지를 찾다가 실패하고 주변의 24시간 출력소를 검색했지만 그조차도 찾지 못했다는 걸.
지우는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우선은 퇴근을 하기로 했다. 출근 전에 어디든 일찍 문을 여는 출력소를 찾아 출력을 해야지, 아니면 잉크 카트리지를 구매하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새벽까지 운행하는 심야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다. 첫차와 별 차이도 나지 않는 시각에 도로를 달리는 심야 버스에는 생각보다 승객이 많아 자리에 앉지 못하고 손잡이를 잡고 서서 가야만 했다. 당장이라도 침대에 쓰러지고 싶을 정도로 피곤했지만 출근할 때 입을 옷을 미리 골라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고, 세수를 하고 난 뒤엔 로션까지 꼼꼼하게 챙겨 바른 다음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알람을 맞추고 잠들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눈도 다 뜨지 못한 채로 알람을 끄고 나서 몸을 일으키는 대신 그대로 돌아누웠고, 이미 사무실에 도착했어야 하는 시각에야 불현듯 불길한 기운을 느끼며 벌떡 일어났고, 머리를 말릴 시간이 부족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샤워기를 정수리에 가져다 대고 물을 틀었고……
그러니까, 회의 자료는 출력해야 하는 열다섯 부 중에서 다섯 부와 4분의 1부만이 출력된 상태였다. 그나마 다섯 부도 제본이 되어있지 않은 채로, 지우의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지우씨! 울지 마!”
희진은 기합이라도 넣는 것처럼 말하며 지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지우가 금세 흘러내릴 듯이 차오른 눈물을 다시 몸속으로 집어넣으려는 듯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고 제자리에서 동동동 발을 굴렀다. 그건 참 귀엽고도 한숨이 나오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희진은 일단 한숨을 한 번 쉬고, 이 안쓰러운 인턴사원에게 필요한 것을 주기로 했다.
“울지 않아도 돼. 회의가 두 시에서 다섯 시로 미뤄졌어. 그리고 내가 오전에 관리실에 얘기해서 점심때 잉크 카트리지 교환하는 분이 오실 거야. 그러니까……”
“대리님!”
으앙, 하고 아이처럼 얼굴을 찡그리며 지우가 희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지구로 돌진하는 혜성을 막아낸 슈퍼히어로를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그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희진은 생각했다.
제법 규모가 있는 광고 대행사인 레너드 에이전시는 빌딩 다섯 개 층에 자리 잡고 있었고 덕분에 팀별로 개별 사무실을 썼다. 희진과 지우가 속한 기획 6팀은 팀장을 포함해 여덟 명이었는데, 연차 휴가를 쓴 한 명을 뺀 나머지 팀원들은 모두 경쟁 PT가 있어 자리를 비웠다. 예상했던 것보다 PT가 길어질 예정이라 두 시에 잡혀있던 회의가 다섯 시로 미뤄진 것이다. 회의 준비는 팀의 막내가 하는 것이 기획 6팀의 관례였고, 희진도 막내 시절 하던 일이었다. 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길길이 날뛰는 팀장이 지우에게 외모부터 학력까지 고루고루 차별적인 폭언을 하지 않게 된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게다가 지우는 곧 인턴 기간이 끝나고 팀원들의 평가를 통해 정규직 전환이 되느냐 그대로 계약종료로 퇴사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었다.
“대리님! 제가 이 은혜를 어떻게 갚죠? 어떻게 해야 하죠? 제가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 뭘 드시고 싶으세요? 네?”
숨도 쉬지 않고 말하는 지우에게 희진은 진정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일단, 우리 커피나 한잔할까? 내가 살게. 나 기프티콘 많아.”
수요일 오전 열한 시의 테헤란로. 초겨울의 공기는 차갑고도 맑았고, 도로 양편으로 늘어선 고층빌딩들의 유리창이 은빛으로 반짝였다. 희진은 이 거리의 커다란 보도블록을 밟으며 걷는 것이 좋았다. 게다가 목에는 사원증을 걸고, 자신을 상사로 대하는 사람과 함께, 업무시간에 사무실을 나와 스타벅스에 간다는 사실이 희진의 마음을 충만하게 했다.
“난 아이스 바닐라 라떼. 지우씨는 뭐 마실래?”
“저는 토피넛 팝콘 트리 프라푸치노 그란데요!”
“뭐?”
예상치 못한 긴 이름에 희진은 저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그리고 지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메뉴 이름을 다시 한번 말하고, 그란데, 라고 사이즈도 정확하게 짚은 다음, 손가락을 뻗어 가리킨 곳을 보았다. 크리스마스 시즌 음료 안내판이었다. 토피넛 라떼를 얼음과 함께 갈아낸 프라푸치노 위에 풍성한 휘핑크림이 올라가 있고 알록달록한 캐러멜 팝콘이 장식되어 있었다.
“저는 시즌 음료는 꼭 마셔보거든요.”
“그렇구나.”
벌써 크리스마스 시즌이네요, 대리님은 크리스마스에 선약 있으세요? 이런 걸 여쭤보는 건 아무래도 실례겠죠? 저는 크리스마스에는 매년 초등학교 동창들이랑 모여서 파티를 했는데, 올해는 결혼한 친구도 있어서 어려울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대리님은 항상 아이스 음료를 드시네요, 저도 얼어 죽더라도 아이스 마시는 파거든요…… 종알종알 떠드는 지우에게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다가 이제는 정말 버틸 수 없다 싶을 때쯤 희진이 주문할 차례가 됐다. 희진은 반드시 아이스 음료를 마시는 편은 아니었고, 막상 얼음이 든 컵을 들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을 걸을 생각을 하니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 같기도 해서 뜨거운 바닐라 라떼와 지우의 음료를 주문했다.
“죄송하지만, 토피넛 팝콘 트리 프라푸치노는 오늘 주문이 마감되었습니다. 팝콘이 다 떨어져서요. 혹시 팝콘 빼고 주문하시면 가능하신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희진이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지우가 다급하게 말했다.
“팝콘이 없으면 토피넛 팝콘 트리 프라푸치노가 아닌데요!”
그리고 잠깐의 정적.
희진은 지우가 음료 주문을 바꿀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았다.
“주문 취소할게요.”
희진은 풀죽은 지우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다른 스타벅스 가보자.”
테헤란로엔 한 블록에 하나씩은 스타벅스가 있었다. 어떤 블록에는 모퉁이마다 네 곳의 스타벅스가 있기도 했다. 그 점도 희진이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였다. 무엇이든 부족하기보다는 넘쳐흐를 정도로 과하기로 결정한 이 거리의 풍요로운 얼굴이 희진은 마음에 들었다. 물러설 데 없는 절박한 선택지란 없는 곳. 여기가 아니면 저기로 가자고 할 수 있는 곳. 뭐든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곳. 이왕 이렇게 된 거 테이크 아웃을 해서 사무실로 돌아가는 대신 잠깐 앉아서 마시고 그대로 점심 식사까지 하고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까짓거, 크리스마스 음료, 먹게 해준다.
희진과 지우는 세 번째로 들른 스타벅스에서 토피넛 팝콘 트리 프라푸치노를 주문할 수 있었다. 음료가 나오자 지우는 빨대를 꽂기 전에 다섯 장, 빨대를 꽂고 나서 세 장의 사진을 찍었다. 희진이 음료를 들고 있는 모습을 찍어줄까 물었더니 사양하지 않고 단박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리님은 이 회사에서 얼마나 일하셨어요?”
“오 년.”
“와, 오 년이나 같은 회사를 다니면 기분이 어떠세요? 전 초등학교 때 이후로는 같은 곳을 그렇게 길게 오간 적이 없어서.”
“좋아. 나쁘지 않아.”
“너무 멋져요. 정말 어른 같다고 할까. 저도 대리님처럼 될 수 있겠죠?”
지우는 정말 순수한 감탄으로 희진을 바라보았다. 나쁘지 않았다. 이런 시선을 받는 것. 좋다고도 할 수 있지. 아니, 좋다. 분명하게 좋다. 희진이 공채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주임을 거쳐 대리가 되는 동안 희진과 함께한 인턴, 사원, 주임들이 여럿 있었지만 지우처럼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기분이다. 지우씨, 내가 점심도 살게. 뭐 먹을래?”
“미돌초밥이요!”
그 가게에 가려면 다시 회사 앞을 지나쳐 한참을 더 걸어가야 한다는 걸, 알고 하는 말이겠지? 어느새 열두 시가 다 되어 있었다. 그래, 이왕 가는 거 줄 생기기 전에 가자. 거기가 맛있긴 하잖아.
“그래, 가자.”
“앗, 잠시만요!”
지우가 컵 바닥에 남은 음료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빨대로 빨아들이는 동안 열두 시가 지나고 말았고, 걸음을 부지런히 재촉했지만 미돌초밥 앞엔 긴 줄이 생겨 있었다. 점심시간에만 판매하는 특선세트가 가격에 비해 푸짐한 구성으로 인기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가게 안의 테이블 수를 생각했을 때 꽤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처럼, 지우는 서비스로 제공되는 튀김을 새우와 야채 중에 무엇으로 고를까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 골똘한 얼굴 위로 서서히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오늘 비가 온다고 했었나?”
“안 되는데…… 우산 없는데…… 아, 맞다. 대리님 혹시 그 우산 아세요?”
“그 우산?”
“오늘 택시 기사님이 어쩐 일인지 건물 뒤쪽으로 내려주셔서 후문으로 들어왔는데, 흡연 구역 쪽에 옆 건물 사이 있잖아요. 지나다닐 수는 없는 거기에……”
“초록색 우산 말이지. 맥주 회사 로고 찍힌.”
“어? 대리님도 아시네요?”
알다마다. 희진은 그 우산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희진은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한 첫 번째 회사에서 담배를 배웠다. 을지로에 있는 오래된 저층 빌딩 꼭대기 층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사수들은 틈만 나면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피웠다. 광고 전단과 현수막을 만드는 회사였고, 인쇄도 겸하느라 사무실의 가장 넓은 자리를 중형 자동차만한 인쇄기가 차지한 채 하루 종일 돌아가고 있었다. 잠깐이라도 그 소음과 진동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흡연자 무리에 끼어 옥상에 올라가는 것뿐이었다. 그 회사에서는 딱 1년만 채우고 퇴직금을 받아서 나왔다. 재취업을 위해 이력서를 쓰려고 책상 앞에 앉기만 하면 윙윙, 철컥, 윙윙, 철컥, 환청이 들렸다. 그 핑계로 실업급여를 받으며 3개월을 쉬었다.
두 번째 회사는 구로디지털단지에 있었다. 기업의 사보를 만드는 회사였다. 희진은 개천에서 난 용,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을 바짝 차릴 범재, 하룻밤에 산도 옮길 천하의 장사들을 만났다. 자수성가 이야기들은 디테일만 다를 뿐 대부분 비슷비슷한 줄기를 갖고 있어서 어떨 때는 이전에 쓴 인터뷰를 그대로 복사한 뒤에 단어 몇 개만 바꾸면 될 때도 있었다. 아무것도 편집하지는 않지만 편집장이라고 불리는 상사 한 명과 기자라는 직함을 달고서 별다른 취재는 하지 않는 희진, 둘이서만 일했으므로 아주 고요하고 지루했다. 그곳에 2년을 있었다. 여러 회사들의 구내식당 음식 맛을 비교하는 것이 소소한 재미였고, 잠들기 전이 괴로운 나날이었다. 희진은 자신이 야망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어제보다 나아진 내일을 원한다고, 그러기 위해서 오늘의 슬픔이나 아픔도 버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직서는 싱겁게 수리되었고, 바로 그날 밤에 레너드 에이전시의 신입사원 공채에 이력서를 보냈다. 첫 번째 회사의 이름도 두 번째 회사의 이름도 쓰지 않았다.
희진의 사수였던 양민지 주임은 희진 보다 두 살이 어렸고, 지금은 회사의 에이스라고 할 수 있는 기획 1팀으로 옮겨 과장 직함을 달고 있을 정도로 실력이 있었다. 하지만 뛰어난 업무 능력이 반드시 후배 양성에 도움이 되는 건 아니었다. 양민지가 희진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은 “이해가 안 되네”였다.
“희진씨, 이걸 왜 이렇게 했어요? 이해가 안 되네.”
“아니, 아직도 그걸 하고 있어요? 이해가 안 되네.”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제 말이 어려워요?”
어려워도 너무 어려웠다. 희진에게는 양민지가 업무를 지시할 때 쓰는 업계의 용어들이 외계어처럼 들렸다. 희진은 궁금했다. ‘컴케’가 커뮤니케이션의 줄임말이라는 걸, ‘구다리 야마’가 주요 강조 요소라는 걸 다른 사람들은 어디서 배워서 쓰는 걸까. ‘ROS’가 시간 단위로 기록한 일정표라는 뜻의, ‘TBA’가 추후 발표 예정이라는 뜻의 영어 약자라는 걸 양민지는 절대로 먼저 알려주지 않았고, 몇 번 질문을 했다가 “이걸 몰라요? 이해가 안 되네”라는 말을 들은 뒤로 희진도 양민지에게 더는 묻지 않았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양민지의 말을 번역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으므로 희진은 거의 매일 같이 야근을 했다.
그날도 그런 날 중에 하나였다. 사무실에 홀로 남아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인터넷이 먹통이었다. 컴퓨터와 공유기, 모뎀을 모두 껐다 켰다 해봐도 연결이 안 됐다. 당시 희진이 하는 일은 대부분 자료 조사였기에 더이상은 회사에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희진은 집에 가서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회사의 공용 노트북을 챙겼다. 외부 미팅이나 PT를 갈 때 쓰는 고사양의 노트북이었다. 희진의 한 달 월급을 다 털어도 살 수 없는 것이어서 소중하게 품에 안고 사무실을 나섰다.
아직 지하철도 버스도 다닐 시각이었지만 퇴근이 아니라 재택근무를 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스스로에게 택시에서 잠깐 눈을 붙일 여유 정도는 선물하고 싶어졌다. 희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택시를 호출했다. 로비에 내려갔을 때에서야 호출 위치를 잘못 지정해서 택시가 정문이 아닌 후문 쪽으로, 그것도 옆 건물로 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보도블록에 빗줄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세찬 비가.
“도착했는데요.”
“아, 죄송해요. 제가 위치를 잘못 눌렀어요.”
“뭐요?”
친절했던 택시 기사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험악해졌다. 그런 날이 있다.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잘못된 선택을 하는 날이. 호출 취소 수수료를 내고 그 택시를 돌려보내는 방법도 있었다. 정문으로 나가면 바로 옆에 편의점이 있었고, 그곳에서 우산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택시를 부르거나, 그냥 지하철을 타러 가도 되었을 텐데. 희진은 택시 기사에게 죄송하다고, 금방 가겠다고,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후문으로 향했다. 예약 등을 켠 택시가 보였다. 뛰면 1분도 안 걸릴 거리였다. 하지만 비가 너무 많이 오고, 혹시 노트북이 젖으면 어떡하지. 그래서 망가지기라도 하면…… 그때 그 우산이 생각난 것이다.
식욕이 없어서 점심시간에 밥을 먹으러 가는 대신 혼자 담배를 피울 때 얼핏 보았던 건물 틈새의 버려진 우산. 건물에 짧은 처마가 있어 비를 맞지 않고 거기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희진은 종종걸음으로 그곳에 갔다. 저번에 본 그대로, 검은 장우산이 펼쳐져 있었다. 희진은 기뻐하며 손을 뻗어 우산 꼭지를 잡아당겼다.
이상하게도 저항이 있었다.
어라, 싶어 더 세게 당겼을 때 우산이 불쑥 솟아올랐다.
사람이었다.
그날 희진은 흠뻑 젖은 채로 택시를 탔고, 택시 기사가 시트가 젖는다며 운행 내내 투덜거렸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산 아래에 사람이 있었다. 건물 틈새에 있는 버려진 우산 아래에,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 밤에, 사람이 있었다. 언제부터? 도대체 언제부터?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고, 자신이 비명을 질렀고, 그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우산 아래로 몸을 낮췄다. 그 장면이 희진의 머릿속에서 계속 반복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노트북은 젖었지만 다행히 고장 나지 않았고, 희진은 밤새 일을 했다. 다음날도 비가 내렸다. 어쩐 일인지 양민지가 희진이 건넨 파일을 퇴짜 없이 한 번에 받았고, 점심시간에는 함께 밥을 먹자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양민지가 맛집이라면서 코다리 요리를 파는 식당으로 희진을 안내했다. 그러고는 코다리찜도 코다리 무침도 아닌 메밀국수와 메밀전병을 시켰다. 희진은 비도 오고 하니 국물이 있는 뜨끈한 음식을 먹고 싶었지만 메밀국수와 메뉴판 같은 칸에 있던 코다리 냉면을 골랐다.
코다리 냉면은 맛있었다. 매콤한 양념에 무친 코다리가 제법 넉넉하게 들어 있었다. 맛집은 맛집이구나. 희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냉면을 먹었다. 먹는 동안 양민지와는 말 한마디 섞지 않았다. 그저 각자의 음식을 열심히 먹을 뿐이었다. 이럴 거면 왜 같이 나오자고 한 건지. 하지만 차라리 잘 된 것 같기도 해서 애써 말을 붙이려고 애쓰진 않았다. 양민지는 네 개나 나온 메밀전병을 희진에게 하나 먹어보라고 권하지도 않았다. 이해가 안 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희진은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메밀국수 그릇을 향해 고개 숙인 양민지의 정수리에 대고 몰래 혀라도 날름 내밀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때 식당 문을 열고 그 사람이 들어왔다.
우산 아래에 있던 사람.
그가 바로 그 검은 장우산을 착, 접어서 입구의 우산꽂이에 꽂았다. 그러고는 희진이 앉은 건너편 테이블에 앉았다. 메뉴판도 보지 않고 코다리 정식을 시켰다. 코다리 정식은 이만오천 원인데! 그렇게 생각하고 희진은 곧바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무심코 떠올린 몇 가지 가정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을 향하기엔 무례한 것들뿐이어서. 얼른 코다리 냉면에 집중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그에게로 시선이 갔다.
그는 몸짓이 우아한 사람이었다. 냅킨을 뽑거나 물을 마시거나 숟가락을 들고 내릴 때마다 일정한 박자에 맞춘 동작처럼 기품이 느껴졌다. 볼이 불룩해지지 않을 만큼만 음식을 입에 넣었고, 그 뒤에는 입술을 꼭 붙인 채로 꼭꼭 씹었다. 젓가락을 빨거나 숟가락을 향해 고개를 기울이는 일도 없었다. 이따금 맛을 음미하는지 수저를 상 위에 올려둔 채 잠깐씩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도 먹는 속도가 빨라서 금세 그릇들이 비어갔다.
“희진씨는 천천히 드시는 편인가 봐요?”
어느새 메밀국수는 물론이고 메밀전병까지 싹 비운 양민지가 후식으로 나온 오미자차를 마시면서 말했다.
“천천히 먹는 게 건강에 좋대요.”
그때 희진은 자신이 먹는 속도를 조절하는 이유가 저열한 호기심 때문이라는 것까지는 몰랐다. 그 사람이 계산대에서 계산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는 걸, 분명 그때 어떤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알았더라면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서 일어섰을 것이다. 잔뜩 남은 코다리나 오미자차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양민지의 몫까지 계산하고 가게를 나섰을 것이다. 그런 정도의 염치는 가진 사람으로 살고 싶으니까. 하지만 희진은 그때 스스로에 대해 잘 몰랐다. 자기 자신에 대해 항상 제때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그래서 희진은 양민지가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무언의 재촉을 하든 말든 젓가락을 최대한 천천히 움직였다. 그 사람이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계산대에는 대인원 단체 손님이 각자 자신의 음식을 계산하기 위한 카드를 들고 웅성웅성 모여 있었다. 그다음이 그 사람의 차례였고, 양민지가 그 뒤에 서 있었다. 계산서를 집으며 “제가 살게요”라고 양민지가 말했기 때문에 희진은 조금 떨어져서 서 있었다. 오미자차가 든 종이컵 끄트머리를 잘근잘근 씹으면서 카운터 쪽을 흘깃거렸다. 그러다가 본 것이다. 하나둘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던 단체 손님의 무리 중 하나가 그 사람의 우산을 우산꽂이에서 뽑아 드는 것을.
“어?”
희진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냈고, 계산대 근처의 모두가, 딱 한 사람, 바로 그 사람만 빼고 모두 희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희진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 여기서. 그 우산은 이 사람 거라고, 내가 안다고, 왜냐하면 내가 그 우산 아래에 있는 이 사람을 봤으니까, 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그래도 될까?
희진이 망설이는 사이, 그 사람의 우산은 다른 사람이 쓰고 가버렸다. 그리고 그 사람이 계산할 차례가 됐다.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어 현금으로 계산을 했다. 지폐는 깨끗했다. 직원을 대하는 태도도 정중했다. 아, 하지만 그의 우산은 이미 다른 사람이 가져갔고 그가 입은 말쑥한 재킷은 곧 볼품없이 젖어버릴 것이다. 희진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그가 직원이 건네는 영수증을 받아 소중하게 지갑에 넣은 뒤 우산꽂이에서 희진의 우산을 뽑아 들기 전까진.
어?
이번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건 분명 희진의 우산이었다. 초록색 바탕에 맥주 회사의 로고가 빨갛게 찍힌, 마트에서 맥주 여덟 캔 꾸러미를 사고 사은품으로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들고 있으니 어쩐지 그에게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돌초밥 특선세트는 과연 구성이 알찼다. 지우가 붉은 살 생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며 참치 초밥 두 개를 희진에게 주어서 더욱 배가 불렀다. 한 가지씩 골라서 나눠 먹은 새우튀김과 단호박 튀김의 고소함과 바삭함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하며 사무실에 돌아오니 프린터는 여전히 잉크 부족 메시지를 띄우고 있었다. 울상이 된 지우 대신 희진이 관리팀에 전화를 걸었지만 부재중이었다. 희진은 자신의 법인카드를 지우에게 내밀었다. 대리급 이상의 직원들에게 한 장씩 주어지는 법인카드. 그걸 지갑에서 꺼낼 때마다 희진은 금연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었다.
“사거리에 있는 사무용품 매장 알죠? 거기에서 잉크 카트리지 팔아요. 사 오는 게 빠르겠어.”
“제가요?”
그럼 누가……?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았지만 충분히 뜻이 전해질 표정을 지었던 모양이다. 지우가 마지못한 티가 역력한 얼굴로 카드를 받아들었다. “다녀오겠습니다” 하는 말이 길게 꼬리가 늘어졌다.
지우는 돌아올 시간이 되고도 남았을 텐데도 소식이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전화를 해보려는데 그제야 창밖에 비가 쏟아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정말 세찬 비였다. 언제부터 내리고 있었을까. 혹시 지우가 사무실을 빠져나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에 도착했을 때, 그때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을까? 그래서 아침에 보았던 초록색 우산이, 건물과 건물 사이에 버려진 것처럼 보였던 그 우산이 떠오르지는 않았을까? 종종걸음으로 그곳에 다가가 손을 뻗어 우산 꼭지를 잡아당기고……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고…… 비명을 지르고…… 그 뒤로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한 건 아닐까. 그대로 어디로든 계속 달리고 달려서……
그때 지우의 자리에 놓인 전화기의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직 명함도 없어 내선으로밖에는 거는 사람이 없는 그 전화가. 희진은 피식 웃음이 났다. 지우에게 좋은 사수가 되고 싶었다. 휴대폰 번호까진 아니어도 자신의 것과 끝자리 하나만 다른 사무실 직통번호를 외울 정도는 되는, 그런 사람.
그러니 지금 채 말리지 못한 축축한 머리카락으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지우를 이해해야 한다고 희진은 생각한다. 알았겠지. 알면서도 어쩌다 보니,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이렇게 되어버린 거겠지.
“지우씨, 회의 준비는 다 했어?”
“그럼요, 대리님! 제가 그건 어제 퇴근하기 전에 다……”
자신만만하던 지우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희진은 알고 있다. 지우가 어제 퇴근하기 전, 정확히 말하면 자정이 지나 오늘 새벽에 퇴근하기 전까지 회의 자료를 출력하다가 사무실 프린터가 ‘잉크 부족’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멈춰버렸다는 사실을. 비품실에서 여분의 잉크 카트리지를 찾다가 실패하고 주변의 24시간 출력소를 검색했지만 그조차도 찾지 못했다는 걸.
지우는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우선은 퇴근을 하기로 했다. 출근 전에 어디든 일찍 문을 여는 출력소를 찾아 출력을 해야지, 아니면 잉크 카트리지를 구매하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새벽까지 운행하는 심야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다. 첫차와 별 차이도 나지 않는 시각에 도로를 달리는 심야 버스에는 생각보다 승객이 많아 자리에 앉지 못하고 손잡이를 잡고 서서 가야만 했다. 당장이라도 침대에 쓰러지고 싶을 정도로 피곤했지만 출근할 때 입을 옷을 미리 골라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고, 세수를 하고 난 뒤엔 로션까지 꼼꼼하게 챙겨 바른 다음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알람을 맞추고 잠들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눈도 다 뜨지 못한 채로 알람을 끄고 나서 몸을 일으키는 대신 그대로 돌아누웠고, 이미 사무실에 도착했어야 하는 시각에야 불현듯 불길한 기운을 느끼며 벌떡 일어났고, 머리를 말릴 시간이 부족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샤워기를 정수리에 가져다 대고 물을 틀었고……
그러니까, 회의 자료는 출력해야 하는 열다섯 부 중에서 다섯 부와 4분의 1부만이 출력된 상태였다. 그나마 다섯 부도 제본이 되어있지 않은 채로, 지우의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지우씨! 울지 마!”
희진은 기합이라도 넣는 것처럼 말하며 지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지우가 금세 흘러내릴 듯이 차오른 눈물을 다시 몸속으로 집어넣으려는 듯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고 제자리에서 동동동 발을 굴렀다. 그건 참 귀엽고도 한숨이 나오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희진은 일단 한숨을 한 번 쉬고, 이 안쓰러운 인턴사원에게 필요한 것을 주기로 했다.
“울지 않아도 돼. 회의가 두 시에서 다섯 시로 미뤄졌어. 그리고 내가 오전에 관리실에 얘기해서 점심때 잉크 카트리지 교환하는 분이 오실 거야. 그러니까……”
“대리님!”
으앙, 하고 아이처럼 얼굴을 찡그리며 지우가 희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지구로 돌진하는 혜성을 막아낸 슈퍼히어로를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그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희진은 생각했다.
제법 규모가 있는 광고 대행사인 레너드 에이전시는 빌딩 다섯 개 층에 자리 잡고 있었고 덕분에 팀별로 개별 사무실을 썼다. 희진과 지우가 속한 기획 6팀은 팀장을 포함해 여덟 명이었는데, 연차 휴가를 쓴 한 명을 뺀 나머지 팀원들은 모두 경쟁 PT가 있어 자리를 비웠다. 예상했던 것보다 PT가 길어질 예정이라 두 시에 잡혀있던 회의가 다섯 시로 미뤄진 것이다. 회의 준비는 팀의 막내가 하는 것이 기획 6팀의 관례였고, 희진도 막내 시절 하던 일이었다. 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길길이 날뛰는 팀장이 지우에게 외모부터 학력까지 고루고루 차별적인 폭언을 하지 않게 된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게다가 지우는 곧 인턴 기간이 끝나고 팀원들의 평가를 통해 정규직 전환이 되느냐 그대로 계약종료로 퇴사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었다.
“대리님! 제가 이 은혜를 어떻게 갚죠? 어떻게 해야 하죠? 제가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 뭘 드시고 싶으세요? 네?”
숨도 쉬지 않고 말하는 지우에게 희진은 진정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일단, 우리 커피나 한잔할까? 내가 살게. 나 기프티콘 많아.”
수요일 오전 열한 시의 테헤란로. 초겨울의 공기는 차갑고도 맑았고, 도로 양편으로 늘어선 고층빌딩들의 유리창이 은빛으로 반짝였다. 희진은 이 거리의 커다란 보도블록을 밟으며 걷는 것이 좋았다. 게다가 목에는 사원증을 걸고, 자신을 상사로 대하는 사람과 함께, 업무시간에 사무실을 나와 스타벅스에 간다는 사실이 희진의 마음을 충만하게 했다.
“난 아이스 바닐라 라떼. 지우씨는 뭐 마실래?”
“저는 토피넛 팝콘 트리 프라푸치노 그란데요!”
“뭐?”
예상치 못한 긴 이름에 희진은 저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그리고 지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메뉴 이름을 다시 한번 말하고, 그란데, 라고 사이즈도 정확하게 짚은 다음, 손가락을 뻗어 가리킨 곳을 보았다. 크리스마스 시즌 음료 안내판이었다. 토피넛 라떼를 얼음과 함께 갈아낸 프라푸치노 위에 풍성한 휘핑크림이 올라가 있고 알록달록한 캐러멜 팝콘이 장식되어 있었다.
“저는 시즌 음료는 꼭 마셔보거든요.”
“그렇구나.”
벌써 크리스마스 시즌이네요, 대리님은 크리스마스에 선약 있으세요? 이런 걸 여쭤보는 건 아무래도 실례겠죠? 저는 크리스마스에는 매년 초등학교 동창들이랑 모여서 파티를 했는데, 올해는 결혼한 친구도 있어서 어려울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대리님은 항상 아이스 음료를 드시네요, 저도 얼어 죽더라도 아이스 마시는 파거든요…… 종알종알 떠드는 지우에게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다가 이제는 정말 버틸 수 없다 싶을 때쯤 희진이 주문할 차례가 됐다. 희진은 반드시 아이스 음료를 마시는 편은 아니었고, 막상 얼음이 든 컵을 들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을 걸을 생각을 하니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 같기도 해서 뜨거운 바닐라 라떼와 지우의 음료를 주문했다.
“죄송하지만, 토피넛 팝콘 트리 프라푸치노는 오늘 주문이 마감되었습니다. 팝콘이 다 떨어져서요. 혹시 팝콘 빼고 주문하시면 가능하신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희진이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지우가 다급하게 말했다.
“팝콘이 없으면 토피넛 팝콘 트리 프라푸치노가 아닌데요!”
그리고 잠깐의 정적.
희진은 지우가 음료 주문을 바꿀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았다.
“주문 취소할게요.”
희진은 풀죽은 지우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다른 스타벅스 가보자.”
테헤란로엔 한 블록에 하나씩은 스타벅스가 있었다. 어떤 블록에는 모퉁이마다 네 곳의 스타벅스가 있기도 했다. 그 점도 희진이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였다. 무엇이든 부족하기보다는 넘쳐흐를 정도로 과하기로 결정한 이 거리의 풍요로운 얼굴이 희진은 마음에 들었다. 물러설 데 없는 절박한 선택지란 없는 곳. 여기가 아니면 저기로 가자고 할 수 있는 곳. 뭐든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곳. 이왕 이렇게 된 거 테이크 아웃을 해서 사무실로 돌아가는 대신 잠깐 앉아서 마시고 그대로 점심 식사까지 하고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까짓거, 크리스마스 음료, 먹게 해준다.
희진과 지우는 세 번째로 들른 스타벅스에서 토피넛 팝콘 트리 프라푸치노를 주문할 수 있었다. 음료가 나오자 지우는 빨대를 꽂기 전에 다섯 장, 빨대를 꽂고 나서 세 장의 사진을 찍었다. 희진이 음료를 들고 있는 모습을 찍어줄까 물었더니 사양하지 않고 단박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리님은 이 회사에서 얼마나 일하셨어요?”
“오 년.”
“와, 오 년이나 같은 회사를 다니면 기분이 어떠세요? 전 초등학교 때 이후로는 같은 곳을 그렇게 길게 오간 적이 없어서.”
“좋아. 나쁘지 않아.”
“너무 멋져요. 정말 어른 같다고 할까. 저도 대리님처럼 될 수 있겠죠?”
지우는 정말 순수한 감탄으로 희진을 바라보았다. 나쁘지 않았다. 이런 시선을 받는 것. 좋다고도 할 수 있지. 아니, 좋다. 분명하게 좋다. 희진이 공채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주임을 거쳐 대리가 되는 동안 희진과 함께한 인턴, 사원, 주임들이 여럿 있었지만 지우처럼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기분이다. 지우씨, 내가 점심도 살게. 뭐 먹을래?”
“미돌초밥이요!”
그 가게에 가려면 다시 회사 앞을 지나쳐 한참을 더 걸어가야 한다는 걸, 알고 하는 말이겠지? 어느새 열두 시가 다 되어 있었다. 그래, 이왕 가는 거 줄 생기기 전에 가자. 거기가 맛있긴 하잖아.
“그래, 가자.”
“앗, 잠시만요!”
지우가 컵 바닥에 남은 음료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빨대로 빨아들이는 동안 열두 시가 지나고 말았고, 걸음을 부지런히 재촉했지만 미돌초밥 앞엔 긴 줄이 생겨 있었다. 점심시간에만 판매하는 특선세트가 가격에 비해 푸짐한 구성으로 인기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가게 안의 테이블 수를 생각했을 때 꽤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처럼, 지우는 서비스로 제공되는 튀김을 새우와 야채 중에 무엇으로 고를까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 골똘한 얼굴 위로 서서히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오늘 비가 온다고 했었나?”
“안 되는데…… 우산 없는데…… 아, 맞다. 대리님 혹시 그 우산 아세요?”
“그 우산?”
“오늘 택시 기사님이 어쩐 일인지 건물 뒤쪽으로 내려주셔서 후문으로 들어왔는데, 흡연 구역 쪽에 옆 건물 사이 있잖아요. 지나다닐 수는 없는 거기에……”
“초록색 우산 말이지. 맥주 회사 로고 찍힌.”
“어? 대리님도 아시네요?”
알다마다. 희진은 그 우산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희진은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한 첫 번째 회사에서 담배를 배웠다. 을지로에 있는 오래된 저층 빌딩 꼭대기 층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사수들은 틈만 나면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피웠다. 광고 전단과 현수막을 만드는 회사였고, 인쇄도 겸하느라 사무실의 가장 넓은 자리를 중형 자동차만한 인쇄기가 차지한 채 하루 종일 돌아가고 있었다. 잠깐이라도 그 소음과 진동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흡연자 무리에 끼어 옥상에 올라가는 것뿐이었다. 그 회사에서는 딱 1년만 채우고 퇴직금을 받아서 나왔다. 재취업을 위해 이력서를 쓰려고 책상 앞에 앉기만 하면 윙윙, 철컥, 윙윙, 철컥, 환청이 들렸다. 그 핑계로 실업급여를 받으며 3개월을 쉬었다.
두 번째 회사는 구로디지털단지에 있었다. 기업의 사보를 만드는 회사였다. 희진은 개천에서 난 용,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을 바짝 차릴 범재, 하룻밤에 산도 옮길 천하의 장사들을 만났다. 자수성가 이야기들은 디테일만 다를 뿐 대부분 비슷비슷한 줄기를 갖고 있어서 어떨 때는 이전에 쓴 인터뷰를 그대로 복사한 뒤에 단어 몇 개만 바꾸면 될 때도 있었다. 아무것도 편집하지는 않지만 편집장이라고 불리는 상사 한 명과 기자라는 직함을 달고서 별다른 취재는 하지 않는 희진, 둘이서만 일했으므로 아주 고요하고 지루했다. 그곳에 2년을 있었다. 여러 회사들의 구내식당 음식 맛을 비교하는 것이 소소한 재미였고, 잠들기 전이 괴로운 나날이었다. 희진은 자신이 야망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어제보다 나아진 내일을 원한다고, 그러기 위해서 오늘의 슬픔이나 아픔도 버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직서는 싱겁게 수리되었고, 바로 그날 밤에 레너드 에이전시의 신입사원 공채에 이력서를 보냈다. 첫 번째 회사의 이름도 두 번째 회사의 이름도 쓰지 않았다.
희진의 사수였던 양민지 주임은 희진 보다 두 살이 어렸고, 지금은 회사의 에이스라고 할 수 있는 기획 1팀으로 옮겨 과장 직함을 달고 있을 정도로 실력이 있었다. 하지만 뛰어난 업무 능력이 반드시 후배 양성에 도움이 되는 건 아니었다. 양민지가 희진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은 “이해가 안 되네”였다.
“희진씨, 이걸 왜 이렇게 했어요? 이해가 안 되네.”
“아니, 아직도 그걸 하고 있어요? 이해가 안 되네.”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제 말이 어려워요?”
어려워도 너무 어려웠다. 희진에게는 양민지가 업무를 지시할 때 쓰는 업계의 용어들이 외계어처럼 들렸다. 희진은 궁금했다. ‘컴케’가 커뮤니케이션의 줄임말이라는 걸, ‘구다리 야마’가 주요 강조 요소라는 걸 다른 사람들은 어디서 배워서 쓰는 걸까. ‘ROS’가 시간 단위로 기록한 일정표라는 뜻의, ‘TBA’가 추후 발표 예정이라는 뜻의 영어 약자라는 걸 양민지는 절대로 먼저 알려주지 않았고, 몇 번 질문을 했다가 “이걸 몰라요? 이해가 안 되네”라는 말을 들은 뒤로 희진도 양민지에게 더는 묻지 않았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양민지의 말을 번역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으므로 희진은 거의 매일 같이 야근을 했다.
그날도 그런 날 중에 하나였다. 사무실에 홀로 남아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인터넷이 먹통이었다. 컴퓨터와 공유기, 모뎀을 모두 껐다 켰다 해봐도 연결이 안 됐다. 당시 희진이 하는 일은 대부분 자료 조사였기에 더이상은 회사에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희진은 집에 가서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회사의 공용 노트북을 챙겼다. 외부 미팅이나 PT를 갈 때 쓰는 고사양의 노트북이었다. 희진의 한 달 월급을 다 털어도 살 수 없는 것이어서 소중하게 품에 안고 사무실을 나섰다.
아직 지하철도 버스도 다닐 시각이었지만 퇴근이 아니라 재택근무를 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스스로에게 택시에서 잠깐 눈을 붙일 여유 정도는 선물하고 싶어졌다. 희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택시를 호출했다. 로비에 내려갔을 때에서야 호출 위치를 잘못 지정해서 택시가 정문이 아닌 후문 쪽으로, 그것도 옆 건물로 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보도블록에 빗줄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세찬 비가.
“도착했는데요.”
“아, 죄송해요. 제가 위치를 잘못 눌렀어요.”
“뭐요?”
친절했던 택시 기사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험악해졌다. 그런 날이 있다.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잘못된 선택을 하는 날이. 호출 취소 수수료를 내고 그 택시를 돌려보내는 방법도 있었다. 정문으로 나가면 바로 옆에 편의점이 있었고, 그곳에서 우산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택시를 부르거나, 그냥 지하철을 타러 가도 되었을 텐데. 희진은 택시 기사에게 죄송하다고, 금방 가겠다고,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후문으로 향했다. 예약 등을 켠 택시가 보였다. 뛰면 1분도 안 걸릴 거리였다. 하지만 비가 너무 많이 오고, 혹시 노트북이 젖으면 어떡하지. 그래서 망가지기라도 하면…… 그때 그 우산이 생각난 것이다.
식욕이 없어서 점심시간에 밥을 먹으러 가는 대신 혼자 담배를 피울 때 얼핏 보았던 건물 틈새의 버려진 우산. 건물에 짧은 처마가 있어 비를 맞지 않고 거기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희진은 종종걸음으로 그곳에 갔다. 저번에 본 그대로, 검은 장우산이 펼쳐져 있었다. 희진은 기뻐하며 손을 뻗어 우산 꼭지를 잡아당겼다.
이상하게도 저항이 있었다.
어라, 싶어 더 세게 당겼을 때 우산이 불쑥 솟아올랐다.
사람이었다.
그날 희진은 흠뻑 젖은 채로 택시를 탔고, 택시 기사가 시트가 젖는다며 운행 내내 투덜거렸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산 아래에 사람이 있었다. 건물 틈새에 있는 버려진 우산 아래에,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 밤에, 사람이 있었다. 언제부터? 도대체 언제부터?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고, 자신이 비명을 질렀고, 그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우산 아래로 몸을 낮췄다. 그 장면이 희진의 머릿속에서 계속 반복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노트북은 젖었지만 다행히 고장 나지 않았고, 희진은 밤새 일을 했다. 다음날도 비가 내렸다. 어쩐 일인지 양민지가 희진이 건넨 파일을 퇴짜 없이 한 번에 받았고, 점심시간에는 함께 밥을 먹자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양민지가 맛집이라면서 코다리 요리를 파는 식당으로 희진을 안내했다. 그러고는 코다리찜도 코다리 무침도 아닌 메밀국수와 메밀전병을 시켰다. 희진은 비도 오고 하니 국물이 있는 뜨끈한 음식을 먹고 싶었지만 메밀국수와 메뉴판 같은 칸에 있던 코다리 냉면을 골랐다.
코다리 냉면은 맛있었다. 매콤한 양념에 무친 코다리가 제법 넉넉하게 들어 있었다. 맛집은 맛집이구나. 희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냉면을 먹었다. 먹는 동안 양민지와는 말 한마디 섞지 않았다. 그저 각자의 음식을 열심히 먹을 뿐이었다. 이럴 거면 왜 같이 나오자고 한 건지. 하지만 차라리 잘 된 것 같기도 해서 애써 말을 붙이려고 애쓰진 않았다. 양민지는 네 개나 나온 메밀전병을 희진에게 하나 먹어보라고 권하지도 않았다. 이해가 안 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희진은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메밀국수 그릇을 향해 고개 숙인 양민지의 정수리에 대고 몰래 혀라도 날름 내밀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때 식당 문을 열고 그 사람이 들어왔다.
우산 아래에 있던 사람.
그가 바로 그 검은 장우산을 착, 접어서 입구의 우산꽂이에 꽂았다. 그러고는 희진이 앉은 건너편 테이블에 앉았다. 메뉴판도 보지 않고 코다리 정식을 시켰다. 코다리 정식은 이만오천 원인데! 그렇게 생각하고 희진은 곧바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무심코 떠올린 몇 가지 가정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을 향하기엔 무례한 것들뿐이어서. 얼른 코다리 냉면에 집중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그에게로 시선이 갔다.
그는 몸짓이 우아한 사람이었다. 냅킨을 뽑거나 물을 마시거나 숟가락을 들고 내릴 때마다 일정한 박자에 맞춘 동작처럼 기품이 느껴졌다. 볼이 불룩해지지 않을 만큼만 음식을 입에 넣었고, 그 뒤에는 입술을 꼭 붙인 채로 꼭꼭 씹었다. 젓가락을 빨거나 숟가락을 향해 고개를 기울이는 일도 없었다. 이따금 맛을 음미하는지 수저를 상 위에 올려둔 채 잠깐씩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도 먹는 속도가 빨라서 금세 그릇들이 비어갔다.
“희진씨는 천천히 드시는 편인가 봐요?”
어느새 메밀국수는 물론이고 메밀전병까지 싹 비운 양민지가 후식으로 나온 오미자차를 마시면서 말했다.
“천천히 먹는 게 건강에 좋대요.”
그때 희진은 자신이 먹는 속도를 조절하는 이유가 저열한 호기심 때문이라는 것까지는 몰랐다. 그 사람이 계산대에서 계산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는 걸, 분명 그때 어떤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알았더라면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서 일어섰을 것이다. 잔뜩 남은 코다리나 오미자차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양민지의 몫까지 계산하고 가게를 나섰을 것이다. 그런 정도의 염치는 가진 사람으로 살고 싶으니까. 하지만 희진은 그때 스스로에 대해 잘 몰랐다. 자기 자신에 대해 항상 제때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그래서 희진은 양민지가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무언의 재촉을 하든 말든 젓가락을 최대한 천천히 움직였다. 그 사람이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계산대에는 대인원 단체 손님이 각자 자신의 음식을 계산하기 위한 카드를 들고 웅성웅성 모여 있었다. 그다음이 그 사람의 차례였고, 양민지가 그 뒤에 서 있었다. 계산서를 집으며 “제가 살게요”라고 양민지가 말했기 때문에 희진은 조금 떨어져서 서 있었다. 오미자차가 든 종이컵 끄트머리를 잘근잘근 씹으면서 카운터 쪽을 흘깃거렸다. 그러다가 본 것이다. 하나둘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던 단체 손님의 무리 중 하나가 그 사람의 우산을 우산꽂이에서 뽑아 드는 것을.
“어?”
희진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냈고, 계산대 근처의 모두가, 딱 한 사람, 바로 그 사람만 빼고 모두 희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희진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 여기서. 그 우산은 이 사람 거라고, 내가 안다고, 왜냐하면 내가 그 우산 아래에 있는 이 사람을 봤으니까, 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그래도 될까?
희진이 망설이는 사이, 그 사람의 우산은 다른 사람이 쓰고 가버렸다. 그리고 그 사람이 계산할 차례가 됐다.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어 현금으로 계산을 했다. 지폐는 깨끗했다. 직원을 대하는 태도도 정중했다. 아, 하지만 그의 우산은 이미 다른 사람이 가져갔고 그가 입은 말쑥한 재킷은 곧 볼품없이 젖어버릴 것이다. 희진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그가 직원이 건네는 영수증을 받아 소중하게 지갑에 넣은 뒤 우산꽂이에서 희진의 우산을 뽑아 들기 전까진.
어?
이번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건 분명 희진의 우산이었다. 초록색 바탕에 맥주 회사의 로고가 빨갛게 찍힌, 마트에서 맥주 여덟 캔 꾸러미를 사고 사은품으로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들고 있으니 어쩐지 그에게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돌초밥 특선세트는 과연 구성이 알찼다. 지우가 붉은 살 생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며 참치 초밥 두 개를 희진에게 주어서 더욱 배가 불렀다. 한 가지씩 골라서 나눠 먹은 새우튀김과 단호박 튀김의 고소함과 바삭함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하며 사무실에 돌아오니 프린터는 여전히 잉크 부족 메시지를 띄우고 있었다. 울상이 된 지우 대신 희진이 관리팀에 전화를 걸었지만 부재중이었다. 희진은 자신의 법인카드를 지우에게 내밀었다. 대리급 이상의 직원들에게 한 장씩 주어지는 법인카드. 그걸 지갑에서 꺼낼 때마다 희진은 금연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었다.
“사거리에 있는 사무용품 매장 알죠? 거기에서 잉크 카트리지 팔아요. 사 오는 게 빠르겠어.”
“제가요?”
그럼 누가……?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았지만 충분히 뜻이 전해질 표정을 지었던 모양이다. 지우가 마지못한 티가 역력한 얼굴로 카드를 받아들었다. “다녀오겠습니다” 하는 말이 길게 꼬리가 늘어졌다.
지우는 돌아올 시간이 되고도 남았을 텐데도 소식이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전화를 해보려는데 그제야 창밖에 비가 쏟아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정말 세찬 비였다. 언제부터 내리고 있었을까. 혹시 지우가 사무실을 빠져나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에 도착했을 때, 그때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을까? 그래서 아침에 보았던 초록색 우산이, 건물과 건물 사이에 버려진 것처럼 보였던 그 우산이 떠오르지는 않았을까? 종종걸음으로 그곳에 다가가 손을 뻗어 우산 꼭지를 잡아당기고……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고…… 비명을 지르고…… 그 뒤로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한 건 아닐까. 그대로 어디로든 계속 달리고 달려서……
그때 지우의 자리에 놓인 전화기의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직 명함도 없어 내선으로밖에는 거는 사람이 없는 그 전화가. 희진은 피식 웃음이 났다. 지우에게 좋은 사수가 되고 싶었다. 휴대폰 번호까진 아니어도 자신의 것과 끝자리 하나만 다른 사무실 직통번호를 외울 정도는 되는, 그런 사람.
조우리
2011년부터 소설을 발표하고 있으며, 휴직과 복직을 반복하는 근로 노동자이기도 하다. 최근 복직을 해서인지 자꾸만 회사원이 주인공인 소설을 쓰게 된다. 근로 노동자로서의 바람은 일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쁘지 않은 동료가 되는 것. 소설가로서는 우선 『내 여자친구와 여자 친구들』 중쇄를 찍고 싶다.
2020/11/24
3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