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닮은 사람을 만났던 건 재작년의 일이다.
   큰아버지는 한 달 전 세상을 떠났다. 일가친척을 포함하여 평생 사람들을 등치고 속여먹고 배신하던 기억은 치매 속에 묻어두고 암세포에 완전히 잡아먹혔다. 아무도 울지 않을 줄 알았는데 빈소에서 작은고모가 서럽게 흐느꼈다. 좋을 때는 정말로 좋았던 오빠였다면서. 자기는 다 용서했다면서. 정말로 좋았던 그때 작은고모는 큰아버지의 보증을 섰다가 아파트와 땅을 처분했고, 고모의 큰딸은 10년 넘게 배우던 발레를 포기했다. 헛헛한 빈소에서 향 연기가 꼬리 긴 연처럼 올라갔다.
   어떤 죽음은 문제를 끝내는 게 아니라 잘게 잘라 포자처럼 퍼뜨린다. 장례가 끝나고 며칠 뒤 새벽에 정체불명의 전화가 왔다. 어떤 남자가 쉰 목소리로 당신이 이 아무개의 조카냐 묻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마치 음란 전화처럼. 나는 아무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도 없었다. 숨소리가 일 분쯤 이어지더니 돌연 전화가 끊겼다. 나는 조용해진 전화기를 손에 들고 앉아 있다가 윤정에게 큰아버지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날 헤어지면서 윤정은 큰아버지와 관련된 건 부고 소식만 듣겠다고 했다. 물론 말뿐이었다. 그녀는 어떤 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윤정은 큰아버지의 딸이었다. 내 사촌이 아니라 큰아버지의 딸. 큰아버지가 윤정의 어머니, 그러니까 내 큰어머니가 아닌 윤정의 어머니를 어떻게 기만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런 건 궁금하다고 해서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버지가 전화했을 때 나는 고용보험센터에서 내 번호표로 종이학을 접으면서 차례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집에는 실직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구석에서 소리죽여 통화를 해야 했다. 아버지는 겁에 질려 있었다. 큰아버지가 입원한 요양병원에서 딸이라는 여자가 면회를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입원 당시 작성한 서류에 따르면 큰아버지는 미혼에 자녀도 없었고, 우리 역시 그런 줄만 알았으며, 아버지는 형과 관련된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는 알아보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상담이 끝나고 병원에 연락해보니 여자는 명함을 남기고 떠난 뒤였다. “법무사 명함이에요. 주소요? 잠깐만요.” 우리 친척 중에는 법무사도 없었고, 명함에 적혀 있는 도시에 사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직원에게 전화번호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번호를 누르고 신호음이 두세 번 울리자 비음 섞인 여자 목소리가 천윤정입니다, 라며 전화를 받았다. 나는 용건을 밝혔고, 우리는 여자가 묵고 있는 호텔 라운지에서 만나기로 했다.
   호텔에 도착하여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나는 이제부터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온갖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지만 큰아버지와 똑같이 생긴 여자가 수수한 검은색 정장을 입고 라운지에 앉아 있을 수도 있으리라는 예상만큼은 하지 못했다. 그런 건 자주 일어날 수도, 정말 드물게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쌍꺼풀 없는 눈과 두툼한 콧등, 큼지막한 입을 보았을 때 나는 그녀가 무엇도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윤정 역시 나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는 자기가 큰아버지의 딸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와 서류를 내게 건네고 나서 용건을 밝혔다.
   “어머니가 그 사람을 보고 싶어해요.”
   윤정은 자신의 출생에도, 우리 집안에 뭔가 요구하는 데도 아무 관심이 없다고 못을 박았다. 제 앞가림을 하며 사는 이상 그런 건 다 불필요했다. 윤정의 어머니도 지금껏 마찬가지였다. 당신 본인의 힘으로 일가를 이뤘고 그간 아쉬운 것 하나 없었는데, 당뇨에 녹내장이 겹치자 심경에 변화가 일어났다. 수술은 잘 됐지만 의사는 시력 상실은 피할 수 없다고 했고, 윤정의 어머니는 눈이 멀기 전에 그 인간을 한번 봐야겠다고 딸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큰아버지의 상태가 많이 안 좋다고 설명했는데, 그건 사실이었다. 어쩌면 반년쯤 전, 그러니까 방문 간병인이 어느 날 아침 당신께서 본인 대변을 냄비에 담아 끓여 먹는 광경을 발견하기 전에 우리를 찾아왔다면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저도 그렇게 말했어요.” 윤정이 말했다. “그런데 믿질 않네요.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직접 모시고 와서 확인시키기도 어렵고.”
   라운지 아래로는 건물과 도로가 펼쳐져 있었다. 날씨가 맑아 멀리까지 시선이 닿았다. 실내에는 부드럽고 무의미한 음악이 흘렀다. 윤정은 나보다 대여섯 살 정도, 어쩌면 더 많은 듯했다. 모든 색을 섞으면 검은색이 되듯 그녀의 얼굴에도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서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턱과 입술은 내 것과 거의 똑같았고, 나는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 타인 앞에서 문득 등골이 서늘해졌다.
   윤정이 말했다. “어머니는 그쪽 집에서 누가 와서 제대로 얘길 해 줬으면 해요. 가능할까요? 교통비와 기본적인 비용 정도는 저희가 부담할게요.”

   이틀 뒤 나는 기차를 탔다. 열차가 곡선 선로를 돌자 오전의 햇살이 객차로 들어왔다. 나는 블라인드를 반쯤 내리고 계속 휴대폰을 보았다. 호텔 라운지에서 윤정은 어머니의 이름인 천귀자와 그녀가 대표로 재직하는 회사명을 가르쳐주었고, 검색창에 그 이름들을 집어넣자 시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이 나왔다.
   ‘#우리지역강소기업’ 시리즈는 2년 전 제작된 것으로, 영상에서 천귀자씨는 위생복에 위생모를 갖춰 쓴 채 직원들과 같이 단무지 재료를 점검하고 있었다. 시장 구석의 좌판에서 시작해 반찬가게를 거쳐 세운 작은 공장이 절임 무 제품 전문기업으로 성장하고 일본에 단무지를 수출하기까지 이른 과정을 회상하면서, 천귀자씨는 특별한 꿈이 있어서 사업을 시작했던 건 아니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혼자 애 키우는 여자한테는 기회를 안 줘요. 그럼 내가 기회를 만들어야지. 달리 방법이 없었어요. 영상 제작자가 보기에 천귀자씨는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에게 꿈과 희망을 준 인물이었고, 이에 대해 천귀자씨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운이에요, 운. 그런 게 없으면 나 같은 사람은 힘들어요. 의지와 능력이 있어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실패해요. 나 같은 사람을 롤 모델, 뭐 그런 걸로 생각하시면 안 돼요. 자기만의 꿈을 품고 각자 알아서 살아남으셔야 해요.
   나는 열차에서 내린 다음 윤정이 올 때까지 대합실에 앉아 기다렸다. 매점 옆 빈 공간에 꽃 그림과 풍경화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달콤한 슈크림 만쥬와 어묵 냄새가 역사를 은은히 떠돌았다. 십오분 뒤 윤정이 나타났다. 그녀가 몰고 온 암갈색 SUV에서는 희미하게 담배 냄새가 났다. 뒷좌석에는 가죽 서류 가방과 곱게 접은 정장 상의가 놓여 있었다.
   차가 출발하자 새삼 긴장이 되었다. 아버지는 혹시 모르니 꼭 녹취를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지만 그럴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뭘 요구한다 한들 줄 것도 없었다. 그럴 만한 건 이미 예전에 큰아버지가 들고 가서 죄다 탕진했다. 그 탕진의 소용돌이에 우리 가족도 휘말렸다. 그 때문에 몇 년을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고, 나는 양말을 갈아 신는 것만큼이나 자주 학교와 거처를 옮겨야 했다. 아버지는 가족의 재결합이 당신의 마지막 임무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그 일을 이루고 나자 인생의 기력을 죄다 소진했고, 이제는 일이 잘못될 기미만 보여도 화들짝 놀라고 늘 무언가에 쫓기는 기분을 떨쳐내지 못하는 겁 많고 소심한 사람이 되었다. 그로 인해 많은 책임이 내게로 넘어왔는데, 그건 달리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양해를 구하고 차창을 조금 내렸다. 아직은 서늘한 기운이 남아 있는 바람이 들어왔고, 하늘에서는 구름이 이리저리 떠밀리며 형태를 바꾸었다.
   “혹시 역에서 하는 전시회 보셨어요?” 윤정이 말을 걸었다. 나는 멀리서만 보았다고 대답했는데, 막상 그렇게 말하고 나니 바보 같은 소리 같았다.
   “엄마 그림도 거기 있어요.” 윤정이 계속 말했다. 수술 후 재활 차원에서 그림 교실에 등록을 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다며 열심히 그렸고, 내친김에 그림 교실 사람들과 같이 작은 전시회를 기획했다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척척 진행해서 쓱싹 이루어진 일이었다. 윤정이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늘 보아왔듯이.
   “행동력이 대단하시네요.”
   “그렇죠.” 검은색 스포츠카가 갑자기 끼어들자 윤정이 가볍게 경적을 울렸다. “그래도 이런 행동력은 발휘 안 하셨으면 좋았겠지만. 먼 데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 말은 잘 들으시거든요. 제 말만 못 알아듣죠.”
   마지막 말은 내게 하는 말이었지만 내가 들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라서, 나는 그녀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왜 천귀자씨가 큰아버지를 만나고 싶어하는지 물었다.
   “글쎄요. 말도 안 되는 이유만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어떤 이유요?”
   “어쨌든 아무리 그래도 네 아버지 아니냐, 뭐 그따위 이유.”
   십여 분 뒤 윤정은 조용하고 널찍한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까지 올라갔고, 나는 빗나갈 게 빤하다는 걸 알면서도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상상하며 거울 옆에 붙어 있는 치킨 체인점 광고 스티커를 응시했다.
   윤정을 따라 현관으로 들어가자마자 공기가 답답해졌다. 뜨뜻미지근한 습기 속에서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냄새가 났다. 자연의 냄새도 났고, 인공의 냄새도 났으며, 지나치게 향긋한 냄새가 비료 냄새와 뒤섞여 풍겼다.
   천귀자씨의 머리는 그 냄새와 수많은 화초 사이에 떠 있었다.
   당연히 과장으로, 정말로 그렇지는 않았다. 하지만 집안 전체에 화분이 널려 있었다. 베란다 유리로 들어오는 햇볕이 넓적하고 단단하며 반들반들한 화초에 반사되어 벽으로 이리저리 튀었고, 윤곽이 흐릿한 그림자들이 바닥에 얼룩처럼 배어 있었다. 천귀자씨는 은색 실이 섞인 빨간색 조끼 차림으로 가죽 소파에 등을 기댄 채 한쪽 무릎을 가슴에 끌어당긴 자세로 앉아 있다가 윤정이 왔어요, 라고 하자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왔냐, 라고 했다. 영상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였다.

절을 해야 하는지

망설이면서 내가 엉거주춤 서 있자 천귀자씨가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가 양반다리로 자세를 바꿨다. 윤정이 차를 내온 다음 주방으로 돌아가 유리컵에 물을 따랐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처음 마셔보는 맛이었다. 대추가 섞여서인지 한약 같기도 했다.
   “먼 길 오셨네.” 천귀자씨가 말했다. “그 사람이 정신이 나갔다면서요?”
   나는 윤정에게 했던 설명을 다시 했다. 천귀자씨는 가끔씩 끼어들어 세부사항을 확인했다. 정확히 언제부터? 뭘 먹었다고요? 어디에 담아서 먹었다고? 입가에 가끔 만족스러운 기색이 떠오르는 것도 같았지만 그건 그냥 내 생각일 수도 있었다. 화려하게 꾸민 손톱은 요람에서 잠든 아기처럼 무릎 위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눈동자는 안개가 자욱한 밤에 뜬 달처럼 흐릿했으며, 내 옆에 피어 있는 분홍색 꽃을 향하고 있었다. 내 말이 끝나고도 한참을 가만히 있어서 나는 그냥 일어나서 가도 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렇게 살고 있다는 건 잘 알겠고,” 천귀자씨가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 혹시 한 번이라도 내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지나가는 말로라도?”
   나는 들은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천귀자씨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녀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간수가 면회 시간이 끝났다며 열쇠 꾸러미를 짤랑거리듯 윤정이 주방 테이블에서 유리컵을 달그락거렸다. 문득 화초에 가려 보이지 않던 집 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냉장고 옆에 걸린 달력은 사찰에서 가져온 것으로, 평일은 검은 숫자로, 공휴일은 빨간 숫자로 적혀 있었으며, 날짜 아래마다 파란색으로 음력 날짜가 병기되어 있었고 왼쪽 구석에는 십이간지 그림이 조그맣게 인쇄되어 있었다.
   갑자기 천귀자씨가 손으로 무릎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에서 연골이 두둑거리는 소리가 났다. 윤정이 부축하려 했지만 천귀자씨는 손을 내저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윤정을 보았고, 윤정은 고개를 저었다. 잠시 뒤 천귀자씨가 무언가를 들고 방에서 나와 같은 자리에 앉았다. 그런 다음 들고 온 것을 내 쪽으로 부드럽게 밀었다. 검은색 가죽가방이었다.
   “그 사람한테 내가 줄 게 있어요.”
   천귀자씨가 말했다.
   “언제 줘야 하나 생각을 늘 했는데, 내가 눈이 이렇게 되고 나서는 더 미루면 안 되겠다 싶었거든. 설마 나보다 먼저 정신이 나가 버릴 줄은 몰랐는데. 그런데 한 번 마음을 먹으니까 이걸 더 여기 놔두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까 그쪽이 좀 가져가 줘야겠어.”
   나는 가방을 받아들었다. 탁상용 국어사전 한 권 정도가 들어갈 크기로, 속이 꽉 차 있었지만 무겁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정이 되면 그걸 그 사람한테 들고 가서 말 좀 전해 줘요. 이걸로 계산은 다 끝났다고. 알아들을지는 모르겠는데 알아들어도 모르는 척하겠지. 치매잖아. 핑계가 얼마나 좋아. 그래도 나는 지금 이걸로 분명히 정리를 한 거예요. 이젠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났고, 그만하면 충분해. 나는 더이상 빚진 게 하나도 없어.”
   천귀자씨가 처음으로 웃었다. 뿌옇고 흐릿한 눈에 눈물은 확실히 아닌 물기가 배었다.

   아파트를 나온 뒤 윤정이 시간 있으면 얘기 좀 하고 가자고 했다. 시장하면 식사를 하는 것도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나는 화초와 방향제와 비료 냄새만으로도 배가 충분히 불러 있었고, 횡단보도 건너편에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가 눈에 띄었다.
   카페에서 나는 얼음을 넣은 사이다를, 윤정은 망고 슬러시를 주문했다. 음료를 받아온 다음 윤정이 핸드백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약속했던 비용이라며 내게 건넸다. 나는 이럴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윤정은 어머니의 뜻이라고, 부담 갖지 말라고 했다.
   “그 가방, 저는 몰랐어요.” 윤정이 망고 슬러시를 절반쯤 마시고 나서 말했다.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고요.”
   “그래 보였어요.”
   “정말 몰랐어요.” 윤정이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검은색 가죽가방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궁금하세요?”
   “모르겠어요.” 윤정이 말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실은 그날 있잖아요, 그쪽하고 나하고 처음 만난 날, 그쪽한테 화가 나 있었어요.”
   윤정이 계속 말했다. 큰아버지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위해 사람을 썼는데, 이미 그때부터 합법과 불법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사람이 정리해서 보내는 큰아버지의 행적을 읽으면서 차츰 혐오감이 쌓였고, 대체 어머니가 왜 이런 일을 부탁한 건지 알 수가 없어졌다. 어째서 굳이 이런 인간을 다시 보고자 하는가? 과거를 파헤쳐서 뭘 어쩌겠다는 건가? 요양병원에 다녀오고 나서 나를 만나기로 한 그날은 혐오와 회의가 깨어날 수 없는 꿈처럼 깊을 대로 깊어져서 여기까지 오게 된 자신의 처지를 참을 수가 없어졌고, 자칫 내 앞에서 그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날까 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무슨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말고 사무적으로 처신해야겠다고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랑 턱과 입술이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멍한 표정으로 저쪽에서 걸어오는 걸 보자 윤정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고, 눈썹 문신을 해두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눈썹마저 닮았을 테니까. 어떤 건 다가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극복할 수 없는 벽처럼 보였던 것은 충분히 거리를 두고 볼 경우 종종 낮은 울타리였던 것으로 밝혀지곤 한다. 많은 문제가 그렇게 흘러간다. 개울을 돌아 사라지는 종이배처럼. 내가 그날 본 윤정의 복잡한 표정은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었고, 나는 내가 멍한 표정으로 걸어왔다는 대목만 빼고는 그녀의 이야기를 모두 납득했다.
   “계속 그렇게 흘려 넘기는 법을 배우는 것 같아요.” 윤정이 말했다. “매번 새로운 문제가 다가오니 늘 처음 같은 느낌이지만.”
   “저는 그냥 흘려보낼 수 없는 문제가 있어요.”
   “말씀하세요.”
   “아까 마셨던 차가 대체 뭔지 모르겠어요.”
   “두릅차에요. 사포닌이 함유되어 있어 당뇨에 좋대요. 항암 효과도 있고.”
   나는 그 효능에 반발하듯이 남은 사이다를 단숨에 마셨다. 망고 슬러시가 담긴 투명 플라스틱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컵 바닥을 둥글게 감쌌다.
   나는 가방 지퍼를 열고 안에 든 걸 꺼냈다. 천귀자씨가 돌려주겠다는 빚은 신문지에 둘둘 말려 있었다. 신문지를 풀기 시작하자 종이가 부스럭거렸다. 카페에 손님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윤정과 나 둘뿐이었는데, 카운터의 아르바이트생이 소리를 들었는지 우리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커피 테이블이 이내 옛날 뉴스로 뒤덮였다.
   마지막 신문지를 벗기자 회색 스테인리스 보온 물병이 나타났다. 나는 물병을 흔들어 보았다. 안에서 작고 단단한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고, 손끝에 희미하게 닿는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여기서 그만둔다면 그건 너무 문학적이거나 영화적일 것이다. 수수께끼를 영원히 연장하고 여운을 부여하는 고전적이고 속이 빤한 수법. 하지만 이것을 보는 쪽이 흘려보내는 것일까, 아니면 보지 않는 쪽이 흘려보내는 것일까? 이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윤정을 보았다.
   “보여주세요.” 윤정이 말했다.
   나는 물병 뚜껑을 열고 기울였다. 테이블 위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났다.

   윤정은 역까지 나를 태워서 바래다준 다음 돌아갔다. 서로 작별 인사는 하지 않았는데, 다시 볼 일이 없다는 걸 피차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기차표를 구입하고 전시장으로 갔다. ‘제1회 재활화실 전시회’라는 입간판 주위를 축하 화분 몇 개가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입간판 옆 책상에 놓인 방명록에 이름을 적었다. 그림들은 벽을 따라 걸려 있었고, 작품마다 액자 위에 조명이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천천히 움직이면서 그림을 감상했다. 커다란 그림도 있었고, 작은 그림도 있었다. 안개에 잠겨 있는 새벽의 산, 낮잠을 자고 있는 고양이, 상상 속 풍경일 것이 분명한 산속의 정자, 비 내리는 거리. 천귀자씨의 작품은 아홉 번째로, 전시작 중 유일하게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이었다. 금박을 입힌 액자 속에 윈도 바탕화면 같은 녹색 벌판이 펼쳐져 있고, 벌판 한가운데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그늘 아래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나무에 기대 졸고 있었다. 액자 밑에 〈어두워지기 전에〉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나는 한동안 그림을 바라보았다. 열차가 승강장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안내방송이 허공에서 녹아내렸고, 커다란 TV 앞에 모인 사람들이 팔짱을 끼고 뉴스를 보면서 나름의 이유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민우

소설이 ‘작은 이야기’라는 말에 대해 쓰는 동안 자주 생각했습니다.

2021/05/25
4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