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공범 / 시차
공범
너에게 그림자가 없었다
누군가 그림자만 가위로 오려낸 것처럼
신문 속 부고들과 단 한 번도 겹쳐진 적 없는
가상적 죽음을 단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깨끗한 공백이었다
오랜만이야 반가워할 겨를도 없이
어떻게 된 일이지
정오도 아닌데
네 눈에는 이 치명적인 부재가 안 보이니
길에서 우연히
너와 만나서 걸었는데 우연히
어제 본 나무를 오늘도 보았다
저것 봐 꽃 피려고
나무를 가리키는 네 손가락이
나무가 막 존재하기 시작하려는 순간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있었다 그랬으므로
나무의 그림자를 목격했다
너에게는 없는 것이 나무에게는
있었다 크고 무거워 보였다
웅크린 검은 고양이였다가 태양의 흑점이었다가 길에 모로 누워 부리 사이로 아슬아슬한 숨을 뱉고 있는 까마귀였다가 편의점 검은 비닐봉지였다가 무릎 꿇은 사람의 모습 같기도 했는데 그것은 죽음 같은 관념이나 보라색 꽃의 불길한 꽃말을 떠올리게 했는데
저것 봐
나는 네 손가락을 가리고 있는 역광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삽을 들고 따라와서
이곳을 파봐 이곳에 무언가
있는 것 같아 이 부분이 두근대 붉은 흙 부분이
하지만, 하지만
이곳에는 얼마 전에 튤립을 심어놨는데
아 그거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빗물에 다 떠내려갔을 거야
순진하기도 하지
삽을 든 사람은 크고 튼튼한 손을 가졌다
삽만큼 더럽고 오래된 손을
그를 따라가면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나는 모른다
나는 다만 흙속에 있을 뿌리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어린뿌리가 뽑혀도 뿌리를 뽑은 사람이 아니라
어린뿌리가 비난당하는 세상에 대해
생각을 하고 또 할 뿐이다
순진하기도 하지
네가 왜 그렇게 나약하고 지랄
삽을 들고 따라와봐
붉은 흙속에 맥박이 느껴져
하지만, 하지만
삽보다 녹슬고 무거운 심장을 가진 나는
발이 움직여지지 않아서 그를 따라갈 수가 없다
약한 뿌리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여기서부터는 따라오지 마
작별 선물로는 길고 검은 끈과 가위가 좋겠다
네가 내 그림자를 잘라
내가 네 그림자를 자를 게
더는 우리의 그림자가 함부로 섞이지 않도록 따로 걷자
아직 과거가 되지 않은
아직 다 아물지 않은 거리에 대해서 쓴다
골목 끝에서 실밥이 터져 나오고
길 위로 봉합선의 주름이 선명하게 보인다
경사로와 터널의 끝에 대해서
쓰고 있는 동안에 과거는 과거가 되도록
우리는 더는 물그림자로 그림자를 씻기지 않아도 돼
그림자 속에 빠져 죽은
딱정벌레를 건져 올리는 일 때문에
미간을 찌푸리지 않아도 돼
타인의 그림자와 내 그림자가 뒤섞여서
발목이 꺾이고 고개가 젖혀지고
내 몸통 위에 다른 이의 머리통이 붙어버리는
소동에 사로잡히지 않아도 돼
시차
이것 봐, 어린아이에게서
솜사탕을 뺏는 건 이렇게나 쉬워
그 어린아이가 나였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만
적은 장미가 피어있는 오월의 담장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친구는 소화기의 호스를 길게 뽑아 장미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생화는 불에 잘 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늬가 화려한 긴 뱀이 장미 가시에 찔리면서도
덩굴장미를 휘감고 있었다 사랑은 온몸이었는데
오월은 이미 여름이었고
장미는 이미 다 불타버렸다 죽었다는 것
이제 여기 없다는 것
적과 친구에게는 모두 유월이 필요해 많이 필요해 그러나
장미는 이미 여기 없지
하나,
태양은 배가 고파서 그림자를
빵처럼 뜯어먹는다
그림자는 효모처럼 부풀면서 뜯어먹히기를 기다린다
뜯어먹히는 순간 사건에 참여하지 않는다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
태양은 목이 말라서 붉은 흙의 물기를
마신다 버려진 개처럼
흙은 야금야금 없어지면서 정체를 들킨다
둘,
부서진 퍼즐 조각들이 서로에게 끌리는 자력으로
사실은 맞지 않는 조각들인데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부서졌다는 이유만으로 달라붙고 마는 결말
그렇다면 그것이 비극이 아닐 수도 있었겠다고
우연히 일어난 일은 아니다
불온하고 불완전한 자석들처럼
불에 타서 너덜너덜해진 꽃잎들처럼
피고름처럼
종결된 사건의 파편들이
복잡한 사람에게 와서 달라붙었다
이것 보라고
원성은
몰래 쓰고 있었고, 몰래 쓰고 있고, 몰래 쓰고 있을 사람. 허구 속의 신뢰할 수 없는 화자와 악역에 매력을 느낀다.
2021/06/29
4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