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소설 인간 / 감상
소설 인간
당신은 레스토랑 입구에
주차장에
자정을 넘긴 운동장에
싸구려 초상화가 즐비한
나무 아래
비스듬히 서 있다
대중을 향하여,
당신은 말이 없다
다만 이것을 지녔다
모자에서 시작되어
구두까지 연결된 선과
검은 잉크로 뒤덮인 얼굴
수백 페이지로 나누어진 그 여린 심정
간결함을 넘어
고귀함을 선보이는 실루엣
타인을 바라보지만
여러 개의 소실점으로 멀어져가는
모조리 검은
작은
모자를 쓴 수상한 당신은
몸 어딘가에 비밀을 지녔다
재킷이 바람에 나부낄 때
누군가 쏜 화살에 피가 솟구치듯
빛이 뿜어져 나온다
화살을 맞은 자는
죽거나 웃기거나 둘 중 하나는 해야겠지만
이 소설은 그렇지 않을 테니까
당신의 작가는
심드렁하고
유식하고
반발심이 있으며
수상을 한 이력이 있다
무엇보다 말 없는 동식물을 좋아하지
많은 사람이 당신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달그락달그락 포크가 접시를 건드리는 소리와
나이든 서버가 카트를 끌고 오가는 소리
무언가에 매료되어
동공이 확장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인다
그들은 당신의 등 뒤에서
그곳이 어딘지
동두천인지 텍사스인지 알려주지 않은 채
계속 소음을 발생시킨다
소설
싸라기눈, 곁눈질
소설
눈 속에 묻힌
얼어붙은 흰 개의 눈동자
소설은 춥다
당신의 검은 혀는 인간의 잇몸을 훑으며
인간을 모방하고
인간을 이룩하며
무구한 자를 살해하고
복잡한 자를 요약하며
만화 인간의 커다란 눈을
증오한다
인간의 눈을
그 여린 심정의
그 깊은 심연을
그리도 동그랗게 그리다니
당신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다
감상
풍화된 카펫 위로
저녁 빛이 드리워진 실내
사물의 언저리마다 부유하는 먼지와
잠연히 가라앉은 그림자들
나란히 앉은 두 노인은
과거의 주전자를 떠올린다
두 사람이 검은 머리일 때 함께 사용하던
은빛 물건
아내는 튤립을 넣고
남편은 돋보기를 넣는다 머릿속에서는
가스 불이 켜지고
꽃과 안경이 보르르 끓어오르는 동안
아요……… 어서요……
아내가 남편의 무릎을 건드린다
남편의 바지 주머니에서
새 모이가 흘러나온다
아내의 얼굴에 볕뉘가 들자
한 장면이 작아진다
색이 다른 세 송이의 튤립,
탁상용 거울과 녹색 철제 서랍장
자수가 놓인 옷깃 위로
부드러운 목주름을 드러낸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할머니와
무릎에 놓인 잡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골몰한 할아버지의 옆모습이
가지런한 쿠션들처럼
가정집 소파 위에 배치된다
새는 없지만, 1977
Oil on canvas
183×183cm
미풍이 인다
깃털이 홀홀 허공을 떠다닌다
장수진
아침의 숲과 석양을 좋아해 오전 산책과 오후 라이딩을 즐긴다. 책을 더 읽고 꾸준히 쓰려한다.
2021/07/27
4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