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를 닦다가 칫솔이 부러졌다. 윗니 안쪽을 닦다 부러지는 바람에 입천장이 까졌다. 침을 뱉어보니 피가 조금 섞여 있었다. 나는 부러진 칫솔을 들고 한참을 서 있었다. 뭔가 다른 것을 해야 해. 얼른 치약으로 욕실 거울에 웃는 얼굴을 그렸다. 칫솔이 부러진 건 잊고 치약으로 웃는 얼굴을 그렸다는 것만 기억하려고 했다. 언니한테 이 이야기를 해주면 틀림없이 잘했어, 잘했어, 하고 두 번 반복해서 칭찬을 할 것이다. 언니는 재수 없는 일이 생기면 몇 분 안에 기분 좋아지는 일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야 더 나쁜 기운이 다가오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언니는 내 손을 잡고 매일 등교를 시켜주었다. 그때 언니는 열일곱 살. 초등학교 일 학년이었던 나는 아침마다 울었다. 술에 취한 아빠가 시도 때도 없이 화를 냈기 때문에 운 게 아니었다. 언니가 나를 버리고 떠날까 봐 울었다. 언니와 나를 연결해줄 엄마가 사라졌으니. 게다가 우리 아빠는 못된 새아빠였으니까. 학교에 가는 길에 언니는 예쁘다는 말을 자주 했다. 개똥을 보아도 예쁘다고 했다. 그리고 내게 그 말을 따라 하게 했다. “저 똥은 참 예쁘게 생겼네.” “저 돌멩이도 참 예쁘게 생겼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모든 사물에 얼굴이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와 나는 나무 아래에서 웃는 얼굴을 한 낙엽, 우는 얼굴을 한 낙엽, 장난꾸러기 얼굴을 한 낙엽들을 찾아냈다. 깨진 보도블록에도 얼굴이 들어 있었다. “저 얼굴은 코가 깨졌네. 그래도 참 예쁘네.” 그렇게 여섯 달이 지나자 나는 혼자 학교에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자 나는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빵 봉지만 보아도 웃는 아이가 되었다. 그런 언니가 오늘 수술을 한다. 그러니 부러진 칫솔을 잊으려면 치약으로 거울에 낙서를 할 수밖에. 수건으로 얼굴을 닦은 다음 거울을 닦으려다 그만두었다. 대신 치약을 짜서 웃는 입 모양을 더 크게 그렸다. 언니는 눈 밑에 점이 있으니 그것도 그렸다.

   지하철역을 가려면 걸어가거나 마을버스를 타야 했다. 지난주에 나는 마을버스에서 가방에 매달아 둔 인형을 잃어버렸다. 이민을 가기 전 영주가 자기 가방에 달고 다니던 것을 내 가방에 달아주면서 말했다. 아주아주 운이 좋은 친구가 준 거니 앞으로 행운이 함께 할 거라고. 영주는 로또 복권 2등에 두 번이나 당첨된 적이 있었다. 1등은 아니지만 2등을 두 번이나 한 것도 엄청나게 운이 좋은 거라고 영주는 자주 말했다. 그것 말고 놀랄만한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는데도 영주는 늘 자신이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 인형을 잃어버리고 며칠 후 나는 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다. 모든 게 행운의 인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야. 나는 화가 나서 그날 이후로 마을버스를 타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는 길을 건너 아파트 단지로 들어갔다. 아파트를 가로질러 반대쪽 후문으로 나가는 길이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이 아파트는 월요일에 장터가 열리는데 내가 일하는 카페는 매주 월요일이 휴무여서 나는 종종 이곳에서 군것질거리를 사먹곤 했다. 닭강정이나 돈가스를 사서 낮술을 하기도 했다. 올봄에 132동 앞에 있는 놀이터에서 다친 아이를 보았다. 한 아이가 미끄럼틀을 타다 넘어지는 걸 보고 놀라 달려갔다. 앞니가 부러졌다. “괜찮니?” 내가 묻자 아이가 침을 바닥에 뱉더니 대답했다. “전 의젓해서 괜찮아요.” 그렇게 말했지만 아이는 엄마가 오자 울기 시작했다. 엄마의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 놀이터를 지나자 그 풍경이 다시 생각났고 그러자 웃음이 났다. 나는 아이가 된 기분으로 미끄럼틀에 올라가보았다. 생각보다 높았다. 한 번에 미끄러질 줄 알았는데 중간에 멈췄다. 그래서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래로 내려와 다시 한번 미끄럼틀에 올라갔다. 이번엔 한 번에 성공하리라. 하지만 역시 중간에 멈추고 말았다. 미끄럼틀 손잡이에 스티커를 붙였던 자국이 남아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스티커는 보라색이나 파란색 드레스를 입은 공주였을 것 같았다. 후문으로 나가니 붕어빵 리어카가 보였다. 붕어빵이라니. 몇 년 전 헤어진 남자친구는 겨울이면 천 원짜리를 꼭 가지고 다녔다. 붕어빵을 사 먹기 위해. 지갑을 열어보니 천 원짜리는 없고 만 원짜리만 있었다. 구천 원을 거슬러달라기가 미안해서 나는 삼천 원어치 달라고 했다. “있잖아요. 오늘 중요한 날이니 아주 예쁜 붕어로만 주세요. 찌그러진 놈 말구요.” 나는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남자친구와 헤어질 때는 천원에 세 마리였는데 이제는 천원에 두 마리였다. 아주머니가 만들어놓은 붕어빵을 보더니 내게 새로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비늘 하나하나 살아 있는 붕어빵 구워줄게요.” 아주머니가 붕어빵을 새로 만드는 동안 나는 찻길 건너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을 수리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나는 두 마리는 머리부터 먹고 두 마리는 꼬리부터 먹었다. 아주머니 말대로 비늘이 선명하게 보였다. 뱃속이 금방 따뜻해졌다. 남은 두 마리를 봉지에 담아 가방에 넣었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칠하다 만 대문이 보였다. 인부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예전의 색은 초록색이고 새로 칠하려는 색은 주황색이었다. 칠할 때 바닥으로 떨어진 페인트 흔적들이 보였다. 점점이 떨어진 흔적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별자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페인트 자국들을 손가락으로 연결해보았다. 북두구성. 점이 아홉 개라 아홉 개로 국자를 만들어보았다. “이것도 예쁘네.” 나는 큰 소리로 말해보았다.

2

   내려야 할 역에서 내리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2호선을 한 바퀴 도는데 한 시간 삼십 분이 걸린다고 되어 있었다. 피가 몸을 한 바퀴 도는데 46초가 걸린다. 붕어빵을 꼬리부터 먹었던 남자친구는 그 말을 자주 했다. 내가 화를 낼 때면 46초만 가만 있어보자고 말했다. 피가 오른쪽 심장에서 나와 몸을 한 바퀴 돌고 왼쪽 심장으로 돌아가는 순간을 상상해보자고. 그 말을 들으면 나는 더 화가 났고 남자친구에게 고함을 질렀다. “너는 반 아이들에게 도둑년이란 말을 안 들어봐서 그래.” “너는 화단에 버려진 실내화를 울며 찾아본 적이 없어서 그래.” “넌 첫 생리를 할 때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그래.” 내가 고함을 지를수록 남자친구는 입을 다물었다. 남자친구가 떠나고 난 후에야 나는 46초를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남자친구가 생각날수록. 다시 전화하고 싶은 마음이 들수록. 언니는 고등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다음날 집을 나갔다. 떠나기 전날 언니는 내게 떡볶이를 해주었다. 국물떡볶이였다. 그걸 만들면서 언니가 말했다. “오뎅을 많이 넣고 다시다도 한 숟가락 넣어. 알았지? 간 보고 맛없으면 무조건 다시다야.” 언니가 떠난 것을 알았을 때 아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전날 언니가 끓여놓은 김칫국을 말없이 먹기만 했다. “시원하네.” 아빠의 말에 내가 말했다. “다시다 맛이야.” 언니가 떠났지만 나는 등굣길에 본 솔방울을 보고 예쁘다고 말했다. 교실로 가기 전에 시소에 혼자 앉아서 좋아하는 동요를 불렀다. 빨개졌대요. 빨개졌대요. 길가의 코스모스 얼굴. 1절을 한 번 부른 다음 가사를 바뀌 다시 불렀다. 빨개졌대요. 빨개졌대요. 사랑에 빠진 언니 얼굴.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을 들고 집 앞까지 찾아온 남자를 본 뒤에 나는 코스모스 동요 가사를 바꿔 부르며 언니를 놀렸다. 언니는 종종 이렇게 가사를 바꿔 나를 놀렸다. 빨개졌대요. 빨개졌대요. 시험을 망친 동생 얼굴. 나는 그렇게 예쁜 것만 보려 했지만 아이들은 나를 못생겼다고 놀렸다. 그 모든 게 아침마다 머리를 예쁘게 따주던 언니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림역에서 아이 둘을 데리고 한 여자가 탔다. 남자아이들은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신발만은 달랐다. 나를 가운데 두고 오른쪽에 아이 둘이 앉고 왼쪽에 엄마가 앉았다. “자리 바꿔 드릴게요.” 내가 말하자 아이 엄마가 괜찮다고 했다. 아이들도 말했다. “괜찮아요. 엄마 잔소리 안 듣고 좋아요.” 그러면서 아이들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낙성대역에 도착했을 때 엄마가 아이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허리 똑바로 펴야지.” 아이들에 건성으로 네, 네, 하고 대답했다. 잠시 후 한 아이가 다리를 흔들자 또 엄마가 말했다. “다리 조심하고.” 여자와 아이들은 서초역에서 내렸다. 나는 서초역에서 잠깐 눈을 감았다. 잠실역에서 눈을 떠보니 오른쪽에는 중년 남자가 앉아 있고 왼쪽에는 눈썹 문신을 짙게 한 중년 여자가 앉아 있었다. 건대입구역에서 중년 여자가 일어나더니 중년 남자에게 말했다. “여보, 내려야 해.” 나는 둘이 부부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앉아 있을 때는 남남처럼 있더니 내릴 때 보니 부부는 손을 잡고 있었다. 성수에서 탄 여자는 계속 전화를 했다. 남동생이 돈을 빌려가 갚지 않는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큰오빠에게 하소연을 했다. “천재 동생 태어났다고 오빠가 하도 칭찬을 해서 그런 놈이 된 거야.” 여자는 말했다. 다음에는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언니, 그 새끼. 내가 고소해 버릴 거야.” 여자의 통화를 들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고소해요. 고소해. “알아, 알아. 엄마 봐서 참는 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여자의 말을 듣자 나는 방금 했던 생각을 취소했다. 그래. 참아요. 참아요. 오늘 우리 언니 수술 날이니 참아요.

   동대문에서 할머니 두 분이 탔다. 한 할머니는 허리가 굽었고 다른 할머니는 작은 수레를 끌고 있었다. 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앉았다. 내가 자리 바꿔드릴까요? 하고 묻자 두 할머니가 동시에 말했다. “우리 모르는 사람인데?” 그리고 몇 분이 지나자 갑자기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말을 했다. “젊은 사람이 참 착하네. 자리도 바꿔준다 그러고.” 그러자 다른 할머니가 그 말을 받아 말을 이었다. “우리 아들 소개시켜주고 싶네. 근데 직장도 변변찮은 노총각이라 아가씨가 아까워.” 그 말을 시작으로 할머니들은 나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결혼을 하지 않는 자식들 이야기를 하다, 남편 죽은 이야기를 하다, 공부를 잘하는 손주 자랑을 하다, 젊은 시절에 하도 농사를 지어 안 아픈 관절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한 할머니는 마늘과 고추 농사를 지었고 다른 할머니는 담배 농사를 지었다. 할머니들은 가운데 앉아 있는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수다를 떨었고 나는 유령이 된 기분이었다. 오른쪽 앉은 할머니가 왼손을 내밀더니 끝이 휜 새끼손가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놈의 콩 농사. 밭매다 호미에 인대가 끊어져서 이렇게 되었어.” 할머니가 손을 다친 것은 열네 살 때. 밭을 매다 중간에 새참도 만들어야 해서 마음이 급했다. 그래서 호미로 왼손 새끼손가락을 내리치고도 아픈 줄 몰랐다고. 피가 나서 천으로 둘둘 말고 수제비를 끓였다고. 그러자 왼쪽에 앉은 할머니가 오른손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검지 손톱이 찌그러져 있었다. “나는 이 손톱이 다섯 번이나 빠졌다우.” 그러면서 할머니가 말했다. “그놈의 새참. 하도 국수를 끓여서 멸치 국물이라면 지긋지긋해.” 할머니는 결혼을 하면 국수는 쳐다도 보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남편이 하루에 한끼는 국수를 먹었다. 그래서 또 국수를 끓이고. 큰아들이 그 식성을 물려받아 또 끓이고. 근처에 사는 큰 손녀는 사흘에 한 번씩 찾아와 국수를 끓여달라고 했다. “평생 잔치국수 끓일 팔자지. 잔치도 아닌 날에 말이야.” 할머니의 말을 듣고 보니 할머니의 몸에서 멸치 비린내가 나는 것도 같았다. 아버지도 국수를 좋아했다. 멸치 국물에 호박과 양파가 들어간 국수를. 나는 멸치 따위는 넣지 않았다. 그냥 맹물에 다시다를 넣고 끓였다. 멸치 다시다나 냉면 다시다로 만들면 아버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점점 요리가 는다고 칭찬까지 받았다. 손톱이 다섯 번이나 빠진 할머니가 이번에는 손을 뒤집어 바닥을 보여주었다. 엄지손가락 끝부분부터 손목까지 길게 흉터가 나 있었다. “낫에 베어서 이렇게 되었지. 오래되어서 이제 희미해졌네.” 할머니는 왼손 검지로 흉터의 선을 따라 그었다. 그러자 오른쪽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내 쪽으로 몸을 숙여 흉터가 있는 손바닥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작은아버지가 이랬는데 내가 작은아버지 장례식에 가서 부조도 안 하고 밥만 세 그릇 먹었지.” 추석날 제사를 마치고 음복을 하다 형제들간에 말싸움이 일어났다. 그때 작은아버지가 형제들에게 낫을 휘둘렀는데 하필이면 그 순간 할머니가 방에 들어선 것이다. 새로 만든 안주를 가지고. “작은아버지가 육전을 부쳐오라 그랬거든. 추석이라 먹을 것도 많았는데 육전이라니. 그냥 있는 거 처먹었으면 오죽 좋았어. 염병.” 할머니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염병.” 오른쪽 할머니가 더 큰 소리로 염병을 따라 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람들 몇몇이 고개를 들어 우리 쪽을 보았다. 나는 할머니들과 일행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살짝 고개를 좌우로 저어보았다. 맞은편 사람들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그걸 보자 고개를 저은 내가 우습게 느껴졌다. “염병.” 나도 할머니들을 따라 해보았다. 나는 스물 셋이 되어서 언니를 다시 만났다. 그동안 나는 밤마다 언니를 저주했다. 다시 만나게 되면 가장 상처 되는 말을 해주리라고 밤마다 연습을 했다. 하지만 언니는 두 살이 된 조카를 데리고 나왔다. 이마에 캐릭터 밴드가 붙어 있었다. 어쩌다 다쳤냐고 물었더니 모기에 물렸는데 그걸 붙여 달라 그래서 붙여준 거라고 했다. 그게 십이 년 만에 만난 언니와 나눈 첫 대화였다. 두 살이 된 조카는 뽀로로 밴드를 붙이고 싶어서 아무데나 아프다고 엄살을 피운다고 언니는 말했고 그 말에 나는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다. 오른쪽에 앉은 할머니가 손바닥에 흉터가 길게 난 할머니의 손을 쓰다듬었다. “나도 있지. 나도 이거 있어.” 그러면서 자신의 손바닥을 보여주었다.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흉터가 보였다. “남편이 일찍 죽고 식당에서 일을 할 때였는데 그만 강도가 들었거든.” 부엌에서 양파를 썰고 있는데 칼을 들고 강도가 들어왔다. 강도도 칼을 들고 할머니도 칼을 들고. 강도가 돈을 달라고 하자 할머니는 강도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돈을 빼앗으려면 카운터로 가야지 부엌으로 오면 어떻게 하냐고. 강도는 있는 돈이라도 내놓으라고 했고 할머니는 없다고 했고, 강도는 칼을 내려놓으라 했고 할머니는 뒷문으로 조용히 나가라 했고, 그렇게 실랑이를 하다 그만 칼에 베이고 말았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낫에 손을 베인 할머니가 강도에 손을 벤 할머니의 손을 쓰다듬어주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두 할머니가 서로의 손을 쓰다듬는 것을 보았다.

   3

   “안 아프셨어요?” 내가 묻자 두 할머니가 대답했다. “이제 아팠던 건 기억도 안 나.” “맞아. 난 지금 허리가 더 아파.” 나는 할머니들에게 허벅지 상처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 생각을 하자 흉터 부위가 간질간질해졌다. 이십 년이 지나고 삼십 년이 지나면 괜찮아질까? 오십 년쯤 되면 하나도 기억이 안 날까? 라면을 끓이다 허벅지에 쏟은 게 시작이었다. 찬물로 씻으니 아픈 느낌이 사라져서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버지가 지방 공사 현장에 가서 일주일에 하루만 왔으므로 나는 누구한테 말하지 않고 차가운 물수건을 허벅지에 올려놓고 잠을 잤다. 다음날 일어나보니 물집이 잡혀 있었다. 서랍을 뒤져 아무 연고나 바른 다음 압박붕대로 허벅지를 감았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는 배구부가 있었다. 그중 한 아이가 나와 같은 반이었는데 늘 양팔에 압박붕대를 감고 있었다. 나는 그게 부러웠다. 날 건드리지 마. 그럼 니들도 이렇게 붕대를 감게 될 거야.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상처에서 진물이 났다. 붕대는 살에 달라붙었고 그것을 떼어내면서 나는 언니의 욕을 했다. 아프면 아플수록 통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샘통이야,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중에 보건 선생님에게 상처를 들켰을 때 선생님은 내 등을 때리며 말했다. “이 미련한 것아.” 그러면서 선생님은 소독약을 한 통이나 허벅지에 부었다. 허벅지 안쪽에 커다랗게 흉터가 남았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엉덩이 모양으로 보였다. 간지러워 흉터를 긁다 보면 엉덩이를 긁는 기분이 들었다. “저도 여기 흉터가 있어요.” 나는 오른손으로 오른쪽 허벅지를 두드렸다. “보여줄 수는 없지만 저도 여기에 있어요.” 오른쪽에 앉은 할머니가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다행이네. 안 보여서 다행이네.” 왼쪽에 앉은 할머니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코를 풀었다. 그러고는 말을 했다. “응. 자꾸 보면 생각나거든. 난 세수를 할 때마다 작은아버지가 생각나. 그래서 더 용서가 안 되는 건가 봐. 아가씨는 목욕할 때도 허벅지는 보지도 마.”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할머니들은 신도림역에서 내렸다. 그제야 나는 내려야 할 역을 또 지나쳤다는 것을 알았다. 한 바퀴를 더 돌면 수술 시간에 맞춰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다음 역에서 내려 반대편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역에서 나왔더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내렸는지 바닥에도 제법 눈이 쌓여 있었다. 하얀 눈을 보면서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성긴 눈이 내리네. 그렇게 말하면 늙은이가 된 기분이었다. 눈송이는 아주 커 보이고 시간은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말을 처음 들었던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담임이던 국어 선생님이 눈 내리던 어느 날 창가에 서서 그 말을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는데 가슴에 구멍이 난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빨리 늙고 싶었다. 십 대를 건너뛰고, 이십 대도 건너뛰고, 삼십 대도 건너뛰고. 그래서 눈만 내리면 나는 그 말을 중얼거렸다. 병원을 향해 걷다가 털모자를 파는 노점상을 보았다. “제가 직접 뜬 모자예요. 눈 내리는 날 쓰면 딱이에요.” 노점상 청년이 소리를 쳤다. 얼굴을 보니 나보다 더 어려 보였다. “정말 직접 떴어요?” 내가 묻자 청년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열 살 때부터 뜨개질을 좋아했어요. 그것 때문에 우리 엄마한테 얼마나 혼이 났다고요. 지금은 제가 뜬 옷만 입으세요.” 나는 언니에게 줄 모자를 하나 샀다. 그리고 목도리가 붙어 있는 아동용 털모자가 있어서 그것도 샀다. 언니가 수술을 받는 동안 조카랑 눈 구경을 하리라. 조카가 털모자를 쓴 모습을 상상하자 웃음이 났다. 조카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청년이 모자를 봉지에 담아 내게 건네면서 말했다. “예쁘게 쓰세요.” 그 말이 좋아 나는 똑같이 대답했다. “예쁘게 쓸게요.” 병원에 거의 다 와서 앞서 걷던 남자가 넘어지는 걸 보았다. 엉덩방아를 세게 찧었다. 그 모습을 보고 뒤에 가던 사람이 달려갔다. 그리고 넘어진 사람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러다 둘 다 다시 넘어졌다. 둘이 바닥에 앉은 채로 웃었다. 하하하.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일어나 엉덩이를 털고는 나란히 길을 걸었다. 나는 남자들이 넘어진 자리에 가보았다. 이 자리만 그늘이 진 것도 아닌데 다른 곳과 달리 살얼음이 얼어 있었다. 나는 살얼음을 폴짝 뛰어넘었다. 나는 안 넘어지지. 메롱. 속으로 그렇게 말하며 병원 정문을 통과했다. 입구에서 지도를 한참 들여다본 뒤 언덕길을 따라 본관으로 걸어갔다. 할머니 한 분이 한쪽 다리를 절뚝이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할머니, 어디까지 가세요? 부축해드릴까요?” 나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그리고 눈 오는 날은 절대 손잡으면 안 돼. 그럼 하나 넘어질 거 둘이 넘어진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그리고 나보고 자기는 아주 느리게 걸으니 앞서 걸어가라고 말했다. 나는 할머니를 지나쳐 걸었다. 병원 본관 앞에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보였다. 그 앞에 루돌프와 썰매를 탄 산타의 모습이 전구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걸 보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나는 루돌프 사슴코는 매우 반짝이는 코. 노래를 흥얼거려보았다. 그리고 동요를 다 부르기도 전에 그만 꽈당.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엉덩이가 얼얼했다. 나는 넘어진 김에 누워서 내리는 눈을 보았다. 속으로 46초를 세었다. 넘어진 걸 기억하는 피가 온몸을 돌다 다시 심장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러자 먼 미래의 모습이 보였다. 조카의 결혼식에 초를 밝히는 언니의 모습이었다. 아주 고운 한복을 입고 있었다. “괜찮아요?” 다리를 절뚝이며 걷던 할머니가 다가와 내게 물었다.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보였다. “할머니, 얼굴이 예뻐요.” 내가 말했다.

윤성희

나는 소설을 쓸 때 주인공이 웃는 장면을 먼저 상상한다. "괜찮다”는 말이 소설에 한 번씩은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2021/12/28
4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