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사이의 일이었다. 옥수수밭에 거대한 길이 났다. 길의 소실점은 지평선과 맞닿아 아득했다. 폭이 10미터는 되니 족히 열댓 포대는 수확할 면적이었다. 쓰러진 옥수숫대들은 뽑히거나 부러지지 않았다. 다만 하나같이 태양이 뜨는 방향을 향해 휘어 있었다. 그것은 흡사 거대한 롤러로 무심하게 밀어버린 모양새라서, 아무리 봐도 그 이유나 목적을 알 수가 없었다. 우리 노동자들은 할말을 잃고 삼열 종대를 유지한 채 서 있었다. 마스터만이 죽일 듯한 표정으로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지금 자백하면 살려주겠어.”
    마스터가 마치 죄인을 추궁하듯 말했다. 열 포대면 세 사람이 하루를 달라붙어야 수확할 수 있는 양이었다. 즉 한 팀의 일당이 날아가는 셈이니 적은 손해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마스터도 화가 날 만 하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산과 납득은 이곳 T에서 제정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불길하네. 한두 번도 아니고.”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갑자기 웅얼거리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마스터는 위협이 먹히지 않자 배알이 꼴렸는지 대뜸 꺼져버리라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은 밭을 흘긋거리며 하나둘씩 식당으로 돌아갔다. 다들 조식을 먹다 말고 소집을 당해 굶주린 터였다. 유진과 또다른 유진도 사람들 틈에 섞였다. 나 역시 그 뒤를 따르려던 참이었다.
    “너는 남아.”
    마스터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나는 철제 의자에 앉아 마스터를 기다렸다. 안쪽에 소파가 있었지만 왠지 앉아선 안 될 것 같았다. 이곳 T로 온 첫날, 계약서에 사인을 하기 위해 삼십 초간 머무른 걸 빼면 관리소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이곳의 모든 건물이 그렇듯 태양열을 한껏 흡수한 컨테이너는 찜통같이 더웠다. 그러나 그래도 여긴 벽에 선풍기가 두 대나 달려 있었고 마주보고 있는 책상 옆에는 작은 냉장고까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살 만한 곳처럼 보였다.
    오래지 않아 마스터가 담배 냄새를 풍기며 들어왔다. 그는 두 대의 선풍기를 모두 책상 쪽으로 돌려놓고는 의자에 앉았다. 육중한 무게에 눌린 가죽이 찌걱거리며 늘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밀짚모자를 벗어 땀을 훔쳤다. 새카맣게 탄 얼굴에서 이마만큼은 희고 기름졌다.
    “너 외국인 팀이지? 그중에 말 없는 놈.”
    ‘외국인 팀’이란 나와 유진, 그리고 또다른 유진 셋을 의미했다. 그리고 우리를 대표하는 ‘외국인’은 단연 또다른 유진이었다. 유진과 나는 인접국 출신인 반면 또다른 유진의 고향은 거의 지구 반대편이었다. 나는 네, 라고 대답하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터는 책상 서랍에서 계약서뭉치를 꺼내어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모두 이곳 노동자들의 것이었다. 그는 그중에 한 장을 꺼내 책상에 올려놓더니 내게 내밀었다. 선풍기 바람에 펄럭거리는 종이 밑면에 또다른 유진의 사인이 있었다.
    “몰래 그 놈을 좀 감시해봐. 돈은 일당 최고치로 쳐주지. 이유는 알고 있겠지?”
    ‘길’ 때문인 것 같았다. 이주 전 쯤, 처음으로 길이 났을 땐 모든 이들은 외딴 농작지에 의례히 일어난 회오리바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쓰러진 옥수숫대의 옥수수들이었다. 하나같이 검게 말라붙어 상품 가치가 없었다. 마스터는 농장주에게 보고하거나 우리에게 화살을 돌리지 않았다. 우린 그저 떠돌이 노동자들이었고 밭을 망칠 이유도 힘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로 벌써 세번째 길이었다. 장소만 달랐지 모두 이곳 T의 중심부에서 1킬로미터 이내에서 벌어진 일들이었다. 마스터 안에서 드디어 뭔가가 발동한 게 틀림없었다. 이를테면 T의 유일한 마스터로서 우리에게 뭔가를 보여줘야겠다는 심보 같은 것이었다.
    또다른 유진을 본보기로 찍은 건 비겁하지만 현명한 선택이었다. 역시 마스터다웠다. 나는 또다른 유진을 싫어하지 않았지만 마스터의 말을 거스르는 건 바보짓이었다.
    “그런데 왜 저죠? 우리 팀엔 또 유진이라는 친구가 있어요. 이 유진 말고 다른 유진.”
    “그거야 네가 여기서 제일 남자답지 않으니까.”
    마스터는 장난기 하나 없이 말했다. 나는 울컥했지만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로 침묵했다. 또다른 유진을 감시할 거란 사실을 내게 말한 이상 그건 제안보다는 명령에 가까웠다. 나로서도 적당히 감시역을 해주고 편하게 돈을 버는 게 이득이었다. 마스터는 마음에 들었다는 듯 냉장고에서 맥주 한 병을 꺼내주었다. 그리고 오늘 밤에 다시 오라며 나를 내보냈다.
    관리소를 나오자마자 욕을 중얼거리며 맥주를 마셨다. 근 한 달 간 미지근한 맥주밖에 먹지 못했던 것이다. 곧 온몸에 굴욕적이면서도 짜릿한 한기가 돌았다.

    이곳 T의 노동자들은 200명에 육박했다. 세 명으로 이루어진 각 팀은 하루 종일 배정된 밭에 들어가 옥수수를 수확했다. 가로세로 70미터마다 붉은 깃발이 하나씩 꽂혀 있었는데 그 정사각형이 하나의 구역이었다. 우리 ‘외국인 팀’은 지난 한 달간 다섯 개의 구역을 갈아치웠다. 이번 배정은 지옥 그 자체였다. 밭 한가운데에 동네 교회만 한 풍력발전기가 하루 종일 돌아가고 있었다. T에서 밀랍 따위를 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T가 가진 건 오직 옥수수, 그저 옥수수였다. 밭에 들어가자마자 옥수수이파리부터 단단하게 말아 귀를 막았다. 섬유질을 가볍게 헤치고 온 프로펠러의 굉음이 당구공마냥 머릿속에서 굴러다녔다. 옥수수이파리를 젖혀가며 또다른 유진을 찾아다녔다. 옥수숫대들은 나보다 한 뼘은 더 컸으며 모두 같은 뿌리에서 자라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빼곡했다. 운 좋게 그가 가까이 있지 않았더라면 한참을 헤맸을 거였다.
    또다른 유진은 세 동작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잡고, 돌리고, 놓기. 그의 손에 닿은 옥수수는 크림 덩어리처럼 부드럽게 자루로 떨어졌다. 더군다나 그는 양손잡이였다. 마른 어깨와 팔이 빠르고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젤과 진물로 범벅이 된 상반신에 햇빛이 반짝거렸다. 그의 실력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역시 넋이 나가는 광경이었다. 자루로 떨어진 옥수수 하나가 튀어나왔다. 또다른 유진은 그제야 꽉 찬 자루를 끈으로 묶으려 허리를 숙였다. 생선가시 같은 등뼈가 도드라졌다. 나는 이파리 사이로 더 몸을 숨겼다. 그는 허리에 통증이 온 듯 얼굴을 찡그렸다. 땀 한 방울이 얄쌍한 턱을 타고 흘렀다. 그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빈 자루를 가지고 밭 안으로 사라졌다. 한숨이 나왔다. 이건 정말 무의미한 짓이었다.
    머뭇거리는 사이 뒤쪽 옥수숫대 사이에서 유진이 불쑥 튀어나왔다. 놀라서 나자빠질 뻔 한 나를 잡아 일으키는 손이 사포처럼 거칠었다. 유진은 심각한 얼굴로 뭐라고 말했다. 귀에서 옥수수이파리를 빼냈다. 프로펠러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손을 귓바퀴에 둥글게 대고 다가섰다. 유진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내 귀를 붙잡고 외쳤다.
    “저 외국인 놈 짓이라고!”
    나는 불에 덴 듯 물러났다. 검붉은 얼굴에서 청록색 눈알 한 쌍이 번들거렸다. 나는 유진이 끌고 가는 대로 길가로 나왔다. 유진은 담배부터 한 대 꺼내 물었다. 그리고 담배 연기를 내 얼굴이 풍겨대며 횡설수설 거렸다. 보급 담배 특유의 싸구려 냄새에 머리가 아파왔다. 요는 간단했다. 또다른 유진이 어제 새벽 숙소를 나가는 것을 보았다는 거였다.
    "단지 그 이유로?"
    나는 되물었다. 화장실이건 샤워장이건 모두 숙소 밖에 있었다. 유진은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더니 침을 툭 뱉었다.
    “그놈 아니면 누가 그랬겠어? 말해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상식은 몰상식을 이길 수 없는 법이었다. 요즘 들어 더 튀어나온 광대뼈가 그의 인상을 고집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유진은 마스터와 같은 계산속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또다른 유진이 싫은 것이었다. 담뱃불을 발로 비벼 끈 유진은 늘어난 셔츠를 끌어올려 땀을 닦아냈다.
    “한계야, 여기.”
    유진이 중얼거렸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리 멀리 내다보려 해도 누런 옥수수밭이 시선의 끝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것이 T의 지평선이었다. 그 너머에선 지금도 옥수수 알갱이들이 뻑뻑한 이파리를 밀어내며 자라고 있었다. 창살 같은 햇볕은 우리에겐 발진의 근원이었지만 저들에게는 생명의 원천이었다. 나는 가끔 이 햇빛 아래 있는 우리와 옥수수 중, 무엇이 '제대로' 살아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러니 자존심이 센 유진에게 T는 미치기 딱 좋은 곳이었다. 마스터가 감시역을 유진이 아닌 내게 맡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유진은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밭으로 돌아갔다. 나는 숨을 한 번 들이켰다. 구수하고 달큼한 냄새가 비강을 타고 머리끝까지 올라갔다. 하늘은 고요하고 눈부셨다. T에 온 후로 비가 내리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지역에서 짧은 기간 동안 세 번이나 회오리바람이 불었다면 그건 이변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떠나면 그만이었다. 여긴 T였다.

    T에 오던 날이었다. 달리는 트럭 짐칸에서 우리는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T는 엄연히 외국이었지만 우리나라와 같은 인접국에겐 공용농장이나 다름없었다. 국경 개념이 약하기도 하거니와 T부터가 노동자라면 살인자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트럭에는 중학교에나 가야 할 풋내기부터 머리가 희끗한 노인까지 약속이나 한 듯 멍한 얼굴로 밭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 여름철에 옥수수를 따기 위해 국경을 넘는 인생들이란 뻔한 것이었다.
    스쳐가는 트럭들엔 비료 더미 껍데기가 쌓여 있거나 혹은 텅 비어 있었다. 반나절 째 변할 줄 모르는 풍경 속에서 T양만이 서서히 궤도를 따라 져갈 뿐이었다. 빠르게 번져가는 누런 옥수숫대의 잔상은 어렸을 적 보았던 도심의 불빛을 떠올리게 했다. 삶의 반을 수도에서 살아봤다는 건 귀한 경험이었다. 열네 살이 될 무렵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발령으로 한적한 시골 마을로 터를 옮겨야 했다. 젊은 아버지에겐 운이 없는 일이었다. 얼마나 운이 없었냐면, 강물을 잘못 마시고 박테리아 감염으로 죽고 말았다. 시골 생활을 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병원에 실려 가던 아버지를 비웃던 사람들에게 큰 악의는 없었다. 아마 짓궂은 신고식 정도로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가장 많은 조의금을 낸 건 유진의 아버지였다. 그는 그 마을의 제일가는 부호로 거대한 포도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유진은 트럭 밖으로 토악질을 해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더이상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던 그를 트럭에서 만나는 건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는 학창 시절 운동클럽에서 부풀린 근육과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머리색도 밝았으며 이목구비도 가늘었다. 나라가 위아래로 길고 기후가 다채롭다보니 출신지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기는 차이였다. 별 매력 없는 성격 탓도 있었지만 학창 시절 이렇다 할 친구 하나 사귀지 못 한 건 외모 탓이 컸다. 더구나 타고난 약골인지라 주기적으로 유진의 무리에 돈을 상납하는 것으로 졸업장을 딸 수 있었다. 근 몇 년 간 이상 기온으로 농가가 전국적으로 타격을 입었다는 소식을 듣긴 했다. 그래도 막내인 유진이 T까지 원정 노동을 떠날 정도인 줄은 몰랐다. 내가 아는 한 T는 합법 노동지의 마지노선이었다. 우린 트럭에서 엉겁결에 통성명을 했다. 그는 내가 동창인 줄도 몰랐다. 그의 손은 농장주의 아들이라기엔 너무나 부드러웠다.
    트럭은 관리소라고 적힌 컨테이너 앞에 멈췄다. 너나할것없이 땅으로 뛰어내렸다. 새벽부터 계속된 트럭행에 몸이 땅으로 쑥 꺼질 것 같았다. 관리소는 광활한 옥수수밭 가운데에 덩그러니 있었다. 누가 장난을 치다 떠난 듯 어딘가 개구진 모양새였다. 사람들은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관리소에서 배가 심각하게 튀어나온 중년 남자가 나왔다. 그리고 자신을 마스터라 칭하며 괄괄한 목소리로 삼열 종대를 외치고 다녔다. 사람들이 구물구물 줄을 서기 시작했다. 유진은 자연스럽게 내 오른쪽에 섰다. 왼쪽 자리는 마지막에 채워졌다.
    뭐야. 유진이 중얼거렸다. 왼편의 그는 낯선 인종이었다. 더구나 머리는 수도승같이 밀어놓아 이상했다. 그와 같은 인종을 어렸을 적 도심에서 한두 번이나 봤을까 싶었다. 확실한 건 시골로 이사를 간 후로는 처음이었다. 그는 검은 눈으로 우리에게 눈인사를 했다. 나는 손을 들어 보였지만 유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수확량에 따라 돈은 각자 받지만 밭을 옮길 때마다 인센티브는 똑같이 나간다. 무슨 말인지 알아먹었겠지?”
    마스터가 외쳤다. 알아서 서로를 관리하란 뜻이었다. 마스터는 커다란 자루를 끌고 오더니 그 안에서 주먹만 한 옥수수빵을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우리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빵을 먹었다. 물은 관리소 옆에 딸린 수도에서 알아서 먹어야 했다. 여기저기서 기침이 터져나왔다. 나는 묵묵히 빵을 먹는 왼편의 그에게 이름을 물었다.
    “유진.”
    생경한 발음이었다. 그런 식으로도 유진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진다는 게 신기했다. 또다른 유진의 ‘원래’ 유진은 헛웃음을 짓더니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포도주 공장.”
    또다른 유진은 대뜸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었다. 팔이 온통 썩은 것 마냥 검붉었다. 그전에는 무 농장, 알로에 농장, 가죽 공장, 심지어 어선을 타기도 했다고 말했다. 유진은 조금 더 노골적으로, 어디서 태어났느냐고 물었다. 또다른 유진이 대답했지만 생전 처음 들어보는 나라였다.
    “여기까진 왜 온 거지?”
    “내전 때문에. 죽기 싫어서.”
    “그럼 난민이군.”
    “그런 셈이지.”
    “계속 이런 일만 할 수밖에 없겠군.”
    “아니. 돈을 모아 국적을 살 생각이야.”
    쏘아붙이는 유진의 말에 밀리지 않을 정도로 또다른 유진은 이 지역 언어에 유창했다. 상당한 노력파임이 틀림없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T의 노동이 시작되었다. 우리의 첫 밭은 꽤 안쪽이었다. 옥수숫대를 헤치고 밭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렇게 들어간 그곳은 고요했다. 빼곡하게 자란 넓적하고 긴 이파리들이 모든 소리를 차단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밀도에 숨이 막혔다. 마치 바닷속 같았다. 또다른 유진은 빠르게 주위의 옥수수를 거덜낸 후 안쪽으로 사라졌다. 유진도 질 수 없다는 듯 반대쪽으로 나아갔다. 혼자 남은 나는 옥수수를 하나 잡았다. 어린 짐승의 뒷다리처럼 뜨겁게 손 안에 들어찼다. 건조하고 성긴 껍질 안으로 울퉁불퉁한 알맹이가 느껴졌다. 손목을 힘껏 돌렸다. 섬유질이 찢어지고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옥수수가 떨어져나왔다. 손목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날 저녁까지 나는 자루 두 개를, 유진은 세 개 반을 채웠다. 또다른 유진은 다섯 개의 자루를 끌고 왔다.
    오래지 않아 각 팀들에게 자연스레 ‘노인네 팀’ ‘샌님 팀’ ‘운동선수 팀’ ‘기술자 팀’ 등의 이름이 붙었다. 우리는 ‘외국인 팀’이라고 불렸다. 유진의 히스테리가 발발한 건 그 무렵이었다.
    “외국인 같은 소리. 지랄.”
    한번은 식당에서 유진이 중얼거렸다. 유진과 나, 심지어 T의 대부분이 외국인이지만 ‘외국인 팀’의 ‘외국인’이 누굴 의미하는지는 뻔한 일이었다. 근처 자리에서 또다른 유진이 잠잠히 옥수수스프를 떠먹고 있었다. 유진은 또다른 유진을 가만히 노려보더니 식판을 들고 식당을 떠났다.
    숙소로 돌아왔을 때, 침대에 누워있던 유진이 내게 말했다.
    “우리도 참 운이 없다. 그렇지? 저런 놈 밑에 있는 꼴이라니.”
    “우리?”
    “그래. 우리.”
    유진은 나와 자신을 한 번씩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우리라니. 지랄.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또다른 유진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밭을 갈아치우는 속도는 더뎠다. 나는 원래 몸 쓰는 일에는 영 젬병이었다. 유진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표적은 내가 아니었다. 다른 팀이 먼저 밭을 옮겨 갈 때마다 유진은 또다른 유진을 불러 세워 윽박을 질렀다. 제대로 하지 않으면 T에서 쫓겨나게 해주겠다는 거였다. 사람들은 우리 주위를 금세 에워쌌다. 무미건조한 T의 생활에서 몇 안 되는 오락거리였다. 그러나 또다른 유진은 유진의 짜증이 다 풀릴 때까지 묵묵하게 욕을 들었다. 또다른 유진을 쫓아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마스터뿐이었다. 마스터는 옥수수만 잘 딴다면 원숭이도 상관없을 위인이었다. 또다른 유진은 마스터의 그런 점을 신뢰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아무리 옥수수를 잘 딴다 할지라도 원숭이와 다를 바 없다는 뜻이란 걸 그때는 몰랐다.

    저녁 식사를 마치면 우리에게 서너 시간 가량의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유진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술을 마시거나 혹은 포커를 치면서 시간을 보냈다. 화장실에 가는 척 숙소를 나와 관리소로 들어가면 마스터가 나를 맞았다. 마스터는 무슨 서류를 그리 많이 작성하는지는 몰라도 항상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이제는 익숙한 접이식 철제 의자에 앉으면 마스터는 나를 흘긋 보곤 말했다. 시작해.
    “오늘은 늦잠을 잤습니다.”
    “몇 시?”
    “그래봤자 7시입니다. 아침을 거르고 계속 자다가 바로 밭으로 나갔습니다.”
    마스터는 천장으로 눈을 돌리며 셈을 했다. 그리고 이내 다니 펜을 놀렸다.
    “오전엔 계속 수확을 했습니다.”
    “몇 자루지?”
    “그건, 세어보진 않았습니다만 계속 일을 하고 있던 건 확실합니다.”
    나는 최대한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점심시간에는 식사를 하고 의무실에 갔습니다.”
    “약은?”
    “어제랑 같습니다.”
    “그래도 말해봐.”
    “진통제, 피로회복제, 발진용 젤 두 통입니다.”
    “젤은 엊그제도 받았잖아?”
    “시시때때로 바르니까요. 그가 많이 쓰는 편이긴 하지만 문제적일 정도는 아닙니다.”
    마스터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놓였다. 왠지 또다른 유진의 변호인이 된 것 같았다.
    “오후에도 계속 수확을 했고 최종적으로 다섯 자루를 채웠습니다.”
    “평균적으로 한 자루 반이 더 많군.”
    그것에 있어선 나는 딱히 할말이 없었다.
    “석식을 먹고는 약을 바르고 침대로 갔습니다. 잠이 든 걸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마스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필요 이상 모범적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오히려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잠시 바라보았다. 나는 뭐라도 더 말하고 싶었다. 예컨대 또다른 유진은 몸집에 비해서 과할 정도로 많이 먹었다. 평균적으로 그는 한 끼에 빵 네 개, 두 대접의 스프, 두 덩이의 돼지고기를 먹어치웠다. 또한 잡고, 돌리고, 놓고. 무한하게 반복되는 세 동작에 불순물은 없었다. 그 순결함 앞에서 나는 자주 미안해졌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마스터에겐 아무 의미가 없을 거였다. 물론 마스터가 물어보는 것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이 날을 기억하면 나는 풉, 하고 웃어버릴지도 몰랐다.
    “뭐, 들은 얘기 같은 건 없어?”
    마스터가 물었다. 문득 유진이 틈만 나면 말하곤 하는 또다른 유진의 새벽 외출 생각이 났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길이 두 개였다. 저번 것의 두 배는 넘는 폭으로 쓰러진 옥수숫대들은 거대한 십자가의 형상으로 교차하고 있었다. 두 길의 교착 지점은 반듯한 정사각형이었는데, 그 안에서 휜 옥수숫대들이 또 작은 십자가들을 만들어냈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우리는 이번에도 삼열 종대로 선 채 날뛰는 마스터를 마주해야 했다. 마스터는 노골적으로 또다른 유진을 노려보았다. 또다른 유진은 햇빛에 눈살을 찌푸린 채 밭을 둘러 볼 뿐이었다. 마스터의 시선이 이번엔 내게 머물렀다.
    어깨가 뜨거워질 무렵이 되어서야 인근 지방 도시에서 경찰차가 왔다. 두 명의 경찰과 한 명의 양복쟁이가 내렸다. 경찰은 누가 죽거나 물건이 없어지지 않은 한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양복쟁이는 허우적대며 밭으로 들어가더니 좀처럼 나오질 않았다. 나무 각도기를 이리저리 갖다대던 그는 한참 뒤에야 상기된 얼굴로 나왔다. 그는 ‘미스터리’라고 말하며 그 증거로 옥수숫대가 얼마나 부드럽게 휘었는지를 설명했다. 마스터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뜸 배부터 들이밀었다.
    “미스터리건 지랄이건 중요하지 않아요. 누가 이 짓을 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마스터는 마치 그에게 어떤 책임이라도 있다는 듯 말했다. 양복쟁이는 학회에 알리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경찰들은 마스터가 양복쟁이의 넥타이를 잡아채기 전에 얼른 그를 순찰차에 태우고 떠나버렸다. 나는 관리소로 불려갔다. 마스터는 선 채로 나를 몰아붙이며 추궁하기 시작했다. 나로선 매일 밤 마스터에게 했던 소리를 반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다른 유진은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약을 먹고, 바르고, 잠을 잤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뺨에서 불이 일었다. 단번에 나동그라졌다. 그는 나를 더 패주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나는 감시직에서 ‘해고’당했다.
    관리실에서 나온 나는 홀린 듯 밭으로 돌아가 옥수수를 따기 시작했다. 잡고, 돌리고, 놓기. 마치 또다른 유진이라도 된 듯 평소 쓰지 않던 왼손도 바삐 움직였다. 그러나 곧 리듬이 꼬였고, 새로운 옥수수를 그때그때 찾지 못해 손이 허우적댔다. 비릿함에 침을 뱉으니 피가 섞여 있었다. 아래턱이 얼얼했다. 자루를 내려놓고 풍력발전기 쪽으로 걸어갔다. 셔츠를 벗고 발전기에 등을 대고 앉았다. 옥수수밭 그늘에 서늘하게 식은 쇠판의 냉기가 땀을 식혀주었다. 프로펠러 밑은 공명이 덜해 의외로 조용했다. 등을 자극하는 간헐적인 진동에 가슴이 뿌듯하게 팽창하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끓어오르는 굴욕감을 되새김질 하지 않기 위해 다른 것들로 머리를 채웠다. 내게서 멀리 있는 것들부터 시작했다. 누나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에 대한 사랑, 아버지에 대한 원망, 내가 입사하자마자 빚만 남기고 도산한 출판사, 언젠간 고향 도시로 돌아가고야 말겠다는 꿈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의연해지기 위해 그런 것들을 으깨고 섞다가 밍밍한 옥수수스프처럼 이내 마셔버렸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T에 온 후 그 작업들은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파리들이 흔들렸다. 옥수숫대 몇 개가 휘나 싶더니 또다른 유진이 나타났다. 눈인사를 하고 돌아가려는 그에게 이리 와 같이 앉자고 손짓했다. 그는 머뭇거리더니 자루를 내려놓고 내 옆에 앉았다. 셔츠를 벗자 흉측하게 벗겨진 살갗이 드러났다.
    “심하네. 알레르긴가.”
    “풀독일거야. 이 지방은 너무 습해.”
    내게 T의 기후는 바스러질 듯 건조했다. 밤이나 되어야 습기를 느끼는 정도였다. 또다른 유진의 출신국은 추운 지방이지 싶었다. 우리는 잠시 그렇게 앉아 있었다. 눈앞에는 빽빽한 옥수수줄기 뿐이었고 내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이끌리듯 요 며칠 내게 일어났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일이 과장스러울 정도로 자세하게 터져나왔다. 그러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기분이었다. 가만히 듣기만 하던 그가 낮게 웃었다.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잔디밭 같은 머리를 긁으며 한동안 말을 골랐다.
    “그러니까, 장난이라고 생각해.”
    “뭘? 너를 감시한 걸?”
    “그걸 포함해서 다. 그럼 일단 너는 잘못이 없는 셈이지.”
    또다른 유진은 남의 일처럼 말했다. 그리고 더는 고민하지 말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밭으로 들어갔다. 그가 말하는 ‘장난’이라는 말은 명확히 알 수 없었다. 나의 감시인지, 혹은 마스터가 내게 감시역을 시킨 것인지, 애초에 밭에 일어난 일 자체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 상황을 장난이라 하는 말이 장난인 것인지. 하지만 뭐가 됐건 그게 또다른 유진이 T를 버티는 방법인 건 확실했다. 나는 또다른 유진에게 사과하지 않기로 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럴 수 없었다. 나로선 그의 방법을 따라줄 수밖에 없었다.

    일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공동 샤워장에서 미끈거리는 석회수로 몸을 닦을 때였다. 입구 천막이 걷히고 마스터와 몇몇 놈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부연 수증기 속을 뒤지더니 다짜고짜 또다른 유진을 끌고 나갔다. 또다른 유진은 그 와중에 옷을 챙겨 재빨리 걸쳤다. 익숙한 일이라는 듯 침착하고 겸허한 태도였다. 샤워장이 술렁거린 건 말 할 것도 없었다. 유진만이 태연하게 비누칠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근육은 오간 데 없이 얼룩덜룩 탄 살갗을 정성스레 씻어냈다.
    숙소 상황은 더 심각했다. 또다른 유진의 자리는 도둑이라도 든 듯 뒤엎어져 있었다. 서랍과 침대 시트, 하다 못해 베갯잇까지 뜯어져 나뒹굴었다. 없어진 물건은 뻔했다. 그가 이제껏 모아둔 일급이었다.
    “어젯밤에 그 자식 또 나가더라고. 밭으로 들어가는 것 까지 내가 다 봤어.”
    유진이 수건으로 머리를 시원스레 말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가 마스터에게 또다른 유진을 모함한 것 같았다.
    “그래서 본 거야? 밭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아니. 도무지 나오질 않아서 숙소로 돌아왔지. 야간에 밭에 습기가 얼마나 심한지 알잖아? 피부가 남아나질 않을걸?”
    문득 발진투성이던 또다른 유진의 등과 어깨가 떠올랐다. 혼란스러웠다. 밭에 길을 낸 사람이 진짜 또다른 유진이라는 게 믿기질 않았다. 그의 이유나 목적을 떠나 그를 감시하며 느꼈던 무력감과 미안함이 배신당한 것 같았다. 붕 뜬 기분으로 또다른 유진의 침대에 앉았다. 땀과 진물이 밴 시트가 내 것보다 배는 더 삭아 있었다.

    마스터가 우리를 부른 건 자정 무렵이었다. 유진은 앞장서서 관리사무소로 들어갔다. 또다른 유진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양손을 뒤로 묶은 밧줄은 다시금 접이식 철제 의자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얼마나 맞은 것인지 눈 주위에 피멍이 가득했지만 아직 정신을 잃진 않은 것 같았다. 마스터는 과시하듯 구둣발로 또다른 유진의 배를 걷어찼다. 또다른 유진이 고통에 몸을 틀자 이번에는 오금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또다른 유진이 태아처럼 웅크릴 때까지 구타는 계속되었다. 근래의 스트레스를 전부 폭발시키는 것 같았다. 마스터는 비틀대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몇 장의 지폐를 꺼냈다. 또다른 유진이 번 돈이 유진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내일 해가 뜨는 대로 쫓아내버려. 알겠지?”
    마스터는 뭉그러지는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진심이라면 죽으란 뜻과 다름없었다. 멀쩡한 사람도 걸어서 T를 벗어나는 건 목숨을 걸어야 했다. 또다른 유진의 상태라면 반도 가지 못 해 탈수증으로 쓰러질 거였다. 설사 술김에 한 말이라 해도, 이젠 명령을 따를 유진이 있었다. 마스터는 우리가 오자 흥이 꺾였는지 소파에 주저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그대로 드러누워 잠이 들었다. 유진은 기다렸단 듯 또다른 유진을 억세게 걷어찼다. 말려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욕설과 폭행은 몇 분간 계속되었다. 또다른 유진은 관리소에서 쫓겨나기도 전에 맞아 죽을지도 몰랐다.
    “냉장고에 맥주가 있어.”
    내 말에 유진은 멈칫하더니 마스터를 흘긋 보았다. 그는 숨이 넘어갈 듯 코를 골고 있었다. 유진은 냉장고에서 맥주 두 병을 꺼내어 내게 하나 주었다. 나는 의자를 하나 끌어와 또다른 유진의 앞에 앉았다. 분위기를 바꾸려는 시도가 먹혔는지 유진 역시 나를 따라서 자리를 잡았다. 유진은 맥주 한 병을 단숨에 비우곤 행복에 겨운 얼굴로 또 한 병을 꺼내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천천히 맛을 음미하더니 또다른 유진을 내려다보았다.
    “이젠 말해보는 게 어때? 혹시 알아? 내일 아침에 물 한 병 챙겨줄지.”
    또다른 유진은 퉁퉁 부은 눈으로 유진을 응시했다.
    “대체 새벽에 뭔 짓을 한 거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또다른 유진이 입을 달싹였다. 유진이 나를 보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수그리고 귀를 기울였다. 숨소리 사이로 익숙하다 못해 지겨운 단어가 들려왔다. 옥수수.
    “옥수수?”
    “밤마다 옥수수를 조금 더 땄을 뿐이야.”
    또다른 유진이 체념한 듯 말했다. 나는 허리를 폈다. 알고는 있었지만 궁금해본 적이 없던 것들이 이유를 달고 다가왔다. 한 번도 떨어진 적 없는 또다른 유진의 수확량, 다 쓴 젤 통들, 아무리 많이 먹고 자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건강 같은 것들이었다. 유진마저도 당황한 듯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건 이제 상관없어.”
    유진은 오줌을 싸고 오겠다고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나는 또다른 유진과 단둘이 남았다.
    “맹세코 나는 아니야. 내가 말하진 않았어.”
    내가 말했다. 그러나 또다른 유진은 별로 궁금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 관리소 밖에 유진 역시 ‘그런 건 이제 상관없어.’라고 외칠 것만 같았다. 나는 의자를 여전히 누워 있는 또다른 유진에게 더 가까이 붙였다.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있잖아, 유진.”
    “……”
    “지금 일어나는 이 일도 다 장난이라 할 수 있는 거야?"
    또다른 유진은 대답 대신 웃었다. 그러나 이내 가슴에 통증이 왔는지 몸을 움츠렸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살짝 돌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것 좀 풀어줘. 부탁이야.”
    나는 하마터면 그의 밧줄을 풀고 관리소 문을 열어줄 뻔했다. 내가 조금만 더 감상적인 인간이라면 혹은 마스터의 주먹맛을 몰랐다면 칼을 쥐어주곤 관리소를 빠져나갈 수도 있었다. 실제로 나도 모르게 손이 움찔하기까지 했다. 또다른 유진도 눈치챈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주먹을 꽉 쥐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진심을 다해 또다른 유진에게 사과했다. 또다른 유진의 눈빛이 점점 절박함에 젖어갔다. 하지만 빌고 싶은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이토록 미안한 순간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똑똑한 그 역시 모르진 않을 거였다. 그럼에도 그는 집요하게 굴었다. 내가 그에게 지켜줄 수 있는 예의는 도망치지 않는 것이었는데 그 짧은 순간에도 몇 번이나 그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내리눌러야 했다. 뒤에서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다른 유진은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우리는 또다른 유진을 앞에 두고 앉아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눴다. 유진이 또다른 유진을 때릴 생각이 들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한 수다스럽게 굴었다. 유진은 계속 맥주를 마셨고 찬장의 양주까지 손을 댔다. 그의 흥을 깨지 않기 위해 나 역시 조금 받아 마셨다. 머리가 아찔할 정도로 독한 술이었다. 그래서인지 유진의 뒤로 또다른 유진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의자가 유진의 뒤통수를 때려 갈겼다. 두 유진은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먼저 일어난 쪽은 또다른 유진이었다. 뒤로 묶인 손목 아래로 의자가 덜렁거렸다. 적잖이 구겨진 의자를 보고 그제야 그게 철이 아닌 알루미늄이라는 걸 알았다. 마스터는 소란을 느꼈는지 코골이를 멈추고 뒤척였다. 또다른 유진은 뒤로 의자를 잡은 채 소파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스터의 얼굴을 향해 의자를 내려쳤다. 마스터는 한마디 신음을 내뱉곤 조용해졌다. 또다른 유진은 몸을 있는 대로 비틀며 엉성해진 매듭에서 팔을 빼냈다. 밧줄에 쓸린 손등에 피가 고였다. 나는 다리를 꼰 채로, 유진과 대화하던 그 자세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유진은 덜덜 떨고 있는 나를 조급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는 마스터의 책상 서랍을 뒤지더니 자신의 계약서와 돈들을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그리고 빠르게 관리소를 나갔다.
    나는 한동안 눈만 끔벅거리다가 벌떡 일어났다. 관리소를 달려나가 주위를 살폈다. 주위의 빛이라곤 입구의 가로등이 유일했다. 그 불빛이 희미해지는 지점에서 유진이 다리 한쪽을 끌며 도망치고 있었다. 나는 그를 잡기 위해 달렸다. 그럴 수밖에 없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또다른 유진이 나를 슥 돌아보곤 계속 나아갔다. 가로등 불빛이 더이상 우리를 비추지 않을 무렵, 그는 옥수수밭으로 들어가버렸다. 나 역시 옥수숫대를 밀치고 들어섰다.
    그곳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공기는 습하다 못해 축축했고 짙은 어둠이 나를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저 멀리 작게 반짝이는 별들만이 그곳이 하늘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얼굴에 달려드는 벌레들에 허우적대며 사방을 밀치고 꺾어댔다. 다리에 감기는 이파리들이 묘한 열감을 남기곤 떨어져나갔다. 머지않은 곳에서 또다른 유진이 매끄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작정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문득 멈춰 섰다. 내 힘으로 과연 그를 잡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곳이라면 또다른 유진은 나를 죽일 수도 있었다. 밭이 일순간 고요해졌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외따로 서 있었다. 아무래도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풍력발전기 프로펠러가 천천히 움직이더니 이내 정신없이 돌아갔다. 난데없이 훤해지는 시야에 등을 돌렸다. 옥수숫대가 서서히 굽고 있었다. 바람은 등은 타고 올라와 정수리로 쏟아졌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자세를 낮춰야 했다. 이어 눈앞에 빛과 그림자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두려움과 함께 바람은 더 강해졌다. 옥수숫대 사이로 또다른 유진이 보였다. 그는 고작 몇 걸음 앞에서 옥수숫대를 잡고 버텨내고 있었다. 나도 그를 따라 옥수숫대를 부여잡았다. 정말이지 깊게도 박힌 뿌리였다.
    잠시 후 바람이 사그라지더니 주위도 점차 흐려졌다. 겨우 고개를 들었다. 숨을 깊게 뱉어냈다. 또다른 유진과 나를 중심으로 거대한 원 모양으로 옥수숫대가 휘어져 있었다. 옴짝달싹 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다만 또다른 유진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 높지 않은 곳에 보름달만한 것이 빛났다. 그것은 위아래로 가볍게 일렁거리며 머리 위에서 맴돌았다. 분명 우릴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슴이 꽉 막힌 것 같더니 뭔가가 서서히 치밀어올랐다. 나는 뭐라도 하고 싶었다. 새벽에 옥수수를 따는 일이나 딱 남들만큼 비겁한 성격에 대해 변호해야 했다. 어쩌면 그럴 필요도 없이 책임을 물어야 했다. 하지만 빛은 우아하게 하늘을 유영할 뿐이었다. 이런 사소하고 재미난 장난에는 절대 사과할 마음이 없다는 듯. 심지어 우리가 너무 작고 더럽지 않으냐 놀리는 것 같았다. 나는 울 것 같은 기분이었다가 결국 풉, 하고 웃고 말았다.
    둥실대던 빛은 서서히 작아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T의 하늘 멀리 사라졌다. 또다른 유진은 휘어진 옥수숫대 사이로 걸어갔다. 천천히 그를 따라갔다. T를 완전히 떠나면 그를 붙잡아볼 생각이었다.

최선영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밭을 본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다 따야만 하는 임무를 맡았을 겁니다. 우리의 삶도 각자의 옥수수밭이 있을 테지만 그 크기에 관계없이 아득한 건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리고 그 아득함에 반응하는 육체는 절망적인 동시에 아름답습니다. 옥수수를 따야 하는 이의 육체를 떠나지 않는 소설을 쓰는 것이 저의 작은 목표입니다.

2018/02/27
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