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재 / 빛과 신의 놀이
재
-교차 창작의 시를 위한 연습 4
글: 김연필
춤: 정지훈
youtu.be/Zg4RRKS1R3M
수조 속에 두 사람이 앉아 있다
한 사람은 선명하고 한 사람은 그림자가 흐리다 한 사람을 통과한 빛이 물결에 흔들리며 바닥을 긁고 있다
이 수조는 아크릴 수조이다 가로 180센티미터 세로 120센티미터 높이 150센티미터로 사람 한 명이 들어가기 적당하고
이 수조의 물은 바닷물이다 한 번 말린 바닷물을 아무것도 녹지 않은 순수한 물에 녹인 것으로 이것은 재생된 바닷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영혼의 재생도 이와 같아서, 한 사람을 말린 몸을 아무것도 녹지 않은 순수한 물에 담그면 한 사람의 영혼이 살아난다 그 영혼의 무게를 재는 실험을 한다 투명한 사람이 불투명한 사람을 통해 한 사람의 이름은 작가이고 한 사람의 이름은 투명한 독자이다
저기 독자의 죽음으로 이 극은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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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조는 아크릴로 된 수조로, 흠집에 약하다 여기 수조 바닥에서 떨고 있는 것, 수조를 긁는 것이다 아크릴은 흠집에 약하지만 압력에 강해 큰 사이즈의 수조를 만들기에 적절하다 수조의 모양은 관과 같으나, 관과 같이 만들면 물이 새 수조로 쓸 수 없으며 심한 경우 터지기도 한다
수조 속을 헤엄치는 무용수가 있다 저것의 이름은 납작벌레다 납작벌레는 편형동물에 속하는 연체동물로, 물이 마르면 남는 것은 거의 없다 납작벌레에는 시각 기관이 있으나, 납작벌레는 고개를 돌리거나 하지는 못한다 납작벌레의 눈을 상상하면 나는 혼자가 된다 나는 혼자서 몸을 말리다 조그만 조각이 된다
사람은 대부분이 물이다 여기 두 사람의 대부분도 물이다 사람은 동물이기도 하고 짐승이기도 하지만, 사람의 대부분은 물이다 저기 물처럼 펄럭이는 사람, 사람의 몸 위에 닿은 글자가 일렁인다 이런 말은 조금 어려울 수도 있다 우리는 말할 수 있고 우리는 입이 있지만,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말리기를 계속한다 물을 뺀 사람은 진짜 사람이 될 것이다 물과 같은 불순물이 없는
바다는 사실 대부분 사막과 같은 곳으로, 저기 깊은 곳에는 생물이 거의 살지 않는다 나는 심해의 생물과 눈을 마주친 적이 있다 어느 정도 깊이까지의 바다에서 물고기는 눈이 커지고 빛나며, 더 깊이 들어가면 물고기의 눈은 거의 사라진다 빛을 내는 물고기의 몸을 생각한다 물고기는 빛을 먹고 빛으로 사라진다 그런 걸 생각하면 슬퍼서, 나는 뒤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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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등 돌리고 서 있는 것은 사람이다 아니다 납작벌레다 아니다 어류다 목숨이다 한 사람이 마르고 남은 불순물이다 한 사람의 불순물을 수조에 붓는다 이 수조의 사이즈는 한 사람의 관으로 적당하다
저기 투명한 사람이 움직인다 연출이다 저기 희미한 그림자에 이름 모를 생물이 자리한다 저 생물의 이름은 아직 없고, 저 생물은 다른 생물을 흉내낸다 저 생물은 흔들리기도 하고, 흔들리며 걷기도 하고, 흔들리며 걸으며 문법을 흉내내기도 하고, 작가를 흉내내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제 죽어 찾을 수 없다 저기 투명한 사람이 아직도 작가라면 좋겠다 나는 작가를 찾을 수 없는 곳에서 한 사람을 마주한다
구름
이 물 위로
떠오르면 좋겠다 저 하늘은
바보
같이 웃고 있으면
좋겠다 흔들리고 흔들고 마주보고 웃고
그런 게 인생 아니니? 라고 투명한 사람이 말한다 투명한 사람이 웃는다 저것의 이름은 오래된 문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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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다 모든 글은 윗줄에서 아랫줄로 읽는다 글을 읽는 법을 배우지 못한 불투명한 사람은 슬프다 그는 작가를 알지 못한다 작가와 마주보고 있으면서도, 그는 슬퍼서 작가의 손을 떼기 시작한다 떨어진 손이 수조 위로 떠오른다 작가의 비중은 물보다 작아서, 어느새 하늘까지 떨어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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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은 수조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다
이 장면은
수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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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심해의 가운데로 숨는다 이건 슬픈 이미지다 작가는 저기에서 춤을 추고 있다 이미 죽은 몸이라 매우 가볍다 일렁이는 물살에도 너무나 재미있는 표정이다 이미 죽었구나 작가는 잘 죽었구나 목이 베여 수면으로 떠오르고도 더 올라가는구나 저렇게 하늘 끝까지 올라가는구나 언젠간 더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가서
갑자기 하늘에서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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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조 속은 고요하다
이제 수조에는 한 사람만이 남아 예정된 대사만을 반복한다
빛과 신의 놀이
-교차 창작의 시
글: 김연필
춤: 정지훈
youtu.be/oLmQsDpwy_I
하얀 방에 사람이 서 있다
모든 빛은 그곳으로 집중된다 이것으로 이 장면은 시작한다
하얀 방 안에 사람들이 서 있다 이것은 전시이다 우리는 전시장에 앉아 전시된 물건을 바라본다
이곳엔 아무것도 전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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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콘크리트 수조이다 이 수조는 가로 17미터 세로 10미터 높이 8미터이다 이 수조의 물 양은 나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수조 속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실로 건물을 만든다 그것은 실로 흥미로운 장면이고
그것은 실뜨기, 어릴 적 하던 놀이다 어릴 적 하던 놀이들이 수조의 벽에 떠오른다 저기 무언가가 올라온다 저것은 사람의 알레고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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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수조다 아니다 바다다 여기는 물이다 물로 가득차 기포가 떠오른다 모래 속의 미생물들은 질산염을 녹여 질소를 만든다 질소는 조금씩 물 위로 올라온다 거품이다
저기 늘어선 것이 있다 저것은 벌레다 저것은 납작하고 저것은 편형동물로 저것의 이름은
하얀 관이라고 해보자 수조에는 물이 많고, 수조의 수압은 매우 강하다 수조의 바닥에는 기어다니는 것이 많다 저기 산호가 있고 산호는 유생을 내뿜고
그런 장면으로 이 공연은 시작한다
*
어떤 날은 벽에 기대고 싶은 때도 있다 벽이 바닥보다 편안하게 느껴질 때, 나는 그것을 공연이라고 부른다 이 공연은 번역이다 저기 움직임을 무어라고 부를까 두드리면 열리는 소리라고 부를까 열리는 소리는 열리는 소리이다 계속 열리는 소리이다 끝없이 열리는 문이다 그렇게 부딪치는 소리이다
저기 올라가는 것, 저것은 어디까지 올라가는 것일까
*
서랍을 열어본다 서랍에는 시계도 있고 책도 있다 서랍에는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고 춤이 있으라, 하니 춤도 있고 그렇게 어릴 적 놀이하던 것을 생각한다 이것은 놀이이다 끝나지 않는
*
저기 눈뜬 것, 나와 마주본다 눈은 나를 보고 나는 뚫어진다 내 얼굴에 빛이 통과한다
교차, 라고 한번 발음해보자
*
팔이 움직인다 다리가 움직인다 몸이 움직인다 머리가 움직인다 움직임들에 모두 이름 붙인다 이것은 번역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한번 말해보자, 저 손짓의 이름을 그러면 손짓은 말이 되어 떠오른다 기포처럼
*
저기 저 조명은 풍선 조명, 저 조명은 텅스텐 조명, 저 조명은 엘이디 조명, 저 조명은 슬픔의 조명, 저 조명은 죽음의 조명 저 조명은 빛의 알레고리 빛의 상징 빛의 히스토리 빛이 있으라, 하면 빛이 있는 것, 이 우리의 약속이고
상실감으로 새를 덮는다 저기 앉아 나를 바라보는 것 날개 없고 눈 없는 새 막대 위에 앉아 나를 바라보다가 조금씩 눈이 멀어버린 새의 이름을 안다 그 이름은 혼돈이다 혼돈에 일곱 구멍을 뚫으면 우리는 아무 말 할 수 없는 감정이 들고
이 공연은 끝에 가까워진다 무대에 선 작가가 나를 향해 신호를 보낸다
*
홀로 하는 술래잡기, 홀로 하는 실뜨기, 홀로 하는 숨바꼭질, 홀로 하는 모든 놀이, 홀로 하는 모든 활동, 홀로 하는 모든 작동, 홀로는 서로가 되고 서로는 홀로의 다른 이름이 되고 서로는 홀로와 마주본다 홀로와 서로는 세계의 알레고리이다 이곳은 세계이고 이곳은 비좁고 이곳은 모두 부서진다 마치 수조가 터지듯 터지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서
*
벌판 위에 꽃나무가 서 있다, 꽃나무가 하나, 둘, 셋
꽃나무에 불을 붙인다 조금씩 타오르다 재가 된다
그것을 녹인 물을 마신다
* 위 작품은 ‘뉴노멀 시가무詩歌舞 무악시舞詩樂’ 프로젝트(주최: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주관:괜찮은 모험,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과정 속에서 창작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다양한 예술 장르의 자유로운 교류와 협업을 통해 동시대 예술을 다시 조망하는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기획에 조아라, 작곡/퍼커션에 서릴라, 안무/무용에 이윤희, 정지훈, 시에 김연필이 참여하였으며 2021년 12월 14일에 플랫폼엘 라이브홀에서 공개 발표 공연을 진행하였다.
위 작품은 언어를 몸짓으로, 몸짓을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을 통해 한 편의 시를 두 명의 주체가 창작한 것으로, 본 공연에 앞선 연습 중의 습작과 본 공연 시 창작된 작품을 두 예술가가 소통하며 창작하는 과정을 담은 영상과 함께 공개한다. 발표한 시는 춤과 텍스트의 교차를 통해 창작된 두 편의 글을, 마지막으로 시인이 조금 정돈한 텍스트이다.
위 작품은 언어를 몸짓으로, 몸짓을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을 통해 한 편의 시를 두 명의 주체가 창작한 것으로, 본 공연에 앞선 연습 중의 습작과 본 공연 시 창작된 작품을 두 예술가가 소통하며 창작하는 과정을 담은 영상과 함께 공개한다. 발표한 시는 춤과 텍스트의 교차를 통해 창작된 두 편의 글을, 마지막으로 시인이 조금 정돈한 텍스트이다.
김연필
2012년 첫 시를 발표해, 최근 『검은 문을 녹이는』을 냈다. 의미에서 벗어난 날것의 언어를 드러내는 방법과, 시를 시로 인식하게 만드는 요소들에 대해 탐구한다. 시인의 지위를 기술(奇術 또는 記述)자로 만드는 데에 관심이 있다. 근 1년은 문학과 다른 장르의 교차 및 문학의 전시/공연화에 집중했다.
2022/01/25
5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