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을 제외한 해변의 전체



   구름이 자신의 꿈을 길게 풀어둔 해변에서, 약간의 바닷물이 담긴 콜라병이 굴러다니는 풍경 속에서, R은 장편 소설을 한 편 써야겠다고 마음먹었고, 그러므로 구름이 R에게 그 일을 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R에게는 구름에게 없는 손발이 있었고, 콜라병 속 바닷물처럼 약간의 말들이 R의 내부에서 출렁일 때가 있었고, 그것은 R이 정체 모를 파도에 떠밀려 이곳에 이르는 동안 그에게 남은 유일한 흔적이기도 했다.

   해변은 온갖 종류의 지상이었다. 이 정도의 넓이는 현재라는 시공간의 운신의 폭과도 유관하여 과거와 미래를 얼마간 이곳으로 끌어올 수 있었고, 그러므로 R은 앉은 자리에서 보이는 해변의 왼편을 과거로, 오른편을 미래로 설정하였다. 소설은 해변의 왼편부터 오른편까지를 세세히 묘사하는 방식이 될지도 모르겠다, 고 R은 생각했다. R은 왼손과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R은 자신이 선형성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조금 부끄러웠다. 하지만 선형성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렇게 해변의 바위에 앉아 한가롭게 소설이나 써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라고 R은 다시 한번 생각했다.

   R에게는 많은 것이 아름다움이었다. 이러한 해변이 구름의 펼쳐진 꿈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하늘을 뒤덮은 저 부드러운 구름들이 해변의 꿈이기도 했다. R은 구름이 꾸는 꿈의 표현 방식이었다. R은 자신이 방식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그 사실이 R에게 자유를 주었다. 해변에 온종일 내리는 눈과 사랑에 빠진 연인들과 희미하게 드러나는 수평선이 그와 동족이기에 R은 흡족했다. R은 해변의 모든 것과 자신을 가리켜 ‘우리’라고 불렀다.

   우리 안에서 따뜻한 해풍이 콜라병을 굴리고 있다. 우리 안에서 약간의 바닷물이 쏟아진다. 우리 안에서 모래가 길게 젖어 간다. 우리가 구름의 꿈이구나. 구름이 우리의 꿈이구나. 소금 향이 나는 낡은 간판들, 산책과 굴뚝, 눈물과 안개, R의 기쁨과 절망과 그리움이 모두 하나였다.

   R은 공책을 꺼냈다. R을 제외한 해변의 전체가 R을 지켜보고 있었다. R이 해변을 바라볼 때와 같은 방식이었다. R은 이러한 관측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바람이 페이지를 뒤적였다. R에게 소설이란 소설의 방식을 뜻했다. R은 기억을 뒤져보기 위해 왼쪽 해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왼쪽 해변은 순식간에 오른쪽 해변으로 스며들었다.

   기억이 아니라면, 소설에는 무엇이 있어야 하나. R은 고민을 시작했다. 소설에는 우선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소설이라 칭하는 순간 소설의 시간은 이미 발생했다고 보아도 좋았다. R은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시간이 있으면? 공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은 하나인 것 같았다. 과거가 해변의 왼쪽이고, 미래가 해변의 오른쪽인 것처럼. 그리고 소설에는 우리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천천히 드러나도 좋았다. 또…… 무엇보다 빛이 있어야 한다. 빛이라는 표현이 필요하다. 해변에 내리쬐는 빛이 R의 윤곽을 밝히는 바람에, R을 R로 제한한 덕분에 이렇게 소설도 쓸 수 있는 거니까. 그래서 R은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태초에 빛이 있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도입부 같다, 고 R은 생각했다.





   증거



   내가 너의 커피를 훔쳤다
   이 얼룩이 그 증거다

   네가 소파에서
   펜처럼 쓰러져 잠들었을 때
   너의 꿈을 빼돌렸다
   검은 잉크 번진
   이 얼룩이 그 증거다

   나는 너를 가로챘다
   그러니까 네가 모르는 새에
   네가 거울 보는 동안
   뒷모습을 훔쳤다
   길어진 내 그림자를 좀 봐라

   그런데도 너는
   오늘은 눈밭을 좀 걸어야겠다고
   커다란 장화를 신고 왔다

   걷는 동안
   나는 네 발자국을 훔칠 것이다

   다시 눈이 내리고
   눈이 너를 조금씩 지우면
   희어진 네 머리카락 훔쳐서

   나의 미래에 갖다 붙일 것이다
   너를 넓게 간직하면
   나의 지금이 늘어날 거다

   더러워진 티셔츠 티셔츠
   빨아대다가
   얼어버린 손으로

   뜨거운 커피
   끓여놓고 앉아 있으면

   너는 하얀 붕대처럼 돌아오겠지

   나는 널 기다린 적 없을 거고

김선오

시간이 언어로 관측되는 방식에 관심이 있습니다.

2022/03/29
5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