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물 쓰레기통에서 흰 벌레를 발견했다. 여름 내내 바닥에 깔려 있던 비닐 쓰레기 너머였다. 몸통을 둥글게 말고 빙글빙글 도는 속도가 워낙 빨라 처음엔 작은 구슬인 줄 알았다. 한데 모은 다리가 어둑해서 마치 흰 구슬에 검은색 사인펜으로 점을 찍은 것처럼 보였다. 폭염에 우그러진 비닐 속으로 스스로 기어들어갈 리 없으니 애초에 그 안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지저분한 바닥에서 몸부림치듯 돌고 돌던 흰 벌레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매끈하던 점이 함몰하고 구슬이 갈라지며 굴곡이 생겼다. 구더기를 연상하는 순간 헛구역질이 났다. 나는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그 위로 떨어뜨리고 주황색 뚜껑을 닫았다.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눈앞에 하얀 잔상이 어른거려 소름이 돋았다.

   「부등식은 양변의 크기를 비교하는 식이다. ‘구더기<흰 벌레’는 참이고, ‘사람<흰 벌레’는 거짓이다.」


   월요일 출근길에 골목 어귀에서 흰 벌레를 또 보았다. 하얀 몸통을 부풀렸다가 오그리며 내가 가려는 방향으로 꾸물꾸물 기어가고 있었다.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봤던 것과 같은 개체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발길을 돌려 다른 길로 멀찍이 우회했다.
   출근 시간이 늦은 편이라 지하철을 탈 때는 항상 좌석에 여유가 있었다. 빈자리에 앉자 맞은편에 장미와 에펠탑이 그려진 검은색 캔버스 가방을 끌어안은 여자가 보였다. 여자의 등 뒤로 벽면에 빗물 자국이 남은 연립과 부옇게 먼지가 앉은 방음벽이 지나갔다. 가로공원의 녹음이 덮치듯 밀려왔다가 쓸려갔다. 지하철이 터널을 향해 서서히 가라앉았다.
   ― 뭐해?
   친구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가장 친하지만 요즘 통 만나기 어려운 친구였다. 동생이 진 빚을 집에서 대신 갚아주었다는 이야기도 만나서 하지 못하고 전화로만 털어놓았다. 얼마 전에 엄마가 조직 검사를 받았다는 소식도 메시지로 전했다. 조직 검사 결과가 다음주에 나온다고 했더니 친구가 답장을 보냈다.
   ― 괜찮을 거야. 힘내.
   나도 엄마에게 비슷하게 말했었다. 별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해도 굳은 입가가 풀어질 줄 몰랐다. 몇 마디 말보다 치킨이나 족발이 엄마의 기운을 북돋는 데에 더 효과적이었다고 했더니 친구가 웃는 얼굴의 이모티콘을 올렸다. 일하러 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지하철에서 내렸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던 중에 멈칫했다. 아스팔트에 흰 벌레가 있었다. 집에서부터 여기까지 따라왔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잠시 품었다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상상인지 깨닫고 피식 웃었다. 신호등 불이 바뀌고 차들이 움직였다. 흰 벌레가 있던 자리를 커다란 바퀴가 여러 번 지나갔다.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려고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타야 할 버스를 발견하고 얼른 손을 흔들었다.
   버스에 타서 창밖에 시선을 두고 오늘 수업에 필요한 유인물 목록을 떠올렸다. 프린터가 한 대뿐이라 눈치를 봐가며 틈틈이 출력해야 할 것 같았다. 작년까지 일했던 학원은 프린터만큼은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다. 원장이 걸핏하면 메시지를 보내 사적인 질문을 하거나 지나가면서 팔뚝을 쓰다듬거나 하지 않았다면 더 오래 일했을 텐데…… 다음 직장은 규모는 작아도 원장의 평판이 좋은 곳으로 골랐다. 수입은 줄었지만 내내 날카롭게 곤두섰던 신경이 누그러들었다. 그때보다는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시간표가 촘촘한 날이라 저녁 먹을 시간이 없었다. 쉬는 시간에 간단하게 빵을 먹기는 했지만 수업이 끝날 즈음 현기증이 났다. 퇴근할 때는 밖이 깜깜했다. 도중에 분식집에 들러 떡볶이며 순대며 튀김을 바리바리 싸들고 집으로 향했다.
   골목 어귀에서 발을 멈췄다. 흰 벌레가 보이지 않았다.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 묻혀 있는 듯했다. 한 걸음 다가갔다. 겨우 벌레 한 마리. 제자리에 멈춰 섰다.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어둠 속에 누군가 숨어 있는 듯했다. 어린아이가 쪼그리고 앉아도 옷자락이 보일 정도로 작은 그림자였다. 나는 허리를 숙였다. 길고양이라고 하기에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울퉁불퉁한 어둠 속에서 가장 짙은 어둠이 눈동자처럼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나는 허리를 폈다. 정말 흰 벌레를 보기라도 하면 식욕이 떨어질 것 같았다. 포장한 음식이 식기 전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위화감의 정체는 다음날 바로 알았다. 흰 벌레가 두 마리였다. 어제만 해도 분명 알사탕만한 크기였는데 이제 탁구공만한 크기로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흰 벌레를 보지 않으려 애쓰며 발길을 돌렸다.
   성충이 되어 날아가든 말라죽든 할 줄 알았는데 보름이 지나도록 골목의 흰 벌레는 그대로였다. 언제부터인가 지하철역 자전거 거치대에도 흰 벌레가 있었다. 퇴근길에 학원 문 앞에서 흰 벌레를 발견하고부터 나는 빙 돌아가기를 그만두었다.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이 선선해질 즈음 골목 어귀의 흰 벌레가 세 마리로 늘어났다. 그리고 엄마가 암이라고 진단받았다.

   「부등식의 양변에 같은 수를 더하거나 빼도 부등호의 방향은 변하지 않는다. ‘x+흰 벌레<암’의 양변에 스트레스를 더해도 부등호의 방향은 그대로다.」


   엄마의 담당 의사는 제법 사람을 안심시키는 말을 할 줄 알았다.
   ― 부분 절제로 최대한 가슴 모양을 살려보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세 시간을 예상했던 수술은 다섯 시간 가까이 걸렸다. 담당 의사는 엄마의 왼쪽 가슴을 전절제했다.
   ― 암환자가 전부 항암제를 맞는 건 아닙니다. 결과를 기다려 보세요.
   림프절 검사 결과 항암제 투여가 결정되었다. 담당 의사는 덤덤한 얼굴로 그나마 다른 장기에 전이되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했다. 항암제를 맞기 위해 엄마가 병원에 입원한 날 진료를 돌던 담당 의사가 엄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 같이 잘해 봅시다.
   ― 네, 네.
   ― 절대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 네, 그럴게요.
   엄마가 엉겁결에 담당 의사의 손을 맞잡으며 대답했다. 부작용을 대비해 그날은 나도 병원에서 잤다. 간이침대에서 숨을 쉴 때마다 바닥에 고인 냉랭한 공기가 폐를 쓸었다. 가슴이 따끔한 것 같아 손으로 눌러보았지만 어디가 아픈지 가늠할 수 없었다. 나는 집에서 가져온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항암제를 맞고 집에 돌아온 엄마는 한동안 잠만 잤다. 코를 고는 엄마 대신 조리법을 보며 요리했는데 토마토가 들어간 음식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항암제 치료는 3주 간격으로 반복한다고 했다. 엄마가 다음 항암제를 맞으러 가기 전까지 나는 밀린 수업을 보충했다.
   토요일은 다른 반에 수업이 없어 조용했다. 훌쩍거리는 아이를 달래다가 대기실의 학부모에게 보내기도 했고, 처음부터 할 마음이 없는 아이와 실랑이하기도 했다.
   ― 방정식은 배워도 쓸모가 없잖아요.
   ― 왜 쓸모가 없어. 무시하다 나중에 후회한다.
   ― 필요해지면 그때 배울게요.
   ― 그때는 늦어.
   ― 안 늦어요.
   ― 이미 늦었어.
   사탕을 주자 그제야 아이가 투덜거리던 입을 다물었다. 원생과 학부모가 모두 돌아간 뒤에 나는 원장에게 학원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병간호를 해야 한다고 했더니 원장은 더 붙잡지 않았다.
   수업을 정리하고 인수인계하는 동안 가을이 끝났다. 소지품을 챙겨 학원을 나오는 길에 흰 벌레를 보았다. 한 달 전보다 크기가 커져서 주먹만한 반죽을 뭉쳤다 늘렸다 하듯이 꿈틀거리는 모양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제 밟았다가는 운동화가 더러워질 것 같았다.
   버스 정류장에도 흰 벌레가 있었다. 하얀 몸통을 둥글게 마는 모습이 눈에 익었다. 기어다닐 때는 보이지 않던 검은색 발이 꿈틀거리다가 한데 모여 둥근 원을 만들었다. 더 지켜보고 싶지 않아 등을 돌렸는데 얼마 안 있어 무언가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슬리퍼를 끄는 소리인가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내 앞으로 사람이 지나가지 않았다. 바닥을 끄는 소리는 점차 커졌다. 힐끔 뒤돌아보자 사람은 없고 흰 벌레만 제자리를 돌고 있었다. 제자리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멀리 있다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코앞으로 닥쳐오는 일을 최근 여러 번 겪었다. 나는 버스를 타기 전까지 몇 번이나 뒤를 확인했다.
   지하철역에도 흰 벌레가 있었다. 노점 가판대마다 두세 마리씩 돌아다녔다. 골목 어귀에는 그 수가 다섯 마리로 늘어났다. 그쯤 되자 뭔가 체념하는 기분이 들었다.
   흰 벌레는 점차 수가 불어나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났다. 길마다 자동차 바퀴에 짓눌린 사체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바닥에 말라붙은 노란 체액을 피해 다니다가 무감해지는 데에 얼마 걸리지 않았다. 벌레를 유독 싫어하는 친구는 진저리를 쳤다.
   ― 다 죽여버리면 안 되나.
   ― 보기 흉해서 그렇지 사람한테는 해가 없대.
   ― 해가 없어도 불편하잖아.
   ― 불편할 뿐이지 죽는 건 아니니까.
   ― 죽어야 해가 되는 건가.
   한숨을 쉬는 친구에게 동영상 링크를 보냈다. 소금물을 뿌리자 흰 벌레가 움직임을 멈추고 꼼짝하지 않더라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은 작은 스프레이에 소금물을 담아서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실수로 흰 벌레를 밟아 터트린 날에는 다리를 타고 올라온 감각에 구역질이 났다. 아스팔트 바닥에 대고 발을 한참 문대어도 체액이 지워지지 않아 집에 오자마자 운동화를 빨았다. 날이 더 추워지고 눈이 내리자 흰 벌레가 뜸해졌다. 어쩌면 하얀 눈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것뿐인지도 모르지만 한동안은 소금물 없이 편하게 다닐 수 있었다.
   겨우내 줄어드나 싶었던 흰 벌레는 날이 따뜻해지면서 다시 수가 늘었다. 웅크리면 배구공으로 보일 만큼 커져서 스프레이로 뿌리는 소금물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흰 벌레를 물총으로 퇴치하는 광고가 인기를 끌더니 친구도 물총을 하나 구입했다고 말했다.
   ― 이거라도 없으면 출근 못 했을 거야.
   ― 다행이네.
   ― 너는 괜찮아?
   그즈음 나는 흰 벌레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이력서를 작성하고 면접을 보러다니느라 바빴다. 엄마가 마지막 항암제를 맞는 날 종합 건강 진단도 신청했다. 환자 가족은 30% 할인해준다는 전단에 혹하기도 했지만 내심 우려했다. 가족력에다 비출산, 서른이 넘은 나이까지 모두 고위험 요인이었다.
   검진 결과 초음파 영상에서 검은 구멍으로 보이는 결절이 왼쪽은 도토리만한 크기로 다수, 오른쪽은 밤톨만한 크기로 서너 개 발견되었다. 엄마의 가슴과 위치만 반대일 뿐 유형이 비슷했다. 엄마의 담당이자 내 담당인 의사가 절대 스트레스받지 말라고 해서 나는 대답했다.
   ― 네, 그럴게요.
   조직 검사를 받는 날은 혼자 병원에 갔다. 망치로 못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쇠침이 오른쪽 가슴을 푹 찔렀다. 탕. 탕. 작년 가을에 엄마도 같은 소리를 들었겠지. 조직 검사를 하고, 암이라 판명되고, 수술을 받은 뒤, 왼쪽 가슴이 사라졌다. 탕. 탕. 단단한 금속이 몸을 파고드는 감촉이 귀로 전해졌다. 서걱거리며 살을 잘라내는 소리가 소름 끼쳤다. 마취해서 감각이 없는 오른쪽 가슴 대신 왼쪽 가슴이 떨렸다. 검사가 끝나고 일어나자 상처에는 벌써 테이프형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나는 간호사가 시키는 대로 압박용 거즈를 힘껏 눌렀다.
   병원을 나와 버스 정류장에 한참 서 있었다. 언제 꽃이 피었다 졌는지 나무에 푸른 잎이 가득했다. 여름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닫자 갑자기 더위가 숨통을 조여 왔다. 가쁜 숨을 몰아쉴 때마다 희뿌연 하늘이 우그러들며 가라앉았다. 머리를 짓누르는 하늘 아래 얇게 고인 산소를 겨우 빨아들이는데 발이 돌멩이라도 얹은 것처럼 무거워졌다. 고개를 숙이자 흰 벌레가 보였다. 발등에 올라탄 하얀 몸통이 발목을 휘감고 있었다. 나는 다리를 앞으로 힘껏 뻗어 흰 벌레를 떨쳐내고 집으로 가는 길에 물총을 주문했다.

   「부등식의 양변에 같은 수를 곱하거나 나눌 때 양수이면 부등호의 방향이 그대로지만, 음수이면 부등호의 방향이 반대로 바뀐다. 예를 들어, ‘x+흰 벌레<낙관적 기대’의 양변에 종합 건강 검진 결과를 곱하면 양수일 때는 부등호의 방향이 그대로다. 음수일 때는 부등호의 방향이 반대로 바뀐다. (단, 종합 건강 검진이 30% 할인일 때)」


   거울 앞에 서서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들어올렸다. 왼쪽 가슴보다 오른쪽 가슴이 눈에 띄게 컸다. 여태 모른 게 이상할 정도였다. 조직 검사를 받고 가슴에 들었던 멍은 오늘 아침에야 완전히 사라졌다. 그 작은 상처가 낫는 데 일주일이 걸린 셈이다.
   옷을 갈아입고 베란다로 향했다. 나무로 된 널빤지 위에 소금이 한 포대 올라가 있었다. 천일염이 더 효과적이라고 해서 주문해 간수를 빼는 중이었다. 나는 국자로 스테인리스 그릇에 소금을 퍼 담았다. 불룩 솟아 있던 소금이 쑥 들어갔다.
   빈 생수병에 소금을 넣고 수돗물을 반쯤 채워 흔들었다. 소금이 어느 정도 녹았을 때 물을 입구까지 담고 뚜껑을 닫았다. 그렇게 세 번을 반복했다. 소금물 두 병은 배낭에 넣고 한 병은 물총에 끼웠다. 길기는 해도 한 손으로 들기에 부담 없는 무게였다. 소금물이 떨어졌을 때 생수병만 갈아 끼우면 되니까 사용하기도 편했다.
   목이 높은 워커를 신고 엄마와 함께 집을 나섰다. 골목 어귀에 자동차 바퀴만한 크기의 흰 벌레가 제자리에서 돌고 있었다. 나는 총부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소금물을 맞은 하얀 몸통이 둥글게 말고 있던 몸을 펼치며 뒤틀었다. 소금물의 효과는 오래가지 않았다. 바르작거리는 몸짓이 끝나기 전에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났다. 다음 골목에는 흰 벌레가 구석에 있어 피해 감 직해 보이기에 물총을 든 손을 늘어뜨렸다. 갈 길이 멀어 되도록 소금물을 아끼고 싶었다.
   버스 정류장에 흰 벌레가 없다 했더니 물청소 차가 지나간 뒤였다. 뿌리는 소금물의 염도가 낮은지 짠내보다 아스팔트 흙먼지 냄새가 더 진하게 풍겼다. 버스에 타자 물총을 든 사람이 여럿 보였다. 나도 그들처럼 물총을 세워 몸통을 꽉 움켜쥐었다. 병원에 도착하고서야 물총을 배낭에 집어넣었다.
   진료실 앞 대기실에 앉으며 배낭을 내려놓았다. 다리가 아프다고 중얼거리는 엄마의 목덜미로 땀방울이 주르륵 흘렀다. 항암제를 맞는 동안 엄마의 머리에서는 표백제를 탄 소금물 같은 냄새가 고약하게 풍겼다. 나는 숨을 참고 번들거리는 땀을 잽싸게 닦아내고는 했다.
   ― 수술해서 왼쪽 가슴이 아예 없어요. 이건 실리콘 패드예요. 가슴이 한쪽만 없으면 척추가 비뚤어진다잖아요.
   ― 어머, 그렇게 안 보이는데. 감쪽같다.
   옆자리에 앉은 아주머니가 감탄하자 건너편에서 귀를 기울이던 할머니가 불쑥 끼어들었다.
   ― 항암제는 언제까지 맞으셔?
   ― 저는 지난달에 끝났어요. 속이 다 후련하더라고요.
   실리콘 패드와 전용 브래지어에 대한 정보를 한참 교환하더니 어느새 흰 벌레로 화제가 옮겨갔다.
   ― 그것들은 점점 커지는 거 같아요.
   ― 뭘 먹고 그렇게 자라나 몰라.
   날이 더워지면서 흰 벌레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크기가 더 커지자 이제 집안에서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창문을 열었다가 방범창에 달라붙어 있는 흰 벌레에 기겁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있었다. 밖에 나가려고 현관문을 열 때 묵직하다 싶으면 흰 벌레가 복도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사할까. 흰 벌레가 집에 기어들어온 뒤로 상담 치료를 받기 시작한 친구가 말했다. 나는 그러라고도, 그러지 말라고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있었다.
   ― 사람 크기만한 것도 있다던데.
   ―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할머니가 어딘가에서 듣고 온 괴담을 전하자 엄마가 말도 안 된다며 웃었다. 아주머니도 엄마를 따라 웃었다. 할머니는 꿋꿋하게 흰 벌레가 다 자라면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다더라 하는 괴담까지 풀어놓았다. 웃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간호사가 이름을 불러 엄마와 내가 같이 일어났다. 그제야 모녀 사이인 걸 알아본 할머니가 닮았다고 상투적인 말을 건넸다. 간호사가 엄마가 아닌 내 쪽으로 와서 이름을 확인하니 주위가 조용해졌다.
   ― 오늘은 우리 애 때문에 왔어요.
   어설프게 웃으며 엄마가 고개를 까닥 움직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료실에 들어가 배낭을 내려놓고 간호사가 시키는 대로 티셔츠를 벗었다. 진료실에 들어온 담당 의사가 엄마를 알아보고 습관처럼 운동하라는 말을 던졌다. 커튼을 열고 내게도 뭐라고 했는데 곧 잊어버렸다.
   담당 의사가 손가락 세 개를 붙여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를 눌렀다. 밑가슴을 꾹꾹 누른 다음 가슴골을 지나 윗가슴으로 이동했다. 손가락이 누르는 압력이 소용돌이를 그리며 점차 유륜에 가까워졌지만 나는 어디에 결절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수술하면 흉터의 위치로 겨우 짐작하겠지. 아, 거기에 그것이 있었구나 하고.
   동생은 두 번째 빚을 지고 나서야 코인에 손을 댔다고 털어놓았다. 끈덕지게 이유를 캐묻던 아빠는 침묵했다. 엄마는 그날부터 웃음을 상실했다. 나 역시 예능 프로그램을 볼 때가 아니면 웃을 수 없었다. 아빠는 일을 늘리더니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더 늦어졌다. 물총이며 소금을 주문하는 건 전부 내 몫이었다. 차라리 흰 벌레를 상대하는 쪽이 더 마음 편하기도 했다.
   ― 옷 입고 나오세요.
   간호사의 말에 천천히 일어나 거칠게 티셔츠를 꿰입고 커튼을 열었다. 신발을 신고 둥근 의자에 앉아 담당 의사의 입을 응시했다.

   「연산은 참이 되는 해를 구하는 일이다. ‘x+흰 벌레<무너진 신뢰’의 해는 수술일 수도 있고, 실직일 수도 있다.」


   ― 집에서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마세요.
   담당 의사는 운동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다물었다. 진료실을 나와 간호사와 정기검진일을 조정하는데 대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아주머니가 물었다.
   ― 뭐래요?
   엄마가 힘이 빠진 미소를 지어 보이고 대답했다.
   ― 아니래요. 암 아니래요.
   ― 잘됐네.
   나는 아주머니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원무과에서 번호표를 뽑을 때까지 들뜬 기분이 가라앉지 않아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 차례가 오기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셈하던 중에 알람이 울렸다.
   ― 뉴스 봤어?
   축하한다는 말 대신 친구는 흰 벌레를 언급하고 다시 말했다.
   ― 뉴스를 봐.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답장이 없었다. 병원을 나가면서 친구에게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다시 전화를 거는데 사이렌을 울리며 구급차가 들어왔다. 청소원이 쓰레기 수거함을 밀고 그 옆을 지나갔다. 주황색 뚜껑이 들썩거린다 싶더니 흰 벌레가 기어나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청소원이 재빨리 흰 벌레를 쓰레기 수거함에 넣고 모서리를 돌아 사라졌다. 나는 핸드폰을 손에 든 채 입술을 깨물었다. 마른 각질이 뜯어지며 비리고 짭조름한 맛이 났다.
   버스에 올라타 엄마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음만 길게 이어졌다. 다리를 건너자 하늘이 까맣게 물들었다. 마천루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차창에 검은 재가 빗방울처럼 달라붙었다. 가로수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갈라져 불타고 있었다. 구불구불 파인 길에 잿물이 고였다. 갈라진 아스팔트 사이로 불거진 흙더미에 녹슨 하수관 같은 것들이 부서져 뒤엉켜 있었다. 그 너머로 흰 벌레가 보였다. 화물 트럭 크기만한 몸통이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며 편의점을 들이받았다. 전봇대가 무너져 불꽃이 튀었다. 승용차가 튕겨 날아가 뒤집혔다.
   옆자리에 앉은 엄마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는 엄마 손을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부드러운 피부가 자랑이었던 손등이 거칠해졌다. 손을 쥐었다. 척추가 비뚤어질까 봐 엄마는 집에서도 브래지어를 벗지 못했다. 도로 손을 폈다. 그렇게 몇 번이나 손을 쥐었다 펴도 엄마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나는 배낭에서 물총을 꺼내 움켜쥐고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다. 엄마를 태운 채 흰 벌레와 반대 방향으로 사라지는 버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쳐들었다. 하늘을 뒤덮은 검은 연기 너머로 모습이 보이지 않는 헬기 소리가 크게 들렸다. 나는 가장 높은 빌딩을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꼭대기 층을 눌렀다. 위로 올라가는 동안 엘리베이터는 쿵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때로 불이 깜박거렸다.
   ― 뭐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친구가 전화했다. 나는 대답했다.
   ― 바다에 가.
   꼭대기 층은 공사 중이었는지 온통 판자벽으로 막혀 있었다. 가운데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뚫린 곳을 찾아 들어가자 앞에 또 판자벽이 있었다. 이번에는 양쪽 끝이 뚫려 있어 왼쪽으로 향했다. 막다른 곳이었다. 되돌아나와 오른쪽으로 향했다.
   ― 바닷가에는 흰 벌레가 없대.
   ― 거기서 살면 좋겠다.
   ― 집값 많이 올랐을 거야.
   친구가 웃는 소리가 들려 다행이다 싶었다. 나는 아직 다른 사람을 웃게 만들 수 있구나. 판자벽이 흔들릴 때마다 천장에서 돌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미로 같은 길을 빠져나가자 커다란 창문이 보였다. 여기저기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 기다려. 내가 소방 헬기 훔쳐서 갈게.
   ― 소방 헬기?
   ― 바다 소금물 싣고 와서 왕창 뿌려줄게.
   발밑이 크게 흔들리더니 유리창이 깨져나갔다. 나는 더듬더듬 바닥을 짚고 일어나 창틀 너머를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몸통이 얼마나 빨리 도는지 벌레가 아니라 외눈박이 괴물의 눈으로 보였다. 흰자 가운데 박힌 검은색 눈동자가 희번덕거렸다. 나는 배낭에서 소금물을 꺼내 허공에 뿌렸다. 덩어리진 물이 산산이 흩어지고 나중에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 잘 먹어. 잘 먹어야 잘 울 수 있으니까. 실컷 울고 나면 잠도 잘 자고……
   통화를 마친 핸드폰을 집어넣고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바닥에서 깨진 유리를 살펴 손에 잡히는 것 중에 가장 큰 것을 골랐다. 흰 벌레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변화가 없었다. 나는 한쪽 다리를 올려 창틀을 밟았다. 심호흡하다가 벽을 넘어 훌쩍 뛰어내렸다. 하강하는 동안 커다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잠시 후 유리 조각이 꽂히고 상처가 날 것이다. 피눈물을 흘리는 벌레가 미쳐 날뛸 것이다. 헬기가 뒤틀린 대기를 유영하며 내려다볼 것이다. 사이렌은 울리지 않을 것이다. 바다가 마를 때까지 로데오 경기는 계속될 것이다. 사이렌은 울리지 않을 것이다.

   「부등식 연산에서 해가 나오지 않는 경우는 두 가지다. 하나는 부등호를 만족하는 해가 없는 ‘불능’이다. 이때는 x에 어떤 값을 넣어도 부등식이 거짓이 된다. 또 하나는 모든 수가 해가 되는 ‘부정’이다. 이때는 x에 어떤 값을 넣어도 부등식이 참이 된다. 즉, 부등식을 거짓으로 만드는 x가 존재하지 않는다.」


   에어컨 바람이 팔뚝을 긁어 소름이 돋았다. 무릎에 닿은 햇빛마저 서늘했다. 맞은편 자리에 장미와 에펠탑이 그려진 검은색 캔버스 가방을 끌어안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여자의 등 뒤로 벽면에 빗물 자국이 남은 연립과 부옇게 먼지가 앉은 방음벽이 지나갔다. 가로공원의 녹음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지하철은 삼켜지듯 터널 속으로 뛰어들었다.
   밖으로 나오자 폭염에 머리가 뜨거웠다. 나는 정류장에 서서 가르쳐야 할 아이들이 있는 직장으로 데려갈 버스를 기다렸다. 검은 재가 날려와 눈꺼풀 위에 내려앉을 때마다 끊어진 전선과 조각난 유리 조각이 발에 밟혔다. 흙탕물이 고인 웅덩이에서 음식 썩는 냄새가 풍겼다. 관자놀이를 따라 흘러내린 땀이 입꼬리에 스몄다. 매미가 가슴을 찌르듯이 일제히 울음을 터트렸다. 감당해야만 하는 여름이 흐르고 있었다.

고민실

삶에 지치고 흔들리면서도 자신을 지키려 애쓰는 사람을 생각한다.

2023/01/31
6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