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잔불
오늘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지나가버린 어제나 닥치지 않은 내일이 아니라 그저, 지금, 이 순간. 쓸데없이 후회하거나 무모한 계획을 세우는 건 질렸다. 절망도 희망도 품지 않으려 한다. 딱 몇 초 후, 필요하다면 몇 시간,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을 거고, 벌어진 일은 돌아보지 않을 거다. 넌 너무 많이 되새기고 예측했다. 난 너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초인종을 누르며 해야 할 말을 결정했다. 아침에 일어나 너희 집에 가기로 마음먹었을 땐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들이 죽은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하지만 손가락으로 버튼을 누르고 가벼운 이물감과 함께 전자음이 울리자 거짓말처럼 간단히 거짓말이 떠올랐다.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네 어머니에게 나는 방금 떠오른 말을 건넸다.
“괜찮으신지 보러 왔어요.”
어떤 표정을 짓는 게 좋을지 알 수 없었지만, 무슨 상관일까. 너의 어머니는 남의 표정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나무껍질처럼 말라비틀어지고 쪼그라든 네 어머니를 보니 새삼스럽게 네가 미워지고, 미안했다.
몇 번인가 인사한 적이 있었던 나를 기억하는지 어머니는 끄덕 고개를 흔들고 나를 집에 들였다.
너희 집에선 전과 다른 냄새가 났다. 답답하고 무거운 공기 속에 생선 비린내가 섞여 있었는데, 뭔가를 구워 먹은 것 같진 않았고, 아마 국물을 내었을 것이다. 며칠, 아니 그보다 더 오래 환기하지 않았겠지. 숨을 쉬면 집안의 어둠이 고스란히 내 안에 스며들 것 같아 그냥 거실 한복판에 서 있었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며 어머니가 편히 앉으라고 했는데, 그건 좀 이상한 말이었다. 편하게 앉는 건 편할 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래도 계속 서 있을 순 없으니 거실의 소파에 주저앉았을 때, 네 게임기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직사각형 모양의 게임기. 기계 뒤편의 케이블은 텔레비전에 연결되어 있었고 앞쪽의 가느다란 코드는 손에 쏙 맞게 디자인된 게임 패드와 이어져 있었다. 몇 번인가 네 등 뒤에서 네가 패드를 잡고 낑낑거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지. 텔레비전 화면 속에선 칼을 든 남자가 바닥을 구르거나, 총을 든 여자가 달려 다니곤 했다. 빌어먹을, 지난 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는데. 어쩔 수가 없네. 하지만 화면 속의 누군가가 위기에 처하거나 죽을 때마다 마치 자신이 직접 그런 일을 당한 것처럼 비명을 지르는 너를 보는 일은 참 웃기고 즐거웠다. 그래, 어쩌면 그런 일이 쌓이고 쌓여 정말로 네가 죽어버린 걸지도.
곧 어머니가 커피를 타 들고 와 내 앞에 놓았다. 믹스커피였는데 물을 너무 많이 타 밍밍했다. 자기 몫의 커피는 입에도 대지 않은 채 너희 어머니는 멍하니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너무 어색해서, “괜찮으세요?” 하고 물으니 너의 어머니는 가만히 웃더라. 그래, 내가 생각해도 웃긴 질문이네.
갑자기 너희 어머니가 휙 몸을 일으키더니 네 방문을 열고 들어가보겠느냐는 듯 고갯짓했다. 솔직히 들어갈 마음은 없었다. 실은 아무 생각이 없었지. 하지만 빼꼼히 열린 문틈 사이로 네 방안을 보고 있으니 안 들어가 볼 수가 없었다. 방에 들어선 나를 남기고 어머니는 자리를 피해 주방 쪽으로 가셨다.
커튼이 쳐진 방안은 어두침침했지만 의외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네가 치운 건 아닐 테고 너희 어머니가 청소했겠지. 하지만 구석구석 신경 써서 치운 건 아닌 모양이다. 방문 옆에 놓인 책꽂이에 먼지가 잔뜩 내려앉아 있었다. 재밌는 건 너의 침대. 네 잠자리는 방금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처럼 헝클어져 있었다.
“여기서 주무시나 봐요.” 어머니에게 묻자 고개를 저었다. 그럼 네가 자고 일어난 흔적이겠지. 이해가 갔다. 바닥을 쓸고 닦고 물건을 정리할 순 있어도, 방금 죽은 사람의 잠자리를 치우는 건 좀 다른 일이었겠지.
몇 번인가 여기서 함께 잠든 적이 있었지. 너희 어머니가 집을 비웠을 때. 그때는 이불 속 눅눅한 감촉이 참 싫었는데.
충동적으로 이불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예전처럼 불쾌하고 축축한 느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손을 넣은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불 속이 뜨겁다 싶을 정도로 따뜻해서. 침대 옆에 달린 전기담요의 스위치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끄는 걸 잊을 정도로 바쁘게 일어난 건가. 아니면 겨우내 한 번도 끈 적이 없었던 건가. 날이 따뜻해지는 참이니 이제 그만 꺼두는 게 좋을 텐데.
끌까, 생각하며 손을 뻗으려 했을 때 거실에서 나를 쳐다보는 너희 어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아무렇지 않은 척 거실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어머니가 너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한글을 일찍 익혔다면서?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설마 일곱 살 무렵부터 시작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다행히도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은 생략하더라. 착한 아들이었다지. 글쎄, 착한 게 대체 뭐야? 너는 투명하거나 희미하거나 조용하거나 싱겁거나 부드러울진 몰라도, 너를 착하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다. 무기력하고 순한 것은 무해하지만 그렇다고 맹물을 두고 착하다 하진 않으니까.
한참 동안 너에 대한 지나가버린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절대로 지나가버린 이야기는 하지 않을 거지만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까지 말릴 순 없으니까. 어머니는 네가 당신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을까? 너에게 어머니는 피하고 싶은 화제였잖니? 부끄러운 건지 무서운 건지 화가 난 건지는 몰라도. 어쩌면 셋 다일 수도 있고.
너의 역사가 죽던 날 아침에 이르렀을 때, 나는 일어서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사람의 입으로 그날의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 내가 확인하고 싶은 거지. 그러려고 찾아온 건데 하루 방문으로 될 일은 아닐 테고 아무래도 몇 번 더 들러야 할 텐데, 그때.
안방에 놓인 여행용 캐리어를 봤다. 막 챙기기 시작한 건지, 아니면 풀기 시작한 건지 주변에 옷가지가 잔뜩 널려 있더라.
“어디 가시려고요?”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아니면 돌아오시는 길?”
여행을 간다나 봐. 지방에 사는 친구 집에 일주일 정도. 집에 있으면 우울하기만 해서 바람을 쐬려고.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아니? 어쩌면 네 어머니의 지난 이야기를 참지 않아도 될지 몰라.
인사와 안부와 가벼운 부탁과 다짐을 주고받은 후 너희 집을 나왔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너희 집 근처의 철물점에 들러 필요한 물건의 값을 알아봤다. 지난 몇 주간 가장 부지런히 움직인 날이었다.
삶은 너무 짧다. 당장 너를 봐도 알 수 있지.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당장 출발하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정오가 지날 때까지 참았다.
너희 집 앞에 도착해 조심스레 문에 귀를 가져다 댔다. 인기척은 없었지만, 시험 삼아 초인종을 누르고 몸을 피해봤다. 집이 빈 것을 확인하고 내가 아는 너희 집 비밀번호를 눌렀다. 너의 생일. 그러고 보니, 곧 너의 생일이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마 어머니가 바꾼 모양이지. 하기야 죽은 아들의 생일을 매번 누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일 테니까. 그런데 번호를 뭘로 바꿨을까? 네 생일이 아니라면 당신의 생일이려나? 어제 넌지시 알아볼 수도 있었는데, 아깝네.
뭐, 이 정도는 예상했지. 곧장 철물점으로 가서 들고 다닐 수 있는 접이식 사다리를 샀다. 플라스틱 재질이라 가볍긴 해도 오래 쓰진 못하겠지만 무슨 상관이겠어. 딱 한 번만 쓰면 되는걸.
네 방 창문 쪽으로 돌아가 주위를 둘러본 후 사다리를 걸었다. 창문이 손에 닿는 곳까지 올라간 뒤에야 잠겨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부드럽게 창이 열리고 나는 네 방에 들어설 수 있었다. 다행이지 뭐야, 잠겼으면 깰 셈이었으니까.
방문을 열고 집안을 살폈다. 어머니가 계실지 모르니까. 낮잠이나 늦잠을 자다 초인종 소리를 못 들었을 수도 있고. 안방 문을 열어 보니 캐리어가 없었다. 아마 떠나신 모양이지.
현관문을 열고, 신발장에서 네가 신던 슬리퍼를 꺼내 문 아래쪽에 받쳐두고 집 뒤쪽의 사다리를 수거해 돌아왔다. 그리고 문을 잠그고 한동안 거실에 서서 호흡을 골랐다. 대낮이었지만 커튼이 쳐진 집안은 어두웠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묵은 공기가 느껴져 찝찝하더라. 갑자기 몸을 움직여서인지, 아니면 긴장해서 그런 건지 가슴이 몹시 뛰었다. 목덜미에 흘러내리는 땀을 손으로 쓸어내리고 싱크대에서 세수를 했다. 수건을 찾으려 물을 뚝뚝 흘리며 거실을 둘러봤는데 마땅한 게 없어 식탁에 놓인 휴지로 대충 닦아냈다. 그리고 잘 닦이지 않은 물기를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이마에 달라붙은 휴지 조각을 만지작거리며, 한마디로.
괜히 시간을 끌고 있었다. 해야 할 일은 명확했지만 막상 너희 집으로 들어와보니 쉬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식탁에 걸터앉아 아주 잠깐, 그냥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이미 너희 집에 들어오기까지 했는데 그럴 순 없고. 일단 들여다보기라도 하자, 그러고 나면 뭐든 해볼 마음이 들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네 방문 앞에 섰다.
창을 통해 들어올 때 열어두었던 문을 굳이 다시 닫고, 두 번 노크했어. 누구라도 방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할 만큼,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정중하게.
허락해줄래? 싫다면 지금 당장 대답해.
방안은 너희 집처럼 적막하다. 꼭 너처럼. 도무지 움직이지 않고 아무런 대답도 없으며 심지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짐을 줄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세 번째 취업에 실패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을 때 값비싼 물건과 도무지 팔릴 것 같지 않은 물건을 모두 내다 팔았다는 걸. 누구는 그조차도 일종의 신호나 경고였다고 주장한다. 너의 죽음이 보다 오랫동안, 아주 전부터 준비되어 왔던 일이라고. 나는 그보다는 현실적인 이유였을 거라 생각한다. 그저 얼마간의 용돈이 필요했던 거라고. 어쨌거나 이제 네 방에 남은 것은 네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누구에게도 가치가 없어 도저히 팔 수 없었던 물건들뿐이다. 옷장과 책상, 속옷과 겉옷들, 겨우 돌아가는 컴퓨터와 키보드 옆에 놓인 머그컵. 딱 그 정도가 네게 필요한 물건이었나보다. 예전 너에게 주었던 물건의 대다수가 없었다. 환절기마다 목을 앓았던 네게 선물했던 가습기나, 엉성한 면도질에 얼굴을 베이던 너를 위해 사 준 면도기 같은 것들. 그럼 서가에 넘치도록 꽂힌 책들은 팔 수 없던 물건이었나. 다 읽거나 아직 읽지 않은 수많은 책은 네게 어떤 가치가 있었나. 네가 죽어가고 있을 때, 네가 읽은 책들은 너를 지켜주지 못했다. 얼어붙은 길에 오토바이를 몰고 가다 미끄러져 머리를 부딪칠 때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 적혀 있는 책은 없을 테니까. 그러니 이 책들은 누구에게도 팔 수 없었던 거다.
가능하다면 지금 당장 네게 남은 책들을 가지고 나가 모두 태워버리고 싶다.
컴퓨터를 켰다. 너는 대답이 없으므로 무엇이든 답을 찾고 싶다면 남은 기록들을 뒤지는 수밖에. 네가 마지막으로 적은 글씨는 내게 건넨 편지였을 것이다. 거기 그렇게 적혀 있었다. 요즘은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고. 그래서 글씨를 쓰는 것이 몹시 어색하지만 꼭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짧은 편지였지만 네가 전하고자 했던 원망 같은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찢어버렸을 만큼 충분히. 그래서 너의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네가 준 것이 편지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어쩌면 그 글에서 내가 읽어내야 했던 것은 나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너의 심경이었을지도. 그러나 두 장을 겨우 넘긴 그 편지는 조각조각 찢겨 커피숍의 쓰레기통에 들어갔으므로, 이제 남은 기록이라곤 네가 쓰던 컴퓨터뿐일 텐데.
그런데, 컴퓨터는 텅 비어 있었다. 덩그러니 휴지통 아이콘만 남아 있는 화면을 보고 있으니 어쩌면 이건 평소 네가 툭툭 내뱉던 싱거운 농담의 일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쓰레기통만 남기고, 모두 쓰레기통으로. 그래, 너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또 한편, 원하던 것을 찾은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던 것. 너만이 이야기해줄 수 있으므로 이젠 누구도 이야기할 수 없는 사실. 그 사실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증거와 근거. 사용하던 컴퓨터를 깡통처럼 비워버린 것은 남은 것들을 정리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니. 죽은 뒤에 컴퓨터를 뒤졌더니 갖가지 야동이 튀어나오는 것은 민망하니까. 물론 아무런 증거가 아닐 수도 있다. 그저 단순히 컴퓨터가 팔린 것일지도 모른다. 빈 컴퓨터를 끄고 거실로 나왔다.
이제 어쩌면 좋을까.
가능하다면 지금 내게 들려주지 않을래? 나밖엔 아무도 없으니까, 살짝 다가와 귀에 속삭여줘.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게. 오직 나만 알고 있을 테니 내게만 살짝.
멍하니 팔을 늘어뜨리고 중얼거렸다. “살짝.”
살짝, 무엇을?
네가 왜 죽었는지를.
너와 더 친한 우리의 친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네가 죽음을 택한 거라고. 배달 아르바이트는 핑계고, 오토바이의 브레이크를 일부러 잡지 않은 거라고. 그 길은 네가 수백 번을 오르내린 길이고, 거기서 조심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네가 잘 알고 있었다고. 나와 친한 친구들은 그럴 리 없다고 말했다. 이른 시각이었고 아직 잠에서 덜 깨었거나, 도로에 남아 있던 물기에 미끄러진 걸지도 모른다고. 사고에 이유를 붙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고 그건 살아 있는 사람들을 더욱 괴롭히는 일이라고.
너의 선택이든 사고든, 그애들이 그런 말을 주고받는 것은 결국 나에 대한 원망과도 같았다. 그 직전 우리는 몹시 험악한 꼴로 헤어졌으니까.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이력서에 적어넣을 몇 줄의 성취를 제외하면 또래 관계뿐이었으므로, 나는 열심히 너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아무쪼록 전과 변함없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주로 지나간 너의 잘못과 계획 없는 미래를 핑계 삼았지만, 알고 있니? 사실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나는 그저 그날 너의 얼굴이 싫었다. 그 얼굴이 짓는 표정과 네가 입은 옷과 그 옷에 어울리지 않는 신발과 네가 시킨 커피의 냄새와 주변의 소음이 싫었다. 내가 입은 바지와 그 바지에 맞춘 신발의 얼룩과 공들여 꾸몄지만 금세 흐트러진 머리 모양과 내가 주문한 음료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맛이 싫어서 나는 너와 더이상 만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다음 이야기는 우리 두 사람보다 나의 친구들이 더 잘 알고 있다. 단체 채팅방과 SNS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필요 이상으로 부풀려진 이야기들이 마음껏 날뛰었으니까. 너의 낙담과 나의 이기심 같은 것들. 혹은 너의 무책임함과 나의 인내심 같은 것들. 나는 그 모든 이야기들을 내버려두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은 오직 내 마음뿐이다.
하지만 그 애들이 모르는 것도 있다. 네가 건네준 편지 같은 것. 그 편지를 받고 나는 너를 불러냈다. 거실의 창문을 열면 마지막으로 너와 만났던 공원이 보인다. 커다란 나무 아래에 벤치가 놓인 작은 쉼터다. 나무 밑동에는 우리 둘의 이름이 패어 있다. 집에서 칼을 가져와 우리 둘이 직접 새긴 것이다.
다정했던 시기에 우리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손을 잡고 입을 맞췄다. 어둑어둑 날이 저물 무렵, 머리 위에 드리운 검푸른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많은 마음을 서로의 손가락으로 헤아렸다.
헤어진 후 만났을 때에도 나는 그렇게 했다. 편지에 적힌 것이 진심이냐는 나의 힐난에 너는 오롯한 진심은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고, 나는 그 대가로 무릎을 꿇렸다. 이전에도 너는 종종 무릎을 꿇었다. 장난이었을 때도 있었고 간절했을 때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무릎을 꿇었을 때 너는 어떤 기분이었나. 살짝, 알려주지 않을래?
처음부터 때려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다. 그저 네가 공들여 적은 편지만큼 너를 모욕하고 싶었다. 하지만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던 너의 얼굴은 어두컴컴한 그림자에 가려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고, 그래서 손을 놀렸다. 나무 둥치에 이름을 새길 때처럼, 뺨을 하나아, 두우울, 셋. 너는 신음도 흘리지 않고 가만히 따귀를 맞았다.
그러니 나는 알 수 없다. 때린 사람이 죽는다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내가 죽는다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벌을 받은 거라고. 누군가를 때렸으니 어딘가에서 미끄러져 머리를 부딪칠 수도 있다고. 하지만 맞은 사람이 죽는 것은 글쎄.
한참 거실에 서 있었다. 낮이었지만 해가 흐려 커튼이 쳐진 집안은 어둡다. 아마 내 얼굴도 분간할 수 없겠지. 그렇다면 누군가 다가와 내 뺨을 후려쳐주진 않을까. 누군가, 이를테면 네가. 그러면 나도 너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울 수 있겠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그저 서 있기만 하는 것보단 차라리 맞거나 울거나 죽는 것이 낫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그런 게 나아.
텔레비전 앞에 놓인 게임기의 패드를 들고 구동 스위치를 눌렀다. 화면이 켜졌을 때는 아주 약간 두려움을 느꼈다. 컴퓨터처럼 게임기도 텅 비어 있다면 정말 견디기 힘들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익숙한 아이콘 몇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네가 즐겨하던 게임들. 혼자 신이 나 한참 동안 내용을 설명하곤 했지. 관심을 두지도, 묻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그때 생각이 났다. 게임기에 자동 녹화 기능이 있었지. 몇 번인가 자랑했잖아. 어려운 보스를 멋지게 잡아냈다면서 알아보기도 힘든 화면을 보게 했어. 새삼스레 짜증이 치밀었지만 꾹 참고 패드를 조작해 녹화된 동영상을 찾았다. 마지막으로 게임기를 만진 것은 언제지? 나와 헤어지던 날? 아니면 편지를 쓰던 날? 혹은 내게 뺨을 맞은 날?
자동으로 저장된 동영상의 날짜를 확인했다. 가장 최근의 영상은 너의 기일에 저장된 것이었다. 네가 살아있던 마지막 흔적.
재생 버튼을 누르자, 화면이 암전되었다. 곧 희미하게 불빛이 떠오르고 짙은 안개 사이로 고풍스러운 도시의 전경이 펼쳐졌다.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순례자들은,
순례자들은 북쪽으로 향하고, 예언의 의미를 깨달을 것이다.
불은 사그라들고, 왕들에겐 옥좌가 없지만,
장작조차 되지 못한 자들은 그렇기에 더더욱 잔불을 바라는 거야.
웅장한 음악과 종소리가 울리고, 돌로 된 관 속에서 가느다란 팔 하나가 솟아올랐다. 되살아난 남자는 앞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해골 모습의 적들을 칼로 능숙하게 베어가며 남자는 절벽과 돌길 사이를 달렸다.
그것은 몹시 어처구니없는 광경이어서 뭐라 보탤 말이 없었다. 갑자기 관 속에서 되살아나는 것은 뭐고, 되살아나자마자 해골이 덤벼드는 것은 또 뭐지? 죽은 사람이 저렇게 완전히 무장을 하고 있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그러면서도 또 잘 아는 길처럼 거침없이 나아가는 건 또 뭐야.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들어본 적이 있는 게임이었다. 옥좌가 없는 왕들, 장작이 되지 못한 자들. 오래전 세상을 밝히던 불이 꺼지고, 왕들은 스스로의 몸을 태우는 장작이 되어 멸망을 막았다. 그러나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불은 사그라들고 이제 남은 것은 아주 약간의 온기만 남은 깜부기와 불이 꺼진 재들.
하지만 그래서 재는 잔불을 바라는 거야.
잘 모르는 눈으로 봐도 게임은 몹시 어려워 보였다. 주인공이 들고 있는 무기는 보잘것없는 검 한 자루뿐인데, 덤벼오는 적들은 갈수록 점점 더 흉악해져 갔다. 거대한 도끼와 창을 든 해골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오고, 누군가는 손에서 번개를 뿌리거나 빛줄기를 쐈다. 맹수와 불을 뿜는 용들, 그리고 집채만한 크기의 걸어다니는 나무와 걸쭉한 타르 같은 것을 뿌리고 다니는 괴물이 차례차례 등장했다.
하지만 그런 모든 괴물들보다 훨씬 더 어이없는 것은 주인공 남자였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사람 같은데, 줄지어 등장하는 환상 속 세계의 황당한 괴물들을 잘도 무찌르고 있었다. 물론 몇 번인가 공격을 받고 쓰러지거나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일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다가오는 위험을 능숙하게 헤쳐나갔다. 들고 있던 아이템을 던져 미리 함정을 작동시키고, 숨어있는 적들을 교묘히 유인해 처리했다. 화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커다란 괴물의 공격을 힘겹게 피하고 자세를 가다듬은 후 다시 공격을 이어나가는 식으로 끝끝내 적을 쓰러뜨렸다.
다행스러운 것은 남자가 몇 번을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 칼에 베이고, 화염에 타고, 벼락을 맞아 쓰러져도 언제나 정해진 자리에서 남자는 살아났다. 그렇게 살아나면 또 한번 자신이 죽은 자리를 향해 나아갔다. 질릴 만큼 끈질긴 도전이 계속 이어졌다.
녹화된 동영상은 꽤나 길었다. 아침에 출근했을 테니, 밤새 게임을 한 거구나. 대단한 건 저 남자가 아니라 너였어.
몇 시간을 봤을까, 영상이 끝나갈 무렵엔 날이 저물고 있었다. 문득 화면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잿빛의 하늘이 붉게 물들고 태양은 검은빛을 뿜었다. 아마도 세상의 불이 다 타버린 모양이다. 어느 들판을 향해 남자가 달려 나갔다. 그리고 그 앞에 왕관을 쓴 사람 형태의 불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예언 속 장작의 왕.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여기는 멸망 직전이야. 밖은 흐리고, 불은 꺼졌어. 우리는 모두 얼굴을 가렸고 약속된 것은 없어. 너는 가난하고 나는 잔인해.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떠들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아무도 몰라. 나는 살아있지만 너는 죽었고, 언젠가 우리는 재밖에 남지 않게 될 거야. 끝을 향해 가는 도중이란 건 그냥 끝이 왔다는 뜻이 아닐까. 이런 세상에서 너는 이제 어쩔 셈이야?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남자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왕은 불로 된 검을 들고 남자를 베기 시작했다. 몇 번의 공방이 오가고 왕 앞에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되살아나는 것은 너에게 축복이자 저주. 다시 정해진 자리에서 일어선 남자는 한번 더 왕에게 덤벼들었다. 죽고, 또 죽고. 이전의 괴물들보다 훨씬 오래, 더 많이 남자는 왕과 싸웠다. 그리고,
“잘하네.”
엔딩 화면 위로 올라가는 스테프롤을 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그때,
“좋아.” 너의 목소리가 화면에서 흘러나왔다.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화면을 뒤로 돌렸다. 다시 한번 네 음성이 들렸다. 좋아. 패드에 달린 스피커에 녹음된 소리였다.
아무렇지 않은 듯, 심드렁하게 네가 말했다. 좋아.
뭐가?
영상이 끝나고 게임기의 초기 화면이 떠올랐다. 꼭 잡고 있던 패드를 겨우 놓고 호흡을 골랐다. 세상의 멸망을 두고 누군가와 다투기라도 한 것처럼 몹시 피곤했다. 동시에 묘한 안도감. 불이 꺼진 세상이 다시 밝아지진 않더라도, 작은 깜부기 같은 것이 타올라 내일이나 그 다음날 정도는 상상할 수 있을 거라고. 한번 더 네 목소리를 들어볼까. 증거. 네가 죽은 것이 나 때문이 아니라는 확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 내게만 살짝. 무언가 덜어내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어서. 그런데 네가 말했잖아. 좋아, 라고. 뭐가 좋은 거야? 나도 좋아해도 좋은 거야?
졸음이 몰려왔다. 게임기를 끄고 패드를 원래 자리에 돌려놓고 사다리를 챙겨 집을 빠져나가야 하는데, 견딜 수 없이 졸렸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네 방으로 갔다. 정리되지 않은 너의 잠자리. 전에도 여기서 잠든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너는 죽었고, 너의 어머니는 없다. 우리는 헤어졌고 나는 너를 때렸다. 그래도 괜찮을까? 네가 말했잖아. 좋아.
조심스레 침대에 몸을 뉘었다. 전기담요를 끄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이불 속은 녹아내릴 것처럼 따뜻하고 달콤했다. 멸망이 미뤄진 세상이나, 모닥불 속에 남은 잔불처럼.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며 나는 네게 몇 마디 말을 중얼거렸다. 용서를 구하진 않았다. 너는 용서하지 못하니까. 후회하지도 않았다.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으니까. 그저, 우리가 몰랐던 우리의 마음을 겨우 입 밖에 내었다. 누구도 듣지 못하게, 네게만 살짝.
초인종을 누르며 해야 할 말을 결정했다. 아침에 일어나 너희 집에 가기로 마음먹었을 땐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들이 죽은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하지만 손가락으로 버튼을 누르고 가벼운 이물감과 함께 전자음이 울리자 거짓말처럼 간단히 거짓말이 떠올랐다.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네 어머니에게 나는 방금 떠오른 말을 건넸다.
“괜찮으신지 보러 왔어요.”
어떤 표정을 짓는 게 좋을지 알 수 없었지만, 무슨 상관일까. 너의 어머니는 남의 표정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나무껍질처럼 말라비틀어지고 쪼그라든 네 어머니를 보니 새삼스럽게 네가 미워지고, 미안했다.
몇 번인가 인사한 적이 있었던 나를 기억하는지 어머니는 끄덕 고개를 흔들고 나를 집에 들였다.
너희 집에선 전과 다른 냄새가 났다. 답답하고 무거운 공기 속에 생선 비린내가 섞여 있었는데, 뭔가를 구워 먹은 것 같진 않았고, 아마 국물을 내었을 것이다. 며칠, 아니 그보다 더 오래 환기하지 않았겠지. 숨을 쉬면 집안의 어둠이 고스란히 내 안에 스며들 것 같아 그냥 거실 한복판에 서 있었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며 어머니가 편히 앉으라고 했는데, 그건 좀 이상한 말이었다. 편하게 앉는 건 편할 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래도 계속 서 있을 순 없으니 거실의 소파에 주저앉았을 때, 네 게임기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직사각형 모양의 게임기. 기계 뒤편의 케이블은 텔레비전에 연결되어 있었고 앞쪽의 가느다란 코드는 손에 쏙 맞게 디자인된 게임 패드와 이어져 있었다. 몇 번인가 네 등 뒤에서 네가 패드를 잡고 낑낑거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지. 텔레비전 화면 속에선 칼을 든 남자가 바닥을 구르거나, 총을 든 여자가 달려 다니곤 했다. 빌어먹을, 지난 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는데. 어쩔 수가 없네. 하지만 화면 속의 누군가가 위기에 처하거나 죽을 때마다 마치 자신이 직접 그런 일을 당한 것처럼 비명을 지르는 너를 보는 일은 참 웃기고 즐거웠다. 그래, 어쩌면 그런 일이 쌓이고 쌓여 정말로 네가 죽어버린 걸지도.
곧 어머니가 커피를 타 들고 와 내 앞에 놓았다. 믹스커피였는데 물을 너무 많이 타 밍밍했다. 자기 몫의 커피는 입에도 대지 않은 채 너희 어머니는 멍하니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너무 어색해서, “괜찮으세요?” 하고 물으니 너의 어머니는 가만히 웃더라. 그래, 내가 생각해도 웃긴 질문이네.
갑자기 너희 어머니가 휙 몸을 일으키더니 네 방문을 열고 들어가보겠느냐는 듯 고갯짓했다. 솔직히 들어갈 마음은 없었다. 실은 아무 생각이 없었지. 하지만 빼꼼히 열린 문틈 사이로 네 방안을 보고 있으니 안 들어가 볼 수가 없었다. 방에 들어선 나를 남기고 어머니는 자리를 피해 주방 쪽으로 가셨다.
커튼이 쳐진 방안은 어두침침했지만 의외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네가 치운 건 아닐 테고 너희 어머니가 청소했겠지. 하지만 구석구석 신경 써서 치운 건 아닌 모양이다. 방문 옆에 놓인 책꽂이에 먼지가 잔뜩 내려앉아 있었다. 재밌는 건 너의 침대. 네 잠자리는 방금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처럼 헝클어져 있었다.
“여기서 주무시나 봐요.” 어머니에게 묻자 고개를 저었다. 그럼 네가 자고 일어난 흔적이겠지. 이해가 갔다. 바닥을 쓸고 닦고 물건을 정리할 순 있어도, 방금 죽은 사람의 잠자리를 치우는 건 좀 다른 일이었겠지.
몇 번인가 여기서 함께 잠든 적이 있었지. 너희 어머니가 집을 비웠을 때. 그때는 이불 속 눅눅한 감촉이 참 싫었는데.
충동적으로 이불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예전처럼 불쾌하고 축축한 느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손을 넣은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불 속이 뜨겁다 싶을 정도로 따뜻해서. 침대 옆에 달린 전기담요의 스위치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끄는 걸 잊을 정도로 바쁘게 일어난 건가. 아니면 겨우내 한 번도 끈 적이 없었던 건가. 날이 따뜻해지는 참이니 이제 그만 꺼두는 게 좋을 텐데.
끌까, 생각하며 손을 뻗으려 했을 때 거실에서 나를 쳐다보는 너희 어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아무렇지 않은 척 거실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어머니가 너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한글을 일찍 익혔다면서?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설마 일곱 살 무렵부터 시작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다행히도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은 생략하더라. 착한 아들이었다지. 글쎄, 착한 게 대체 뭐야? 너는 투명하거나 희미하거나 조용하거나 싱겁거나 부드러울진 몰라도, 너를 착하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다. 무기력하고 순한 것은 무해하지만 그렇다고 맹물을 두고 착하다 하진 않으니까.
한참 동안 너에 대한 지나가버린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절대로 지나가버린 이야기는 하지 않을 거지만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까지 말릴 순 없으니까. 어머니는 네가 당신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을까? 너에게 어머니는 피하고 싶은 화제였잖니? 부끄러운 건지 무서운 건지 화가 난 건지는 몰라도. 어쩌면 셋 다일 수도 있고.
너의 역사가 죽던 날 아침에 이르렀을 때, 나는 일어서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사람의 입으로 그날의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 내가 확인하고 싶은 거지. 그러려고 찾아온 건데 하루 방문으로 될 일은 아닐 테고 아무래도 몇 번 더 들러야 할 텐데, 그때.
안방에 놓인 여행용 캐리어를 봤다. 막 챙기기 시작한 건지, 아니면 풀기 시작한 건지 주변에 옷가지가 잔뜩 널려 있더라.
“어디 가시려고요?”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아니면 돌아오시는 길?”
여행을 간다나 봐. 지방에 사는 친구 집에 일주일 정도. 집에 있으면 우울하기만 해서 바람을 쐬려고.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아니? 어쩌면 네 어머니의 지난 이야기를 참지 않아도 될지 몰라.
인사와 안부와 가벼운 부탁과 다짐을 주고받은 후 너희 집을 나왔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너희 집 근처의 철물점에 들러 필요한 물건의 값을 알아봤다. 지난 몇 주간 가장 부지런히 움직인 날이었다.
삶은 너무 짧다. 당장 너를 봐도 알 수 있지.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당장 출발하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정오가 지날 때까지 참았다.
너희 집 앞에 도착해 조심스레 문에 귀를 가져다 댔다. 인기척은 없었지만, 시험 삼아 초인종을 누르고 몸을 피해봤다. 집이 빈 것을 확인하고 내가 아는 너희 집 비밀번호를 눌렀다. 너의 생일. 그러고 보니, 곧 너의 생일이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마 어머니가 바꾼 모양이지. 하기야 죽은 아들의 생일을 매번 누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일 테니까. 그런데 번호를 뭘로 바꿨을까? 네 생일이 아니라면 당신의 생일이려나? 어제 넌지시 알아볼 수도 있었는데, 아깝네.
뭐, 이 정도는 예상했지. 곧장 철물점으로 가서 들고 다닐 수 있는 접이식 사다리를 샀다. 플라스틱 재질이라 가볍긴 해도 오래 쓰진 못하겠지만 무슨 상관이겠어. 딱 한 번만 쓰면 되는걸.
네 방 창문 쪽으로 돌아가 주위를 둘러본 후 사다리를 걸었다. 창문이 손에 닿는 곳까지 올라간 뒤에야 잠겨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부드럽게 창이 열리고 나는 네 방에 들어설 수 있었다. 다행이지 뭐야, 잠겼으면 깰 셈이었으니까.
방문을 열고 집안을 살폈다. 어머니가 계실지 모르니까. 낮잠이나 늦잠을 자다 초인종 소리를 못 들었을 수도 있고. 안방 문을 열어 보니 캐리어가 없었다. 아마 떠나신 모양이지.
현관문을 열고, 신발장에서 네가 신던 슬리퍼를 꺼내 문 아래쪽에 받쳐두고 집 뒤쪽의 사다리를 수거해 돌아왔다. 그리고 문을 잠그고 한동안 거실에 서서 호흡을 골랐다. 대낮이었지만 커튼이 쳐진 집안은 어두웠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묵은 공기가 느껴져 찝찝하더라. 갑자기 몸을 움직여서인지, 아니면 긴장해서 그런 건지 가슴이 몹시 뛰었다. 목덜미에 흘러내리는 땀을 손으로 쓸어내리고 싱크대에서 세수를 했다. 수건을 찾으려 물을 뚝뚝 흘리며 거실을 둘러봤는데 마땅한 게 없어 식탁에 놓인 휴지로 대충 닦아냈다. 그리고 잘 닦이지 않은 물기를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이마에 달라붙은 휴지 조각을 만지작거리며, 한마디로.
괜히 시간을 끌고 있었다. 해야 할 일은 명확했지만 막상 너희 집으로 들어와보니 쉬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식탁에 걸터앉아 아주 잠깐, 그냥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이미 너희 집에 들어오기까지 했는데 그럴 순 없고. 일단 들여다보기라도 하자, 그러고 나면 뭐든 해볼 마음이 들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네 방문 앞에 섰다.
창을 통해 들어올 때 열어두었던 문을 굳이 다시 닫고, 두 번 노크했어. 누구라도 방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할 만큼,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정중하게.
허락해줄래? 싫다면 지금 당장 대답해.
방안은 너희 집처럼 적막하다. 꼭 너처럼. 도무지 움직이지 않고 아무런 대답도 없으며 심지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짐을 줄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세 번째 취업에 실패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을 때 값비싼 물건과 도무지 팔릴 것 같지 않은 물건을 모두 내다 팔았다는 걸. 누구는 그조차도 일종의 신호나 경고였다고 주장한다. 너의 죽음이 보다 오랫동안, 아주 전부터 준비되어 왔던 일이라고. 나는 그보다는 현실적인 이유였을 거라 생각한다. 그저 얼마간의 용돈이 필요했던 거라고. 어쨌거나 이제 네 방에 남은 것은 네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누구에게도 가치가 없어 도저히 팔 수 없었던 물건들뿐이다. 옷장과 책상, 속옷과 겉옷들, 겨우 돌아가는 컴퓨터와 키보드 옆에 놓인 머그컵. 딱 그 정도가 네게 필요한 물건이었나보다. 예전 너에게 주었던 물건의 대다수가 없었다. 환절기마다 목을 앓았던 네게 선물했던 가습기나, 엉성한 면도질에 얼굴을 베이던 너를 위해 사 준 면도기 같은 것들. 그럼 서가에 넘치도록 꽂힌 책들은 팔 수 없던 물건이었나. 다 읽거나 아직 읽지 않은 수많은 책은 네게 어떤 가치가 있었나. 네가 죽어가고 있을 때, 네가 읽은 책들은 너를 지켜주지 못했다. 얼어붙은 길에 오토바이를 몰고 가다 미끄러져 머리를 부딪칠 때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 적혀 있는 책은 없을 테니까. 그러니 이 책들은 누구에게도 팔 수 없었던 거다.
가능하다면 지금 당장 네게 남은 책들을 가지고 나가 모두 태워버리고 싶다.
컴퓨터를 켰다. 너는 대답이 없으므로 무엇이든 답을 찾고 싶다면 남은 기록들을 뒤지는 수밖에. 네가 마지막으로 적은 글씨는 내게 건넨 편지였을 것이다. 거기 그렇게 적혀 있었다. 요즘은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고. 그래서 글씨를 쓰는 것이 몹시 어색하지만 꼭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짧은 편지였지만 네가 전하고자 했던 원망 같은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찢어버렸을 만큼 충분히. 그래서 너의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네가 준 것이 편지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어쩌면 그 글에서 내가 읽어내야 했던 것은 나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너의 심경이었을지도. 그러나 두 장을 겨우 넘긴 그 편지는 조각조각 찢겨 커피숍의 쓰레기통에 들어갔으므로, 이제 남은 기록이라곤 네가 쓰던 컴퓨터뿐일 텐데.
그런데, 컴퓨터는 텅 비어 있었다. 덩그러니 휴지통 아이콘만 남아 있는 화면을 보고 있으니 어쩌면 이건 평소 네가 툭툭 내뱉던 싱거운 농담의 일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쓰레기통만 남기고, 모두 쓰레기통으로. 그래, 너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또 한편, 원하던 것을 찾은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던 것. 너만이 이야기해줄 수 있으므로 이젠 누구도 이야기할 수 없는 사실. 그 사실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증거와 근거. 사용하던 컴퓨터를 깡통처럼 비워버린 것은 남은 것들을 정리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니. 죽은 뒤에 컴퓨터를 뒤졌더니 갖가지 야동이 튀어나오는 것은 민망하니까. 물론 아무런 증거가 아닐 수도 있다. 그저 단순히 컴퓨터가 팔린 것일지도 모른다. 빈 컴퓨터를 끄고 거실로 나왔다.
이제 어쩌면 좋을까.
가능하다면 지금 내게 들려주지 않을래? 나밖엔 아무도 없으니까, 살짝 다가와 귀에 속삭여줘.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게. 오직 나만 알고 있을 테니 내게만 살짝.
멍하니 팔을 늘어뜨리고 중얼거렸다. “살짝.”
살짝, 무엇을?
네가 왜 죽었는지를.
너와 더 친한 우리의 친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네가 죽음을 택한 거라고. 배달 아르바이트는 핑계고, 오토바이의 브레이크를 일부러 잡지 않은 거라고. 그 길은 네가 수백 번을 오르내린 길이고, 거기서 조심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네가 잘 알고 있었다고. 나와 친한 친구들은 그럴 리 없다고 말했다. 이른 시각이었고 아직 잠에서 덜 깨었거나, 도로에 남아 있던 물기에 미끄러진 걸지도 모른다고. 사고에 이유를 붙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고 그건 살아 있는 사람들을 더욱 괴롭히는 일이라고.
너의 선택이든 사고든, 그애들이 그런 말을 주고받는 것은 결국 나에 대한 원망과도 같았다. 그 직전 우리는 몹시 험악한 꼴로 헤어졌으니까.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이력서에 적어넣을 몇 줄의 성취를 제외하면 또래 관계뿐이었으므로, 나는 열심히 너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아무쪼록 전과 변함없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주로 지나간 너의 잘못과 계획 없는 미래를 핑계 삼았지만, 알고 있니? 사실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나는 그저 그날 너의 얼굴이 싫었다. 그 얼굴이 짓는 표정과 네가 입은 옷과 그 옷에 어울리지 않는 신발과 네가 시킨 커피의 냄새와 주변의 소음이 싫었다. 내가 입은 바지와 그 바지에 맞춘 신발의 얼룩과 공들여 꾸몄지만 금세 흐트러진 머리 모양과 내가 주문한 음료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맛이 싫어서 나는 너와 더이상 만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다음 이야기는 우리 두 사람보다 나의 친구들이 더 잘 알고 있다. 단체 채팅방과 SNS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필요 이상으로 부풀려진 이야기들이 마음껏 날뛰었으니까. 너의 낙담과 나의 이기심 같은 것들. 혹은 너의 무책임함과 나의 인내심 같은 것들. 나는 그 모든 이야기들을 내버려두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은 오직 내 마음뿐이다.
하지만 그 애들이 모르는 것도 있다. 네가 건네준 편지 같은 것. 그 편지를 받고 나는 너를 불러냈다. 거실의 창문을 열면 마지막으로 너와 만났던 공원이 보인다. 커다란 나무 아래에 벤치가 놓인 작은 쉼터다. 나무 밑동에는 우리 둘의 이름이 패어 있다. 집에서 칼을 가져와 우리 둘이 직접 새긴 것이다.
다정했던 시기에 우리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손을 잡고 입을 맞췄다. 어둑어둑 날이 저물 무렵, 머리 위에 드리운 검푸른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많은 마음을 서로의 손가락으로 헤아렸다.
헤어진 후 만났을 때에도 나는 그렇게 했다. 편지에 적힌 것이 진심이냐는 나의 힐난에 너는 오롯한 진심은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고, 나는 그 대가로 무릎을 꿇렸다. 이전에도 너는 종종 무릎을 꿇었다. 장난이었을 때도 있었고 간절했을 때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무릎을 꿇었을 때 너는 어떤 기분이었나. 살짝, 알려주지 않을래?
처음부터 때려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다. 그저 네가 공들여 적은 편지만큼 너를 모욕하고 싶었다. 하지만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던 너의 얼굴은 어두컴컴한 그림자에 가려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고, 그래서 손을 놀렸다. 나무 둥치에 이름을 새길 때처럼, 뺨을 하나아, 두우울, 셋. 너는 신음도 흘리지 않고 가만히 따귀를 맞았다.
그러니 나는 알 수 없다. 때린 사람이 죽는다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내가 죽는다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벌을 받은 거라고. 누군가를 때렸으니 어딘가에서 미끄러져 머리를 부딪칠 수도 있다고. 하지만 맞은 사람이 죽는 것은 글쎄.
한참 거실에 서 있었다. 낮이었지만 해가 흐려 커튼이 쳐진 집안은 어둡다. 아마 내 얼굴도 분간할 수 없겠지. 그렇다면 누군가 다가와 내 뺨을 후려쳐주진 않을까. 누군가, 이를테면 네가. 그러면 나도 너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울 수 있겠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그저 서 있기만 하는 것보단 차라리 맞거나 울거나 죽는 것이 낫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그런 게 나아.
텔레비전 앞에 놓인 게임기의 패드를 들고 구동 스위치를 눌렀다. 화면이 켜졌을 때는 아주 약간 두려움을 느꼈다. 컴퓨터처럼 게임기도 텅 비어 있다면 정말 견디기 힘들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익숙한 아이콘 몇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네가 즐겨하던 게임들. 혼자 신이 나 한참 동안 내용을 설명하곤 했지. 관심을 두지도, 묻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그때 생각이 났다. 게임기에 자동 녹화 기능이 있었지. 몇 번인가 자랑했잖아. 어려운 보스를 멋지게 잡아냈다면서 알아보기도 힘든 화면을 보게 했어. 새삼스레 짜증이 치밀었지만 꾹 참고 패드를 조작해 녹화된 동영상을 찾았다. 마지막으로 게임기를 만진 것은 언제지? 나와 헤어지던 날? 아니면 편지를 쓰던 날? 혹은 내게 뺨을 맞은 날?
자동으로 저장된 동영상의 날짜를 확인했다. 가장 최근의 영상은 너의 기일에 저장된 것이었다. 네가 살아있던 마지막 흔적.
재생 버튼을 누르자, 화면이 암전되었다. 곧 희미하게 불빛이 떠오르고 짙은 안개 사이로 고풍스러운 도시의 전경이 펼쳐졌다.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순례자들은,
순례자들은 북쪽으로 향하고, 예언의 의미를 깨달을 것이다.
불은 사그라들고, 왕들에겐 옥좌가 없지만,
장작조차 되지 못한 자들은 그렇기에 더더욱 잔불을 바라는 거야.
웅장한 음악과 종소리가 울리고, 돌로 된 관 속에서 가느다란 팔 하나가 솟아올랐다. 되살아난 남자는 앞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해골 모습의 적들을 칼로 능숙하게 베어가며 남자는 절벽과 돌길 사이를 달렸다.
그것은 몹시 어처구니없는 광경이어서 뭐라 보탤 말이 없었다. 갑자기 관 속에서 되살아나는 것은 뭐고, 되살아나자마자 해골이 덤벼드는 것은 또 뭐지? 죽은 사람이 저렇게 완전히 무장을 하고 있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그러면서도 또 잘 아는 길처럼 거침없이 나아가는 건 또 뭐야.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들어본 적이 있는 게임이었다. 옥좌가 없는 왕들, 장작이 되지 못한 자들. 오래전 세상을 밝히던 불이 꺼지고, 왕들은 스스로의 몸을 태우는 장작이 되어 멸망을 막았다. 그러나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불은 사그라들고 이제 남은 것은 아주 약간의 온기만 남은 깜부기와 불이 꺼진 재들.
하지만 그래서 재는 잔불을 바라는 거야.
잘 모르는 눈으로 봐도 게임은 몹시 어려워 보였다. 주인공이 들고 있는 무기는 보잘것없는 검 한 자루뿐인데, 덤벼오는 적들은 갈수록 점점 더 흉악해져 갔다. 거대한 도끼와 창을 든 해골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오고, 누군가는 손에서 번개를 뿌리거나 빛줄기를 쐈다. 맹수와 불을 뿜는 용들, 그리고 집채만한 크기의 걸어다니는 나무와 걸쭉한 타르 같은 것을 뿌리고 다니는 괴물이 차례차례 등장했다.
하지만 그런 모든 괴물들보다 훨씬 더 어이없는 것은 주인공 남자였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사람 같은데, 줄지어 등장하는 환상 속 세계의 황당한 괴물들을 잘도 무찌르고 있었다. 물론 몇 번인가 공격을 받고 쓰러지거나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일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다가오는 위험을 능숙하게 헤쳐나갔다. 들고 있던 아이템을 던져 미리 함정을 작동시키고, 숨어있는 적들을 교묘히 유인해 처리했다. 화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커다란 괴물의 공격을 힘겹게 피하고 자세를 가다듬은 후 다시 공격을 이어나가는 식으로 끝끝내 적을 쓰러뜨렸다.
다행스러운 것은 남자가 몇 번을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 칼에 베이고, 화염에 타고, 벼락을 맞아 쓰러져도 언제나 정해진 자리에서 남자는 살아났다. 그렇게 살아나면 또 한번 자신이 죽은 자리를 향해 나아갔다. 질릴 만큼 끈질긴 도전이 계속 이어졌다.
녹화된 동영상은 꽤나 길었다. 아침에 출근했을 테니, 밤새 게임을 한 거구나. 대단한 건 저 남자가 아니라 너였어.
몇 시간을 봤을까, 영상이 끝나갈 무렵엔 날이 저물고 있었다. 문득 화면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잿빛의 하늘이 붉게 물들고 태양은 검은빛을 뿜었다. 아마도 세상의 불이 다 타버린 모양이다. 어느 들판을 향해 남자가 달려 나갔다. 그리고 그 앞에 왕관을 쓴 사람 형태의 불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예언 속 장작의 왕.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여기는 멸망 직전이야. 밖은 흐리고, 불은 꺼졌어. 우리는 모두 얼굴을 가렸고 약속된 것은 없어. 너는 가난하고 나는 잔인해.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떠들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아무도 몰라. 나는 살아있지만 너는 죽었고, 언젠가 우리는 재밖에 남지 않게 될 거야. 끝을 향해 가는 도중이란 건 그냥 끝이 왔다는 뜻이 아닐까. 이런 세상에서 너는 이제 어쩔 셈이야?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남자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왕은 불로 된 검을 들고 남자를 베기 시작했다. 몇 번의 공방이 오가고 왕 앞에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되살아나는 것은 너에게 축복이자 저주. 다시 정해진 자리에서 일어선 남자는 한번 더 왕에게 덤벼들었다. 죽고, 또 죽고. 이전의 괴물들보다 훨씬 오래, 더 많이 남자는 왕과 싸웠다. 그리고,
“잘하네.”
엔딩 화면 위로 올라가는 스테프롤을 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그때,
“좋아.” 너의 목소리가 화면에서 흘러나왔다.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화면을 뒤로 돌렸다. 다시 한번 네 음성이 들렸다. 좋아. 패드에 달린 스피커에 녹음된 소리였다.
아무렇지 않은 듯, 심드렁하게 네가 말했다. 좋아.
뭐가?
영상이 끝나고 게임기의 초기 화면이 떠올랐다. 꼭 잡고 있던 패드를 겨우 놓고 호흡을 골랐다. 세상의 멸망을 두고 누군가와 다투기라도 한 것처럼 몹시 피곤했다. 동시에 묘한 안도감. 불이 꺼진 세상이 다시 밝아지진 않더라도, 작은 깜부기 같은 것이 타올라 내일이나 그 다음날 정도는 상상할 수 있을 거라고. 한번 더 네 목소리를 들어볼까. 증거. 네가 죽은 것이 나 때문이 아니라는 확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 내게만 살짝. 무언가 덜어내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어서. 그런데 네가 말했잖아. 좋아, 라고. 뭐가 좋은 거야? 나도 좋아해도 좋은 거야?
졸음이 몰려왔다. 게임기를 끄고 패드를 원래 자리에 돌려놓고 사다리를 챙겨 집을 빠져나가야 하는데, 견딜 수 없이 졸렸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네 방으로 갔다. 정리되지 않은 너의 잠자리. 전에도 여기서 잠든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너는 죽었고, 너의 어머니는 없다. 우리는 헤어졌고 나는 너를 때렸다. 그래도 괜찮을까? 네가 말했잖아. 좋아.
조심스레 침대에 몸을 뉘었다. 전기담요를 끄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이불 속은 녹아내릴 것처럼 따뜻하고 달콤했다. 멸망이 미뤄진 세상이나, 모닥불 속에 남은 잔불처럼.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며 나는 네게 몇 마디 말을 중얼거렸다. 용서를 구하진 않았다. 너는 용서하지 못하니까. 후회하지도 않았다.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으니까. 그저, 우리가 몰랐던 우리의 마음을 겨우 입 밖에 내었다. 누구도 듣지 못하게, 네게만 살짝.
이영훈
지난 몇 년간, 무엇을 쓸 것인가 와 무엇을 써야 할까 사이에서 고민했는데…… 이번엔 쓸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손목이 부러졌거든요. 지금 보니…… 음, 쓸 수 있네요. 앞으로는 더 잘 쓸 수 있을 거 같아요. 손목이 부러졌을 때도 쓸 수 있었으니까.
2021/03/30
4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