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또 걷고 있었다. 매일 걷고 걷는데 오늘은 유난히 힘들었다. 힘들었지만 걸었다. 십 분쯤 지났을까? 태은이가 자전거에 올라탔다. 아주 천천히 페달을 밟으며 내 옆을 지나갔다. 태은이가 타고 가는 자전거 뒷바퀴를 보며 나는 뛰기 시작했다. 금방 숨이 찼다. 태은이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무표정하게 앞만 보며 페달을 밟았다.

계속 같은 꿈이다. 꿈에서 나는 걷고 태은이는 자전거를 타고 있다. 이불을 걷고 누운 채로 다리를 움직였다. 꿈속에서 매일 걸어서일까? 다리가 전보다 더 튼튼해 보였다. 튼튼한 다리로 침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책상 위에 어제 풀다 만 ‘기초 튼튼! 통합 중1 수학’ 문제집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나는 급하게 문제집을 서랍에 넣었다. 엄마가 보면 화낼 게 분명했다. 괜히 숨이 찼다. 꿈에서처럼.
  휴대폰을 켰다. 아침 7시. 태은이는 6시에 일어난다고 했다. 꿈에서도 나보다 빠르더니 꿈에서 깨어나는 것도 나보다 빨랐다. 열두 살이 되면서 태은이가 뭐든 나보다 빨라졌다.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내 방에서는 학교 교문이 잘 보인다. 엄마가 깨우러 올 때까지 나는 ‘알파 베타 어쩌고’ 반 아이들이 나보다 빨리 교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본다. 교문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전단지를 나눠주는 사람들과 그걸 말리는 사람들도 보였다. 십 분 만에 아이들이 학교로 들어갔다. 교문이 닫혔다. 나도 창문을 닫았다. 곧 4월인데도 바람이 차가웠다.
  그 일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났다. 뉴스에 전문가들이 나와 학원을 많이 다니는 어린이는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꼭 그렇지는 않은데.) 어린이를 행복하게 해줘야 한다고 했다.(우아!) 학원에서 하는 선행학습을 학교에서 하자고 했다.(뭐라고?) 그럼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진짜?) 6학년을 없애고 초등학교를 5년제로 바꾸는 법을 만든다는 뉴스가 나왔다. ‘어린이 행복추구권’을 위해서라고 했다. 작년 3월, 내가 4학년이 되고 처음 학교에 가던 날, 교문 앞에는 구호가 적힌 종이를 든 어른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침묵시위라고 했다. 그곳에는 엄마 아빠도 있었다.
  6학년 폐지 반대.
  아이는 아이답게, 교육은 교육답게.
  이러다 중학교도 없어진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수학 수업이라니!
  학교는 학원이 아니다.
  교육 정상화!
  선행학습이 어린이를 불행하게 한다!
  어린이 행복추구권을 보장하라!
1학년이 됐을 때, 나는 어서 6학년이 되고 싶었다. 2학년이 됐을 때도 6학년이 되고 싶었고, 3학년이 되어서도 빨리 6학년이 되고 싶었다. 4학년 때도 내 생각은 같았다. 6학년이 되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태권도 학원에서 제일 근사한 언니도 6학년이었고, 학교에서 제일 힘이 센 것도 6학년이었다. 그런데 6학년이 없어진다니! 6학년이 되고 싶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교문 밖 어른들을 마주 보고 1학년, 2학년, 3학년, 4학년, 5학년도 교문 안에서 스케치북에 쓴 구호를 들고 서 있었다. 6학년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바닥만 보고 우리를 쳐다보지 않고 지나갔다. 어떤 아이가 6학년은 이제 중학생이 되니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나도 6학년이 되고 싶어요.
  어른들 마음대로 정하지 마세요!
  우리 이야기도 들어주세요.
  내 꿈은 6학년 1반.
  빨리빨리 서두르지 마세요.
어른들이 들고 있는 피켓처럼 검은색이나 붉은색이 아니었다. 알록달록하고 예뻤다. 나중에는 누가 더 예쁘게 꾸미는지 대회라도 벌어진 듯 장식을 했다. 문구점의 반짝이 스티커와 금색, 은색 펜은 매일 품절이었다. 1, 2학년은 요술봉을 가져와 흔들기도 했다. 방과후수업에서 방송 댄스를 듣는 아이들은 안무를 짜왔다. 방송국에서 취재를 오기도 했다. 하지만 열흘 정도 지나니 요술봉도 안무팀도 사라졌다. 검은 옷을 입고 학교의 그림자처럼 서서 침묵시위를 하던 어른들도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사라졌다. 나중에 태은이는 우리도 붉은색으로 구호를 쓰거나 무시무시한 문장을 적거나 시끄럽게 소리를 질렀어야 6학년이 없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우리 학교만 조용해진 건 아니었다. 뉴스에도 신문에도 전국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일어나는 시위 소식이 나왔지만, 곧 조용해졌다. 새로운 대학입시제도가 발표되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이듬해 3월부터 초등학교 5년제를 실시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다음으로 유럽 어느 나라에서 하루 동안 일 년 치 비가 왔다는 뉴스, 집값이 또 올랐다는 뉴스가 나왔고 새로 생긴 햄버거 가게에 매일 찾아오던 고양이가 직원이 됐다는 뉴스가 나왔다. 외국에서 열린 수학올림피아드에서 한국 학생이 일, 이, 삼등을 했다는 뉴스도 나왔다.
  해가 바뀌고 2월이 되었을 때는 마지막 6학년 졸업식 뉴스가 나왔고 학교를 떠나는 선생님이 늘었다는 뉴스도 나왔다. 누군가 전국의 초등학교를 돌며 6학년 명패를 훔쳐 갔다는 뉴스가 나왔다. 전국의 4학년들은 아주 중요한 선택을 해야 했다. 5, 6학년 통합수업을 듣는 기본반이나, 5, 6학년 통합수업에 중학교 1학년 수학, 영어 수업까지 듣는 선행반 둘 중 하나를 고르는 선택이었다. 이 일로 다시 뉴스에 우리 소식이 많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해외에서 활약하는 축구 선수가 한 경기에 네 골을 넣었다는 뉴스와 빙하가 녹아 작은 마을에 큰 강이 생긴 뉴스, 새로 생긴 동물원에 진짜 동물 대신 가짜 동물이 있다는 뉴스만 나왔다.
  “학원에서 시험 봤는데 나는 선행반이 맞대.”
  “할머니가 점을 봤는데 나는 무조건 선행반에 가야 성공한댔어.”
  “기본반 가는 애들은 누구야? 나는 누가 가는지 보고 선택하려고.”
  “선행반이 낫지 않아? 좀 있어 보이잖아.”
  “지금도 학원에서 중1 수학 문제 푸는데 선행반 들어가면 몇 학년 수학 문제를 풀어야 하는 거야?”
  나는 반 친구들 이야기를 들으며 태은이를 쳐다봤다. 태은이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고민이 없어 보였다. 태은이와 내가 스케치북을 들고 교문 앞에 서 있었던 이유처럼 태은이도 나도 기본반을 선택해서 같은 반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전국의 4학년은 가정통신문을 받았다. ‘귀댁 자녀의 미래를 위해 신중한 선택을 부탁드립니다.’라고 쓰여 있었지만 당장 다음주 월요일까지 내라고 했다.
  “태은이 넌 무슨 반 신청할 거야?”
  그러고 보니 태은이랑 무슨 반을 신청할지 따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 우리는 빙하가 녹아 큰 강이 생긴 외국 마을 이야기를 했고, 가짜 동물만 있다는 새로 생긴 동물원에 가보자는 이야기, 그리고 얼마 전에 문구점에서 같이 고른 지우개가 잘 지워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만 나눴다.
  “난 잘 모르겠어. 그런데 우리 그 동물원 언제 갈까? 예약하기도 어렵다던데.”
  나는 모르겠다는 태은이 말에 놀랐다. 당연하게 우리가 같은 반을 선택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없이 조금 걷다가 새로 생긴 동물원에 언제 가면 좋을지만 이야기했다.

엄마 아빠는 식탁 위에 내가 올려놓은 가정통신문을 가만히 쳐다봤다. 당연히 ‘5학년 기본반’ 칸에 동그라미 칠 줄 알았는데 아빠 손은 ‘5학년 선행반’ 위를 왔다갔다했다. 작년 3월, 교문 앞에서 조용히 서 있던 엄마 아빠는 며칠 동안 목소리를 높여가며 싸웠다.
  “당연히 기본반을 선택해야지.”
  “우리 아진이만 뒤처질 순 없다고.”
  “뒤처지는 게 아니야. 기본반도 5, 6학년 통합이니 이미 선행이라고.”
  “어떤 부모가 기본반을 선택하겠어? 무조건 선행반이지.”
  “당신까지 이렇게 생각이 바뀌면 이제 5학년도 없어지고 4학년도 없어져. 3학년 때 중학교 수학 문제를 풀지도 모른다고.”
  “내 친구 애들은 벌써 결정하고 중학 수학학원 다니기 시작했어.”
  “아진이가 선행반에 가서 못 따라가면 어떻게 할 거야? 그때 돼서 다시 5학년 기본반으로 가면 아진이 기분은 어떨 것 같아?”
  “그렇게 되지 않게 만들어야지. 아진이도 학원 보내고 선행반에 적응하게 만들어야지.”
  평소에 내 의견이 제일 우선이라고 했던 엄마 아빠였다. 이번에는 내 의견을 물어보지 않았다. 엄마 아빠가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식탁 위에 놓여 있던 가정통신문을 갖고 방으로 들어왔다. 신중한 선택을 위해 괄호부터 쉼표 하나까지 꼼꼼하게 읽어보기로 했다. 그때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다. 태은이가 사진 한 장을 보냈다. ‘5학년 선행반’ 칸에 동그라미 친 가정통신문을 들고 태은이 가족들이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 잘 나왔네!’라고 답을 보냈다.
  ‘뽀송뽀송 필터 덕분!’이라는 답이 왔다. 거실에선 아빠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서랍을 열었다. 며칠 전, 아빠가 엄마 몰래 사온 ‘기초 튼튼! 통합 중1 수학’ 문제집이 있었다.
  “사람마다 알 수 없는 재능이 있을 수 있잖아. 그동안 발견하지 못한 재능 같은 거.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한번 풀어봐. 6학년 수학이랑 중학교 1학년 수학이 통합된 문제집이라고 하니까 어렵지 않을 거야. 천천히 신중하게 풀어봐.”
  엄마는 아빠한테 숨기는 게 하나도 없다고 했었다. 아무래도 엄마가 내 수학 점수는 아빠에게 숨기는 것 같았다. 엄마 표현대로라면 내 수학 실력은 천천히 선생님을 따라 걷는 정도라고 했다. 아빠는 내가 빨리 달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때부터 아빠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아빠가 사온 수학 문제집을 펼쳤다. 1번 문제를 다섯 번쯤 읽었지만, 답을 쓸 수 없었다. 2번 문제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숫자들이 외계어처럼 보였다. 문제집을 덮고 그대로 서랍에 넣었다.
  며칠이 지나 다시 꺼낸 문제집은 여전히 1번에만 여러 번의 줄이 그어져 있었다. 밑줄 아래에 ‘화이팅’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빠 글씨체였다. 필통에서 지우개를 꺼냈다. 태은이 말대로 이 지우개는 잘 지워지지 않았다. 여러 번 지웠지만 밑줄이 조금 희미해지기만 했다. 아빠의 파이팅은 계속 선명했다.
  ‘그래, 딱 다섯 문제만, 어떻게든 다섯 문제만 풀어보자!’
  아빠 말대로 혹시 나도 모르는 재능이, 4학년 수학은 절반 정도만 맞춰도 중학교 1학년 수학 문제는 잘 풀지도 모르는, 이상한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태은이가 보낸 사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태은이가 선택한 건 확실히 선행반이었다. 다섯 문제로 숨겨진 재능을 찾을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진짜 혹시 모르니까. 혹시, 혹시. 나는 1번 문제에 다시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어제 학원 테스트 결과가 그렇게 나왔어. 무조건 선행반이어야 한다고.”
  다음 날 내가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선행반을 선택한 이유를 묻지 않았는데 태은이가 먼저 말했다. 태은이 엄마 아빠도 6학년 폐지를 반대하면서 검은 옷을 입고 피켓을 들고 조용히 교문 앞을 지켰었다. 태은이 아빠는 방송국에 다니는 친구까지 불러와 인터뷰도 했다. 마지막까지 6학년을 지키는 어른이 되겠다고 하면서 조금 울먹이기도 했다. 방송국에서 다녀가고 며칠이 지나 태은이 아빠는 교문 앞에서 사라졌다. 아저씨가 지켜야 하는 건 6학년 말고도 많다고 했다. 언젠가 우리 아빠와 태은이 아빠가 마트에서 만났을 때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한숨을 쉬기도 했다.
  “태은아, 이것 좀 풀어줘.”
  나는 가방에서 ‘기초 튼튼! 통합 중1 수학’ 문제집을 꺼냈다. 태은이 눈이 커졌다.
  “뭐야, 이아진? 너도 선행하고 있었어?”
  “아니. 그냥 한번 풀어보려고.”
  “그냥?”
  내가 밑줄만 친 수학 문제 1번을 태은이가 풀기 시작했다. 딱 다섯 문제만 내가 풀어보고 싶었는데 다섯 문제를 태은이가 다 풀어줬다. 내가 꿈에서 걷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였다. 다음 날 아침, 문제집에 빨간 동그라미 다섯 개가 그려져 있었다. 아빠의 오해가 만든 다섯 개의 동그라미였다. 그날 밤, 나는 가정통신문 ‘5학년 기본반’ 칸에 커다랗고 굵은 동그라미를 그려 식탁 위에 올려놨다. 엄마는 나를 안아주었다. 아빠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며칠 동안 말이 없었다. 나에게 침묵시위를 하는 것 같았다. 아빠가 말이 없는 동안에도 나는 매일매일 걸었다. 꿈에서 걷는 동안 3월이 왔고 5학년이 시작되었다.

  “나도 아진이 너처럼 8시 반에 학교 가고 싶다. 7시 20분까지 학교에 오라니. 우리가 고등학생도 아니고. 너무해.”
  나는 5학년 1반이 되었고 태은이는 5학년 알파반이 되었다. 여덟 개 반 중에 숫자가 붙은 반은 1반과 2반뿐이다. 나머지 여섯 개 반에는 숫자 대신 알파, 베타 같은 이름이 붙었다. 뉴스에서는 이렇게 많은 학생이 선행반을 선택할지 몰랐다고 했다. 선생님들은 너무 바빴다. 선생님들은 원래도 바빴지만 6학년이 없어지고 나서 몇 배로 더 바빠 보였다. 선생님이 바빠도 5학년 복도는 조용했다. 가끔 4학년들이 선행반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내려갔다. 1반과 2반에는 4학년 때처럼 한 분의 선생님이 계셨다. 선행반에는 여러 명의 선생님이 번갈아가며 수업을 했다. 금을 그어놓은 것도 아닌데 1반과 2반을 지나 선행반으로 가는 복도를 넘어가거나 넘어오는 사람은 나와 태은이 정도였다. 급식실이 나눠진 것도 아닌데 서로 몇 개 자리를 비워두고 따로 먹었다. 그 가운데쯤에서 나와 태은이가 같이 밥을 먹었다. 그래야 태은이랑 잠깐이라도 만날 수 있었다. 반이 나뉘면서 태은이와 다니는 학원도 달라졌다. 태은이는 아침 7시 20분에 학교에 갔다가 국·영·수 학원이 끝나면 밤 10시가 넘었다. 나는 아침 8시 30분에 학교에 갔다가 학원이 끝나면 오후 5시가 되기 전이었다. 가끔 놀이터에서 만나 놀기도 했지만 아주 가끔,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두 달이 지나 5월이 되었을 때, 뉴스에서 다시 5학년 이야기를 했다. 몇몇 아이들이 적응하지 못해 5학년 기본반으로 옮겨가거나 전학을 갔다고 했다. 홈스쿨링을 하는 아이도 늘었다고 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보다 학생들의 수준도 학부모의 만족도도 높다며 전문가들이 나와 자신들의 말이 맞았다고 했다. 성격이 급한 전문가 아저씨는 이 제도가 자리 잡으면 이제 중학교도 필요 없이 바로 고등학교로 진학하거나 바로 대학에 진학해도 될 거라고 했다. 다음 뉴스에서 가짜 동물원에는 아직도 구경하려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그날 밤에도 꿈을 꿨다. 나는 꿈에서 계속 걷고 있었다. 출발선에서 태은이를 기다렸지만 태은이는 한참 동안 오지 않았다. 혼자 걷기 시작했다. 걷다가 보니 우리 반 아이들도 옆에서 같이 걷고 있었다. 그때 자전거를 탄 태은이와 ‘알파 베타 어쩌고’ 반 아이들이 걸어가는 우리 옆을 빠르게 지나갔다.

“내 꿈에 매일 네가 나와.”
  “신기하다. 매일?”
  “매일매일.”
  “어떻게 나와?”
  “나는 매일 걷고 너는 매일 자전거를 타고 가.”
  “나 자전거 못 타는데?”
  “알지. 우리 둘 다 퀵보드도 못 타잖아. 그런데 나는 꿈에서 매일 걷고 너는 매일 자전거를 타.”
  “네 꿈에서 나는 자전거 잘 타?”
  “엄청. 내가 걷고 있으면 네가 자전거를 타고 멀리 가버려.”
  “그럼 너는? 뛰어가?”
  “아니. 나는 계속 걸어.”
  “뛰어야지. 그래야 나랑 같이 가지.”
  나는 태은이가 앉아 있는 놀이터 그네 주변을 동그랗게 걸어다녔다.
  “1반은 어때, 좋아?”
  “4학년 때랑 비슷해. 아니, 거의 똑같아. 알파반은 어때?”
  “수업 시간마다 선생님이 바뀌니까 정신이 없어.”
  “중학교, 고등학교처럼?”
  “언니 오빠 있는 애들이 중학교 고등학교도 그렇게 수업한대.”
  “나는 5학년인데 너는 몇 학년인 걸까?”
  태은이가 입을 닫았다. 생각 중이다. 조금 기다리면 답이 나온다.
  “나도 5학년이지. 너처럼.”
  “그런데 우리 너무 다르다. 그렇지?”
  태은이가 또 입을 닫았다. 그네를 조금 더 타다가 벌떡 일어났다. 학원 버스가 놀이터 앞에 도착했다. 나는 태은이가 학원 차로 뛰어가는 것을 보면서 집으로 걸어갔다.

“넘어오지 말라고.”
  “이 복도가 네 거야?”
  “여기부터는 선행반이야. 너희는 기본반이잖아. 우리랑 다르다고.”
  “다 같은 5학년이지 뭐가 달라?”
  “5학년 1반, 2반이랑 5학년 알파 베타랑 같냐?”
  “우리 작년까지 같은 4학년이었고 올해는 같은 5학년이 된 거잖아.”
  “초등학교 5학년 수학 푸는 애들이랑 중학교 수학 푸는 우리랑 어떻게 같아?”
  2반과 알파반 사이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1반에서도 그 소리가 다 들렸다. 1반과 2반 아이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알파, 베타 어쩌고 하는 여섯 개 반에서도 아이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그동안 싸운 적은 없었지만 2반과 알파반 사이 복도의 분위기는 늘 아슬아슬했다. 내가 태은이와 서서 이야기하고 있을 때도 경계선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알파 베타 어쩌고’ 반 아이들 사이에 입을 꾹 다문 태은이가 보였다. 괜히 반가워 손을 흔들었지만 태은이는 가만히 서 있었다. 작년에 6학년 폐지 반대를 외치면서 같이 안무를 짜고 피켓을 만들던 아이들이 지금은 경계에 서서 싸우고 있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 오랜만에 책상 서랍을 열었다. 수학 문제집 표지가 구겨진 채 들어 있었다. 태은이가 꾹꾹 눌러 푼 다섯 개의 문제 그리고 아빠의 빨간 동그라미 다섯 개가 그대로 있었다. 가방에서 새로 산 지우개를 꺼냈다. 이 지우개는 잘 지워지는 거라고 했다. 태은이가 쓴 동글동글한 숫자들이 깨끗하게 지워져 나갔다. 아빠의 동그라미는 지워지지 않고 조금 희미해지기만 했다. 다시 문제를 풀어보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해보고 싶었다. 1번부터 다시 시작했다. 몇 번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지우개 똥이 많이 생겼다. 두 문제쯤 풀고 나는 침대에 누웠다. 손가락에 연필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나도 태은이처럼 자전거를 못 타는데 내가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페달을 밟아도 자전거가 제자리였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오르막길 중간에 내 자전거가 가만히 서 있었다. 페달을 밟지 않으면 뒤로 밀려날 것 같았다. 페달을 아무리 밟아도 자전거 바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자전거에서 내렸다. 옆에 1반, 2반 아이들이 나처럼 꼼작하지 않는 자전거에서 애를 먹고 있었다. 나는 자전거를 그대로 두고 걸었다. 언덕 위에서 누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제일 앞에 태은이가 있었고 그뒤로 ‘알파 베타 어쩌고’ 반 애들이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내가 푼 문제의 답을 알 수 없지만 아빠의 희미한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으니 틀린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아빠에게 정답을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왠지 실망할 것 같아 그대로 두었다. 태은이에게 물어볼까 싶었지만, 소동이 일어난 이후 2반과 알파반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태은이도 나를 보기 위해 교실 밖을 나오거나 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베타반에서 한 명이 1반으로 왔고 알파반에서 두 명이 전학을 갔다. 나는 꿈에서 계속 걸었고 태은이는 자전거를 탔다.
  “아무래도 이건 네가 풀어야겠어.”
  며칠 후, 놀이터에서 만난 태은이에게 문제집을 줬다. 서랍에만 있던 ‘기초 튼튼! 통합 중1 수학’ 문제집이었다.
  “문제집을 선물로 받긴 처음이야.”
  태은이가 문제집을 펼쳤다. 내가 푼 문제 두 개를 한참 쳐다봤다.
  “네가 다시 푼 거야? 정답입니다!”
  태은이는 가방에서 빨간펜을 꺼내 희미해진 동그라미 위에 덧칠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제 너도 선행반 와도 되겠는데?”
  태은이 말에 나는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그냥 걸을래.”
  나는 놀이터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네에 앉아 있던 태은이가 일어나 내 그림자를 따라 걸었다. 나는 태은이가 가까워질 때쯤 어제 학원에서 친 수학 시험을 반 이상 맞췄다고 말해줬다. 그리고 계속 걸었다. 태은이도 내 옆에서 걸었다.

박성희

경북 구미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요즘은 다정한 어린이들과 따뜻한 책방이 있는 김포 운양동에서 살고 있습니다. 2023년 3월, 첫 동화책 『친애하고 존경하는』을 냈습니다.

‘나의 속도와 방향’이 세상의 속도보다 한참 느리고 세상의 방향과 다른 것 같아 마음이 급해지기도 합니다. 꾸준함이 있다면, 두려움을 피해 도망가지 않는다면 이 속도도, 이 방향도 괜찮지 않을까요?

2023/12/06
6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