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하얀 밤의 고양이
전학 온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학교 수업이 끝났다. 아연이는 아파트 상가의 편의점에 들어갔다. 집에 먹을 게 없으니 여기서 배 채울 거리를 찾아야 했다. 아연이는 눈을 내리깔고 ‘1+1’만 찾았다. 둘러보면 먹고 싶은 게 많을 거고 그러면 배가 고파진다. 오늘 고른 것은 덴마크 요구르트 우유 두 개, 사과 맛과 포도 맛이었다. 아연이가 카운터에 가까이 가자 편의점 사장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처음 보는데, 이사 왔니?”
아저씨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아연이는 공연히 가슴이 졸아들었다.
“...... 네.”
“쟤, 6동에 이사 왔어. 저번 주에.”
이제 보니 카운터 옆에 머리가 벗어진 아저씨도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미처 못 봤다.
“저번 주에 이사 왔어요?”
“내가 어제 말했잖아. 이번달에 부동산 경기가 하도 나빠서 한 채도 못 팔고 칠천에 오십짜리 월세 하나 겨우 중개했다고.”
“아, 그 월셋집이요.”
“그래, 이 단지는 월세가 드물어.”
아연이는 요구르트 우유를 쥐고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편의점 아저씨가 “자주 와라.”라고 한 말도 못 들었다. 대신 ‘월세’라는 소리만 가슴속 깊이 파고들었다.
놀이터에는 남자아이 둘, 여자아이 둘이 술래잡기를 하며 미끄럼틀 주변을 뛰어다녔다. 아연이는 그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그네에 앉았다. 우유를 뜯고 하나씩 마셨다. 매캐한 먼지 냄새와 향긋한 과일 향이 섞였다. 해가 지고 있었다. 아이들은 어느새 집에 가버렸다. 뺨에 시원한 바람이 불더니 발아래 갈색 가랑잎이 굴렀다.
‘집에 가기 싫어.’
아연이는 생각했다.
아빠는 이사 온 집에 아직 오지 않았다. 엄마는 혼자 짐을 정리했다. 새집은 방이 딱 하나였다. 엄마는 그 방을 인터넷 쇼핑몰 스튜디오 겸 물건 창고로 만들었다. 거실이 텔레비전과 에어 매트로 꽉 찼다. 아연이 방도 없어졌다. 침대도 없어지고 노트북과 책상은 거실 한구석에 놓였다. 그림책들도 사라졌다. 정확히는 엄마가 팔았다. 가로세로 십자가 모양으로 묶여서.
“내 그림책.”
“삼 학년이나 돼서 무슨 그림책이야. 글자 많은 책 읽어야지.”
엄마 말이 맞다. 그림책은 아기들이나 보는 거지. 아연이는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썼지만 그래도 그림책이 좋았다. 달과 산, 바다와 모래밭이 나오는 그림책. 아연이는 나중에 직접 그림을 그리고 글도 써서 그림책을 만들고 싶었다.
학교가 끝나고 돌아오면 집에는 아무도 없다. 엄마가 새로 시작한 물류센터 일을 마치는 시간은 저녁 여섯 시였다. 잔업 때문에 두세 시간 늦을 때도 있었다. 혼자서 텔레비전을 켰다가 어른들 보는 프로그램이 나오기 시작하면 유튜브에 접속한다. 추천되는 영상을 두 시간 정도 보다가 지루해서 케이팝 스트리밍을 켜면 엄마가 물류센터의 곰팡이 냄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밥 먹었어?”
대개 엄마가 묻지만 아연이가 엄마에게 물어볼 때도 있다. 대답은 늘 “응.” 이거나 힘없는 끄덕임이었다. 샤워를 하고 나온 엄마는 라면을 끓여 먹거나 아니면 거실 매트에 옆으로 누웠다.
때로 엄마는 누워서 아연이를 멍하니 바라본다. 왜 쟤가 방에 안 들어가고 거실에 있지, 라는 표정이다. 그러다가 엄마는 기억해낸다. 이 집에 이사 오면서 아연이 방이 없어졌다는 것을.
밤 열 시가 되면 아연이는 엄마와 나란히 누웠다. 둘 다 소록소록 잠이 든다. 그렇지만 엄마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쇼핑몰 일을 시작해야 한다. 아연이가 자는 동안 들어온 주문을 확인하고 옷을 포장하고 발송을 준비한다. 일을 마친 엄마가 밥상에 아연이의 아침 식사를 차려놓으면 오전 일곱 시였다. 엄마는 아연이를 흔들어 깨우고, 세수를 시키고, 옷을 입히고 수저를 드는 것까지 지켜본다. 그리고 오후 출근 시간까지 다시 잔다.
아연이는 자는 엄마를 깨우지 않게 수저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밥 먹은 그릇을 싱크대 물에 담그고 반찬통도 냉장고에 넣은 다음 신발을 신었다. 양치질은 학교에서 하지만 급식 시간까지 못할 때도 있다.
학교 아이들은 가을 학기에 전학한 아연이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아연이도 아이들이 무서웠다. 혹시나 아이들이 ‘월세 거지’라고 할까봐 가슴이 얼어붙었다. 물론 이제까지 그런 말을 한 아이는 없다.
‘그래도 그러는 애들이 많다고 뉴스에서 그러던데.’
아연이는 편의점에서 만난 부동산 아저씨가 ‘저 집은 월세야’라고 떠들고 다닐 것 같았다.
아빠와 따로 사는 것도 들킬까봐 무섭다. 아빠가 없는 아이라고 소문나면 누군가 찾아와 붙들어갈 것 같다. 나쁜 데로 잡혀가면 어떡하지. 엄마는 돈도 벌어야 하고 힘도 약하다. 아빠라도 와주어야 하는데.
그래서 아연이는 혼자 있을 때 현관문을 잠그는 걸 잊지 않았다. 도어록이 차라락, 하고 돌아가면 손을 한껏 뻗어 맨 위의 가로 쇠를 지른다. 둥그런 손잡이도 돌려서 잠근다. 그렇게 문을 세 번 잠그면 마음이 조금 놓였다. 가끔 누군가 찾아와 초인종을 누르면 아연이는 아무도 없는 척하려고 이불을 덮어쓰고 숨소리를 죽였다.
하루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가 잠이 들어버렸다. 저녁에 퇴근한 엄마는 초인종을 몇 번이고 누르다가 아연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고 있던 아연이가 전화벨 소리에 허둥지둥 일어나 문을 열자 엄마는 쓰러지듯이 들어왔다.
“잤니?”
“……네.”
그날 엄마는 열 번이나 전화를 했었다.
다음날부터 아연이는 졸음이 올 때마다 눈꺼풀을 잡아당겼다. 자면 안 돼. 그러다보니 아홉 시가 되어도 졸리지 않았다.
어느새 늦가을이 되어 있었다.
학교가 끝났다. 아연이는 주섬주섬 책과 공책을 가방에 담았다. 아이들은 손을 맞잡고 재잘대면서 교실 문을 나갔다. 가방을 메려는데 담임 선생님이 불렀다.
“주아연, 이리 와봐.”
선생님은 웃고 있다. 아연이는 안심하고 다가갔다.
“요새 선생님이 너무 바빠서 아연이에게 신경을 못 썼어. 그래도 잘하고 있어서 고마워. 그래, 아연이는 뭘 가장 좋아해?”
선생님의 눈이 친절하게 반짝였다. 그래도 아연이는 그 눈빛이 조금 무서웠다.
“아침 독서 시간에 책을 참 열심히 읽던데.”
“책은 좋아해요…… 저, 그림책 읽어도 돼요?”
“그림책? 그림책 좋아하니?”
아연이가 살며시 고개만 끄덕이자 선생님은 웃었다.
“선생님도 그림책 좋아해. 그런데 혹시 글자 많은 책 읽기가 힘드니?”
아연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글책 읽기는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그림책이 보고 싶을 뿐이었다.
“아연이 그림책 좋아하는구나. 그래도 학교 수업 시간에는 글책을 읽어야 해. 그림책을 보고 싶으면 학교 도서관에 가보렴.”
이사하고 처음으로 그림책을 볼 수 있다. 아연이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학교 도서관에는 아이들이 없었다. 앞문은 열려 있고 사서 선생님 혼자 책상 앞에 앉아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연이가 기웃거리자 사서 선생님은 고개를 숙인 채 손만 내밀어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아연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림책은 어딨어요?”
사서 선생님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눈을 깜박거리더니 물었다.
“너 몇 학년이야?”
“삼 학년이요.”
“삼 학년인데 아직 그림책을 봐?”
아연이는 말문이 콱 막혔다. 선생님은 손을 들어 가리켰다.
“학교 도서관에는 그림책이 별로 없어. 그래도 저기 맨 안쪽 책장, 맨 아래 칸에 조금 있어.”
아연이는 감사합니다, 라고 입속으로 되뇌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림책은 대부분 낡고 책장이 너덜너덜했지만 아연이는 신경쓰지 않았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시냇물처럼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빛깔과 모양들이 아연이를 반갑게 맞았다.
‘안녕, 오랜만이야.’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연이는 사서 선생님이 등 뒤에 서서 내려다보는 것도 몰랐다.
“얘, 이제 집에 가야지.”
“아, 아, 네.”
아연이가 일어나려고 버둥거리자 사서 선생님이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지금은 학교가 문을 닫아야 해. 신우 아파트 어딘지 아니?”
“거기 살아요.”
“그럼 잘 됐다. 그 아파트 6동 일 층에 작은 도서관이 있어. 거기에 그림책이 많아.”
“감사합니다.”
아연이는 고개를 푹 숙여 인사했다. 월셋집에 이사 온 게 처음으로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학교가 끝나자마자 아연이는 아파트 6동 일 층에 갔다. 따로 도서관 건물이 있는 건 아니었다. 아파트 현관문처럼 생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도서관이었다. 학교 도서관보다 넓고 그림책도 많았다. 책장 세 개가 모두 그림책이었다. 아연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그림책을 한 무더기 꺼냈다. 책장을 넘기다보면 배고픈 줄도 몰랐다. 도서관이 문 닫는 시간이 되자 아연이는 아쉬운 나머지 사서 아주머니에게 물어보았다.
“여기 내일 몇 시에 열어요?”
“오후 두 시 반이란다. 주말에는 닫아.”
아연이는 그 말을 기억하면서 사서 아주머니가 내보내는 대로 도서관을 나왔다.
휴대폰에 엄마의 카톡이 와 있었다.
‘엄마는 오늘 일이 많아서 늦어. 먼저 밥 먹고 자. 현관문은 도어록만 걸어놔. 엄마가 알아서 들어갈게.’
카톡을 보고 나서야 아연이는 배고프다고 쪼르륵대는 위장의 아우성을 들을 수 있었다.
며칠 뒤 아연이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작은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세 시가 조금 넘었지만 문이 잠겨 있었다. 아연이는 당황했다. ‘왜 닫혔지? 오늘은 주말이 아닌데.’ 아연이는 잠긴 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11월이라 제법 추웠다. 화단의 나무들은 낙엽을 떨구고 뾰족뾰족한 나뭇가지들만 남겼다. 아연이는 아침 등굣길에서 본 서리가 생각났다. 차가운 진흙에 바늘같이 생긴 얼음이 끼어 있었다. 서리가 보이면 겨울이 온다고 했다. 찬바람에 손가락이 저리기 시작했다. 아연이는 손을 쥐었다 펴면서 기다렸다. 한참 뒤에야 아주머니가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아이고, 얘야, 오래 기다렸니? 내가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아주머니는 도어록 뚜껑을 열고 비밀번호를 눌렀다. 3, 1, 1, 4, 7, 5, 2.
아연이는 그 번호를 바로 외울 수 있었다.
가을은 곧 겨울로 변했다. 연회색 하늘은 싸늘한 빗방울을 뿌려댔다. 밤새 내린 비가 새벽에 얼었다가 대낮에 녹기도 했다.
그동안 아연이는 주말마다 몰래 작은 도서관에 갔다. 처음 비밀번호를 누를 때에는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폴짝, 뛰쳐나올 것 같았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작은 도서관은 추워서 갈 때마다 패딩과 담요를 챙겼다. 문을 안쪽에서 잠그고 보온컵에 담긴 뜨거운 물을 마시면서 그림책을 읽었다. 혹시 누군가 들어올까봐 작은 도서관의 맨 안쪽 책장과 책장 사이에 방석을 깔고 웅크렸다. 거기에 숨으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작은 도서관이 다 내 방 같아.’
엄마가 늦는 날에도 아연이는 몰래 작은 도서관에 갔다. 거기서 그림책을 읽다가 한밤중이 되기 전에 집에 들어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엄마가 온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요즘은 열한 시가 넘어도 엄마가 안 올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아연이는 생각했다.
‘내 방에서 그림책 보다가 올걸.’
날씨는 점점 추워졌다. 엄마가 늦어지는 날도 많아졌다. 아예 작은 도서관에서 밤을 새우는 날도 잦아졌다. 담요를 뒤집어쓰고 휴대폰 불빛으로 책을 읽다보면 어디선가 길고양이들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추위를 견디다 못해 지르는 비명이었다.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아연이는 책을 덮고 귀를 기울였다. 추위에 떠는 고양이들을 찾아서 데려오고 싶었다. 그렇지만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금요일 저녁이었다. 엄마는 새벽에 들어온다는 카톡을 보냈다. 아연이는 일기예보가 끝나자 텔레비전을 껐다. 기상캐스터는 오늘밤은 올해 중 가장 추우니 한파에 대비하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아연이는 뺨과 귀가 발갛게 언 채 도서관에서 밤을 새울 준비를 했다. 과자 한 봉지, 목도리와 장갑, 뜨거운 물이 든 보온병을 챙겼다.
밤 열한 시였다. 아연이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어두운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전깃불은 켜지 않고 휴대폰 플래시로 책을 읽을 작정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책장 사이로 기어들어가려는 순간 손에 보드라운 감촉이 닿았다. 그 감촉은 물컹하게 변하더니 날카로운 쇳조각처럼 아연이의 손등을 긁었다!
“……아!”
아연이는 손등의 상처를 보는 대신 휴대폰 플래시를 켰다. 책장 사이의 방석 위에 온몸이 새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앞다리를 길게 뻗고 앉아 있었다. 코와 귀 안쪽까지 눈부시게 희었다. 하얀 고양이는 하늘색 눈동자를 보석처럼 빛내며 아연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누군가 했더니 너구나.”
고양이가 말했다. 아연이는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넌 누구야?”
아연이의 물음에 고양이는 하얀 채찍 같은 꼬리를 내밀어 방석을 툭툭 쳤다.
“난 여기서 태어났어.”
“태어났다고?”
“그래, 이 책장 사이에서. 내 엄마도 여기서 태어났어. 할머니도 아빠도.”
고양이가 말을 할 때마다 뺨에 돋은 흰 바늘 같은 수염이 살랑살랑 움직였다. 마치 수염이 살아 있는 것 같다.
“난 네가 누군지 알아. 매일 밤 여기서 그림을 펴고 소리를 내어 글자들을 읽었지.”
“나를 알아?”
“알지. 너처럼 이 도서관에 숨어드는 아이들이 있었어. 그 아이들은 언제나 내 아기들을 잘 돌보아 줬어. 너도 그럴 거지?”
“너, 여기서 아기 낳는 거야……?”
고양이는 천천히 일어나서 등을 우아하게 펴고 한 발 한 발 다가왔다.
“오늘밤 잘 보고 있어.
새카만 밤의 아기와
새벽달 같은 아기가 나올 거야.
그 아기들은 모두 너의 친구가 될 거야.”
고양이의 말이 끝나자 아연이는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고양이의 얼굴에 닿았다. 하얀 고양이의 얼굴은 북극여우처럼 부드럽고 차가웠다. 싸늘함이 손을 타고 올라와 팔과 어깨를 감고 온몸을 가득 채웠다. 마치 빙하를 들이마시는 것 같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서리로 변하는 그때, 창밖에서 두툼한 눈송이 수만 개가 하염없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얀 고양이는 말한 대로 아기 고양이 두 마리를 낳았다. 한 마리는 비단처럼 반지르르한 검은 털에 눈은 호박색이었다. 한밤의 별이 빛나는 모습이었다. 다른 한 마리는 연한 황금색 털로 온몸이 덮여 있었다. 초록색 눈동자는 부서진 비취 조각처럼 은은하게 빛났다.
아연이는 하얀 고양이가 먹이를 구하러 나간 동안 아기 고양이들과 책을 읽었다. 아기 고양이들은 그림책 위를 기어다녔고 아연이는 속삭이듯 글자들을 읽어내려갔다.
푸르고 푸른 별빛이
눈밭 위에 폭
하고 내려앉았어요
하얀 눈 위에
달빛도 폭
내려왔어요
검은 고양이가 하얀 눈밭 그림 위를 뒹굴었다. 황금색 고양이도 그림책 위에 드러누웠다. 아연이는 둘을 쓰다듬었다. 털은 눈처럼 부드럽고 차가웠다.
“곧 있으면 엄마가 돌아올 거야.”
아연이는 중얼거리며 한 손에 한 마리씩 고양이를 들어 품에 안았다. 주먹만한 아기 고양이들은 꿈틀거리면서 뺨을 가슴에 비볐다.
며칠째 눈은 펑펑 쏟아졌다. 삽으로 눈을 퍼내는 소리가 들렸다. 길이 꽁꽁 얼어 자동차가 다니지 못한다는 불평이 쌓였다. 눈이 내리자마자 얼음덩어리가 되어 치우기 힘들다고 했다. 그렇지만 도서관은 춥지 않았다. 바깥에서 내린 눈이 백곰의 두터운 털 같이 도서관을 덮어주는 것 같았다. 배고프지도 않았다. 아기 고양이들을 안고 있으면 어느새 하얀 고양이가 돌아왔다. 아기 고양이들이 엄마의 젖을 빨면 아연이도 배가 불렀다.
“바깥은 어때?”
아연이가 묻자 하얀 고양이가 대답했다.
“아주 깨끗하고 고요해.”
그 말을 들은 아연이는 기분이 좋았고 졸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연이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하얀 고양이가 속눈썹에 맺힌 서리를 핥고 있었다. 핥을 때마다 서리가 굵어지고 뾰족해졌다. 눈꺼풀이 무거워질 정도였다.
“……아기 고양이들은 어디 있어?”
하얀 고양이는 뺨도 핥아주었다. 그 자리에도 서리가 맺혔다.
“내 아기들은 겨울이 오는 곳에 갔어. 눈을 만들어주러 갔어.”
아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기 고양이들이 다 자랐다는 뜻이었다. 밤의 별과 새벽의 달.
고양이가 다시 말했다.
“그동안 같이 있어줘서 고마워.”
“어, 가려고?”
“봄이 오고 있거든.”
안 돼. 아연이는 소리치려 했다. 나 혼자 두지 마. 그렇지만 언 목구멍에서 나온 것은 목소리가 아니라 살얼음 조각뿐이었다.
하얀 고양이가 얼굴을 아연이의 볼에다 대고 비볐다. 섬뜩하게 차갑고 털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너는 서리처럼 작고
눈처럼 부드러워
겨울이 추워질수록
얼음처럼 단단해질 거야
햇빛이 너를 비추면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겠지
아연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난 햇빛 싫어
물이 되어 녹잖아
난 계속 단단한 얼음이고 싶어
고양이는 두 앞발을 들어 아연이의 가슴에 댔다.
걱정 마
이 세상에 물보다 자유로운 존재는
없어
아연이는 하얀 고양이를 붙잡으려 했다. 고양이는 잡히지 않았다. 부드러운 젤리처럼 물 흐르듯 책과 책 사이를 빠져나가 사라졌다.
눈을 뜨자 온몸이 젖어 있었다. 몸에서 땀처럼 얼음물이 솟아난 것 같다. 속눈썹에 맺힌 서리는 깨알만한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손바닥에는 무서움을 탈 때처럼 물기가 촉촉이 고였다. 어둠이 희끄무레하게 걷히고 있었다. 아연이는 누군가 자기를 향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너 언제부터 여기 있었니, 도대체?”
사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고막을 아프게 찔렀다.
“괜찮아? 일어날 수 있어?”
아주머니가 손을 내밀었다. 아연이는 고개를 저으며 바닥에 손을 짚었다. 뜨거운 물이 담긴 욕조에 오랫동안 있다가 나온 것처럼 무릎이 휘청거렸다. 비틀거리며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날씨는 눈부시게 맑았다. 햇빛 아래 잔설이 녹고 있었다. 따라 나온 아주머니가 없어진 아이를 찾았다고, 그동안 도서관에 숨어 있었다고 휴대폰에 대고 시끄럽게 소리치고 있었다. 그 목소리도, 따뜻함도 차가움도 아연이의 몸을 통과하여 하늘 위로 올라가 흰 날개를 펴고 사라졌다. 춥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대신 배가 맹렬하게 고프기 시작했다. 이젠 혼자 있어도 괜찮아.
“처음 보는데, 이사 왔니?”
아저씨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아연이는 공연히 가슴이 졸아들었다.
“...... 네.”
“쟤, 6동에 이사 왔어. 저번 주에.”
이제 보니 카운터 옆에 머리가 벗어진 아저씨도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미처 못 봤다.
“저번 주에 이사 왔어요?”
“내가 어제 말했잖아. 이번달에 부동산 경기가 하도 나빠서 한 채도 못 팔고 칠천에 오십짜리 월세 하나 겨우 중개했다고.”
“아, 그 월셋집이요.”
“그래, 이 단지는 월세가 드물어.”
아연이는 요구르트 우유를 쥐고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편의점 아저씨가 “자주 와라.”라고 한 말도 못 들었다. 대신 ‘월세’라는 소리만 가슴속 깊이 파고들었다.
놀이터에는 남자아이 둘, 여자아이 둘이 술래잡기를 하며 미끄럼틀 주변을 뛰어다녔다. 아연이는 그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그네에 앉았다. 우유를 뜯고 하나씩 마셨다. 매캐한 먼지 냄새와 향긋한 과일 향이 섞였다. 해가 지고 있었다. 아이들은 어느새 집에 가버렸다. 뺨에 시원한 바람이 불더니 발아래 갈색 가랑잎이 굴렀다.
‘집에 가기 싫어.’
아연이는 생각했다.
아빠는 이사 온 집에 아직 오지 않았다. 엄마는 혼자 짐을 정리했다. 새집은 방이 딱 하나였다. 엄마는 그 방을 인터넷 쇼핑몰 스튜디오 겸 물건 창고로 만들었다. 거실이 텔레비전과 에어 매트로 꽉 찼다. 아연이 방도 없어졌다. 침대도 없어지고 노트북과 책상은 거실 한구석에 놓였다. 그림책들도 사라졌다. 정확히는 엄마가 팔았다. 가로세로 십자가 모양으로 묶여서.
“내 그림책.”
“삼 학년이나 돼서 무슨 그림책이야. 글자 많은 책 읽어야지.”
엄마 말이 맞다. 그림책은 아기들이나 보는 거지. 아연이는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썼지만 그래도 그림책이 좋았다. 달과 산, 바다와 모래밭이 나오는 그림책. 아연이는 나중에 직접 그림을 그리고 글도 써서 그림책을 만들고 싶었다.
학교가 끝나고 돌아오면 집에는 아무도 없다. 엄마가 새로 시작한 물류센터 일을 마치는 시간은 저녁 여섯 시였다. 잔업 때문에 두세 시간 늦을 때도 있었다. 혼자서 텔레비전을 켰다가 어른들 보는 프로그램이 나오기 시작하면 유튜브에 접속한다. 추천되는 영상을 두 시간 정도 보다가 지루해서 케이팝 스트리밍을 켜면 엄마가 물류센터의 곰팡이 냄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밥 먹었어?”
대개 엄마가 묻지만 아연이가 엄마에게 물어볼 때도 있다. 대답은 늘 “응.” 이거나 힘없는 끄덕임이었다. 샤워를 하고 나온 엄마는 라면을 끓여 먹거나 아니면 거실 매트에 옆으로 누웠다.
때로 엄마는 누워서 아연이를 멍하니 바라본다. 왜 쟤가 방에 안 들어가고 거실에 있지, 라는 표정이다. 그러다가 엄마는 기억해낸다. 이 집에 이사 오면서 아연이 방이 없어졌다는 것을.
밤 열 시가 되면 아연이는 엄마와 나란히 누웠다. 둘 다 소록소록 잠이 든다. 그렇지만 엄마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쇼핑몰 일을 시작해야 한다. 아연이가 자는 동안 들어온 주문을 확인하고 옷을 포장하고 발송을 준비한다. 일을 마친 엄마가 밥상에 아연이의 아침 식사를 차려놓으면 오전 일곱 시였다. 엄마는 아연이를 흔들어 깨우고, 세수를 시키고, 옷을 입히고 수저를 드는 것까지 지켜본다. 그리고 오후 출근 시간까지 다시 잔다.
아연이는 자는 엄마를 깨우지 않게 수저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밥 먹은 그릇을 싱크대 물에 담그고 반찬통도 냉장고에 넣은 다음 신발을 신었다. 양치질은 학교에서 하지만 급식 시간까지 못할 때도 있다.
학교 아이들은 가을 학기에 전학한 아연이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아연이도 아이들이 무서웠다. 혹시나 아이들이 ‘월세 거지’라고 할까봐 가슴이 얼어붙었다. 물론 이제까지 그런 말을 한 아이는 없다.
‘그래도 그러는 애들이 많다고 뉴스에서 그러던데.’
아연이는 편의점에서 만난 부동산 아저씨가 ‘저 집은 월세야’라고 떠들고 다닐 것 같았다.
아빠와 따로 사는 것도 들킬까봐 무섭다. 아빠가 없는 아이라고 소문나면 누군가 찾아와 붙들어갈 것 같다. 나쁜 데로 잡혀가면 어떡하지. 엄마는 돈도 벌어야 하고 힘도 약하다. 아빠라도 와주어야 하는데.
그래서 아연이는 혼자 있을 때 현관문을 잠그는 걸 잊지 않았다. 도어록이 차라락, 하고 돌아가면 손을 한껏 뻗어 맨 위의 가로 쇠를 지른다. 둥그런 손잡이도 돌려서 잠근다. 그렇게 문을 세 번 잠그면 마음이 조금 놓였다. 가끔 누군가 찾아와 초인종을 누르면 아연이는 아무도 없는 척하려고 이불을 덮어쓰고 숨소리를 죽였다.
하루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가 잠이 들어버렸다. 저녁에 퇴근한 엄마는 초인종을 몇 번이고 누르다가 아연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고 있던 아연이가 전화벨 소리에 허둥지둥 일어나 문을 열자 엄마는 쓰러지듯이 들어왔다.
“잤니?”
“……네.”
그날 엄마는 열 번이나 전화를 했었다.
다음날부터 아연이는 졸음이 올 때마다 눈꺼풀을 잡아당겼다. 자면 안 돼. 그러다보니 아홉 시가 되어도 졸리지 않았다.
어느새 늦가을이 되어 있었다.
학교가 끝났다. 아연이는 주섬주섬 책과 공책을 가방에 담았다. 아이들은 손을 맞잡고 재잘대면서 교실 문을 나갔다. 가방을 메려는데 담임 선생님이 불렀다.
“주아연, 이리 와봐.”
선생님은 웃고 있다. 아연이는 안심하고 다가갔다.
“요새 선생님이 너무 바빠서 아연이에게 신경을 못 썼어. 그래도 잘하고 있어서 고마워. 그래, 아연이는 뭘 가장 좋아해?”
선생님의 눈이 친절하게 반짝였다. 그래도 아연이는 그 눈빛이 조금 무서웠다.
“아침 독서 시간에 책을 참 열심히 읽던데.”
“책은 좋아해요…… 저, 그림책 읽어도 돼요?”
“그림책? 그림책 좋아하니?”
아연이가 살며시 고개만 끄덕이자 선생님은 웃었다.
“선생님도 그림책 좋아해. 그런데 혹시 글자 많은 책 읽기가 힘드니?”
아연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글책 읽기는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그림책이 보고 싶을 뿐이었다.
“아연이 그림책 좋아하는구나. 그래도 학교 수업 시간에는 글책을 읽어야 해. 그림책을 보고 싶으면 학교 도서관에 가보렴.”
이사하고 처음으로 그림책을 볼 수 있다. 아연이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학교 도서관에는 아이들이 없었다. 앞문은 열려 있고 사서 선생님 혼자 책상 앞에 앉아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연이가 기웃거리자 사서 선생님은 고개를 숙인 채 손만 내밀어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아연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림책은 어딨어요?”
사서 선생님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눈을 깜박거리더니 물었다.
“너 몇 학년이야?”
“삼 학년이요.”
“삼 학년인데 아직 그림책을 봐?”
아연이는 말문이 콱 막혔다. 선생님은 손을 들어 가리켰다.
“학교 도서관에는 그림책이 별로 없어. 그래도 저기 맨 안쪽 책장, 맨 아래 칸에 조금 있어.”
아연이는 감사합니다, 라고 입속으로 되뇌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림책은 대부분 낡고 책장이 너덜너덜했지만 아연이는 신경쓰지 않았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시냇물처럼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빛깔과 모양들이 아연이를 반갑게 맞았다.
‘안녕, 오랜만이야.’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연이는 사서 선생님이 등 뒤에 서서 내려다보는 것도 몰랐다.
“얘, 이제 집에 가야지.”
“아, 아, 네.”
아연이가 일어나려고 버둥거리자 사서 선생님이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지금은 학교가 문을 닫아야 해. 신우 아파트 어딘지 아니?”
“거기 살아요.”
“그럼 잘 됐다. 그 아파트 6동 일 층에 작은 도서관이 있어. 거기에 그림책이 많아.”
“감사합니다.”
아연이는 고개를 푹 숙여 인사했다. 월셋집에 이사 온 게 처음으로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학교가 끝나자마자 아연이는 아파트 6동 일 층에 갔다. 따로 도서관 건물이 있는 건 아니었다. 아파트 현관문처럼 생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도서관이었다. 학교 도서관보다 넓고 그림책도 많았다. 책장 세 개가 모두 그림책이었다. 아연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그림책을 한 무더기 꺼냈다. 책장을 넘기다보면 배고픈 줄도 몰랐다. 도서관이 문 닫는 시간이 되자 아연이는 아쉬운 나머지 사서 아주머니에게 물어보았다.
“여기 내일 몇 시에 열어요?”
“오후 두 시 반이란다. 주말에는 닫아.”
아연이는 그 말을 기억하면서 사서 아주머니가 내보내는 대로 도서관을 나왔다.
휴대폰에 엄마의 카톡이 와 있었다.
‘엄마는 오늘 일이 많아서 늦어. 먼저 밥 먹고 자. 현관문은 도어록만 걸어놔. 엄마가 알아서 들어갈게.’
카톡을 보고 나서야 아연이는 배고프다고 쪼르륵대는 위장의 아우성을 들을 수 있었다.
며칠 뒤 아연이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작은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세 시가 조금 넘었지만 문이 잠겨 있었다. 아연이는 당황했다. ‘왜 닫혔지? 오늘은 주말이 아닌데.’ 아연이는 잠긴 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11월이라 제법 추웠다. 화단의 나무들은 낙엽을 떨구고 뾰족뾰족한 나뭇가지들만 남겼다. 아연이는 아침 등굣길에서 본 서리가 생각났다. 차가운 진흙에 바늘같이 생긴 얼음이 끼어 있었다. 서리가 보이면 겨울이 온다고 했다. 찬바람에 손가락이 저리기 시작했다. 아연이는 손을 쥐었다 펴면서 기다렸다. 한참 뒤에야 아주머니가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아이고, 얘야, 오래 기다렸니? 내가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아주머니는 도어록 뚜껑을 열고 비밀번호를 눌렀다. 3, 1, 1, 4, 7, 5, 2.
아연이는 그 번호를 바로 외울 수 있었다.
가을은 곧 겨울로 변했다. 연회색 하늘은 싸늘한 빗방울을 뿌려댔다. 밤새 내린 비가 새벽에 얼었다가 대낮에 녹기도 했다.
그동안 아연이는 주말마다 몰래 작은 도서관에 갔다. 처음 비밀번호를 누를 때에는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폴짝, 뛰쳐나올 것 같았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작은 도서관은 추워서 갈 때마다 패딩과 담요를 챙겼다. 문을 안쪽에서 잠그고 보온컵에 담긴 뜨거운 물을 마시면서 그림책을 읽었다. 혹시 누군가 들어올까봐 작은 도서관의 맨 안쪽 책장과 책장 사이에 방석을 깔고 웅크렸다. 거기에 숨으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작은 도서관이 다 내 방 같아.’
엄마가 늦는 날에도 아연이는 몰래 작은 도서관에 갔다. 거기서 그림책을 읽다가 한밤중이 되기 전에 집에 들어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엄마가 온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요즘은 열한 시가 넘어도 엄마가 안 올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아연이는 생각했다.
‘내 방에서 그림책 보다가 올걸.’
날씨는 점점 추워졌다. 엄마가 늦어지는 날도 많아졌다. 아예 작은 도서관에서 밤을 새우는 날도 잦아졌다. 담요를 뒤집어쓰고 휴대폰 불빛으로 책을 읽다보면 어디선가 길고양이들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추위를 견디다 못해 지르는 비명이었다.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아연이는 책을 덮고 귀를 기울였다. 추위에 떠는 고양이들을 찾아서 데려오고 싶었다. 그렇지만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금요일 저녁이었다. 엄마는 새벽에 들어온다는 카톡을 보냈다. 아연이는 일기예보가 끝나자 텔레비전을 껐다. 기상캐스터는 오늘밤은 올해 중 가장 추우니 한파에 대비하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아연이는 뺨과 귀가 발갛게 언 채 도서관에서 밤을 새울 준비를 했다. 과자 한 봉지, 목도리와 장갑, 뜨거운 물이 든 보온병을 챙겼다.
밤 열한 시였다. 아연이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어두운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전깃불은 켜지 않고 휴대폰 플래시로 책을 읽을 작정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책장 사이로 기어들어가려는 순간 손에 보드라운 감촉이 닿았다. 그 감촉은 물컹하게 변하더니 날카로운 쇳조각처럼 아연이의 손등을 긁었다!
“……아!”
아연이는 손등의 상처를 보는 대신 휴대폰 플래시를 켰다. 책장 사이의 방석 위에 온몸이 새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앞다리를 길게 뻗고 앉아 있었다. 코와 귀 안쪽까지 눈부시게 희었다. 하얀 고양이는 하늘색 눈동자를 보석처럼 빛내며 아연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누군가 했더니 너구나.”
고양이가 말했다. 아연이는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넌 누구야?”
아연이의 물음에 고양이는 하얀 채찍 같은 꼬리를 내밀어 방석을 툭툭 쳤다.
“난 여기서 태어났어.”
“태어났다고?”
“그래, 이 책장 사이에서. 내 엄마도 여기서 태어났어. 할머니도 아빠도.”
고양이가 말을 할 때마다 뺨에 돋은 흰 바늘 같은 수염이 살랑살랑 움직였다. 마치 수염이 살아 있는 것 같다.
“난 네가 누군지 알아. 매일 밤 여기서 그림을 펴고 소리를 내어 글자들을 읽었지.”
“나를 알아?”
“알지. 너처럼 이 도서관에 숨어드는 아이들이 있었어. 그 아이들은 언제나 내 아기들을 잘 돌보아 줬어. 너도 그럴 거지?”
“너, 여기서 아기 낳는 거야……?”
고양이는 천천히 일어나서 등을 우아하게 펴고 한 발 한 발 다가왔다.
“오늘밤 잘 보고 있어.
새카만 밤의 아기와
새벽달 같은 아기가 나올 거야.
그 아기들은 모두 너의 친구가 될 거야.”
고양이의 말이 끝나자 아연이는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고양이의 얼굴에 닿았다. 하얀 고양이의 얼굴은 북극여우처럼 부드럽고 차가웠다. 싸늘함이 손을 타고 올라와 팔과 어깨를 감고 온몸을 가득 채웠다. 마치 빙하를 들이마시는 것 같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서리로 변하는 그때, 창밖에서 두툼한 눈송이 수만 개가 하염없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얀 고양이는 말한 대로 아기 고양이 두 마리를 낳았다. 한 마리는 비단처럼 반지르르한 검은 털에 눈은 호박색이었다. 한밤의 별이 빛나는 모습이었다. 다른 한 마리는 연한 황금색 털로 온몸이 덮여 있었다. 초록색 눈동자는 부서진 비취 조각처럼 은은하게 빛났다.
아연이는 하얀 고양이가 먹이를 구하러 나간 동안 아기 고양이들과 책을 읽었다. 아기 고양이들은 그림책 위를 기어다녔고 아연이는 속삭이듯 글자들을 읽어내려갔다.
푸르고 푸른 별빛이
눈밭 위에 폭
하고 내려앉았어요
하얀 눈 위에
달빛도 폭
내려왔어요
검은 고양이가 하얀 눈밭 그림 위를 뒹굴었다. 황금색 고양이도 그림책 위에 드러누웠다. 아연이는 둘을 쓰다듬었다. 털은 눈처럼 부드럽고 차가웠다.
“곧 있으면 엄마가 돌아올 거야.”
아연이는 중얼거리며 한 손에 한 마리씩 고양이를 들어 품에 안았다. 주먹만한 아기 고양이들은 꿈틀거리면서 뺨을 가슴에 비볐다.
며칠째 눈은 펑펑 쏟아졌다. 삽으로 눈을 퍼내는 소리가 들렸다. 길이 꽁꽁 얼어 자동차가 다니지 못한다는 불평이 쌓였다. 눈이 내리자마자 얼음덩어리가 되어 치우기 힘들다고 했다. 그렇지만 도서관은 춥지 않았다. 바깥에서 내린 눈이 백곰의 두터운 털 같이 도서관을 덮어주는 것 같았다. 배고프지도 않았다. 아기 고양이들을 안고 있으면 어느새 하얀 고양이가 돌아왔다. 아기 고양이들이 엄마의 젖을 빨면 아연이도 배가 불렀다.
“바깥은 어때?”
아연이가 묻자 하얀 고양이가 대답했다.
“아주 깨끗하고 고요해.”
그 말을 들은 아연이는 기분이 좋았고 졸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연이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하얀 고양이가 속눈썹에 맺힌 서리를 핥고 있었다. 핥을 때마다 서리가 굵어지고 뾰족해졌다. 눈꺼풀이 무거워질 정도였다.
“……아기 고양이들은 어디 있어?”
하얀 고양이는 뺨도 핥아주었다. 그 자리에도 서리가 맺혔다.
“내 아기들은 겨울이 오는 곳에 갔어. 눈을 만들어주러 갔어.”
아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기 고양이들이 다 자랐다는 뜻이었다. 밤의 별과 새벽의 달.
고양이가 다시 말했다.
“그동안 같이 있어줘서 고마워.”
“어, 가려고?”
“봄이 오고 있거든.”
안 돼. 아연이는 소리치려 했다. 나 혼자 두지 마. 그렇지만 언 목구멍에서 나온 것은 목소리가 아니라 살얼음 조각뿐이었다.
하얀 고양이가 얼굴을 아연이의 볼에다 대고 비볐다. 섬뜩하게 차갑고 털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너는 서리처럼 작고
눈처럼 부드러워
겨울이 추워질수록
얼음처럼 단단해질 거야
햇빛이 너를 비추면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겠지
아연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난 햇빛 싫어
물이 되어 녹잖아
난 계속 단단한 얼음이고 싶어
고양이는 두 앞발을 들어 아연이의 가슴에 댔다.
걱정 마
이 세상에 물보다 자유로운 존재는
없어
아연이는 하얀 고양이를 붙잡으려 했다. 고양이는 잡히지 않았다. 부드러운 젤리처럼 물 흐르듯 책과 책 사이를 빠져나가 사라졌다.
눈을 뜨자 온몸이 젖어 있었다. 몸에서 땀처럼 얼음물이 솟아난 것 같다. 속눈썹에 맺힌 서리는 깨알만한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손바닥에는 무서움을 탈 때처럼 물기가 촉촉이 고였다. 어둠이 희끄무레하게 걷히고 있었다. 아연이는 누군가 자기를 향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너 언제부터 여기 있었니, 도대체?”
사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고막을 아프게 찔렀다.
“괜찮아? 일어날 수 있어?”
아주머니가 손을 내밀었다. 아연이는 고개를 저으며 바닥에 손을 짚었다. 뜨거운 물이 담긴 욕조에 오랫동안 있다가 나온 것처럼 무릎이 휘청거렸다. 비틀거리며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날씨는 눈부시게 맑았다. 햇빛 아래 잔설이 녹고 있었다. 따라 나온 아주머니가 없어진 아이를 찾았다고, 그동안 도서관에 숨어 있었다고 휴대폰에 대고 시끄럽게 소리치고 있었다. 그 목소리도, 따뜻함도 차가움도 아연이의 몸을 통과하여 하늘 위로 올라가 흰 날개를 펴고 사라졌다. 춥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대신 배가 맹렬하게 고프기 시작했다. 이젠 혼자 있어도 괜찮아.
주애령
어른들도 같이 읽기 좋은 동화를 쓰고 싶은 작가. 2020년 장편 동화 『승리의 비밀』을 내고 나서 새로운 스타일을 시험하고 싶던 중이었다. 외롭던 어린 시절에 읽은 북유럽 동화를 떠올리며 썼다. 알고 보니 외로움은 삶의 기본값이었다.
2021/07/27
4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