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소녀의 축제
사미타는 내게 두꺼운 아이라인을 그려줬어. 이마 중앙에는 실제로 세상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눈동자가 선명한 눈 모양을 그려 주었지. 이마에 그린 눈은 특별한 통찰력의 상징이야. 입술은 빨갛게 칠하고 머리는 단정하게 올려 묶었어. 그리고는 장신구가 가득한 마호가니 상자에서 목걸이와 팔찌를 꺼냈지. 사미타가 내 몸에 무거운 보석을 조이는 동안 나는 얼굴을 찌푸렸어. 마지막으로 강렬한 빨간색 전통 옷을 입었지. 이제 준비가 다 됐어.
나무로 된 창문을 열었어. 오늘도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어. 나는 하루에 두 번 창문을 열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얼굴을 보여줘. 사람들은 내가 흘끗 쳐다보기만 해도 행운이 온다고 믿어. 그래서 나를 잠깐 보기 위해 몇 시간씩 기다리고 있지. 누가 왔는지 빙 둘러봤어. 아는 얼굴이 보여. 사원 근처에서 옷 가게를 하는 아저씨랑 아들이 왔어. 말썽꾸러기처럼 아빠 등에 매달려 있는 아이가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을 뻔했지 뭐야. 꾹 참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몰라. 사람들은 내가 하는 행동을 하나의 예언으로 받아들이거든. 내가 울거나 크게 웃으면 중병이나 죽음이 온다고 믿어. 내가 음식을 집으면 재산을 잃을 거라고 믿지.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 그래서 함부로 웃을 수도 없는 거야.
여기는 네팔 카트만두 더르바르 광장에 있는 쿠마리 사원이야. 네팔에는 살아있는 여신 ‘쿠마리’가 있어. 어린 소녀를 뽑아 신으로 모시는 거지. 대통령도 쿠마리 앞에선 무릎을 꿇을 정도로 모든 이들의 숭배를 받아.
나는 여섯 살 때 쿠마리가 되었어. 꽤 까다롭고 엄격한 심사를 통해 뽑혔지. 사슴처럼 가는 허벅지, 소 같은 눈꺼풀 등 외모에서만 서른두 가지 심사를 받았어. 돼지, 닭, 양 등 동물의 사체와 하룻밤을 자야 하는 무서운 평가도 통과해야 했지. 쿠마리가 되었을 때 엄마는 무척 좋아하셨어.
"네가 여신이 되다니, 가문의 영광이구나."
하지만 난 꼭 좋지만은 않았어. 가족을 기쁘게 한 건 좋았지만 가족과 친구들과 헤어지는 건 정말 싫었거든.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이곳에 왔을 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울고 싶은데 울 수도 없었어.
쿠마리는 지켜야 할 규칙이 아주 많거든. 웃거나 울어서도 안 되고 가족과 친한 친구 빼고는 누구에게도 말을 하면 안 돼. 부모는 일 년에 며칠만 볼 수 있고 일 년에 서너 번 열리는 축제 빼고는 나갈 수도 없어. 축제 때라도 신성한 발이 땅에 닿으면 안 돼. 상처가 나거나 피가 나도 안 돼. 그래서 첫 생리를 하게 되면 신성함이 없어졌다는 이유로 쫓겨나게 되지.
"여신님, 축제가 드디어 내일이에요. 긴장되시죠?"
"응 사미타. 이런 기분은 처음이야. 너무 긴장되고 떨린다."
"몇 달 만에 바깥에 나가는 거니 당연하지요.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쉬세요."
"그래. 그래야겠어. 근데 네나는 어디 있지?"
"축제 준비를 돕고 있을 거예요."
나는 사미타에게 네나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어. 네나는 시녀인 사미타의 딸이야. 네나를 만난 건 정말 행운이었어.
쿠마리가 된 지 벌써 5년이 됐어. 아직도 물안개 자욱한 고향 꿈을 자주 꿔. 그곳에서 가족들도 만나고 친구들도 만나서 뛰어놀곤 하지. 그럴 때면 몰래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어. 하지만 참고 또 참아야 했어. 가족과 가문의 명예가 내게 달렸으니까.
나는 종일 이 좁은 방에서 빨간 옷을 입고 앉아만 있어야 해. 얼마나 지루하고 심심한지 몰라. 외로움을 달래는 유일한 방법이 창문 틈으로 몰래 바깥세상을 엿보는 거였어.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이 오갔어. 사람들 표정만 봐도, 행동만 봐도 내 머릿속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졌어. 마치 한 편의 연극처럼.
그날도 창문 틈으로 바깥을 보고 있었어.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어. 둘이 잘 놀다가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다투기 시작했어. 그걸 보니 나도 친구들과 놀다 다투던 일이 생각난 거야. 그땐 참 아무것도 아닌 일로 다퉜었는데. 그때를 생각하니 괜히 웃음이 났어. 쿡쿡.
그러고 나서 고개를 돌렸는데 하마터면 심장이 멎을 뻔했어. 나처럼 작은 몸집의 소녀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서 있었거든. 내가 웃는 걸 분명히 봤을 거야.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딴청을 피웠지.
"누구지?"
네나는 그제야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어.
"여신님. 저는 사미타의 딸, 네나 입니다. 어머니께서 바쁘셔서 저를 대신……."
당황하는 모습이 무척 재미있었지.
"혹시 봤어?"
"네에? 아뇨. 전 아무것도……."
"혹시 봤더라도 비밀이다."
"네에? 아아…… 알겠습니다. 여신님."
"근데 몇 살이냐?"
"열한 살입니다."
나랑 동갑이야. 마치 고향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지. 하지만 표정에 드러내선 안 돼.
"그럼 학교 다니겠네?"
"네. 학교 다닙니다."
와우, 정말! 마음속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어. 나는 개인 교사와 둘이 공부하고 있거든. 그래서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정말 부러웠어. 궁금한 것도 너무 많고 말이야. 나는 네나와 친구가 되고 싶었어.
“우리 친구 하자."
네나는 다시 한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봤지.
"여신님, 무슨 말씀이신지……"
"학교에 친구 있지? 그냥 그런 친구."
그날부터 우리는 비밀 친구가 되었어. 네나는 매일 내 방으로 왔어. 사미타는 우리의 관계를 눈감아 주었지. 나는 네나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어. 그동안 못했던 얘기를 쏟아내느라 밤이 새는 줄도 모를 정도였지. 나는 네나에게 끝없이 질문했어. 친구들하고는 뭐 하고 놀아? 선생님 별명은 뭐야? 남학생들은 어떤 짓궂은 장난을 치지? 네나는 내가 학교에 다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아주 자세하게 얘기해줬어. 학교 이야기는 시작에 불과했지. 요즘 가장 인기 있는 가수는 누구야? 어떤 춤이 유행이야? 요즘 인기 있는 데이트 장소는 어디지? 나는 바깥세상에 대한 모든 궁금증을 쏟아냈어. 그동안 어떻게 참고 살았나 싶을 정도로 말이지.
“여신님은 정말 궁금한 게 많으세요.”
“여기서 내가 볼 수 있는 건 방 네 귀퉁이뿐이라고. 학교도 다니고 친구들도 사귀고 원하는 건 다 할 수 있는 네나가 부럽다.”
"제가 부럽다고요? 저는 여신님이 훨씬 부러운걸요."
"내가 부럽다고? 이 좁은 방에만 갇혀서 인형같이 앉아 있는 게?"
"그래도 세상 모든 사람이 여신님을 우러러보잖아요. 저도 사실 쿠마리를 꿈꾼 적이 있었거든요. 아무나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포기했지만요."
나와는 반대로 네나는 여신으로 사는 게 궁금했던 모양이야. 나는 네나에게 친절하게 알려줬지.
“여신이 되는 건 공주가 되는 거랑 비슷해. 뭐든지 사원 안에서 하는 거야.”
“전 나가지 않아도 좋으니까 한번만이라도 여신이 되어보고 싶어요. 아마 구름 위를 나는 기분이겠죠?”
네나의 얼굴을 봤어.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이었지. 순간 네나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럼, 네나도 한 번 해볼래?"
나는 서랍에서 화장품이 들어있는 상자를 꺼냈어. 그리고 네나의 얼굴에 화장을 하기 시작했어. 눈에 두꺼운 아이라인을 그리고 이마 중앙에 눈을 그려 넣었어. 입술은 빨갛게 칠하고 머리는 단정하게 올려 묶었지. 쿠마리의 빨간 전통 복장을 입힌 후 화려한 팔찌와 목걸이도 걸어주었어. 그리고 나란히 거울 앞에 섰지.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본 순간 우리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우리 둘의 모습이 마치 쌍둥이처럼 똑같았거든. 그때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어.
“네나, 하루만 딱 하루만 내가 되어줄래?”
이제 축제가 몇 시간 남지 않았어. 네나가 들어왔어.
"네나, 준비 다 됐지?"
"여신님,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네나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어. 잔뜩 긴장한 것 같았지. 나 역시 마찬가지였어. 화장에 가려서 보이지 않을 뿐이었지.
"사람들에게 어떻게 축복을 내려야 하죠?"
나는 잠시 생각한 뒤 네나의 귓가에 속삭였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잠이 오지 않았어. 밤새 뒤척였지. 어느덧 창틈으로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어. 드디어 축제가 시작된 거야.
준비해둔 옷을 입고 살금살금 밖으로 나왔어. 아직 어둠이 깔려 있었어. 사원 전체가 잠든 것처럼 고요했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어. 신발을 신고 땅을 밟았지. 너무 오랜만이라 걸을 때 자꾸 몸이 휘청거렸어. 다행히 네나와 조금씩 연습한 덕에 금방 적응할 수 있었어. 사원을 빠져나올 때까진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어. 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렸지. 어느새 나는 사방이 쭉 뻗어있는 광장 위에 서 있었어. 매일 방에서만 바라보던 광장이야. 광장은 생각보다 훨씬 더 크고 웅장했어.
광장은 새벽부터 축제 준비로 들썩거렸어. 나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광장은 여러 갈래의 길로 이어졌어. 마치 미로처럼 말이지. 그 길을 따라 알록달록 화려한 옷들과 다양한 기념품 가게들, 먹을거리가 넘쳐났어. 구경하는데 정신을 빼앗겨 몇 번이나 길을 잃었어. 그래도 하나도 두렵지 않았지. 이게 바로 내가 원하는 거였으니까. 맘껏 걷다가 길을 잃어버리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중 하나였어. 상점 앞을 지나다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봤어. 동그란 민얼굴에 평범한 옷을 입은 소녀가 서 있었어. 많이 낯설었지만, 기분 좋았어. 누가 나를 쿠마리라고 생각하겠어. 세상 모두를 속이고 있는 것 같아 웃음이 났어. 쿡쿡. 생각해보니 지금은 웃어도 상관없잖아. 배꼽 빠질 정도로 크게 웃었지.
“흐흐흐 히히히 호호호 하하 하하하하.”
얼마나 크게 웃었는지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어. 그때 어디선가 달콤한 냄새가 솔솔 풍겨왔어. 냄새를 따라 가보니 동글동글한 도넛이 기름에 지글지글 튀겨지고 있었어. 달달한 도넛을 입에 물고 네나가 다니는 학교를 찾아갔어.
운동장에는 파란 체육복을 입은 학생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어. 쭈그리고 앉아 한참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공이 내 앞으로 날아왔어. 멀리서 한 남학생이 외쳤어.
"공 좀 던져줄래?"
한 번도 공을 차본 적은 없었지만, 다리를 뻗어 힘껏 공을 찼어. 다행히 제대로 맞았어. 공은 순식간에 공중으로 솟구쳤어. 그리고 멀리멀리 앞으로 나아갔지. 파란 하늘 속에서 까만 점 하나가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어. 학교 안으로 들어가니 교실이 줄지어 있었어. 까치발을 들고 창문을 들여다봤어. 아이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그림을 그리고 있고 안경 낀 젊은 남자 선생님은 아이들을 오가며 그림을 봐주고 있었지. 나도 저기에 앉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 드르륵 문이 열렸어.
"넌 이름이 뭐니?"
안경 낀 선생님이야. 순간 내 이름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았어. 쿠마리가 되고 나선 이름을 부른 사람이 없었으니까. 한참 후에야 겨우 생각났지.
"차…… 차니라, 내 이름은 차니라."
"차니라, 예쁜 이름이구나. 들어와서 같이 그림 그릴래?"
너무 좋아 대답도 하지 못하고 선생님을 졸졸 따라 들어갔어.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어. 나는 샐샐거리며 아이들 틈에 앉았어. 선생님은 도화지와 크레파스를 주면서 축제의 풍경을 그려보라고 하셨어.
나는 잠시 생각한 뒤 그리기 시작했어. 신들의 분장을 하고 춤을 추는 무용수들과 사람들을 그렸어. 매년 내가 행진할 때마다 보았던 모습이야. 가마에 앉아 있기만 해야 하는 나는 땅을 밟고 춤을 추는 그들이 너무 부러웠거든. 겉으로는 아무 표정 없이 앉아있었지만, 속으로는 나도 함께 춤을 추고 있었지. 그림 속에 춤을 추는 내 모습도 그려 넣었어. 선생님은 내 그림을 아이들이 볼 수 있게끔 교실 앞에 걸었어. 아이들이 손뼉을 쳐줬어. 마치 매일 다니던 학교에 온 기분이었어. 꿈을 꾸는 것 같았지.
시계를 봤어. 버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친구들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후다닥 교실을 빠져나왔어. 정류장을 향해 뛰고 또 뛰었어. 겨우 막 출발하려는 버스에 올라탈 수 있었지. 창밖으로 경적이 시끄럽게 울리고 사람들은 점점 더 모여들고 있었어.
깜박 잠이 들었던 것 같아. 눈을 뜨니 확 트인 푸른 들판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어. 저 멀리 손 모내기하는 사람들, 집을 짓기 위해 흙벽을 쌓는 사람들도 보여. 창문을 여니 바람 사이로 구수한 냄새가 났어. 어린 시절 고향에서 나던 바로 그 냄새였어. 버스에서 내렸어. 들판 샛길로 한참을 걸어 올라가니 나무로 만든 이층집이 보였어. 아궁이에선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지.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어.
문 앞에서 머뭇거리고 서 있는데 안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어. 엄마, 아빠의 목소리야. 당장이라도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생각하지 못했거든. 그때였어.
"누나?"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어. 분명 모한이야. 그땐 꼬맹이였는데 못 알아볼 정도로 훌쩍 자라있었어.
"모한?"
"엄마! 아빠! 누나 왔어!"
순식간에 엄마, 아빠가 달려 나왔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대로 서 있었어. 엄마, 아빠도 놀란 표정이었어. 다행히 두 분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나를 꼭 껴안아 줬어. 집은 변한 게 하나도 없었어. 내가 가지고 놀던 못생긴 헝겊 인형도, 아빠가 만들어준 앉은뱅이 의자도 모두 그대로 있었지. 벽에는 쿠마리 사진이 걸려있었어. 어제의 내 모습인데 왠지 낯설었어.
아주 오랜만에 네 식구가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어. 소박한 밥상이었지만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 가장 맛있는 밥이었어. 이야기를 많이 하진 않았지만, 눈빛만 봐도 그저 행복한 시간이었지.
‘엄마, 아빠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마음속의 말은 하지 못하고 버스에 올랐어. 가족들이 보고 있는 걸 알았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어. 돌아보면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거든. 듬성듬성 자리한 작은 집들이 어둠 속으로 하나둘 사라져갔어. 나는 자꾸 눈앞이 흐려져서 눈을 감았어.
더르바르 광장은 용광로처럼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어. 광장은 축제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어. 사람들이 파도처럼 너울거렸지. 신들의 행차를 준비하는 악사들이 등장했어. 악사들은 흰옷에 꽃으로 한껏 치장을 한 채 연주하기 시작했어. 악사들이 지나가는 곳에 길이 열렸어.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지. 저 멀리 작은 빛이 보였어. 그 빛은 점점 커졌지. 누군가가 외쳤어.
"쿠마리 여신이다!"
화려하게 번쩍이는 가마가 점점 가까워졌어. 가마 안에는 새하얀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한 쿠마리가 아무 표정 없이 앉아 있었어. 쿠마리의 발이라도 만져보려는 사람들 때문에 나는 자꾸 떠밀려갔어. 그때였어. 쿠마리가 내가 있는 쪽을 향해 꽃을 던졌어. 얼떨결에 나는 손을 높이 들어 꽃을 받았지. 나는 꽃을 머리에 살포시 올려 예를 차렸어. 그리고 눈빛으로 네나에게 말했어.
‘네나. 해낼 줄 알았다. 고맙다.’
쿠마리는 엷게 미소 지었어. 물론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미소였지.
신들의 행차가 끝나고 거리의 불이 꺼졌어.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어.
“치소파니! 치소파니!”
차가운 물을 뿌려달라고 사람들이 외쳤어. 여기저기서 물이 뿌려졌고 어느새 나는 온몸이 흠뻑 젖어 버렸지. 어디선가 요란한 악기 소리가 들려왔어. 나는 다시 사람들 속으로 빨려 들어갔어. 신의 모습으로 분장한 무용수들이 신나게 춤을 추기 시작했어. 그중 한 사람이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어.
"여신님, 함께 추시겠습니까?"
잠시 망설이다 그 손을 잡았어. 나는 두 발로 사뿐사뿐 뛰어오르며 아주 오래오래 춤을 췄어.
축제는 영영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긴긴밤을 건너고 있었지.
나무로 된 창문을 열었어. 오늘도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어. 나는 하루에 두 번 창문을 열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얼굴을 보여줘. 사람들은 내가 흘끗 쳐다보기만 해도 행운이 온다고 믿어. 그래서 나를 잠깐 보기 위해 몇 시간씩 기다리고 있지. 누가 왔는지 빙 둘러봤어. 아는 얼굴이 보여. 사원 근처에서 옷 가게를 하는 아저씨랑 아들이 왔어. 말썽꾸러기처럼 아빠 등에 매달려 있는 아이가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을 뻔했지 뭐야. 꾹 참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몰라. 사람들은 내가 하는 행동을 하나의 예언으로 받아들이거든. 내가 울거나 크게 웃으면 중병이나 죽음이 온다고 믿어. 내가 음식을 집으면 재산을 잃을 거라고 믿지.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 그래서 함부로 웃을 수도 없는 거야.
여기는 네팔 카트만두 더르바르 광장에 있는 쿠마리 사원이야. 네팔에는 살아있는 여신 ‘쿠마리’가 있어. 어린 소녀를 뽑아 신으로 모시는 거지. 대통령도 쿠마리 앞에선 무릎을 꿇을 정도로 모든 이들의 숭배를 받아.
나는 여섯 살 때 쿠마리가 되었어. 꽤 까다롭고 엄격한 심사를 통해 뽑혔지. 사슴처럼 가는 허벅지, 소 같은 눈꺼풀 등 외모에서만 서른두 가지 심사를 받았어. 돼지, 닭, 양 등 동물의 사체와 하룻밤을 자야 하는 무서운 평가도 통과해야 했지. 쿠마리가 되었을 때 엄마는 무척 좋아하셨어.
"네가 여신이 되다니, 가문의 영광이구나."
하지만 난 꼭 좋지만은 않았어. 가족을 기쁘게 한 건 좋았지만 가족과 친구들과 헤어지는 건 정말 싫었거든.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이곳에 왔을 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울고 싶은데 울 수도 없었어.
쿠마리는 지켜야 할 규칙이 아주 많거든. 웃거나 울어서도 안 되고 가족과 친한 친구 빼고는 누구에게도 말을 하면 안 돼. 부모는 일 년에 며칠만 볼 수 있고 일 년에 서너 번 열리는 축제 빼고는 나갈 수도 없어. 축제 때라도 신성한 발이 땅에 닿으면 안 돼. 상처가 나거나 피가 나도 안 돼. 그래서 첫 생리를 하게 되면 신성함이 없어졌다는 이유로 쫓겨나게 되지.
"여신님, 축제가 드디어 내일이에요. 긴장되시죠?"
"응 사미타. 이런 기분은 처음이야. 너무 긴장되고 떨린다."
"몇 달 만에 바깥에 나가는 거니 당연하지요.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쉬세요."
"그래. 그래야겠어. 근데 네나는 어디 있지?"
"축제 준비를 돕고 있을 거예요."
나는 사미타에게 네나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어. 네나는 시녀인 사미타의 딸이야. 네나를 만난 건 정말 행운이었어.
쿠마리가 된 지 벌써 5년이 됐어. 아직도 물안개 자욱한 고향 꿈을 자주 꿔. 그곳에서 가족들도 만나고 친구들도 만나서 뛰어놀곤 하지. 그럴 때면 몰래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어. 하지만 참고 또 참아야 했어. 가족과 가문의 명예가 내게 달렸으니까.
나는 종일 이 좁은 방에서 빨간 옷을 입고 앉아만 있어야 해. 얼마나 지루하고 심심한지 몰라. 외로움을 달래는 유일한 방법이 창문 틈으로 몰래 바깥세상을 엿보는 거였어.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이 오갔어. 사람들 표정만 봐도, 행동만 봐도 내 머릿속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졌어. 마치 한 편의 연극처럼.
그날도 창문 틈으로 바깥을 보고 있었어.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어. 둘이 잘 놀다가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다투기 시작했어. 그걸 보니 나도 친구들과 놀다 다투던 일이 생각난 거야. 그땐 참 아무것도 아닌 일로 다퉜었는데. 그때를 생각하니 괜히 웃음이 났어. 쿡쿡.
그러고 나서 고개를 돌렸는데 하마터면 심장이 멎을 뻔했어. 나처럼 작은 몸집의 소녀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서 있었거든. 내가 웃는 걸 분명히 봤을 거야.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딴청을 피웠지.
"누구지?"
네나는 그제야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어.
"여신님. 저는 사미타의 딸, 네나 입니다. 어머니께서 바쁘셔서 저를 대신……."
당황하는 모습이 무척 재미있었지.
"혹시 봤어?"
"네에? 아뇨. 전 아무것도……."
"혹시 봤더라도 비밀이다."
"네에? 아아…… 알겠습니다. 여신님."
"근데 몇 살이냐?"
"열한 살입니다."
나랑 동갑이야. 마치 고향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지. 하지만 표정에 드러내선 안 돼.
"그럼 학교 다니겠네?"
"네. 학교 다닙니다."
와우, 정말! 마음속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어. 나는 개인 교사와 둘이 공부하고 있거든. 그래서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정말 부러웠어. 궁금한 것도 너무 많고 말이야. 나는 네나와 친구가 되고 싶었어.
“우리 친구 하자."
네나는 다시 한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봤지.
"여신님, 무슨 말씀이신지……"
"학교에 친구 있지? 그냥 그런 친구."
그날부터 우리는 비밀 친구가 되었어. 네나는 매일 내 방으로 왔어. 사미타는 우리의 관계를 눈감아 주었지. 나는 네나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어. 그동안 못했던 얘기를 쏟아내느라 밤이 새는 줄도 모를 정도였지. 나는 네나에게 끝없이 질문했어. 친구들하고는 뭐 하고 놀아? 선생님 별명은 뭐야? 남학생들은 어떤 짓궂은 장난을 치지? 네나는 내가 학교에 다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아주 자세하게 얘기해줬어. 학교 이야기는 시작에 불과했지. 요즘 가장 인기 있는 가수는 누구야? 어떤 춤이 유행이야? 요즘 인기 있는 데이트 장소는 어디지? 나는 바깥세상에 대한 모든 궁금증을 쏟아냈어. 그동안 어떻게 참고 살았나 싶을 정도로 말이지.
“여신님은 정말 궁금한 게 많으세요.”
“여기서 내가 볼 수 있는 건 방 네 귀퉁이뿐이라고. 학교도 다니고 친구들도 사귀고 원하는 건 다 할 수 있는 네나가 부럽다.”
"제가 부럽다고요? 저는 여신님이 훨씬 부러운걸요."
"내가 부럽다고? 이 좁은 방에만 갇혀서 인형같이 앉아 있는 게?"
"그래도 세상 모든 사람이 여신님을 우러러보잖아요. 저도 사실 쿠마리를 꿈꾼 적이 있었거든요. 아무나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포기했지만요."
나와는 반대로 네나는 여신으로 사는 게 궁금했던 모양이야. 나는 네나에게 친절하게 알려줬지.
“여신이 되는 건 공주가 되는 거랑 비슷해. 뭐든지 사원 안에서 하는 거야.”
“전 나가지 않아도 좋으니까 한번만이라도 여신이 되어보고 싶어요. 아마 구름 위를 나는 기분이겠죠?”
네나의 얼굴을 봤어.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이었지. 순간 네나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럼, 네나도 한 번 해볼래?"
나는 서랍에서 화장품이 들어있는 상자를 꺼냈어. 그리고 네나의 얼굴에 화장을 하기 시작했어. 눈에 두꺼운 아이라인을 그리고 이마 중앙에 눈을 그려 넣었어. 입술은 빨갛게 칠하고 머리는 단정하게 올려 묶었지. 쿠마리의 빨간 전통 복장을 입힌 후 화려한 팔찌와 목걸이도 걸어주었어. 그리고 나란히 거울 앞에 섰지.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본 순간 우리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우리 둘의 모습이 마치 쌍둥이처럼 똑같았거든. 그때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어.
“네나, 하루만 딱 하루만 내가 되어줄래?”
이제 축제가 몇 시간 남지 않았어. 네나가 들어왔어.
"네나, 준비 다 됐지?"
"여신님,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네나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어. 잔뜩 긴장한 것 같았지. 나 역시 마찬가지였어. 화장에 가려서 보이지 않을 뿐이었지.
"사람들에게 어떻게 축복을 내려야 하죠?"
나는 잠시 생각한 뒤 네나의 귓가에 속삭였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잠이 오지 않았어. 밤새 뒤척였지. 어느덧 창틈으로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어. 드디어 축제가 시작된 거야.
준비해둔 옷을 입고 살금살금 밖으로 나왔어. 아직 어둠이 깔려 있었어. 사원 전체가 잠든 것처럼 고요했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어. 신발을 신고 땅을 밟았지. 너무 오랜만이라 걸을 때 자꾸 몸이 휘청거렸어. 다행히 네나와 조금씩 연습한 덕에 금방 적응할 수 있었어. 사원을 빠져나올 때까진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어. 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렸지. 어느새 나는 사방이 쭉 뻗어있는 광장 위에 서 있었어. 매일 방에서만 바라보던 광장이야. 광장은 생각보다 훨씬 더 크고 웅장했어.
광장은 새벽부터 축제 준비로 들썩거렸어. 나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광장은 여러 갈래의 길로 이어졌어. 마치 미로처럼 말이지. 그 길을 따라 알록달록 화려한 옷들과 다양한 기념품 가게들, 먹을거리가 넘쳐났어. 구경하는데 정신을 빼앗겨 몇 번이나 길을 잃었어. 그래도 하나도 두렵지 않았지. 이게 바로 내가 원하는 거였으니까. 맘껏 걷다가 길을 잃어버리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중 하나였어. 상점 앞을 지나다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봤어. 동그란 민얼굴에 평범한 옷을 입은 소녀가 서 있었어. 많이 낯설었지만, 기분 좋았어. 누가 나를 쿠마리라고 생각하겠어. 세상 모두를 속이고 있는 것 같아 웃음이 났어. 쿡쿡. 생각해보니 지금은 웃어도 상관없잖아. 배꼽 빠질 정도로 크게 웃었지.
“흐흐흐 히히히 호호호 하하 하하하하.”
얼마나 크게 웃었는지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어. 그때 어디선가 달콤한 냄새가 솔솔 풍겨왔어. 냄새를 따라 가보니 동글동글한 도넛이 기름에 지글지글 튀겨지고 있었어. 달달한 도넛을 입에 물고 네나가 다니는 학교를 찾아갔어.
운동장에는 파란 체육복을 입은 학생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어. 쭈그리고 앉아 한참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공이 내 앞으로 날아왔어. 멀리서 한 남학생이 외쳤어.
"공 좀 던져줄래?"
한 번도 공을 차본 적은 없었지만, 다리를 뻗어 힘껏 공을 찼어. 다행히 제대로 맞았어. 공은 순식간에 공중으로 솟구쳤어. 그리고 멀리멀리 앞으로 나아갔지. 파란 하늘 속에서 까만 점 하나가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어. 학교 안으로 들어가니 교실이 줄지어 있었어. 까치발을 들고 창문을 들여다봤어. 아이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그림을 그리고 있고 안경 낀 젊은 남자 선생님은 아이들을 오가며 그림을 봐주고 있었지. 나도 저기에 앉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 드르륵 문이 열렸어.
"넌 이름이 뭐니?"
안경 낀 선생님이야. 순간 내 이름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았어. 쿠마리가 되고 나선 이름을 부른 사람이 없었으니까. 한참 후에야 겨우 생각났지.
"차…… 차니라, 내 이름은 차니라."
"차니라, 예쁜 이름이구나. 들어와서 같이 그림 그릴래?"
너무 좋아 대답도 하지 못하고 선생님을 졸졸 따라 들어갔어.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어. 나는 샐샐거리며 아이들 틈에 앉았어. 선생님은 도화지와 크레파스를 주면서 축제의 풍경을 그려보라고 하셨어.
나는 잠시 생각한 뒤 그리기 시작했어. 신들의 분장을 하고 춤을 추는 무용수들과 사람들을 그렸어. 매년 내가 행진할 때마다 보았던 모습이야. 가마에 앉아 있기만 해야 하는 나는 땅을 밟고 춤을 추는 그들이 너무 부러웠거든. 겉으로는 아무 표정 없이 앉아있었지만, 속으로는 나도 함께 춤을 추고 있었지. 그림 속에 춤을 추는 내 모습도 그려 넣었어. 선생님은 내 그림을 아이들이 볼 수 있게끔 교실 앞에 걸었어. 아이들이 손뼉을 쳐줬어. 마치 매일 다니던 학교에 온 기분이었어. 꿈을 꾸는 것 같았지.
시계를 봤어. 버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친구들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후다닥 교실을 빠져나왔어. 정류장을 향해 뛰고 또 뛰었어. 겨우 막 출발하려는 버스에 올라탈 수 있었지. 창밖으로 경적이 시끄럽게 울리고 사람들은 점점 더 모여들고 있었어.
깜박 잠이 들었던 것 같아. 눈을 뜨니 확 트인 푸른 들판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어. 저 멀리 손 모내기하는 사람들, 집을 짓기 위해 흙벽을 쌓는 사람들도 보여. 창문을 여니 바람 사이로 구수한 냄새가 났어. 어린 시절 고향에서 나던 바로 그 냄새였어. 버스에서 내렸어. 들판 샛길로 한참을 걸어 올라가니 나무로 만든 이층집이 보였어. 아궁이에선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지.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어.
문 앞에서 머뭇거리고 서 있는데 안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어. 엄마, 아빠의 목소리야. 당장이라도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생각하지 못했거든. 그때였어.
"누나?"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어. 분명 모한이야. 그땐 꼬맹이였는데 못 알아볼 정도로 훌쩍 자라있었어.
"모한?"
"엄마! 아빠! 누나 왔어!"
순식간에 엄마, 아빠가 달려 나왔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대로 서 있었어. 엄마, 아빠도 놀란 표정이었어. 다행히 두 분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나를 꼭 껴안아 줬어. 집은 변한 게 하나도 없었어. 내가 가지고 놀던 못생긴 헝겊 인형도, 아빠가 만들어준 앉은뱅이 의자도 모두 그대로 있었지. 벽에는 쿠마리 사진이 걸려있었어. 어제의 내 모습인데 왠지 낯설었어.
아주 오랜만에 네 식구가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어. 소박한 밥상이었지만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 가장 맛있는 밥이었어. 이야기를 많이 하진 않았지만, 눈빛만 봐도 그저 행복한 시간이었지.
‘엄마, 아빠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마음속의 말은 하지 못하고 버스에 올랐어. 가족들이 보고 있는 걸 알았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어. 돌아보면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거든. 듬성듬성 자리한 작은 집들이 어둠 속으로 하나둘 사라져갔어. 나는 자꾸 눈앞이 흐려져서 눈을 감았어.
더르바르 광장은 용광로처럼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어. 광장은 축제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어. 사람들이 파도처럼 너울거렸지. 신들의 행차를 준비하는 악사들이 등장했어. 악사들은 흰옷에 꽃으로 한껏 치장을 한 채 연주하기 시작했어. 악사들이 지나가는 곳에 길이 열렸어.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지. 저 멀리 작은 빛이 보였어. 그 빛은 점점 커졌지. 누군가가 외쳤어.
"쿠마리 여신이다!"
화려하게 번쩍이는 가마가 점점 가까워졌어. 가마 안에는 새하얀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한 쿠마리가 아무 표정 없이 앉아 있었어. 쿠마리의 발이라도 만져보려는 사람들 때문에 나는 자꾸 떠밀려갔어. 그때였어. 쿠마리가 내가 있는 쪽을 향해 꽃을 던졌어. 얼떨결에 나는 손을 높이 들어 꽃을 받았지. 나는 꽃을 머리에 살포시 올려 예를 차렸어. 그리고 눈빛으로 네나에게 말했어.
‘네나. 해낼 줄 알았다. 고맙다.’
쿠마리는 엷게 미소 지었어. 물론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미소였지.
신들의 행차가 끝나고 거리의 불이 꺼졌어.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어.
“치소파니! 치소파니!”
차가운 물을 뿌려달라고 사람들이 외쳤어. 여기저기서 물이 뿌려졌고 어느새 나는 온몸이 흠뻑 젖어 버렸지. 어디선가 요란한 악기 소리가 들려왔어. 나는 다시 사람들 속으로 빨려 들어갔어. 신의 모습으로 분장한 무용수들이 신나게 춤을 추기 시작했어. 그중 한 사람이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어.
"여신님, 함께 추시겠습니까?"
잠시 망설이다 그 손을 잡았어. 나는 두 발로 사뿐사뿐 뛰어오르며 아주 오래오래 춤을 췄어.
축제는 영영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긴긴밤을 건너고 있었지.
하정
낯선 길을 걸으며 모르는 사람과 마주치고 다른 세계와 만날 때, 비로소 살아있는 것 같다. 두렵지만 무모하게 걸어간 길이 나를 성장시키고 변화시킨다. 그래서 언제나 미지의 길을 꿈꾼다. 글은 그러한 세계로 인도하는 통로이자 출구다.
2018/04/24
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