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고 싶다.
   지금이 딱 인데.

   임현지가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임현지는 음악 수행평가 뮤지컬 〈개구리 왕자〉의 공주 역을 노리고 있었다. 다른 배역은 거의 다 정해졌고 가장 대사가 많은 공주 역이 남았다. 이 배역을 따내지 못하면 우스꽝스러운 개구리나 대사 하나 없는 황금 공 역할을 해야만 했다. 자존심 센 임현지가 그런 걸 하고 싶어 할 리가 없었다.
   “잠깐만요. 부르기 전에 설명 좀 할게요. 제가 부를 노래는 헨델의 〈울게 하소서〉라는 곡인데요, 우리말 가사도 있지만 저는 이태리어 가사로 부를 거예요. 그래야 느낌이 살거든요.”
   임현지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하자 누군가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리며 우우하는 소리를 냈다.
   “라시아― 끼오 삐앙가 라 두 라 쏘으르떼―”
   임현지는 애들 앞에 서서 노래하는 게 민망하지도 않은가보다. 두 손을 배꼽 위에 올린 채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라시아 끼오 꼬끼오 이면지 꼬끼오!’
   어제까지의 나라면 큰소리로 외쳤을 것이다. 그러면 반 애들은 책상을 쾅쾅 두드리거나 배꼽을 잡으며 웃어대겠지. 애들은 잘난 척쟁이 임현지가 놀림 받는 걸 좋아한다.
   반 애들 중 임현지를 가장 잘 놀리는 건 나였다. 임현지가 그렇게 싫으냐고? 그건 아니다. 나는 임현지에게 특별히 나쁜 감정이 없다. 잘난 척하는 게 좀 재수 없긴 하지만 나에게 피해를 주는 건 없으니까. 그럼 왜 놀리느냐고?
   그냥…… 나는 4반 웃긴 애고, 그 별명이 좋기 때문이다.
   4반에 웃긴 애가 있다고 소문이 난 건 딱 일주일 전이었다. 그러니까 저번 화요일 음악 시간까지만 해도 나는 웃긴 애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조용한 애, 존재감 없는 애에 더 가까웠다.

*

   “다음 시간엔 공주 오디션을 볼 거예요. 공주는 가창력이 중요하니까 오디션에 참가하고 싶은 사람은 노래를 연습해오세요.”
   지난주 바로 이 시간 아이들은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부스럭거리며 짐을 쌌다. 나는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피해가기 위해 천천히 필통을 챙겼다.
   “야, 이면지 어딨어?”
   음악실을 나가려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5반 반장이었다.
   나는 음악실 구석에 놓인 상자를 가리켰다. 음악 선생님은 남는 인쇄물을 저곳에 놓는다. 연습장이 필요할 땐 여기서 이면지를 갖다 쓰라고 했던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저 박스 안에 있는 게 다 이면지야.”
   “뭐?”
   5반 반장이 벽을 짚으며 웃어댔다. 알려 달래서 알려줬더니 뭐가 웃긴 거지?
   이상한 건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였다. 애들은 나랑 5반 반장, 그리고 임현지를 번갈아 쳐다보며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5반 반장이 찾았던 건 이면지가 아니라 임현지였던 것이다.
   임현지는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보더니 음악실을 박차고 나갔다.

   그날 이후, 반 애들은 임현지를 ‘이면지’로, 나를 ‘웃긴 애’로 불렀다. 그동안 임현지를 얄미워했던 애들은 쉬는 시간마다 그날의 상황을 따라 해댔다. 가끔 나한테 재연을 요구하기도 했다. 처음에 나는 요구를 거절하지 못해 개미만 한 목소리로 이면지를 찾았다. 그런데 이것도 하다 보니 늘었다. 점점 애들의 시선이 무섭지 않았다. 임현지 놀리기는 내 주특기가 됐다.
   나는 임현지에게 미안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상황이 좋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애들이 나를 둘러싼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복도를 지나가다가 ‘쟤야, 4반에 웃긴 애!’ 하는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이란! 콜라를 원샷할 때보다 짜릿했다.
   그러나 이 짜릿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임현지가 종례 시간에 손을 들고 말했기 때문이다.
   “선생님, 하유민이 자꾸 제 앞에서 이면지를 찾는데요, 기분이 너무 나빠요.”
   그때도 반 애들은 큰 소리로 웃었다.
   “이면지를 찾는 게 뭐가 어때서?”
   “야, 나 수학 문제 풀게 이면지 좀 주라.”
   “이면지? 저기 있는 게 다 이면지잖아!”
   선생님은 누가 처음 이 말을 시작했는지 물었다. 아이들은 나를 가리켰다.
   “다른 사람의 이름을 가지고 놀리는 일은 잘못이에요. 이름은 그 사람을 대신하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이렇게 조롱하면 안 됩니다. 하유민, 나와서 정중히 사과하세요.”
   선생님은 처음 보는 엄한 표정으로 무기한 벌 청소를 내렸다. 임현지가 사과를 받아줘야만 끝나는 벌이었다.
   나는 온종일 임현지를 따라다니며 사과했다. 임현지는 네 시간이 지나서야 사과를 받아줬다. 2교시부터 6교시까지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풀렸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또 이면지라고 놀리기만 해봐. 너 때문에 웃느라 분위기 망치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에케― 쏘오오! 스피리― 라― 리베르타아!”
   약속을 했으니 나는 지금 가만히 임현지의 노래를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임현지의 노래가 길어질수록 반 아이들은 나를 쳐다보았다. 언제 놀리기 시작할 거냐는 뜻이었다. 나는 임현지와의 약속이 떠올라 손으로 엑스 모양을 만들었다. 그러자 애들이 시시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때였다.
   “점수 메모를 해야 하는데 종이가 없네. 누가 이면지 좀 가져다줄래?”
   아무것도 모르는 음악 선생님이 이면지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절호의 찬스였다.
   “이면지요? 선생님 옆에 있잖아요!”
   나는 기다렸다는 듯 참지 못하고 이면지를 놀렸다. 음악실은 웃음바다가 됐다. 선생님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술을 씰룩거렸다. 성공이다!
   박장대소하는 반 애들을 둘러보다가 임현지와 눈이 마주쳤다. 임현지는 나를 노려보더니 음악실 밖으로 나갔다. 이번에는 진짜로 화난 것 같았다.
   화날 만도 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한 걸 내가 또 해버렸으니…… 덕분에 오디션을 보기 좋게 망쳐버렸다. 그런데 예상외로 임현지는 종례 시간 내내 조용했다. 평소처럼 잘난 척을 하지도 않았다. 어깨가 축 처진 채로 음악 공책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갑자기 임현지에게 더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무사히 종례를 마치고 집에 가려는데 누군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임현지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눈빛이 얼마나 매섭던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날 왜 기다렸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내가 오디션을 망쳐서 화를 내러 온 걸 테다. 여기서 화를 돋우면 나는 또 무기한 청소 벌칙을 받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종례 시간 임현지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아니, 그게 말야…… 나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정말 선생님이 널 찾는 줄 알고…… 내가 왜 그랬지? 하하.”
   내가 변명하듯 말했지만 임현지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화가 잔뜩 난 모양이었다. 이윽고 임현지는 한숨을 크게 쉬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게 미안하면 부탁 하나만 들어줘.”
   임현지의 입에서 욕이 따다다다 나올 줄 알았는데 욕은커녕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 나왔다.
   “어떻게 하면 너처럼 될 수 있어? 너는 사 반 웃긴 애잖아.”
   임현지는 자기가 말해놓고도 민망한지 앞장서 걸었다. 나는 점점 벌어지는 간격을 좁히며 달려갔다.
   “너한테 그게 왜 필요한데?”
   “나는 웃기지 말란 법 있어? 재수 없는 애 이미지도 이제 지겹다고.”
   “너도 네가 재수 없는 거 알고 있었어?”
   “죽을래? 알려주기나 해. 이왕이면 족집게 과외처럼 핵심만 쏙쏙 뽑아서.”
   눈빛을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 나한테 개그 과외를 받겠다는 사람이 나타날 줄이야. 십이 년을 살았더니 별일이 다 생긴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임현지라니.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흠흠, 내가 나름대로 공부를 해봤거든?”
   임현지가 가방에서 공책 한 권을 꺼내며 말했다. 얼마나 많이 들춰본 건지 표지가 너덜너덜했다. 나는 공책을 받아들고 첫 장부터 읽어내려갔다.

   우리나라 개그의 역사: 한국의 원조 코미디언은 구봉서, 배삼룡, 서영춘이다. 그중에서 구봉서는 애드리브의 달인이었다. 뒤를 이어 이주일, 심형래가 뜨기 시작했는데, 이주일은 ‘콩나물 팍팍 무쳤냐!’같은 유행어를, 심형래는 〈영구야 영구야〉에서 ‘띠리리리리리― 영구 없다!’라는 유행어를 남겼다. 이주일이 만담 개그의 신이었다면 심형래는 슬랩스틱의 달인이었다. 마치 요즘 장도연이 말재주로 웃기고 박나래가 분장 개그로 웃기는 것처럼 말이다.

   공책에는 우리나라 개그의 역사부터 종류, 역대 공채 개그맨들의 이름과 유행어, 인터뷰 내용 등 개그에 관한 모든 것들이 백과사전처럼 적혀있었다. 정말 임현지다운 공책이었다.
   “내가 보기엔 너는 애드리브에 강한 것 같아. 그건 개그맨 구봉서 할아버지의 특기기도 해. 그분이 어쩌다 유명해진 줄 알아? 어떤 배우가 연극을 앞두고 도망가서 그 자리를 급하게 맡게 됐다는 거야. 당연히 연습을 안 했으니까 그 자리에서 다 지어내야 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
   “야, 개그를 글로 배우냐? 이러면 하나도 재미없어.”
   “그럼 어떻게 해? 넌 내 이름 하나로 웃긴 애가 됐으면서. 불공평해.”
   임현지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재수 없기만 한 줄 알았는데 반전의 모습이었다.
   “개그는 공부가 아니라 센스야.”
   “센스? 그건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데? 검색하면 나와?”
   임현지는 휴대폰으로 ‘센스 얻는 법’을 검색했다. 힐끔 보니 지난 검색기록엔 ‘웃기는 법’, ‘웃기는 애가 되는 법’ 등 노력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내 주특기가 즉흥 코미디였던 것처럼 너만의 주특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진짜 웃긴 퀴즈를 듣긴 했는데…… 큼큼.”
   나는 임현지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세상에서 고양이를 제일 싫어하는 동물은?”
   “글쎄, 뭔데?”
   “정답은 미어캣! 미워~캣! 이 개그는 고양이를 뜻하는 영어 ‘캣’이랑 ‘미워’를 말을 합친 개그인데……”
   “그만! 이렇게 설명하는 개그는 재미없다니까?”
   “안 웃겨? 그럼 다음 퀴즈. 어떤 사람이 밤에 잠을 자는데 모기 때문에 깬 거야. 그래서 모기를 막 째려봤지. 그랬더니 모기가 뭐라 그랬게?”
   나는 대답을 하는 대신 임현지를 빤히 쳐다보았다. 잠시 뒤 임현지는……
   “정답은 왱! 왜애애애앵― 왜애애애앵―”
   으악. 임현지는 조금도 웃지 않고 저런 개그를 내뱉었다. 우리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내 반응에 임현지도 머쓱했는지 조용히 머리를 긁적였다.
   “이상하다. 우리 아빠 말로는 직원들이 다 빵 터졌다던데……”
   “혹시 아빠가 부장님이셔?”
   “어떻게 알았어?”
   언젠가 맥주를 마시던 아빠가 그랬다. 부장님들은 어쩜 그렇게 재미없는 개그만 가져오는지 모르겠다고. 아빠는 이제 하나도 안 웃긴 개그를 듣고도 데굴데굴 구를 수 있을 만큼 연기가 늘었다고 했다. 그런 게 사회생활이라나 뭐라나.
   “씹느냐, 씹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렇게 말하면서 아빠는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었다. 오늘은 집에 가서 아빠네 부장님이 혹시 임 씨인지 물어봐야겠다.

   다음날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려는데 또 한번 임현지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임현지의 눈이 어제보다 초롱초롱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나도 이름 개그 해볼게. 이름하여 하유민 삼행시!”
   이번엔 또 어떤 이상한 개그를 가져왔을까? 듣기도 전인데 도망가고 싶었다.
   “하, 하늘에서 갑자기! 유, 유에프오가 떨어진다면? 민, 민첩하게 도망가세요!”
   임현지는 내 눈치를 보며 어디론가 도망가는 시늉을 했다.
   “큼큼, 이름 개그에 슬랩스틱을 접목해본 건데 어때?“
   나는 임현지와 나 사이에 얼음 냉장고가 있는 줄 알았다. 이렇게 차가운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니. 임현지와 함께라면 이번 여름이 겁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와, 하나도 안 웃겨서 웃겨. 넌 어떻게 이렇게 재미없는 것만 가져오냐?”
   “다시, 다시. 그럼 이건 어떤지 봐봐.”
   임현지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하, 하우두유두? 유, 유민이에게 경고합니다. 민, 첩하게 도망가세요!”
   임현지는 나를 톡 치더니 민첩하게 도망갔다. 자기가 해놓고도 웃긴 지 혼자 깔깔 웃었다.
   나한테도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번엔 내가 해볼게. 운 띄워주라.”
   “하”
   “하지 마, 임현지. 절대 하지 마.”
   “유”
   “유머 같은 거 제발 하지 마.”
   “……민?”
   “민망해 죽겠단 말야!”
   임현지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역시 임현지보다는 내가 한 수 위인 것 같다.
   “근데, 나 친구랑 집에 같이 가는 거 처음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친구가 많이 없기도 했고, 그나마 있는 친구들의 집 방향도 다 달랐기 때문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던 하굣길이 오늘따라 짧아진 것 같았다.
   “빤스가 한 장에 천 원! 둘이 입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아니, 두 명 입어도 한 명도 안 죽는 빤스가 천 원! 빤스가 천 원! 깜짝 세일입니다!”
   속옷 가게 아저씨가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팬티 한 장에 천 원이라는 말을 들은 동네 사람들이 허겁지겁 속옷 가게로 달려갔다.
   “풉!”
   우리는 눈을 마주치자마자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너는 왜 웃긴 애가 되고 싶은 거야?”
   내가 물었다.
   “저번에 말했잖아. 재수 없는 이미지는 지겹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공부 잘하는 애랑 발표 잘하는 애도 모자라서 웃긴 애까지 네가 하고 싶냐? 재수 없어.”
   “그런 거 아니거든? 사실 나는 개구리 캐릭터가 좋아. 사람들은 결국 우스꽝스러운 개구리의 모습도, 변신 후 왕자가 된 모습도 다 좋아해 줄 거 아냐.”
   “의외네. 네 성격상 개구리에는 관심 없을 줄 알았는데.”
   “개구리 오디션에는 자신 없어. 개구리는 팔짝팔짝 뛰면서 몸개그도 해야 되잖아. 내가 대사 암기 천재는 맞지만 몸개그까지 잘 할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임현지는 재수 없다.
   그때였다. 누군가 우리를 보더니 성큼성큼 걸어왔다.
   “임현지, 집 안 들어가고 뭐 하니? 아빠가 내준 한자 숙제는 다 했어?”
   썰렁 개그를 늘어놓는 황당한 아저씨를 상상했는데, 임현지네 아빠는 생각보다 무뚝뚝해 보였다. 사실 직원들은 무서움을 참기 위해 웃었던 게 아닐까?
   “안 그래도 들어가려고 했어요. 한자도 거의 다 외웠고요.”
   임현지가 얼른 가보라는 듯 손짓했다. 나는 곧장 아저씨께 인사한 후 발걸음을 옮겼다. 임현지와 아저씨의 대화가 점점 작게 들려왔다.
   “현지야, 우공이산이라고 했지. 오늘의 노력이 내일의 임현지를 만드는 거야.”
   “학원 숙제할 시간도 없단 말이에요. 숙제 좀 줄여주시면 안 돼요?”
   “말했잖아. 사장님 딸은 하루에 다섯 시간 자고 공부해서 서울대 갔다고. 초등학생 때 이미 필수 한자 3500개를 다 외웠대. 내 딸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임현지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가방을 메고 있는 것처럼.

   어쩌다 보니 우리는 약속을 따로 잡지 않아도 집에 같이 가는 사이가 됐다. 유머 감각에 있어서는 빵점인 임현지였지만 혼자인 것보다는 훨씬 더 재미있었다. 우리는 전날 본 개그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가 하면, 개구리 왕자 오디션 장면을 연습하기도 했다.
   “깨골개골― 개구울개굴! 깨굴!”
   내가 양 볼에 바람을 넣다 뺐다 하면서 개구리 소리를 내자 임현지가 깔깔 웃었다.
   “내가 한번 해볼게.”
   임현지는 무릎을 조금 굽히더니 뜀틀을 넘듯 팔짝팔짝 뛰었다. 손바닥을 펴서 얼굴에 댄 채로 말이다. 가끔은 혀를 날름거리기도 했다.
   “공주님, 낼름! 저는, 낼름! 신출귀몰, 낼름! 개구립니다, 낼름! 반가워요, 낼름!”
   “푸하하. 그게 뭐냐? 이건 개구리가 아니라 목도리도마뱀이잖아! 그것도 잘난 척 쟁이 목도리도마뱀.”
   “어딜 봐서? 이건 목도리가 아니라 울음주머니라구.”
   임현지는 공주 역에만 진심인 게 아니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목도리도마뱀인지 개구리인지를 흉내 내는 걸 보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얘한테 이런 면도 있었다니.
   “큰일이네. 이제 오디션도 얼마 안 남았는데.”
   임현지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분장하는 건 어때? 개구리처럼 말이야. 개구리가 된 임현지? 푸핫, 생각만 해도 웃기다.”
   “그런 걸 쪽팔리게 어떻게 하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임현지는 다시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임현지와 친해진 건 좋지만 동시에 고민이 생겼다. 임현지를 놀리지 않으니 내게 재밌다고 해주는 애들이 없어진 거였다. 임현지를 제외한 모두가 더이상 날 찾지 않았다. 나는 다시 ‘웃긴 애’에서 ‘존재감 없는 애’가 됐다. 일부러 우스꽝스럽게 넘어지기도 하고, 개그맨들이 하는 유행어를 따라 하기도 했지만 반응은 시시했다. 하루는 이런 말도 들었다.
   “하유민 쟤, 요즘 임현지랑 놀더니 좀 재미없어진 것 같지 않냐?”
   공부를 못한다는 말보다 재미없다는 말이 더 충격으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 재미없는 하유민이라는 말이 하루 종일 귓가에 맴돌았다.
   그날 집으로 오는 내내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고 임현지는 유난히 더 많이 종알거렸다.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다 쏟아내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거 알아? 개구리 중엔 하늘을 나는 애도 있대. 베트남에서 맨 처음 발견된 ‘헬렌 날개구리’라는 종인데, 다리에 물갈퀴가 달렸다는 거야. 그래서 날다람쥐마냥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
   “그만 좀 종알거려. 네가 이렇게 진지하니까 나까지 재미없어지는 거 아냐.”
   임현지는 가만히 땅을 쳐다보더니 집으로 들어갔다. 임현지네 집 대문이 쿵 소리와 함께 닫혔다. 내 마음도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사흘이 넘도록 나는 혼자 하교했다. 느린 걸음으로 집에 가고 있는데, 저번에 임현지와 지나갔던 속옷 가게가 보였다. 가게 문 앞에는 개구리 그림의 잠옷이 걸려있었다. 임현지가 생각났다.
   ‘임현지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무조건 웃어줬는데……’
   내일은 학교에 가서 임현지에게 말을 걸어야겠다고 다짐했다.

*

   교실이 소란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개구리 왕자 오디션 날이었다.
   “너도 해 보는 거 어때? 요즘 좀 감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개그 하면 하유민이잖아.”
   짝꿍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개구리를 하라고? 내가?”
   내가 하고 싶은 건 황금 공 역할이었다. 황금 공은 대사 한마디 없이 무대를 데굴데굴 구르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연습을 많이 할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개구리는 임현지가 찜해놓은 역할이었다.
   “아니, 난 별로……”
   내가 개미만 한 목소리로 말하자 애들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너처럼 웃긴 애가 개구리를 안 하면 누가 해? 이참에 네 몸개그 좀 보나 싶었는데.”
   그러자 갑자기 욕심이 생겼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웃긴 애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았다. 더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오디션 신청서를 작성했다.
   음악 시간이 되자 선생님은 신청서를 낸 순서대로 줄을 세웠다. 생각보다 많은 애들이 지원을 했지만 이길 자신이 있었다. 나는 사 반 웃긴 애니까.
   선생님은 지원자가 많으니 한 번에 두 명씩 나오라고 했다.
   이럴 수가, 임현지가 참가번호 11번, 내가 12번이었다. 아마 임현지도 마지막까지 고민을 하다가 신청서를 제출한 모양이었다. 그동안 개구리 오디션을 보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 임현지의 모습이 스치듯 떠올랐다.
   “자, 마지막 순서는 하유민이랑 임현지. 나와서 준비한 거 보여줄래?”
   임현지는 초록색 가방을 어깨에 멘 채 교탁 앞으로 나왔다. 그러더니 가방에서 꼬깃꼬깃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앞뒤 할 것 없이 연필 자국이 빼곡한 대본이었다.
   “임현지는 대본도 이면지에 쓴대요!”
   “이면지가 개구리 역할을 한다고? 그렇게 안 웃긴 개구리가 어딨냐?”
   “하유민 파이팅!”
   애들이 놀려대는 소리에도 임현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쩐지 내가 더 미안해졌다. 이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나 때문에 떨어지면 얼마나 속상할까?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임현지가 아니라 나였다. 대본도 준비하지 않았으니 그만큼 더 열심히 웃기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며칠 전에 임현지 앞에서 선보였던 개구리 흉내를 내기 위해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때였다.
   “쟤 뭐야? 푸하하. 진짜 웃겨. 대박!”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웃기다는 건가? 나는 기대하며 고개를 들었다.
   바로 눈앞에 생각지도 못한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임현지는 초록색 망토를 두른 것도 모자라 초록색 수영모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어찌나 꼼꼼하게 쓴 건지 머리카락이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수영모 때문에 눈이 위로 삐쭉 올라가 있는 건 덤이었다. 매끈한 모자를 쓰고 있으니 진짜 개구리 같아보였다.
   “푸하하하!”
   모두가 웃어대는데도 임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개구리가 될 준비를 마쳤다.
   “시작해볼까?”
   음악 선생님의 말씀이 떨어지기도 무섭게 임현지가 폴짝 뛰어올랐다. 연습을 엄청 했는지 저번보다 점프 실력이 늘어있었다. 개구리 임현지가 내 배꼽 높이까지 점프했다. 개굴개굴 소리를 내면서.
   나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개구리 역할을 따내야 한다는 생각도 잊은 채 임현지를 구경했다. 임현지는 여전히 진지했다.
   “공주님, 저랑 결혼하기로 한 걸 잊으셨나요? 깨굴깨굴!”
   오디션이 끝날 때까지 나는 대사 한마디 내뱉지 못하고 자지러질 수밖에 없었다. 내 차례 때도 마찬가지였다. 웃느라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반 애들도 내가 임현지 이름으로 실수를 했을 때보다 더 크게 웃었다. 평상시에 그렇게 잘난 척만 하던 임현지가 저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있으니 그럴 만했다.
   “푸흡. 다. 다들 현지가 개구리 역할 하는 것에 찬, 성하지?”
   선생님이 가까스로 웃음을 참고 말했다. 애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쟤 원래 저렇게 웃긴 애였냐?”
   애들이 말하는 ‘쟤’는 내가 아니라 임현지였다. 어떤 애들은 임현지에게 다가가 다시 한번 팔짝 뛰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임현지는 거절하지 않고 열심히 개구리 흉내를 냈다.
   “야, 하유민!”
   임현지 개구리가 날 불렀다.
   “나 이제 제자로 충분하지?”
   나는 울다가 웃는 걸 반복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임현지 개구리는 그제야 수영모를 벗고 내 친구 임현지로 돌아왔다. 개그를 알려달라고 왔을 때처럼 초롱초롱한 눈빛의 임현지였다.

   오랜만에 하굣길이 즐거웠다.
   임현지는 평소보다 더 말이 많았다. 그중에 반은 역시 자기 자랑이었다.
   “아까 애들 표정 봤지? 나 보면서 웃느라 정신을 못 차리더라. 하긴, 나 같은 모범생이 그런 연기까지 잘할 줄 누가 알았겠어. 별것도 아니긴 했지만.”
   “그 정돈 아니었거든?”
   “아니긴. 완전 빵 터지던데. 넌 대사 한 마디 없는 황금 공 역할 맡게 돼서 어쩌냐? 오디션 다시 보자고 할까? 나한테 개구리 개그 좀 배울래?”
   며칠 전만 하더라도 나한테 개그를 알려달라고 한 게 누군데.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웃음이 났다.
   “어이!”
   골목을 돌아서는데 누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 맞지? 4반에 웃긴 애.”
   우리는 대답하는 대신 그 애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 이름은 백두병. 10반에 웃긴 앤데, 혹시 시간 좀 있어? 다음 주에 청소년 개그 축제 오디션이 있거든. 같이 나가볼까 하고.”
   그 애가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아직 사반 웃긴 애가 하유민이라는 공식은 깨지지 않았나 보다. 어깨가 으쓱했다. 나는 최대한 진지해 보이고 싶어서 목청을 가다듬고 말했다.
   “큼큼. 내가 요즘 바빠서 말야. 스케줄 좀 확인해야 할 것 같은데.”
   말하고 나니 조금 재수 없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임현지한테 강력한 무언가가 있는 게 틀림없다. 재미없는 것에 전염된 것도 모자라 재수 없는 것도 닮아가는 모양이다.
   “뭐래? 너 말고 쟤. 4반에 진짜 웃긴다고 소문난 애 있잖아. 이름이 임현지랬나?”
   백두병이 임현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임현지가 나랑 백두병을 번갈아 쳐다보며 깔깔 웃었다.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어쩌지? 난 파트너가 따로 있는데.”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임현지가 내 손을 덥석 잡아버린 것이다.
   내 역할은 분명 황금 공인데, 새빨간 공이 되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김소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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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8
3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