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콩 심은 데 팥
골목이 휘청 굽는다. 가게들이 비스듬히 눕는다. 땅이 찌걱찌걱 갈라지더니 ‘영아 미용실’ 앞에서 나란히 봄볕을 쬐던 꽃들이 그 사이로 툭툭 떨어진다. '이걸 어째!' 하며 영아 엄마가 가위를 손에 든 채 뛰쳐나오다가 끝을 알 수 없는 시커먼 틈 사이로 풍 빠져버린다. 개 오줌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담벼락들도 감자 으깨지듯 뭉그러져 사라져버린다. 오늘 세상은 끝났다.
나는 상상했다. 큰 지진이 나서 우리 동네만 세상에서 쏙 사라져버리면 되지 않을까? 하고. 잠깐 그런 공상에 빠졌다. 숙제를 안 해간 날, 오늘 하루만 선생님이 어이쿠야, 하고 쓰러지면 좋겠다 했을 때처럼 간질간질하고 조금은 뾰족한 마음으로.
하지만 엄마를 생각하면 그건 안 될 것 같다.
엄마는 아홉 살 때 지진을 겪은 적이 있다고 했다. 대낮에 집에서 할머니와 우동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미닫이 창문이 쩍 하고 깨졌더랬다. ‘왜?’와 ‘어떡하지?’를 생각하는 짧은 시간에 할머니가 갑자기 엄마의 우동 그릇을 홱 낚아챘다. 동시에 우동의 뜨거운 국물이 할머니 가슴팍에 쏟아지고 찬장 선반에 나란히 놓인 접시들이 뒤에서 누가 밀기라도 하듯이 뛰어내렸다.
할머니는 국물을 닦을 새도 없이 엄마를 안고 식탁 밑으로 들어갔다. 어디선가 우지끈 쩌어억! 소리가 이어졌다. 흔들림이 완전히 멈출 때까지 할머니가 엄마를 너무 꼭 끌어안고 있어서, 엄마는 할머니 가슴에 쏟아진 국물의 뜨거움이 그대로 등으로 전해졌다고 했다. 몸이 오들오들 떨려서, 지진이 끝났다는 것도 한참 뒤에야 알아챘다.
“세상이 끝나는 날 같았어.”
엄마는 그뒤로 놀이기구는 하나도 타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바닥이 흔들리고 핑핑 도는 건 모조리 기겁을 하고 물러났다. 그뒤로도 몇 번 더 지진을 겪었다. 엄마는 도저히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가 없어서 고향을 떠나 멀리멀리 가는 것이 꿈이었다고 했다.
그날 이후 할머니는 가슴에 낙엽 모양의 화상 자국을 갖게 되었다. 엄마가 기타를 치고 살겠다고 한 날과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산적 같은 남자(지금은 우리 아빠)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한 날, 할머니는 엄마 손을 가만히 잡으셨다. 그 손을 화상 자국이 있는 할머니의 가슴에 갖다대셨다고 했다. 할머니 가슴엔 또 한 번 지진이 일어났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아무리 이어붙여도 오늘따라 집에 가는 길이 너무 짧게 느껴진다. 센터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다가 나왔는데도 그렇다. 시베리아 벌판을 천천히 달리는 횡단 열차처럼 집에 가는 길이 열흘쯤으로 길어졌으면 좋겠다. 한여름의 전깃줄처럼 길이 축축 늘어졌으면 좋겠다.
영아는 왜 그런 소리를 해가지고 날 이렇게 곤란하게 만드는 걸까?
사실 짐작이 가는 이유가 있긴 하다. 일주일 전에 영아가 새로 산 내 신발을 보고 예쁘다고 하면서 계속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자꾸 내 신발만 쳐다보니까 발꿈치를 덮는 부분이 해질 정도로 꺾어 신은 지 오래된 영아의 신발이 마음에 걸렸다. 영아는 여동생이 둘이나 있고 언니도 한 명 있어서 언니의 신발이 작아지기 전까지는 신발을 바꿀 수가 없다. 그런데 영아네 언니는 키가 천천히 자라서 신발이 작아지지 않는다. 영아가 고기 반찬을 양보하고 스트레칭 하는 법도 가르쳐주었는데도 그렇다. 그래서 영아는 체육 시간에 자꾸 아프다고 하고 쉰다.
영아의 그런 마음을 알고 있어서 난 너무 신경이 쓰인 나머지,
“이거 진짜 싸구려고 거지같은 거야. 메이드 인 차이나거든!”
하고 말해버렸다. 영아의 얼굴과 내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알고 있는 낱말들이 모조리 깨져서 우주 밖으로 휭휭 날아가버렸다. 누군가가 지구에 커다란 진공청소기를 대고 말을 다 빨아들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멍하게 서 있는데 영아가 홱 돌아서면서 한마디 뱉었다.
“자기도 원숭이 주제에.”
그 말은 나도 참을 수 없었다. 전쟁이다. 영아랑 한마디도 하지 않은 건 그날부터였다.
봄볕이 바람을 만나면 무엇이 될까?
정답은 ‘엄마의 노래’이다. 겨울방학 내내 먼지가 덮여 있던 엄마의 기타가 빛을 보는 계절이다. 오죽 봄을 좋아하면 내 이름도 일본어로 봄을 뜻하는 말로 지었을까.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엄마는 아직 피지도 않은 벚나무 밑을 서성이며 자작곡을 흥얼거린다. 그러면 아빠는 기타를 메고 엄마가 흥얼거린 노래의 음을 하나하나 따서 악보를 만든다. 매일 노래 하나씩 뚝딱 만들어지는 봄날이다.
오늘도 ‘필’이 가득한 엄마가 기타를 치고 있는 모습이 가게의 통유리 너머로 훤히 들여다보인다. 손님은 아무도 없다. 그래도 엄마는 환한 얼굴이다. 엄마는 어떻게 매일매일 따뜻해 보일 수 있을까?
가게 문을 여니 문 위에 달린 종이 자랑자랑 울린다. 우동 면이 폭폭 삶기는 촉촉한 냄새가 가게를 가득 채우고 있다. 육수가 끓으면서 냄비 뚜껑을 마구 밀어내는 소리가 들린다. 내 마음에서도 뭔가가 끓고 있는 것만 같다.
“하루야, 너도 먹을래?”
삶은 면을 체에 걸러 얼음물에 헹구면서 아빠가 물었다. 아빠 손은 벌겋고 군데군데 굳은살이 박여 있다. 손만 보면 칠십대 농부 아저씨 같다.
“아니.”
난 고개를 저었다.
아빠가 삶아주는 우동은 쫄깃쫄깃하고 탱글탱글해서 면발을 쭈우욱 빨아당기면 면발의 끝이 뺨을 찰싹 튕기곤 한다. 명태와 다시마와 멸치만 우글우글 사는 커다란 바다를 졸이고 졸여서 한 그릇 안에 부어넣은 것 같은 국물 맛도 최고이다. 눈이 폭폭 쏟아지는 날에 그런 국물을 먹으면 분명 뜨거운 물을 마시는 건데도 새파랗게 시원한 바다가 통째로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만 같다. 국물의 시원한 맛을 알기에는 열두 살은 아직 어리다고 아빠는 핀잔을 주면서도 흐뭇한 표정을 숨기지는 않는다. 엄마도 파도가 찰싹찰싹 치듯이 국물이 몸속을 찰싹찰싹 쳐서 잠을 깨워주는 것 같다고 자작곡 ‘우동 속의 바다’에서 말했다.
그 국물 위에 엄마의 특제 비법으로 튀긴 가지와 연근을 하나씩 올려 간장을 부어 먹는다. 간장도 그냥 간장이 아니다. 할머니는 조상 대대로 궁중요리 비법을 전수받은 분이셔서 종자 간장이라 불리는 아주 오래된 간장을 갖고 있으신데, 역사가 무려 이백 년이나 되었다. 엄마가 집을 나올 때 몰래 훔쳐온 그 종자 간장에 매해 새로 만든 간장을 조금씩 풀어서 맛의 역사를 이어간다. 짠맛, 단맛으로 표현할 수 없는 맛이라는 게 있다는 걸 나는 간장이 사르르 녹아든 국물을 먹으면서 알았다. 아주 맑은 가을날의 밤하늘을 뚝 떼어다가 국물에 섞어놓은 것만 같다. 서늘한 별과 은은한 달과 코끝이 찡한 공기가 한 숟가락에 모두 들어 있는. 언제 먹어도 질릴 수 없는 아빠의 특제 우동!
그러니 내가 이렇게 맛난 우동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엄마, 아빠가 동시에 놀랄 일이다.
“하루, 무슨 일 있어?”
무슨 일 있다.
“엄마, 학교 좀 와줄 수 있어?”
엄마가 눈을 둥그렇게 하고서는 기타를 내려놓았다. 기타가 지르는 비명소리가 웅웅 울렸다.
오늘 한국사 수업 시간에서였다. 따분해서 모두들 하품을 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갑자기,
“독도는 누구 땅인지 아는 사람?”
하고 우리를 둘러보았다.
“우리 땅이죠!”
당연한 대답이 동시에 나왔다.
“이렇게 당연한테 왜 일본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길까?”
그 질문에 모두 다퉈가며 외쳤다.
“독도 밑에 자원이 풍부해서요.”
“더 넓은 바다를 자기네 걸로 갖게 되니까요.”
“그냥 못 살게 구는 거 아니에요?”
“대마도도 우리 땅 하면 안 돼요?”
여기저기서 친구들이 손을 들었다.
“그 이유는,”
선생님이 교탁을 탁 내리치며 뜸을 들였다가 말씀하신 한마디 때문에 나는 들끓는 용암 속에 가라앉는 깃털 하나처럼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고 싶어졌다.
“사실 일본인은 다 나쁜 놈들이어서 그렇다.”
친구들이 맞다, 맞다 하며 박수를 쳤다. ‘쪽’으로 시작하는, 일본인을 얕잡아 부르는 욕을 내뱉는 친구도 있었다. 부반장인 희민이였다. 아이들이 책상을 탕탕 치며 웃었다. 선생님은 욕을 한 친구에게 벌점을 주지 않았다. 희민이는 평소에 일본 애니메이션을 무척 즐겨보는 친구였다. <원피스>부터 <나루토>와 <코난>까지 정주행을 마친 애였다. 우리 나이에는 보면 안 되는 <진격의 거인>을 다운 받아볼 수 있는 사이트를 자랑스럽게 알려준 것도 쟤였다. 일본어도 몇 마디씩 할 줄 알았다. 모두 이상한 뜻의 말들이었는데, 뭣도 모르고 엄마에게 뜻을 물어봤다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엄마가 어디서 본 말이냐고 꼬치꼬치 물어본 적이 있었다. 어쨌든 우리 반에 일본어가 유행처럼 번진 것은 희민이 때문이었다. 겨울방학 때 나가사키에 있는 놀이공원에 가서 그곳의 호수 위에 전시된, 애니메이션에 나온 유람선을 타고 오겠다고 큰소리를 치던 것도 희민이였다. 모두가 희민이를 부러워했다. 오는 길에 샤프와 지우개 좀 부탁해, 하고 말을 걸던 친구들도 많았다.
뇌에 쥐가 나서 웅웅거리는 느낌이었다. 선생님은 어떤 점에서 일본인이 나쁜 사람인지 일본인이 한 인체 실험과 고문, 강제징집 같은 끔찍한 역사를 하나하나 들려주었다. 온몸이 오그라들 정도로 소름이 돋는 일들이었다. 너무 잔인한 범죄들로 가득했다. 소설이나 영화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역사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서로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을 텐데 무슨 미움이 생겨서 때리고 죽이고 고문했을까? 그들에게도 비슷하게 생긴 가족이 있었을 텐데. 찌르면 아프고 못 살게 굴면 괴로워하는 것은 모두가 똑같았을 텐데. 열두 살의 내가 아는 것을 왜 당시의 사람들은 몰랐던 걸까. 알고도 그랬다면, 그건 너무 무서운 일이다.
“과거사라고 부르지만 이건 현재진행형이야.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은 역사란다.”
스물네 살의 젊고 멋지고 언제나 환한 표정이셨던 선생님의 하얀 이마에 핏줄이 불끈거렸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주에 있을 학부모 일일 교사 체험에서는 너희 역사 인식을 더 키울 수 있도록 한국과 일본의 역사에 관해 다루어볼 거다. 누구 부모님이 해주실 수 있을까?”
그 순간 나는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영아가 손을 번쩍 든 것이다.
“선생님! 하루네 엄마가 아티스트인데요, 무대 경험이 많아서 수업도 잘 하실 것 같아요. 추천해요!”
내가 놀란 눈으로 돌아보자 영아가 속삭였다.
“메이드 인 차이나의 복수다.”
영아를 만난 곳은 우리 동네의 아동 센터였다. 영아와 나는 다문화가정 어린이로 분류되어 관리를 받았다. 엄마 아빠가 가게 일과 곡 작업으로 바쁜 방과 후 시간에 나를 돌봐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아빠는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고 엄마의 부모님은 일본에 계셔서 나를 맡아줄 수 없다. 다른 아이들도 대개 동남아시아 출신의 엄마가 있거나 한쪽 부모 혹은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자라는 경우와 아동 센터에서가 아니면 저녁을 먹을 수 없는 형편의 환경에 살아서 들어왔다. 누가 굳이 말해준 적이 없는데도 다들 무슨 ‘사유’로 방과 후 시간을 센터에서 보내는지 눈치껏 형편을 알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친해지는 과정에서 서열이 생겼다. 마치 중요한 순서를 정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어딜 가든 1번이 생기고 그룹이 나뉘고 친구와 친구 사이에 계단의 개수가 정해진다. 친해지려면 감당해야 하는 거리 같은 것 말이다. 영아와 나는, 나라의 이미지 때문에 서열이 갈렸다. 나는 선진국인 일본에서 온 좀더 나은 아이가 되고, 영아는 친구들에게는 별로 인기 없는 나라인 중국에서 온 아이가 되어버렸다. 우리 엄마도, 영아네 엄마도, 연애결혼을 한 건 똑같은데 아이들은 영아한테만 엄마 얘기로 놀렸다. 영아 엄마는 연변 출신의 조선족이 아니라 베이징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족인데도, 아이들은 어눌한 말투로 보이스 피싱 흉내를 냈다. 영아네 집 그 누구도 그런 말투를 쓰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러면 영아는 엄마 없이 사는 애들을 놀렸다. 서로 마음을 할퀴다가 울곤 했다. 외부 센터에서 상담 선생님이 오셔서 집단 상담을 반복 하고나서야 그런 일이 줄어들었다.
나는 친구들이 그런 일로 싸우는 게 이상했다. 나나 영아나 생김새나 말투, 생각이 다를 게 없다. 숟가락, 젓가락을 쥐는 법도 노트에 글씨를 적는 방향도 선생님께 인사하는 방법도 비슷비슷하다.
나는 다문화가정이라는 것도 사람들이 굳이 그렇게 불러서 알게 되었을 뿐인데, 영아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태풍 부는 날 다 익은 야자수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 아래 혼자 서 있는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왜 자꾸 다문화, 다문화 하면서 나누는 거야? 난 한국에서 태어났는데! 한국 어린이인데. 한국 이름을 쓰고 한국어를 쓰고 한국에서 사는데 또 뭐가 더 필요한 거야? 내 얼굴에 다문화라고 적혀 있니? 쳇!”
“기분 나빠? 난 상관없는데. 특별해 보이기도 하고.”
“넌, 넌 좋은 나라에서 와서 내 마음 몰라.”
“중국이 얼마나 크고 멋진 나라인데. 역사도 엄청 깊고. 우리 아빠가, 전 세계가 무서워하면서 눈치보는 나라가 중국이랬어. 종이랑 나침반, 화약, 인쇄술 전부 다 중국에서 발명한 거래. 달러랑 중국 돈이랑 비슷하게 알아줄 만큼 잘 사는 나라랬어.”
“그럼 뭐해. 그런 걸 애들이 알아줘야지. 내가 어른들이랑 친구할 것도 아닌데! 흥. 기왕 혼혈일 거면 엄마가 미국이나 영국 사람이면 좋을 것 같아. 똑같은 다문화여도 그런 애들은 얼굴도 예쁘게 태어나서 연예인도 할 수 있고, 잘 사는 나라에서 오면 무시하지도 않잖아.”
“엄마가 ‘미국에도 거지 있고 영국에도 도둑놈 있다’고 했어.”
“그건 무슨 말이야?”
“뭐, 100퍼센트 좋기만 한 나라는 없다는 거 아닐까?”
그래도 영아는 씩씩 화를 냈다. 영아는 놀림을 받은 날에는 꼭 나를 불러서 일본은 얼마나 잘사는 나라인지 물어보고 또 물어보았다. 나는 일본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내가 일본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그쳐 물었다. 헤어지기 전에는, 그래도 중국이 미국 다음으로 힘이 센 건 맞지 하고 중얼거리다가 혼자 뛰어갔다. 영아의 그 마음을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혼자 섬이 된 것 같은 마음을.
작년에 있었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작년 여름, 일본에서 할머니가 사시는 곳 근처에 대지진이 나서 통신이 끊겼다. 엄마가 발을 동동 구르는 걸 보다가 나 혼자 포털사이트에 기사를 검색해본 적이 있었다. 지진에 관련된 기사 밑 댓글에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요’나 ‘공감’ 버튼을 눌러서 베스트 댓글로 뽑힌 글들이 한눈에 보였다.
-이게 다 인과응보다. 우리한테 나쁜 짓을 그렇게 했으니 죽어도 싸지!
-도쿄에는 지진 안 나나?
-하나님 드디어 제 기도를 들어주셨군요. ㅋㅋㅋ
-속이 다 시원하다! 아예 가라앉아버려!
-관동대학살의 복수, 조상님들이 저승에서 웃고 계실 듯.
다친 사람들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댓글은 한참을 읽어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가 엄마를 끌어안고 식탁 밑으로 들어가는 순간을 계속 상상해보았다. 할머니를 본 적이 오래되어서 상상 속의 얼굴이 비어 있기 때문에 옆집 할머니의 얼굴로 바꿔서 상상했다. 흔들리는 식탁이 무섭고 깨진 유리창 사이로 부는 바람이 두렵고 도란도란 밥을 먹던 공간이 무너지는 것이 싫은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할머니가 일본 사람이라고 해서 그 마음이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 엄마가 일본인이라고 해서 죽어도 된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내 얘기를 다 듣고 아빠 엄마는 동시에 한숨을 푹, 쉬었다.
“학교에서 그런 일이 있었구나.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하루야, 엄마가 가서 수업해도 되겠어?”
“엄마는 괜찮겠어?”
“엄마가 일본 정부를 대표하는 사람도 아니고, 엄마가 누군가를 고문하거나 죽인 적도 없어. 엄만 아주 작은 한 사람이고, 나라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똑같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하루는 엄마 믿지?”
그건 말하지 않아도 잘 안다. 엄만 파리 한 마리 못 죽인다. 꽃도 꺾지 않는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함부로 망가뜨리지 않는 게 엄마의 규칙이다. 어릴 때 나비의 날개를 찢으며 놀다가 엄마한테 엄청 혼난 적이 있어서 그건 내가 더 잘 안다.
“하지만 엄마의 뿌리에는 일본이 있으니까 내가 이야기하는 역사도 의미 있지 않을까? 엄마도 마음이 아프다고 말할 거야.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라고 이야기할 거야. 그리고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나 같은 일본인도 있으니까, 미래가 있다고 말할 거야. 다만, 하루 네가 상처 받는 일이 생길까봐 걱정이 돼.”
나는 희민이가 주도해서 나를 뭐라고 놀릴지 상상이 되었다. ‘쪽’으로 시작하는 그 욕을 붙여 부를 게 뻔하다. 필통 안에는 일본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학용품들이 가득하면서 처음부터 일본을 싫어했던 것처럼, 나를 미워했던 것처럼 변할 아이들의 얼굴이 그려졌다.
캐릭터 상품과 일본이 저지른 만행은 멀리 있는 걸까, 가까운 걸까. 나는 어디까지 밀려나게 될까. 센터 출신의 몇몇만 알고 있던 내 이야기가 공개되는 날,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꼬리표가 붙여진 채로 이 작은 동네에서 오래오래 살아갈 생각을 하면, 나도 엄마처럼 먼 곳으로 떠나버리고 싶어진다.
하지만 내가 나 자신만으로도 특별한 존재라는 것, 내가 어떤 옷을 입든지 어떤 언어를 쓰든지 상관없이 나는 소중하다는 것을 난 알고 있다. ‘꽃도 나무도 새도 너도 나도 모두 다 좋다. 바람이 만지고 가는 존재는 다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우리는 다 좋다.’ 엄마가 만든 노래에 나온 가사를 떠올렸다.
엄마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눈빛에서 내게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엄마의 마음이 반짝이고 있다.
나도 엄마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슬픔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다. 엄마는 언제나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롭게 살자는 주제의 노래를 지어 아빠와 함께 불렀다. 가을에 열리는 산사음악회에서 그런 노래들을 연주하기도 했고, 가끔 도시로 나가 거리에서 기타를 치면서 사람들에게 평화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런 곳에서는 아무도 엄마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내가 아는 엄마는 사람들이 미워하는 일본인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엄마의 노래를 들을 때, 엄마는 그냥 우리 엄마가 될 수 있었다.
폭폭 삶기는 우동 냄새가 가게 안을 가득 채웠다. 통유리에 보얗게 김이 서려 바깥 풍경을 모두 지워버렸다. 밖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게 안에 뭐가 있는지 보려면 슥삭슥삭 천으로 닦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여길 볼 수 없다. 이렇게 도란도란, 행복한 우리 가족을 볼 수 없다.
봄볕이 창문을 두드린다. 엄마가 기타를 치는 소리가 용기를 준다. 나는 소매로 창문을 닦아냈다. 마음에 봄볕이 가득 쏟아져들어와 하루가 환해진다.
나는 상상했다. 큰 지진이 나서 우리 동네만 세상에서 쏙 사라져버리면 되지 않을까? 하고. 잠깐 그런 공상에 빠졌다. 숙제를 안 해간 날, 오늘 하루만 선생님이 어이쿠야, 하고 쓰러지면 좋겠다 했을 때처럼 간질간질하고 조금은 뾰족한 마음으로.
하지만 엄마를 생각하면 그건 안 될 것 같다.
엄마는 아홉 살 때 지진을 겪은 적이 있다고 했다. 대낮에 집에서 할머니와 우동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미닫이 창문이 쩍 하고 깨졌더랬다. ‘왜?’와 ‘어떡하지?’를 생각하는 짧은 시간에 할머니가 갑자기 엄마의 우동 그릇을 홱 낚아챘다. 동시에 우동의 뜨거운 국물이 할머니 가슴팍에 쏟아지고 찬장 선반에 나란히 놓인 접시들이 뒤에서 누가 밀기라도 하듯이 뛰어내렸다.
할머니는 국물을 닦을 새도 없이 엄마를 안고 식탁 밑으로 들어갔다. 어디선가 우지끈 쩌어억! 소리가 이어졌다. 흔들림이 완전히 멈출 때까지 할머니가 엄마를 너무 꼭 끌어안고 있어서, 엄마는 할머니 가슴에 쏟아진 국물의 뜨거움이 그대로 등으로 전해졌다고 했다. 몸이 오들오들 떨려서, 지진이 끝났다는 것도 한참 뒤에야 알아챘다.
“세상이 끝나는 날 같았어.”
엄마는 그뒤로 놀이기구는 하나도 타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바닥이 흔들리고 핑핑 도는 건 모조리 기겁을 하고 물러났다. 그뒤로도 몇 번 더 지진을 겪었다. 엄마는 도저히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가 없어서 고향을 떠나 멀리멀리 가는 것이 꿈이었다고 했다.
그날 이후 할머니는 가슴에 낙엽 모양의 화상 자국을 갖게 되었다. 엄마가 기타를 치고 살겠다고 한 날과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산적 같은 남자(지금은 우리 아빠)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한 날, 할머니는 엄마 손을 가만히 잡으셨다. 그 손을 화상 자국이 있는 할머니의 가슴에 갖다대셨다고 했다. 할머니 가슴엔 또 한 번 지진이 일어났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아무리 이어붙여도 오늘따라 집에 가는 길이 너무 짧게 느껴진다. 센터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다가 나왔는데도 그렇다. 시베리아 벌판을 천천히 달리는 횡단 열차처럼 집에 가는 길이 열흘쯤으로 길어졌으면 좋겠다. 한여름의 전깃줄처럼 길이 축축 늘어졌으면 좋겠다.
영아는 왜 그런 소리를 해가지고 날 이렇게 곤란하게 만드는 걸까?
사실 짐작이 가는 이유가 있긴 하다. 일주일 전에 영아가 새로 산 내 신발을 보고 예쁘다고 하면서 계속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자꾸 내 신발만 쳐다보니까 발꿈치를 덮는 부분이 해질 정도로 꺾어 신은 지 오래된 영아의 신발이 마음에 걸렸다. 영아는 여동생이 둘이나 있고 언니도 한 명 있어서 언니의 신발이 작아지기 전까지는 신발을 바꿀 수가 없다. 그런데 영아네 언니는 키가 천천히 자라서 신발이 작아지지 않는다. 영아가 고기 반찬을 양보하고 스트레칭 하는 법도 가르쳐주었는데도 그렇다. 그래서 영아는 체육 시간에 자꾸 아프다고 하고 쉰다.
영아의 그런 마음을 알고 있어서 난 너무 신경이 쓰인 나머지,
“이거 진짜 싸구려고 거지같은 거야. 메이드 인 차이나거든!”
하고 말해버렸다. 영아의 얼굴과 내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알고 있는 낱말들이 모조리 깨져서 우주 밖으로 휭휭 날아가버렸다. 누군가가 지구에 커다란 진공청소기를 대고 말을 다 빨아들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멍하게 서 있는데 영아가 홱 돌아서면서 한마디 뱉었다.
“자기도 원숭이 주제에.”
그 말은 나도 참을 수 없었다. 전쟁이다. 영아랑 한마디도 하지 않은 건 그날부터였다.
봄볕이 바람을 만나면 무엇이 될까?
정답은 ‘엄마의 노래’이다. 겨울방학 내내 먼지가 덮여 있던 엄마의 기타가 빛을 보는 계절이다. 오죽 봄을 좋아하면 내 이름도 일본어로 봄을 뜻하는 말로 지었을까.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엄마는 아직 피지도 않은 벚나무 밑을 서성이며 자작곡을 흥얼거린다. 그러면 아빠는 기타를 메고 엄마가 흥얼거린 노래의 음을 하나하나 따서 악보를 만든다. 매일 노래 하나씩 뚝딱 만들어지는 봄날이다.
오늘도 ‘필’이 가득한 엄마가 기타를 치고 있는 모습이 가게의 통유리 너머로 훤히 들여다보인다. 손님은 아무도 없다. 그래도 엄마는 환한 얼굴이다. 엄마는 어떻게 매일매일 따뜻해 보일 수 있을까?
가게 문을 여니 문 위에 달린 종이 자랑자랑 울린다. 우동 면이 폭폭 삶기는 촉촉한 냄새가 가게를 가득 채우고 있다. 육수가 끓으면서 냄비 뚜껑을 마구 밀어내는 소리가 들린다. 내 마음에서도 뭔가가 끓고 있는 것만 같다.
“하루야, 너도 먹을래?”
삶은 면을 체에 걸러 얼음물에 헹구면서 아빠가 물었다. 아빠 손은 벌겋고 군데군데 굳은살이 박여 있다. 손만 보면 칠십대 농부 아저씨 같다.
“아니.”
난 고개를 저었다.
아빠가 삶아주는 우동은 쫄깃쫄깃하고 탱글탱글해서 면발을 쭈우욱 빨아당기면 면발의 끝이 뺨을 찰싹 튕기곤 한다. 명태와 다시마와 멸치만 우글우글 사는 커다란 바다를 졸이고 졸여서 한 그릇 안에 부어넣은 것 같은 국물 맛도 최고이다. 눈이 폭폭 쏟아지는 날에 그런 국물을 먹으면 분명 뜨거운 물을 마시는 건데도 새파랗게 시원한 바다가 통째로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만 같다. 국물의 시원한 맛을 알기에는 열두 살은 아직 어리다고 아빠는 핀잔을 주면서도 흐뭇한 표정을 숨기지는 않는다. 엄마도 파도가 찰싹찰싹 치듯이 국물이 몸속을 찰싹찰싹 쳐서 잠을 깨워주는 것 같다고 자작곡 ‘우동 속의 바다’에서 말했다.
그 국물 위에 엄마의 특제 비법으로 튀긴 가지와 연근을 하나씩 올려 간장을 부어 먹는다. 간장도 그냥 간장이 아니다. 할머니는 조상 대대로 궁중요리 비법을 전수받은 분이셔서 종자 간장이라 불리는 아주 오래된 간장을 갖고 있으신데, 역사가 무려 이백 년이나 되었다. 엄마가 집을 나올 때 몰래 훔쳐온 그 종자 간장에 매해 새로 만든 간장을 조금씩 풀어서 맛의 역사를 이어간다. 짠맛, 단맛으로 표현할 수 없는 맛이라는 게 있다는 걸 나는 간장이 사르르 녹아든 국물을 먹으면서 알았다. 아주 맑은 가을날의 밤하늘을 뚝 떼어다가 국물에 섞어놓은 것만 같다. 서늘한 별과 은은한 달과 코끝이 찡한 공기가 한 숟가락에 모두 들어 있는. 언제 먹어도 질릴 수 없는 아빠의 특제 우동!
그러니 내가 이렇게 맛난 우동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엄마, 아빠가 동시에 놀랄 일이다.
“하루, 무슨 일 있어?”
무슨 일 있다.
“엄마, 학교 좀 와줄 수 있어?”
엄마가 눈을 둥그렇게 하고서는 기타를 내려놓았다. 기타가 지르는 비명소리가 웅웅 울렸다.
오늘 한국사 수업 시간에서였다. 따분해서 모두들 하품을 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갑자기,
“독도는 누구 땅인지 아는 사람?”
하고 우리를 둘러보았다.
“우리 땅이죠!”
당연한 대답이 동시에 나왔다.
“이렇게 당연한테 왜 일본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길까?”
그 질문에 모두 다퉈가며 외쳤다.
“독도 밑에 자원이 풍부해서요.”
“더 넓은 바다를 자기네 걸로 갖게 되니까요.”
“그냥 못 살게 구는 거 아니에요?”
“대마도도 우리 땅 하면 안 돼요?”
여기저기서 친구들이 손을 들었다.
“그 이유는,”
선생님이 교탁을 탁 내리치며 뜸을 들였다가 말씀하신 한마디 때문에 나는 들끓는 용암 속에 가라앉는 깃털 하나처럼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고 싶어졌다.
“사실 일본인은 다 나쁜 놈들이어서 그렇다.”
친구들이 맞다, 맞다 하며 박수를 쳤다. ‘쪽’으로 시작하는, 일본인을 얕잡아 부르는 욕을 내뱉는 친구도 있었다. 부반장인 희민이였다. 아이들이 책상을 탕탕 치며 웃었다. 선생님은 욕을 한 친구에게 벌점을 주지 않았다. 희민이는 평소에 일본 애니메이션을 무척 즐겨보는 친구였다. <원피스>부터 <나루토>와 <코난>까지 정주행을 마친 애였다. 우리 나이에는 보면 안 되는 <진격의 거인>을 다운 받아볼 수 있는 사이트를 자랑스럽게 알려준 것도 쟤였다. 일본어도 몇 마디씩 할 줄 알았다. 모두 이상한 뜻의 말들이었는데, 뭣도 모르고 엄마에게 뜻을 물어봤다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엄마가 어디서 본 말이냐고 꼬치꼬치 물어본 적이 있었다. 어쨌든 우리 반에 일본어가 유행처럼 번진 것은 희민이 때문이었다. 겨울방학 때 나가사키에 있는 놀이공원에 가서 그곳의 호수 위에 전시된, 애니메이션에 나온 유람선을 타고 오겠다고 큰소리를 치던 것도 희민이였다. 모두가 희민이를 부러워했다. 오는 길에 샤프와 지우개 좀 부탁해, 하고 말을 걸던 친구들도 많았다.
뇌에 쥐가 나서 웅웅거리는 느낌이었다. 선생님은 어떤 점에서 일본인이 나쁜 사람인지 일본인이 한 인체 실험과 고문, 강제징집 같은 끔찍한 역사를 하나하나 들려주었다. 온몸이 오그라들 정도로 소름이 돋는 일들이었다. 너무 잔인한 범죄들로 가득했다. 소설이나 영화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역사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서로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을 텐데 무슨 미움이 생겨서 때리고 죽이고 고문했을까? 그들에게도 비슷하게 생긴 가족이 있었을 텐데. 찌르면 아프고 못 살게 굴면 괴로워하는 것은 모두가 똑같았을 텐데. 열두 살의 내가 아는 것을 왜 당시의 사람들은 몰랐던 걸까. 알고도 그랬다면, 그건 너무 무서운 일이다.
“과거사라고 부르지만 이건 현재진행형이야.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은 역사란다.”
스물네 살의 젊고 멋지고 언제나 환한 표정이셨던 선생님의 하얀 이마에 핏줄이 불끈거렸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주에 있을 학부모 일일 교사 체험에서는 너희 역사 인식을 더 키울 수 있도록 한국과 일본의 역사에 관해 다루어볼 거다. 누구 부모님이 해주실 수 있을까?”
그 순간 나는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영아가 손을 번쩍 든 것이다.
“선생님! 하루네 엄마가 아티스트인데요, 무대 경험이 많아서 수업도 잘 하실 것 같아요. 추천해요!”
내가 놀란 눈으로 돌아보자 영아가 속삭였다.
“메이드 인 차이나의 복수다.”
영아를 만난 곳은 우리 동네의 아동 센터였다. 영아와 나는 다문화가정 어린이로 분류되어 관리를 받았다. 엄마 아빠가 가게 일과 곡 작업으로 바쁜 방과 후 시간에 나를 돌봐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아빠는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고 엄마의 부모님은 일본에 계셔서 나를 맡아줄 수 없다. 다른 아이들도 대개 동남아시아 출신의 엄마가 있거나 한쪽 부모 혹은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자라는 경우와 아동 센터에서가 아니면 저녁을 먹을 수 없는 형편의 환경에 살아서 들어왔다. 누가 굳이 말해준 적이 없는데도 다들 무슨 ‘사유’로 방과 후 시간을 센터에서 보내는지 눈치껏 형편을 알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친해지는 과정에서 서열이 생겼다. 마치 중요한 순서를 정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어딜 가든 1번이 생기고 그룹이 나뉘고 친구와 친구 사이에 계단의 개수가 정해진다. 친해지려면 감당해야 하는 거리 같은 것 말이다. 영아와 나는, 나라의 이미지 때문에 서열이 갈렸다. 나는 선진국인 일본에서 온 좀더 나은 아이가 되고, 영아는 친구들에게는 별로 인기 없는 나라인 중국에서 온 아이가 되어버렸다. 우리 엄마도, 영아네 엄마도, 연애결혼을 한 건 똑같은데 아이들은 영아한테만 엄마 얘기로 놀렸다. 영아 엄마는 연변 출신의 조선족이 아니라 베이징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족인데도, 아이들은 어눌한 말투로 보이스 피싱 흉내를 냈다. 영아네 집 그 누구도 그런 말투를 쓰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러면 영아는 엄마 없이 사는 애들을 놀렸다. 서로 마음을 할퀴다가 울곤 했다. 외부 센터에서 상담 선생님이 오셔서 집단 상담을 반복 하고나서야 그런 일이 줄어들었다.
나는 친구들이 그런 일로 싸우는 게 이상했다. 나나 영아나 생김새나 말투, 생각이 다를 게 없다. 숟가락, 젓가락을 쥐는 법도 노트에 글씨를 적는 방향도 선생님께 인사하는 방법도 비슷비슷하다.
나는 다문화가정이라는 것도 사람들이 굳이 그렇게 불러서 알게 되었을 뿐인데, 영아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태풍 부는 날 다 익은 야자수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 아래 혼자 서 있는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왜 자꾸 다문화, 다문화 하면서 나누는 거야? 난 한국에서 태어났는데! 한국 어린이인데. 한국 이름을 쓰고 한국어를 쓰고 한국에서 사는데 또 뭐가 더 필요한 거야? 내 얼굴에 다문화라고 적혀 있니? 쳇!”
“기분 나빠? 난 상관없는데. 특별해 보이기도 하고.”
“넌, 넌 좋은 나라에서 와서 내 마음 몰라.”
“중국이 얼마나 크고 멋진 나라인데. 역사도 엄청 깊고. 우리 아빠가, 전 세계가 무서워하면서 눈치보는 나라가 중국이랬어. 종이랑 나침반, 화약, 인쇄술 전부 다 중국에서 발명한 거래. 달러랑 중국 돈이랑 비슷하게 알아줄 만큼 잘 사는 나라랬어.”
“그럼 뭐해. 그런 걸 애들이 알아줘야지. 내가 어른들이랑 친구할 것도 아닌데! 흥. 기왕 혼혈일 거면 엄마가 미국이나 영국 사람이면 좋을 것 같아. 똑같은 다문화여도 그런 애들은 얼굴도 예쁘게 태어나서 연예인도 할 수 있고, 잘 사는 나라에서 오면 무시하지도 않잖아.”
“엄마가 ‘미국에도 거지 있고 영국에도 도둑놈 있다’고 했어.”
“그건 무슨 말이야?”
“뭐, 100퍼센트 좋기만 한 나라는 없다는 거 아닐까?”
그래도 영아는 씩씩 화를 냈다. 영아는 놀림을 받은 날에는 꼭 나를 불러서 일본은 얼마나 잘사는 나라인지 물어보고 또 물어보았다. 나는 일본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내가 일본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그쳐 물었다. 헤어지기 전에는, 그래도 중국이 미국 다음으로 힘이 센 건 맞지 하고 중얼거리다가 혼자 뛰어갔다. 영아의 그 마음을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혼자 섬이 된 것 같은 마음을.
작년에 있었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작년 여름, 일본에서 할머니가 사시는 곳 근처에 대지진이 나서 통신이 끊겼다. 엄마가 발을 동동 구르는 걸 보다가 나 혼자 포털사이트에 기사를 검색해본 적이 있었다. 지진에 관련된 기사 밑 댓글에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요’나 ‘공감’ 버튼을 눌러서 베스트 댓글로 뽑힌 글들이 한눈에 보였다.
-이게 다 인과응보다. 우리한테 나쁜 짓을 그렇게 했으니 죽어도 싸지!
-도쿄에는 지진 안 나나?
-하나님 드디어 제 기도를 들어주셨군요. ㅋㅋㅋ
-속이 다 시원하다! 아예 가라앉아버려!
-관동대학살의 복수, 조상님들이 저승에서 웃고 계실 듯.
다친 사람들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댓글은 한참을 읽어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가 엄마를 끌어안고 식탁 밑으로 들어가는 순간을 계속 상상해보았다. 할머니를 본 적이 오래되어서 상상 속의 얼굴이 비어 있기 때문에 옆집 할머니의 얼굴로 바꿔서 상상했다. 흔들리는 식탁이 무섭고 깨진 유리창 사이로 부는 바람이 두렵고 도란도란 밥을 먹던 공간이 무너지는 것이 싫은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할머니가 일본 사람이라고 해서 그 마음이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 엄마가 일본인이라고 해서 죽어도 된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내 얘기를 다 듣고 아빠 엄마는 동시에 한숨을 푹, 쉬었다.
“학교에서 그런 일이 있었구나.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하루야, 엄마가 가서 수업해도 되겠어?”
“엄마는 괜찮겠어?”
“엄마가 일본 정부를 대표하는 사람도 아니고, 엄마가 누군가를 고문하거나 죽인 적도 없어. 엄만 아주 작은 한 사람이고, 나라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똑같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하루는 엄마 믿지?”
그건 말하지 않아도 잘 안다. 엄만 파리 한 마리 못 죽인다. 꽃도 꺾지 않는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함부로 망가뜨리지 않는 게 엄마의 규칙이다. 어릴 때 나비의 날개를 찢으며 놀다가 엄마한테 엄청 혼난 적이 있어서 그건 내가 더 잘 안다.
“하지만 엄마의 뿌리에는 일본이 있으니까 내가 이야기하는 역사도 의미 있지 않을까? 엄마도 마음이 아프다고 말할 거야.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라고 이야기할 거야. 그리고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나 같은 일본인도 있으니까, 미래가 있다고 말할 거야. 다만, 하루 네가 상처 받는 일이 생길까봐 걱정이 돼.”
나는 희민이가 주도해서 나를 뭐라고 놀릴지 상상이 되었다. ‘쪽’으로 시작하는 그 욕을 붙여 부를 게 뻔하다. 필통 안에는 일본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학용품들이 가득하면서 처음부터 일본을 싫어했던 것처럼, 나를 미워했던 것처럼 변할 아이들의 얼굴이 그려졌다.
캐릭터 상품과 일본이 저지른 만행은 멀리 있는 걸까, 가까운 걸까. 나는 어디까지 밀려나게 될까. 센터 출신의 몇몇만 알고 있던 내 이야기가 공개되는 날,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꼬리표가 붙여진 채로 이 작은 동네에서 오래오래 살아갈 생각을 하면, 나도 엄마처럼 먼 곳으로 떠나버리고 싶어진다.
하지만 내가 나 자신만으로도 특별한 존재라는 것, 내가 어떤 옷을 입든지 어떤 언어를 쓰든지 상관없이 나는 소중하다는 것을 난 알고 있다. ‘꽃도 나무도 새도 너도 나도 모두 다 좋다. 바람이 만지고 가는 존재는 다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우리는 다 좋다.’ 엄마가 만든 노래에 나온 가사를 떠올렸다.
엄마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눈빛에서 내게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엄마의 마음이 반짝이고 있다.
나도 엄마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슬픔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다. 엄마는 언제나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롭게 살자는 주제의 노래를 지어 아빠와 함께 불렀다. 가을에 열리는 산사음악회에서 그런 노래들을 연주하기도 했고, 가끔 도시로 나가 거리에서 기타를 치면서 사람들에게 평화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런 곳에서는 아무도 엄마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내가 아는 엄마는 사람들이 미워하는 일본인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엄마의 노래를 들을 때, 엄마는 그냥 우리 엄마가 될 수 있었다.
폭폭 삶기는 우동 냄새가 가게 안을 가득 채웠다. 통유리에 보얗게 김이 서려 바깥 풍경을 모두 지워버렸다. 밖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게 안에 뭐가 있는지 보려면 슥삭슥삭 천으로 닦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여길 볼 수 없다. 이렇게 도란도란, 행복한 우리 가족을 볼 수 없다.
봄볕이 창문을 두드린다. 엄마가 기타를 치는 소리가 용기를 준다. 나는 소매로 창문을 닦아냈다. 마음에 봄볕이 가득 쏟아져들어와 하루가 환해진다.
지요
개인과 전체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른들이 짐작하는 것보다 아이들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직면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 어른 쪽이겠지요. 더 불편하고 덜 아름다운 동화를 쓰려고 합니다.
agio-mi@hanmail.net
2018/01/30
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