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너와 그곳에서
더웠다. 그냥 덥기만 한 게 아니라 습하면서 더워 온몸이 끈적거렸다. 이 날씨 때문에 죽을 맛이었다. 태국의 대기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나는 바짓자락을 좀 당겨 올렸다. 바람이 잘 드는 면바지인데도 다리에 칭칭 감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제 엄마가 예약해 놓은 툭툭이 앞에 서서 하품을 크게 했다. 눈곱을 떼며 정신이 들도록 머리를 두어 번 흔들었다. 그리고 게스트하우스에서 준비해 준 바나나 머핀을 주섬주섬 꺼내 입으로 밀어넣었다. 달고 퍽퍽했다. 목이 메어 캘룩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어깨를 툭 쳤다.
“엇, 야 윤쓸!”
윤슬아라는 내 이름을 멋대로 줄여서 부르는 사람을 방콕에서 만나다니. 황당해하며 돌아보니 거기 강린아가 서 있었다.
“너, 네가 왜, 왜 여기 있어?”
너무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이 숙소에 묵는다는 말은 들었지만, 막상 같은 반 애랑 다른 나라에서 마주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왜 여기 있긴. 당연히 놀러 왔지. 뭘 그렇게 급하게 먹냐? 일단 이것부터 마셔. 누구랑 왔어?”
놀라기도 하고 사레가 들리기도 해서 계속 쿨럭거리고 있자 린아가 자기가 마시고 있던 망고주스를 태연히 나한테 건넸다. 플라스틱병에 분홍색 립밤이 묻어 있는 게 보였다. 난감해하는 표정을 눈치챘는지 린아가 “아.”하고는 다시 병을 가져가 소매로 슥슥 그 부분만 문지르고는 도로 건넸다. 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좀 들었지만 거절하기도 뭐해 그냥 순순히 병을 받아들었다. 주스는 머리가 띵해질 만큼 달고 시원했다.
“아, 난 엄마랑 둘이.”
나는 짤막하게 대꾸하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너는?”하고 되물어봐야 하는데 모든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엄마는 내 여름방학에 맞춰 태국 방콕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삼박 사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엄마 딴에는 정말 큰맘을 먹고 벼르고 별러 온 여행이었다. 열 시간씩 일해도 턱없이 적은 월급에, 들쑥날쑥 들어오는 양육비에, 해외여행은커녕 집 앞 공원 한 번 나가는 것도 힘들다고 우는소리를 하던 엄마가 어느 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덜렁 표 두 장을 사 온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날은 엄마가 아빠와 이혼한 지 딱 일 년째 되는 날이었다.
엄마는 날 앞에 두고 솔직하게 말했다. 아빠와 갈라서면서 인생의 실패자가 된 것 같아 두려웠고, 날 혼자 기를 수 있을지 엄두가 안 나 무서웠다고. 하지만 우리 둘이 충분히 잘해 나가고 있는 것 같아 정말로 기쁘다고. 그걸 축하하고 싶다고. 나는 대답 대신 방으로 들어가 몰래 감춰둔 저금통을 들고 와 건넸다. 엄마가 “우리 딸 다 컸네.” 하며 내 코를 장난스럽게 쥐었다. 그 덕에 코끝이 빨개진 걸 들키지 않았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는 않아 제일 싼 표를 끊어야 했던 우리는 새벽 세 시에 방콕에 도착했다. 자유 여행의 성지처럼 여겨지는 곳부터 가야 한다고 첫 여행지를 방콕으로 골랐던 엄마는 태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지쳐버렸다. 비행기는 연착되었고 입국 심사를 기다리는 줄은 어마무시하게 길었다. 짐을 찾아 미리 예약해 놓은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자 새벽 다섯 시였다. 엄마랑 나는 씻지도 못하고 기절하듯 잠들었다. 온몸이 쑤시고 피곤했지만 겨우 짬을 내어 온 여행인 만큼 시간을 버릴 순 없었다. 주말에만 연다는 짜뚜짝 시장엘 가려고 아득바득 일어나 게스트 하우스 앞에 서 있는데, 뜬금없이 친하지도 않은 린아가 불쑥 나타나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 나는 이 모든 걸 어떻게 구구절절 설명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내가 당황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린아는 태연하게 기지개를 켜며 자기 얘기를 늘어놓았다.
“난 이모랑 둘이 왔어. 오늘 왕궁이랑 왓포 사원 가고, 시간 나면 왓 아룬이랑 야시장까지 가보려고. 아, 오늘도 한국 사람 엄청 많으려나? 방학이라 그런지 우리 또래 애들도 많더라. 여기서 한국 사람 보니까 뭔가 신기하지 않아? 하긴. 너랑 만난 것도 완전 대박이다. 무슨 숙소까지 똑같냐.”
린아는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혼자 말하고 혼자 킥킥거리는 게 우스웠다. 뭐랄까. ‘이런 애였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따로 대꾸하진 않았지만 사실 나도 신기하기는 했다. 같은 반이지만 6학년 1학기가 다 지나도록 말 한 번 제대로 섞어보지 않은 린아와 이 먼 곳에, 이렇게 같이 서 있다니.
“밀알, 이러다 늦겠어! 왕궁 줄 엄청 길대. 아, 얘 우리 반 앤데 여기서 만났다? 엄청나지?”
린아가 안에서 늦장을 부리고 있는 자기 이모를 막 불렀다. 그런데 이모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밀알이라고 불렀다. 평소에 늘 그렇게 부르는지 아주 자연스러웠다. 어른을 이름으로 부르는데도 혼나지 않다니. 다소 낯설고 충격적이었다.
커피를 홀짝거리며 나오던 린아네 이모는 린아의 호들갑에 “오!”하고 짧은 감탄사를 내뱉더니 곧장 나를 반갑게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엄마가 뒤에서 “슬아야?”하고 불렀다.
“아, 어, 엄마. 그, 같은 반 애를 우연히 만나서. 얜 강린아고, 이분은 린아 이모님이래.”
나는 민망해하며 린아와 린아네 이모를 소개했다.
“이모님이라니. 큭큭. 편하게 밀알이라고 불러. 이런 데서 우리 린아 친구를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반가워요. 편하게 밀알이라고 불러 주세요.”
엄마보다 열 살 정도 어린 린아네 이모는 우리를 엄청나게 반가워하며 방방 뛰어다녔다. 서양식으로 끌어안고 인사를 하는 린아네 이모가 약간 부담스럽긴 했지만 원래부터 활달한 성격인 듯 거리낌 없이 구는 모습이 싫지는 않았다. 엄마도 비슷하게 느꼈는지 어느새 살갑게 말을 주고받았다.
“우린 짜뚜짝 시장부터 가려고요. 하도 유명하다고 해서. 일정이 달라서 밤에나 보겠네. 잘 둘러보고 와요.”
엄마가 린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밀알 이모한테도 인사를 건넸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서운해하는 눈치라 나는 조금 놀랐다. 나만큼이나 낯을 가리는 엄마가 스스럼없이 마음을 여는 걸 보니 신기했다. 낯선 곳에 와서인지 아니면 린아와 밀알 이모가 그만큼 마음에 들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엄마가 스스럼없이 대하니 나도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린아네와 헤어지고 우리는 툭툭이를 타고 짜뚜짝 시장으로 향했다. 엄마는 잔뜩 들떠 사진을 쉴 새 없이 찍었다. 색색의 건물들과 자동차들이 눈을 사로잡았다. 아주 복잡한 것 같으면서도 단순하고,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다채롭게 어우러진 풍경들이 신기했다. 짜뚜짝 시장은 상상 이상으로 북적거렸다. 오천여 개나 된다는 가게들이 죽 늘어서 있고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길 사이 사이로 온갖 국적의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사람들에게 밀리지 않으려 기를 쓰면서 엄마를 놓칠까봐 딱 달라붙어 걸었다. 실을 일일이 꼬아 만든 장식품들부터 조개들을 풍성하게 엮어 만든 화려한 풍경들, 직접 가죽을 고르고 이니셜을 새겨 넣을 수 있는 여권 지갑 등 한국에서는 쉽게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눈을 사로잡았다.
처음 와 본 티를 팍팍 내며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엄마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보더니 어디론가 내달렸다. 나는 깜짝 놀라 엄마 뒤를 정신없이 쫓아갔다.
“엄마! 어디 가는 건데? 잠깐 멈춰 봐. 어?”
내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엄마가 달리던 걸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지갑. 지갑이 없어.”
엄마의 얼굴이 창백했다. 희게 질린 엄마의 얼굴을 보자 아찔했다. 말로만 듣던 소매치기를 당한 거였다. 이런 일은 다른 사람들한테나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는데.
“엄마, 설마 거기에 돈 다 넣어놓은 건 아니지? 어제 분명히 나눠서 넣었잖아.”
엄마는 울상을 지으며 이마를 짚었다. 시장에선 돈을 많이 쓰게 될 것 같아 일부러 넉넉하게 챙겨 왔다는 거였다. 여기저기 나눠 담으면 넣었다 뺐다 하기가 성가실 것 같아 ‘지갑만 단단히 챙기면 되겠지.’ 하고 그냥 지갑에 넣어왔다고 했다. 힘이 쪽 빠졌다. 나는 얼른 주머니 여기저기를 뒤져 보았다. 십 밧짜리 두 장이 나왔다. 숙소까지 갈 택시비도 빠듯한 돈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기만 한 하늘이 순간 노랗게 보였다. 눈앞이 캄캄했다. 처음 당해 보는 일에 엄마는 완전히 혼이 나가 있었다. 여권이나 휴대폰은 그대로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일단은 숙소로 돌아가야 돈을 다시 가져오든 말든 할 텐데, 숙소까지 이동할 방법도 없으니 막막했다. 떠들썩한 시장 분위기 때문에 정신이 더 없었다. 그때 퍼뜩 린아 생각이 났다. 얼른 구글 지도를 찾아보니 왕궁과 시장이 그렇게 많이 멀지는 않았다.
“잠깐만, 엄마. 린아한테 혹시 와줄 수 있는지 물어볼게.”
나는 린아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문자를 보냈다.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았지만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햇볕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시장 한복판에, 수없이 많은 사람이 오가는 길 한가운데에 엄마랑 나랑 둘만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었으니까. 린아는 답장이 없었다. 속이 탔다. 전화를 걸까 말까 망설이는데, 내 마음이 전달되기라도 한 것처럼 린아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 지금 툭툭이 타고 그쪽으로 가고 있어. 복잡하니까 시장에 있지 말고 역 쪽으로 나와 있어. 우리 왓포 사원으로 갈 건데 같이 움직이자. 어때?”
린아가 물었다.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망설여졌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엄마랑 나는 제대로 구경할 새도 없이 겁부터 먹어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숙소로 돌아가버리기에는 여기까지 온 게 너무 아까웠다. 결국 나중에 한꺼번에 셈을 해서 갚기로 하고 넷이 같이 돌아다니기로 했다. 다행히 린아네 이모는 자유 여행을 많이 해 봐 여러 상황에 능숙하게 대처할 줄 알았다. 여윳돈도 넉넉하게 챙겨와 여러 주머니에 분배를 해 둬서 종일 같이 다녀도 끄떡없다고 우리를 안심시켰다.
우리 넷은 시장을 뒤로하고 왓포 사원으로 향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 때문에 타격을 받긴 했지만 새로운 곳을 보자 다시 기운이 났다. 사원의 어마어마한 규모와 거대한 불상들, 건축물들의 섬세함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감동과 별개로 더운 날씨에 오래 걸으니 확실히 금방 지쳤다. 무리하지 않으려 대충 돌아다녔는데도 어질어질했다. 배낭여행을 즐겨 한다는 밀알 이모만 빼고 다들 금세 지쳐 헉헉거렸다. 특히 점심때가 되자 배가 너무 고파, 찾아 놨던 맛집은 가볼 생각도 못하고 눈에 보이는 아무 식당으로 들어가 똠얌꿍과 팟타이를 시켜 먹었다.
“다 너무 맛있잖아! 나 여기서 살아야 할 것 같아. 밀알 우리 이사 올까? 응? 응?”
린아는 난리를 치며 엄지를 치켜 올렸다. 그 모습이 웃겨 다 같이 한바탕 웃었다. 나는 웃으면서도 새삼 린아를 다시금 힐끗거렸다. 햇볕에 타 그새 까무잡잡해진 린아는 학교에서 보던 것과는 또다른 느낌이었다. 훨씬 더 경쾌하고 밝아보였다. 이쪽이 진짜 린아의 모습에 한 뼘 더 가까운 걸까. 그럼 린아의 눈에 나는 어떤 애로 보였을까. 지금의 나는 또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조금씩 궁금한 게 늘어났다. 낯선 곳에 와 있어 그런지 사소한 것들까지 평소와는 다르게 다가왔다.
우리는 부른 배를 두드리면서 코코넛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사 먹고 왓 아룬으로 가기 위해 선착장으로 향했다. 손짓과 단어 몇 개만 얘기해도 사람들이 친절하게 길을 알려 주어서 별로 헤맬 일이 없었다. 선착장에도 이미 많은 사람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우리는 그 줄 끝에 서서 강을 구경했다. 태국에서 제일 긴 강이라는 차오프라야 강은 흙탕물로 제법 거세게 출렁이고 있었다. 조금 무서웠지만 보트로 오 분 남짓이면 바로 건너편 왓 아룬에 도착한다고 해 그렇게 많이 불안하지는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배에 오르는데 파도 때문에 배가 잠시 흔들렸다. 내가 휘청거리자 먼저 올라탄 린아가 손을 뻗어 붙잡아주었다. 무심코 그 손을 잡았다 얼른 손을 뗐는데, 어쩐지 가는 내내 가슴이 묘하게 울렁거리고 린아의 손과 닿았던 손끝이 화끈거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새벽 사원의 모습에 엄마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곳에 제일 와 보고 싶었다는 린아도 기다렸다는 듯 카메라를 꺼내들고 호들갑을 떨었다. 희디흰 사원의 모습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조개와 자기로 장식된 무늬들은 섬세하고 정교했다. 조각에 대해서도, 건축에 대해서도 잘 몰랐지만 경이로웠다. 더없이 웅장한 그 모습에 어쩐지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팔짝거리며 사방으로 뛰어다닐 것 같았던 린아는 막상 사원 안으로 들어서자 어째서인지 좀 가라앉아 보였다. 밀알 이모도 묘하게 조용했다. 나는 휴대폰으로 정신없이 사진을 찍으며 간간이 렌즈에 비치는 린아의 모습을 봤다. 린아는 기도하는 것처럼 두 손을 모으고 서서 사원을 올려다봤다. 자세히 보니 목걸이를 손안에 쥐고 있었다.
“그건 뭐야? 여기 와서 산 거야?”
지금까지와 다르게 사뭇 진지해 보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다가가 말을 걸고 말았다. 린아는 잠깐 멈칫하다가 싱긋 웃었다.
“우리 강 여사야. 내 외할머니.”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나는 멈칫했다. 린아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건 유골 목걸이인데, 이 안에 할머니 뼛가루가 있어. 이모랑 나랑 하나씩 나눠 가졌어. 할머니가 여길 와 보고 싶어했거든. 셋이 꼭 같이 오기로 했는데 결국 같이 못 왔네. 그래도 여기 함께 있는 거니까.”
린아는 그렇게 말하며 목걸이에 여러 번 입을 맞췄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그때 갑작스럽게 빗방울이 툭 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으앗, 우산 안 가져왔는데. 일단 저리로 가자. 얼른 뛰어!”
린아가 목걸이를 티셔츠 안으로 쏙 집어넣고 비를 피할 데를 찾아 뛰어갔다. 갑자기 내린 비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한쪽으로 모여들었다. 밀알 이모와 엄마가 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잘 보이지 않을 테지만 혹시 걱정할까봐 우리도 껑충껑충 뛰며 손짓을 해 보였다.
비는 짧게 쏟아지다 금방 그칠 것 같았다. 여기는 그런 비가 잦다고 했다. 잠깐만 기다리면 또 지나가겠지 싶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다들 한쪽으로 몰려들었다. 우산을 쓰지 않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자 린아와 나는 어쩔 수 없이 가까이 앉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선가 달짝지근한 말리꽃 향기가 땀 냄새와 섞여 났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할 것 같은데 입이 달라붙은 것처럼 한 마디가 안 나왔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계속 린아가 말을 걸어 줘서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거였다. 어쩔 줄 모르고 손톱만 잘근잘근 씹고 있는데, 누굴 닮아서 그렇게 뻣뻣하냐고 혀를 차던 아빠의 모습이 불쑥 떠올랐다. 준비되어 있지 않을 때 치고 들어오는 기억은 불쾌했다.
솔직히, 아빠는 말을 거를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빠와 헤어질 때 엄마는 아빠가 무심코 뱉었던 백 가지의 나쁜 말을 목록으로 적어 건넸다. 얼핏 봤던 그 목록에는 내가 자주 들었던 말들도 꽤 여러 개 적혀 있었다. 여하튼, 나는 점점 민망해졌고 쓸데없이 아빠가 한 부정적인 말들만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자 어쩐지 몸 여기저기가 가려운 느낌이 들었다. 팔을 북북 긁고 있는데, 이번에도 린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왠지 네가 썼던 글 생각난다. 왜, 우리 국어 시간에 발표했던 거. 사실 나 그때부터 너랑 친해지고 싶었는데 한 학기가 다 지나도록 말 한 번을 못 걸어봤어. 근데 여기서 딱 만나다니. 웃기지?”
린아가 코를 찡긋거리며 키득거렸다. 반면 나는 생각지도 않았던 얘기에 멍해졌다. 나랑 친해지고 싶었다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얘기였다. 솔직히 린아는 반에서 꽤 인기가 있었다. 뭐든 곧잘 하는 편이었고 어딜 가든 눈에 띄는 존재감이 있었다. 그에 반해 나는 여태 친한 친구도 한 명 없었다. 학교에서도 거의 혼자 책을 읽거나 뭔가를 끄적거리는 게 다였다. 그런데 나랑 친해지고 싶었다니. 게다가 내가 썼던 글을 기억한다고? 믿을 수 없다 못해 황당하기까지 했다. 내 기분을 알 리 없는 린아는 얘기를 이어갔다.
“있잖아. 나 가끔 네가 발표했던 글 혼자 생각해보고 그랬다? 특히 그 구절이 좋았어. ‘같이 없어도 같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같이 있어도 같이 있는 것 같지 않았던 때가 있었던 것처럼.’”
린아는 익숙한 문장을 조곤조곤 읊었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내가 쓴 문장을 누군가 소리 내 읽어주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당연히 그 문장을 기억했다. 엄마 아빠가 이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썼던 글의 일부분이었다.
“당신이 한 마디 뱉을 때마다 내 존재 가치가 없어지는 기분이야. 그런데 우리가 같이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언젠가 엄마가 아빠에게 따져 물었다.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도 아빠도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때 우리 가족은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셋 다 다른 방향으로 돌아서 있어 서로의 표정을 살필 수 없었다. 엄마 아빠가 완전히 헤어지고 나자 도리어 조금 편해졌다. 더이상 엄마 아빠의 감정을 살피느라 쩔쩔맬 필요가 없었다. 간간이 오는 아빠의 문자에도 편하게 답할 수 있었다.
가끔 보게 된 아빠는 이제 할 수 있는 한 좋은 말만 하려고 애썼다. 그게 어색하면서도 싫지 않았다. 그런 시간이 쌓이자 아빠가 없는데도 같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생겼다. 하지만 그게 아빠와 함께 살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냥, 정말로 그냥 그럴 때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 걸 다 기억하냐? 그냥 끄적거린 건데.”
괜히 민망해 불퉁거리자 린아가 피식 웃었다. 그리곤 다시 말을 이었다.
“뭐, 나도 그냥. 그냥 생각이 나더라고. 예전에 우리 엄마랑 같이 있으면 꼭 그런 기분이었거든. 종일 집에 같이 있는데, 엄마는 창밖만 내다보고 꼼짝도 하지 않고. 나는 그런 엄마 옆에서 또 꼼짝도 하지 않고. 엄마가 우울증이었거든. 엄마는 아픈 건데, 나도 아는데, 그래도 외롭더라. 같이 있어도 같이 있는 것 같지 않더라고.”
린아는 말을 마치고 한쪽 팔을 쭉 뻗어보더니 “비 그쳤다, 가자.” 하고 말했다. 그럼 이제 엄마랑은 같이 안 사냐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괜히 아픈 데를 건드리는 걸까 싶어 물어보지 못했다. 린아는 밀알 이모와 우리 엄마가 있는 데로 곧장 달려갔다. 그 뒤를 쫓아가면서 생각했다. 네가 말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나도 정확히 알 것 같다고. 나도 그런 걸 말하고 싶었던 게 맞다고. 그걸 말하기 전에 비가 그쳐버린 게 어쩐지 좀 아쉬웠다.
우리는 발 마사지를 한 번 받고 아시아티크로 가 야시장을 둘러봤다. 엄마는 여기까지 왔으니 사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사라고 배짱을 부렸다. 나는 방콕의 풍경이 담긴 자석 몇 개를 골랐고 엄마는 라탄백 하나랑 목각으로 된 코끼리 장식품들을 샀다. 밀알 이모는 바람이 불면 소리가 나는 종들을 종류별로 사 모았다. 린아는 한참을 기웃거리기만 하더니 이모에게 스노우볼 하나를 사달라고 했다. 안에 코끼리 두 마리가 들어 있는 스노우볼이었다. 엄마 코끼리랑 아기 코끼리가 그 안에 다정하게 앉아 있었다. 손바닥에 올려두고 살짝 흔드니 반짝이들이 차르르 흩어졌다 천천히 가라앉았다. 린아가 그걸 보고 가만히 웃었다. 그 웃음을 보는데 어쩐지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남은 일정 내내 함께 다녔다. 엄마가 첫날의 돈을 갚으려 하자 밀알 이모가 대신 맛있는 걸 사달라고 졸라서, 그날 점심으로는 백 년의 전통을 가졌다는 허름한 오리 국숫집에서 밥을 먹었다. 처음엔 가게의 외양만 보고 실망을 좀 했는데, 잘 구워진 오리가 듬뿍 올라간 국수를 먹고는 눈이 번쩍 뜨여 국물까지 싹싹 비웠다. 린아의 말처럼 진짜 여기 와서 살고 싶어지는 맛이었다. 내가 그 말을 웅얼거리며 했더니 모두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는 미리 짜 놓은 일정 중 어떤 것은 취소하고 어떤 것은 추가했다. 다행히 넷이 어울려 다니는 게 생각처럼 어렵지 않았다. 린아네가 우리보다 일찍 방콕에 왔는데 신기하게도 가는 날은 딱 겹쳐 더 일정 조율하기가 쉬웠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웃고 떠들고 돌아다녔더니 어쩐지 정말로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묘했다.
마지막 날, 게스트하우스에 맡겨놨던 짐을 찾아 공항으로 향하는 길에 밀알 이모는 차창을 열고 “방콕아 안녕!”하고 소리를 질렀다. 엄마가 그걸 보고는 킥킥거리더니 덩달아 “방콕아 안녕!”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까지 장난기 넘치는 엄마는 처음이었다. 운전기사 아저씨가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좋아, 좋아.”하고 한국말로 말해서 우리 모두 킬킬거렸다.
“엄마랑 밀알 이모랑 왜 이렇게 잘 맞아?”
내가 놀리듯 묻자 둘은 성공했다는 듯 하이파이브를 했고 린아랑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공항에서 엄마랑 이모가 수속을 밟는 동안, 우리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캄캄해진 공항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믿을 수 없게 사람이 많았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 사이에 우리가 서 있다는 게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벌써 좀 아쉬웠다. 작은 체구의 친절한 사람들, 화려한 태국 돈, 기호 같은 문자들, 어딜 가나 차랑차랑 울리는 풍경 소리, 사원에서 풍기는 아릿하고 매캐한 향냄새. 모든 것이 종종 불쑥불쑥 떠오를 것 같았다.
“드디어 방콕도 끝이네. 돌아가면 뭐 할 거야?”
짐 가방을 괜스레 밀었다 당겼다 하며 린아가 물었다.
“그냥, 뭐. 2학기 준비?”
내가 말하고도 시시해 픽 웃고 말았다. 린아도 따라 웃었다.
“너 막 내가 말 걸면 도망가고 그러면 안 된다? 왠지 한국 가면 모른 척할 것 같아.”
린아가 눈을 흘기는 척하며 말하자 뜨끔한 나는 괜히 천장을 보며 볼을 긁적거렸다. ‘돌아가면 린아랑은 전처럼 어색해지겠지’, 하고 내심 생각했던 게 딱 걸린 거였다. 나는 괜스레 목이 마르다는 핑계를 대며 가방을 뒤져 라임 주스 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시고 린아에게도 마시라며 건넸다. 내가 딴청을 피우자 린아는 봐줬다는 듯 샐쭉 눈을 흘기곤 화제를 돌렸다.
“아, 사람 진짜 많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거의 다 집으로 돌아가는 거겠지? 아님 다른 곳으로 또 떠나거나. 다들 뭔가를 잊기 위해 떠나는 걸까?”
린아가 주스를 단번에 마시고 턱에 손을 괸 채 중얼거렸다.
“글쎄. 어떤 건 잊고 어떤 건 잊지 않으려고 떠나는 게 아닐까? 다 잊어버리면 좀 슬프니까.”
나는 곰곰 생각하다 무심코 대답을 해버렸다.
“엇, 너 처음으로 내 말에 제대로 대답해준 것 같은데?”
린아가 빙글거리면서 놀리자 그제야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내 얼굴이 빨개지자 린아는 농담이라며 내 어깨를 두드리고는 다시 저 멀리 창 너머를 바라봤다. 잠잠해진 린아를 보고 있으니 우습게도 자꾸 다시 말을 걸고 싶어졌다. ‘너는 무엇을 잊고 싶었어? 무엇을 잊고 싶지 않았어?’ 묻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잊고 싶은 것과 잊고 싶지 않은 것도 오래도록 설명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말들을 늘어놓는 대신 린아처럼 잠자코 바깥을 내다보았다. 한국으로 돌아가서도 린아와 이곳에서처럼 솔직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게 된다면, 그땐 더 잘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과연 그런 시간이 생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우리는 낯선 곳에서 성큼 가까워졌지만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면 그만큼 더 멀어질지도 몰랐다. 비겁하게 그런 걸 재고 있는 게 한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할머니가 좋아하시겠다. 여기저기 구경 많이 하시고 집으로 돌아가셔서.”
나는 간신히 용기를 내 그 말만은 전했다. 그 말마저 하지 않으면 정말로 내내 후회할 것 같았다. 내 말에 린아가 목걸이를 옷 위로 꺼내 손으로 꽉 한 번 쥐었다. 그리고는 작게 “고마워.”하며 웃었다. 그때 멀리서 엄마와 밀알 이모가 얼른 오라며 손짓을 했다. 우리는 벌떡 일어나 후다닥 짐을 챙겨 달려갔다.
진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엇, 야 윤쓸!”
윤슬아라는 내 이름을 멋대로 줄여서 부르는 사람을 방콕에서 만나다니. 황당해하며 돌아보니 거기 강린아가 서 있었다.
“너, 네가 왜, 왜 여기 있어?”
너무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이 숙소에 묵는다는 말은 들었지만, 막상 같은 반 애랑 다른 나라에서 마주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왜 여기 있긴. 당연히 놀러 왔지. 뭘 그렇게 급하게 먹냐? 일단 이것부터 마셔. 누구랑 왔어?”
놀라기도 하고 사레가 들리기도 해서 계속 쿨럭거리고 있자 린아가 자기가 마시고 있던 망고주스를 태연히 나한테 건넸다. 플라스틱병에 분홍색 립밤이 묻어 있는 게 보였다. 난감해하는 표정을 눈치챘는지 린아가 “아.”하고는 다시 병을 가져가 소매로 슥슥 그 부분만 문지르고는 도로 건넸다. 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좀 들었지만 거절하기도 뭐해 그냥 순순히 병을 받아들었다. 주스는 머리가 띵해질 만큼 달고 시원했다.
“아, 난 엄마랑 둘이.”
나는 짤막하게 대꾸하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너는?”하고 되물어봐야 하는데 모든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엄마는 내 여름방학에 맞춰 태국 방콕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삼박 사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엄마 딴에는 정말 큰맘을 먹고 벼르고 별러 온 여행이었다. 열 시간씩 일해도 턱없이 적은 월급에, 들쑥날쑥 들어오는 양육비에, 해외여행은커녕 집 앞 공원 한 번 나가는 것도 힘들다고 우는소리를 하던 엄마가 어느 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덜렁 표 두 장을 사 온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날은 엄마가 아빠와 이혼한 지 딱 일 년째 되는 날이었다.
엄마는 날 앞에 두고 솔직하게 말했다. 아빠와 갈라서면서 인생의 실패자가 된 것 같아 두려웠고, 날 혼자 기를 수 있을지 엄두가 안 나 무서웠다고. 하지만 우리 둘이 충분히 잘해 나가고 있는 것 같아 정말로 기쁘다고. 그걸 축하하고 싶다고. 나는 대답 대신 방으로 들어가 몰래 감춰둔 저금통을 들고 와 건넸다. 엄마가 “우리 딸 다 컸네.” 하며 내 코를 장난스럽게 쥐었다. 그 덕에 코끝이 빨개진 걸 들키지 않았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는 않아 제일 싼 표를 끊어야 했던 우리는 새벽 세 시에 방콕에 도착했다. 자유 여행의 성지처럼 여겨지는 곳부터 가야 한다고 첫 여행지를 방콕으로 골랐던 엄마는 태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지쳐버렸다. 비행기는 연착되었고 입국 심사를 기다리는 줄은 어마무시하게 길었다. 짐을 찾아 미리 예약해 놓은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자 새벽 다섯 시였다. 엄마랑 나는 씻지도 못하고 기절하듯 잠들었다. 온몸이 쑤시고 피곤했지만 겨우 짬을 내어 온 여행인 만큼 시간을 버릴 순 없었다. 주말에만 연다는 짜뚜짝 시장엘 가려고 아득바득 일어나 게스트 하우스 앞에 서 있는데, 뜬금없이 친하지도 않은 린아가 불쑥 나타나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 나는 이 모든 걸 어떻게 구구절절 설명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내가 당황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린아는 태연하게 기지개를 켜며 자기 얘기를 늘어놓았다.
“난 이모랑 둘이 왔어. 오늘 왕궁이랑 왓포 사원 가고, 시간 나면 왓 아룬이랑 야시장까지 가보려고. 아, 오늘도 한국 사람 엄청 많으려나? 방학이라 그런지 우리 또래 애들도 많더라. 여기서 한국 사람 보니까 뭔가 신기하지 않아? 하긴. 너랑 만난 것도 완전 대박이다. 무슨 숙소까지 똑같냐.”
린아는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혼자 말하고 혼자 킥킥거리는 게 우스웠다. 뭐랄까. ‘이런 애였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따로 대꾸하진 않았지만 사실 나도 신기하기는 했다. 같은 반이지만 6학년 1학기가 다 지나도록 말 한 번 제대로 섞어보지 않은 린아와 이 먼 곳에, 이렇게 같이 서 있다니.
“밀알, 이러다 늦겠어! 왕궁 줄 엄청 길대. 아, 얘 우리 반 앤데 여기서 만났다? 엄청나지?”
린아가 안에서 늦장을 부리고 있는 자기 이모를 막 불렀다. 그런데 이모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밀알이라고 불렀다. 평소에 늘 그렇게 부르는지 아주 자연스러웠다. 어른을 이름으로 부르는데도 혼나지 않다니. 다소 낯설고 충격적이었다.
커피를 홀짝거리며 나오던 린아네 이모는 린아의 호들갑에 “오!”하고 짧은 감탄사를 내뱉더니 곧장 나를 반갑게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엄마가 뒤에서 “슬아야?”하고 불렀다.
“아, 어, 엄마. 그, 같은 반 애를 우연히 만나서. 얜 강린아고, 이분은 린아 이모님이래.”
나는 민망해하며 린아와 린아네 이모를 소개했다.
“이모님이라니. 큭큭. 편하게 밀알이라고 불러. 이런 데서 우리 린아 친구를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반가워요. 편하게 밀알이라고 불러 주세요.”
엄마보다 열 살 정도 어린 린아네 이모는 우리를 엄청나게 반가워하며 방방 뛰어다녔다. 서양식으로 끌어안고 인사를 하는 린아네 이모가 약간 부담스럽긴 했지만 원래부터 활달한 성격인 듯 거리낌 없이 구는 모습이 싫지는 않았다. 엄마도 비슷하게 느꼈는지 어느새 살갑게 말을 주고받았다.
“우린 짜뚜짝 시장부터 가려고요. 하도 유명하다고 해서. 일정이 달라서 밤에나 보겠네. 잘 둘러보고 와요.”
엄마가 린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밀알 이모한테도 인사를 건넸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서운해하는 눈치라 나는 조금 놀랐다. 나만큼이나 낯을 가리는 엄마가 스스럼없이 마음을 여는 걸 보니 신기했다. 낯선 곳에 와서인지 아니면 린아와 밀알 이모가 그만큼 마음에 들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엄마가 스스럼없이 대하니 나도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린아네와 헤어지고 우리는 툭툭이를 타고 짜뚜짝 시장으로 향했다. 엄마는 잔뜩 들떠 사진을 쉴 새 없이 찍었다. 색색의 건물들과 자동차들이 눈을 사로잡았다. 아주 복잡한 것 같으면서도 단순하고,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다채롭게 어우러진 풍경들이 신기했다. 짜뚜짝 시장은 상상 이상으로 북적거렸다. 오천여 개나 된다는 가게들이 죽 늘어서 있고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길 사이 사이로 온갖 국적의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사람들에게 밀리지 않으려 기를 쓰면서 엄마를 놓칠까봐 딱 달라붙어 걸었다. 실을 일일이 꼬아 만든 장식품들부터 조개들을 풍성하게 엮어 만든 화려한 풍경들, 직접 가죽을 고르고 이니셜을 새겨 넣을 수 있는 여권 지갑 등 한국에서는 쉽게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눈을 사로잡았다.
처음 와 본 티를 팍팍 내며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엄마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보더니 어디론가 내달렸다. 나는 깜짝 놀라 엄마 뒤를 정신없이 쫓아갔다.
“엄마! 어디 가는 건데? 잠깐 멈춰 봐. 어?”
내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엄마가 달리던 걸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지갑. 지갑이 없어.”
엄마의 얼굴이 창백했다. 희게 질린 엄마의 얼굴을 보자 아찔했다. 말로만 듣던 소매치기를 당한 거였다. 이런 일은 다른 사람들한테나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는데.
“엄마, 설마 거기에 돈 다 넣어놓은 건 아니지? 어제 분명히 나눠서 넣었잖아.”
엄마는 울상을 지으며 이마를 짚었다. 시장에선 돈을 많이 쓰게 될 것 같아 일부러 넉넉하게 챙겨 왔다는 거였다. 여기저기 나눠 담으면 넣었다 뺐다 하기가 성가실 것 같아 ‘지갑만 단단히 챙기면 되겠지.’ 하고 그냥 지갑에 넣어왔다고 했다. 힘이 쪽 빠졌다. 나는 얼른 주머니 여기저기를 뒤져 보았다. 십 밧짜리 두 장이 나왔다. 숙소까지 갈 택시비도 빠듯한 돈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기만 한 하늘이 순간 노랗게 보였다. 눈앞이 캄캄했다. 처음 당해 보는 일에 엄마는 완전히 혼이 나가 있었다. 여권이나 휴대폰은 그대로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일단은 숙소로 돌아가야 돈을 다시 가져오든 말든 할 텐데, 숙소까지 이동할 방법도 없으니 막막했다. 떠들썩한 시장 분위기 때문에 정신이 더 없었다. 그때 퍼뜩 린아 생각이 났다. 얼른 구글 지도를 찾아보니 왕궁과 시장이 그렇게 많이 멀지는 않았다.
“잠깐만, 엄마. 린아한테 혹시 와줄 수 있는지 물어볼게.”
나는 린아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문자를 보냈다.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았지만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햇볕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시장 한복판에, 수없이 많은 사람이 오가는 길 한가운데에 엄마랑 나랑 둘만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었으니까. 린아는 답장이 없었다. 속이 탔다. 전화를 걸까 말까 망설이는데, 내 마음이 전달되기라도 한 것처럼 린아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 지금 툭툭이 타고 그쪽으로 가고 있어. 복잡하니까 시장에 있지 말고 역 쪽으로 나와 있어. 우리 왓포 사원으로 갈 건데 같이 움직이자. 어때?”
린아가 물었다.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망설여졌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엄마랑 나는 제대로 구경할 새도 없이 겁부터 먹어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숙소로 돌아가버리기에는 여기까지 온 게 너무 아까웠다. 결국 나중에 한꺼번에 셈을 해서 갚기로 하고 넷이 같이 돌아다니기로 했다. 다행히 린아네 이모는 자유 여행을 많이 해 봐 여러 상황에 능숙하게 대처할 줄 알았다. 여윳돈도 넉넉하게 챙겨와 여러 주머니에 분배를 해 둬서 종일 같이 다녀도 끄떡없다고 우리를 안심시켰다.
우리 넷은 시장을 뒤로하고 왓포 사원으로 향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 때문에 타격을 받긴 했지만 새로운 곳을 보자 다시 기운이 났다. 사원의 어마어마한 규모와 거대한 불상들, 건축물들의 섬세함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감동과 별개로 더운 날씨에 오래 걸으니 확실히 금방 지쳤다. 무리하지 않으려 대충 돌아다녔는데도 어질어질했다. 배낭여행을 즐겨 한다는 밀알 이모만 빼고 다들 금세 지쳐 헉헉거렸다. 특히 점심때가 되자 배가 너무 고파, 찾아 놨던 맛집은 가볼 생각도 못하고 눈에 보이는 아무 식당으로 들어가 똠얌꿍과 팟타이를 시켜 먹었다.
“다 너무 맛있잖아! 나 여기서 살아야 할 것 같아. 밀알 우리 이사 올까? 응? 응?”
린아는 난리를 치며 엄지를 치켜 올렸다. 그 모습이 웃겨 다 같이 한바탕 웃었다. 나는 웃으면서도 새삼 린아를 다시금 힐끗거렸다. 햇볕에 타 그새 까무잡잡해진 린아는 학교에서 보던 것과는 또다른 느낌이었다. 훨씬 더 경쾌하고 밝아보였다. 이쪽이 진짜 린아의 모습에 한 뼘 더 가까운 걸까. 그럼 린아의 눈에 나는 어떤 애로 보였을까. 지금의 나는 또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조금씩 궁금한 게 늘어났다. 낯선 곳에 와 있어 그런지 사소한 것들까지 평소와는 다르게 다가왔다.
우리는 부른 배를 두드리면서 코코넛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사 먹고 왓 아룬으로 가기 위해 선착장으로 향했다. 손짓과 단어 몇 개만 얘기해도 사람들이 친절하게 길을 알려 주어서 별로 헤맬 일이 없었다. 선착장에도 이미 많은 사람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우리는 그 줄 끝에 서서 강을 구경했다. 태국에서 제일 긴 강이라는 차오프라야 강은 흙탕물로 제법 거세게 출렁이고 있었다. 조금 무서웠지만 보트로 오 분 남짓이면 바로 건너편 왓 아룬에 도착한다고 해 그렇게 많이 불안하지는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배에 오르는데 파도 때문에 배가 잠시 흔들렸다. 내가 휘청거리자 먼저 올라탄 린아가 손을 뻗어 붙잡아주었다. 무심코 그 손을 잡았다 얼른 손을 뗐는데, 어쩐지 가는 내내 가슴이 묘하게 울렁거리고 린아의 손과 닿았던 손끝이 화끈거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새벽 사원의 모습에 엄마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곳에 제일 와 보고 싶었다는 린아도 기다렸다는 듯 카메라를 꺼내들고 호들갑을 떨었다. 희디흰 사원의 모습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조개와 자기로 장식된 무늬들은 섬세하고 정교했다. 조각에 대해서도, 건축에 대해서도 잘 몰랐지만 경이로웠다. 더없이 웅장한 그 모습에 어쩐지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팔짝거리며 사방으로 뛰어다닐 것 같았던 린아는 막상 사원 안으로 들어서자 어째서인지 좀 가라앉아 보였다. 밀알 이모도 묘하게 조용했다. 나는 휴대폰으로 정신없이 사진을 찍으며 간간이 렌즈에 비치는 린아의 모습을 봤다. 린아는 기도하는 것처럼 두 손을 모으고 서서 사원을 올려다봤다. 자세히 보니 목걸이를 손안에 쥐고 있었다.
“그건 뭐야? 여기 와서 산 거야?”
지금까지와 다르게 사뭇 진지해 보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다가가 말을 걸고 말았다. 린아는 잠깐 멈칫하다가 싱긋 웃었다.
“우리 강 여사야. 내 외할머니.”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나는 멈칫했다. 린아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건 유골 목걸이인데, 이 안에 할머니 뼛가루가 있어. 이모랑 나랑 하나씩 나눠 가졌어. 할머니가 여길 와 보고 싶어했거든. 셋이 꼭 같이 오기로 했는데 결국 같이 못 왔네. 그래도 여기 함께 있는 거니까.”
린아는 그렇게 말하며 목걸이에 여러 번 입을 맞췄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그때 갑작스럽게 빗방울이 툭 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으앗, 우산 안 가져왔는데. 일단 저리로 가자. 얼른 뛰어!”
린아가 목걸이를 티셔츠 안으로 쏙 집어넣고 비를 피할 데를 찾아 뛰어갔다. 갑자기 내린 비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한쪽으로 모여들었다. 밀알 이모와 엄마가 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잘 보이지 않을 테지만 혹시 걱정할까봐 우리도 껑충껑충 뛰며 손짓을 해 보였다.
비는 짧게 쏟아지다 금방 그칠 것 같았다. 여기는 그런 비가 잦다고 했다. 잠깐만 기다리면 또 지나가겠지 싶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다들 한쪽으로 몰려들었다. 우산을 쓰지 않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자 린아와 나는 어쩔 수 없이 가까이 앉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선가 달짝지근한 말리꽃 향기가 땀 냄새와 섞여 났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할 것 같은데 입이 달라붙은 것처럼 한 마디가 안 나왔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계속 린아가 말을 걸어 줘서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거였다. 어쩔 줄 모르고 손톱만 잘근잘근 씹고 있는데, 누굴 닮아서 그렇게 뻣뻣하냐고 혀를 차던 아빠의 모습이 불쑥 떠올랐다. 준비되어 있지 않을 때 치고 들어오는 기억은 불쾌했다.
솔직히, 아빠는 말을 거를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빠와 헤어질 때 엄마는 아빠가 무심코 뱉었던 백 가지의 나쁜 말을 목록으로 적어 건넸다. 얼핏 봤던 그 목록에는 내가 자주 들었던 말들도 꽤 여러 개 적혀 있었다. 여하튼, 나는 점점 민망해졌고 쓸데없이 아빠가 한 부정적인 말들만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자 어쩐지 몸 여기저기가 가려운 느낌이 들었다. 팔을 북북 긁고 있는데, 이번에도 린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왠지 네가 썼던 글 생각난다. 왜, 우리 국어 시간에 발표했던 거. 사실 나 그때부터 너랑 친해지고 싶었는데 한 학기가 다 지나도록 말 한 번을 못 걸어봤어. 근데 여기서 딱 만나다니. 웃기지?”
린아가 코를 찡긋거리며 키득거렸다. 반면 나는 생각지도 않았던 얘기에 멍해졌다. 나랑 친해지고 싶었다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얘기였다. 솔직히 린아는 반에서 꽤 인기가 있었다. 뭐든 곧잘 하는 편이었고 어딜 가든 눈에 띄는 존재감이 있었다. 그에 반해 나는 여태 친한 친구도 한 명 없었다. 학교에서도 거의 혼자 책을 읽거나 뭔가를 끄적거리는 게 다였다. 그런데 나랑 친해지고 싶었다니. 게다가 내가 썼던 글을 기억한다고? 믿을 수 없다 못해 황당하기까지 했다. 내 기분을 알 리 없는 린아는 얘기를 이어갔다.
“있잖아. 나 가끔 네가 발표했던 글 혼자 생각해보고 그랬다? 특히 그 구절이 좋았어. ‘같이 없어도 같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같이 있어도 같이 있는 것 같지 않았던 때가 있었던 것처럼.’”
린아는 익숙한 문장을 조곤조곤 읊었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내가 쓴 문장을 누군가 소리 내 읽어주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당연히 그 문장을 기억했다. 엄마 아빠가 이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썼던 글의 일부분이었다.
“당신이 한 마디 뱉을 때마다 내 존재 가치가 없어지는 기분이야. 그런데 우리가 같이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언젠가 엄마가 아빠에게 따져 물었다.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도 아빠도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때 우리 가족은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셋 다 다른 방향으로 돌아서 있어 서로의 표정을 살필 수 없었다. 엄마 아빠가 완전히 헤어지고 나자 도리어 조금 편해졌다. 더이상 엄마 아빠의 감정을 살피느라 쩔쩔맬 필요가 없었다. 간간이 오는 아빠의 문자에도 편하게 답할 수 있었다.
가끔 보게 된 아빠는 이제 할 수 있는 한 좋은 말만 하려고 애썼다. 그게 어색하면서도 싫지 않았다. 그런 시간이 쌓이자 아빠가 없는데도 같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생겼다. 하지만 그게 아빠와 함께 살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냥, 정말로 그냥 그럴 때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 걸 다 기억하냐? 그냥 끄적거린 건데.”
괜히 민망해 불퉁거리자 린아가 피식 웃었다. 그리곤 다시 말을 이었다.
“뭐, 나도 그냥. 그냥 생각이 나더라고. 예전에 우리 엄마랑 같이 있으면 꼭 그런 기분이었거든. 종일 집에 같이 있는데, 엄마는 창밖만 내다보고 꼼짝도 하지 않고. 나는 그런 엄마 옆에서 또 꼼짝도 하지 않고. 엄마가 우울증이었거든. 엄마는 아픈 건데, 나도 아는데, 그래도 외롭더라. 같이 있어도 같이 있는 것 같지 않더라고.”
린아는 말을 마치고 한쪽 팔을 쭉 뻗어보더니 “비 그쳤다, 가자.” 하고 말했다. 그럼 이제 엄마랑은 같이 안 사냐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괜히 아픈 데를 건드리는 걸까 싶어 물어보지 못했다. 린아는 밀알 이모와 우리 엄마가 있는 데로 곧장 달려갔다. 그 뒤를 쫓아가면서 생각했다. 네가 말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나도 정확히 알 것 같다고. 나도 그런 걸 말하고 싶었던 게 맞다고. 그걸 말하기 전에 비가 그쳐버린 게 어쩐지 좀 아쉬웠다.
우리는 발 마사지를 한 번 받고 아시아티크로 가 야시장을 둘러봤다. 엄마는 여기까지 왔으니 사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사라고 배짱을 부렸다. 나는 방콕의 풍경이 담긴 자석 몇 개를 골랐고 엄마는 라탄백 하나랑 목각으로 된 코끼리 장식품들을 샀다. 밀알 이모는 바람이 불면 소리가 나는 종들을 종류별로 사 모았다. 린아는 한참을 기웃거리기만 하더니 이모에게 스노우볼 하나를 사달라고 했다. 안에 코끼리 두 마리가 들어 있는 스노우볼이었다. 엄마 코끼리랑 아기 코끼리가 그 안에 다정하게 앉아 있었다. 손바닥에 올려두고 살짝 흔드니 반짝이들이 차르르 흩어졌다 천천히 가라앉았다. 린아가 그걸 보고 가만히 웃었다. 그 웃음을 보는데 어쩐지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남은 일정 내내 함께 다녔다. 엄마가 첫날의 돈을 갚으려 하자 밀알 이모가 대신 맛있는 걸 사달라고 졸라서, 그날 점심으로는 백 년의 전통을 가졌다는 허름한 오리 국숫집에서 밥을 먹었다. 처음엔 가게의 외양만 보고 실망을 좀 했는데, 잘 구워진 오리가 듬뿍 올라간 국수를 먹고는 눈이 번쩍 뜨여 국물까지 싹싹 비웠다. 린아의 말처럼 진짜 여기 와서 살고 싶어지는 맛이었다. 내가 그 말을 웅얼거리며 했더니 모두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는 미리 짜 놓은 일정 중 어떤 것은 취소하고 어떤 것은 추가했다. 다행히 넷이 어울려 다니는 게 생각처럼 어렵지 않았다. 린아네가 우리보다 일찍 방콕에 왔는데 신기하게도 가는 날은 딱 겹쳐 더 일정 조율하기가 쉬웠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웃고 떠들고 돌아다녔더니 어쩐지 정말로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묘했다.
마지막 날, 게스트하우스에 맡겨놨던 짐을 찾아 공항으로 향하는 길에 밀알 이모는 차창을 열고 “방콕아 안녕!”하고 소리를 질렀다. 엄마가 그걸 보고는 킥킥거리더니 덩달아 “방콕아 안녕!”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까지 장난기 넘치는 엄마는 처음이었다. 운전기사 아저씨가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좋아, 좋아.”하고 한국말로 말해서 우리 모두 킬킬거렸다.
“엄마랑 밀알 이모랑 왜 이렇게 잘 맞아?”
내가 놀리듯 묻자 둘은 성공했다는 듯 하이파이브를 했고 린아랑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공항에서 엄마랑 이모가 수속을 밟는 동안, 우리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캄캄해진 공항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믿을 수 없게 사람이 많았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 사이에 우리가 서 있다는 게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벌써 좀 아쉬웠다. 작은 체구의 친절한 사람들, 화려한 태국 돈, 기호 같은 문자들, 어딜 가나 차랑차랑 울리는 풍경 소리, 사원에서 풍기는 아릿하고 매캐한 향냄새. 모든 것이 종종 불쑥불쑥 떠오를 것 같았다.
“드디어 방콕도 끝이네. 돌아가면 뭐 할 거야?”
짐 가방을 괜스레 밀었다 당겼다 하며 린아가 물었다.
“그냥, 뭐. 2학기 준비?”
내가 말하고도 시시해 픽 웃고 말았다. 린아도 따라 웃었다.
“너 막 내가 말 걸면 도망가고 그러면 안 된다? 왠지 한국 가면 모른 척할 것 같아.”
린아가 눈을 흘기는 척하며 말하자 뜨끔한 나는 괜히 천장을 보며 볼을 긁적거렸다. ‘돌아가면 린아랑은 전처럼 어색해지겠지’, 하고 내심 생각했던 게 딱 걸린 거였다. 나는 괜스레 목이 마르다는 핑계를 대며 가방을 뒤져 라임 주스 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시고 린아에게도 마시라며 건넸다. 내가 딴청을 피우자 린아는 봐줬다는 듯 샐쭉 눈을 흘기곤 화제를 돌렸다.
“아, 사람 진짜 많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거의 다 집으로 돌아가는 거겠지? 아님 다른 곳으로 또 떠나거나. 다들 뭔가를 잊기 위해 떠나는 걸까?”
린아가 주스를 단번에 마시고 턱에 손을 괸 채 중얼거렸다.
“글쎄. 어떤 건 잊고 어떤 건 잊지 않으려고 떠나는 게 아닐까? 다 잊어버리면 좀 슬프니까.”
나는 곰곰 생각하다 무심코 대답을 해버렸다.
“엇, 너 처음으로 내 말에 제대로 대답해준 것 같은데?”
린아가 빙글거리면서 놀리자 그제야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내 얼굴이 빨개지자 린아는 농담이라며 내 어깨를 두드리고는 다시 저 멀리 창 너머를 바라봤다. 잠잠해진 린아를 보고 있으니 우습게도 자꾸 다시 말을 걸고 싶어졌다. ‘너는 무엇을 잊고 싶었어? 무엇을 잊고 싶지 않았어?’ 묻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잊고 싶은 것과 잊고 싶지 않은 것도 오래도록 설명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말들을 늘어놓는 대신 린아처럼 잠자코 바깥을 내다보았다. 한국으로 돌아가서도 린아와 이곳에서처럼 솔직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게 된다면, 그땐 더 잘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과연 그런 시간이 생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우리는 낯선 곳에서 성큼 가까워졌지만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면 그만큼 더 멀어질지도 몰랐다. 비겁하게 그런 걸 재고 있는 게 한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할머니가 좋아하시겠다. 여기저기 구경 많이 하시고 집으로 돌아가셔서.”
나는 간신히 용기를 내 그 말만은 전했다. 그 말마저 하지 않으면 정말로 내내 후회할 것 같았다. 내 말에 린아가 목걸이를 옷 위로 꺼내 손으로 꽉 한 번 쥐었다. 그리고는 작게 “고마워.”하며 웃었다. 그때 멀리서 엄마와 밀알 이모가 얼른 오라며 손짓을 했다. 우리는 벌떡 일어나 후다닥 짐을 챙겨 달려갔다.
진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윤슬
어제의 어린이도, 오늘의 어린이도, 내일의 어린이도 응원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모습이든 말이에요. 종종 생각나는 동화를 쓰고 싶습니다.
2021/02/23
3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