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신부 입장!”
   귀에 익은 행진곡을 배경으로, 신랑신부가 두 손을 꼭 맞잡은 채 하얀 카펫을 걸었다. 하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고, 조영근은 아까부터 계속 코를 훌쩍였다. 둘째 누나가 빨리 독립했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으면서, 막상 결혼해서 나가 산다니 서운한 모양이었다. 보다 못한 푸른이가 조영근에게 휴지를 뽑아 건넸다. 조영근이 코를 휙 풀었다.
   이제 신랑신부가 사랑의 서약문을 낭독할 차례였다. 결혼식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서다. 난 두 눈을 감고 마이크를 통해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푸른이는 또 검은 머리 파뿌리라며 지루해했지만, 난 좋았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엔 정말로 그렇게 될 거란 믿음이 담겨있었으니까. 어쩌면 결혼식은 그런 사랑을 찾은 사람들만이 하는, 고귀한 의식 같은 걸지도 모른다.
   그런 멋진 결혼식을 나도 꿈꾼다. 언제 어디서 할지도 일찌감치 생각해두었다. 계절은 덥지도 춥지도 않은 봄이어야 하고, 실내보단 푸른 잎사귀가 싱그럽게 돋아난 야외가 좋겠다. 하객은 내가 아끼고 나를 아끼는 사람 몇 명만 초대할 거다. 맛있는 음식은 필수지만, 축의금은 안 받아도 된다. 낮에는 내가 직접 쓴 사랑의 서약문을 낭독하고, 밤에는 달빛을 조명 삼아 춤을 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신부가 너무 예쁘다. 그렇지?”
   푸른이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귀가 간지러워서, 하마터면 또 말할 뻔했다. 나랑 결혼하자고. 이 결혼식의 주인공은 나와 푸른이니까. 
   어렸을 땐, 시도 때도 없이 프러포즈를 했다. 소꿉놀이를 하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말이 막 나왔다. 하지만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푸른이조차도 그랬다. 부모님들은 축가도 불러주고 주례도 서주겠다면서, 꼭 한마디를 덧붙여 내 속을 뒤집어놓았다. ‘둘 중 하나가 남자였으면 결혼시키는 건데……’라고. 난 어른들이 불가능한 일을 말하듯 말끝을 흐리는 게 싫다.
   우리나라는 여자와 여자끼린 결혼할 수 없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하지만 법은 바뀐다. 옛날에는 성과 본관이 같은 동성동본은 결혼할 수 없다고 했다. 이젠 그게 결혼하는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법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럼 결혼이 가능한 나라로 가면 된다. 네덜란드, 대만, 남아공 등등…… 생각보다 많은 나라가 있다.
   신랑신부가 함께 퇴장했다. 조영근은 아예 대놓고 통곡했다. 푸른이는 예식장에 장식된 꽃을 구경하러 가자고 내 손을 잡고 이끌었다. 처음엔 나도 내 마음을 잘 몰랐다. 친구니까 계속 같이 있고 싶은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젠 손을 잡고 싶고, 안아주고 싶고, 어쩔 땐 입을 맞추는 상상을 하다가 얼굴이 붉어진다. 맞잡은 손에 땀이 차오를수록 자꾸만 욕심이 났다. 푸른이의 옆자리에 친구가 아닌 여자친구로 서 있고 싶다고. 그래서 하얀 카펫을 서로의 보폭에 맞춰 걷고 싶다고.
   결혼식이 끝났다. 어른들은 자기들끼리 뒤풀이를 해야겠다며 우리에게 먼저 집에 가라고 했다. 푸른이도 우리끼리 같이 놀자고 했지만, 난 피곤하다는 핑계로 자리를 떴다. 그리곤 집에 가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아파트 상가에 있는 진이분식으로 갔다. 얼굴이 퉁퉁 부은 조영근이 벌써 와있었다. 
   조영근은 예식장에서 뷔페를 잔뜩 먹었으면서 음식을 또 엄청 주문했다.
   “너 뷔페 안 먹었냐?”
   “음식이 잘 안 넘어가더라고. 자, 상담료 대신이라 치고. 뭔 고민이야.”
   거짓말이다. 열 접시는 넘게 갖다 먹었으면서. 난 주머니 사정을 확인하곤 자세를 바로잡았다. 저래 보여도 조영근의 별명은 연애 박사다. 먹을 것만 사주면 연애 상담을 기가 막히게 잘해준다. 우리 반에서만 벌써 세 커플이 조영근의 조언을 받고 연결됐다. 난 그게 다 누나들 덕분이라는 걸 안다. 누나들에게 야금야금 주워들은 걸로 아는 척이다.
   “지난번에 말했던 내 친구 얘긴데…….”
   하지만 지금 날 도와줄 사람은 조영근뿐이다. 난 ‘내 친구’가 드디어 고백하기로 결심했다고, 문제는 방법을 몰라 고민이라고 했다.
   “그 친구는 좋아하는 사람을 언제 처음 만났어?”
   조영근이 떡볶이에서 어묵만 골라 집어먹으며 물었다.
   “그런 것도 알려줘야 돼?”
   내 말에 조영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최선의 방법으로 고백하기 위해서 꼭 알아야 하는 정보라고 했다.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푸른이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푸른이와 난 유치원 6세 반에서 처음 만났다. 동네 뒷산으로 야외수업을 갔다가 교실로 돌아왔는데, 처음 보는 여자애가 내 책상에 앉아있었다. 그 앤 낯가림이 되게 심했다. 비키라고 말했을 뿐인데, 꼭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결국엔 아이들 앞에서 자기소개도 못하고 선생님 뒤로 가서 숨었다.
   난 그게 꼭 내 탓 같아서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좀 챙겨줬다. 소꿉놀이도 같이하자고 끼워주고, 내 친구들도 소개시켜줬다. 마침 푸른이가 우리 아파트로 이사를 와서, 서로의 집에도 자주 놀러 갔다. 이제 우린 24시간이 모자랄 만큼 붙어다닌다. 통화는 기본 1시간이고, 톡은 휴대폰을 산 뒤로 끊긴 적이 없다.
   “그럼 언제부터 좋아하게 됐어?”
   떡볶이 국물에 튀김을 찍어먹던 조영근이 물었다. 
   “그게……”
   언제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었다. 그냥 정신을 차리니까, 푸른이가 이미 내게 스며들어있었다. 마치 가랑비에 어깨가 젖듯 말이다. 그럼 푸른이는 어떨까? 나와 같을까? 난 그게 무척 궁금했다.
   “진짜 고백하고 싶어?”
   조영근이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난 결심했어!”
   “고백하면 김푸른이랑 친구도 못 될 수도 있는데?”
   조영근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나는 정곡을 찔린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조영근 말이 맞다. 멋대로 고백했다가 내가 우리 사이를 다 망쳐버릴까 봐 무섭다. 그런데 조영근은 이게 내 얘기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이거 내 친구……”
   “고백할래? 아니면 이대로 지낼래?”
   조영근이 내 말을 싹둑 잘랐다. 난 침을 꿀꺽 삼켰다.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데, 언제까지고 두고만 볼 수 없었다. 푸른이를 만나고부터 내 마음은 점점 더 크고 넓어졌다. 아주 거대하고 근사한 풍선을 담을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그게 터지면 결국엔 나도 다치고, 푸른이도 다칠 거다.
   “……할래. 고백할래!”
   내가 외쳤다. 풍선이 터지면 푸른이가 다치지 않도록 내가 막아서면 된다. 모 아니면 도. 난 결혼식의 주인공이고 싶지, 무대 아래서 박수를 쳐주는 하객이고 싶진 않다.
   “좋아. 일단 고백부터 하자.”
   “지금 그걸 못해서 너한테 묻고 있잖아.”
   “그 고백이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밝히자는 거지. 그러면……”
   “그러면?”
   난 숨을 죽인 채 조영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걔가 누구냐고 묻겠지. 그때 네가 힌트를 주면서 맞춰보라고 해. 힌트는 걔가 자기인 걸 쉽게 알아챌 수 있어야 해. 그리고 만나자는 약속을 잡아. 약속 전까지 걘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았을 거야. 네 마음을 수락하면 약속장소에 나올 거고, 거절하면 안 나오겠지.”
   “안 나온다……”
   “그렇지만 직접 고백한 건 아니니까 계속 친구로는 지낼 수 있어.”
   “그건…… 그건 너무 비겁하잖아.”
   “최선의 방법이지.”
   조영근이 티슈로 입을 닦곤 일어났다. 난 한 입도 못 먹었는데, 그릇이 깨끗했다. 이제 내 앞엔 떡볶이 계산서와 비겁하긴 해도 내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고백 방법만이 남았다. 
   한 달 용돈을 탈탈 털어 계산하고 나오는데, 푸른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디야?”
   “어, 나 집. 집이야.”
   얼떨결에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조영근이 입 모양으로 ‘김푸른이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영근은 이참에 확 말해버리라면서 나를 부추겼다. 머릿속이 완전 뒤죽박죽이었다. 푸른이가 뭐라 뭐라 말하는데,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너 내 말 듣고 있어?”
   푸른이가 물었다.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내가 눈을 딱 감고 말했다. 조영근이 옆에서 박수를 쳤다. 푸른이는 놀란 듯 대답이 없었다. 마음이 괜히 조급해졌다.
   “힌트 줄 테니까 네가 맞춰볼래?”
   “……좋아.”
   푸른이가 대답했다.
   “음…… 일단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야. 나랑 같은 유치원을 나왔고, 지금은 같은 반이야. 웃을 땐 왼쪽 볼의 보조개가 쏙 들어가고, 이야기를 할 땐 항상 나와 눈을 꼭 맞춰줘.”
   이 정도면 이름만 빼고 거의 다 말한 셈이다.
   “내일 저녁 6시 호수정원으로 나오면 누군지 알려줄게.”
   호수정원은 조영근이 추천해준 장소다. 누나들이 자주 데이트하던 곳인데, 밤에는 LED 장미에 불이 들어와서 아주 로맨틱하다고 했다.
   “사랑의 벤치!”
   조영근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깜빡했다. 
   “아, 사랑의 벤치로 와.”
   내가 황급히 덧붙여 말했다. 조영근은 ‘사랑의 벤치’에서 고백해야 사랑이 이뤄진다고 했다. 둘째 누나도 결혼하기 전에 이곳에서 남자친구에게 프러포즈를 했다고 말이다. 난 푸른이가 더 묻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잘했어.”
   조영근이 하이파이브를 하자고 손바닥을 들었다. 나도 손바닥을 마주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조영근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내가 잘한 건지 모르겠다.

   호수정원은 별게 없었다. LED 장미엔 아직 불이 들어오지 않아, 앙상한 뼈대만 보였다. 내가 너무 일찍 나온 탓이었다. 난 호수정원을 가로지르며 ‘사랑의 벤치’를 찾았다. 사랑의 벤치는 딱 봐도 눈에 띄었다. 하트모양의 프레임이 벤치에 붙어있는 데다가, 사람들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서 있었다. 난 근처에서 기다리며 기회를 엿봤다.
   하늘이 어두워지자, 앙상했던 LED 장미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LED 장미는 꽃이라기보단 별에 더 가까웠다. 어둠 속에서 송이마다 반짝반짝 빛나는 게 그랬다. 사람들이 LED 장미를 구경하기 위해 정원 곳곳으로 흩어졌다. 마침내 사랑의 벤치에도 자리가 났다. 난 그 틈을 타 벤치를 차지했다. 
   휴대폰을 얼핏 확인하니까, 약속 시간이 조금 지나있었다. 난 주변을 휘 둘러봤다. 푸른이가 날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을까 봐 걱정되었다. 전화를 할까 톡을 할까 고민하는 사이, 벨 소리가 울렸다. 
   “딸, 어디야?”
   엄마였다.
   “어, 그게 나 푸른이랑 놀러 왔는데.”
   “푸른이? 방금 우리 집에 왔다 갔는데?”
   엄마가 말했다.
   “우리 집에?”
   내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응. 지난번에 빌려 간 그릇 갖다준다고. 그러고 오늘 외식한다던데 둘이 같이 있어?”
   “외식한다고?”
   “그래. 저녁 먹고 가라니까 괜찮다면서. 너도 빨리 집에 와. 밥 먹어야지.”
   휴대폰을 든 손에 힘이 빠졌다. 푸른이는 나와 한 약속을 잊은 걸까. 아니면…… 인기척이 들렸다. 설마 싶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몇몇 사람들이 사랑의 벤치 주위를 서성이는 게 보였다. 그중 한 사람이 내게 다가와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난 카메라를 받아들며 벤치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연인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하트모양의 프레임 속으로 들어가 입을 맞췄다. 
   줄이 금세 또 늘어났다. 난 옆으로 비켜서서 프레임 속의 두 사람을 바라봤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바뀌었다. 나이도, 얼굴도, 옷차림도. 심지어는 비슷비슷해 보이는 포즈까지도 조금씩 달라졌다. 달라지지 않은 것은 딱 하나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성별조합 말이다. 한쪽은 여자, 한쪽은 남자. 그건 나만 모르는 규칙 같았다. 
   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찬 공기가 몸속으로 밀려들어왔다. 그때 알았다. LED 장미는 예쁘지만, 향기는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난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을 켰다. 부재중도, 톡도 없었다. 푸른이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근질했다. 하지만 조금 참기로 했다. 어차피 곧 푸른이를 만난다. 오늘은 월요일이고, 우린 매일 아파트 관리사무실 앞에서 만나 학교에 간다. 난 베란다로 나가 밖을 내다봤다. 관리사무실 앞엔 아직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았다. 
   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거울을 봤다. 울상인 내 얼굴이 보였다.
   “어젠 왜 안 나왔어?” 
   난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며 미리 준비해둔 말을 연습했다. 감정은 쏙 빼고, 사실만 묻는다. 아무렇지 않아 보여야 했다.
   그런데 푸른이가 없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푸른이가 나를 피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먼저 학교에 갈 사정이 있었던 걸까? 그래도 전화 한 통, 톡 하나 남겨줄 순 있었을 텐데. 답도 없이 꼬리만 길게 늘어지니까, 대뜸 화가 났다. 약속은 푸른이가 다 어겼다. 호수정원에서 만나자는 것도, 매일 아침 함께 등교하는 것도 전부 다. 그렇다면 내가 주눅들 필요는 없다. 
   난 빠른 걸음으로 학교에 가 교실 문을 활짝 열었다. 좀 세게 열어서 몇몇 아이들이 나를 쳐다봤다. 문을 조심스레 닫고 교실을 둘러봤다. 푸른이가 자기 자리에서 날 보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분명 나와 눈이 마주쳤으면서 인사도 안 했다. 난 실내화를 쿵쾅대며 푸른이에게 다가갔다. 
   “너 왜 먼저 갔어? 어젠 왜 안 나왔고?”
   내가 쏘아붙이듯 물었다. 
   “아, 깜빡했어.”
   푸른이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뭐? 그걸 어떻게 잊어?”
   약속은 지키지도 않고, 말도 없이 먼저 가고. 난 서운해서 눈물이 다 나올 것 같았다.
   “내가 나간다고 말 안 했잖아. 네 할 말만 하고 끊었지.”
   푸른이가 딴청을 피우며 말했다. 그러면서 속삭이듯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고 그런 건 여기서도 알려줄 수 있잖아.”
   “진짜 궁금해? 여기서 말할까?”
   내가 홧김에 말했다. 반 아이들이 우리 곁을 와다다 뛰어 지나갔다. 정적이 푸른이와 나 사이로 흘렀다. 월요일 아침의 교실은 전혀 로맨틱하지 않다. 고백하기 아주 안 좋은 장소다.
   “아냐. 됐어.”
   푸른이가 교실을 나갔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어쩌면 푸른이는 이미 답을 한 걸지도 모른다. 내 고백을 받아줄 수 없다고.
   푸른이와 난 하루 종일 데면데면했다. 쉬는 시간에는 각자 자리에 앉아있고,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그래도 점심은 같이 먹긴 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지만. 몇몇 아이들이 둘이 싸웠냐고 은근슬쩍 물어왔다. 그때마다 난 어물쩍 웃어넘기느라 바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대로 고백하고 제대로 차일 걸 그랬다. 괜히 머리를 썼다가 이도 저도 아니게 됐다.
   “아직 가능성은 있어.”
   조영근이 나를 위로해준답시고 말을 걸었다.
   “뭔 가능성?”
   내가 가방을 챙기며 물었다. 푸른이는 아까 선생님 말씀이 끝나자마자, 쏜살같이 교실 밖으로 뛰어나가고 없었다.
   “김푸른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을 알아채지 못했을지도 모르잖아. 내가 방금 둘째 누나한테 물어봤는데, 지금 김푸른은 서운해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댔어.”
   “서운해한다고?”
   “생각해봐. 가장 친한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대. 이제 그 친구는 좋아하는 사람과 꼭 붙어다니겠지? 그럼 어쩌겠어. 하루아침에 친구를 빼앗긴 기분이지 않겠냐고.”
   조영근이 말했다. 차라리 그런 거라면 좋겠다. 그러면 난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푸른이는 언제나 나의 첫 번째 친구라고. 그리고 그렇게 말할 일은 없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푸른이니까. 조영근은 푸른이와 따로 만나 마음을 슬쩍 떠보겠다고 했다. 난 고개를 저었다. 이젠 다른 사람 뒤에 숨고 싶지 않았다.
   푸른이와의 톡 대화창을 열었다. 대화는 이틀 전, 토요일이 마지막이었다. 조영근의 둘째 누나 결혼식이 끝난 뒤, 집에 도착했을 때다.
   ‘많이 피곤해?’
   푸른이는 내 핑계를 진심으로 믿고 날 걱정해주었다. 그에 반해 난 내가 상처받지 않을 궁리만 잔뜩 했다. 어쩌면 푸른이가 불편해할 걸 알면서도 말이다. 난 푸른이가 보낸 마지막 톡을 반복해서 읽다가 대화창에 메시지를 적었다.
   ‘저녁 6시, 아파트 놀이터로 나와 줘. 너한테 할 이야기가 있어.’
   전송 버튼을 눌렀다. 숫자 1이 금방 사라졌다. 난 화들짝 놀라 대화창에서 재빨리 나왔다. 아직 고백하지 않았는데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약속 시간이 다가왔다. 난 놀이터로 나가 그네에 앉았다. 도움닫기를 하듯 발을 굴렀더니, 그네가 삐걱대며 움직였다. 삐걱삐걱. 그네 소리가 겹쳐서 났다. 옆을 돌아봤다. 푸른이가 어느새 내 옆 그네에 앉아있었다. 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 
   또 침묵이 흘렀다. 마음이 바늘로 쑤신 듯 아릿했다.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됐을까. 애초에 내가 너무 큰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만약이란 말은 나를 자꾸만 주눅 들게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 마음은 분명해졌다. 여기까지 온 이상, 난 푸른이와 계속 친구 할 마음이 없다. 아니, 자신이 없다.
   “저기…… 그게 말이야.”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푸른이가 말했다.
   “조영근이지?”
   난 내 귀를 의심했다.
   “같은 유치원에 같은 반. 보조개도 뭐 있는 것 같고.”
   푸른이가 내가 줬던 힌트를 곱씹으며 말했다. 김이 빠져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맞다. 조영근도 우리와 같은 유치원에 다녔고, 지금은 같은 반이다. 그렇지만 보조개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둘이 진이 분식에서 같이 있는 거 봤어.”
   “그건 사정이 있어서……”
   “거짓말 안 해도 돼.”
   푸른이가 단정하듯 말했다. 
   “거짓말 아니야. 나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어.”
   내가 말했다. 푸른이가 오해하는 건 싫다. 내 마음을 숨기는 것도. 
   해가 지면서 놀이터를 둘러싼 아파트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평범한 평일 저녁, 푸른이와 내가 어릴 적부터 만나서 놀던 놀이터. 이 익숙한 공간이 지금은 우리만의 별 같았다. 사람들에게서 외따로 떨어진, 푸른이와 나만을 위한 별. 집집마다 흘러나오는 불빛은 LED 장미처럼 빛났고, 날씨는 춥지도 덥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고백하기 딱 좋은 타이밍이다.
   “그럼 그게 나였으면 좋겠다.”
   푸른이가 말했다. 잠깐만. 뭐라고? 뭐가 나였으면 좋겠다고? 난 잘못 들었나 싶어 푸른이를 바라봤다. 
   “나는 이봄, 네가 좋으니까. 좋아하니까.”
   푸른이는 이야기를 할 땐 꼭 눈을 맞췄다. 그럼 난 막 하려고 했던 말을 종종 잊곤 했다. 푸른이의 눈이 내 모든 생각을 밀어냈으니까. 근데 지금은 그보다 더 큰 비상이 걸렸다. 푸른이가 날 좋아한다고? 난 그네에서 벌떡 일어나 숨을 몰아쉬었다. 100m 달리기를 한 것처럼 심장이 규칙도 없이 뛰었다. 혹시 내가 내뱉은 말을 푸른이가 한 말처럼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놀이터를 비추는 가로등이 켜졌다. 그 덕에 푸른이의 얼굴이 잘 보였다. 왼쪽 볼에 쏙 들어간 보조개까지도. 그건 방금 들은 말이 내 착각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푸른이가 내 자리에 잘못 앉아있었을 때. 내가 홀린 것처럼 그 보조개를 쿡 누른 거다. 쿡.
   사랑이 언제 시작되었냐고 물으면 이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난 처음부터였다고. 푸른이에게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고.
   “나랑…… 나랑 결혼할래?”
   내 말에 푸른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너무 성급했나보다. 그래, 일단은.
   “좋아해.”
   난 푸른이가 앉아있는 그넷줄을 붙잡았다. 그네가 삐걱대다가 이내 멈췄다. 푸른이가 나를 올려다봤다. 난 고개를 숙여 푸른이에게 입을 맞췄다.
   펑.
   풍선이 터지면 우리가 다칠 줄 알았다. 아니었다. 풍선 조각은 푸른이의 입술처럼 보드랍고 따듯했다. 물론 가슴이 찌르르하긴 했다. 꼬마 번개가 치는 것처럼. 난 주먹을 꼭 쥐고 숨을 들이켰다. 손끝에 담긴 온기가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며, 곁에 있는 푸른이의 숨결이 어느 때보다도 가까이서 느껴졌다. 그 숨결이 내 몸속으로 마구 밀려들어왔다. 산뜻한 향기를 품고서, 푸른 봄과 함께.

조은비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으세요?

2020/07/28
3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