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맞을 텐데……”
   엄마가 긴 복도를 내다보며 말했다. 등 뒤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덜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닫혔다.
   “너무 일찍 왔나?”
   나는 엄마를 따라 낡은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여기네.”
   1507호였다.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엄마가 고개를 쭉 빼고 집안을 들여다보더니 조심스레 현관으로 들어갔다. 나도 엄마를 따라 들어갔다. 집안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헉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집 안은 복잡했다. 아니, 복잡한 것 이상이었다. 빼곡했다.
   “하리야, 알지? 할머니는 쓰레기를 모으는 병이 있어. 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산처럼 쌓인 쓰레기들이 베란다 창을 가려서 집안은 어둑어둑했다. 밥솥, 청소기, 다리미, 영어 사전, 프라이팬, 플라스틱 그릇, 우산, 의자 여러 개, 풍경화 액자, 빛바랜 라면 봉지까지 있었다.
   쓰레기를 살피고 있는데 복도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엄마가 내 양팔을 붙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말할게. 집중하고 들어야 해. 아빠는 회사에서 잘렸어.”
   엄마 목소리가 떨렸다. 엄마는 나보다 더 긴장한 것 같았다.
   “너는 여기서 할머니랑 둘이 사는 거고. 알고 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아마 여기 못 있을 거야. 혼자 잘 있을 수 있지?”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지 엄마는 이런저런 주의 사항을 계속 이야기했다. 이미 수십 번 들은 이야기들이었다. 난 엄마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잠바 소매에 묻은 때를 손가락으로 비볐다. 엄마가 그냥 두라는 듯 내 손을 잡았다.
   복도에서 사람들 말소리와 발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엄마가 내 손을 꽉 잡았다. 엄마 손은 축축했다.
   한 할머니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엄마가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어서 인사드려야지.”
   “안녕하세요. 김하리입니다.”
   나는 엄마가 얘기했던 대로 또박또박 내 이름을 말하고, 90도로 허리 숙여 인사했다.
   할머니는 얼음이 든 커피를 쪽 빨아 마시더니 나를 향해 빙긋 웃었다.

   할머니가 두 손 가득 쓰레기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관리비 고지서를 들고 있었다. 연체라는 단어가 선명했다.
   “할머니, 우리 이제 어떡해요?”
   “컷!”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몸이 움찔했다.
   “손녀! 얼굴만 찡그리면 어떡해요. 더 슬픈 목소리로 해야지요. 지금 관리비가 밀렸고, 통장에 돈은 떨어졌다는 거잖아요. 여기 얼굴에 땀 좀 닦아줘요!”
   스태프 언니가 휴지로 얼굴을 꾹꾹 눌렀다. 등은 이미 땀으로 푹 젖었다. 초가을에 겨울 잠바는 너무 더웠다.
   현관문 밖에서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안절부절못하는 엄마가 보였다. 엄마와 눈이 마주치기 전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다시 해봅시다.”
   “하, 할머니. 우, 우리 이제 어떡해요?”
   “컷! 잠시 쉬었다 합시다.”
   감독님이 현관을 나섰다. 엄마가 감독님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이야?”
   할머니가 물었다. 촬영 때와는 전혀 다른 상큼한 목소리였다. 할머니는 앵글 밖으로 치워뒀던 커피를 가져와 쪽, 소리를 내며 마셨다.
   “괜찮아. 난 처음에는 두 마디 이상을 못했다니까. 결국 중간에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지. 넌 그때 나보다 백배는 잘하는데?”
   할머니가 웃었다. 여기서 나에게 잘한다고 해주는 사람은 할머니밖에 없었다. 응원으로 하는 말인 줄은 나도 알지만, 그래도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신기하게도 할머니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할머니가 목까지 올렸던 잠바 지퍼를 내렸다. 얇은 민소매 티셔츠가 보였다. 난 잠바 안에 두꺼운 스웨터까지 입었는데. 할머니가 잠바를 양쪽으로 펼쳐 보이자 안주머니 부분에 작은 아이스 팩이 붙어 있었다.
   “에어컨 없을 줄 알았어. 있어도 소리 들어갈까 봐 잘 안 켜기도 하고.”
   할머니가 아이스 팩 하나를 떼서 나에게 건넸다. 내가 망설이자 할머니는 내 손바닥 위에 아이스 팩을 올려놓았다.
   나는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스웨터 안에 아이스 팩을 넣고 스웨터 밑단을 바지 안으로 넣었다. 배가 조금 불룩해졌다. 배가 시렸지만 더운 것보다는 나았다.
   할머니가 방 안을 둘러보다 말했다.
   “난 어렸을 때 이 집보다 더 가난했어. 그런데 웃긴 게 뭔지 아니? 지금도 가난하다는 거야. 하하하하.”
   할머니가 높고 경쾌한 목소리로 웃었다. 그 모습이 낯익었다. 마치……
   “잠바는 네 건 아닌 거 같네.”
   “친구가 빌려줬어요.”
   “친구?”
   할머니가 잠바를 살펴보며 컵을 흔들었다. 달그락달그락 얼음 소리가 났다.

   엊그제 엄마와 함께 급하게 옷장을 뒤졌다. 촬영팀에서 갑자기 겨울 잠바를 입고 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싸 보이고, 낡고, 때 타고, 물려 입은 듯 커 보이는 것’으로.
   “아니, 소품을 왜 우리보고 준비하래?”
   엄마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냥 없다고 하라고 했더니 엄마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아마 무슨 사정이 있을 거라며, 괜히 불만을 말했다가 일이 어그러지면 안 된다고 했다. 이건 내 첫 촬영이다. 연기 학원을 다닌 지 육 개월 만에 처음으로 하는 일.
   낡은 잠바. 옷장을 뒤졌지만 그런 잠바는 없었다. 나는 매년 키가 쑥쑥 크는 바람에 겨울이 올 때마다 잠바를 새로 산다. 겨울 내내 잠바 하나만 입는 것도 아니고 코트와 잠바 몇 개를 번갈아 입으니 낡을 때까지 입어본 적이 없었다.
   작아진 잠바는 깨끗이 빨아서 기부했다. 다른 옷과 신발들도 함께 상자에 차곡차곡 담아 한 회사에 택배로 보냈다. 그 회사에서는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옷을 보내준다고 했다.
   “지금 백화점에 겨울 잠바는 없을 거고……"
   엄마가 스마트폰 화면을 분주히 터치했다. 막 가을로 접어들고 있어서 겨울 잠바를 살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인터넷에는 있었다. 엄마는 낮은 가격순으로 잠바를 정렬하고, 가장 위에 있는 것을 골랐다.
   다음날 새벽, 집 앞에는 잠바가 든 상자가 놓여 있었다. 잠바는 회색이었다.
   “촬영만 하고 기부해야겠어. 입을 만한 옷이 아니네.”
   엄마가 잠바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괜찮아 보였는데 마감이 허술하다고 했다. 거위 털이나 오리털이 아니라 솜이 들어있다고도 했다.
   잠바를 입어봤다. 두 사이즈 크게 샀더니 펑퍼짐해서 물려받은 느낌이 났다. 하지만 새 옷 티가 너무 났다. 당연했다. 새 옷이니까. 엄마가 당장 잠바를 입고 나가 놀라고 했다. 최대한 험하게. 살다 살다 험하게 놀라는 말을 엄마에게 듣다니. 은근히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놀이터로 나갔다. 일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아이들이 한 명도 없었다. 다행이기도 했다. 초가을에 겨울 잠바를 입고 돌아다니면 이상하게 볼 테니까.
   험하게 놀라고?
   그네를 아주 높이 탔지만 잠바는 멀쩡했다. 미끄럼틀을 몇 번 탔다. 일부러 눕는 자세로 탔다. 아래쪽에 먼지가 조금 묻었지만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어 보였다.
   분명 낡은 잠바라고 했는데. 낡으려면 시간이 필요한 건데.
   놀이터 바닥에서 떼굴떼굴 구르면 어떨까 생각했지만 도저히 그건 자신이 없었다. 대신 놀이터 옆 나무 기둥에 등을 비볐다. 나무 겉면이 까끌까끌해서 비빌 때마다 쓱쓱 소리가 났다. 쓱쓱, 쓱쓱. 옆구리도 쓱쓱. 배도 쓱쓱.
   “하하하하.”
   어디선가 높고 경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리하리! 너 거기서 뭐해?”
   지현이가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물었다. 지현이는 지난달 우리 반으로 전학 온 친구였다. 나랑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다. 친하지 않은데도 하리하리라는 내 별명을 잘 부르는 아이였다.
   “음…… 옷을 낡게 해야 해서.”
   지현이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일 광고 촬영인데, 낡고 오래된 잠바를 입고 오라는데 없어서 말이야. 제일 싼 걸로 사긴 했는데, 낡아 보이지는 않지?”
   혹시라도 지현이가 반 아이들에게 김하리가 겨울 잠바를 입고 나무에 등을 문지르고 다닌다고 이야기할까 봐 길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광고? 뭘 파는 건데?”
   “물건을 파는 건 아니고, 어려운 아이들 도와달라고 하는 거야. 후원 같은 거.”
   “아아.”
   지현이는 팔짱을 낀 채 가느스름한 눈으로 나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러더니 한마디했다.
   “좋은 일이네.”
   지현이는 내 주위를 한 바퀴 돌며 잠바를 살폈다.
   “싸 보이기는 하는데, 이 정도로는 안 될 것 같아.”
   지현이가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오른쪽 아파트 입구로 뛰어들어갔다.
   우리집과 지현이네 집은 아파트 같은 동에 있다. 하지만 사용하는 입구는 다르다. 지현이네는 오른쪽, 우리는 왼쪽. 입구가 다르니 엘리베이터도 다르다. 처음 이사 왔을 때 아빠에게 이상하다고 했더니, 건설사가 이렇게 지은 거라고만 했다. 왜 이렇게 지었냐고 했더니, 뭔가를 나눌 필요가 있었나 보다라고만 대답했다. 더이상 자세히 말해주지는 않았다.
   지현이는 노란 잠바 하나를 가져왔다. 내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노란 잠바보다는 누런 잠바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싸 보이고, 낡고, 때 타고, 물려 입은 듯 커 보이는 것’에 딱 맞는 옷이었다. 저 옷만 입으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오빠 거야. 빌려줄게.”
   나는 얼른 잠바를 입어봤다. 소매가 손을 덮었고, 옷자락도 엉덩이를 반쯤 덮었다. 소매에는 찌든 때가 있었고, 가슴에는 볼펜 자국이 두 군데나 있고, 밑단 쪽에는 작게 찢어진 구멍도 있었다.
   “한번 해 봐.”
   “응?”
   “대사해 봐. 내가 봐줄게.”
   지현이 앞에서 연기를 하려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당장 촬영이 코앞이니까 부끄러워도 참고 해보기로 했다.
   학원 선생님은 연기를 할 때는 옆에 누가 있어도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신경을 쓰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다. 선생님은 그걸 모르나 보다.
   나는 지현이에게 배경 상황을 대충 설명한 뒤 눈을 딱 감고, 감정을 잡았다. 온 얼굴에 슬픔을 가득 담으려고 노력했다.
   “할머니, 우리 이제 어떡해요?”
   내 대사는 이 한 줄이 다다. 역시 옷이 날개라더니, 누런 잠바를 입었더니 대사가 입에 착 붙었다. 하지만 지현이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잘한다고는 해줄 줄 알았는데.
   “얼굴을 너무 심하게 찡그린 것 같아. 너 지금 딱 이랬어.”
   지현이가 잔뜩 인상을 쓴 얼굴을 내 얼굴 바로 앞으로 들이밀었다. 내가 이랬다고? 거울을 보며 수백 번은 연습했는데…… 분명 그 정도는 아니었을 거다. 지현이가 날 놀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빠졌다.
   “그러니까 엄마는 집 나가고, 아빠는 회사에서 잘려서 할머니랑 둘이 사는 거라는 거지? 게다가 할머니는 쓰레기를 모으는 마음의 병이 있고, 통장에 돈은 다 떨어져서 관리비 낼 돈도 없다는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되게 비슷하네.”
   “응?”
   “아냐.”
   지현이가 벤치에 앉더니 자기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앉으라는 시늉이었다. 내가 뭐 자기가 앉으라면 앉는 사람인가? 그래도 한번 앉아보기로 했다. 지현이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지현이에게서 세 뼘쯤 떨어져 앉았다.
   “내가 하면 훨씬 잘할 것 같은데.”
   지현이가 중얼거렸다. 나를 보지 않고 앞을 보고 한 걸로 봐서는 혼잣말 같았다. 하지만 내 귀에 엄청 잘 들리게 말한 걸로 봐서는 나 들으라고 한 말 같기도 했다. 나는 불쑥 화가 났다.
   나는 지현이에게 어렸을 때부터 내 꿈이 연기자였고, 꿈을 이루기 위해서 여섯 달 동안 얼마나 열심히 학원에 다녔는지 이야기했다. 아빠는 내가 은근히 내성적인 성격이라서 연기자에 맞지 않는다며 반대한다고도 이야기했다. 이번에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더이상 시간 낭비하지 말고 당장 학원을 그만두라고 했다는 것도 말해버렸다.
   이런 이야기를 친구에게 한 건 처음이었다. 다들 연기 학원에 다닌다고 하면 부러워하기만 해서 말하지 못했다.
   지현이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막상 이야기하고 나니 너무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올랐다. 지현이랑 나는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데 어쩌다 이런 말을 다 털어놓아 버린 거지? 나는 당장이라도 집으로 들어가버리고 싶었다.
   “내가 도와줄게.”
   “뭘?”
   “연기!”
   “괜찮아. 옷은 정말 고마워. 잘 입고 줄게.”
   벤치에서 반쯤 몸을 일으켰는데 지현이가 내 팔을 잡았다.
   지현이는 지금부터 자기 친구네 집 이야기를 해주겠다며,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이번 연기가 훨씬 쉬워질 거라 했다. 엉거주춤 서 있던 나는 솔깃한 마음이 들어서 다시 벤치에 앉았다.
   지현이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친구 아빠가 주식 빚을 져서 집이 날아갔을 때 친구 마음이 어땠는지, 할머니 집에 맡겨진 첫날 어떤 마음으로 잠이 들었는지, 새벽 배송 일을 하던 아빠가 삼일 만에 힘들다고 그만뒀을 때는 또 어땠는지, 할머니가 힘들게 모은 돈을 아빠가 또다시 주식으로 날렸을 때는 또 어땠는지.
   담담히 말하다가도 언뜻언뜻 보이는 지현이의 표정이 내 마음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그냥 슬픈 표정은 아니었다. 뭔가 오묘한 표정이었다.
   친구 이야기를 마친 지현이가 한 번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한 번 크게 웃음을 지었다. 다시 지현이 평소 얼굴로 돌아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지현이 표정을 따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그냥 슬프기만 하기보다는, 뭐랄까…… 화! 화가 섞인 마음이었대. 알겠지? 이제 제대로 할 수 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을 잡을 필요도 없었다. 나는 바로 대사를 말했다.
   “할머니, 우리 이제 어떡해요?”
   지현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박수를 쳤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지현이를 올려다봤다.
   “야, 나 눈물날 뻔했어.”
   눈물이 날 뻔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 기립박수 처음 받아봐.”
   “하하하. 나도 기립박수 처음 쳐 봐. 너 나중에 성공해서 큰 상 받으면 꼭 내 얘기해줘야 해. 이건 모두 나에게 처음으로 기립박수를 쳐준 친구 지현이 덕분입니다. 이 상을 지현이에게 바칩니다. 이렇게.”
   이 말을 하며 지현이는 트로피를 먼 곳을 향해 들어올리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이 정말 상을 받은 사람 같았다. 갑자기 지현이 꿈은 뭘까 궁금해졌다.
   “너도 연기 잘할 것 같은데?”
   지현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다고 했다.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고 했다. 그러더니 할머니가 연기 학원 보내줄 리가 없다며, 말하는 순간 등짝 스매싱을 당할 거라고 했다. 난 학원 안 다니고도 연기자가 되는 사람이 많다고 말해줬다. 지현이가 입으로 쩝 소리를 한 번 내더니 말했다.
   “그래도 안 다니는 것보다는 다니는 게 낫겠지. 내일 잘 찍으면 나 햄버거 하나 사 주는 거다!”
   우리는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지현이는 손을 흔들고 집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지현이를 불러세우고 싶었다.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그 얘기 정말 친구 얘기가 맞느냐고. 하지만 꾹 참았다.
   엄마는 어디서 이렇게 딱 알맞은 잠바를 가져왔냐며 기뻐했다.
   
   “자, 합시다.”
   감독님이 자리를 잡았다.
   나는 지현이 친구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지현이가 친구 이야기를 할 때 언뜻 보였던 슬픔과 화가 섞여 있는 표정도 떠올렸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떠올리지 못했었다.
   “할머니, 우리 이제 어떡해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할머니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컷 소리가 날 때까지는 움직여선 안 된다. 할머니도 양손 가득 쓰레기를 든 채 꼼짝 않고 나를 내려다봤다.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오케이!”
   감독님이 소리쳤다.
   “갑자기 확 좋아졌는데? 아이스 팩 덕인가?”
   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사진 촬영을 몇 장면 더 했다. 대사가 없는 건 좋았지만 얼굴과 몸짓으로 감정을 표현해야 해서 더 집중을 했다. 지현이 친구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촬영이 모두 끝났다. 스태프분들이 내 덕에 촬영이 일찍 끝났다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옆에서 엄마가 연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런데 나는 칭찬을 받으면 받을수록 기분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배도 꼭 체한 것처럼 답답했다. 지현이 친구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연기한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왜 그런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자꾸만 그랬다. 나는 잠바 밑단을 만지작거렸다. 할머니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1507호를 나서는데 할머니가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넌 네 일을 열심히 한 거야. 우리 다른 촬영장에서 꼭 만나자.”
   할머니가 환히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할머니의 손가락이 따뜻했다.

   집에 돌아온 뒤 의자에 걸쳐둔 누런 잠바를 바라봤다. 나는 한 손으로 윗배를 문질렀다. 집에 오고 나서도 계속 체한 것 같았다.
   잠바를 어서 돌려주고 싶었다. 빨아서 줘야 할까? 혹시 더러워 보여서 빨았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그래도 내 땀도 묻었을 테니까 빨아주는 게 맞겠지?
   때마침 지현이가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촬영 잘했어?
   -응. 잠바는 빨아서 내일 줄게. 고마워.
   -뭘 빨아. 됐어! 하루 입어놓고는. 지금 줘. 그네에서 볼까?
   -응. 같이 햄버거 먹으러 가자.
   -좋아!


   나는 종이가방에 잠바를 넣었다. 청소기를 돌리던 엄마에게 지현이를 만나러 간다고 말했다.
   “지현이한테 고마워서 어쩌지?”
   “햄버거 사주기로 했어.”
   “너 체했다며. 먹을 수 있어?”
   “옆에 앉아 있지 뭐.”
   엄마가 청소기를 끄며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다.
   엄마가 종이 가방을 내밀었다. 가방 안에는 새로 산 회색 잠바가 들어있었다.
   “이걸 주라고?”
   “그래. 새거라서 안 받으려나? 엄마가 꼭 주랬다고 그래. 덕분에 촬영 잘했다고. 정말 고맙다고.”
   “그런데 이건……”
   “왜?”
   “엄마가…… 입을 만한 옷이 아니라고 그랬잖아.”
   엄마는 잠시 멈칫하다 말했다.
   “다시 보니까 괜찮더라. 요즘은 동물 보호 때문에 오리털, 거위 털 들어간 잠바 일부러 안 입는다잖아. 이런 옷도 다 비슷하게 따뜻하대.”
   결국 나는 종이가방 두 개를 들고 집을 나왔다.
   엘리베이터에 탄 나는 버튼을 누르려다 잠시 멈췄다. 지현이네 집은 3층이다. 하지만 우리집 엘리베이터에는 3층 버튼이 없다. 지현이가 타는 엘리베이터에도 19층 버튼이 없을 거다.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나는 종이가방 두 개를 내려다봤다.
   나는 놀이터로 가다가 방향을 바꿔 쓰레기장으로 갔다. 헌 옷 수거함 앞에 서서 새 잠바를 꺼냈다. 막상 새 옷을 넣으려니 망설여졌다. 하지만 이 옷을 지현이에게 줄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하리하리! 거기서 뭐 해?”
   지현이가 쓰레기봉투를 든 채로 다가왔다. 지현이 눈이 내 손에 들린 회색 잠바에서 멈췄다. 내가 뭘 하려는지 눈치를 챘는지 두 눈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설마 너 그 잠바 버리려는 건 아니지?”
   “나한테는 좀 커서……”
   “버릴 거면 나 줘! 완전 새 옷이잖아.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집에 그 잠바랑 딱 어울리는 바지가 있거든.”
   지현이가 종이가방 두 개를 받아들었다.
   “얼른 햄버거 먹으러 가자. 콜라 대신 바닐라셰이크 먹어도 돼?”
   “그럼! 나도 바닐라셰이크 좋아해.”
   우리는 햄버거 가게를 향해 나란히 걸어갔다. 나는 종이가방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달라고 했다. 지현이는 하나도 안 무겁다면서도 선뜻 하나를 넘겼다. 달랑달랑, 종이가방이 무릎 옆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황지영

이런저런 광고 속 어린이들이 머릿속을 맴돌아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한 문장, 한 문장 쓸 때마다 아슬아슬한 기분을 느낍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글을 내보냅니다.

2022/01/25
5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