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이 두 주 남았다. 남아 있는 방학을 보람차면서도 만족스럽게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새로운 계획을 짰다. 새 계획은 엄마의 동의가 필요했다. 출근하기 전에 커피를 마시는 엄마와 마주앉았다. 월요일 아침이었다.
   엄마에게 내 계획을 설명했다. 계획은 두 가지였다. 간단했다.
   첫째로, 5학년 1학기 수학 심화 문제집을 한 권 풀겠다. 그리고 글밥이 가장 많은 초등한국사 시리즈 세 권을 읽겠다. 둘째로, 첫 번째 것을 다 하고 난 뒤에 남는 시간은 내 마음대로 쓰겠다.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너무 버릇이 없고 막 나가는 말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 계획에 동의해 달라고 엄마에게 말했다.
   “나머지 시간에는 뭘 할 거야?”
   엄마가 물었다. 출근 시간이 가까웠기 때문에 이야기를 길게 나눌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는 일단 내게 유리했다. 엄마와 길게 이야기를 나누면 늘 내가 불리해졌다. 옳은 이야기는 엄마가 나보다 훨씬 더 잘한다.
   “내가 뭘 할 것인가를 이야기했는데, 만약 엄마가 허락하지 않으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못하게 되잖아.”
   “좋아, 일단 나중에 더 이야기하자.”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그 뒤로 내 계획에 대해서 더이상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내가 내 계획을 실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수학 심화 문제집을 풀고 한국사를 읽느라고 꼼짝 못했다. 엄마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책을 읽었다.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였다. 첫 번째 계획은 금요일 아침에 끝이 났다. 나도 내가 해낸 것이 속으로 놀라웠다. 뿌듯했다. 수학문제집은 스스로 채점을 다 하고 틀린 문제를 끝까지 풀어냈다. 엄마가 볼 수 있도록 수학 문제집과 한국사 시리즈 세 권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이제 개학 전날까지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커피를 마시는 엄마 앞에서 말했다. 엄마가 나를 좀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어째 우리 한나가 내게 선전포고를 하는 것만 같다.”
   엄마가 말했다.
   “엄마, 아니야. 나는 절대적인 평화를 원해.”
   내가 말했다.
   엄마는 그날 내게 세 차례나 전화를 걸어서 뭐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것도 안 해.”
   내 대답은 세 번 다 똑같았다.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안 했다. 핸드폰을 쥐고 침대에 누워 지냈다. 화장실에 갈 때하고 배가 고플 때만 일어났다. 배도 많이 고프지 않았다. 많이 먹은 것도 아닌데, 몸은 점점 무거워졌다. 핸드폰으로 친구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시들해지면 잠을 잤다. 나는 정말 만족스러웠다.
   토요일이 되었다. 나는 내 방에서 빵과 우유를 먹었다. 사용한 컵과 접시는 잊지 않고 잘 씻었다. 양치질만 하고 세수는 안 했다. 엄마도 쉬는 날이었다. 엄마가 함께 영화를 보러 나가자고 했다. 나는 고맙지만 다음에 가자고 말했다. 점심때 엄마는 집 근처로 산책을 나가자고 했으나 나는 사양했다. 저녁때 밥을 같이 먹자고 해도 배 안 고프다고 말했다.
   “그러면 한나야, 집 청소 같이할까?”
   엄마가 내 방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 문을 닫고 나갔다. 엄마는 혼자 집 청소를 했다. 나는 적어도 ‘싫다’라거나 ‘귀찮아’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모든 게 싫고 귀찮았다.
   일요일 아침에 일이 터졌다.
   내가 은근히 걱정했던 것은 그렇게 살고 있는 나를 보고 엄마가 견디지 못하고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그런데 폭발한 것은 뜻밖에도 나였다.
   일요일엔 늦잠을 잤다. 밤에 깨어 있느라고 늦게 잠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대로 침대에 누워서 친구들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내 새로운 계획을 친구들에게 이미 알렸다. 친구들은 내 기분이 어떤지 궁금해했다.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있는데 기분은 썩 좋지 않아. 내가 마치 물이 꽉 찬 고무풍선 같아졌어. 일어나기가 힘들어. 내가 점점 한심해지는 것 같기도 해.”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친구들은 두 번째 계획을 끝까지 해내라고 응원하는 쪽과 그만하라고 말리는 쪽으로 갈렸다. 의견이 한 가지로 모아질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친구들과 헤어지고 나서 당근마켓을 오래 구경했다. 핸드폰을 너무 오래 해서 손목이 아팠다.
   엄마가 노크를 했다.
   “왜?”
   내 말투에 짜증이 묻어 있었다.
   엄마가 방으로 들어왔다.
   “엄마에게 말투가 그게 뭐니?”
   “내가 뭘?”
   그때, 내가 폭발했다. 엄청나게 화가 났다. 심장은 저 혼자 빠르게 뛰면서 팔딱거렸다. 날카롭고 사나운 내 목소리는 정말로 낯설었다. 나는 내가 엄마에게 한 짓을 입에 담을 수가 없다. 그런 일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나는 그때 내가 아닌 것 같았다.
   나와 엄마는 너무 당황해서 눈을 크게 뜨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몇 시간이 흘렀다.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침대에 다시 누워 있었다. 엄마가 나를 불렀다. 나는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엄마는 식탁에 앉아 있었다. 나는 식탁을 두고 엄마와 마주앉았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엄마가 내게 벌을 내렸다.
   두 번째 계획 기간 동안 핸드폰 압수 및 할머니 집에서 살기.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울하기도 했다.
   “엄마,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진심이 담긴 사과였다. 그러나 너무 늦은 사과였다.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할아버지 돌아가신 뒤로 방학이 되어도 할머니 집에 가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내게 무척 친절하셨다. 할머니는 무뚝뚝하신 편이다. 할머니네 식당 일을 돕는 금마할머니라는 분이 계시는데, 나는 금마할머니를 무서워했다. 할머니는 바지락칼국수집을 했다.
   할머니네 집에 가 있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핸드폰 압수만은 피하고 싶었다.
   “내가 핸드폰이 없다면 엄마가 불안하지 않을까?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엄마가 알 수가 없잖아?”
   말을 해놓고 보니 너무 굽실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알겠어. 그렇게 할게.”
   내가 말했다.
   “짐 싸라. 5시에 출발할게.”
   “핸드폰 15분만 쓸게. 친구들에게 인사를 해야 해서.”
   내 핸드폰은 엄마 손에 있었다. 엄마는 핸드폰을 내 앞에 놓았다. 나는 내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핸드폰이 불쌍해 보였다. 나도 불쌍했다.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꾹 참고 핸드폰을 쥐고 방으로 왔다. 침대에 몸을 던졌다. 15분만 더 누워 있기로 했다.
   참았던 눈물이 흘러나왔다. 5분만 울자고 다짐했다. 소리 없이 울었다. 점점 더 서러워졌다. 이불에 얼굴을 묻고 엎드려서 소리 죽여 울었다.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침대 구석으로 내던졌다. 따지고 보면, 내 핸드폰이 꼭 내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엄마가 사주었고 매달 핸드폰 요금도 엄마가 내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침대도 끌어안고 있는 이불도 엄마 거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내가 좋아하는 내 방도 엄마 거고, 그 방 안에 있는 것들 모두 다 엄마 거다. 내가 샀다고 해봐야 엄마한테서 받은 용돈으로 산 것이니까. 내가 엄마한테 잘 보이려고 애쓰는 것도 다 숨은 까닭이 있었다.
   세상에 맙소사!
   나도 엄마가 낳았잖아?
   그렇게 따지고 보면 나도 엄마 거잖아?
   나조차도 내 것이 아니라니.
   생각이 제멋대로 이리저리 가고 있었다.
   정신 차리자. 시간이 얼마 없다. 눈물은 다 말랐다.
   나는 핸드폰을 다시 집어들었다.
   친구들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고 인사를 했다. 아이들의 반응은 격렬했다. 호기심이 하늘을 찔렀다. 나는 잘못하다가는 엄마한테 대든 것을 가지고 우쭐한 마음이 생길 것 같아서 조심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잠시 미쳤던 게지. 나는 유배를 가야 해.”
   내 인사말이 마음에 들었다. 특히 유배라는 말이 근사했다. 한국사를 읽으면서 배운 말이었다.
   엄마와 나는 다섯 시에 출발했다. 나는 운전하는 엄마 옆자리에 앉는 대신에 뒷자리에 앉았다. 말이 없어진 엄마 옆에 앉는 게 어려웠다. 엄마는 운전하는 내내 거의 말이 없었다. 곳곳에서 차가 막혔다. 길에는 차가 많았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나는 뒷자리에 누워 잠이 들었다.
   할머니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캄캄했다. 할머니가 잠든 나를 깨웠다. 나는 차에서 내렸다. 엄마가 차 트렁크에서 내 여행 가방을 꺼냈다.
   “할머니한테는 말씀드려놨어. 여기서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봐. 다음주 토요일에 데리러 올게.”
   차에 오르기 전에 엄마가 말했다. 나는 내 여행 가방 옆에 뻣뻣하게 서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토요일에 데리러 온다는 엄마 말에 안심이 되었다. 토요일이면 귀양살이가 끝나는 것이다. 엄마는 내일 출근을 해야 해서 바로 다시 집을 향해 출발했다.
   할머니네 집 이층에는 엄마가 사용하던 방이 있다. 나는 그 방을 사용하게 되었다. 방에는 잠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잠자리에 들어가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바지락.
   소리가 났다. 눈을 떴다. 방안은 어슴푸레했다. 처음에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러다가 어제 일이 떠올랐다. 습관적으로 머리맡을 더듬었다. 핸드폰은 없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바지락.
   소리는 창문 밖에서 들려왔다. 창문은 열려 있다. 무슨 소리인지 궁금했다.
   아. 무슨 소리인지 기억났다. 금마할머니가 이른 아침에 갯벌에 나가 캐 온 바지락을 수돗가에 내려놓는 소리다. 바지락은 초록색 그물로 만든 부대에 들어 있을 것이다.
   엄마 방 창문 아래는 수도가 있는 뒷마당이다. 일 층 주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고, 문 옆에는 창고가 있다. 시멘트를 바른 뒷마당에서 계단을 일곱 개 내려가면 곧바로 너른 갯벌과 이어졌다. 썰물 때는 갯벌뿐이지만 밀물 때는 뒷마당 바로 앞까지 물이 들어온다.
   “어이, 아직 식전이면 한술 뜨고 가!”
   할머니가 금마할머니에게 말하는 소리다.
   “간밤에 한나가 왔능가비요.”
   금마할머니가 주방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내가 온 줄 어떻게 알았지?
   나는 어렸을 때 분명한 이유 없이 금마할머니를 무서워했다.
   간밤에 엄마 차 소리를 들었겠지.
   나는 내게 대답을 해주었다.
   금마할머니는 할머니네 옆집에 혼자 사신다. 태어나고 자란 곳이 금마라고 했다. 지금은 금마할머니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더이상 금마할머니를 무서워하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나는 자라났다. 그러나 내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내가 나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을 찾기도 힘들었다.
   이 방도 엄마 방이다. 나는 다시 잠들고 싶었다. 이불을 끌어안으며 돌아누웠다. 깔고 잔 요는 두툼했지만 침대처럼 푹신하지 않았다.
   바지락 바지락
   바지락 바지락
   소리가 났다. 잠에서 깨어났다. 눈은 뜨지 않았다. 머리맡을 더듬었다. 핸드폰은 없다. 한숨을 내쉬며 돌아누웠다. 까치가 깍깍대는 소리가 났다. 차 소리도 들렸다. 먼 데서 닭이 울었다. 컹. 뒷마당에 묶여 있는 흰둥이가 한 번 짖었다.
   바지락 바지락
   바지락 바지락
   할머니가 바지락을 씻는 소리다. 물이 가득 차 흘러넘치는 붉은 고무 다라이에, 금마할머니가 캐 온 바지락을 쏟아붓고 손으로 북북 문대서 씻는 소리다.
   잠이 쏟아졌다. 나는 핸드폰이 없는 줄 알면서도 또다시 머리맡을 더듬었다. 딱딱하고 작은 돌멩이 같은 게 손에 잡혔다. 아까는 잡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게 뭐지.
   아, 알았다. 바지락이구나.
   할머니네 집에는 바지락이 정말 많다. 집 뒤 갯벌에도 바지락은 정말 많다. 나는 바지락을 살그머니 쥐었다. 살았을까 죽었을까.
   살아 있는 바지락을 알아내는 방법을 할아버지가 알려주신 적이 있었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가만히 있어봐라. 무겁지만 가벼운 게 섞여 있고, 물처럼 찬 기운이 남아 있으면 살아 있는 거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마침내 바지락을 쥐고 있는 손에서 할아버지가 알려 준 것을 느꼈다. 바지락은 살아 있었다.
   어쩌지?
   뭘 어째, 내 손에 들어왔으니 살려줘야지.
   나는 벌떡 일어났다. 창문으로 몸을 내밀었다. 갯벌이 뻗어가다가 파란 하늘을 만나는 곳에서부터 물이 이쪽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나는 창문을 뛰어넘었다. 창문 아래는 평평한 창고 지붕이었다. 지붕 위를 걸었다. 흰둥이가 나를 보고 컹 짖었다. 지붕이 끝나는 쪽에 나무 사다리가 있었다. 할아버지가 만들어놓은 길이었다. 곧바로 바다로 향할 수 있는 길이었다.
   흰둥이는 꼬리를 흔들면서 좋아했다. 나는 흰둥이의 목줄을 풀었다. 물이 들어오는 갯벌에 혼자 들어가기가 무서웠다. 우리는 함께 갯벌로 뛰어들어갔다. 물이 들어오는 쪽으로 달려나갔다. 진흙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맨발의 감촉은 정말로 신선했다. 갯벌을 집어삼키면서 들어오는 물은 무섭기도 하다. 나는 물 가까이 가서 손에 쥐고 있던 바지락을 힘껏 던졌다. 물은 길게 밀려오며 내 발을 적셨다. 나는 돌아서서 흰둥이와 함께 있는 힘껏 달렸다. 물이 우리를 뒤따라왔다.
   할머니네 집 뒷마당에 들어와서 뒤를 돌아보았다. 물은 갯벌을 거의 삼켜가고 있었다. 숨이 찼다. 나는 웃으면서 흰둥이를 끌어안았다.
   “고마워.”
   나는 한동안 흰둥이를 잊고 살았었다. 흰둥이는 내 볼을 핥았다. 흰둥이는 정말로 점잖은 개다. 나는 풀었던 목줄로 흰둥이를 다시 묶어놓았다.
   수돗가에 바지락이 들어 있는 고무 다라이가 있었다. 할머니는 다라이 위에 검은 비닐을 덮고 비닐이 날아가지 않도록 각목 두 개를 걸쳐놓았다. 나는 발을 씻었다. 열려 있는 문을 통해 주방 안을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조용했다. 사다리를 올라갔다. 가까이에서 물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바지락 바지락
   바지락 바지락
   나는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알고 있다. 해감을 빼내기 위해 검은 비닐로 덮여 있는 다라이 속에서 바지락들이 내는 소리다. 나는 언젠가 이 소리를 따라서 할아버지가 내준 길을 내려가 검정 비닐을 들춰본 적이 있다. 갑자기 소리가 멈췄었다. 바지락들은 황급하게 내밀었던 살을 집어넣고 껍질을 닫았다. 그때 보지 말아야 할 것을 엿본 것처럼 미안한 마음이 들었었다.
   바지락 바지락
   바지락 바지락
   그때보다 소리가 작다. 내가 자라서 그런가 보다. 엄마는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지만 이제 그만 일어나서 할머니 일을 도와야 할 것 같다. 배도 고팠다.
   어제 내가 한 짓을 엄마가 할머니에게 말했을까?
   
   엄마가 말을 했거나 안 했거나 상관없이 아래층으로 내려가 할머니 볼 일이 왠지 부끄러웠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엄마가 출근 준비를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시계 옆에는 유리문이 달린 책장이 있다. 엄마가 보던 책이 그대로 꽂혀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얼마나 많이 보았는지 짙은 청색 책등이 나달나달해졌다. 나도 엄마를 닮아서 공부를 잘한다. 그러나 가끔 엄마 때문에 마음이 나달나달해지는 것처럼 지치고 피곤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지만 사실이었다. 나는 책장을 등지고 누웠다.
   바지락 삶은 냄새가 콧등을 간질였다. 손등으로 코를 문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배가 고팠다. 머리맡을 더듬고 싶었지만 참았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한나야, 한나!”
   할머니였다. 뒷마당에 서서 방 창문을 올려다보며 나를 불렀다. 그렇게 부르면 내가 다 들을 수 있다는 것을 할머니는 아셨다.
   “네!”
   나는 큰 소리로 외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내려와서 밥 먹어라.”
   할머니 말이 반가웠다. 나는 서둘러 이불과 요를 개고 여행 가방을 풀어 정리했다. 세면도구를 들고 욕실로 가서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했다. 이번에는 창문이 아니라 문을 열고 나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당으로 들어갔다. 할머니와 금마할머니는 바닥에 목욕 의자를 놓고 앉아서 도마질을 하고 계셨다. 호박을 썰고 계셨는데, 당근과 양파가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금마할머니 안녕하세요!”
   나는 인사를 했다.
   “한나, 참말로 오랜만이네.”
   금마할머니가 빙긋 웃으며 나를 돌아보셨다. 나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마음이 푸근해졌다. 금마할머니는 나를 정말로 반겨주셨다.
   “어여, 먹어라.”
   할머니는 도마질을 멈추지 않으며 말했다. 할머니들 옆 탁자에 바지락칼국수와 김치와 수저가 놓여 있었다. 입에 침이 고였다.
   “잘 먹겠습니다.”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바지락은 내가 캔 것이여.”
   금마할머니가 흐흐 웃으시면서 말했다.
   “금마할머니 잘 먹겠습니다.”
   나는 한번 더 말했다.
   “오냐.”
   금마할머니가 흐흐흐 웃으시며 대답했다.
   칼국수는 노란색이었다. 치자 칼국수였다. 면발 위에 바지락들이 누워 있었다. 익은 살을 내보이며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나는 젓가락으로 호박과 당근을 몇 점 집어먹었다. 맛있었다. 입안에서 밀물처럼 침이 솟아올라왔다. 나는 침을 모아서 씹던 당근과 함께 꿀꺽 삼켰다.
   바지락을 하나씩 건져먹었다. 고소하고 맛있었다. 젓가락질을 할 때마다 바지락 껍질들이 서로 부딪치며 삭삭 소리를 냈다. 껍질을 꺼내놓을 때도 삭삭 소리가 났다. 더이상 바지락 바지락 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바지락을 건져먹을 때마다 개수를 셌다. 너무 맛있어서 숫자 세는 것을 깜박 잊기도 했다. 그릇에 바지락이 남아 있지 않았을 때 밖에 꺼내놓은 껍질의 수를 헤아렸다. 열세 개였다. 칼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배가 고픈데다가 오랜만에 먹는 할머니네 칼국수가 너무 맛있어서 이런저런 생각들은 흐려지며 힘을 잃었다. 그러나 내가 살려준 바지락은 겨우 한 개이고, 먹은 바지락은 열세 개라는 생각은 선명했다.
   도마질 소리에 섞여서 할머니들이 나누는 이야기 소리도 들렸다. 사투리가 심해서 어떤 때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되기도 했다.
   엄마한테 내가 해 준 것은 무엇이지?
   이런 생각이 났다. 당장 생각나는 게 없다. 수학 심화 문제집을 푼 것이나 글밥이 많은 초등한국사 시리즈 세 권을 읽은 것도 엄마에게 뭘 해 준 것은 아니었다. 엄마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이 있긴 했지만 결국 나를 위한 일이었다.
   칼국수를 다 먹은 다음에는 그릇을 씻고 탁자를 닦았다.
   당장 할 일이 없었다. 심심하기도 했다. 할머니들 곁에 앉아서 파를 다듬었다. 겉껍질을 벗겨내고 작은 칼로 뿌리를 자른 다음에 소쿠리에 담는 일이었다. 매워서 눈물이 나기도 했다.
   “한나야, 뭐냐 저 거시기 정 필요하믄 할머니 핸드폰 써라, 잉.”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고 있는 내 어깨를 할머니가 팔꿈치로 건드리며 말했다.
   “파가 매워서요.”
   내가 눈물을 흘리는 까닭을 혹시 두 할머니가 오해할까 봐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진짜로 매워서 우는 것이었다. 핸드폰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오후에 다시 물이 빠졌다. 갯벌만 남았다. 나는 금마할머니와 바지락을 캐러 나섰다. 장비와 옷은 할머니 것을 썼다. 할머니의 옷이나 신발과 모자가 내게 잘 맞았다.
   바지락을 한 바구니 캤을 때였다. 내가 캤으니까 내일 바지락 칼국수를 먹을 때는 나한테 잘 먹겠다고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좋았다.
   “할머니 이건 내 거야.”
   금마할머니에게 내가 캔 바지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말하고 나니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마할머니가 나를 돌아보며 흐흐흐 웃었다.
   “온 시상에, 이 뻘 속 조개 다 우리 한나 꺼라고 혀도 이 시상 누가 뭐라는 사람 있다냐?”
   금마할머니가 말했다. 사투리가 심하게 섞인 말이었다. 나는 다 알아듣지 못했지만 무슨 말인가는 쉽게 이해되었다. 너무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날 뻔했다.
   “그러게요. 참말로 그려요.”
   나는 소리 내어 웃으면서 금마할머니 말을 크게 흉내 냈다.

신현이

"이것 내 거야.”
갯벌에서 스스로 캔 바지락을 작은 바구니에 담아들고서 한 아이가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배시시 웃었습니다. 아이들은 가진 것이 정말 별로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2022/09/27
5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