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원한 중심, 대도시(Metropolis) 서울의 심상지리(心象地理)

서울특별시(特別市, Seoul Special City)는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문화·인문·정치·경제 중심지 역할을 하는 도시로, 경기도와 인천광역시까지 아우르는 수도권의 중심축 역할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특별시로 지정된 도시로서 (…) 1945년 광복 이후 서울로 개칭되고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특별시 지위에 올랐고, 한강의 기적과 강남 개발 등의 대대적인 경제성장을 거쳐…1) (밑줄은 강조를 위해 인용자가 표시함)

위키백과가 정의한 서울(SEOUL)이다. 문화·인문·정치·경제의 중심지, 중심축, 유일한 특별시, 한강의 기적 등, 서울을 설명하는 수식어는 서울이라는 장소에 대한 우리의 심상지리(心象地理)를 그대로 담고 있다. 생각해보자. 서울은 우리에게 어떤 공간(空間), 어떤 장소(場所)로 인식되는가. 무엇보다 우리에게 서울은 지역(地域)인가? ①자연적 또는 사회적, 문화적 특성에 따라 일정하게 나눈 지리적 공간 ②일정하게 구획된 어느 범위의 토지2)라는 지역의 정의를 두고 볼 때 서울도 다양한 지역 중 하나인데, 서울은 우리에게 ‘지역’이었던 적이 없다. 대도시(Metropolis) 서울은 우리에게 언제나 ‘중심’이었다.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라는 오래전 속담부터 수많은 소설과 영화, 시대를 풍미한 대중가요의 가사까지 대한민국에서 서울은 예나 지금이나 홀로 특별한 ‘중심’이다.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네/ 그곳은 춥고도 험한 곳/ 여기저기 헤매다 초라한 문턱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조용필의 〈꿈〉은 근현대 서울을 그린 다양한 서사 속 서울의 모습과 겹친다. 풍운의 꿈을 품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자본주의가 만든 꿈의 도시 서울. 방방곡곡에서 ‘올라온’3) 사람들은 서울의 외곽(변두리)이나 쪽방, 고시원 등에 기거하며 서울에 자신의 장소를 만들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서울은 이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서울은 죽어가는 아내에게 설렁탕 한 그릇을 사줄 수 없는 곳4)이고, 언제까지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겨울5)이며, 비상구 없이 몰락을 향해 내달리는 도시6)다. 문학작품 속 서울은 이렇게 ‘비정하고 비열한 거리’7)이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서울을 꿈꾸고 서울을 바라본다. 서울이 중심이기 때문이다. 어린이·청소년문학도 비슷하다. 어린이·청소년문학 속 서울 역시 중심에서 밀려난, 혹은 아직 ‘진짜 중심’에 입성하지 못한 자들이 부유하는 공간이다. 서울은 무당과 주정뱅이, 구걸하는 장애인과 부랑아들이 모인 곳8)이고, 열 살, 열여덟 살 형제가 자신들을 두고 간 아이언맨(아버지)을 기다리는 곳9)이자 숨겨야 하는 게 많은 변두리 속 변두리10)이다.
  지역에서 서울로, 서울의 외곽(변두리)에서 서울 한복판으로 향하는 이야기들. 서울을 영원한 중심으로 만든 것은 어쩌면 우리가 만들고 향유한 이야기들인지도 모른다. 서울을 향한 선망. 나도, 내 인생도 한 번쯤은 중심에서 빛나보고 싶다는 욕망과 그것의 불가함을 수 없이 되풀이한 이야기들 속에서 역설적으로 더 선명해지고 강화되는 서울의 배타적 중심성. 지역이라는 정체성을 잃고 홀로 높아진 서울은, 서울을 향해 부나방처럼 모여드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부평초처럼 떠돈다. 서울의 중심성과 배타적 위계성은 극복의 대상이 된 지 오래지만 우리의 상상력은 여전히 중심(기원, origin)으로서의 서울에 매여 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서울을 상상하고 재현하는 방식을 한번 바꿔보는 건 어떨까? 서울의 배타적 중심성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이야기가 아닌, 소박하고 따뜻한 삶의 공간으로 그려지는 서울이라면?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힘이 작동하는 위계의 공간이 아니라 순환적이고 수평적인 사고에 기반한 연대의 힘이 담긴 공간이라면? 있는 현실보다 있어야 할 현실에 주목하는 어린이문학의 힘은 이런 데에서 더 잘 발휘되지 않을까? 최근 어린이문학에서 ‘중심’의 눈으로 서울을 읽지 않는 이야기들이 등장하고 있다. 우리는 이 작품들에 어떤 이름을 붙여주어야 할까? 작품들 속에서 재현된 서울은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상상력과 가능성이 되어줄까? 공간을 새롭게 상상하는 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2. 기원(origin)과 작별하는 이야기

나는 이곳에 부러진 버드나무 가지처럼 떨궈졌다. 이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영원히 물길을 떠돌 것 같다. 내 뿌리를 찾아야겠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빠를 찾고야 말겠다. (8쪽)

문은아의 『기린 놀이터에서 만나』(한울림어린이, 2023)는 이렇게 시작된다. 주인공 ‘모이든’은 여행사의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러 오지로 떠난 엄마 때문에 갑자기 외할머니댁으로 가게 된다. 외할머니집은 재개발을 앞둔 38년 된 둔촌주공아파트. 2018년 현재 6학년인 이든은 2005년 고3인 엄마에게서 태어났고 출생신고가 1년 늦어져 아직 초등학생이다. 어릴 적 엄마의 물건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방에서 이든은 엄마의 일기장을 발견하고, 자기 뿌리를 찾기 위해 엄마의 추억을 되짚는다. 이야기는 모이든의 2018년의 둔촌동과 엄마 ‘모수림’의 1999년의 둔촌동이 교차 편집되면서 진행된다. 작품은 표면적으로 이든의 뿌리(기원) 찾기에 있지만 시간의 교차를 통해 독자에게 와닿는 것은 20여 년의 시차를 두고 펼쳐지는 서울 둔촌동 대단지 아파트의 흥망성쇠와 그것과 함께한 사람들의 삶이다.
  단지가 너무 커서 행정동 둔촌1동이 모두 둔촌 주공이었던, 한때 서울을 대표했던 대단지 아파트의 삶과 재개발은 작품 속에서 그다지 극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엄마 모수림의 1999년은 모두가 그랬듯 평범하고 특별한 6학년이다. 1999년 수림은 친구 유미의 짝사랑을 이어주려 대필 편지를 쓰다가 편지의 대상인 창기를 좋아하게 되고, 우정과 자신의 마음 사이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애쓴다. 우정과 사랑 사이라는 소재에 비해 이를 담아내는 인물과 공간은 담담하고 차분하다. 수림도 유미도 창기도, 아무도 섣부르지 않다. 이는 2018년에서도 마찬가지다. 대단지 아파트 재개발이라고 하면 흔히 떠오르는 아귀다툼 대신 이야기는 작품의 제목인 ‘기린 놀이터에서 만나’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온라인 비밀 카페 사람들이 재개발로 버려진 고양이나 베어질 나무와 함께 살아갈 방법을 궁리하는 데 시선을 둔다. 그러니까 이 동화는 발단, 전개, 위기를 밟고 절정을 향해 치닫다가 폭발하는 결말로 가는 전형적인 플롯 대신, 긴 시간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평범하고 슴슴한, 그래서 비범한 이야기인 셈이다.
  작품에서 이런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화자 모이든을 중심으로 한 모녀 삼대다. 동화 속 수림의 아버지는 수림이 세 살 때 돌아가셨고, 엄마의 성을 받은 이든은 아빠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삼대에 걸쳐 부재중인 가부장은 ‘결핍’이 아니라 외려 모녀 삼대의 ‘독립적이고 수평적인 삶’을 가능하게 한 동력으로 그려진다. 한국 사회에서 가부장의 부재는 여러모로 쉽지 않은 문제라서 작품 속에서 ‘뿌리 깊은 나무’라는 출판사를 다니며 홀로 딸을 키우는 수림 엄마는 “유미 엄마가 아니었으면 학부모 모임에도 못 나갔을” 다소 남다른 사람으로 언급되지만, 그뿐이다. 수림이는 그런 일로 놀림을 받거나 따돌림을 당하지 않고 친구 유미와 엄마와 함께 또 따로, 그렇게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 자신으로 살아간다. 서울 둔촌동 토박이로 그려지는 여성 삼대의 삶은 그간 우리 서사가 재현한 전형적인 서울의 삶과 다르다. 이들은 토박이가 가지고 있기 마련인 자부심과 거기에서 비롯한 배타적 위계를 보여주는 대신, 흐르는 물처럼 유연하게 자신의 속도대로 흘러간다.

엄마와 나처럼, 엄마와 할머니도 닮은 데가 참 없다. 그뿐이게. 친한 데도 없다. 엄마는 설과 추석, 그리고 할아버지 제사 때나 되어야 할머니를 찾아갔다. 그것도 반나절 정도 데면데면 있다 돌아오기 일쑤. 그래서 할머니를 관찰할 시간이 부족했지만, 나도 촉이 있다. 내가 보기에 엄마와 할머니 사이는 쿨하다 못해 차가울 지경이다. (16~17쪽)

동화의 초반, 이든의 눈에 비친 할머니와 엄마의 관계다. 얼핏 ‘쿨하다 못해 차갑게’ 보이는 모녀 관계는 변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관계를 읽는 이든의 시각이 변한다. 비밀 카페에서 ‘나무 지기’로 활동하며 ‘있는 그대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과 함께 하는 할머니와 살고, 한편으로는 엄마의 추억이 담긴 시공간을 쫓으면서 이든은 할머니가 “철없이 핀 제비꽃”(205쪽)을 철없다 탓하는 대신 기특하게 여기며 사랑과 존중으로 지켜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같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을 읽는다. 이든은 깨닫는다. ‘나무와 나무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숲을 이루는 것처럼’ ‘할머니와 엄마의 무심한 듯, 다정한 대화법’(201쪽)에 숨겨진 서로 존중하는 사랑을.
  이는 비밀 카페 ‘기린 놀이터에서 만나’에서도 유사하게 드러난다. 어른과 아이, 남성과 여성이 골고루 있는 이 모임은 서로 존대하고, 버려진 혹은 버려질 생명들과 어떻게 하면 오래 함께 살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실천한다. 특별한 중심이 없는 모임에서 모두는 평등한 발언권을 갖고 각자의 의견을 개진한다. 이들의 수평적인 연대는 기린 미끄럼틀의 조기 철거를 늦추고 이 작품에서 오래 기억될 기린 놀이터와 ‘안녕 파티’를 열 계기를 만들어낸다. 동화에서 ‘둔촌둥이’라 불린 토박이들이 사람에서 “영역을 떠나지 않은 둔냥이들, 메타세쿼이아, 참느릅나무, (…) 달맞이꽃, 토끼풀, 범의귀……”(207쪽) 같은 동식물로 확대되는 장면은 중심과 주변, 중앙과 변두리, 어른과 아이, 남성과 여성을 나누는 위계와 배제의 논리를 수평적이고 순환적인 연대로 대체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할머니가 ‘뿌리 깊은 나무’라는 이름의 출판사에서 일했다는 사실은 이 작품이 지향하는 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실존한 잡지 이름이기도 한 뿌리 깊은 나무는 이 작품에서 거대한 한 그루의 나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나무와 나무가 숲을 이룬’ 상태를 말한다. 오랜 시간 한 자리를 지키는 나무는 땅속에서 옆의 나무, 그 옆의 나무들과 뿌리로 서로 얽힌다. 그래서 나무의 몸통이 베어져도 뿌리로 얽힌 그루터기는 살아 베어진 자리에서 또다른 싹을 틔운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로 얽혀 기대어 살아가는 숲의 모습은 할머니와 엄마의 삶의 방식이자 재개발의 광풍 속에서도 고양이와 나무들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실존했던 그러나 재개발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 둔촌 주공을 추억하며, 자신이 지나온 시절에 이별을 고하는 방식으로 쓰인 이 작품은 어쩌면 실제보다 아름답게 채색되었는지도 모른다. 또 영화 〈클래식〉(곽재용, 2003)을 떠올리게 하는 수림의 이야기나, 실제 둔촌 주공 재개발 과정에 있었던 재건축위원회와 다양한 주체들 사이의 갈등 같은 일은 다루지 않거나 소소하게 언급하고 넘어가는 방식을 택했지만, 중요한 것은 실제와 얼마나 딱 들어맞느냐가 아니라 작가가 어떤 눈과 마음으로 그 시간과 공간을 바라보고 재구성 했는가와 그것이 인물과 독자에게 어떤 흔적을 남겼는가일 터이다.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서울과 서울의 삶은 평범하고 소박하다. 이는 작품 속 인물들이 평범한 일상을 살고, 일상을 이루는 ‘식물, 동물, 이웃’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애써 ‘무엇-중심’이 되려 하기보다 느슨한 관계망 속 한코로 존재하는 자기 삶에 만족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여기서 핵심은 ‘느슨한 존중’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다. 이든은 할머니를 통해 자신이 지워질 뻔한 존재가 아니라 선택받은 존재였고, 엄마에게도 같은 편인 엄마(할머니)가 있었음을 확인한다. 하지만 따로 이 확인이 필요했을 만큼, 그리고 얼핏 차갑게 보일 만큼 모녀 삼대는 거리를 두고 서로의 영역과 선택을 존중한다. 할머니는 엄마의 삶과 선택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함부로 가지치기 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고, ‘미스터 블랙’(아빠)을 찾겠다고 고군분투하는 이든에게 엄마 수림은 그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주기보다 이든 스스로 답을 찾는 과정을 지켜보는 방식을 선택한다.
  그렇기 때문에 결말에서 이든이 아빠 대신 찾아온 고모와 만나는 장면은 아쉬움보다 아련하지만 확실한 이별로 다가온다. 시작된 둔촌 아파트의 재개발과 함께 이든의 한 시대는 막을 내리고 이제 이든은 자기 삶의 다음 장을 향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다. 이것은 기린 놀이터와 그것을 대변했던 한 시절, 같이 이불을 널고 어느 집에나 들어가 함께 밥을 먹던, 우리의 기원이었던 한 시절과 이별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너나없고, 무람없이 굴어도 특별히 폐가 되지 않았던 1999년 서울 둔촌동의 인정과 따스함을 추억하되, 그것을 회복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시절과 아름답게 이별하는 이야기는, 기원, 나아가 중심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독자에게 남긴다. 정해진 정답, 하나의 가치, 만인의 기원이 있는 게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기원으로 자기 자리와 목소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 가부장이라는 중심이 없어도 따로 또 함께 서로에게 기대어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모녀 삼대는 우리가 그토록 도달하고자 애썼던 중심이 어쩌면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3. 소박하고 따뜻한 삶의 공간인 서울

이소완의 『맹물 옆에 콩짱 옆에 깜돌이』(봄볕, 2022)11)는 싱겁고 눈물이 많아서 ‘맹물’이라 불리는 은영이와 몸집은 콩알만 한데 기운은 짱짱해서 ‘콩짱’으로 불리는 은우가 동네 공원에서 만난 강아지 깜돌이를 통해 얼쑤 아저씨, 할머니, 그냥씨와 친구와 이웃이 되는 이야기다. 그냥 쓱 읽으면 ‘밋밋하다’는 반응을 불러오기 딱 좋은 이 이야기는 사실 그 ‘밋밋함’이 핵심이다. 이 작품은 ‘갈등 이후의 삶’을 말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사실주의 동화의 문법에서 살짝 벗어난 자리에 있다. 이를테면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콩짱의 집은 파산했고 부모님은 이혼했다. 암에 걸린 맹물의 엄마도 지난한 항암의 과정을 거쳤고 마지막 항암을 앞두고 있으며,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반려견을 모두 떠나보냈다. 그러니까 등장인물의 ‘사연’이라고 할만한 일들이 이미 종결된 상태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는 작가의 전작인 『잃어버린 겨울방학』(소년한길, 2003)에 실린 단편의 짜임새를 두고 볼 때, 작가의 의도적인 선택으로 읽힌다. 그러니까 작가는 전형적인 소설의 갈등, 소위 ‘극적 갈등’을 그리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리지 않겠다는 서사 전략을 짠 셈이다. 이야기에서 독자의 관심을 끌 만한 극적인 요소들을 내려놓는 위험한 방식을 택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냥씨가 할머니 옷 선생님이라면, 할머니는 내 뜨개질 선생님이었다. 할머니에게 안뜨기와 바깥뜨기를 배웠다. 엄마한테 목도리를 선물하고 싶었다. 할머니도 나도 그냥씨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조용히 함께 있는 시간이 정말 편안했다. 입이 심심하면 접시에 담긴 옥수수를 한 알씩 집어먹었다. (…) 엄마가 나으면 엄마 아빠랑 함께 느긋한 주말을 보내고 싶었다. 청소하고, 텔레비전 보고, 책 읽고, 맛있는 것도 해먹는, 대단하지 않지만 평범한 주말 말이다. (62쪽)

토요일마다 각자의 이유로 그냥씨의 가게에 모인 세 사람이 조용하고 편안하게 하루를 보내는 모습이다. 이 장면은 작품 전체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엄마가 암에 걸린 이후 혼자 긴 머리를 묶기 힘들어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맹물은 엄마 아빠랑 함께 청소하고, 텔레비전 보고, 맛있는 걸 해먹는 평범한 주말을 꿈꾼다. 조용하고 평범한 일상을 바라는 건 할머니도 그냥 씨도 마찬가지다. 집에 온통 빨간 딱지가 붙고 부모님이 헤어진 이후 아빠를 따라 산속에서 살다 서울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콩짱도 그렇다. 『맹물』의 등장인물은 어른도, 아이도 중심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른이나 어린이나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따로 또 같이’ 있는 이 장면은 눈에 보이는 어떤 목표보다,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바람이 담긴 공간이다.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서울이 딱 그렇다. 아빠랑 산에서 살던 콩짱이 “다시 서울에 와보니 나는 촌스러운 시골 아이였다”(28쪽)라고 되뇌는 부분이 없다면 공간 배경이 서울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서울은 우리가 여태 보아왔던 서울과 다르다. 『맹물』은 갈등과 사건이 어떻게 인물을 통과하는가가 아니라 갈등과 사건 이후, 그것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다. 인물이 다투고 경쟁하지 않기 때문에 공간도 다투지 않는다. 그래서 중심을 탈환하기 위한 각축전을 벌이는 서울, 혹은 중심에서 미끄러진 자들이 배회하는 서울이 아니라 일상의 공간, 삶의 공간인 서울이 그려진다. ‘대단하지 않은 평범한 주말’을 꿈꾸는 인물들이 모여 중심(서울)을 향한 열망 대신, 삶을 향한 고요한 바람을 불러오는 이야기를 만든 것이다.
  그렇다고 인물들이 패배적인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다투고 경쟁하면서 어떻게든 최고가 되어 보겠다는 열망을 가지지 않았을 뿐, 이들은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타인이 그것을 휘젓게 내버려두거나 타인의 기준에 맞추려 애쓰지 않는다. 이를테면 매일 깜돌이를 산책시키는 아이들은 깜돌이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 사람들이 실은 품종이라는 잣대로 줄을 세우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질문을 곱씹을수록 짜증이 나지만’ 거기 붙잡혀 휘둘리며 인정 투쟁을 하는 대신 자신들에게 좋은 일을 선택한다. ‘이상한 말을 생각하며 산책 시간을 망치기보다 웃으면서 달리고 일분일초를 아끼며 뒤엉켜 노는’(34쪽) 방식이다. 작가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위계와 권위에 찌들어 있는지를 보여주고 그것을 비판하는 전형적인 방식 대신, 소박하고 평화롭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대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윤리적이고 수평적인 시선이 개입되어 있다. 이 작품은 정확한 ‘1인분의 세계’를 그린다. 『맹물』에서는 개도 아이도 어른도 여성도 남성도 모두 1인분이다. 어른이 아이의 위에 있지 않고, 사람이 개 위에 있지 않다. 작품 속 어른들은 잘못 했을 때 빠르고 정확하게 아이들에게 사과한다. 머리가 짧은 맹물을 남자로 착각한 얼쑤 아저씨는 맹물의 성별을 알고 바로 “미안, 머리가 짧아서 너희가 남자라고 생각했어!”(14쪽)라고 말하고, 그냥씨도 호의였지만 상대가 호의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얼굴이 빨개지면서(50쪽, 57~58쪽)까지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깜돌이를 대하는 인물들의 방식도 마찬가지다. 개라고 함부로 대하거나 사람의 생각과 의도를 관철하는 대신, 깜돌이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깜돌이의 감정을 존중한다.12)
  ‘어른은 아이에게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반려동물을 ‘소유물’로 생각하는, 우리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위계에 근거한 사고방식을 이 작품에서는 찾기 어렵다. 그뿐만 아니다. 『맹물』 속 인물들은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고받지 않고 서로 도움이 되는 수평적인 관계를 맺는다.

우리는 매일매일 만나 동네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할머니는 걷기 편안한 길을 많이 알고 있었다. 함께 재래시장 구경도 가고 철쭉이 활짝 핀 동산에도 갔다. 우리는 나무 의자에 앉아 붉게 지는 노을을 같이 바라보았다.
“여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을 명당이란다. 혼자 오다가 같이 오니 더 좋구나, 깜돌아, 고맙다! 맹물, 콩짱, 고맙다!”
“저희가 고마운걸요! 할머니를 만나서 깜돌이가 진짜 괜찮은 개가 된 것 같아요.”
진짜 진짜 그랬다. 깜돌이는 진짜 괜찮은 개가 된 것 같았고 나도 조금은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44~45쪽)

중심성, 위계와 힘을 내려놓은 자리에 연령과 종을 뛰어넘는 ‘우리’가 탄생하는 장면이다. 이들은 혼자 빨리 가기보다 서로에게 기대어 함께 천천히 가는 방식을 선택한다. ‘우리’는 어른이 아이를 일방적으로 돌보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대신, 아이들도 어른에게 의지가 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그렇게 서로를 돌보는 관계는 사람과 사람을 넘어 깜돌이까지 이어진다. 작품 속 인물들은 자신이 깜돌이를 돌본다고 생각하지 않고, 깜돌이가 자신을 돌본다거나(그냥씨, 86쪽) 혹은 깜돌이와 우리는 친구(맹물, 32쪽)라고 생각한다. 어른과 아이, 사람과 개가 자연스럽게 ‘우리’가 되면서 특별한 무엇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존재로 인해 더 나은 내가 되어가는 과정이 보여주는 충만함은 온통 경쟁뿐인 우리의 삶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생각하게 한다.
  이 작품은 경쟁을 일상화하고 일등을 만들어 뒤처지는 이를 기필코 양산하는 기존의 시스템에서 완전하게 탈각해 있다. 아무도 경쟁하지 않기 때문에 경쟁에서 오는 아슬아슬함이나 스릴 같은 종류의 재미는 없다. 대신 이 작품은 우리가 그동안 잘 볼 수 없었던 서울의 새로운 모습과 가능성을 보여준다. 중심은 이런 방식으로 부서지고 해체되지 않을까? 중심의 배타적 위계를 비판한다고 해서 중심이 사라지지 않는다. 헐뜯고 비판하면서 자세하게 재현하는 와중에 중심은, 중심을 향한 선망은 더 강화된다. 우리 서사의 역사가 이를 잘 보여준다. 변두리 의식은 중앙을 명확히 인식했을 때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이니, 변방과 중앙을 각각의 지역으로 인식하지 않는 한 중앙의 해체는 요원하다. 그러니 휘황한 서울에서 미끄러지는 변방의 인물을 보여주는 것보다, 옆 동네 같은 서울에서 소박하고 따뜻한 삶을 영위하는 인물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지 않을까. 서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심상지리가 바뀔 때, 서울도 다양한 지역 중 하나로 새롭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 터이다.


4. 공간을 새롭게 상상한다는 것

중앙집권 시스템이 주는 합리와 효용보다 그 폐단이 더 커져버린 오늘, 지역(region)이나 로컬(local)이 시대의 중심 키워드로 떠오르는 현상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역이나 로컬은 유행처럼 한 번 왔다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지역과 로컬이라는 개념의 번성은 중앙집권 시스템, 즉 근대적 시스템이 더이상 우리 현실을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를 방증이라도 하듯 로컬은 현재 계속 깊어지고 넓어지면서 다양한 실천 속에서 진화해가고 있다.
  어린이‧청소년문학도 근대의 유산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 어린이‧청소년문학에서 이 글에서 다룬 ‘중앙’ 혹은 ‘서울’과 같은 개념은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그간 어린이와 청소년은 아직 완전한 주체가 아닌, 성장해야 하는 미완성의 대상이었고 어린이‧청소년문학은 이들의 성장을 독려하며 이들과 함께 자라왔다. 하지만 성장은 그렇게 실체적이고 명징한 개념이 아니다. 미성숙과 성숙, 그리고 이 두 가지를 포함하는 성장이라는 개념을 모두가 도달해야만 하는 어떤 완성태로 상정한 것은 근대라는 시스템과 우리의 합작품이다. 『기린 놀이터에서 만나』와 『맹물』 속 인물은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야기 속 아이들은 어리지만 미성숙하지 않고, 어른들이라고 모두 성숙하지 않다. 이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성장’을 둘러싼 여러 개념과 상황을 돌아보게 한다. 변두리에서 중앙으로,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어쩌면 우리는 단계적 발전, 혹은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문학을, 어린이와 청소년을 줄 세우고 새장에 가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와 관련, 문학작품에서 공간을 새롭게 상상하고 구축하는 일은 단순히 공간의 갱신에 멈추지 않는다. 공간은 인물을 담고 있는 장소이며, 어떤 인물을 담느냐에 따라 공간의 빛깔과 향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수직적인 위계와 배제의 논리를 체현한 인물은 그 공간을 스펙터클한 경쟁과 탈락, 승자독식의 장소로 만들고 수평적이고 순환적인 상호 보완과 돌봄의 자세를 내면화한 인물은 느리고 때로 답답해 보이지만 너와 내가 함께 걷고, 함께 사는 장소를 만든다. 전자는 근대 소설과 그 자체인 플롯으로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후자는 스펙터클한 재미와 무관한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 사람들의 이야기, 우리가 그동안 보았던 근대문학의 플롯과는 다른, 새로운 이야기들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이야기들을 생산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그리고 그것에 알맞은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새로운 시선이 아닐까.

송수연

평론집 『우리에게 우주가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SF플러스알파’와 ‘어린이청소년책작가연대’ 회원입니다.

나와 내 삶 자체인 근대 체제와 그 한계를 절실하게 깨닫는 하루하루입니다. ‘근대 이후’를 상상하고 실천하는 일이 문학과 사람이 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2024/04/17
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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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언어도 서울 중심성을 잘 보여준다. 어느 지역으로 움직이더라도 우리는 서울을 중심에 두고 언어를 사용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서울에서 속초를 갈 때나 부산을 갈 때 ‘내려간다’고 말하고, 반대의 경우에는 ‘올라간다’고 표현한다. 지리적으로 서울보다 낮은 위도에 위치한 부산 (북위 약35도)에서 서울로 갈 때 ‘올라간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지만, 서울보다 높은 위도에 위치한 속초(북위 약 38.2도)에서 서울을 오갈 때 ‘올라간다 혹은 ’내려간다’고 말하는 것은 틀린 표현이다. 이는 위도나 경도 같은 지리적 사실조차 뛰어넘는 서울의 위상, 배타적 위계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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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 「운수 좋은 날」, 『개벽』,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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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사상계』,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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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새움, 2018.
7
유하, <비열한 거리>(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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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실, 『상계동 아이들』, 사계절, 2004. 『상계동 아이들』은 1992년 산하에서 출간된 이후 1999년 시공주니어에서, 2004년 사계절에서 재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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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란, 『서울 아이』, 우리학교, 2023. 『서울 아이』는 2014년 자음과모음에서 출간한 『서울역』을 재출간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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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실, 『변두리』, 문학동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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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맹물』로 약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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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돌이가 원래 주인인 얼쑤 아저씨의 형 집으로 돌아가고 난 후 쌍둥이 아기들이 아파 병원에 가는 바람에 깜돌이는 사흘을 혼자 집에 있게 된다. 뒤늦게 사실을 알고 깜돌이 집으로 간 아이들과 얼쑤 아저씨는 깜돌이를 데리고 오려고 하지만 주인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안 나가려고 버티는 깜돌이의 마음을 읽고 난 후 서운하고 속상하지만 깜돌이를 집에 두고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