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디스/리스펙트 시대의 비평
‘비평적 글쓰기’라는 강의 시간에 겪은 일이다. 여전히 수업에 대한 감이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본격적인 비평도 아니고 그렇다 하여 딱히 글쓰기를 가르치는 것도 아닌, ‘적(的)’이라는 매개항으로 연결된 ‘비평’과 ‘글쓰기’ 두 영역에 어정쩡한 포즈로 발을 걸치고 있는 모양새로 강의를 진행했다. 그리고 학생들이 제출한 비평 과제들을 받아보고 조금 놀랐다. 일일이 옮기지는 않겠지만, 이렇게까지 신랄할 필요가 있나 싶을 만큼 작품을 혹독하게 평하는 학생들이 생각 외로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신랄한 만큼 그 비판이 정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일 것이나, 비록 매끄러운 모양새는 아닐지라도 작품을 향해 가감 없는 비판을 수행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것만으로도 처음에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들의 과제를 넘겨볼수록 여기에는, 그저 이번 학기에 유독 비판 정신으로 무장한 학생들이 다수 수강했을 뿐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려운, 어떤 경향이 느껴지기도 했다. 당시 나는 그해에 가장 흥행한 한국 영화 중 한 편을 골라 이를 텍스트 삼아 평할 것을 주문했고 이때 선정된 작품은 연상호 감독의 <반도>(2020)였다. 학생들이 가장 많이 문제시한 대목은 ‘개연성’과 ‘신파’라는 두 키워드로 압축될 수 있었는데, 특히 ‘개연성’을 향한 비판은 나의 이목을 끌었다. 연출, 연기, 설정, 서사 구조 등등, 학생들이 서두에서 비판한 영화의 문제점은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흥미롭게도 마지막에 이르러서 그들은 결국 그 문제가 ‘개연성의 결여’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기 때문이다. 개연성에 관한 많은 말들을 읽으면서, 나는 오히려 그들이 생각하는 개연성이 무엇인지를 더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단지 나만의 인상이 아니었다.
거기서 관객이 말하는 개연성이 뭔지 잘 모르겠다. 개연성이란 단어 자체에 개연성이 없는 것처럼 들린다. 진짜 서사적인 구멍이나 결핍이 있는 것과는 약간 결이 다르다. 영화에 대한 기대치가 있는데 그걸 충족시켜주지 못했을 때 이른바 개연성이란 말로 퉁 쳐서 표현하고 있는 거다.1)
최근 한국 상업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평가 가운데 유독 개연성의 부재를 지적하는 빈도가 늘었다는 말에 안시환 평론가는 위처럼 답한다. 즉, 개연성이라는 말이 어느덧 영화에 대한 불만 전체를 뭉뚱그려 칭하는 말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는 학생들의 용례와도 상당 부분 포개어졌다. 많은 경우 개연성이라는 용어는 작품으로부터 촉발되었지만 정확히 이름 붙이기는 어려운 불만족스럽거나 불쾌한 감각적·정서적 반향 또는 인상들을 한곳에 고정하는 압정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개연성의 부족으로 설명된다는 것은 곧 개연성의 부족만으로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할 뿐이었다.
한편, 개연성의 부족을 지적한 이들 가운데 몇몇은 결말에서 다음 문장을 거의 복사하다시피 구사했다. “영화 〈반도〉는 전작 〈부산행〉의 반도 따라가지 못한다.” 흡사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 〈쇼미더머니〉에서 봤던 디스(disrespect) 랩의 한 구절에 가까운 문장들을 이곳저곳에서 읽으면서, 나는 이런 불길한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 이들에게 비평은 ‘디스’와 같은 것이었을까. 그런 상태로 남은 과제들을 읽다보니 문득 머릿속에서는 가상의 힙합 비트가 울리기 시작했고, 점차 모든 글이 내게는 두 가지 범주 안에서 읽혔다. ‘디스’냐 ‘리스펙트(respect)’냐.
‘비판’에 관해 조금 더 말해보자. 언젠가 학생들에게 본인이 비평을 접하는 경로가 어디인지를 물은 적이 있는데 그들 대다수는 인터넷에서, 특히 유튜브를 통해 ‘리뷰’를 접한다고 답했다(과연 그것을 비평이라 말할 수 있을지를 이곳에서 논하지는 않겠다). 그러니까 소수의 학생을 제외한다면 이들에게 비평은 읽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듣는 것이었다. 나는 학생들이 말한 ‘개연성’의 실체를 어렴풋하게나마 확인하기 위해 일단 유튜브에 접속하여 ‘반도 리뷰’를 검색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영화 리뷰 유튜버’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유튜브가 상단에 추천하는 콘텐츠의 공통점을 꼽자면 영화를 향한 못된 표현이나 조롱을 섬네일과 제목에 노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곳에서는 비판(다시, 과연 그것을 비판이라 말할 수 있을지를 이곳에서 논하지는 않겠다)이 범람하고 있었으며, 나는 학생들의 비판 의식 일부의 출처가 이곳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단순히 이들이 유튜버의 말과 비슷한 내용을 적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눈여겨본 것은 비판의 방식이었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전통적인 문학 비평에서 ‘칭찬하는 비평’이나 ‘비판이 실종된 비평’, 이른바 “주례사 비평”을 경계하는 목소리를 심심치 않게 들어왔다. 그것은 아동문학계도 예외가 아닌데, 이에 관하여 원종찬은 아래와 같이 매섭게 비판한 적이 있다.
한동안 ‘주례사 비평’이 도마 위에 오른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례사 비평이 횡행하는 평단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다. 이는 ‘문학권력’의 폐해일 것이나, 막연히 자본만 탓하는 것으로는 답이 나오질 않는다. 문학권력을 떠받치는 폐쇄적 문단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 관건이다. 아동문학계에는 부족한 문학적 권위를 매사 친목으로 때우려 드는 희한한 ‘동업자 의식’이 없지 않다. 그 때문에 평론이 평론답지 못하고 해설을 닮아 가는 것에 무신경한 온정주의·적당주의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2)
비판의 실종. 이것은 ‘문학 권력’의 문제이나, 근본적으로는 해당 권력을 작동케 하는 문단의 폐쇄성에서 기인하는 문제라는 지적이다. 이때의 ‘권력’이란 일반적으로 출판 자본과 매체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일련의 인적/제도적 네트워크 속에서 발생하는 사후적인 효과 같은 것으로 지목된다. 그러므로 권력 자체를 문제라 말하기는 어려우나, 단 그것이 “폐쇄적 문단 구조”라는 토대 위에서 생산된 것이라면, 그렇게 폐쇄적 네트워크가 공유하는 “희한한 ‘동업자 의식’”에 기대어 자신들의 부족함을 위장하기 위해 쓰이는 것이라면 문제가 된다. 따라서 ‘비판 없는 비평’을 넘어서려는 시도는, 텍스트를 향한 비판이면서 동시에 수행적으로 그러한 권력에 대항하려는 제스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다시 학생들의 “디스”에 가까웠던 비평들로 시선을 옮겨 보자. 그들의 비평은 작품의 권위에 순응하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겠으나, 위의 관점을 그대로 적용해본다면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단지 수업 과제였을 뿐이므로, 즉 권력을 생산하는 예술계의 폐쇄적 네트워크 구조로부터 이들이 자유롭기에 이런 비판이 가능했던 것이라고.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뿐일까? 이것은 전통적인 출판 매체의 조건 위에서 적용 가능한 진단일지도 모른다. 기억하자. 학생들이 구사했던 신랄하고 못된 표현들은 종이 지면이 아닌 인터넷을 출처로 삼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유튜브와 같은 매체에서 권력이 발생하는 구조와 논리는 위 상황과 다르다. 이 세계의 가치는 사실상 수, 이를테면 구독자 수와 조회 수 같은 것으로 환산되고 측정된다. 이때 권력의 문제는 폐쇄적 네트워크의 중심에 얼마나 가깝게 위치하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구독, 조회, ‘좋아요’ 등으로 대표되는) 접속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있다. 비판이나 칭찬을 수행하는 역학도 이 원리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 세계의 (시각-언어와 청각-언어를 포함하는) 말들이 유독 자극적인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점잖지 못한 말을 사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때 자극적인 과잉의 말들은 이따금 공정하지 않은 방식으로 행해지는 비난 또는 상찬의 공허를 감추는 기능을 도맡곤 한다. 그렇다면 “매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는 키틀러(Friedrich Kittler)의 말에 따라3), 비평을 ‘읽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듣는’ 이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비판/비판 의식이라는 것도 이제는 새롭게 정의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공허를 감추는 이 세계의 과잉된 언어들. 그런데 이것은 앞에서 본 ‘개연성’이라는 말의 기능─요컨대 작품에서 체감한 불만족의 감각을 명확한 언어로 상징화하는 데에 실패했음을 은폐하는 것─과도 유사하지 않은가? 이때의 개연성이라는 용어는 작품이 지닌 문제점을 정확한 언어로 설득하기 위해 동원되는 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성격의 것을 전달하려는 목적을 지니는 듯하다. 이를테면 해당 작품으로부터 촉발된 자신의 어떤 감각적·정서적 상태를 표출하려는 의지 같은 것. 결국, 전하려는 것은 작품이 내포하는 문제점이 아니라, 좋고 나쁨에 대한 (이 경우에는 ‘개연성이 부족한 나쁜 작품’이라는) 자신의 감상인 셈이다.
그렇다면 개연성은 비록 개념어의 외피를 취하고 있지만, 정립과 표상(representation)의 언어이기보다는─마치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가 정의한 정동(affect)4) 개념처럼─감각적 표출(expression)에 더 가까운 언어라 말할 수 있다. 신체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표출 언어의 커뮤니케이션, 이곳이 유튜브 시대의 대중들이 소비하는 비평과 (지극히 〈쇼미더머니〉적인 의미에서의) 힙합이 만나는 지점이다. 나는 오직 이들이 〈반도〉라는 제목을 각운 삼아 재치 있는 구절을 썼다는 점에서 위 은유를 떠올린 것이 아니다. 이제 다시 처음의 문제로 되돌아가 보자. 디스냐 리스펙트냐.
〈쇼미더머니〉에 출연한 래퍼들은 종종 상대를 향해 리스펙트를 표하거나 반대로 디스를 벌였다. 전자는 누군가를 향해 존중이나 존경심을 표하는 것이므로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으나, 디스의 경우 일반인들이 인터넷에 게시했다가는 모욕죄가 성립할 수 있을 만한 가사를 상대방에게 퍼부음에도 힙합이라는 장르가 지닌 문화라면서 대체로 용인되곤 했다. 특히 〈쇼미더머니〉는 연출된 프로그램이므로 상대를 향한 무례와 모욕 역시 일종의 쇼비즈니스로 쉬이 수용되었다. 이렇듯 참가자들이 구가하는 디스와 리스펙트는 마치 정반대의 수행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가사는 근본적으로 결여 또는 과잉의 속성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우리는 왜 저 래퍼가 “샷 아웃”(shout out)을 외치며 특정인에게 리스펙트를 표하는지, 또는 반대로 왜 저토록 잔혹한 용어들을 사용하며 시시콜콜한 흠결까지 끄집어내 모욕을 하는지, 그가 뱉는 열여섯 마디 내외의 요란한 가사를 따져보더라도 그 존중과 무례의 실체를 쉽사리 파악하기 어렵다. 왜 그럴까. 사실상 그들의 공연은 정확한 언어를 구사하여 상대방이 얼마나 존중받을 만한 인물인지 혹은 그 반대인지를 설득하는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짜”(real)고 “가짜”(fake)인지를 표상하고 가리는 일이 아니다. 래퍼가 의도하는 바는 해당 인물에 관한 정서적 표출에 있다─자신이 어떤 인물로부터 느낀 존경심 또는 적의에 해당하는 정서적 감각을 표출하려는 의지이자 조각난 몸짓으로서의 언어. 그것이 바로 결핍과 과잉의 언어들로 빼곡한 그들의 가사가 향하는 방향이다.
스웨그(swag), 바이브(vibe) 등등, 비록 실체는 모호하나 감각 차원에서 반응을 일으키는 분위기를 이들이 중요시하는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식의 표출이 랩을 듣는 이로 하여금 정서적 모방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스피노자를 떠올린다면 다소 과한 접근이 될까?
(3부) 정리 27. 우리와 같으면서, 우리가 어떤 정서도 갖지 않았던 사물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정서에 의해 그것이 변용된다고 우리가 상상할 때면, 우리 역시 동일한 것에 의해 변용된다.5)
우리는 래퍼들의 디스/리스펙트를 들으며, 다시 말해서 특정인을 향한 존중 또는 적의의 몸짓을 바라보면서 이들의 정서를─심지어는 이전까지는 그들과 “어떤 정서도 갖지 않았던”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따라 느끼곤 한다. 이는 이성의 언어에 기초한 판단이 아닌, 전적으로 ‘몸(감각-지각)의 사유’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다. 마치 스피노자가 말한 ‘정서의 모방’처럼 말이다.6) 모방과 감염, 이것이 정동의 언어-커뮤니케이션이 작용하는 논리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개연성’이라는 용어에 관해 이렇게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자신이 체감한 불/만족의 정동을 표출하기 위해 채택된 언어일 뿐만 아니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타인을 향한 정서적 감염을 의도하는 용어였다고. 나는 앞에서, 모든 것이 개연성의 부족으로 설명된다는 것은 곧 개연성의 부족만으로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만을 지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이 설명을 위한 언어가 아니었다면, 정서적 공감을 구하는 식의 어떤 감염을 의도하는 몸짓으로서의 언어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물론 나는 이들이 치밀한 계산하에 이런 식의 언어를 사용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에 더 가까울 것이다. 다만, 이번에도 “매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 것이었을 뿐. 그러니까 소셜 미디어를 통해 각자의 피드를 공유하며 “좋아요” “리트윗” “구독” 버튼을 누르는 것만으로 사용자 사이의 매개와 접속이 기하급수적으로 확산하고 증식되는7), 모방과 감염의 체계 위에서 일상을 구성하는 이들이 이러한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을 구사한다는 것은 퍽 자연스러운 귀결이 아니냐는 것이다. 한편, 마수미는 정동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동은 규정적(prescriptive)이지 않다. 그것은 약정적(promissory)이다. 그것이 약정하는 것은 강렬도이다. 그것은 또한 판단의 정치적 기준과 관련하여 중립적이다. 정동은 파시즘적일 수도 있고 진보적일 수도 있다. 또 반동적일 수도 있고 혁명적일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은 사변적으로 움직임의 제스처를 초래하는 초개체적 욕망의 정향에 달려 있다.8)
정동의 방향성은 “욕망의 정향”에 따라 열려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강렬도이다. 유튜브에서 사용자가 콘텐츠를 향해 내릴 수 있는 평가는 오직 ‘좋아요’ 또는 ‘싫어요’뿐이다. 따라서 이곳에서의 강렬도는 좋고 나쁨이라는, 바꿔 말하자면 리스펙트냐 디스냐 식의 투박하게 양분된 정서적 반응 구조 위에서 추동된다.
앞서 학생들이 즐겨 사용한 라인을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는 「부산행의 반도 못했습니다 반도 리뷰」라는 유튜브 콘텐츠가 기록한 조회 수는 2021년 10월 21일 기준으로 무려 138만 회 이상이었다. 출판 매체를 전제로 한 비평 가운데 과연 어떤 글이 1년 만에 대중 사이에서 이만큼 읽힐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아니, 전통적인 관점에서, 1년 사이에 138만 회 이상 읽히는 비평이 과연 좋은 비평으로 평가될 수 있기는 할까?). 단순히 어떤 비평은 재밌고 어떤 비평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상이한 매체의 논리와 언어의 속성으로부터 기인한 효과라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하겠다. 정서적 감염을 일으키는 높은 강렬도의 디스/리스펙트적 언어에 기초하여, 누군가의 조회·구독이라는 반응이 다른 사용자의 알고리즘에 개입해 연결과 감염의 확산을 불러일으키는 이 세계의 체계가 만들어낸 결과가 바로 137만이라는 수치인 것이다.
기실 새로운 매체의 출현이 전통적 매체의 자리를 뒤흔드는 현상은 오래전부터 목격되었다. 사진 이후의 회화, 영화 이후의 문학 등이 그 사례일 것이다. 하지만 키틀러가 영화의 출현은 단순히 당장의 “소설가들에게 어떤 형태의 경쟁을 유발”한 것을 넘어 “책이라는 것 자체가 시청각 조건 아래에서 어떤 새로운 위상”에 놓이는 결과마저 불러일으켰다고 말한 것처럼9), 그것은 전통적 매체의 본질 자체를 소급하여 재규정한다. 예컨대 ‘#문단_내_성폭력’이라는 소셜 미디어의 해시태그가 한국문학장 근간을 뒤흔들고 이를 재규정했듯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튜브의 존재를 이렇게 말해본다면 어떨까. 그것은 현장 비평(또는 리뷰)의 현재적 경쟁(?) 플랫폼일 뿐 아니라, 비평이라는 기록 형식 자체를 종전과 다른 위상으로 이끄는 매체 조건이라고.
한쪽에서는 여전히 출판 매체를 기본 전제로 한 비평이 생산된다. 진리, 이데올로기, 세계관 등등 표상의 언어들이 기록·공유되는 이 세계가 요구하는 것은 일종의 동일시(identification)이다. 이곳의 언어들은 문학(예술)이란 무엇이어야 하며 세계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주체는 이 커다란 표상의 일부로서 자신을 동일시하고 참여해야 하는지에 관해 말한다. 앞서 언급한 “폐쇄적 문단 구조”나 “희한한 ‘동업자 의식’” 같은 것은 바로 이 동일시의 운동이 닫힌 체계에 이르렀을 때 발생하는 증상에 해당할 것이다. 이때 비판은 폐쇄적인 권력을 생산하는 어떤 동일시의 구조에 틈을 내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모방과 감염의 체계 위에서 신체 수준의 커뮤니케이션이 확산·전파된다. 정동의 표출과 감염을 의도하는 조각난 몸짓으로서의 언어들이 범람하는 세계. 이곳에서 주체는 각자의 스마트폰을 매개로 비슷한 방향의 감각·정서의 표출들에 반응하며 잠정적·즉흥적으로 관계하고 해체하기를 반복한다. 표상을 공유하거나 동일시를 요구하지 않는 체계인 까닭에 이곳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비판이 이루어진다. 또한 숫자만 보더라도 활발한 상호적 커뮤니케이션이 발생하는 곳은 단연 이쪽이다. 하지만 그것은 늘 다양한 잠재적 가능성의 증대로 이어지기보다는 때때로 플랫폼이 구획한 정서적 정향에 따라, 예컨대 유튜브라면 좋아요/싫어요로 구축된 디스/리스펙트 형식의 반응 구조에 따라 더 많은 감염(자들)을 추수하기 위한 강렬한 과잉/결핍의 언어만을 양산하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했다.
상대의 언어를 불가해한 방언이라 여기며 점차 양분화하는 두 세계 사이에서, 비평은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아마도 이 두 세계의 언어를 연결하는 것이 앞으로 비평이 짊어지게 될 또 하나의 책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교과서적인 답안일 테지만, 그것이 가능한지 아닌지는 차치하더라도, 앞서 언급한 ‘비평적 글쓰기’ 수업에서의 ‘적’처럼 그것은 두 세계 사이에서 어정쩡한 형태로 간신히 발만 걸치려는 시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정말 비평의 조건 자체가 새로운 위상으로 이동했다면 이야기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요컨대 모든 문제점을 ‘개연성의 부족’이라는 결론으로 봉합해서는 안 된다며, 그 아래 밑줄을 긋고 동일시의 문법에 기초한 표상의 언어로 첨삭을 하고 나면 끝나는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문득 이런 의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이 두 세계가 진정 다른 영토이기는 한 걸까? 아무리 위대한 출판물이라고 하더라도 만약 검색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 세계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10) 반대로, 아무리 강렬한 전파 체계를 갖추었더라도 감염을 일으킬 언어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두 세계는 이미 포개어져 있었다. 한쪽은 공백을 감추기 위해 비평(리뷰)의 언어 형식을 과잉 전유하고, 다른 한쪽은 다분히 존재론적인 이유로 모방과 감염의 체계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존재론적 위상의 현상황을 고려했을 때, 표상의 언어에 기초하여 표출의 언어를 첨삭해 온 그간의 관습은 이제 재고되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랜 시간 신성시되어 온, 또한 비평의 원점이라 할 수 있는 ‘비판’이라는 주제를 향해 재차 질문을 던져야 한다. 디스/리스펙트의 시대에 비판이란 과연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가?
강수환
아동청소년문학평론과 매체 연구를 하고 있다. 무엇 하나도 쉽지가 않다.
2021/10/26
47호
- 1
- 송경원, 김병규, 김소희, 안시환, 「한국 상업영화에 떠도는 개연성이란 유령」, 『씨네21』 1270호, 2020. (링크)
- 2
- 원종찬, 「내게 비평은 무엇인가?」 『아동문학의 오래된 미래』 창비, 2020, 184쪽.
- 3
- 프리드리히 키틀러, 『축음기, 영화, 타자기』, 유현주·김남시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9.
- 4
- “(…) 정동은 몸으로 생각하기─의식적으로 그러나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사유의 의미에서, 모호하게─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브라이언 마수미, 『정동정치』, 조성훈 옮김, 갈무리, 2021(제2판), 34쪽.
- 5
- “Although we may not have been moved toward a thing by any emotion, yet if it is like ourselves, whenever we imagine it to be affected by any emotion, we are affected by the same.” Benedict De Spinoza, Ethics, Trans. James Gutmann, Hafner Publishing Company, 1954, p.147.
- 6
- 예를 들어 스피노자는 이러한 “정서들의 모방” 이 슬픔과 연결된다면, 그것은 ‘연민’으로 불린다고 말한다. Ibid, p.148.
- 7
- 미디어 학자 이시다 히데타카 역시 이러한 정서의 감염과 확산이 이루어지는 체계인 인터넷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피노자를 참조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石田英敬·東浩紀, 『新記?論』, ゲンロン, 2019, p.293, 326.
- 8
- 브라이언 마수미, 위의 책, 296쪽.
- 9
- 프리드리히 키틀러, 『광학적 미디어』, 윤원화, 현실문화, 2011, 42쪽.
- 10
- 피터스는 오늘날의 존재론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 적이 있다. “만일 구글이 당신을 찾지 못한다면,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 더럼 피터스, 「자연과 미디어」, 이희은 옮김, 컬처룩, 2018, 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