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비평 연재 실험
0.
한 편의 좋은 글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몇 번의 마감이 필요할까?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원래 예정된 마감일을 며칠이나 훌쩍 넘겨버린 상태라는 것을 먼저 말해야겠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닥친 마감의 고통이 너무 괴로워서 이러한 물음을 던지는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제도권 안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지면의 일정에 맞춰 반드시 글을 써내야 하는 의무를 부여받는 일이기도 하다. 예컨대 문단에서는 매달 혹은 계절에 한 번씩 문예지가 발간되고 그 일정에 맞춰 원고의 마감 기한이 정해진다. 등단을 하고 글을 발표한 지 1년 정도가 흐른 시점에서 회고해보니 그간의 글쓰기는 ‘비평 활동’이 아니라 ‘마감 노동’에 가깝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청탁을 받으면 항상 마감 기한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하지만, 비평에 필요한 생각과 사유들이 특정한 때에 맞춰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다보면 나 자신도 아직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내용을 어떻게든 글로 써서 발표해야 하는 일이 생기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생각이 명료하게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좋은 글이 나올 리 없다. 그것을 쓰는 사람이 잘 알고 있고, 읽는 사람의 눈에는 더 선명히 보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나는 한 편의 글이 마감 이후에 보다 단단해지고 명확한 형태를 갖출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지면을 통해 실험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마감 이후’의 가능성이다.
이 글은 내가 문장 웹진 7월호에 발표한 비평 「공정과 인정, 그리고 감정」의 후속편이라 할 수 있다1). 개인적으로 당시 마감에 쫓겨 이 글의 결론에 해당하는 4장을 급하게 마무리했던 일이 두고두고 아쉬웠다. 항상 다른 지면을 통해서 이 글의 작업을 더 보완해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때마침 좋은 기회가 생긴 것 같아 여기에 적어보려 한다.
1.
그러니까, 수진에게 “새 말을 기입하는 건 새 세계를 들여오는 일”(「티 나지 않는 밤」)이라는 사실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일견 언어철학적인 관점을 연상시키는 이 구절은 수진이 발을 딛고 서 있는 또다른 작품인 「여자가 지하철 할 때」(이하 「지하철」)와 접목시켜 읽을 때 한층 더 흥미롭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듯하다. 우리는 이름 짓는 행위를 통해 최초로 세계와 마주하며, 새로운 말의 도입은 인식의 영역 밖에 존재하는 세계를 지각 가능한 범주로 확장시키는 계기가 된다. 이와 같은 호명 행위는 특히 페미니즘의 영역에서 여성의 권리 평등을 주장하는 운동이 되었으며 여성 노동의 인정 범위는 가사노동, 꾸밈 노동, 돌봄 노동과 같은 언어의 기입을 통해 꾸준히 확장될 수 있었다. 이렇듯 언어적 수행은 그간 비가시적 영역에 가려져 온 행위의 실재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개념화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개인적으로 처음 이 글을 구상하게 된 계기 역시 작품에 언급된 ‘존재 노동’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주는 영감 때문이었는데, 본고에서는 이 말이 지닌 가능성과 한계를 환대의 문제와 연결시켜 고찰해보려 한다.
잘 알려져 있듯 자크 데리다는 이방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환대의 윤리를 제시한 철학자다. 이방인은 누구인가? 그는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매우 불확실한 존재이자, 주체인 나를 위협하고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자이다. 그렇게 우리의 두려움과 적대심을 유발하는 이에게 어떠한 조건 없이 자신을 개방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무조건적인 환대이다. 물론 데리다는 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 도덕적인 당위로 환원시키지는 않는다. 우리는 타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고 그가 가진 의도와 목적에 대한 회의를 떨칠 수 없다. 다만, 그러한 질문과 의심의 과정 속에서 주체의 책임을 산출시키는 공동체의 윤리를 확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지금껏 환대는 윤리적 영역에서 타자의 환대 ‘받을’ 권리를 중심으로 여러 논의들이 이루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환대의 윤리 못지않게 환대의 정치를, 타자의 환대받을 권리만큼 주체의 환대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에 대해 사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주 사회로의 변화가 더이상 되돌리거나 회피할 수 없는 명백한 삶의 조건이 된 상황에서 드러나는 여러 사회적 긴장과 갈등들은 이러한 논의를 간과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은 아닐까.
우리는 흔히 한 사회가 이방인에게 문을 열어주고 그들을 환대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 사회의 구성원은 집단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구체적인 개별자들이다. 그것은 이민과 이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점점 더 높아지는 상황에서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환대의 책임이 구성원에게 균등하게 할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뜻한다. 마치 우리가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바이러스 감염의 위험이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8년 예멘 난민 사태와 올해 8월 아프가니스탄 특별 기여자의 입국 등을 통해 마련된 공적인 논의의 장에서 환대의 책임을 사회 구성원들이 어떻게 정의롭게 분담하고 공유할 수 있을지에 대한 토론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불평등에 대한 적절한 숙고 없이 누군가에게 더 많은 사회적 부담이 지워진다면 그 역시 부당한 일은 아닐까? 이러한 문제 설정은 이방인에 대한 환대를 중단하고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공동체적으로 지속 가능한 행위로 만들기 위해 필요하다.
많은 경우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어디에서 살고, 어디에서 일할지를 결정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주어져 있지 않다. 전 지구적 이주가 가속화되고 있는 오늘날, 사람들은 세계화의 물결에 휩쓸려 자신과는 다른 이방인과 일상적으로 상호작용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예를 들어 한국 사회에서 하층 계급의 자리는 이주 노동자들에 의해 메워지고 있다. 이는 임시직이나 일용직과 같은 저임금의 불안정한 고용직에 종사하는 사람일수록 그들과 같은 일터에서 노동하고 시간을 공유할 가능성을 증가하게 만든다. 또한 자본에 의한 도시의 발전은 지리적으로 불균등하고 차별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도시 공간은 다른 계급 간의 마주침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드는 쪽으로 점차 게토화·양극화되고 있다. 달리 말해 경제적인 격차는 시간과 공간의 두 층위에서 구성원에게 이주민들과 더 많이 마주치고 접촉해야 하는 경험을 부과하고 강제한다. 그렇다면 이처럼 개인의 신체를 특정한 시공간 속에 배치하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규율 권력과 모든 시민에게 평등하게 분담되어야 할 환대의 책임은 과연 양립할 수 있는 것일까?
2.
지하철은 자본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시스템이자 근대적 삶의 일상성을 표상하는 상징적 장소이다. 그것은 도시에 거주하는 노동자를 그들이 일하는 곳으로 이동시키며, 다시 그들이 에너지를 재충전할 수 있도록 주거지로 옮겨 놓는 기능적인 공간이다.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으로써 지하철은 도시의 익명성을 바탕으로 구성원의 동일성과 균질성을 요구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안에는 계급, 젠더, 지리 등 다층적인 차이들을 가로지르는 불평등이 내포되어 있기도 하다. 예컨대 도시의 중심부에서 먼 곳에 거주하는 저소득층일수록 통근을 위해 지하철에 머무르는 시간은 길어질 수밖에 없으며,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험을 감수하며 지하철을 타야 하는 사람과 재택근무 혹은 자동차를 이용하여 출근할 수 있는 사람들의 처지는 같을 수 없다. 또한 강남역 살인 사건을 비롯하여 매일 크고 작게 발생하는 각종 성범죄는 지하철을 타는 여성과 남성에게 일상적인 불안감을 다르게 부과하고 강제한다. 요컨대 지하철은 개별적인 차이가 존재하는 동시에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서는 안 되는 집합적인 장소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간극이 지하철이라는 공간 특유의 갈등과 긴장감을 발생시킨다.
‘위험한’ 사람? 어떻게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어? 너도 알고 나도 알잖아, 하는 식으로 우리 모두 네 생각에 동의하는 양, 그것이 공인된 것인 양, 굴지 마. 대체 ‘위험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야? 그 말을 쓰려거든 위험한 사람에 대한 네 사적 정의부터 밝혀.”
(…)
“좋아. 내가 정의를 내려 주지. 위험한 사람이란!” 눈알 사람이 공중 따옴표 사람에게 얼굴을 바짝 갖다 대며 말했다. “네가 옆에 안 앉으려고 하는 사람. 어때, 심플하지?”―이미상, 「여자가 지하철 할 때」 부분.
최근에 유튜브를 통해 〈무한도전〉의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특집을 다시 시청한 적이 있다. 이 에피소드에서 출연자들에겐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남산 공원까지 도착해야 하는 일이 미션으로 주어진다. 이 방송분은 이러한 미션 수행의 과정을 통해 일상성 또는 정상성에서 이탈한 모습을 하고 대중교통에 탑승했을 때에 발생하는 장면들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예컨대 당시 정형돈은 가수 엄정화의 화려한 무대 의상을 입고 진한 메이크업을 한 상태로 지하철에 승차한다. 승객들은 그에게 이목을 집중하지만 동시에 그의 옆자리에 앉으려고 하지는 않는데, 이때 정형돈이 객실의 긴 의자에 홀로 앉아 있는 모습은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 있는 맞은편의 상황과 대비를 이룬다. 이와 같은 대조적 장면은 같은 장소를 공유하고 있는 이들이 누군가를 ‘다른’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드문 광경을 보여준다. 물론 정형돈은 그 상황을 굉장히 민망해하면서도 특유의 유머러스함을 잃지 않지만, 만일 그와 비슷한 풍경이 방송 촬영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벗어나 일상적 영역에서 펼쳐진다면 그 같은 난처함을 견딜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은 왜 사람에게 일종의 수치심을 유발하는 것일까? 인류학자 김현경에 따르면, 환대는 어떤 사람이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행위이자 그가 동등한 인격체로서 사회 속에 현상하고 있음을 몸짓과 말로써 확인해주는 일이다2). 공적 장소에서 타인은 언제나 나에게 그곳에 나타날 권리를 요구하는 자이며, 우리는 일상적 의례를 주고받으면서 서로를 그곳에 머무를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다. 만일 위의 예시와 같이 어떤 사람의 옆에 아무도 앉기를 원하지 않는 경우, 그것은 상대에게 자리를 점유할 권리가 없음을 암묵적으로 발화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지하철에 탑승한 뒤, 어떤 자리에 앉을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그것은 나의 몸을 상대방의 몸과 얼마나 가까운 범위에 둘 것인가에 대한 판단을 요청하는 일이다. 만일 내가 어떤 이를 나의 동료 시민으로 간주한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그의 옆자리에 가서 앉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를 적대시하거나 꺼린다면, 나는 그로부터 최대한의 거리를 유지하고자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지하철에서 착석 위치를 선택하는 문제에는 내가 상대를 무엇으로 대하고 있는가의 응답이 언제나 내포되어 있으며, 그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동등한 시민으로의 인정이 부여되거나 박탈될 수 있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와, 수진과 같은 객실에 탑승한 ―그리고 아마 수진과 비슷한 고민에 빠졌을― 다른 여성 승객은 혹시나 발생할 수 있는 위험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자신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른 칸으로 떠난다. 그렇다면 남자에게 수치심을 불러일으킨 이 여성은 도덕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물론 여자의 행위는 상대를 향한 불쾌감 혹은 혐오를 드러내면서 자기 자리에 머무를 수 있는 그의 권리를 박탈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에게 위협을 가할 수도 있는 이와 멀리 떨어지고자 하는 것 역시 개인의 자연스러운 방어적 본능이다. 결국 이 텍스트의 가장 큰 난점은 남자에 대한 서술이 추상적이고 모호하게 이루어지는 것인데, 따라서 여자가 자리를 떠난 행위에 대한 판단은 끝내 유보될 수밖에 없다. 다만 이렇듯 불충분한 정보 제시는 예측할 수 없는 타자에 대한 환대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그 의무가 환대자의 취약성과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극대화하여 보여준다.
요컨대 지하철 내부의 상황이 정확히 묘사되진 않지만, 최소한 거기에 있는 두 명의 여성이 남자로부터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낀 채 객실을 떠나야 할지 고민하고 있으며 한 명은 그것을 실제로 행동에 옮겼다. 그러나 이때 다른 여자와 달리 수진이 공포심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벗어나지 않는 이유는 그녀의 행동 반응이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느리거나 둔감해서가 아니다. 다만 수진은 자신의 불안감을 겉으로 드러내거나, 자리를 옮겨 남자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시도가 그에게 실례를 범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망설인다. 달리 말해 그녀의 내면은 자신이 낯선 타인으로부터 폭력을 겪을 수 있다는 두려움과, 자신의 차별적인 태도가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줄 수 있다는 죄책감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수진이 텍스트 전반에서 양가적이고 분열적인 존재로 그려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옆 칸으로 옮길 것인가, 말 것인가. 이는 그녀가 여성-시민으로서 경험하는 아주 실제적인 딜레마인 것이다.
수진이 다시 의자에 앉는다. 복도에서 먼지 섞인 바람이 불어온다. 이제 정말 용기를 내야 할 타이밍이다. 타이머를 맞추고 수진은 눈을 감을 것이다. 가만히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1분을 버틸 것이다. 어둠 저 끝에서 돌진해 오는 공포를, 기억을, 감은 눈으로 볼 것이다.
인간은 사적 개인의 방어적 이기심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인 동시에, 타자를 향한 책임에 부응하는 이타심을 보여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용문에서 수진은 남자를 향한 의구심과 두려움을 끝내 떨쳐내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리에 남아있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이는 공적 장소에서 자신의 드러날 권리를 요구하는 이방인에게 수진이 윤리적으로 응답하는 하나의 사건이 된다. 이때 환대의 행위는 확신할 수 없는 낯선 타인에게 주체가 자신의 존재를 개방하는 범위까지 실천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묶인 듯 의자에 앉아”있으면서 “발작하듯 자꾸 뜨이는” 수진의 눈꺼풀은 그녀의 내적 갈등이 여전히 끝나지 않았으며, 타자에 대한 환대가 주체의 취약성을 완전히 초월한 범위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수진이 자신의 안전을 부분적으로 포기하는 선택을 하는 이유는 그녀에게 타인과의 연결성을 인지하고 감응하는 공동체적 능력이 있기 때문이며, 여기에는 다른 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염려하고 헤아리는 일종의 해석 노동이 수반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진의 이와 같은 행위는 공적인 삶과 연관된 가치 있는 경험으로 파악되지 못한 채 무의미하게 흘러갈 뿐이다. 남자와의 우연한 마주침은 수진에게 단순히 “살았다!”와 같은 짧은 안도감을 불러일으키는 생존의 문제로 귀결되고 있으며, 이로 인한 정서적 피로감과 탈진감 역시 그녀가 개인적으로 감당해야 할 고통의 범주 안에 놓인다. 기존의 명명 체계 안에서 그녀의 행위에 인정을 수여하는 언어는 부재한 상황이며, 이는 개인이 수행하고 있는 공동체적 가치를 의미화의 범주 바깥에 위치시킨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수진이 보여주는 공존의 가치가 상징적 영역으로 적절하게 포섭되지 못할 때 그것은 단지 주체에게 심리적인 고통을 야기하는 원인으로만 여겨지는 것이다. 어쩌면 도시민으로서 그녀의 일상은 이렇듯 실체 없는 감정 소모의 악순환에 소모되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이 작품이 취하고 있는 형식상의 낯섦은 무엇보다 언어로 포착될 수 없는 경험의 재현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3.
『보이지 않는 가슴』의 저자 낸시 폴브레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돌봄이라는 ‘보이지 않는 가슴’에 기대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시장은 사랑, 의무, 호혜의 가치를 바탕으로 하는 가족과 공동체의 틀 밖에서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3). 대개 돌봄 노동은 면대면 상황에서의 대인 돌봄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다른 이를 보살피고 타인의 필요를 충족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보편적 차원의 돌봄을 가리키기도 한다. 우리의 세계를 유지하고 지속하고 보수해 나가기 위해 수행하는 모든 활동이 돌봄이며, 돌봄의 대상은 우리의 몸과 자아, 환경 등 삶을 지속하는 데 관련된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시장의 경쟁은 바로 이와 같은 공동체의 돌봄 활동에 의존하고 있으며, 특히 전 지구적 차원에서 자본이 축적되기 위해서는 이방인에 대한 시민적 환대가 필수적이다. 어떤 점에서 환대는 자본과 재생산으로 수렴되는 근대적 경험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에 수반되는 시민들의 그림자 노동에 의해 시장과 국가의 역할은 꾸준히 확대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사적이고 자기충족적인 활동의 경계를 넘어선 모든 행위는 그것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을만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언어로 표면화되고 구조화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근대적 산업 경제에서 노동은 기업을 구성하는 임금 노동으로만 취급되며, 나머지는 그림자 노동으로 은폐된다. 누가 행위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에 값을 매기는가를 결정하는 시장의 평가 권력은 비경제적 영역에서의 행위성을 더욱더 눈에 띄지 않게 만드는 방식으로 공동체에 대한 구성원의 기여도를 훼손한다. 자본주의의 협소한 인정 질서는 공동체의 유지에 필수적인 행위를 하는 이들을 스스로의 의미 있는 활동에서 소외시키며 자신의 행위를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받아야 할 것으로 분명히 인식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능력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개인과 사회의 상호의존 구조에서 국가 질서는 환대를 수행하는 구성원의 역량에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언어를 박탈하기 때문에 문제적이다.
그러니까 이 끔찍이 쉬운 일을 수진이 전담하게 된 데에는 수진의 의지 말고 다른 이유는 없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고 그랬기에 수진은 할 수밖에 없었다. 면제가 수진에게 그 일을 하게 한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어. 나는 처지 노동 중이야. 존재 노동 중이야. 내 덕에 저 사람들, 단차를 느낄 수 있어. 베풀 수 있어. 언제나 베푸는 쪽 기분이 나은 법이지. 베풂 당하는 쪽보다. 나는 절대 고마워하지 않을 거야…….”
이와 같은 맥락에서 수진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존재 노동’이라고 명명하는 장면을 살펴보자. 우선 이 호명 행위는 그동안 언어로 규정되지 못했던 행위와 주체 사이의 관계를 선언하는 일종의 사건이며, 자본주의의 평가 권력이라는 위계적인 가치 부여의 틀을 벗어나 공동체적 삶을 추구하는 스스로의 수행에 이름과 상징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그녀는 동시에 타인을 환대한 자신의 경험을 경제적인 교환 논리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충동을 드러낸다. 인용문에서 수진은 자신이 국가로부터 복지의 혜택을 받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재생산 활동을 도맡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면제’가 수진에게 환대를 강제했다는 것은 그녀가 사회가 주는 이익을 누리는 대가로 자신의 생존권을 일부분 포기한 채 감정 노동을 행하고 있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이는 일차적으로 인물이 자신의 행위에 대한 몫을 주장하는 것에 매몰되어 교환 논리 바깥에 충분히 존재할 수 있는 다른 수여 관계를 바라보지 못하는 시야의 협소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한층 더 문제적인 지점은 수진에게 환대란 자신의 낮은 계급적 위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가난에 대한 일종의 형벌이나 희생에 가까운 수동적 행위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흔히 난민이나 이주민의 유입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지리적인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도시와 도시 사이, 동네와 동네 사이, 아파트와 주택 사이에 명시적 또는 암묵적으로 그어진 계급적 경계선들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이웃의 존재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말들이 단순히 이방인 혐오를 위해 동원되는 논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가 낯선 이들을 환대하는가? 벌거벗은 생명으로 이곳에 당도한 이와 가장 먼저 삶을 부대껴야 하는 자는 이미 여기에서 배제를 경험한 공동체 내부의 타자인지도 모른다. 특히 가난과 빈곤을 오로지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사회에서, 도시 공간의 양극화는 이웃에 대한 환대를 단지 계급에 따르는 대가이자 견디고 감내해야 할 무언가로 전락시킨 것은 아니었을까. 경제적으로 낮은 지위가 모욕과 모멸의 대상으로 여겨질 때, 우리의 이웃은 자신에 대한 혐오를 투사하는 가장 쉬운 상대로 변모한 것이 아닐까.
그러니 어쩌면 꽤 오랫동안 우리는 수진에게 ‘환대할’ 권리를 제대로 보장해주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시민의 권리는 원칙적으로 자유롭고 동등하다고 가정된 모든 행위자에게 특권 없이 부여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성의 실존적 두려움은 환대를 언제나 단절과 중단의 가능성을 내포한 행위로, 경제적 영역에서의 불평등은 그것을 가난에 대한 형벌이자 책임으로 인식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불안감과 공포 없이 타자를 기꺼이 환대할 수 있는 실질적인 자유, 구성원 간의 평등한 관계를 바탕으로 이웃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분담할 권리, 단지 개인적 차원의 생존을 도모하는 것을 넘어 타인들과 연결되고 더불어 살기 위해 필요한 정신적·물질적 토대들. 수진에게 박탈된 것은 바로 환대라는 행위를 성립하도록 만드는 근본적인 가능 조건이자, 우리의 공동체를 유의미하게 구성하고 꾸려나가는 일에 참여할 수 있는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권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녀에게 환대를 허(許)하라. 이는 우리의 공존을 가로막는 불평등의 구조와 억압적인 조건들을 성찰하고 개선해야 한다는 정치적인 요구이다.
다시 앞서 언급한 데리다의 논의로 돌아온다. 이방인은 주체가 속한 공동체의 관습적 규약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그 자신이 질문으로서 존재하는 대상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우리가 이방인을 환대할 수 있는 (불)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하나의 물음을 던지는 것에서 출발한다. 지구상에 거주하는 서로 다른 존재로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 방식이, 주변부와 경계성을 생산하는 사회적 질서와 결합될 때 어떻게 또다른 억압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낯선 소설적 언어로 포착해낸다. 나는 이전에 이 작품을 평한 다른 글4)에서 「지하철」이 악무한의 일상적 지옥에 갇힌 폐쇄된 세계관을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을 다시 읽는 지금, 내 눈에 달리 들어오는 것은 이 소설이 던지고 있는 우리의 새로운 권리에 대한 가능성이다. 우리가 환대를 의무가 아닌 권리로 누릴 수 있는 어떤 인간적인 세계에 대한 가능성. 이 텍스트는 우리가 오랫동안 놓쳐 왔던 다른 세계의 문을 용감하게 열어젖히며, 자신의 환대할 권리를 질문하는 이방인으로 변모해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와 있다. 그러니 우리는 다시 이 작품을 어떻게 환대하고 기꺼이 맞이할 수 있을까. 이 물음을 끝으로 이 소설의 길었던 독서를 마치고자 한다.
박서양
문학평론을 쓴다. 텍스트 안에 숨어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확장시키는 글을 쓰고 싶다.
2021/10/26
47호
- 1
- 박서양, 「공정과 인정, 그리고 감정」, 《문장웹진》 2021년 7월호. (링크)
- 2
-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207쪽.
- 3
- 낸시 폴브레, 『보이지 않는 가슴』, 윤자영 역, 또 하나의 문화, 2007, 29쪽.
- 4
- 졸고, 「얼굴의 발생학」, 《자음과모음》 2020 겨울호, 335-3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