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 그들

   안녕하신가요. 저는 잘 있습니다. 썩 좋지 않지만 괜찮아요. 거긴 어떤가요.
   아침마다 곳곳의 코로나 발생 현황을 확인하는 것이 일과가 된 지 오래되었다. 스쳐 보내고 만 얼굴들,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를 이들에게 혼자 속으로 안부를 묻는 날들이다.
   최은미의 첫 소설집 표제작이기도 한 「너무 아름다운 꿈」(2011)은 정체불명의 폐렴 바이러스가 몰고 온 상황을 담고 있다. 그에서 파생된 죽음들은 인물들의 개별적인 비극을 아우르며 끝없는 고통 속에 갇힌 인간 삶을 형상화해낸다. 소설이 비추는바, 현실은 그러하다. 안간힘을 써서 터널을 빠져나왔는데 다음 터널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길목을 지키고 있을 때, 그럴 때는 정말이지 길을 박차고 나가는 것이 버겁다. 살아있는 이상 삶의 무게를 짐 져야 한다고 다독이며 최은미의 인물들을 생각한다. 사방이 가로막힌 곳에서 비명을 지르던 이들, 그들은 아직도 거기 있을까.
   고통은 인류 역사의 시원에서부터 문학의 화두였다. 하인츠 슐라퍼의 『신들의 모국어』는 도처에 위험이 도사린 자연 속에서 신을 향해 생명을 구하던 주술적 기도로부터 서정시의 기원을 찾는다. 책은 신에게 도달해야만 한다는 절박 속에서 벼리고 벼린 언어, 그리하여 일상적 언어 형태를 넘어선 그 구원의 언어가 문학의 원형이라 소개한다.1) 간절함이 그 형태를 바꾸어버린 언어를 받고서 신들은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해주었을까. 그랬을 것이다. 어리석고 약한 인간의 말을 들어주는 것으로, 죽음보다 더한 고통으로 인간을 죄어오는 공포, 그 원시적 감정을 토해낼 수 있는 무한의 품이 됨으로써 인간을 구원했을 것이다.
   신의 권능이 회의에 부쳐지는 동안 문학은 여전히 건재하여 우리 발화의 공간이 되고 있다. 사회심리학자로 글쓰기의 치유 효과를 연구해 온 제임스W. 페니베이커는 『표현적 글쓰기』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글쓰기가 인간의 몸과 마음에 끼치는 영향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2) 권위적 청자에게 바쳐지던 제물이자 구원의 도구였던 언어가 이제 그 스스로 인간 회복의 기능을 대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의 장에서 우리는 읽고 쓰는 이 행위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성실히 제기하고 있다. 이는 문학이 고통의 주체인 공동체 및 그들 삶과 멀어져서는 안 된다는 각성의 발로일 것이다. 우리 삶과 사회를 이끌어가는 것은 이런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논의이지만, 합리를 결정하는 것은 삶과 죽음 사이에 선 인간 실존의 상태와 그로부터 발생하는 원초적 감정이다. 문학은 사회적, 예술적 효능으로 인식되기 이전에 인간의 감정을 발화하고 탐구하는 공간이라는 그 본원적 존재 양태로 인하여 여전히 누군가에게 구원일 것이다.
   창작이 인간 고통을 발화하는 공간으로서 의미가 있다면 작가가 토해놓은 고통을 자발적으로 제 안에 들이는 독자의 읽기 행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때로 한여름 밤 더위를 식혀주는 쾌를 넘어서는 서스펜스를 만날 때가 있다. 심연을 파고들어 저 깊은 혐오를 헤집어 놓는 서사 앞에서 허우적대면서도 다음 장을 넘기고야 말 때, 우리가 다시금 확인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그 불가해한 공포 속에서 언캐니한 자기 얼굴을 눈치챘기 때문이 아닌가. 문학이라는 완충지에 기대어 일상이 감춰둔 진실을 목격하는 것, 그것이 문학의 불쾌를 기꺼이 들이는 우리의 모습일 것이다.
   나는 한때 최은미의 소설들이 전하는 고통과 공포에 사로잡혔던 적이 있다. 미적 체험이자 인식적 체험으로서의 독서, 그것은 읽기 사후의 일이었다. 나의 독서는 그러한 인지가 일어나기 전, 소설이 품은 감정에 직관으로 반응하면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고 있다. 격렬했던 읽기의 시간을 냉정과 객관을 지향하는 쓰기 양식, 비평의 틀 속에서 공글리며 보낸 한 해였다. 감정적인, 너무나 감정적이었던 나의 등단작, 그 첫 비평은 내 삶에 어떤 파장으로 작용하고 있을까.
   휘몰아치는 지옥의 세계를 건넸던 소설에 오래도록 안부를 전하고 싶었다. 공포와 전율이 지나간 지금, 다시 돌아온 나를 소설은 어떠한 얼굴로 맞을까.


   * 쓰기가 되기까지

   마지막 한숨까지 모두 풀어놓았다고 생각했던 지난밤의 이야기들이 아침이면 다시 돌아와 하루를 장악하고 그 하루들이 그대로 삶이 되는 날들이 있다.
   문예창작학과에 들어온 것은 고통받는 인간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무정형의 대상들을 자기 언어로 형상화해낼 때 그 고통으로부터 놓여날 수 있다는 정신분석학의 치료 메커니즘이 문학 창작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말할 수 없었던 내면의 결들이 마침내 첫 발화를 터트리는 것은 어떤 순간인지, 작가 내면의 욕망과 아픔은 창작의 시간 동안 어떻게 변해 가는지, 쓰기가 쌓이는 동안 최초의 작품을 배태시킨 삶의 문제들은 어떻게 되는지 알아야 했다. 다만 작가들 옆에서 그들의 작업을 엿보고 싶었던 것이었으나 동료의 창작을 보기만 허락하는 수업은 없었다. 나는 직접 써야 했고, 내 안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역동을 관찰하며 스스로 답을 구해야 했다.
   작가들은 어떤 순간 창작의 욕구를 느낄까. 비평가들이 비평의 욕구를 느낄 때는 어떤 때일까. 소설을 읽다 보면 내가 이 소설을 선택해서 읽는 것이 아니라 소설이 나를 독자로 지목한 것이 아닌가 싶은 순간이 있다. 걷잡을 수 없이 빨려 들어가는데 그 이끌림의 이유를 당장의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때 나는 그 작품을 비평 텍스트로 삼았다. 최은미의 소설은 그렇게 만났다. 그 소설들은 지옥의 형상으로 설명되었었다. 두 권의 소설집 『너무 아름다운 꿈』(2013)과 『목련정전』(2015)의 해설들은 지옥을 반복적으로 형상화하는 소설 행위의 목적을 유추하고, 작가가 지옥의 형상을 직조하는 방식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부연의 말 없이 간명하게 떨어지는 단어, ‘지옥’ 앞에서 멈칫했다.
   이것이 다만 인간의 고통을 말하는가. 이 세계는 여성의 지옥이 아닌가. 그 고통을 인간 공통의 언어로 나누어 갖는 것은 그들 피의 농도를 희석하는 것이 아닌가. 내게 최은미의 소설은 자연의 부름에 대한 충만한 응답으로서의 잉태를 박탈당한 채 잉태하는 제 몸을 저주하는 여성들의 이야기, 잉태 행위와 죽음 행위를 강박적으로 반복하는 비명과 울음으로 가득 찬 세계였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들을 저 울음 바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인본주의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경청의 자세를 이야기한다. 발화자가 경험하고 있는 감정들을 정확히 듣고, 이해한 것을 다시 그에게 전달해주는 것, 듣기와 말하기의 관계를 둘러싼 진실된 관계 속에서 인간은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3) 나는 로저스의 말에 기대어 이 여성 인물들의 증상적 말을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여 그들의 고통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 내 비평이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작가의 작품을 첫 작품부터 마지막 작품까지 펼치고 평생의 창작이 담긴 글쓰기 공간 안에서 서성이다보면 매혹을 설명해주는 어떤 존재를 만날 수 있었다. 2018년 나는 최은미의 인물들을 그렇게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내 글에 옮겨왔다. 그러나 여성들의 고통에 대한 호소와 그들 증상에 대한 해명 욕구에 가득 찬 내 글은 A4 스물한 장으로 통상적 비평 분량의 두 배를 넘어서고 있었다. 인물들의 비명과 눈물을 그대로 받아내어 그들의 아픔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있는 첫 글을 친구들은 읽어내기 어려워했다. 나의 본격적인 비평 쓰기는 그 긴 초고, 정리되지 않은 말들을 줄이는 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같은 말들을 삭제하고 비슷한 내용을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 나가는 동안 나를 잠식시키려 넘실대는 감정을 잠재워 나갔다. 그 고쳐 쓰기의 과정이 내게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내면의 언어적 형상화 작업이 아니었을까.
   쓰는 동안은 두 영혼이 한 몸에 깃드는 것처럼 인물들의 언어와 내 언어가 하나의 언어로 교집되어 간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퇴고 작업까지 마쳤을 때 나는 작가가 내게 전해준 존재와의 만남 속에 젖어 있었다. 작가가 인식한 세계의 죽음 위에 탄생하여 마침내 세계와 자아를 구축해내는 이 존재를 만나게 되었을 때의 전율이란…… 그는 텍스트 내부의 구성 요소인 ‘내포 저자’도 아니고 창작 속에서 자기 기량을 넘어서 도달하게 되는 초월적 작가로서의 ‘암시된 저자’도 아니었다. 인물도, 저자도 아닌 자, 그저 인고의 글쓰기 시간이 낳고, 그 글쓰기 공간이 낳는 새로운 존재였다.
   그리하여 완성된 내 비평은 최은미 소설을 은유와 환유를 넘나들며 여성적 삶의 고통을 반복적으로 탐구한 끝에 잉태와 가부장제의 이중 속박이 주는 고통의 고리를 찾아내고 나아가 이 구태에서 벗어나는 존재를 창출해 내기에 이르렀다고 의미화하였다. 그러나 쓰기로부터 이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의문을 품는다. 작가의 오랜 쓰기가 양각해내었다고 생각한 그 존재는 누구인가. 쓰기가 없었다면 나는 소설에 그토록 바투 다가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존재는 최은미의 소설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비평 위에 있다. 그는 소설 창작의 축적이 낳은 존재인가, 비평가의 자의적 해석이 낳은 존재인가.
   나는 다시금 인물을 잘 이해한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한다. 인물 감정의 결결을 느끼고 그의 아픔을 내 몸으로 느끼는 것, 타자가 되고자 노력하는 것, 이것이 그를 더 잘 이해하려는 자세인가. 당시 시 창작 수업을 듣던 내 일기장에는 이런 메모가 적혀 있다. “시적 화자와 작가는 다른 존재이다” 과제로 제출한 내 시를 두고 시 창작 교수님이 거듭 말씀하시던 음성이 여전히 생생하다. 내 앞에 선 이에게 공감적 이해의 자세를 취하는 것과 문학 작품 속의 인물을 파악하는 것, 그 사이의 거리를 이해하지 못했던 날들이었다.
   대상을 이해함에 있어서 상대와 나 사이의 거리가 중요하다는 말을 한 것은 바흐찐이었다. 그는 작가가 주인공에게 점유당해 버릴 경우, 오직 주인공의 눈을 통해서만 세계를 볼 수 있으며, 주인공 삶의 사건 이외에는 체험할 수 없다고 거듭 말한다.4) 창작에 있어서 작가가 거리를 두고 인물을 통찰해야 함을 강조하는 말이지만 내게 있어 이 조언은 비평 쓰기의 주체인 나와 텍스트 사이의 관계를 비추는 말이었다. 내면적 존재인 동시에 세계 속의 일원인 인물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물 바깥에 선 자리에서 그를 응시하는 시선이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인물들의 내적 세계와 감정에 너무나 밀착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나의 비평은 최은미의 소설 세계 안에서 오직 여성만, 그 여성들의 울음만을 보고 있다.
   내가 그토록 구해내고자 하는 것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로저스의 말은 심리 치료적 장면에서 내담자를 대하는 상담자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가 열렬히 빠져있었던 대상은 작가가 어떠한 담론을 드러내기 위해 창조한 허구적 인물이 아닌가. 지금 생각해보면 경청으로 이 사람의 마음을 살려내야 한다는 그 비평 사명은 소설 속 인물들에 대한 공감적 감상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었다.
   오랜 시간 문학치료학을 연구해왔던 정운채는 독자와 문학작품의 만남을 독자의 자기 서사와 작품 서사의 일치도로 설명한 바 있다.5) 이때 작품 서사란 작품의 근원이 되는 서사이지만 스토리 개념과 달리 독자의 구성행위에 방점을 둔다. 독자가 구성한 서사라는 점에서 작품 서사는 고정불변의 스토리가 될 수 없고 작품을 설명하는 객관적 자료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작품 서사는 무엇을 주장할 수 있는가. 그것은 문학 작품을 경유한 독자의 자기 서사를 비추어낸다. 최은미의 여성들에 몰입하여 그들 목소리를 내 언어로 세상에 전하리라던 그 비평 쓰기의 사명은 결국 인물들에 빗대어 나 자신을 해명하고자 하는 욕망에 다름 아니었다.


   * 다시 마주한 당신

   어느 때, 무슨 계기로 그리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삶의 어떤 국면이 변하고 있음을 문득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계절이 몇 차례 지난 어느 날 문득 말간 얼굴로 서 있는 목련을 본 적이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잎사귀를 움직이는 목련이 더이상 나의 고요를 흔들지 않았다. 이 년 전 썼던 글을 꺼내 읽는 지금, 나는 인물을 이해하고 소설 내용을 파악함에 있어서 범한 오류, 편협한 비평의 시각을 발견하고 있다. 이 지각은 한 편의 비평으로 완결된 서사에 균열이 가고 있음을 말하는 표지일 것이다. 나는 이제 고통의 속살을 벌려 내며 그 생생한 지옥의 형상을 반복해서 그려내던 소설의 행위를 생각한다. 소설이 진정 내게 건넨 것은 무엇이었을까.
   「비밀동화」(2010)는 불교계의 존경받는 율사와 불교 진리를 공부하던 여인이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서사를 담고 있다. 내 비평은 소설 세계를 구성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한 여인에게 초점을 맞추어 그 비극을 해석하고 있다. “결혼과 함께 새로운 이름을 얻는 순간 평생을 염원했던 자아상은 죽임을 당한다. 이제 엄마라는 이름은 온 존재를 붙들고 늘어진다.” 여인의 고통으로부터 비롯되는 세계의 비극을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가하는 불합리로 해명하고 있다.
   비평이 보지 못한 소설의 일면에는 이런 세계가 있다. 먼저 진리의 길을 버리고 사랑을 선택한 결과로 삶의 비참을 감당하고 있는 율사가 있다. 그는 사랑의 성취와 함께 변심한 아내의 증오를 견디고 있으며, 이성을 잃어가는 아내로부터 아이들을 거두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공부 대신 품팔이 노동을 한다. 사랑과 형벌 사이를 오가는 엄마의 히스테리 아래에서 아이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위축된다. 이 소설이 가부장제 아래 혹사당하는 여성의 고통을 다루는 것이 맞는가.

   엄마는 일찍 알아버립니다. (중략) 사원을 나와 승복을 벗고 바보 같은 점퍼를 걸친 아빠는 뿔이 잘린 무소처럼 아무런 빛도 향도 없다는 걸, 엄마는 알아버립니다.

―최은미, 「비밀동화」, 『너무 아름다운 꿈』, 문학동네, 2013, 27-28쪽.


   여인에게 이 빛나는 율사는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진리의 현신이었다. 갈망의 실체를 보지 못한 여인의 망상은 그 모든 희생을 치르고 사랑을 성취했을 때에야 본 모습을 드러낸다. 욕망의 대상이 신기루처럼 사라진 자리에 파고든 비극은 여자와 남자를, 그리고 그들 슬픈 사랑의 결과로 태어난 아이들을 죽음으로 집어삼킨다.
   최은미 소설 세계에서 세상을 고통으로 물들이는 것은 딸을 제물로 바치고서라도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욕망이고(「눈을 감고 기다리렴」) 사랑(이라 보이는 것)에 대한 집착이었으며(「비밀동화」) 이 고통들이 제거된 유토피아에의 환상이었다.(「전곡숲」) 그들이 사로잡힌 사랑과 집념들로 세계는 고통에 빠지고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행위가 다시금 제 발목을 잡는다. 전설 속 이야기와 현실적 사건이 교직된 최은미의 소설들은 이 헛된 환영이 만들어낸 고통이 세대를 이어가며 반복될 것임을 암시한다. 소설은 인간 고통 그 자체의 실감 나는 재현을 넘어서고 있었다.
   「너무 아름다운 꿈」(2011)은 “사방이 막혀서 빠져나갈 기약이 없는 곳”6)을 지옥이라 이른다. 끝없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다가 자살을 한 홍콩 영화배우 리의 사연은 인간 고통의 시작점을 응시한다. 그가 죽기 직전 연출한 영화, ‘공중화’는 소설에 따르면 무명(無明)의 상태로 인하여 보게 되는 아름다움, 환영을 뜻한다. 지옥의 형상을 반복하던 이 소설들의 행위는 이제 다시 읽힌다. 그것은 잔혹한 고통의 실상을 넘어 고통을 발생시키는 헛된 갈망, 그 환영을 보지 못하는 미혹을 비추고 있다.
   근래 발표된 최은미의 소설 「11월행」7)은 잃어버림의 의미를 통해 다시 그 집착을 조명하고 있다. 서사는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여성 삼대를 주인공으로 진행된다. 엄마이자 딸인 은형은 늘 지니고 다니던 텀블러를 잃어버린다. 물건을 찾아 돌아간 길에서 그는 텀블러가 절에 잘 있는 것을 확인한다. 되돌아오는 길에 은형은 다시 딸의 잃어버림을 경험한다. 어린 딸이 혼자 산길을 내려갔다는 사실을 안 순간 화가 치밀지만 그는 곧 친근한 이웃들과 어우러져 있는 딸을 본다. 두 번의 잃어버림은 그간 최은미 인물들의 고통을 지어왔던 집념을 돌아보게 한다. 집착을 놓자 소중한 대상들은 제가 있을 자리를 찾아간다. 이 귀중한 잃어버림 속에서 엄마들과 딸들은 규옥, 은형, 하은이라는 가뿐한 제 이름으로 만나 애정을 나누고는 다시 자기 삶으로 스며든다. 서로를 얽어매었던 갈망과 거부, 공포와 불안의 모녀사(母女史)는 세 여성들의 후경으로 사라지고 있다.


   * 삶은 흐르고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문학이 고통을 품어낼 때 그 고통은 어떻게 변하는지, 문학이 고통을 배태하는 동안 삶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던 나는 소설이 품은 고통을 넘겨받아 비평을 쓰게 되었다. 그 글들이 지나간 내 삶의 풍경은 어떤 모습인가.
   나는 여전히 목련 나무가 잘 보이는 책상 앞에 앉아 이제는 말간 그 얼굴에 시선을 맞춘다. 그리고 종종 최은미의 소설을 읽던 봄을 떠올린다. 때 이르게 꽃 피운 목련 가지를 세찬 바람이 후려치고 또 후려치던 날들이었다. 하얀 꽃잎, 보송한 속살이 검게 멍든 채 바닥에 나부끼고 머리채 그러잡힌 나무들로 온 동네가 휘청대고 있었다. 그 속에서 최은미 소설 속의 딸들이, 어머니들이 서로 얼굴을 바꾸어가며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11월행」에는 큰 스님이 등장하는 짤막한 장면이 있다. 죽을 고비를 넘어 성공 신화를 일군 그이의 주변에는 기념사진 한번 찍고 싶은 사람들이 바글거린다. 그러나 소설은 완고한 자기 서사를 가진 그이를 먼 거리에서 본다. 터널을 빠져나오는 시간은 힘든 일이었으나 이겨내는 동안 만들어진 서사 속에 다시 갇혀버리는 것은 진정 두려운 일이다. 완성된 서사는 다시 문이 되어야 한다. 내면의 슬픔을 똑바로 보고, 그런 다음에는 슬픔 밖으로 걸어나가 슬픔의 서사 속 그를 다시 바라보는 일을 생각한다.
   한때 비평가는 작품에 담긴 작가 의식을 관통하여 원초적 자기 존재를 만난다는 조르주 풀레의 비평관을 오래 읽고 있었다.8) 나는 청년 풀레처럼 자신을 온전히 비워낸 채 작품에 담긴 작가의식을 공감하고 그것을 담아내는 비평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감정과 욕망의 역사를 품은 쓰기 주체, 용해되지 않은 상처의 질곡을 안고 있는 비평가가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대상을 볼 수 있는가. 내 글은 냉정하고 객관적인 비평, 대상을 온전히 해석하고 설명하는 말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다만 내 존재와 작품의 마주침을 드러내는 기록일 것이다. 세계가 여성의 지옥이라고 고집하던 어제의 서사가 해석되는 이 시간, 타인이 사는 세계를 품은 또 하나의 서사가 서서히 열리고 있음을 믿는다. 인물을 휘돌아 나에게로 온 읽기가 다시 세상 바깥으로 나아가는 비평의 길을 생각한다.


박신영

그러나 저는 여전히 문학이, 삶을 향해 내뻗은 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이야기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이야기하는가를 먼저 보려고 합니다.
보잘것없는 이야기라고 겁박하는 자아를 등에 업고서 기어이 하나의 글 존재로 일으켜 세우는 쓰기의 시간을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2020년 제가 서 있는 비평, 쓰기의 정경입니다. 박신영입니다.

2020/09/29
34호

1
하인츠 슐라퍼, 『신들의 모국어』, 변학수 옮김, 경북대학교출판부, 2014, 53~65쪽.
2
제임스W. 페니베이커·존F. 에반스, 『표현적 글쓰기』, 이봉희 옮김, 엑스북스, 2017, 15~43쪽.
3
칼 로저스, 『칼 로저스의 사람-중심 상담』, 오제은 옮김, 학지사, 2007, 132쪽.
4
미하일 바흐찐, 「미적 활동에서의 작가와 주인공」, 『말의 미학』, 박종소·김희숙 옮김, 길, 2006, 43~44쪽.
5
정운채, 「문학치료학의 서사이론에 입각한 창작이론」, 문학치료연구 제26집, 2013, 408쪽.
6
최은미, 「너무 아름다운 꿈」, 앞의 책, 111쪽.
7
최은미 외 5인, 「11월행」, 『나의 할머니에게』, 다산책방, 2020, 161쪽.
8
조르주 풀레, 『비평적 의식』, 조한경 옮김, 지만지,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