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중 한 명

   나도 피해자요.1)

   안희정의 성폭력 범죄에 대한 고발과 재판 과정을 담은 『김지은입니다』2)를 읽은 후, 김숨의 장편소설 『한 명』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한 명』은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가 한 명밖에 남지 않은 미래의 시점을 가정하여 쓰인 소설로, 주인공은 아직까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세상에 밝히지 않은 노년 여성이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위안부’ 생존자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한 뒤, 생존자를 만나야겠다는, 증언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다. 출간 직후 주목받았던 바와 같이 소설 곳곳의 문장에는 316개에 이르는 각주가 달려있는데, 출처를 따라가 보면 실제 ‘위안부’ 피해자의 이름을 만나게 된다. 이로써 소설에서 등장하는 또다른 ‘위안부’ 피해자 ‘한 명’은 완전한 허구도, 온전한 실제도 아닌 ‘허구-실제’ 사이를 왕복하면서 형상화된다.3) 『한 명』은 2015년 12·28 ‘위안부’ 합의 이후, ‘포스트 위안부 운동’의 방향성을 모색하는 맥락에서 제출되었는데, 사실 나는 소설이 스스로 제기한 문제의식에 충분히 답하지는 못했다고 진단한 바 있다. 새로운 ‘위안부’ 피해자의 출현은 마지막 생존자의 시간을 얼마간 유예할 수 있으나 생존자 이후를 상상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4)
   그런데 『김지은입니다』를 읽자 『한 명』은 내 안에서 ‘미투 서사’로 재해석되었다.5) 소설에서 그녀가 피해 사실을 밝히기 위해 처음으로 쓴 문장이 “나도 피해자요”였다는 것을 『김지은입니다』를 읽은 후에야 뒤늦게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나도(Metoo)’는 주체의 의사 표현인 동시에 선행하는 타인의 발화 없이 홀로 존재할 수 없는 말이다. 미투 서사로 다시 읽자 『한 명』에 삽입된 무수한 실제 증언은 ‘나도’ 피해자임을 고발할 수 있게 해 주는 피해 여성들의 선행하는 말하기로 들리게 되었다. 재독을 통해 소설의 제목 ‘한 명’이 단수(單數)라는 의미 외에 어느 누구나 될 수 있다는 부정(不定)의 의미도 담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렇다면 반대로 『한 명』을 경유하여 『김지은입니다』의 미투 서사를 다시 읽는다면 무엇이 발견될까. 무엇보다 ‘(어느)한 명’ 대신 ‘김지은’이라는 고유명이 자리하고 있다는 데에 복잡한 심경이 든다. ‘김지은’이라는 이름은 사건에 대한 해석권을 지닌, 성폭력 범죄에 저항하는 피해 생존자의 주체성을 표시하는 것일 테지만, 자칫 한국 사회 전반에서 자행되고 있는 위력에 의한 성폭력 문제가 ‘김지은’ 개인의 문제로 표상되지는 않을까, 혹은 일상으로 돌아와야 할 ‘김지은’이라는 개인을 피해자로만 인식하게 만들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낳기도 한다. 그러나 피해자의 증언을 주의깊게 따라가면, 『김지은입니다』는 안희정의 성폭력 범죄에 관한 증언이자 동시에 비정규직 노동자, 호모 소셜(homosocial) 사회에서 배제된/이탈한 사람들, 가정·학교·직장에서 일상적인 성폭력을 겪는 사람들 모두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김지은입니다』를 성폭력 피해 생존자 김지은의 이야기이자 지은이‘들’ 중 ‘한 명’의 이야기로 독해하고자 한다. 『한 명』의 주인공의 삶이 316개의 주석 속에서 구성되듯, 김지은의 이야기를 지은이‘들’의 “상호증언”6) 속에서 함께 읽을 것이다. 이를 위해 피해자가 처한 노동 조건을 확대하여 살펴보고, 『김지은입니다』의 배음(背音)으로 존재하는 지지자들의 목소리에도 주목하고자 한다. ‘미투’를 가능케 한 공통의 경험과 다수의 목소리 속에 ‘김지은-한 명’의 이야기를 배치함으로써 피해 생존자의 불투명한 삶의 여백이 회복될 수 있는 논의가 이어지길 바란다.


   노동자의 미투

   『김지은입니다』에서 저자7)는 자신을 세 가지로 규정한다. 노동자, 피해자, 생존자. 책의 구성 또한 이와 유사한데 2장과 3장의 제목은 각각 “노동자 김지은”, “피해자 김지은”이고, 5장은 “그래도 살아간다”로 ‘생존자 김지은’을 보여준다. 그간 양산된 수많은 언론 보도 탓에 ‘김지은’이라는 이름에서 성폭력 피해자를 먼저 떠올리게 되지만, 사건에 대한 저자의 해석에는 ‘피해자’보다 ‘노동자’라는 자기규정이 선행한다. 이는 미투가 “여성에게 지극히 적대적인 한국의 노동시장에서 (…) 노동자로서 생존권 운동”이며, “안희정 사건은 근본적으로 노동 시장의 성차별 문제”라는 진단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8)
   저자는 10개월 단기 행정 인턴, 기간제 근로자, 연구직, 계약직 공무원을 거쳐 안희정 캠프의 선거 운동에 합류했고, 이후 임면 권한이 전적으로 도지사에게 있는 별정직 공무원이 되었다. 비정규직으로 계속해서 일할 수 있는 방법은 ‘계약 연장’이었는데, 저자는 불안정한 고용 형태에서 살아남기 위해 석·박사 과정을 거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평판’에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채용에 있어 ‘평판 조회’는 사실상 인맥 카르텔로 작동하면서 무형의 권력을 만들어 내는데, 이는 고용이 불안정한 내부 구성원에게 ‘입막음’으로 작동하게 된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불이익을 감수하지 않는 한 조직에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것이다. 조직은 구성원에 의한 자정작용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권위적이고 폐쇄적인 집단이 될 수밖에 없다. 저자는 비서직을 수행하면서 업무 시간과 영역을 한정하지 않고 주어진 거의 모든 일을 처리했다. 그 가운데는 지나치게 사적인 일도 많았는데, 이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반복된 것은 ‘비서’라는 직업의 특수성 때문이라기보다 노동자의 권리 주장을 봉쇄하는 고용 시스템과 조직 문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노동 환경에서 여성 노동자의 생존은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주로 고위직 남성이 인맥 카르텔을 구성하고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실적’과 ‘능력’을 표면에 내세우며 심화되는 노동자 간의 갈등은 기존 남성 사회의 여성차별과 맞물려 여성 노동자를 더욱 취약하게 만든다. 가령, 저자는 수행비서로 발령받자마자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는 노골적인 괴롭힘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일부 동료는 “지사의 지시 사항이라고 할지라도 여성, 그것도 조직의 신참 여성이 전달하는 지시를 제대로 따르려 하지 않았다”(84쪽) 이러한 상황에서 저자는 “다들 내가 여자인 게 문제라 말했으니, 나는 그저 주어진 업무를 성실하게 하는 능숙한 직원이 되어야 했다”고 말한다.(85쪽) 불합리한 처우에 항의할 창구가 없는 노동자는 ‘더 성실하고 더 능숙한’ 노동자가 되기 위해 자기를 채찍질하게 된다. 실제로 『김지은입니다』에는 저자를 “성실함의 대명사”(192쪽), “과도할 정도로 업무에 성실한 사람”(195쪽)이라고 표현하는 주변인들의 목소리가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저자의 성실성과 적극성은 1심 재판에서 ‘피해자답지 않은 태도’로 치부되면서 가해자의 무죄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었다. ‘피해자다움’이라는 개념과 이를 가해자의 무죄 판단의 근거로 삼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문제적인 지점이나, 여기에선 ‘노동자의 미투’에 좀 더 주목해 보고자 한다. 저자가 밝힌 이력에서도 잘 드러나듯, 비정규직 노동자는 재계약을 위해 ‘더’ 성실하게 직무에 임하게 된다. ‘더’ 부과되는 노동자 개인의 몫에는 자기 계발뿐 아니라 초과 근무나 대신 떠맡게 된 업무, 심지어 위법적인 상급자의 사적 부탁, 잡무까지 포함된다. 결국 노동자는 살아남으려 노력하면 할수록 불합리한 상황을 감내하고 부조리를 묵인해야 하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특히 여성을 비롯하여 호모 소셜한 조직 문화에서 배제되는/이탈하는 이들은 폐쇄적인 직장 내에서 성폭력이나 괴롭힘과 같은 범죄에 노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의 노동 시스템에서 노동자의 문제 제기는 ‘생존=고용’을 걸고서야 가능하다. ‘노동자 김지은’의 미투 재판 과정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지점은 비정규직으로서의 생존 투쟁이 ‘고학력 엘리트 여성’의 ‘개인적인 노력’으로 환원되었으며, 이를 근거로 상사의 위력이 행사되지 않았다고 주장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의 연속선상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에 필요한 모든 노력은 노동자 개인의 ‘자발성’으로 귀속되며, 바로 그 ‘자발성’으로 인해 어떤 불이익도, 심지어 상급자의 위력에 의한 범죄도 노동자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 될 수 있음이 드러난다. 더불어 비정규직 노동자가 처한 생존의 딜레마는 오늘날 일각에서 주장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여성운동에 대해서도 반성적으로 돌아보게 한다. 여성이 사회 고위직으로 진출하고 성공함으로써 성평등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여성에게 “망설임 없이 뛰어들라(lean in)”고 주문한다. 이러한 논리는 착취 관계를 끊어내지 않은 채 “지배 기회의 평등(equal opportunity domination)”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9) 그런데 ‘노동자 김지은’의 미투는 애초 (현실적으로는 ‘생존’에 가까운) ‘성공’이라는 것 자체가 허구이며, 이것이 오히려 노동자로 하여금 착취와 불합리를 감내하도록 하는 유인책이 되고 있다고 역설한다. 저자의 고발이 그녀만의 문제가 아니라 비-정규직, 비-남성 등 무수한 비-○○ 노동자의 삶과 접속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지은이‘들’과 ‘같은 여자’

   ‘노동자 김지은’의 미투가 특별한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듯 『김지은입니다』에는 저자의 목소리뿐 아니라 기꺼이 저자의 위치에 함께 서고자 한 지은이‘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일련의 고발 과정에서 가장 먼저 들려온 타인의 목소리는 이렇다. “도와줄게.”(24쪽) 2018년 2월 또다시 범행을 당한 뒤, 저자는 반복되는 범죄에서 빠져나올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그때 마침 한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고, 저자는 그에게 피해 사실을 털어놓았다. 수화기에서 흐르는 적막으로 인해 또다시 포기하려고 할 때쯤, 선배로부터 도와주겠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이 한마디에서 저자는 두려움을 이겨보리라 결심한다. “그 한마디에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두려움이 깨졌다.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할 수 있을까. 과연.”(24쪽)
   처음 도와주겠다고 한 선배는 안희정의 신뢰를 받는 핵심 참모였다고 한다. 안희정과 더 오래 알고 지냈는데 어떻게 피해자의 말을 믿었냐고 묻자 그는 군복무 당시 이등병에 대한 부소대장의 폭력 사건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부소대장이 저와 훨씬 친했지만, 계급과 권력의 차이가 확실한 둘을 동일 선상에 놓고 사실 관계를 물어본다는 것은 공정하지도 않고, 피해자에게도 가혹한 처사라고 생각했습니다.”(328~329쪽) 그는 같은 맥락에서 피해자에게 신고를 통해 수사 기관에서 정확한 판단을 받으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김지은입니다』에 실린 피해자 측의 주요 증인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이들은 각자의 시각에서 사건을 해석하고 판단하여 증언에 나섰음을 알 수 있다. 가령, 공공기관에서 비서직을 수행한 바 있는 어느 탄원인은 “비서 업무의 특수성과 그 안에서 발생하는 권력 관계, 그리고 그 권력의 결과로 실행되는 상사의 위력”(132쪽)에 대해 설명하면서 피해자의 미투를 지지했다. 또, 충남도청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는 “안희정이 말하는 가치가, 여성과 모든 소수자에 대해서 말하는 그 내용이 모두 좋”(206쪽)아서 함께 일했다고 한다. 그런데 같은 가치를 지향한다고 생각했던 정치인과 뜻을 함께했던 동료들의 기만적인 모습을 보자 “너무 창피했다”고 한다. 그녀는 피해자를 지지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지켰던 것이다. 덧붙여 조직 내부에서 일했던 사람으로서 “간음이 있었는지 여부를 다투는 것이라면 모를까, 간음이 있었다고 인정한 이상” 이 사건은 성폭력 범죄라고 단언했다. 피해자가 일관되게 주장했듯 조직 내에서 “어떤 지위 막론하고, 남녀를 떠나서 누구라도 지사와의 관계에서는 아무도 합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207쪽)
   한편, ‘지은이와 지은이의 친구들’, ‘보통의 김지은들’이라 이름 붙인 시민들은 직장, 가정, 연인 관계, 학교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폭력을 겪어왔음을 토로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김지은’이라는 연대와 지지를 보냈다. 연대자들은 “우리나라의 여성들에게는 한 번쯤 내 친구였을 흔한 이름”인 “수많은 지은이들”, 그리고 지은이의 친구들을 자처하면서 성폭력 범죄가 “한 사람의 김지은만의 일일까?” 묻는다.(202쪽) 이들은 각자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지은이라는 ‘같은’ 이름을 통해 한국 사회 전반의 젠더 폭력을 근절하고자 하는, 그야말로 ‘동명이인(同名異人)의 연대자들’인 것이다. 만약 지은이‘들’의 목소리를 하나하나 들어본다면, 앞서 살펴본 증언자들처럼 각자 다른 시각에서 다른 이유로 지은이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지은이‘들’의 연대는 ‘나도 같은 여자이지만~’으로 시작하는 여성 혐오 발화와 무척 대조적이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에 있어서도 피해자를 ‘평소 행실이 좋지 못한 여성’, ‘불륜녀’ 등으로 몰아가려는 담론이 생산되었다. 뿐만 아니라 피해자를 위해 증언해주는 이가 남성이기만 하면 어김없이 ‘불륜/내연 프레임’의 가짜 뉴스가 등장했다. 이는 한국 사회 전반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여성 혐오에 기대어 피해자를 ‘믿지 못할 여자’로 만드는 공작이었다.10) ‘나도 같은 여자이지만~’으로 시작하는 댓글들은 성폭력 범죄를 불륜으로, 피해 여성의 호소를 질투로 표현하면서 여성 혐오 프레임에 동조하였다. 물론 ‘나도 같은 여자이지만, 이 사건은 성폭력이 아니다’, ‘나도 같은 여자이지만, 이는 성차별이 아니다’ 등의 백래시는 비단 안희정의 성폭력 범죄에 대한 대응으로 처음 등장한 문구는 아니다. 그럼에도 새삼 고민스러운 지점은 ‘같은 여자’의 이름으로 여성 혐오가 발화된다는 점이다.
   동명이인 지은이‘들’의 연대와 ‘같은 여자’의 동일성을 마주 세워 보는 일은 연대를 고민하는 데에 참고점이 된다. 연대는 ‘내가 ○○○이다’라는 선언으로 자주 표현되곤 하는데, 이때 ‘○○○’은 선천적 동일성이나 집단적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 선언의 대상은 사건에 따라 새롭게 채워지고, 이것이 개인들의 경험, 가치관, 판단과 공명하여 정치적 행위로 이어질 때 연대가 시작된다. ‘○○○’은 동일성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달성되어야 할 목표로 설정되는 것이다.11) “우리 모두가 김지은이다”(202쪽)라고 할 때, 특정 사건을 통해 가시화된 ‘김지은’은 직장 내 성폭력 근절과 가해자의 법적 처벌이라는 목표를 함의한다. ‘김지은’이라는 ‘같은’ 이름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각각 ‘다른’ 삶의 경험, 정체성, 사회적 위치를 지니지만 정치적 목적을 공유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들은 ‘같은’ 이름(=목표) 아래 모인 ‘다른’ 사람들, 즉 ‘동명이인의 연대’인 것이다.
   ‘내가 ○○○이다’라는 연대가 달성되어야 할 목표를 중심으로 결성된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면, ‘같은 여자’의 이름으로 발화된 주장이 지배 질서의 옹호로 회수되고 마는 모순적 논리 구조가 선명하게 보인다. 예컨대, 모두 다른 여자들의 삶을 ‘어머니’, ‘아내’ 등의 ‘같은 여자’로 범주화하고 동일한 입장으로 포획해 버리는 것은 가부장제다. 다시 말해 이성애를 기반으로 하는 가부장제,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다양한 여성의 삶을 균질한 집단으로 만든다. 즉, ‘나도 같은 여자이지만~’ 이라는 발화에는 성차별적 지배 질서에 의해 할당받은 동질적 정체성이 전제된다. 여기에는 우리가 함께 달성해야 할 목표가 없기에 연대의 가능성은 발견되기 어렵다. 대신 자기 정체성 옹호가 곧바로 지배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으로 이어지는 덫이 있는 것이다.


   당신이 불투명할 수 있도록

   소영현은 포스트 미투 운동 시대를 전망하는 자리에서 “공동체로의 귀환 없이 피해 생존자라는 말이 과연 가능한가”12)라고 묻는다. 저자는 비서 업무 수행 중 임면권자에게 성폭력을 당했음을 고발했다. 그런데 “미투를 하고, 강제로 퇴사를 당했다.”(300쪽) 법정에서 가해자의 ‘위력 행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지난한 분투의 과정을 겪어야 했으나, 피해자의 노동자 지위 박탈은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피해자의 노동자 지위가 회복되고 일터에서 일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피해 ‘생존자’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나 미투 운동은 피해자가 ‘○○_내’로 귀환하는 자리에서 운동의 성공을 논의할 수 있”13)다는 지적은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따라서 ‘노동자 김지은’의 미투에 대한 지지와 연대는 피해자가 어떠한 불이익도 없이 노동자로 복귀할 수 있을 때까지 이어져야 할 것이다.14)
   그런데 저자를 비롯하여 피해 생존자들의 미투 이후의 현실은 ‘○○_내’로의 복귀는 고사하고 일상생활도 어려워 보인다. 검찰은 성폭력 범죄의 특성상 2차 피해를 우려해 전면 비공개 재판을 요청했으나 1심 재판부는 이를 거절했다. “검찰 측 증인 진술은 일부 공개, 피고인 측 증인은 전부 공개”(145쪽)가 되면서 피고 측의 검증되지 않은 진술이 재조합되어 온라인상에 퍼져나갔다. 또, 2심 유죄 선고 후, 바로 다음날 “판결문 전문을 단독으로 입수했다는 언론사 보도”가 있었다.(167쪽) 온라인에서 유포되는 가짜 뉴스와 2차 가해는 불륜 프레임, ‘꽃뱀’ 담론 등 여성 혐오 담론과 영합하여 피해자를 함부로 판단하도록 유도한다. 2심 유죄 선고를 받은 후인 2019년 3월~4월에 쓰인 일기에서도 피해자는 “모자에 안경에 마스크를” 쓰고 다니며, “‘피해자다움’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세상의 시선을 무시할 수 없었다”고 토로한다.(217쪽) “감옥에 갇힌 건 가해자인데, 나는 또 다른 감옥에 갇힌 것 같았다”라고도 말한다.(214쪽)
   저자의 진술에서 알 수 있듯, 성폭력 범죄에 관한 재판은 피해자의 사적인 부분까지 추궁하지만 피해자 보호는 미흡하다. 재판 과정에서 만들어진 말들은 제대로 된 검증을 거치지 않은 채 가십으로 가공되어 온라인에 유포된다. 피해자는 소위 ‘신상 털기’에 시달리며 공포를 느끼게 되고, 사회가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피해자다움’은 피해자에게 내면화되어 자기 검열로 작동한다. 그런데 이처럼 피해자의 일상을 적나라하게 공개하여 모든 말과 행동을 범죄에 대한 근거로 판단하려는 폭력은 사후적인 것이 아니라 미투의 전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얼마 전 서울 시장에 대한 성폭력 고발에 대해 일각에서는 ‘증거를 밝혀라’, ‘피해자가 직접 나서라’ 등의 여론이 일어났다. 그러나 다른 어떤 범죄의 경우에도 피해자가 직접 대중 앞에 나서서 증거를 밝히기를 요구받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피해자는 수사기관에 증거를 제출하면 된다. 그럼에도 미투에 관해서는 피해자가 드러나길 요구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 ‘숨어있는 것’처럼 인식하는 여론이 나타난다. ‘떳떳하게 나와서 증거를 제출하라’라는 여론은 언뜻 ‘공정한’ 심판관의 얼굴을 하고 있으나, 사실은 피해 고발을 하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삶 전부를 낱낱이 밝히라는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피해자는 어떻게 공동체 내로 돌아와 일상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인가. 이를 위해 공동체와 연대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는 수행적인 질문으로써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미투가 상호 증언, 상호 응답으로 폭발했던 것처럼 피해자의 삶 역시 여성 말하기의 역사 속에서, 또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집합적 경험 속에서 거듭 말해지고 청취될 때, 고통의 일부라도 나누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 글의 처음에 언급했던 『한 명』의 주인공은 소설에서 내내 ‘그녀’라고만 불리다 피해 고발을 결심하고 나서야 ‘풍길’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녀는 피해 생존자들의 말하기에 “나도 피해자요”라고 응답함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다. 응답한다는 것은 자기 경험에 대한 해석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므로 주체화를 수반한다. 동시에 응답한다는 것은 집합적 목소리의 일부가 되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한 명』의 주인공의 삶은 다수의 피해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기워져 있다. 그것은 316개의 목소리를 대표하거나 단순히 더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수많은 여성들이 ‘한 명’의 삶의 부분 부분과 동일한 경험을 겪었다는 뜻이고, 그러나 완전히 동일한 삶을 산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피해자의 일상 복귀’는 앞으로 우리 모두가 함께 모색해야 할 물음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피해자의 삶은 자신의 고유한 것이자 수많은 여성들의 삶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꼭 강조하고 싶다. 같고 다름 속에서 우리는 ‘동명이인의 연대자’일 수 있으며, 같은 이름을 공유하는 한에서 피해자는 잃어버린 익명성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지은

이 글을 쓰면서 일본군 ‘위안부’ 증언집을 비롯하여 국내외 성폭력 피해자들의 수기나 증언을 최대한 읽어보려 했다. 증언이나 수기를 ‘집합적 목소리’로 읽어나가고자 한다.

2020/09/29
34호

1
김숨, 『한 명』, 현대문학, 2016, 236쪽. (강조-원문)
2
김지은, 『김지은입니다』, 봄알람, 2020.(이하 인용 시 본문에 쪽수만 인용)
3
서영인, 「문학에서 멈추지 않고, 문학을 통과하여 현실로」,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8년 겨울, 15쪽.
4
김숨의 일본군 ‘위안부’ 관련 저작에 관해서는 이지은, 「여성 재현의 ‘몫’을 묻다」, 『크릿터』2, 2020, 53~56쪽 참조.
5
참고로 이혜령은 일본군 ‘위안부’ 문학/영화를 커밍아웃 서사로 해석한 바 있다. ‘위안부’ 피해자가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신고와 증언 이전에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 내에서 자신의 ‘위안부’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혜령, 「그녀와 소녀들-일본군 ‘위안부’ 문학/영화를 커밍아웃 서사로 읽기」,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민음사, 2018, 120~121쪽) 그러나 본 글에서는 『한 명』이 기존 피해 여성들의 증언에 ‘응답’함으로써 집합적 목소리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미투 서사’로 해석하고자 한다.
6
권김현영, 「미투, 반성폭력 운동의 윤리-정치적 전환」, 『문학동네』, 2018년 여름호, 312쪽.
7
『김지은입니다』에서 김지은씨는 스스로를 ‘노동자’, ‘피해 생존자’로 규정한다. 이 글에서는 문맥에 따라 호칭을 사용하되, 피해 생존자가 『김지은입니다』를 통해 스스로 사건을 해석하고 서술하는 ‘저자’로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전체적으로 ‘저자’로 지칭하였다.
8
정희진, 「일상의 혁명, 미투의 정치학」, 정희진 역음, 『미투의 정치학』, 교양인, 2019, 17, 22쪽.
9
낸시 프레이저·친지아 아루짜·티티 바타차리야, 박지니 옮김, 『99% 페미니즘 선언』, 움직씨, 2020, 20쪽.
10
김효영은 가해자 측이 이 사건을 ‘합의에 의한 관계’, ‘불륜 관계’로 정의하면서 법적 문제에서 도덕적 문제로 전환하고, ‘꽃뱀’ 담론을 끌어와 생존자를 가정 파탄을 초래한 ‘가해자’로, 안희정과 그의 부인을 ‘피해자’로 이미지화 했다고 지적한다. (김효영, 「미투 운동에서 ‘객관적 진실’의 딜레마: 안희정 사건 관련 담론에 대한 비판적 분석」,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9.)
11
양선숙, 「미투서사와 진실, 그리고 정의」, 『법학연구』21(4), 2018, 322~323쪽 참조.
12
소영현, 「포스트 미투 운동과 ‘시민-독자’의 자리」, 『여성문학연구』47, 2019, 130쪽.
13
위의 글, 128~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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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이 글을 마무리하고 난 뒤 피해자 측 증인들이 겪고 있는 피해가 보도되었다. 전 직장 동료였던 이들은 해당 직종을 떠났다. 또 처음 도와주겠다고 했던 선배는 민주당 캠프 내에서 납득할 수 없는 보직 변경을 통보받았다고 한다. 피해자 보호와 함께 피해자 측 증인들의 피해 방지를 위한 지지와 관심도 요청된다. (김지아, ‘‘안희정 유죄’ 그 후 1년…‘퇴장당한’ 기미지은 측 증인들’, 〈JTBC 뉴스〉, 202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