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비평의 정체, 혹은 전망이 새삼스레 되물어져야 하는 시점은 그것의 위기론, 더 정확하게는 문학의 총체적인 위기 앞에서 비평이 행한 무능론과 함께 온다. ‘문학비평은 무엇인가’에서 시작되어 ‘문학비평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로 나아가는 낯익은 전개는 짧지 않은 한국문학사에서 하나의 패턴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비평의 본질, 전망, 정체성에 대한 의구심은 그러나 각종 위기의 성격에 따라 온전히 탈바꿈하여 촉발되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무엇보다 한국문학이 언제나 무언가를 향한 위기의식 속에서 형성되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비평을 향한 심문의 과정이 기시감을 동반한다는 진단보다 흥미로운 문제는 바로 ‘사건·사고 → 비평의 반성’이라는 도식 자체다. 비평에 관한 논의는 한국문학장의 폐쇄성을 의식하는 가운데, 비평 일반이 아니라 문학비평에 한정해 진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면, 문학(장)의 사건, 사고가 곧바로 비평에 대한 심문으로 귀결되는 과정 역시 제도권 문학장 내에서나 유독 일반적인 현상일지도 모른다. 비평의 ‘책임론’과 ‘무용론’은 한국문학(장)의 특수한 성격과 그 속에서 비평(가)이 점한 위치와 밀접하게 관련된 사안이라는 의미이다.
   한편, 비/정기적으로 촉발되는 비평 주체들의 자기 반성적 질문의 회로는 ‘리뷰’와 ‘해설’과 ‘틀에 박힌’ 비평만을 생산한다고 지적되곤 하는 동시대 한국문학비평(장)에 전에 없던 생동감을 연출하기도 한다. 비평이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고찰, 비평의 기능과 목적에 대한 논박, 비평 주체 각자의 문학론과 입장차에 근거한 진지(陣地) 구축 등은 진정한, 그리고 흥분된 비평 축제의 현장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 모든 말의 범람이 비평가 ‘그들만의 배틀’처럼 보인다는 비난과, 현 논쟁만은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평가의 양가성은 이때야말로 작가/작품론에 한정되어 유통되던 ‘문학 담론’을 재점검하고 비평의 위치를 되묻는 시간, 말 그대로 한국문학비평(장)에 흔치 않은 발본적 비판(critique)의 시간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따라서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비평의 체계적인 논의와 설명이 요구되고 있는 시점”1)이라는 진단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것만은 아닌 의구심들이 ‘지금’을 기점으로 반복 회귀되어야만 하는 비평장의 상황 그 자체를 보여준다. 김봉곤 사적 대화 무단 인용 사건을 계기로 촉발되었던 근래 비평의 성찰은 ‘지금’의 균열을 통해 ‘지금’을 다시 인식해야만 하는 한국문학비평의 오래된 과제인 것이다. 반복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 반복에 더욱 효과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개별 비평 주체, 집단의 비평기획은 아주 먼 과거, 또 때로는 가까운 과거로부터 전달된 ‘지금’을 기반 삼아 제 나름의 여정을 시작한다. 회귀하는 질문의 정체와 토대를 점검하기 위해 이들 간 차이와 반복을 구별해내고, 동시대적 조건 속에서 이를 갱신하려는 시도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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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비평에서 작가 비평으로의 이행’과 이로 인해 고착된 비평의 (비판 없는) ‘리뷰화, 혹은 에세이화’3)에 대한 성찰은 ‘좀비 비평’의 선언 이후 전개된 각종 유의미한 논박들이 합의된 출발점으로 삼을 만큼 설득력 있는 진단으로 통용되었다. 비평의 성격 변화에 관한 소영현의 분석은 이른바 ‘비평 시대’의 개막이 70년대 이후 문학장을 안정적으로 안착시킨 “계간지 시스템”의 구축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그것이 곧 “비평이 ‘문학’비평이자 ‘한국문학’ 비평이라는 인식이 강고하게 안착되는 시간”이기도 했다는 통찰4)을 바탕으로 한다. 한편으로, 비평이 “대표 주체를 둘러싼 재현론”의 권위5)를 기반으로 지속되었다는 주장을 동시에 제시하면서, 그의 진단은 제도 내 ‘좀비’로서의 문학비평이 기어이 지금 이 시간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기형적인 힘을 가시화한다. 이에 멈추지 않고 한 명의 현장 비평가로서의 그는 ‘젠더적 관점’이라는 문제 설정을 통해 재현론의 권위에 직접적인 개입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그 자체로 한국문학비평사의 연결선이자 그 위에서 새겨지고 미끄러지는 실천이기도 하다.
   이를 고려하면, 최근 생성된 여러 페미니즘-퀴어 문제의식을 1980년대 이후 문학사가 지속해온 ‘주체론’의 한 과정으로 포섭하는 관점이 즉각적인 반발심을 불러일으킨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강동호가 “‘1980년대의 민중 주체 → 1990년대의 개인 주체 → 2000년대의 탈주체’”의 연속선상에 동시대 비평 담론을 배치하고 여전히 ‘비판의 부재’를 우려할 때, 이는 일견 젠더적 관점의 부재 ‘이전’과 ‘이후’를 동질화하는 입장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먼저 짚어야 할 것은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여 인식하게 한 집단적·체험적 차이다. 비평의 무력감에 대한 첨예한 반성 속에서 ‘이후’의 비평이 새로이 주목한 것은 ‘시민-독자’의 출현이었다. 위기론 만큼 익숙한 독자론은 근래의 페미니즘-퀴어 이론과 연동되며 적극적으로 갱신되는 중인데, 관련 문제의식 전반이 비판 당사자에게도 단순한 해석 노동을 넘은 일종의 “‘정치적 비평운동’”6)으로 이해된 것은 이후의 비평적 성취가 결코 부정될 수 없는 사안임을 말해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특수한 맥락에서 출현한 젊은 여성 독자의 적극적인 ‘읽기’를 통해 페미니즘 독법의 시의성을 구성하고, 동시에 돌파할 수 있었던 비평장의 전환 내러티브를 고려할 때 페미니즘-퀴어 비평이 ‘제도 내 좀비 비평’ 재생산 구조에 그대로 위치되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강동호의 문제의식은 “구조에 무지한/복역하는 ‘후배 세대’를 분리한 뒤 그들을 경유해”7)서만 가능한, “동일한 전선을 반복하거나, 기존의 구조를 토대로 미래의 수행성을 미리 제거하는 방식”8)의 “근본주의적 태도”9)에 불과한 것일까.
   그런데 ‘작가-비평가’ 모델이 단순한 비판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지식인-비평가’ 요청의 시공간에서부터 ‘예견’10)된 무엇으로 파악되었다는 사실은, 그 극단적인 체질 전환이 문학의 시장화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비/가시적으로 작동하는 문학비평(장)만의 담론사, 이를 재생하는 구조가 서로 얽혀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담론과 비평가 모델의 연계 속에서 비평의 관성을 파악하는 것은 ‘지금’의 균열을 위한 필수적인 작업이다. 다른 말로 하면,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을 복합적으로 내재하고, 삭제하며, 갱신되거나 퇴보…… 하는 비고정적인 ‘새로운’ 시민-독자의 역동성, 그것과 관계 맺은 여러 형태의 동시대 작품들, 이 모든 변화를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유의미한 ‘실천’의 자리로 재배치시켜왔던 최근 비평 텍스트의 성취와는 분리된 자리에서, ‘문학비평’이라는 공간 자체를 점검하는 토대는 지속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현 비평장에 날아든 ‘지금’이라는 문제적 요청은 일갈의 수준으로 단순화되기보다는, 그 기저에 놓인 문학비평(가)의 반복되는 불안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즉각 제기된 반론들은 이를 다소 상식적이고 유해한 기성세대의 백래시(backlash) 차원, 혹은 스스로 ‘단절’을 공표했던 것에 대해 페미니즘-퀴어 담론이 얼마만큼의 ‘단절’을 성취해냈는가를 따지는 일 따위로 위치시키며 방어에만 집중한다는 점에서 특히나 비생산적인 세대론의 원리를 따른다.
   오히려 생산적인 논박은 인아영이 각주로 제시한 비평장과 학계 사이의 긴밀한 연동성, 이로부터 유지되는 문학비평장의 안정성과 그 속에서 지속되는 ‘젊은 비평가’들의 작업, 무엇보다 해당 작업들의 매우 기형적인, 그러나 동시에 생산적인 모순된 성격을 문제 삼는 데서 시작될 수 있다. 이는 시스템에 대해 생각할 때 “비평가가 전업 노동자로 살아가기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시스템이 유지될 수 있는 근본적 이유를 더 고민해야”11)한다는 인아영 자신의 중요한 문제의식을 확장하는 것에 다름 아니며, “한국문학과 비평을 중층적으로 구조화한 모종의 역사적 힘”12)을 살펴야 한다는 제언과도 분리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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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가 예정되어 있던 질문의 출현과 이를 향한 날 선 반응을 염두에 두면서 앞선 문제로 돌아간다. 비평의 회귀하는 자기비판에는 비평가 개인의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한국문학비평(장) 전반의 불안이 놓여있다.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강력한 의구심을 바탕으로 하는 이 반복이 정체가 불분명한 ‘불안’의 한 양상인 이유는, 문학평론이란 기실, 한국문학(장)이라는 제도화된 틀 내에서 매우 이례적인 안정성을 보장받으며 생산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뉴미디어 시대에 비평이 ‘누구나’의 장르가 됨으로써, 비평가로서의 위상이 경계 지어지지 않는다는 세속적 불안, 그로 인해 비평이라는 전문화된 장르 자체가 쓸모없어졌다는 비평계의 흔한 우려 역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국문학비평(장)은 ‘누구나’의 비평으로 위협을 받기에는, 너무나 안온한 온실이 아니었던가.
   아니면 불안은, 이 좁은 온실 속에서 경제적 안정을 보장해주는 위치가 극소수의 평론가들에게만 배당된다는 현실적인 문제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생계에 대한 불안은 비평가 개개인의 불안을 형성하는 요인일 수는 있지만, 한국문학비평이라는 장르 자체가 반복적으로 겪고 있는 집단적 불안과 위기의식을 온전히 설명해내지는 못한다. 얼마간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방식으로 나름의 전문성을 형성하며, 동시에 매해 비평가/비평 지면을 생산해내는 이곳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불안의 성격은 생존의 문제를 넘어 상상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관점을 달리하면, 오히려 한국 문단의 계간지 시스템이 비평 텍스트를 위한 자리를 필수적으로 생산한다는 사실이 비평의 불안을 생성하는 주된 요인처럼 보인다. 비평가 개인으로서 활동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불안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마련되는 ‘리뷰’와 ‘신간 소개’ 지면부터 확보하는 일에 몰두하게 하고, 이를 위해 ‘독자 없는’ 비평이라는 오명 속에서 영혼 없는 글쓰기를 지속해야 하는 ‘주니어 시스템’이라는 틀은 마치 신인 평론가들이 생존 안정이 보장되면 ‘진짜’ 담론을 생성해낼 수 있다고 기대하며, 그것을 목표로 부당한 열정 페이를 감내하는 것처럼 상황을 인식하게 한다13). 그런데, 한국문학비평(장)은 지면 문제를 제도 비판의 핵심으로 언급하면서도 이를 지면 갱신의 차원으로 확대하지 못하거나, 확장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비평의 투고란은 상시적으로 열려있으나 가장 작품이 들어오지 않는 ‘공란’이라는 문학계 내외부의 공공연한 ‘썰’은 과거 치러졌던 한 좌담에서 사실로 확인된 바 있다.

   『문학과사회』는 이러한 차원에서 작은 실험을 시도해본 적이 있는데요. 일시적으로 서평 코너를 없애는 대신 젊은 평론가들에게 자유 지면을 제공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가이드라인이나 기획 의도도 없으니, 평소 지니고 있는 비평적 주제 의식을 마음껏 발휘하는 글을 써달라고요. 그런데 잡지를 만드는 입장에서 가장 운영하기 어려운 코너가 자유 비평 지면이었어요. 젊은 평론가들이 가장 난감해하는 코너이면서, 펑크율도 높았던 코너였습니다. 상당히 징후적으로 받아들여지더라고요. (강동호)

   자유 지면을 줬는데도 자율적인 문제 제기가 안 나온다는 건, 젊은 평론가들에게 기존체제를 내면화한 면이 있다는 거겠죠. 하지만 충분히 지속적인 지면이 있어야 문제의식을 벼릴 지적 여건이 조성된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어요. 그러니 일시적인 시행착오를 감내하더라도 그런 시도가 지속돼야 합니다. (오혜진)14)

   이른바 ‘자생적 비평 텍스트의 부재’는 비평의 불안을 사유하는 데 있어 문제적인 관점을 제공한다. ‘문단 내부’의 주류 문예지와 그 ‘바깥’에서 생성되는 문학비평 사이의 연계 부재나, ‘외부’에서 생성되어 문학장에 개입하는 문학 담론이 거의 없다는 사실보다 문제적인, 즉 문단 내부의 ‘자생적/자발적’ 비평 텍스트의 불가능이라는 치명적인 사실이 암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점이 문단의 안과 밖을 강화한다는 입장은 해당 사안 자체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일 역시 성급하게 회피함으로써 명백히 내부로 통용되는 담론을 유일한 문학 담론으로 승인하고 이를 자연화한다.
   사례는 더 있다. “리뷰나 서평 등 ‘쪽글’의 형태로 축소된” 문학비평이 “폭넓은 담론을 펼칠 장이 부족하고 비평적 공론화, 활발한 논쟁 등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는 문제의식하에 기획된 《문장 웹진》의 ‘본격! 비평’란은 2020년 7월부터 12월까지 “공모 형식의 심사를 거치지만 결격 사유가 없는 한 최대한 게재하는 것을 원칙”으로 내세우며 비평 투고제를 실시15)한다. 해당 지면이 등단제의 대안적 루트로만 활용되거나, 등단제를 통해 활동을 시작한 ‘문학평론가’의 작품이 단 1편으로 마무리되었을 때, 우리는 ‘본격! 비평’이라는 거대한 표어 아래 몇 년 전 회자되었던 한국문학비평의 초라한 민낯을 다시금 마주한 것이나 다름없다.
   한편, 최근 『외계관측지수』 01호를 발간한 독립 문예지 《스펙트럼》은 “비평의 분실”을 알린 바 있다. 투고를 받은 작품 중 비평은 단 한 편도 모집되지 않았는데, 이는 특히 ‘독립 서적에 발표된 작품’을 대상으로 한다는 투고의 요구 사항과 연결되면서 문단 내 비평의 장르 위계까지 되묻는다16). 이러한 사안은 문학비평은 곧 ‘주문 제작’이라는 자조적 비판, ‘본격! 비평은 등단작뿐이다’와 같은 비평계의 공공연한 문제의식이 실상 기만적인 토로에 불과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비평 주체 개개인들의 복잡다단한 욕망과 수행성을 삭제하지 말라는 주장에 전면으로 배치되는 관련 사례들은 진지하게 분석되어야 한다. 해당 사례들은, 할당된 청탁(서)의 문제의식과 먼 곳에서의 급진적 사유가 불가능한 것이 현 문학비평(장)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며, 이것이야말로 한국문학비평(가)이 내재한, 그러므로 반복적으로 돌출하는 불안의 근원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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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를 물론 문학평론가 개개인의 소극성 탓만으로 돌릴 수 없다. 오혜진은 ‘자율 없는 자유 지면’이라는 사안을, 기존의 체제가 젊은 평론가들에게 내면화된 사정을 내재한, 자율적 장의 지속을 통해 중층적으로 타개되어야 할 문제로 배치한다. 문제는 ‘리뷰’ ‘계간평’ 등의 존재 자체가 아닌 것이다. 본격 비평마저도 청탁서에 기재된 문제의식 속에서만 생성되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은 70년대 이후 개막되고, 90년대 이래로 현재의 모습을 지속 중인 계간지 시스템의 기획 과정과 전혀 무관한 일일까. 동시대 비평 담론 형성의 ‘거의 유일한’ 장인 주류 문예지는 비평의 자발적 담론 생성의 장으로, 혹은 그것을 연계할 장으로서 과연 적합한 공간인가.
   특히 신인 평론가에 한해, 글을 쓰는 필자는 해당 호의 기획이 정확히 어떤 회의와 논박을 거쳐 그 호의 표제로 선별, 의제화되었는지 자세히 알기 어려우며, 자신이 글을 쓰는 ‘특집’, ‘리뷰’, ‘비평’란의 (자신을 제외한) 해당 호 필자가 누구인지, 그들이 어떤 성격의 글을 싣는 필자들인지도 미리 알 수 없다. 비판적 관점을 토대로 하는 비평 텍스트가 그 글이 배치될 위치부터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쓰이는 상황이 별문제 없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때 비평이 관계한다는 ‘현실’은 도대체 무엇인가. 비평에는 ‘작품/작가론’에 최대한 몰두하거나, 기껏해야 비평가 개인에게 현실로 포착된, 그러나 해당 잡지의 기획과는 다소간 동떨어지거나, 청탁서를 통해 느슨히 연계된 동시대의 조건을 작품과 연결 짓는 일만이 최선의 선택지로 주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전반적으로 첨예하지 못한 계간지의 비평 텍스트 생산 과정이 ‘청탁’과 ‘투고’라는 문제 자체보다, 혹은 ‘리뷰’와 ‘계간평’ 같은 지면의 성격보다 더욱 문제적으로 보인다.
   이것이 비평 자유 지면 ‘공란’의 문제를 심각하게 사유하게 하는 이유는, 계간지를 포함한 주류 문예지의 위와 같은 작동 방식이 바로, ‘공란’이 보증하듯, 유일한 문학비평 담론 생성의 장이기 때문이다. ‘독립 비평’이건 ‘자유 지면’이건 문턱 없이 개방된 ‘투고란’이건 공란으로 마무리되는 비평 지면들의 형태는 문학비평의 동종교배, 동질화와 같은 잔혹한 진단을 끝내 수긍하게 한다. 물론 현재의 계간지 시스템이 비평 텍스트만을 싣는 잡지가 아니라는 점에서, 기획 단계부터 개입하는 비평적 관점과 자의식은 무리한 요청일 것이다. 그런데 비평 이외의 장르가 주류로 통용되는 문예 잡지의 기획, 지면 배당의 문제가 매우 기형적인 형태로 현장 평론가들에게 몰려 있는 현상17)은 비평가가 기획하고 견인하는, 그러나 비평적 관점의 자생을 촉발하지 못하는 계간지 시스템이라는 아이러니한 문제와 전혀 무관한 것일까. 비평적 실천은 “‘공감을 바탕으로 한 섬세하고 꼼꼼한 읽기’의 생산 속에서 나타나는 이면적 현상으로서의 ‘비판의 부재’, 더 정확히 말하면 ‘침묵’으로 대신하는 비판의 구성적 외부화로”라는 설명 이전에18) 강동호와 더불어 강동호의 의견에 비판을 개진했던 여러 비평 주체 자신들이 직접 관여하고 있는 가장 단순한 절차를 “상당히 징후적”인 현상 이상으로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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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면 부족 - 생존 쟁투 - 인정 투쟁 - 세대론 - 비평 분실…… 이 모든 배치되는 주장이 공존하는 비평계의 혼란은 “차라리 한국문학비평의 위기”19)에 관한 각종 의구심이 시효가 만료된 넋두리일 수 없다는 점을 말해준다. 앞서 인용한 좌담은 불과 몇 년 전, ‘젊은’ 세대로 스스로를 위치시키며, 비평장의 ‘차이와 반복’을 들여다본 사례다. 이 텍스트는 동시대 비평(가)이라는 자의식이 세대론적 그것을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은연중에 암시하면서도 이때의 ‘세대’가 단순히 생애주기와 젠더, 사회적 위치 등에 한정적으로 기반한 무엇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보여준다. ‘세대’와 ‘비평’의 결합은 “동시대성을 재감각”20)하는 일이 반드시 착시와 오인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필연적인 현상인 것이다. 기왕의 토대에서 무엇을 단절 혹은 연속하며 무엇을 심문할 것인지 결정하는 일은, ‘동시대성’과의 연결과 불화를 지속적으로 의식하는 와중에 개별 주체 각자의 비평적 자의식으로 형성된다.

   “근대문학의 형식적 유효기간이나 그와 연계된 기존의 비평적 역할에 대해서 부정적인 실감을 가지게 된 건 비평 활동을 2~3년쯤 수행한 뒤의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어떤 ‘시차(時差)’를 통해서 뒤늦게야 제 비평적 포지션이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박인성)

   박인성에게 비평(가)의 세대론적 자의식은 안정적이고 고정적인 ‘문학(장)’이라는 시스템의 작동 속에서 형성되는 ‘비평적 포지션’에 다름 아니며, 이는 “시차적 체험들”의 형태로, 즉 “때늦은 자기변명”21)의 형태로 수행된다. 이른바 젊은 비평가에게 할당되고 요구되는 젊은 텍스트를 통해 비평장이 강조하는 동시대에 대한 강렬한 자의식만큼이나, 이것과 맺는 비균질성, 비동시성 등의 ‘불화’가 개별 주체들의 비평적 세대 의식을 형성하고 심지어 강화했다는 것이다. 이 뒤늦게 발견되는 세대 의식인 ‘시차’는, ‘동시대성을 재감각하는’ 비평이 근본적으로 처해 있는 불화의 다른 이름이며, 문학장이라는 특유의 폐쇄적 시스템은 ‘불화’를 재감각의 원천이 아니라 “때늦은” ‘불안’으로 만드는 주범이다.
   따라서 비평은 주례사가 아니라 하객22)이 되어야 한다는 충고나, 등단 제도가 단순한 경쟁 시스템이 아닌, 계층적 위계와 탈정치적 경직성을 재생산하는 주범으로서의 ‘입시제도’라는 비판적 비유를 받아, “신춘문예나 문예지 신인상 같은 건 이른바 ‘정시’고, 기존 제도권의 네트워크를 통한 추천 등을 ‘수시’라고, 독립 매체, 메일링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각자 자기의 커리어를 만들어내는 게 ‘학종’”23)과 같은 무비판적 틀을 재생산하는 것은 결코 비평의 불안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동시대 비평의 역동성 속에서 기어이 재부상한 비평(가)의 불안을 ‘문학’과 ‘사회’라는 거시적인 틀 내에서, 문학의 힘을 믿고 나아가겠다는 낙관 없는 낙관으로 귀결시키는 주장들 역시, 불화 없는 비평의 자리를 그저 지켜나가겠다는 말 이상이 될 수 없다. 비-국문과 비-연구자 출신의 한국문학평론가들의 자리는 예외적 개인의 사례나, 담론적 입장 차에 근거해 간과되어도 좋은 사안이 아니며, 문단 내외부를 통해 문학평론이라는 자리를 내파하려는 비평가들의 실질적인 연대와 실천 없이 제대로 된 비판은 시작되기 어렵다.
   문학비평(장)에 대한 비관과 낙관의 파도 속에서 박인성이 제시했던 ‘나-비평가’라는 돌파구는 흥미롭게도 동시대 비평(장)에서 무/의식적인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일련의 ‘나-비평’ 쓰기의 행위들, 경어체를 기반으로 한 자기 고백적 발화들은 ‘비평가-나’가 아닌 ‘나-비평가’의 위치성을 가시화하고 이에 수반되는 책임을 의식하면서, 객관성에 대한 환상이 텍스트에 한정된 발화로 이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방식으로, 비평 쓰기의 의미를 재구성하고 있다.
   그런데 ‘나-비평가’의 쓰기는 앞서 살폈던 한국문학(장)의 비평가 생산 시스템을 고려할 때도 여전히 같은 가치 값을 가질까. 문학장 내에서 승인된 자들의 ‘나-비평가’ 쓰기가 실질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이때의 ‘나’는 무엇을 강화하는가. 비평-에세이가 ‘비평가가 될 줄 몰랐는데, 덜컥 등단이 되었다.’ 류의 고백(?)을 자기반성의 매개로 삼아 진행될 수 있는 참담한 현실은 ‘나-비평가’ 쓰기의 심층에 놓여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묻게 한다.
   그렇다면 문학비평(장)은 자족과 방어 말고 무엇을 실천할 수 있을까. 작품/작가론임과 동시에 말 그대로 문학비평(장)이라는 현실 자체를 급진적으로 해체하고 갱신하는 비평은 가능할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 뒤에 오혜진의 대답을 놓는다.

   젊은 비평가와 연구자 들이 연대해 제도 밖에서 새로운 담론 공간을 창출해내는 방법도 있을 겁니다. 물리적·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겠지만, 지금 여러 독립잡지들과 연구 모임들이 자생적으로 백출하는 현상은 고무적이에요. 이런 투 트랙의 전략을 좀더 급진적으로 실천해야죠.24)

   경험을 통해 ‘대안 연구 공동체’라는 꽤 구체적인 방식을 제시한 오혜진의 상상력을 ‘나-비평가’의 반대 모델, 즉 ‘집단-비평(가)’이라는 모델로 이해하고 싶다. 비평 텍스트의 자발적 발생이 불가한 이유가, 일차적으로 문예 잡지, 나아가 인접 학문 분야 잡지나 논문25) 시스템 속에서‘만’ 생성 및 보충되며, 텍스트가 놓인 위치를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다시 떠올린다. ‘기획-비평’의 불가능이 문예지 시스템의 비평 생산 방식과 관련된다면 오혜진의 ‘투 트랙 전략’은 다음의 질문을 가능하게 한다. 문학비평은 꼭 소설, 시, 에세이와 같은 타 문학 장르들과 함께 제시되어야만 하는가.
   비평 텍스트는 그 자체로 한시적이고 돌발적인, 출현과 소멸을 반복하는 자생적 ‘장’으로 생성될 수는 없는 것일까. 이것은 전반적인 문학관이나 선호하는 작가가 유사하다는 식의 ‘동인, 편집위원 체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문학장의 개방과 다양화가 문제 해결의 절대 답이라는 순진한 주장도 아니다. 오혜진이 언급했던 ‘대안적 연구 공동체’의, 문학을 느슨하게 통과하는 비평은 지금도 지속 중이다26). ‘지금’이라는 이름으로 요청되는 것이 담론 간 충돌이라면 “제도적 층위보다 훨씬 미시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주체화의 기제를 설명해주”27)는 ‘등단 제도’, ‘작가론’, ‘해설 지면’, ‘문학상’, ‘출판 제도’ 등에 대한 급진적 사유는 매체 밖의 매체-문학비평이 동시적으로 수행될 때에만 가능하다. 좀비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가 시스템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좀비들의 이야기로 존속될 때, 불화를 삭제한 한국문학비평(장)은 다시금 뒤늦은 불안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문학비평은 왜 존재해야 하는가. 글을 시작하게 한 물음이 끝내 답해지지 않는다.

최가은

한국문학비평장에 대한 관심이 많다. 특히 비평장이 형성해온 주요 개념과 담론을 통해 문학사를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헤매는 것을 좋아한다.

2021/10/26
47호

1
강동호, 「비평의 시간 - 김봉곤 사건 이후의 비평」, 『문학과사회』, 2020 가을호, 402-403쪽.
2
오혜진,「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 문학과학사, 『문학과학』 85, 2016, 83-86쪽.
3
소영현, 「좀비 비평 혹은 비평의 유령」, 『올빼미의 숲』, 문학과지성사, 2017.
4
소영현 외, 「비평 시대의 젠더적 기원과 그 불만」, 『#문학은_위험하다』, 민음사, 2019, 21쪽.
5
소영현, 위의 책, 23쪽.
6
강동호, 위의 글, 410쪽.
7
김건형, 「「2020, 퀴어 역학 - 曆學·力學·譯學」을 위한 설계 노트 1」, 『문학동네』, 2020 겨울호, 245쪽.
8
인아영, 「다가오는 것들」, 『문학동네』, 2020 겨울, 287쪽.
9
김건형, 위의 글, 같은 쪽.
10
소영현, 「지식인-비평(가)에서 작가-비평(가)로」, 『올빼미의 숲』, 문학과지성사, 2017, 91쪽.
11
인아영, 위의 글, 286쪽.
12
강동호, 위의 글, 403쪽.
13
이하 전개될 논의와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비평의 불안한 자의식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질문의 회귀가 주로 활동을 보장받은 연차의 ‘시니어 평론가’들로부터 제출된다는 점 역시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담론과 기획의 생산이 보장되는 자리에서, 그러니까 자유 지면을 얼마간 자유롭게 제공받고 또 활용할 수 있는 자리에 이를 때, 이들이 지속적으로 비평 생산의 ‘구조’를 문제시하고 있다는 점은 ‘젊은’ 세대에서 ‘기성’ 세대로의 태세 전환 정도로 치부될 사항이 아니라, 그 자체로 구조의 균열 가능성으로 이해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14
강동호, 박인성, 오혜진, 이우창, 황현경 좌담 「우리 세대의 비평」, 『문학과사회』, 2016 가을호, 76-77쪽. 강조는 인용자.
15
문장 웹진 편집부, 「본격! 비평 공고」, 2020. 04. 29 공지 게시글, (링크))
16
“스펙트럼은 지난달 본 문예지에 게재될 ‘장르 미상’과 ‘비평’ 장르의 작품을 투고 받았습니다. 그러나 비평 작품은 단 한 편도 모집되지 않았습니다. 모집 당시, 비평 원고는 대상 작품이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독립 서적에 발표된 작품’으로요. 독립문예지에 발표되는 문학들은 비평이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곤 합니다. 때문에 스펙트럼은 독립 문학에 대한 비평 텍스트를 싣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스펙트럼은 모집되지 않은 비평원고의 자리를 ‘백지’로 비워 출간합니다.”, (링크))
17
소위 ‘문단’과 국문학 ‘학술장’을 전반적으로 아우르는 경계가 ‘한국문학장’이라고 이해될 때, 이 두 영역은 서로에게 의존적인 형태로 작동된다. 이를테면, 학술장에서 활발히 제출되고 있는 문학사 연구는 작가론과 작품론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문지(문사)’, ‘창비’, ‘문동’ 등으로 대변되는 주류 문학장 중심의 서사를 비판적으로 통과하고, 이에 대한 대항 기억을 발굴한다. 7-80년대 하위주체들의 읽기-쓰기와 여성(해방)문학 운동사/담론사 구축과 더불어 문학 매체들에 대한 탐구가 지속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 전반을 통해 ‘문학장’이라는 전체 구조의 물질적, 정신적 계보가 충실하게 재구축될 뿐만 아니라 동시대 ‘계간지 시스템’의 성립 조건이 형성된다. 이것이 문예지 비평의 ‘독자 없음 → 쓸모없음’이라는 도식이 실질적인 효력을 갖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과정 속에서 한국문학비평(가)은 문학장 내 어떤 위치보다 특수한 자리에 있게 된다.
18
강동호, 위의 글, 432쪽.
19
강동호 외 위의 좌담, 94쪽.
20
강지희, 「동시대성을 재감각하기」 『자음과모음』, 2020, 겨울호.
21
강동호 외, 위의 좌담, 중 박인성의 말, 48-52쪽.
22
노태훈, 「크리티컬 에세이」, 『자음과모음』, 2020 겨울호, 293쪽.
23
노태훈, 소영현, 이경재, 이슬기, 한소범, 「《문장 웹진》 2021년 기획 연속좌담 ‘등단’ 3차 : 모색」, 인용은 노태훈 평론가의 발언이며 이슬기 기자, 한소범 기자는 동일한 비유를 통해 논의를 이어간다.
24
위의 좌담, 오혜진의 말, 78쪽.
25
한편, 인접 학문 분야의 여러 연구/비평 텍스들이 역으로 문예지에서 생성되는 문학비평 담론을 적극적으로 인용, 전유하고 있는지 역시 냉정하게 되물어봐야 할 것이다.
26
참고할만한 사례 중 대형 출판사의 잡지 기획 방식 속에서 다른 비평을 수행하는 인문 잡지 『한편』의 ‘필자 세미나’나, 페미니즘 이론을 중심으로 다양한 전공의 연구자들이 모여 비평과 연구 텍스트의 경계를 허물고 있는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FWD’의 ‘필진 기획 세미나’ 등이 있다. 잡지의 큰 방향성은 유지하되, 개별 호마다 고정 필진과 외부 필진이 따로 형성되고 또 해체되며, 해당 호의 필자 전원은 기획 과정에 참여한다. 이들의 비평 필진은 잡지를 중심으로 개방적이고 유동적이며, 또 집단적인 ‘집단-비평가’이다. ‘FWD’의 수개월에 걸쳐 이어지는 기획과 비평 쓰기의 과정은 집단 비평 담론의 생성이자, 담론의 공유를 위한 설계의 과정이며, 각각 일시적이고 집중적인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링크)) ; 우리는 이와 유사한 작업들이 8-90년대 한국 여성 해방 문학 운동을 이끌었던, 그야말로 “빛나는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
27
강동호, 위의 글, 4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