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날 우리 사회는 비교적 반듯하고 안전해 보인다. 깨진 도로는 바로바로 복구되고 거리에는 쓰레기 하나 없으며 노점상 손수레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말끔한 풍경이다. 느닷없이 고양잇과 동물에게 공격을 당할 위험도 없고, 기아와 질병에 허덕일 위험도 현저히 줄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이 삶의 문제들을 완벽하게 커버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사회의 부정성을 유폐시키는 데 일조하는지도 모른다. 특별히 테크놀로지의 무한 발달은 삶의 외양을 풍요롭게 가시화하면서도 우리로 하여금 감정과 사유를 억제하게끔 암묵적으로 강요하지 않는가. 그로인해 우리는 사회에 잠복한 불협화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과거와 달리 모든 것이 풍요롭다는 환상만을 반복적으로 외치게 되는지도 모른다.
   영화로 상영되기도 한 조남주 장편 『82년생 김지영』이 우리 사회에 부여한 파장은 결코 작지 않았다. 주인공이 처한 부정적 여건에만 천착하였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MZ세대의 내면 심층부에서 뿜어져나오는 어둑한 자화상을 보여준 것은 지금 보아도 우뚝한 성과이다. 그 세대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비루함을 몸의 훼손 과정을 통해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얼마든지 정당한 것이다. 우리는 주인공의 시간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여성이 처한 현실을 통해 한 사회의 비극적 단면을 만나게 된다. 남녀 대립을 부채질했다는 냉소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돌올한 까닭이다.

   우리의 끝없는 숙원 사업은 저녁 식탁을 지키는 것
   반짝이는 흰죽을 입에 물고
   뺨에서 빵으로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슬픔의 막노동을 빼앗지 마소서
― 이민하, 「한 바구니 안에서도 할퀴지 않는 과일들처럼」 부분.


   이민하 시집 『미기후』는 각자의 기후를 살아가는 MZ세대의 자아를 발견하는 방식으로 짜여 있다. ‘미기후’란 아주 작은 범위 안의 기후를 일컫는 말로서, 흔히 지상에서 1.5m 정도 높이까지를 측정 대상으로 한다. 우리가 각기 다른 온도를 경험한다면, 다시 말해 작은 구역에 서로 다른 기후를 지니고 있다면, 이 기후를 느끼기 위해서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이민하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자들의 내면과 이면에 놓인 잠재적 비극성을 담담하게 들려준다. “죽은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이 반씩 섞여 있는” 세상을 시인은 “기울지도 침몰하지도 않는/어떤 세계”(「세상의 모든 비밀」)로 표현한다. 그가 구축해가는 이미지는 아슬아슬한 세계에 몸을 내맡긴 불안한 모습을 형상화하면서 현대인의 삶이 죽음의 무게로 시소처럼 오르내리는 순간을 기록하기도 한다. 그것이 그 세대가 처한 현실의 모습이자 개개인의 삶의 온도가 ‘미기후’로 만져질 때의 감각이 아닐까?
   우리는 풍요와 잉여 속에서도 일에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휴가를 요구하면서도 누구보다 더 일을 통해 인정받으려고 한다. MZ세대의 취업 관련 위기는 소설 ‘김지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80% 이상 대졸 학력을 가진 것과 3D(Dangerous, Dirty, Difficult) 기피 현상을 근거로 MZ세대의 열정은 폄하되기도 한다. 기실 국내 기업은 서구의 기업 형태를 모방하며 고용 패러다임의 변화를 급격하게 가져왔다. 근면의 표상이 되던 평생직장을 갖는 건 거의 불가능한 것이 되었고, 노동을 통해 내 집 마련은 물론이고 가정을 꾸리는 것조차 힘들어지면서, 노동은 젊은 세대에게 인생의 어떤 목적도 부여하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오늘의 노동은 자연의 훼손 아래 일구어온 성과를 토대로 하여 이제 마지막 남은 자원인 인간마저 마모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돌봄이나 인정, 가능성이라는 희망이 누적된 노동 개념은 이윽고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차원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 노동 형상은 아버지에게서 확인된다. 그분의 노동은 고통과 수고의 연속이었지만 삶을 살아볼 만한 것으로 지탱해주는 긍정적인 에너지이자 원동력이었다. 1994년 10월 성수대교가 붕괴하기 불과 5분 전 아버지는 그곳을 지나가고 계셨다. 단정한 시간 때인 오전 7시에 아버지 눈앞에 아수라장의 상황이 펼쳐졌다.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구한 이들은 안도의 한숨과 안타까움의 신음을 동시에 내뱉었다. 손을 쓸 수도 없는 상황에서 직물을 배달하던 아버지는 그곳을 빠져나왔지만 이후 그곳을 지날 때마다 충격이 되살아나 간절히 기도했다고 한다. 배달이 업이었던 아버지는 그곳을 늘 지나야 했고 정신적 충격을 버티며 한동안 그렇게 일을 하셨다. 남동생과 나는 그런 사정도 모르고 아버지가 월급이 담긴 누런 갱지 봉투를 엄마에게 내밀면 아버지가 들고 오신 분식이 담긴 검정 비닐을 뜯는 데만 열중했다.
   과거의 노동은 가치 있는 서사와 삶의 원동력을 만들어내고자 했다는 점에서 물질적, 비물질적 요소를 결합한 것이었다. 근무 수당, 근속 수당, 위험 수당, 야근 수당, 식대 등 구체적인 과정적 명명이 빼곡하게 적힌 목록을 볼 때 아버지는 위대한 존재로 극대화되곤 했다.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쓰인 숫자들은 내게 어떤 로고스의 권능으로 자리하기도 했고 고통과 수고라는 기억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게 한 장의 급여 봉투는 한 개인의 노동에 커다란 정당성과 의미군(群)을 부여하고 모든 이들의 ‘인정’을 탄생시키는 메타포로 포착되었다. 굳이 종교적 접근을 하지 않더라도 노동은 누군가를 책임지는 어떤 신성의 행위였으며,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불퇴전의 능력으로 생각되었다. 그런 노동에 대한 긍정은 내게 ‘잘 삶(to eu z?n)’이라는 것으로 이어졌다. ‘잘 삶’이란 실존적, 미학적, 지성적 접근이면서 동시에 아버지의 노동이 자리한 근원적인 장소에 대한 동경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잘 사나?”를 스스로에게 종종 되묻는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잘 삶’의 위기는 언제나 가까이에 와 있는 듯하다. 삶을 지속해온 결과가 ‘잘 삶’인지, 아니면 그저 삶 자체에 몰두한 것인지, 삶의 목표만 ‘잘 삶’이었는지, 타자의 욕망을 모방해서 살아왔던 것은 아니었는지 끝없이 성찰해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사전적 의미의 노동은 사람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재화를 교환하거나 얻기 위한 육체적, 정신적인 활동을 뜻한다. 그러나 경영학 서적에서는 자아실현을 통한 사회 기여의 주체로 노동의 가치를 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노동의 어원인데, 프랑스어 travail은 라틴어 tripalium에서 유래되었다. tripalium은 막대 세 개로 만들어진 고문 도구를 뜻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어로 노동을 뜻하는 ponos는 ‘슬픔’을, 라틴어 labor는 ‘고역’을, 독일어 Arbeit는 ‘고생’과 ‘역경’을 단어 안에 품고 있다.1) 이것은 경영학 서적의 정의와 너무나 상반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더 거슬러 올라가 살피면 실제 노동은 자연을 모방한다는 ‘미메시스(mimesis)’에서 비롯되었다. 베를 짤 때는 거미, 집을 지을 때는 제비를, 노래할 때는 백조와 나이팅게일을 모방한 것이 노동의 원류가 되는 것이다.2) 따라서 노동은 자연과 분리되어 논할 수 없는 기원을 지니고 있으며 자연 친화적이라는 차원에서 신성한 속성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안타까운 것은 아버지 세대의 월급봉투에 적힌 숫자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으면서도 오늘날의 노동 종사자들은 숫자라는 ‘기호’에서 나아가 그것을 입체화하거나 서사화하는 데 실패한 듯 보인다는 점이다. 노동을 통해 근면과 성실을 내면화하면서도 일에는 좀체 습관이 들지 않고 쉼을 잃어버린 노동은 늘 불안하기만 하다. 이는 자신이 생산하는 노동의 결과와 노동자라는 정체성이 겹쳐지는 데서 비롯하는 것일 터이다. 자신의 생산물이 많을 때 노동자는 더 스스로를 보잘것없다고 느끼게 되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것이 잉여일 뿐이라는 사고가 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사회적 존재라면 노동의 목적 없이도 노동을 해야 하며 그것이 일의 원형이라고 생각하는 착시에 젖어 있다. 인간은 행위 능력의 인정을 통해 존재론적으로 구원되어야 하는데, 오늘날 우리는 인정을 경험하지 못하면서 휴식과 여가를 불가능한 꿈으로만 끌어올리고 있다. 인간 실존 감각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것과 그것에 대한 인정으로 채워지게 마련인데 이 두 가지 목표가 오늘날 완전히 폄하되고 있다는 데서 구원이 필요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노동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이를 구원해줄 노동의 원형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귄터 그라스의 『넙치』는 하늘 늑대가 가지고 있던 불을 아우아가 훔치면서 시작되는 소설이다. 한스 요나스(Hans Jonas, 1903~1993)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를 끌어들여 그가 가지고 있던 불의 권력이 근대 과학기술을 낳았다고 비유적으로 말한 것처럼3), 그라스는 아우아를 통해 불을 지배하게 된 인간에 주목하였다. 여성은 요리라는 살림 행위의 원천으로 불을 사용하는 반면 남성은 전쟁을 위한 무기 생산의 원천으로 불을 사용한다고 그는 보았다. 이 시기부터 노동의 패러다임이 변해간다. 그라스에 따르면 노동에 지배 메커니즘이 들어가기 시작한 때를 신석기 시대로 볼 수 있다. 제임스 수즈먼도 『일의 역사』에서 노동이 ‘명실상부한 고통’이 되는 시기를 신석기 시대로 보았는데,4) 두 작가가 지적한 공통부분은 신석기 시대로부터 노동의 원형이 변형되고 이른바 ‘축적’의 개념이 생겨났으며 지배 이데올로기가 생성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노동은 그 이후 어떤 진화의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셈이다.
   언젠가부터 광고 매체는 노동이라는 서사 대신 노동의 결과에만 주목하여 현란한 소비 이미지를 내놓기 시작했다. 노동에 관한 광고에서도 드라이브가 시작된 셈이다. ‘드라이브’는 바쁘게 돌아가는 사회를 살아내야 하는 현대인의 삶 자체를 지시하는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다. 광고 시장은 노동의 과정과 그로부터의 동반될 서사 대신 노동이 가져다줄 결과에만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노동의 어둑한 측면은 종종 이미지 광고에 가려져 현실로부터 괴리되어갔다. 멋진 차를 타고 출근하면서 반려동물과 산책하는 장면, 인터넷이 통제하는 최첨단 오피스텔이나 아파트에서 재택근무하는 이미지 등은 실제 노동을 전례없이 영웅적으로 활성화하고 있다. 이것은 노동이 가져다주는 결과가 될 수는 있지만, 노동의 목적일 수는 없다. 노동의 목적은 수많은 긍정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서사를 낳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공유와 교류, 환대를 통해 노동의 목적은 노동 자체를 즐기면서 삶을 버틸 수 있는 원동력으로 되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2.

   일시적으로 은폐된 것들은 스스로의 몸을 뚫고 나와 스스로를 증명하게 마련이다. 최근 환경에서 이상 징후가 포착되거나 인류가 유례없는 위기의식을 느끼는 것은 그 점에서 그동안 우리가 겪지 못한 차원의 일이다. 우리는 테크놀로지를 우상화하고 ‘안전’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순치되어 숲을 걷어내고 고층 건물을 세워갔다. 그것은 수많은 죽음 위에 우뚝 솟은 허상일 뿐인데도 말이다. 시인 이문재는 우리가 ‘땅바닥’이라고 부르는 것이 매미 애벌레에게는 생사가 걸린 ‘땅의 천장’이라고 말한다. 올여름 매미를 만났다면 이는 6년 전 땅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것이고 그것을 발견한 자신은 운이 좋았다고도 노래한다. 만일 매미 애벌레가 땅속으로 들어간 사이 그 위에 시멘트나 아스팔트가 깔렸다면 땅속 애벌레는 천장에 죽으라고 이마를 치대다가 죽어갔을 것이다.5) 공유 환경에 대한 의식의 결여는 철저하게 자연과 인간의 단절을 낳는다. 최근 유럽에서는 극심한 무더위와 가뭄으로 고통을 받았고 빈번한 화재로 삶의 터전을 잃는 이들도 많아졌다. 국내 역시 폭염과 폭우가 퍽 오랫동안 동반되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제라도 우리는 공유 환경의 고통을 인정하고 우리가 사는 대지의 죽음에 민감해져야 한다.


   날씨가 사라졌어요
   날씨는 이제 없습니다
   날씨는 기상청 예보에만 있지요
   전날 밤 텔레비전과 신문에서
   날씨는 잠깐 보였다가 지나갑니다
   방송이 체감온도 영하 15라고 일러주면
   사람들은 그 순간에 추위를
   다 겪어버리는 것이지요
― 이문재, 「날씨가 사라지다 ― 散策詩 4」 부분.6)


   플루토늄, 요오드, 세슘, 스트론튬……
   구름은 이제 이런 원소들로 만들어집니다.
   구름 가득한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

   재앙은 전깃줄을 따라 퍼져가고
   소문은 가스관, 상하수도관, 지하도마다 창궐합니다.
   기형아가 태어나고 네모난 해바라기꽃이 피어나고
   머리가 둘 달린 돌고래가 해변으로 떠밀려오고
   그래도 LED 불빛 아래 채소들은 초록빛을 잃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구름기둥,
   저 구름의 제조권은 누가 갖고 있습니까?
― 나희덕, 「미래의 구름」 부분.7)

   해가 져도 어두워지지 않는 밤에, 날씨를 기상청 예보로 감각하는 시대에, “재앙은 전깃줄을 따라 퍼져가”는 세상에, 우리는 “낙엽처럼 떠돌고”8) 있을 뿐이다. 우리가 “나무의 일부였다는 것”9)을 기억하기 어려운 시대에 단정한 거리를 위해 양쪽으로 늘어선 은행나무의 가로수는 “표백제”에 뒤덮여 있다. 그래서 “네모난 해바라기꽃이 피어나”고 우리는 미래를 끊임없이 위협당한다. 모든 존재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김혜순이 노래하였듯이, “아기 고래가 엄마를 부르는 소리”에서 “지구를 가득 뒤덮은 사람들이 각자의 엄마를 부르는 소리”(「잊힌 비행기」)10)까지 감각할 수 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지구라는 몸의 미세한 세포라는 자각을 통해 다른 생물권과 연대하여 그들의 울음을 읽어내야 한다고 김혜순은 말한다.
   귄터 그라스는 『넙치』에서 미학적 발언과 사회적 의제 제시가 동시에 가능함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이 작품은 외관상 남녀의 대결과 식량의 문제, 그리고 힘을 중심으로 한 테마를 전개시키지만, 실제로는 여성을 타자화시킨 지배 이데올로기와 차별의 역사를 암시하는 소설이다. 그러나 그라스가 말하는 것은 어느 한 편에 대한 옹호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지배 의식을 가진 인간 모두의 종말을 예고하는 듯하다. 지식을 상징하는 넙치의 말을 절대적으로 믿은 결과는 파괴와 갈등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라스는 남성의 불이 철기시대를 지나면서 무기를 제작하는 것으로 전환되어 대량 살상과 파괴가 시작되었다고 기록한다. 다시 말해 지식과 정보라는 이름으로 인간은 ‘과잉’이라는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택하였고, 우리는 인간의 탐욕과 노동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를 엿보게 된다.

   나는 잉여에 대해서 쓰련다.
   금식에 대해서, 탐식가들이 왜 금식을 만들었는가에 대하여.
   부잣집 식탁에 오른 쇠고기의 영양가에 대하여
   기름과 똥과 소금과 궁핍에 대하여
   정신은 어떻게 쓸개즙처럼 쓴맛이 되었으며
   배는 어쩌다가 정신병에 걸리게 되었는지,

   (…)

   나는 굶주림에 대하여, 그것이 어떻게 서술되고
   어떻게 문자를 통해 유포되었는지에 대해 쓰련다.

   (…)

   나는 무엇에 대해 쓰는가. 달걀에 대해서.
   걱정과 베이컨, 불사르는 사랑, 못과 밧줄에 대해서,
   수프 속의 너무 많은 머리카락과 말 때문에 생긴 싸움에 대해서.
   전기가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을 때,
   냉장고에 무슨 일이 생겼는가에 대해서.
   말끔히 먹어치운 식탁에 둘러앉은 우리 모두에 대하여
   나는 쓰련다.
   너와 나 그리고 목에 걸린 생선 가시에 대해서도.
― 귄터 그라스, 『넙치』 부분.11)

   20세기를 마감하면서 가장 심각하게 다가온 문제는 생태계의 교란과 파괴였다. 더 심각한 것은, 그라스의 지적처럼, 노동의 결과인 잉여의 생산물이 놀라운 과학 기술에도 불구하고 분배와 할당에서는 전혀 그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전기가 더 이상 들어오지 않을 때/냉장고에 무슨 일이 생겼는가에 대해” 생각해본다는 그라스의 말은 무뎌진 인간성을 통렬하게 지적한다. 한편에서는 썩고 버려져 쓰레기가 되고 한편에서는 기아와 굶주림이 일어나는 비대칭 구조를 바라볼 때 인류는 자연 파괴와 동시에 인간 존재론에 무감해져가는 더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친 것이 된다. 그라스는 노동의 역사가 얼마나 파괴적이었는지를 제시한 셈이다. 칼 마르크스는 “노동자는 자연 곧 감각적인 외부 세계 없이는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다. 자연은 노동자의 노동이 현실화되고 활동하는 질료이다.”12)라고 말했다. 이는 자연이 곧 인간의 신체임을 의미하며, 인간의 신체는 그가 살아있는 한 끊임없는 자연과의 상호교류를 통해 생존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간 멀리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를 우리가 근원에서부터 경청할 차례이다.

   
3.

   제임스 수즈먼은 현대인의 노동 시간이 수렵 채집인의 노동 시간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어디까지 ‘일’이고 어디부터 ‘여가’인지 기준을 세우기 어렵기 때문이다. 창과 돌칼을 들고 사냥에 돌입하는 노동의 측면에서 보면 쉼이란 게으름의 표상이 되겠지만, 공유와 교류와 환대의 시간을 중시한다면 쉼이 없는 노동은 워커홀릭일 뿐이다.13) 수렵 채집인의 삶에서 노동과 여가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이유는 이들에게 노동이 축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족 공동체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에 한정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기술 권력을 통해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지도 않는다. 그들에게 자연은 인간과 동식물의 공유 경제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계절 변화에 예민하고 자연의 감각에 기대어 살아간다. 또한 환경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면서 동시에 동식물의 보금자리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만물이 상호 의존적으로 존재한다는 전제 아래 호혜적 책임의 모습으로 나아가야 한다. 수렵 채집인의 삶이 풍요롭게 여겨지는 것은 그들의 노동이 잉여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그들의 노동은 가족 공동체의 생존을 위한 ‘가치’를 위한 것이었기에 자신들이 채집하고 수렵한 것들은 자신의 생명을 잇는 데 필요한 자원으로서 자리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노동은 대상화되거나 소외되어 나타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기술 발달을 근거로 하는 발전지상주의가 누구의 삶도 윤택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모든 생물권이 살아가지 못하는 환경에서는 인간도 살아갈 수 없다. 이제 환경과 인간을 분리해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는 자연스럽게 책임과 돌봄의 의무를 수반하다. 동물은 주어진 환경과 자연 그대로를 이용해서 살아가지만, 인간은 제한된 자연을 많이 확보하는 방식을 목표로 삼아 기술을 노동에 덧대어 자원을 증가시키고 가치를 창조하기 때문에 강조할 필요가 있다. 르네 지라르는 인간이 가진 폭력성의 원인을 “모방적 경쟁”으로 꼽았는데, 이는 다른 사람이 욕망하는 것을 소유하려는 심리를 뜻한다. 자연을 동식물과의 공유 경제의 원천으로 바라보지 않고 지배와 피지배의 논리로 바라볼 때 우리는 예고된 참사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나 돌아갈 것이다
   도처의 전원을 끊고
   덜컹거리는 마음의 안달을
   마음껏 등질 것이다

   (…)

   어둠을 어둡게 할 것이다
   소리에 민감하고
   냄새에 즉각 반응할 것이다
   하나하나 맛을 구별하고
   피부를 활짝 열어 놓을 것이다
   무엇보다 두 눈을 쉬게 할 것이다

   이제 일하기 위해 살지 않고
   살기 위해 일할 것이다
   생활하기 위해 생존할 것이다
   어두워지면 어두워질 것이다
― 이문재, 「도보순례」 부분.14)

   우리는 무분별하게 일하기 위해 살지 않기로 다짐한다. 이제부터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 “생활하기 위해 생존”하는 ‘돌봄’의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도처의 전원”을 끊고 “덜컹거리는 마음의 안달을/마음껏 등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어둠을 어둡게” 하고 감각을 열어 “소리에 민감하고/냄새에 즉각 반응”하고 “피부를 활짝 열어” 놓으며 “두 눈을 쉬게” 해야 한다. 이것은 ‘나’의 돌봄이 곧 자연에 대한 배려로 이어지는 일이며, 자연과의 소통을 통해 환경을 공유하는 일이 된다. 과학 기술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지금껏 써왔던 훼손의 역사 대신 보존의 역사를 써가야 한다. 인간과 자연의 구분을 허물어 더이상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라 상생의 위상학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를 사유해야 할 때이다.
   ‘돌봄’은 당연히 자연의 삶을 배려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 환경에 저지른 죄과를 폭로하는 일이기도 하다. 진정한 반성이 선행되지 않으면 그것은 동정에 그치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동정심을 감정 이입과 공감으로 나눈 바 있는데, 접촉하지 않고 이념의 도움으로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감정 이입이라면 구체적 접촉을 통해 타인의 사정을 이해하는 것을 공감이라 하였다. 둘 다 필요하겠지만, 그동안 자연에 대해 감정 이입이라는 결합적 태도를 인간이 보여왔다면 이제는 환경과 인간을 나란히 놓는 작업을 위해 공감을 높여가야 한다. 공허한 담론과 추상적 언어가 지배하는 곳에서 돌봄은 이루어질 수 없으며 회복의 역사를 시작할 수도 없다. 특별히 공감의 부재는 오늘날처럼 빈부 격차가 클 때 더욱 크게 나타났다. 과거 가난한 사람들도 여가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부자들에게 충격적이었던 것처럼,15) 환경 파괴와 인간의 윤택한 삶 사이의 격차가 심할 때 개발의 역사를 폭로하는 돌봄의 태도는 참으로 불가결하다.
   한스 요나스는 인간중심주의의 관점으로 진행되어온 전통 윤리학이 인간 이외의 생물권에 대해 소홀했다고 지적하면서,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행복을 빼앗길 때가 되었다고 경고하였다. 그의 주장처럼 우리는 돌봄을 책임의 차원에서 다루어야 한다. 이것만이 자연에 보내는 진정한 화해의 손짓이 될 것이다. ‘돌봄’의 행위는 우리가 수행한 행위의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태도이기도 하다. 환경을 돌보는 일은 우리의 생존을 돕는 일이다. 노동이 더이상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서 자리를 되찾게 해주는 일이며, 그 결과 노동이 가치를 되찾는 일이다. 동시에 우리가 공유해야 할 환경이 다시 한번 새로운 가능성의 지평을 가지게끔 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요나스의 말처럼 이제 신은 우리를 도울 수 없고, 이제 우리가 신을 도와야 한다. 그것이 우리 자신을 궁극적으로 돕는 길이기 때문이다.

염선옥

세계 곳곳에서 보고하는 이상 기후, 불안정한 노동 시장 등 모든 것들은 지나치게 단순하게 보고되고 있지만, 그것들을 모아보면 인류의 미래, 적어도 우리 후손이 살아갈 풍경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폭력적 근대화 과정으로 임계를 맞이한 환경과 노동에 ‘수치’보다는 ‘가치’의 미학을 부여하고 돌봄이 흘러다니는 풍경을 재현해보자고 촉구하고 싶다.

2022/11/29
60호

1
라르스 스벤젠, 『노동이란 무엇인가』, 안기순 옮김, 파이카, 2013, 13쪽.
2
W. 타타르키비츠, 『미학의 기본 개념사』, 손효주 옮김, 미술문화, 1999, 324쪽.
3
양해림, 『한스 요나스의 생태학적 사유 읽기』, 충남대학교출판문화원, 2013.
4
제임스 수즈먼, 『일의 역사』, 김병화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22, 12쪽.
5
이문재, 「매미 소리에 관한 명상」, 경향신문, 2017. 7. 16.
6
이문재, 「날씨가 사라지다 ―散策詩 4」, 『산책시편』, 민음사, 2007.
7
나희덕, 「미래의 구름」, 『파일명 서정시』, 창비, 2018.
8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영화 <안개 속의 풍경> 중에서.
9
나희덕, 「우리는 낙엽처럼」, 『야생사과』, 창비, 2009, 64-65쪽.
10
김혜순, 「잊힌 비행기」,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문학과지성사, 2022, 44쪽.
11
귄터 그라스, 『넙치』, 김재혁, 민음사, 2002, 20-22쪽.
12
칼 마르크스, 『경제학-철학 수고』, 김태경 옮김, 이론과 실천, 1987, 57쪽.
13
제임스 수즈먼, 앞의 책, 12쪽.
14
이문재, 「도보순례」, 『제국호텔』, 문학동네, 2004, 118-119쪽.
15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송은경 옮김, 사회평론, 2005, 22-24쪽·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