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신선도의 죽은 시간

   2020년 나는 ‘탠저블 에러’(2020. 8. 25-9. 26, d/p)라는 전시회에서 작품을 구경하다, 인식론적 충격을 주는 작품을 마주했다. 미술 작품은 내게 정동적 반응을 일으키거나 어떤 강렬한 깨달음을 주는 때가 많았다. 인식론적 충격을 주는 미술 작품을 보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랬기에 더 인상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토록 충격적인 작품은 언메이크랩의 〈신선한 돌〉(2020)이었다. 그 작품은 돌, 웹캠, 그리고 모니터 화면으로 구성된 작품이었다. 트레이 위에 여러 개의 돌이 놓여 있고 웹캠이 돌을 비추고 있으며, 웹캠에 연결된 모니터 화면에 트레이에 놓인 돌이 비치고 있었다. 그런데 모니터는 단순히 배열된 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돌의 신선도를 같이 표시하고 있었다. 돌의 신선도라니, 얼핏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은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이 작품을 마주하기 전까지 내게 신선도는 대체로 생명, 더 정확하게는 음식과 관련이 있는 개념이었다. 예를 들어 야채가 신선하다는 말은 제철 야채라는 의미와 함께 야채의 생생함이 남아 있어 상태가 괜찮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그렇기에 내가 사는 동네에는 00 The Fresh라는 상호의 슈퍼마켓이 있고, 대형 슈퍼마켓에 가면 야채와 과일이 있는 코너에 Fresh라는 문구가 적혀 있으며, 그곳을 신선 식품 코너라고 부른다. 매장뿐만 아니라 온라인 쇼핑몰에서도 신선 식품은 조리 또는 가공되지 않은 식품을 가리킨다. 그러니 신선도는 현재 매우 생생한 상태인 동시에 사람이 먹기에 적절한 제품에 붙이는 수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언메이크랩의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크나큰 혼란에 빠졌다. 돌의 신선도라니, 신선도가 도대체 무슨 개념인가. 야채의 신선도는 야채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의미일까, 아직 살아 있다는 의미일까, 서서히 죽어가고 있지만 완전히 부패하지는 않았다는 의미일까. 만약 아직 죽지 않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면, 야채를 뿌리에서 잘라내는 행위, 가지나 줄기에서 뜯어내는 행위, 혹은 야채가 자라던 토양에서 뿌리째 뽑아내는 행위(통틀어서 수확 행위)는 식물을 죽이는 행위가 아니라는 의미일까. 혹은 그 행위가 식물/생물에 상처를 주는 정도의 타격은 있어도 아직 숨이 붙어 있고 언제라도 살아날 수 있다는 의미일까. 그럼 야채는 언제 죽은 것으로 간주될까? 몇 해 전 대파의 가격이 폭등하면서 파테크라는 말이 유행했다. 대파의 뿌리만 심으면 새순이 나고 이를 적당할 때 잘라 먹으면 된다며 무척 쉬운 일이라고 각종 플랫폼의 방송에서 이를 소개했다. 그럼 대파는 언제 죽음을 맞이할까.
   나에게는 어린 시절 조부모가 살던 시골의 텃밭에서 수확한 오이를 그 자리에서 대충 씻어서 먹은 기억이 있다. 그 오이는 이제껏 내가 먹은 그 어떤 야채나 과일보다 맛있었다. 농촌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사람들이 왜 도시에서 사 먹는 야채를 두고 맛이 없다고 하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럼 그때 그 오이는 아직 죽지 않아, 아직은 숨이 남아 있어, 혹은 이제 막 생명의 상태가 중단되어, 이제 막 죽음을 마주했거나 내가 먹기 직전까지는 생명이어서 사람이 먹기에 적절한 형태였고, 그래서 최상의 신선도를 가졌었다는 뜻일까. 뿌리나 가지에서 뜯겨/잘려 이제는 더이상 생명을 유지할 수는 없지만 먹기에는 적당한 상태일 때는 생명이라는 느낌이 있다가, 사람이 먹기에 부적당한 상태가 될 때 그제야 비로소 신선도를 평가할 수 없는 죽음에 이르는 것일까. 야채의 생과 사는 인간이 먹기에 적당한가 아닌가의 경계에 위치하는가. (그럼 시래기와 같은 채소는 영원히 죽지 않는 상태인 것일까, 미라처럼 보존된 상태인 것일까.)
   이것은 비인간 동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육회를 먹는 경우, 생간을 먹는 경우, 그리고 고기를 조리해서 먹는 경우 등 많은 상황에서 고기 질이 좋아 맛있다면 고기 상태가 신선하다고 표현한다. 실제 고기 역시 신선 식품의 범주에 포함된다. 야채에서 한 질문은 고기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데, 반복하지 말고 새로운 질문만 추가해보자. 육류의 신선도는 도살된 이후, 혹은 생명을 박탈당한 이후의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가를 측정하는 표현일까. 동위 원소 시간 측정을 통해 다양한 자연이나 사물의 시간을 가늠할 수 있듯, 신선도는 죽음에서 가깝거나 멀어진 정도를 측정하는 표현일까. 도살된 시간, 생명을 박탈당한 시간에 가까울수록, 즉 살생의 순간에 가까울수록 신선하고 그 순간에서 멀어질수록 신선도가 떨어지는 것일까.
   인간이 비인간에게 가하는 폭력을 오래 고민한 나에게 언메이크랩의 작품 〈신선한 돌〉은 신선하다는 표현, 생명이라는 표현이 갖는 함의를 근본적으로 다시 질문하도록 했다. 신선함은 생명력을 측정하는 용어일까, 죽음 이후의 상태 혹은 죽음 이후의 시간을 측정하는 용어일까. 적어도 많은 경우, 나와 함께 사는 고양이에게 혹은 길에서 신나게 산책하고 있는 강아지에게 “귀엽다”, “사랑받으며 살고 있네”와 같은 말은 해도 “고녀석 참 신선하네”라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신선도는 더욱 명백하게 죽음의 살아 있는 상태를 지칭한다. 그럼에도 〈신선한 돌〉을 보기 전까지 이와 관련한 고민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끄러웠다.
   그런데 언메이크랩의 작품은 앞서 설명했고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돌의 신선도를 전시했다. 흔히 돌은 무생물로 분류되며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무생물은 “생물이 아닌 물건. 세포로 이루어지지 않은 돌, 물, 흙 따위를 이른다.”고 정의된다. 즉 무생물은 생명력이나 생명 활동이 없는 사물, 죽음이라는 사건을 겪을 수 없는 물건을 지칭한다. 그렇기에 통상적으로 무생물의 신선도를 측정하는 일은 일상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야채와 비인간 동물의 고기의 경우, 채식 행위를 둘러싼 논의에서 무엇을 먹을 것인가, 어떤 범주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가를 분류할 때 중요한 논쟁점이 된다. 하지만 이런 논쟁에서 무생물은 질문과 논쟁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 돌을 먹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돌은 애당초 생명이 없기에 고통을 못 느끼고 감정이 없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고통과 감정은 채식을 둘러싼 논쟁에서 중요한 기준이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생명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 감정이 있는가를 둘러싼 논쟁은 게속되었고 그 결과 2021년 영국은 동물 복지의 일환으로 문어, 갑각류 등이 고통을 느낀다는 이유로 식용을 위해 죽이는 방법에 대한 논의를 본격화했다.1)
   하지만 언메이크랩의 작품은 돌의 신선도를 측정했고 그 숫자는 계속해서 초 단위로 바뀌고 있었다. 마치 트레이 위에 올려져 있는 돌이 현재 살아 숨쉬고 있는 것 같았다. 신선도가 죽음 이후의 시간을 측정하는 개념이라면, 돌은 생명이 있으며 돌이 머물던 곳에서 멀어질 때부터, 인간이 임의로 채집해서 뒹굴던 위치에서 벗어날 때부터 죽어가는 것일까. 마치 원양 어선으로 어류를 잡는 것처럼. 만약 그렇다면 이제까지 논하던 생명의 기준은 어떻게 다시 상상되어야 할까. 혹은 무엇이 생명이고 생명력이며 생명의 유무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언메이크랩이 작품을 구성한 의도가 무엇이건, 나는 <신선한 돌>을 보며 생명, 생물, 신선도의 개념, 경계, 그리고 그 범위를 둘러싼 기존 나의 인식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각각의 한계는 어떤 식으로 설정되어 있는가. 아니 나의 인식론적 한계는 어디까지이며, 그간 무엇이 내게 사유할만하고 논의할만한 가치 있는 생명, 생물로 다루어졌는가를 질문하도록 했다. 오랜 시간 퀴어 운동에 참여했던 나는 왜 이 경계를 매우 좁게 두고 고민했나.

   
02 퀴어의 신선도

   언메이크랩의 작품을 통해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 신선도에 내포된 죽음의 시간을 고민했지만, 사실 이 글은 언메이크랩의 작품을 분석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또한 언메이크랩이 작품의 기획 의도를 설명하는 글에 따르면 나의 해석은 그 의도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언메이크랩의 작품 기획 의도 혹은 작품 설명에 적힌 “[인공지능] 기술이 약속하는 낙관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오히려 '돌걸음'과 같이, 배제되는 것들을 지각하는 고통이, 다른 걸음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묻는다.”는 문구가 이 글의 논의와 상당히 연결된다는 생각에 고민했다. 채식과 먹는다는 것의 의미를 고민해온 시간이 30년 정도 되었다. 또한 20년 가까이 트랜스젠더퀴어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해왔다. 오래 활동하고 고민한 두 운동이 “배제되는 것들을 지각하는 고통”, “다른 걸음”이라는 문구에 나란히 포개지다는 것을 깨달았다.
   1980년대 미국 퀴어 운동이 HIV/에이즈가 확산되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이것은 곧장 생명의 위계질서의 폭력성의 또다른 측면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동료, 친구, 파트너 등 지인의 질병은 언제나 죽음 공포와 연결되는 사건이었고 자기 자신의 생활 양식 또한 죽음을 둘러싼 공포를 마주하는 과정으로 변했다. 이 변화는 친밀성의 성격을 상당히 바꿨다. 흔히 친밀한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함께 할 거야!’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관계로 인해 진짜로 죽을 수 있다는 각오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에이즈가 위기로, 위협으로 인지되면서 퀴어 친밀성의 성격은 죽음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으로 다시 이해되었다. 이것은 한편으로 에이즈에 대한 공포를 일으켜 퀴어 커뮤니티에 참여하기를 꺼리도록 만들었고, 다른 한편으로 에이즈를 개인의 위기로 내모는 사회적 태도에 대한 강한 비판을 제기하도록 했다.
   여기에는 미국 정부의 태도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당시 미국 정부는 에이즈를 게이 관련 질병이라 부르며 신의 저주, 천형, 문란한/잘못된 행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라는 식의 비판에 동조했다. 한 사회의 시민이, 국민이, 혹은 (시민권이나 영주권이 없다고 해도) 한 명의 사람이 죽어가고 있음에도 미국 정부는 개인을 비난하며 개인에게 무한 책임을 지웠다. 정부의 이런 태도는 시민 사회의 강력한 반발을 야기하기도 했지만, 사회적 분위기를 이끌었고 논란이 있을 때마다 작동하는 사회적 기준으로 자리잡아다. 그로인해 HIV/에이즈에 감염되었건 아니건 상관없이 퀴어라면 혹은 그와 관련될 가능성이 있기만 하다면 필요한 사회 서비스, 의료 서비스를 찾기 어려워졌다. 이것은 지금 한국의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HIV/에이즈에 대한 근거 없는 공포, 의도적 무지는 마땅히 누구에게나 필요한 치료를 지원해야하는 의료 서비스를 찾기 어렵게 했고, 병원은 부당한 태도임에도 당당하게 HIV/에이즈 감염인 치료를 거부하는 결과를 낳았다. 1980년대 초 처음 HIV/에이즈가 발견된 뒤로 40년이 지난 지금은 감염되면 반드시 죽는 질병이 아니라 관리 가능한 질병이 되었다. 그럼에도 의료적으로 적절한 판단을 하는 의사를 만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나의 행동 양식이 사회적 지배 규범의 상상력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게 필요한 치료나 조치를 못 받을 뿐만 아니라 죽어 마땅한 존재가 된다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슬프게도 이성애 규범성이 강고하게 작동하고 이것이 종교적 언어와 만나는 일이 빈번한 사회에서 퀴어를 비롯한 비규범적 존재는 죽어 마땅한 존재, 신의 천벌을 받을 존재로 비난받는다. 더 슬픈 것은 이것이 단순히 사회적 폭력에 대한 비유나 은유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데 있다. 많은 트랜스젠더퀴어는 자신의 정체성을 둘러싼 사회적 편견, 몰이해, 혹은 의도적 무지로 인해, 갈만한 병원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한국에는 성소수자도 편하게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이 몇 군데 있는데, 서울 은평구에 있는 병원의 의사는 제주도에서도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트랜스젠더퀴어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2) 1년에 한 번 퀴어문화축제가 열릴 때면 전국 각지에서 퀴어 혐오 세력이 퀴어는 죄악이다, 퀴어로 인해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국가가 무너진다고 주장하며 퀴어를 이 사회의 불필요한 비용, 없어져야 할 존재, 도려내서 버려야 할 존재라고 비난하기 위해 몰려온다. 이런 표현이 적힌 문구를 공공장소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은 퀴어를 비롯한 비규범적 존재를 향한 사회적 적대가 용인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승인되고 있다는 뜻이다.
   살아있을 때 조차 생명의 위계, 사회적 차별을 겪는데 죽어서라고 다르겠는가. 이와 관련해서는 주디스 버틀러나 더글러스 크림프 같이 많은 퀴어 페미니스트 연구자, 에이즈 활동가 등이 다각도로 지적한 바 있다. 특히 크림프는 “프로이트의 애도는 근본적으로 정상성을 특권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애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190쪽)라고 지적하며 에이즈 연구자 사이먼 와트니의 경험을 인용한다.

   브루노의 장례식은 그의 고향인 런던 교외에 있는 한 노르만양식의 교회에서 열렸다. 어느 누구도 에이즈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브루로가 무슨 병 때문에 죽었는지 묻거나 답하지 않았다. (…) 우리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 중 브루노와 가장 가까운 이들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슬픔을 억압해야 했다. 그들은 우리가 우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 더글러스 크림프. 『애도와 투쟁: 에이즈와 퀴어 정치학에 관한 에세이들』, 김수연 옮김, 현실문화, 2021.

   많은 퀴어의 유족은 고인이 퀴어라는 사실을 숨기고 그래서 때로 그 죽음이 퀴어 범주와 관련이 있을 때(때론 관련이 없을 때에도) 이 사실을 밝히기를 거부한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 자체는 애도의 대상이 되지만, 유족이 원하는 특정한 형태의 삶만 애도되고 유족이 원하지 않는 퀴어의 삶은 영원히 은폐된다(제이콥 헤일 1998). 퀴어의 죽음과 유족과 지인의 사후 해석을 둘러싼 논쟁을 다룬 제이콥 헤일은 고인은 살아남은 지인의 해석에 따라 다양한 모습과 정체성을 갖게 된다고 지적했다. 유족이 이성애 가족 규범에 맞춰 고인의 삶을 기억하기를 원하면서 고인의 퀴어와 관련된 삶은 완전히 삭제된다고 비판한 바 있다(Hale 1998). 헤일의 지적은 퀴어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이들에게 체화된 지식이기도 하다.
   부고를 듣는 순간, 남겨진 지인들은 고민한다. 고인의 장례식에 참여해도 괜찮을까, 고인의 유족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라고. 실제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공유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질문도 이것이다. 슬픔과 애도보다 참여 여부를 먼저 질문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슬픔, 애도, 조문에도 위계와 자격과 유족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그래서 유족이 동의를 했다면 장례식장에서 고인을 애도하고 장례식장의 자리를 채우며 고인의 삶을 공유할 수 있다. 하지만 유족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고인의 퀴어 동료가 장례식장에 나타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별도의 추모식을 마련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슬픔은 그 자체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라, 사회적 승인과 가치 있는 인간의 삶을 판단하는 기준이자 규범이다. 슬픔은 시민권, 성원권, 사회적 올바름을 승인하는 감정이다.
   슬픔이 사회적 질서를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라는 말은, 애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건의 위계를 만든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저항, 기존 규범을 바꾸는 역동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2020년 한국 사회에서 여러 명의 트랜스젠더퀴어 혹은 퀴어가 세상을 떠나면서 구축된 정동이기도 하다. 작가로 일하던 사람, 군인으로 근무하다 강제전역된 사람, 고인을 애도하는 활동에 적극 참여했던 사람, 채식과 퀴어의 관계를 고민하던 사람들. 이들은 살아 있을 때 많은 퀴어에게 혹은 퀴어 의제를 고민하고 지지하는 이들에게 다양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강제 전역된 변희수씨의 경우,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부조리에 맞서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표현했고, 너무도 유명했기에 부고는 더 큰 충격을 남겼다. 그들은 모두 원하던 직장에서, 원하던 직무를 맡을 수 없었던 노동자였고, 성소수자 노동자를 탄압하는 사회에 저항하던 활동가였고, 그러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삶의 성취를 만들어가던 친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한국 사회의 트랜스젠더퀴어가 혹은 퀴어가 처한 노동 조건 그 자체였고 삶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잇따른 부고에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등을 축으로 퀴어 단체, 페미니스트 단체, 인권 단체는 변희수씨를 비롯하여 세상을 떠난 여러 퀴어를 애도하는 행사를 마련했다. 변희수씨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지났을 때 1주기 추모제가 열리기도 했다. 다양한 행사와 추모제에 참여했던 나는 애도하기 위해 모인 이들의 슬픔이란 감정에 덩어리처럼 질감이 있다고 느꼈다. 물론 그 질감은 온전히 나의 착각이고 내 감각적, 감정적 환각 같은 것일 테다. 하지만 슬픔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야기하는 동시에 분노로, 변혁의 힘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분노의 활용·인종차별주의에 대응하는 여성들」을 쓴 오드리 로드는 내가 논하는 슬픔이 아닌 분노를 다뤘지만, 이 글에서, 그리고 이 글이 실린 책 『시스터 아웃사이더』3) 전체에서 감정을 정치화하는 작업을 했다. 그러며 “분노를 외면하는 것은, 분노를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통찰을 외면하는 것이며, 이미 알고 있는 구도, 즉 치명적이면서도 편안하게 느껴지는 친숙한 구도만을 수용하겠다는 것입니다”(225쪽)라고 말했다. 이 문장에서 나는 분노를 슬픔으로 바꿀 수 있다고 고민한다. 슬픔을 외면하는 것은, 슬픔을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통찰을 외면하는 것이며, 이미 알고 있는 구도, 즉 치명적이면서도 편안하게 느껴지는 친숙한 구도만을 수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실제 연달아 부고를 들었던 2020년, 나는 한동안 무력했고 ‘이 모든 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라는 생각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다 여러 단체에서 마련한 행사, 추모제 등에 참가하고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들을 보면서 슬픔의 사회적 구조를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무력하게 ‘친숙한 구도’를 수용할 수도 있지만, 더는 이 세상에 내가 있을 자리가 없다는 절망감으로 세상을 떠나는 이가 없도록 뭐라도 해야겠다는 변혁. 감정의 활용. 사회적 적의로 인해, 지배 규범적 질서로 인해 생명과 삶이 박탈되는 상황에서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이것이 감정의 질감을 만들었고, 그날 내가 느낀 슬픔의 덩어리였으며, 뭐라도 해야겠다고 느낀 힘이었다.
   그러니 슬픔이란 감정은 질서 그 자체인 동시에 질서를 위협하는 힘이며, 다른 말로 생명에도 죽음에도 위계질서가 있음을 강하게 주장하는 감정이다. 그 주장은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인 동시에 그 질서를 문제 삼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고통을 느끼는 존재는 보호해야 하고, 고통을 느끼지 않는 존재는 보호할 필요가 없다면, 이 사회는 퀴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퀴어를 향한 사회적 추방 의지, 끊임없이 부정하고 추방하고자 하는 정치권의 발언에서 나타나는 퀴어를 향한 태도를 보자면 퀴어는 감정이 있는 존재가 아닌 것 같다. 그들은 퀴어를 고통, 슬픔을 느끼는 사람으로 인식하기보다 사물, 무생물, 어디선가 들어는 봤지만 실제로 마주한 적은 없는 유니콘으로 인식한다. 이럴 때 퀴어에게도 신선도가 있을까 궁금해진다. 퀴어는 생명권이 박탈당하면서 신선도를 측정할 수 있는 무언가가 되는 것일까, 퀴어는 인간으로 아예 인식되지 않고 사물과도 같은 무언가로 취급될 때가 있다는 점에서 신선한 돌과 같은 무언가일까. 배제된 존재임을 자각하도록, 배제의 폭력성을 계속해서 상기하도록 하나의 신호로써 신선도가 측정되고 있는 건 아닐까.

   
03 죽음의 삶과 삶의 죽음

   언메이크랩의 작품 〈신선한 돌〉을 보며 신선도 개념을 새롭게 고민하면서, 신선한 돌은 퀴어와 같다는 고민을 했다. 퀴어로 죽는 것이나 퀴어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에 유가족의 승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는 유가족의 승인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그것으로 퀴어의 사회적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퀴어는 사회로부터 결정적인 무언가를 박탈당한 상태다. 박탈은 익히 알려져 있듯, 주디스 버틀러와 아테나 아타나시오우가 대담을 통해 논한 개념이다. 버틀러와 아타나시오우는 박탈을 연구 방법론으로, 인식론의 토대로, 관계의 윤리학으로, 수행성의 정치학으로 다양하게 다룬다. 이 대담 과정에서 아타나시오우는 “어떤 종류의 인간이 비인간 혹은 인간보다 못한 것으로 구성되는가?”(61쪽)를 질문하며 박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박탈은 주체가 규범에 대해 맺고 있는 모종의 관계와 관련 (…) 주체가 상처를 주는 호명과 불가능한 정념을 취하고 재의미화함으로써 거듭나게 되는 양상과 관련 (…) 우리는 박탈의 체계 속으로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어떤 것을 지적해낼 필요가 있다.
― 주디스 버틀러·아테나 아타나시오우, 『박탈: 정치적인 것에 있어서의 수행성에 관한 대화』, 김응산 옮김, 자음과모음, 2016.


   토지, 환경, 그리고 신체 자체가 박탈된 상태는 지배 규범의 이분법에 다시 질문하도록 한다. 또한 지배 질서가 퀴어를, 무생물을 호명하고 규정하는 방식에 동화하는 동시에 대항하며 계속해서 그 의미를 확장시켜나간다. 돌의 신선도를 측정할 수 있다면 생명은 도대체 무엇인가, 혹은 슬픔에도 위계가 있다면 인간의 죽음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박탈의 의미를 확장하면 돌과 인간 사이의 경계는 어디인가. 어디서 삶과 죽음,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가 발생하는가.
   이 글에서 나는 계속해서 질문을 만들고 있는데, 이것은 이 글을 청탁받은 시기에서 원고를 마감해야 하는 시기 사이, 한국 사회에 발생한 다양한 죽음과도 관련이 있다. 처음 원고를 청탁받았을 때만 해도 나는 2020년에 내가 참가한 여러 장례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그해 내가 동료의 부고를 듣고 찾아간 장례식이 앞서 언급한 것 말고도 더 있다. 어떤 부고는 연달아 들었는데 오늘 한 지인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동료를, 다음날 다른 지인의 장례식장에서 다시 만난 적도 있다. 이 죽음들, 장례식장에서 계속해서 동료를 만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1년이 더 지난 지금도 나는 그때 그 감정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2022년 9월에는 SPC 그룹의 계열사 SPL의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세상을 떠났다. 이 부고는 파리바게뜨를 비롯한 SPC 계열사 제품의 불매 운동을 불러왔다. 그리고 다시 10월 29일에는 10.29 참사(이태원에서 발생한 참사) 소식을 들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죽음, 참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죽음은 온전히 애도되기보다 때로 참혹함을 야기하고, 어떤 죽음은 산업 재해임에도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되고, 어떤 죽음은 정당 정치의 논쟁이 발생하는 장을 형성한다.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는 차이가 없지만 죽음은 누구의 죽음인가, 어떤 죽음인가에 따라 매우 다른 관심과 논쟁과 의미를 생성한다. 이럴 때 죽음과 관련해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사실 이것은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고 훨씬 더 많은 질문과 질문과 질문을 필요로 한다. 이 많은 죽음은 그 의미가 서로 얽혀 있고 이런 어려움이 〈신선한 돌〉을 다시 고민하도록 했다. 그리고 죽음의 복잡한 층위, 의미 구성을 논하다보면, 오히려 생명에 관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언제 죽음이 시작되는가.
   생명에 대해 질문한다면서 죽음의 시작점을 묻는 이 방식이 어찌 보면 매우 이상하겠지만 <신선한 돌>을 떠올리면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이 어색하지 않은 떠올림이 퀴어의 박탈당한 위치, 노동자가 박탈당한 위치, 그리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참사 혹은 더 많은 박탈들에 더 잘 질문할 수 있도록 하지 않을까. 신선도에 깃들어 있는 죽음과 죽음에 깃들어 있는 삶은 사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살풍경이기 때문이다. 위계가 있다, 차별이 있다, 부당함과 억울함이 있다고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경계가 섞이는 지점을 더 말하기 위해, 더 많은 신선한 돌이 논의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박탈된 존재의 삶을 더 적극적으로 말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참고문헌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조현준 옮김, 문학동네, 2015.
주디스 버틀러·아테나 아타나시오우, 『박탈: 정치적인 것에 있어서의 수행성에 관한 대화』, 김응산 옮김, 자음과모음, 2016.
더글러스 클림프, 『애도와 투쟁: 에이즈와 퀴어 정치학에 관한 에세이들』, 김수연 옮김, 현실문화, 2021.
오드리 로드, 『시스터 아웃사이더』, 주해연·박미선 옮김, 후마니타스, 2018.
Hale, C. Jacob. "Consuming the Living, Dis(re)membering the Dead in the Butch/FTM Borderlands." GLQ: A Journal Of Lesbian And Gay Studies 4.2 (1998): 311-348.

* 원고에서 언급된 인물 중 한 명이 사후, 성폭력 가해자로 고발되었습니다. 부적절한 원고로 인해 불편함과 괴로움을 느끼고 상처를 받은 분들께 사과드리며, 해당 내용을 수정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저의 잘못으로 큰 상처를 입고 힘들어하고 계신 피해자분께 깊이 사과드립니다.


※ 작가 요청에 의해 작품 내 일부 문장 및 단어를 수정하였음을 밝힙니다. (2022. 12. 03)


루인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와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에서 활동하고 있다. 퀴어의 삶을 구성하는 방법으로써의 폭력과 죽음을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늘 어렵다. 많은 고민을 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든 언메이크랩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2022/11/29
60호

1
이정아, ‘문어-게, 산 채로 요리하지 마세요’, 동아사이언스, 2021.11.26. 링크 바로가기
2
‘"트랜스젠더, 성소수자, 이주여성들의 건강권을 책임지는 곳" 살림의원 추혜인원장’, YTN, 2021.10.19. 링크 바로가기
3
오드리 로드, 『시스터 아웃사이더』, 주해연·박미선 옮김, 후마니타스,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