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교환’에서는 문학과 타 장르 필자가 하나의 주제를 각각 비평합니다. 문학, 영화, 미술, 음악, 대중문화 등 각 영역 내의 경향성을 읽고, 모아보면서, 동시대 예술의 흐름을 살펴봅니다.
64호에서는 ‘화자’라는 주제로 동시대 한국 문학과 영화의 인물은 누구인지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문학과 영화에서 누가 등장하는가, 누가 발화하는가”는 곧 지금의 한국 문학과 영화가 어떤 이들의 삶에 관심이 있는가, 어떤 목소리를 담고자 하는가, 누가 주체가 되느냐 등의 문제와 결부됩니다. 작품 속 인물들을 돌이켜봄으로써 동시대 예술이 향하는 방향과 징후로만 드러나는 문제를 포착하고자 합니다.


1.

이 글은 동시대 한국문학의 화자가 누구인지를 비판적으로 톺아보고자 하는 시도에서 작성되었다. 한국문학은 2015년을 전후로 한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 퀴어, 비건 등 사회의 지배적인 규범에 의해 차별을 경험하거나 비정상적인 존재로 낙인찍힌 이들을 꾸준히 문학의 화자로 내세웠다. 이에 대해서는 웹진 《비유》 34호(2020. 10)에 게재된 「외연의 확장 혹은,」 에서 자세히 다룬 바 있다.
  수상자 전원이 여성으로 구성된 2023년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의 심사평을 읽노라면 2023년 현재에도 동시대 한국문학이 소수자 재현의 정치성에서 문학성을 발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성 청년’이 한 덩어리의 단일한 존재가 아님을 차갑게 꿰뚫”으며 “그 사회관계적 조건을 살피고, 새롭게 파생되는 질문을 독자 앞에 남기는 것”은 “문학이 할 역할”(정이현)으로서 제시되며 성혜령의 「버섯 농장」을 시상대에 올렸다. 정선임의 「요카타」는 “여성 가족 구성원들이 집을 떠나고 돌아오길 반복하며 자신의 삶을 일구어온 이야기”, 그리고 “여성들의 생존”(오은교)을 성공적으로 다뤄냈다는 점에서 고평가되었다. 현호정의 「연필 샌드위치」 역시 “여성들의 역사”(강화길)를 주술적인 목소리로 다룬 것으로 독해되었다.
  동시대 한국문학의 화자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무엇을 ‘동시대’라 부를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화자’라 부를 것인지에 대한 간단한 합의가 필요할 것 같다. 왜냐하면 ‘동시대’ 그리고 ‘화자’라는 단어부터가 이미 논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나는 ‘동시대’를 비평적인 목소리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것으로 본다.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동시대로 간주할 것인지, 그 기준은 한없이 임의적이다. 무엇보다 오늘날 예술비평에서 동시대라는 말은 기간을 특정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마치 형용사처럼 사용되며 무엇이 동시대여야 하는지를 반복적으로 자가 정의한다(예컨대, ‘동시대적인 것이 동시대이다’ 혹은 ‘동시대는 동시대적이다’).
  웹진 《연극in》의 좌담 ‘동시대 연극비평을 이야기하다’에서 비평가 하라는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 창작자 스스로 실험적이고 재미있는 시도를 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 혹은 ‘지금, 여기’의 화두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판단될 때”1) “동시대성”을 발견한다고 밝혔다. 같은 좌담에서 비평가 팔도는 “비평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동시대적이라는 건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비판적’이라는 형용사처럼 쓰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민조는 동시대가 ‘이전과는 다른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면서 동시대가 “당위의 개념”으로 쓰이는 케이스를 언급한다. 이 좌담에서 엿볼 수 있듯 동시대는 임의적인 대상들에 사후적으로 덧붙여지는 매우 비평적인 단어임과 동시에 매번 당위적인 주장을 내포하고 주장되는 단어이다. 누군가 ‘동시대적인 것’이라는 문구를 ‘소수자 정치를 실천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면 그 사람은 ‘소수자 정치를 실천하는 것을 동시대적인 것으로 불러야 한다’ 혹은 ‘(이전과는 다른 것, 혹은 이전과는 달라야 하는 것으로서) 동시대가 소수자 정치의 실천을 포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편 ‘화자(narrator)’는 서사(narrative) 문학을 이끌어가는 이로서 폭넓게 정의하고자 한다. 일상 언어에서 ‘화자’는 ‘말하는 이’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나 이를 문학 용어로서의 화자에 그대로 적용하여 이해할 경우에는 1인칭 화자만을 화자로 받아들이게 된다. 화자는 작가와는 분리되는 개념이면서도 ‘작가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화자까지를 포함할 수 있다. ‘화자’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러한 합의를 거친다면 ‘동시대 한국문학의 화자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동시대 한국문학은 누구의 입장에서 서사를 전개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보다 정확해질 수 있다.


2.

동시대 한국문학을 1년여가량 읽지 않은 입장에서 비평을 쓰자니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왜 더이상 동시대 한국문학을 읽지 않게 되었는가? 그 전에, ‘동시대 한국문학’이란 무엇인가? 닳고 닳은 대학교 수업에서나 수백 혹은 수천만 번 반복되었을 이 질문에는 쉽사리 대답하기 꺼려지는 수많은 문제가 포진해 있다. ‘한국’이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리하여 ‘동시대 한국문학’이란 무엇인가?’ 등등…… 나는 이 모든 귀찮은 문제들을 건너뛰고 본고에서 동시대 한국문학을 논의하기 쉽게끔 협의(狹義)의 정의를 마련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 동시대 한국문학이란 문예지에 게재되었다가 그것을 하나의 작품집으로 묶는 일련의 공정을 거쳐 독자에게 도달하는 작품들의 집합을 뜻한다(그 작품 중 일부 혹은 대다수가 문예지에 게재되지 않았을 수 있지만, 적어도 한두 작품은 문예지에 게재된 적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작품들의 집합이 너무나 협의이기에 동의하기 어렵다면 ‘그 작품들의 집합과 그 안팎’ 정도로 의미를 조금 넓혀보아도 좋겠다. 이때의 문예지란 “국제표준도서번호(ISBN) 부여, 결호 없이 3년 이상 발간된 (문학)월간지, 또는 5년 이상 결호 없이 발간된 격월간·계간·반연간 종합 문예지/잡지, 장르별 문예지, 혹은 3년 이상 된 일간지 및 30년 이상 된 문학전문 주간지” 중 하나 이상의 조건을 만족하는 잡지를 의미한다. 이는 예술인경력정보시스템의 예술활동증명 기준2)을 따른 것이다. 아무리 편협한 기준이라 한들 이 기준을 만족하지 못한다면 국가로부터 예술인이라는 인정조차 받지 못하는 셈이니 편협한 그대로 한국문학의 현 상황을 잘 보여준다고 해도 좋겠다. 앞서 ‘동시대’를 ‘비평적인 목소리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것’으로 정의한바, 동시대 한국문학이 되기 위해 필요한 일련의 절차는 오늘날 비평적 목소리가 한국문학을 동시대적인 것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겠다. 이에 대해 국가의 규범과 ‘동시대 한국문학’을 구성하는 비평의 문화는 다르며, 오히려 ‘동시대 한국문학’을 구성하는 문화야말로 국가의 규범에 저항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변명도 가능하겠으나, 현실적으로 든든한 문예지를 거치지 않고 우리에게 알려지는 문학인이 몇이나 되겠는가? 또한 특정 작품을 ‘문예지에 게재’하는 것이 비평적 작업이라고 할 때, 국가의 규범은 얼마나 이미 동시대 한국문학 비평의 기준에 의존해 있는가?
  나는 한국문학의 꽤 성실한 독자였다. 이를 밝히는 이유는 ‘한국문학을 왜 읽지 않는가’가 아니라 한국문학을 ‘왜’ 읽지 않게 ‘되었는가’라는 나의 문제 설정에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서다. 또한, 내가 한국문학을 읽지 않게 된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에 현재의 한국문학 현장에 열정적인 비판을 가할 만큼의 충분한 지식도 없을뿐더러 그런 위치에 서고 싶지도 않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물론 나는 언제나, 그 현장이 어떤 현장이든지, 현장을 떠나지 않고 분투하는 이들을 응원하고 지지한다. 한국문학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글을 쓰며 살아가는 이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이 글을 쓰고 싶다.
  한때 내가 한국문학을 따라 읽는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출판사를 통해 대대적으로 홍보되는 ‘스타 작가’ 혹은 ‘유망주’들의 작품을 구입해서 읽기, 굵직한 문학 출판사의 계간지나 가끔은 작은 예술 웹진에 업로드되는 작품들을 읽기. 2022년 3월부터 2022년 9월까지는 두 계절 가까이 ‘문예지 읽기 모임’을 운영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3) 그러나 나는 2022년의 가을 어느 날 이 열정을 모두 잃고 한국문학을 손에서 놓아버리고 말았다. 정확히 2015년의 페미니즘 리부트와 맞물린 시점인 이십대 초반부터 ‘한국문학’의 ‘동시대적 열정’에 발맞추어 ‘한국문학’을 따라 읽기 시작했으며 2020년 《문장웹진》에 발표한 ‘남자 없는 여자들’이라는 작품으로 평론활동까지 시작한 나는 어째서 ‘한국문학’ 내의 퀴어/페미니즘에 대한 지지와 옹호가 절정이던 시기에 한국문학에 대한 열의를 전부 상실하게 되었을까? 한국문학에 퀴어/여성 화자가 적극적으로 등장하던 바로 그 시기에 말이다.


3.

동시대 한국문학의 화자를 질문하는 이 글은 비평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동시대가 비평의 언어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단어이며, 한국문학 역시 비평적 절차를 거쳐 동시대 한국문학으로서 받아들여진다고 할 때 이는 당연한 귀결이다. 아무도 비평을 읽지 않으며, 비평에는 힘이 없다고 주장하는 뭇사람들의 의견에 따르면 동시대 한국문학의 화자가 비평과 연관될 수 있다는 입장은 일견 비평에 대한 과대평가처럼 보일 것이다.
  한국문학에 신경숙 표절 사태, 김봉곤 사적 대화 무단 인용 사태와 같은 사건들이 발생할 때마다 문제적 상황의 원인으로 겨냥되면서 동시에 그 화살을 피할 수 있는 양가적 위치에 있던 것은 바로 비평이었다. 확실히 비평은 작품 없이 존속할 수 없으며 사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특정한 문제적 작품에 대응하는 원인으로 지목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문예지에 게재되었다가 그것을 하나의 작품집으로 묶는 일련의 공정을 거쳐 독자에게 도달하게 되는 작품들(그 작품 중 일부, 혹은 대다수가 문예지에 게재되지 않았을 수 있지만 적어도 한두 작품은 문예지에 게재된 적이 있어야 할 것이다)의 집합’이라는 한국문학의 임시적 정의를 따르자면, 비평은 한국문학을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비평/가가 한국문학을 만드는 제도에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비평가가 얼마나 적은 돈을 버는지, 그리고 얼마나 적은 사람이 비평을 읽는지와 무관하다.
  비평이 그 독자에 의해 힘을 얻게 된다는 생각은 비평에 독자가 없기 때문에 힘이 없다는 논리와 긴밀히 맞붙어 있다. 여러 문학평론가가 지금은 삭제된 SNS 게시글에서 ‘아무도 안 읽는, 돈도 못 버는 문학비평에 대체 무슨 힘이 있단 말인가?’를 호소하던 장면들이 떠오르지만 이미 모두 삭제된 마당에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겠다. 문학평론계 밖에서도 사정은 비슷해 보인다. 함연선의 ‘데굴데굴 패스연습 (8)’에서는 ‘2023 〈Critical Insight – 비평의 생성, 비평의 체현〉’ 행사의 토론에서 있었던 안소연 미술평론가의 발언이 다음과 같이 인용된다.

“2023년에 비평가는 ‘유령’이다.”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쓰는 것. [글을] 낳자마자 화석화된다. 글의 독자는 쓰는 사람 혼자뿐.” “가장 큰 문제는 기금이며 [그 속에서] 비평가는 최하-하청업자.”4)

함연선은 ‘비평가가 유령’이며 그 이유는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쓰기 때문’이라는 안소연의 발언에 동의한다. 그리고 “‘유령이 되는 방식’이 서로 조금 다를 뿐 각 예술 장르에서 비평 혹은 비평가가 유령이라는 사실 자체는 비슷하지 않을까”라는 고민을 털어놓는다. 나는 이 문장을 ‘비평이 자신을 존속시키는 방식이 서로 조금 다를 뿐 예술 장르에서 비평 혹은 비평가가 자신을 거울이 아닌 유리창에 비춰보며 유령이라고 착각한다는 사실 자체는 비슷하지 않을까’라는 문장으로 바꿔 써보고 싶다.
  어떤 작품이 문예지에 실릴지를 결정하는 것, 어떤 작품이 문학상을 받을지를 심사하는 것은 문학 제도 내에서 비평의 아주 주요한 기능 중 하나다. 문예지에 게재되었던 작품들, 혹은 문예지에 자기 작품을 게재한 바 있는 작가의 작품들, 혹은 문학상을 받은 작품들이 책으로 묶여 독자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는 점에서 비평이 수행하는 추천·심사의 기능은 가히 한국문학의 흐름을 만들어나가는 큰 힘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평가가 쓰는 글만이 비평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대형 문예지의 편집위원 및 문학상의 심사위원으로 비평가가 다수 포진해 있는 상황에 대한 눈 가리고 아웅일 뿐만 아니라 추천과 심사 역시 비평적인 작업을 필요로 하는, 비평/가를 존속시키는, 비평 제도의 큰 축이라는 사실에 대한 외면에 지나지 않는다. 비평가가 글만 쓰는 것이 아니라 추천·심사를 통해 예술계의 여러 제도를 존속시킨다는 점은 문학계 밖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제도에서 비평의 역할을 떠나 비평문 내부로 관점을 이동시켰을 때도 비평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문학의 흐름을 일정 부분 먼저 결정짓고 있다는 주장은 여전히 가능하다. 비평의 흐름이 마치 문학의 (잘못된) 흐름에 대한 정답지처럼 한 발씩 앞서 있기 때문이다. 비평은 동시대 한국문학의 화자가 누구일 것이며 누구여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암시한다.
  한국문학에서 퀴어문학의 열풍은 2016년에 「Auto」로 등단한 김봉곤,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로 등단한 박상영이 크게 주목받으면서 무척 거세졌다. 그리고 비평은 퀴어문학에 주목함과 동시에 ‘오토픽션’이라는 새로운 소설의 문법에도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지금 돌이켜보았을 때 흥미로운 것은 당시 김봉곤과 박상영의 소설은 크게 달랐으며, ‘오토픽션’의 정의에 부합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은 김봉곤의 소설에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을 ‘퀴어문학’으로 묶으며 동시대 퀴어문학을 일갈하는 하나의 완결된 비평문을 쓰고 싶었던 비평가들에게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게이로 커밍아웃하며 작품 속 인물과 작가 자신을 동일시할 여지를 남겨두었던 사람은 김봉곤뿐이었다. 게다가 김봉곤의 소설에는 작가의 자전적 요소를 떠올리게 할 만한 예술학과 전공생과 같은 인물이 종종 등장하였으나 박상영의 소설 속 인물들에는 게이가 종종 등장한다는 것 말고 별다른 공통점이 없었다. 박상영의 첫 단행본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는 표제작과 「중국산 모조 비아그라와 제제, 어디에도 고이지 못하는 소변에 대한 짧은 농담」에 게이 인물을 등장시키기는 하지만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 「조의 방」 「햄릿 어떠세요?」 그리고 「세라믹」과 같은 나머지 작품들에는 인물이 게이라는 사실이 부각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비평은 김봉곤과 박상영의 작품을 동시대 한국문학 내부로 불러들이며 동시대 한국문학을 재구성하고 동시대를 ‘퀴어한 것’으로 재구성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병운과 같이 ‘퀴어-오토’로 독해될 만한 작가들이 이효석문학상, 젊은작가상, 그리고 문지문학상 심사와 선정위원이 동일하게 구성된 문학과지성사의 ‘소설 보다’ 시리즈 등을 통해 주목받으며 등장했다는 점은 전혀 우연처럼 보이지 않는다.
  레즈비언 퀴어소설, 그리고 레즈비언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퀴어소설에 대해서도 나는 비슷한 의구심과 불만을 가지고 있다. 왜 한국문학은 이리도 적재적소에 발견되고 또 등장하는 것인가? ‘한국의 퀴어문학에는 레즈비언의 목소리가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이 나올 때쯤이면 뒤이어 레즈비언 퀴어소설이 등장하고 그 소설이 문학상을 휩쓴다. ‘레즈비언 퀴어소설에는 레즈비언의 섹슈얼리티가 결여되어 있다. 이것은 게이 퀴어소설과의 큰 차이다’라는 지적이 등장할 때쯤이면 레즈비언의 섹슈얼리티를 전면적으로 내세운 소설이 등장한다. 그리고 역시나 그 소설이 문학상을 휩쓸며 주목을 받는다. ‘새로운’ 소설이 등장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기존의 문학에 결여되어 있었던 지점과 새로운 소설을 대조하며 찬사를 늘어놓는 비평들도 함께다. 마치 한국문학의 흐름이 비평에 의해 한발 먼저 결정되어 있으며 그것이 심사와 추천을 비롯한 비평문 안팎의 제도를 통해 수행되는 것처럼 말이다. 오답, 해설, 정답으로 이어지는 이 모든 흐름을 따라가기란 독자로서 상당히 피곤하고 지루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한국문학에서 새로움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4.

동시대는 특정 시기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며 담론 투쟁의 대상이다. 무엇이 동시대인지, 무엇이 동시대적인 질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각자의 입장이 부딪치는 각축장이야말로 동시대이다. 이때 생산적인 담론 형성에 방해가 되는 것은 ‘동시대 한국문학의 화자로서 특정한 주체가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이 판단은 보다 정확해져서 ‘동시대 한국문학이 특정한 주체를 포함하지 않는 것으로서 자신을 구성하고 있다’고 말해져야 할 것이다. 누군가가 소외되고 배제되는 것은 동시대의 바깥이 아니라 언제나 동시대의 경계이다.
  동시대는 ‘동시대적으로 부적절한 것’을 심문하는 자들 스스로에 의해서 구성되고 있으며 그 질문 자체가 동시대에 대한 담론 투쟁의 행위이다. 동시대가 담론 투쟁의 행위임을 망각하면 문제 설정이 단순해진다. ‘레즈비언 존재가 등장하지 않는 동시대 한국문학은 문제다’(동시대적인 것으로 구성되지 않은 ‘바깥의’ 문학 어딘가에는 레즈비언 존재가 이미 있었을 것이다…), ‘레즈비언 섹슈얼리티가 등장하지 않는 동시대 한국문학이 문제다’(이 역시 마찬가지다…), 시기를 더 거슬러 박완서나 『82년생 김지영』과 같은 사례들까지 돌이켜보노라면 ‘동시대 한국문학이 중산층 여성의 삶에 대해서만 말하고 빈곤층 여성의 존재를 다루지 않는 것은 문제다’(두말할 것 없이 이 역시 마찬가지다…)와 같은 단순한 문제 설정들은 무엇이 ‘어떤 주체가 등장하지 않고 있다’는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지, 즉 어떤 조건에 의해 어떤 작품이 동시대 문학으로서 가시화되고 있는지에 대한 반성을 완전히 불가능하게 한다. 또한 비평이 제시한 문제에 대해, 혹은 비평이 제시할 해설에 대해 한발 앞서 정답을 말하고자 하는 열망, 굉장히 제한적인 시야로 포착된 동시대 한국문학의 장 안에서 가장 적절한 문장으로 가장 적절한 글이 되고자 하는 모범생 같은 열망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동시대 한국문학에서 뭔가 새로운, 뭔가 재미있는 것을 만나고 싶다는 열망을 내려놓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제 나는 한국문학을 그리 성실히 따라 읽지도 않으면서 누군가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길,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길, 목마른 누군가가 우물을 파길, 이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서 뭔가를 만날 수 있길, 혹은 다른 어딘가가 아닌 바로 이곳에서 이곳의 조건을 바꾸는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다린다. 그럼 아무것도 안 하고 나는 뭘 하냐고? 나는 이 글을 통해 내 몫의 우물을 팠다.


진송

2020년 7월 《문장웹진》에 「남자 없는 여자들」을 발표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시, 소설, 연극 등 다양한 장르에 대한 비평을 쓴다. 비평 콜렉티브 ‘누워있기협동조합’에서 1) 생활 학문으로서의 이론에 접근하기, 2) 지식과 문제의식들을 난잡하게 공유하기를 목표로 재미있는 기획들을 이어 나가고 있다. 블로그 ‘진진송의 블로그(blog.naver.com/zinsongzin)’를 운영 중이다.

재미있는 글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썼다.

2023/12/20
64호

1
팔도, 민조, 하라, 진송 좌담, 웹진 《연극in》 편집부 정리, 「동시대 연극비평을 이야기하다」, 바로가기, 《연극in》 제230호, 2023년 2월 23일 게재.
2
예술활동증명 기준 안내 중 문학 파트, 예술인경력정보시스템 홈페이지, 바로가기, 2023년 10월 9일 접속.
3
문예지 읽기 모임에서 읽은 작품과 나눈 대화에 대한 메모는 ‘문예지 읽기 모임’ 노션 페이지에 2022년 6월 4일부터 2022년 9월 3일의 만남까지 아카이빙되어 있다. 바로가기
4
함연선, 「데굴데굴 패스연습 (8)」, 《마테리알 온라인》, 바로가기 2023년 8월 21일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