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병신 같아?”
  몇 해 전, 뇌출혈로 쓰러진 후 신체의 오른편이 마비된 라움콘의 Q레이터가 송지은에게 던진 질문이라고 한다. 자기 모습이 반사된 거울을 보면서 병신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스스로에게 붙였단다. 이 글은 병신이라는 단어로 시작해 병신으로 끝맺을 예정이다.
  미친 듯한 더위였다. 벌써 서른 몇 번째나 맞이해 본 여름이었으나 8월 4일 그날은 정말 위험할 정도로 더웠다. 그런 날씨가 절정에 이르렀던 낮 두 시, ‘위험포럼’에 참여해 라움콘을 처음 만났을 때, 지팡이를 짚고 느릿느릿 비틀대며 걸어온 Q레이터는 자신이 기획했다가 면접 심사에서 미끄러진 경험을 모둠 구성원들에게 들려줬다.
  어느 날 좀비 영화를 보던 Q레이터는 느릿느릿 비틀대며 걷는 좀비들을 보다가 그것이 배우의 연기임을 새삼 떠올렸는데, 본인이 좀비 분장을 하고 걸으면 연기를 넘어선 퍼포먼스가 될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어차피 자신은 몸의 한쪽은 움직이지 못하는 데다가 성인의 걸음 속도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느리게 걷기 때문에 자신의 걸음 방식이 정확히 좀비의 움직임과 포개진다는 거다. 라움콘은 Q레이터의 편마비 병실 동기(정확히 그는 병실 동기라고 표현했다) 네 명과 함께 좀비 걸음 퍼포먼스를 기획해 모 지역 거리예술제에 지원했다. 서류 심사를 통과한 라움콘은 면접 심사에 들어갔다. 심사위원 한 명이 라움콘에게 질문했다.
  “다른 장애인들이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라움콘의 이 기획은 거리예술제 공모에서 탈락했다. 이 이야기를 하며 라움콘은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앞에 두고 당사자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지적 섞인 질문을 한 상황 자체가 재미있었다며 웃었다. 그렇다. 듣고 보니 우습다. 장애인 본인이 본인의 신체적 특성을 이용한 작품을 만든다는데 대체 누가 불편하다는 건지 모르겠어서 웃었다. 첫 만남에서 나는 궁금한 게 많았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아 비장애인으로 살아온 Q레이터나 그의 파트너 송지은에게 사실 장애는 아직 적응 중인 무엇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다. 우리는 서로를 소개하며 아이스 브레이킹 격의 말들을 주고받았는데, 여기서 대뜸 라움콘은 본인의 장애를 대상화하는 것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본인의 장애를 이용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또 무엇이든지 해보자며 모둠의 방향성을 완전히 활짝 열어젖혔다.
  장애가 있는 작가와 장애가 없는 작가들이 모여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 가장 커다란 방해 요소는 역시나 장애와 비장애의 차이에서 발생할 것이다. 차이가 작든 크든 사람들은 조심하게 되고, 이는 과정과 결과의 한계를 극대화한다. 대상화를 피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언어들을 배제하고 안전하고 무난한 것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라움콘은 스스로 비장애인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설명하며 그 차이를 고스란히 이용했으면 좋겠다는 과감한 입장부터 던져놓았다. 이때, 우리가 해야할 프로젝트가 아주 명확해졌다. 그가 기획했다가 실현하지 못한 그 프로젝트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좀비 되기’를 구현하기로 했다. 여기서 우리는 좀비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 아주 간략하게나마 좀비의 역사를 짚고 넘어가야 했다. 구글 검색창에 좀비를 적고 엔터를 눌렀다.
  좀비는 아이티의 부두술사 전설에서 유래했다. 부두술사가 주술과 인형을 이용해 죽은 자를 되살리고 조종한다는 전설이 서양에 닿아 시간이 흐르며 좀비로 각색됐다. 좀비 영화의 고전이자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조지 A. 로메로 감독의 1968년 작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부터 2022년에 종영한 미드 〈워킹 데드〉에 이르는 좀비물의 계보에서 매우 중요하게 드러나는 좀비의 특징은 바로 느리다는 것이다. 좀비는 이미 한번 죽은 신체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움직이면서도 부패가 진행된다. 썩어가는 신체는 둔할 수밖에 없다. 문드러진 살갗과 냄새나는 근육의 걸음걸이는 느릿느릿하고 비틀댄다. 때문에 좀비는 살아있는 사람처럼 움직일 수 없다. 우리는 대니 보일의 〈28일 후〉 이후로 급격하게 등장한 뛰는 좀비는 좀비가 아니라고 규정했다. 좀비는 좀비다워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썩어가는 근육, 부러진 뼈로는 뛸 수 없기 때문이다.
  21세기 이후 제작된 좀비 장르 작품에서 사건을 전개하기 위해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장치는 바로 바이러스다. 원인 불명의 바이러스가 사람을 좀비로 만들고, 좀비에게 물리면 바이러스에 감염돼 산 사람도 좀비가 된다는 플롯은 어느덧 이 장르의 문법이 됐다. 좀비물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은 좀비를 피해야 한다. 어쩌다 좀비에게 살짝이라도 물린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본인이 좀비에게 물린 사실을 숨기곤 한다. 살아있는 사람은 좀비를 격리하거나 좀비로부터 떨어지려 한다. 좀비는 퇴치의 대상이며 재앙 그 자체다. 주인공은 안전지대를 향해 이동한다. 안전지대는 좀비로부터 완벽하게 단절된 곳이며 그곳은 정상성의 유토피아다. 그런 면에서 영화나 드라마가 그려내는 좀비는 장애와 상당히 닮아있다. 이 사회는 장애를 숨기고, 장애를 피하고, 장애를 격리한다. 장애는 느리고 장애는 불편하며 장애는 극복해야 하고 장애는 되도록 없는 편이 낫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테이블 위에 올려둔 거라고는 좀비라는 소재를 쓰자는 아이디어뿐이었다. 이 아이디어로부터 브레인스토밍을 하고 구체적인 방향을 잡는데 가장 먼저 필요한 건 어쩌면 우리의 친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3차 미팅은 성북동의 막걸릿집에서 진행했다. 진정 예술의 절반은 술인 것일까? 술이 들어가니 막혔던 것들이 튀어나와 모이기 시작했다. 현대미술 작가 라움콘, 현대무용 안무가 주희, 시인 김해솔 그리고 역시 시각예술을 하는 내가 한 모둠이 되어 좀비를 소재로 뭔가를 하자고 했을 때부터 우리가 목표로 삼은 우리의 장르는 영화였다. 물론 영화라고 해서 거창할 필요는 없다. 거창해질 제작비도 없지만 이날의 취중 회의 이후로 우리는 공동 작업에 있어서 중요한 지점들을 구체화해나갔다.
  회차를 거듭해 좀비와 장애를 연결하면서 우리는 ‘좀비 되기’가 생각보다 훨씬 두터운 층위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발견했고, 좀비라는 장르를 이용해 장애를 대하는 사회의 방식을 드러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장애와 사회의 관계를 표현하기에 그 무엇보다 훌륭한 소재였다. 그러나 한쪽이 완전히 마비된 장애 당사자의 몸을 이용해 좀비 연기를 시킨다는 콘셉트를 두고 누군가는 앞서 등장한 심사위원에 동기화돼 불편한 입장을 드러낼 수 있다. 어쩌면 이 글을 읽으면서도 그 불편함 탓에 이죽거리는 마음 한구석을 억누르고 있는 이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럴 줄 알고 움베르토 에코의 칼럼집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에서 정치적 올바름―책에서는 정치적으로 ‘반듯한’이라고 번역했다―을, 특히 이 세상에 팽배해진 미국식 정치적 올바름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대목들을 잡아당겨본다. 그는 차이의 존중을 사회의 근간으로 삼기로 결정한 문명에서 희극이 종말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고대로부터 불과 얼마 전까지 이어온 아주 오래된 희극의 역사는 앉은뱅이, 절름발이, 말더듬이, 난쟁이, 뚱보, 백치, 일탈자, 평판이 나쁜 직업, 열등 민족으로 간주되는 이들에게 의지해왔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이 금기가 됐다. 이제는 결코 그들을 희화화하거나 따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역사는 종말을 맞이한다.
  그 결과 희극의 실행 여부가 계급을 나누는 새로운 장벽으로 작동한다. 이전에는 노동자를 비웃는 것으로부터 스스로가 자본주의의 상위 계급임을 드러낼 수 있었으나 이젠 노동자만 자본주의자들을 조롱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재용을 재드래곤이라 부르고 정용진을 마이너스의 손을 가진 고릴라라 부른다 한들 언제나 강한 쪽은 우리가 아니라 저 놀림을 받는 이들―정용진은 심지어 고릴라를 이용한 브랜드를 만들었지 아마―이다. 게다가 이제는 정치적 올바름이 하나의 시대정신이자 예술 해석의 기준이 되었다고 생각해 전래동화의 내용을 비판하거나 바꾸려는 이들이 등장했다. 이런 사람들은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용납할 수 없다. 난쟁이는 잘못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준으로는 제목을 ‘백설공주와 일곱 명의 비표준적인 신장의 성인’으로 바꿔야 한다.
  라움콘이 첫 만남에서 본인의 장애를 대상화해도 좋다고 이야기했을 때, 우리는 이 모둠 프로젝트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를 고수하는 것이 불필요할뿐더러 심지어는 작업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우리는 ‘위험포럼’에 부합하는 태도를 견지하기로 했고, 위험한 태도로 접근하자며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이 합의가 대단한 태도의 변화를 일으켜 사회적 물의를 일부러 도모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를 취하지 않겠다는 합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네오나치를 표방하거나 KKK단의 장점이나 일베의 순기능에 관해 논하게 되는 게 아니다. 우리가 모여서 서로의 외모를 비하하거나 욕부터 배운 앵무새처럼 다른 곳에서 입에 담지 못할 말들로 시간을 채웠다는 뜻도 아니다. 돌이켜보면 이 합의는 그저 우리의 프로젝트에 딱 맞는 제목을 짓는 데에 쓰였을 뿐이다. 제목에 고작 ‘병신’이란 말을 넣는 일을 했을 뿐이다.
  공교롭게도 대학로의 장애예술창작센터에서 킥오프 미팅이 진행되던 그 뜨거웠던 여름 한복판의 날에 마로니에 공원에서는 장애인들의 이동권 시위가 한창이었다. 또한 공교롭기 그지없게도 대학로에 가기 위해 버스에 탔던 나는 서울시의 한 홍보 영상을 보며 이죽거리고 있었다. 서울시는 시내버스에 설치된 텔레비전을 이용해 휠체어 장애인들이 웹페이지에 접속해 저상버스 사전예약을 하면 원하는 시간에 이용할 수 있다는 제도를 홍보하고 있었다. 비장애인들 중 누구도 시내버스를 예약해서 이용하지 않는데, 장애인을 위해 저상버스 사전예약 제도를 만들었다면서, 이걸 제도랍시고 홍보하고 있는 것이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현실에서 장애인의 이동권 투쟁은 ‘우리’들에게 불편을 끼치고 야만적인 불법 시위이기 때문에 여론은 싸늘하고 장애인은 연행된다. ‘우리’에게 장애인의 권리라는 건 장애인이 집 밖에 나오지 않았을 때나 겨우 옹호해줄 만한 것이다. ‘우리’들에게 그 투쟁은 병신들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병신이라는 말을 의젓하고 우아하며 누구에게도 불편하지 않은 말로 대체한다 할지라도 상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백설공주와 일곱 명의 비표준적인 신장의 성인’처럼 말이다.
  우리는 병신이라는 낱말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병신이라는 낱말을 대체할 다른 낱말이 떠오르지도 않았고, 가장 잘 어울렸기 때문에 굳이 대체할 이유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제목을 붙인 후 우리는 굉장한 만족감을 느꼈다. 특히나 라움콘의 두 멤버는 이보다 적확한 제목을 붙일 수는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마도 나를 비롯해 안무가 주희와 시인 김해솔에게는 모종의 자신감과 해방감이 자리잡았을지도 모른다. ‘그래, 뭐, 이게 어때서?’라는 식으로.
  어느덧 구월이 되고 시월이 됐다. 이즈음 내린 비에 여름의 더위는 마모됐다. ‘위험포럼’이 마무리되는 십일월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이 포럼이 마무리될 때 어떤 형태의 결과물을 보여줘야 할지 정해야 했다. 가장 현실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실제로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제작비를 확보한 포럼이 아니라는 거였다. 단 5분짜리 초단편 영화를 만들고자 한다면 만들 수야 있겠지만 우리가 보다 집중적으로 보여주기로 한 것은 ‘좀비 되기’를 구현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대상으로 워크숍을 열었다. 각자의 장르에서 주로 다루는 매체의 사용법을 공유하는 거다. 안무가 주희는 본인의 매체인 몸을 사용하는 방법을 공유했고, 라움콘은 자신의 신체적 특징을 이용해 좀비처럼 움직이는 방법을 전수했고, 나는 스마트폰을 이용해 영상을 촬영하고 편집하는 방법을 나누었고, 김해솔은 좀비를 이용한 시 작법을 과제로 던져줬다. 이 워크숍을 통해 ‘좀비 되기’라는 공동 작업의 전개를 위한 실질적 기술들이 서로에게 전수됐나 하면, 좀처럼 엿볼 기회가 없는 서로의 매체를 다뤄봤다는 경험은 다시 각자의 작업에서 아주 요긴하게 써먹힐 테다. 이런 워크숍으로 알차게 채운 ‘위험포럼’ 이후를, 그러니까 우리가 만들어갈 공동 작업을 상상할 수 있도록 시놉시스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맺으려 한다.
  2024년, 한 장애인 시설에서 좀비 바이러스가 발생했다. 장애를 사회로부터 격리하기 위해 만든 이 시설에서 발생한 좀비 바이러스는 과연 바깥으로 퍼질 수 있을 것인가? 이곳에서 반드시 살아나가야 한다!
  혹은 그 반대로.
  원인불명의 바이러스가 사람을 걸어다니는 시체로 만든다. 감염으로부터 안전한 장소를 찾아나선 사람들. 그들이 찾아낸 곳은 다름 아닌 장애인 시설이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좀비처럼 걸어오는 누군가와 마주치는데…….
  이러나저러나 장애인 시설의 격리를 중심으로 장애와 사회 일반과의 역학 관계를 비평적으로, 자조적으로 묘사하는 것에 방점이 찍혀있는 이 작품의 제목은 〈살아있는 병신들의 밤〉 되시겠다.

최황

시각예술가. 주로 영상 작업을 한다. 조각을 전공해서일까? 영상 작업을 조각하듯 하고 있다.

역시 모든 것의 시작은 이미지와 이야기를 반죽하는 것. 장애와 좀비가 적절한 비율로 섞인 반죽이 마련됐다. 이제 빚기만 하면 된다.

2024/02/07
6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