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교환’에서는 문학과 타 장르 필자가 하나의 주제를 각각 비평합니다. 문학, 영화, 미술, 음악, 대중문화 등 각 영역 내의 경향성을 읽고, 모아보면서, 동시대 예술의 흐름을 살펴봅니다.
64호에서는 ‘화자’라는 주제로 동시대 한국 문학과 영화의 인물은 누구인지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문학과 영화에서 누가 등장하는가, 누가 발화하는가”는 곧 지금의 한국 문학과 영화가 어떤 이들의 삶에 관심이 있는가, 어떤 목소리를 담고자 하는가, 누가 주체가 되느냐 등의 문제와 결부됩니다. 작품 속 인물들을 돌이켜봄으로써 동시대 예술이 향하는 방향과 징후로만 드러나는 문제를 포착하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전통적으로 극영화에서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은 등장인물의 생각이나 속마음을 드러내거나(“추신: 나도 가끔 네 꿈을 꿔”―〈윤희에게〉), 극 바깥에서 일종의 전지적 작가 시점을 취하며 극 내부의 사건과 인물들에 대해 설명하고 해설해주는 목소리를 드러내는 장치로 사용된다. 역시나 일반적으로, 그리고 전통적으로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에서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은 현장이나 인물 등과 같은 다큐멘터리 대상에 대한 설명이나 해설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눈여겨보고 싶은 것은 사적 다큐멘터리나 에세이 영화, 혹은 (이런 용어가 가능하다면) ‘에세이적 무빙이미지’에서 사용되는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다. 이들은 (문제적 표현이겠지만) 보다 문학적이고 사적인 내용과 형식을 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김희천의 〈바벨〉(2015)과 박경근의 〈철의 꿈〉(2014), 그리고 장윤미의 〈어떤 곳을 중심으로 하여 가까운 곳〉(2021)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중심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각 작품은 같은 선상에서 다뤄지기에는 서 있는 자리가 아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바벨〉은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철의 꿈〉은 미술작가의 다큐멘터리라는 맥락에서, 〈어떤 곳을 중심으로 하여 가까운 곳〉은 다큐멘터리와 에세이 영화의 경계라는 맥락에서 각자 특정하게 살펴볼 만한 지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 나는 이들 세 작품을 오로지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의 측면에서 다루어보고자 한다.
  내가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물론 〈바벨〉을 본 직후부터였다. 2015년 여름이었고, 〈바벨〉을 여러 번 보고 들으며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의 몇몇 구절들을 받아 적었다. 그걸 트위터에 올리기도 하고, 블로그에 쓴 일기 끄트머리에 덧붙이기도 했다. 〈바벨〉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은 서정적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만, 어쨌거나 그것이 담고 있는 정념 같은 것이 나로 하여금 그 작업에 애착을 갖게 했고 그들과 어떤 식으로든 끈끈하게 엮여 있다는 감각을 갖게 했다. 덕분에 충분한 서사 없이도 끝까지 눈앞의 비주얼과 귀에 닿는 오디오들에 한없이 집중할 수 있었다. 그뒤로 나는 마음 한편에 좋은/훌륭한/탁월한 혹은 나를 강렬히 매혹하는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지닌 작품들을 만나고 싶다는 기대를 항상 품으며 영화관과 전시장, 그리고 각종 스크린 앞을 전전했다.


1. 김희천, 〈바벨〉

〈바벨〉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좋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음은 〈바벨〉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의 내레이션이다. 제2롯데월드타워 부근의 풍경을 3D 렌더링한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와 그 공간을 헤집고 다니는 가상의 카메라-화자의 시선.

세상은 점점 판판해지기만 하고, 사람들은 해결한답시고 그걸 다시 세우는데 지금 보니, 그게 우리의 묘비였어. 저기 봐, 우리 묘비가 로딩되고 있어!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나오는 순간 관객이 보게 되는 것은 제2 롯데월드타워 공사 현장 주변의 풍경을 담고 있는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의 부감 혹은 버드아이뷰 쇼트다.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이기에, 그리고 3D 렌더링된 그래픽 이미지이기에 필연적으로 납작해보일 수밖에 없는 잠실의 아파트들과 막 지어지고 있는 제2롯데월드타워는 “판판하다”는 표현과 연결되고, 더 나아가 “우리의 묘비”로 묘사된다. ‘지어지고 있음’이라는 과정의 순간은 “로딩”이라는 용어로 비약하면서 〈바벨〉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은 ‘더이상 망할 것이 없는 방식으로 망해버린 세상’에 대한 이 작품의 정념의 절정을 보여주고 또 들려준다.
  한편 다음과 같은 보이스-오버 내레이션 역시 ‘망할 수도 없어서 진짜로 망한 세상’의 정조를 보여준다.

지현이가 그랬어. ‘다들 죽지 않으려고만 했지, 살아 있는 놈이 없다’고.

나는 여기서 자꾸만 죽지 않으려고만 해서 살아 있지 못하는 우리들에 대해서 크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2010년대 초반을 지나오면서 (나는 〈바벨〉을 2015년에 보았다) ‘신자유주의적 주체’에 대해서 하도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던 때였다. 흙수저/금수저 구분과 헬조선/탈조선에 대한 이야기들도. 그래서 우리는 ‘죽창’을 들었던가? ‘각자도생’하며 ‘스펙’ 쌓기를 멈추고? 오큐파이 서울을 하자고, 오큐파이 금감원을 하자고, 오큐파이 OO대학교를 하자고 대자보에 죽창을 그려넣고 낄낄거렸지만, 그때 함께 죽창을 들자고 다짐했던 사람들 중에 지금까지도 죽창을 들고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스펙 쌓기’라는 말조차 이제 아무도 하지 않고 ‘각자도생’이란 말도 신자유주의적인 사회와 연관지어 발화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신자유주의 비판과 그것과 결부된 많은 단어를 언급하기’라는 유행이 지난 것일지도. 아니면 그런 걸 전경화할 의욕도 힘도 우리에게 없는 것일지도. 그러니 죽지 않으려고만 해서 결국엔 살아 있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서, 망할 수조차 없어서 정말로 망해버린 듯한 이 세계의 상황에 대해서 말하는 〈바벨〉의 내레이션이 내게는 너무 적확한 사회비평처럼 느껴졌다.

그거 알아? 그냥 우리가 유리 자체야. 우린 진열장이야. 판판하다. 존나 쓸데없이. 데굴데굴 잘 구르는데 굴러서 어딜 가지 않아. 끝도 없이 헛구르기. TV에서 맛집 소개 보는 기분이 들어.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의 화자에 의해 판판하다는 감각은 망함의 새로운 양태와 깊게 연루된다. 우리가 유리 자체이며 유리로 된 진열장이라는 표현은 이 망한 세상에서 살아 있는 대신 죽지 않으려고만 하고 있는 인간상에 대응된다. 내면성이란 것은 찾아볼 수 없고 단지 보이기 위해서 구성한 것들로만 이뤄진 소셜 미디어적 주체에 걸맞은 표현이다. 화자는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일까? 이 발화는 그런 주체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어쩔 수 없다는 포기의 제스처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없이 투명하고 한없이 얇고 판판한 주체. “존나 쓸데없이.” 그러나 어쩌겠는가? 데굴데굴 굴러서 어디로도 가지 못하는 우리에겐 어차피 뒤도 앞도 주어지지 않았는걸. 어쩌면 우리가 유리 진열장이 된 건, 아니 유리 진열장인 것은 앞도 뒤도, 과거도 미래도 없는 지금에 적응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2. 박경근, 〈철의 꿈〉

〈철의 꿈〉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승희에게. 네가 떠난 지 벌써 2년이 지났어. 그때 날 떠나며 말했지. 신을 찾고 싶다고. 내겐 큰 충격이었고 정말 힘든 시간이었어. 날 버리고 무당이 되는 것이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회피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인지 네가 떠난 후로 난 나만의 신을 찾고 싶어졌어. 언젠가 네가 그렇게 찾아 나서고 싶다는 그 신보다 더 구체성 있는 신을 찾아 너에게 보이고 싶었어. 역사의 모순과 엉망진창처럼 보이는 이곳, 어찌할 수 없어 보이는 수많은 굴곡 속에도 숭고한 뭔가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 만약 그 신을 그릴 수 있으면 어쩌면 너의 마음을 다시 얻을 수 있을까?

‘철의 꿈’이라는 제목이 무색하게 사랑을 잃은 남자의 연서로 시작되는 내레이션은 사실 ‘신’, 더 정확히는 ‘믿음’과 관련한 이미지들을 하나로 묶어내기 위한 일종의 픽션으로서 기능한다. 의례에 열중하는 승려들의 모습과 고래 암각화 및 수중에서 촬영된 고래의 모습, 그리고 마지막으로 울산 현대조선소와 포스코에서 생산하는 거대한 철덩어리들의 푸티지. 이 세 층위의 이미지와 푸티지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픽션으로서 감독은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사용한다.

우린 지금 이제 믿을 것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아. 가끔은 내가 너에게 느꼈던 감정이 과연 사랑이었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때도 있어. 그래서 난 새로운 신에 대한 옛사람들의 감정, 그 믿음은 어떤 것일까라고 상상만 할 수 있는 것 같아. 당장 굶주림의 고통과 가난의 수치심을 해결해주는 새로운 희망과 꿈을 주는 새로운 신의 존재감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 옛 필름들을 들여다보면 날 제일 자극하는 건 그때 그 사람들의 표정들이야. 무한한 가능성과 열정의 얼굴들, 믿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얼굴들. 또는 동물처럼 보이는 뻣뻣한 얼굴들.

편지는 쓰여 영화상에서 읽히고 있지만 사랑은 떠났다. 편지는 아마 수신되지 않을 것이다. 받기로 한 사람에게 영영 전해지지 않을 편지는 결국에는 관객을 향한다. 화자에 의하면 오늘날엔 고래-신에 대한 믿음 혹은 철-신에 대한 믿음에 상응하는 그러한 종류의 믿음은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내레이션은 고래-신에 대한 믿음에서 철이라는 새로운 신에 대한 믿음으로 비약하기를 감수하면서 철이 이 땅에서 어떤 의미였는지(“당장 굶주림의 고통과 가난의 수치심을 해결해주는, 새로운 희망과 꿈을 주는 새로운 신”), 철-신을 믿은 이들은 어떤 상태였는지(“무한한 가능성과 열정의 얼굴들, 믿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얼굴들. 또는 동물처럼 보이는 뻣뻣한 얼굴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거대한 철의 스펙터클(이것이 아마 감독이 가장 천착하고 싶었을 소재이자 주제였을 것이다)을 보여주고 또 들려준다. 철-신은 무척이나 아름답게 그려진다.


3. 장윤미

단언컨대, 장윤미는 내레이션을 가장 잘 쓰는 다큐멘터리 감독 중 한 명일 것이다. 2017년 작 〈콘크리트의 불안〉에선 감독 자신의 개인적인 기록과 픽션이 결합된 내용의 내레이션이, 철거를 앞둔 오래된 아파트와 그 부근의 풍경 위로 들린다.

눈― 하면 부드럽게 펼쳐졌다 말려 들어가고, 코― 하면 봉긋 솟아나고, 귀― 하면 밀가루 반죽처럼 쫙 늘어나며, 입― 하면 툭 닫혀버린다. 그게 눈이고 코이고 귀이고 입이다. 눈, 코, 귀, 입. 혀를 굴려 여러 번 반복해본다. 그래도 가장 매력 있는 건 이― 라고 말하는 순간이다. 이― 라고 할 때마다 감추지 못하고 순진하게 제 얼굴을 드러내는 이. 근육 없는 물컹한 아기의 몸에서 처음 난 딱딱한 그 무엇. 잘 감추어 두었는데 난데없이 툭 삐져나온 뼈처럼 낯설기도 하고, 뿌린 씨가 자라 맺은 열매처럼 신비롭기도 하다. 하지만 조그맣게 움튼 이들은 몇 년 살지도 못하고 끙끙 앓다가 툭툭 빠져버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더 크고 튼튼한 이들로 채워질 것이다.

이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끝나는 순간, 화면은 영화의 소재이기도 한 스카이아파트를 보여준다. 내레이션에서 ‘이’는 치아를 뜻했지만, 재개발의 이미지를 상기시키는 낡은 아파트의 이미지와 화면 중간 상단에 뜨는 “콘크리트의 불안”이라는 타이틀 앞에서 그 ‘이’는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 된다. “조그맣게 움튼 이들”은 이제 입안의 유치가 아니라 곧 철거될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이 되고, “더 크고 튼튼한 이들”은 어쩌면 철거된 아파트 자리에 들어설 또다른 아파트의 입주예정자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고 거의 바로 시작되었던 내레이션의 내용에는 명백한 의미가 있었지만, 시간 차를 두고 나타나는 이미지 앞에서 또다른 명백한 의미를 얻는다. 하나의 단어, 하나의 내레이션으로부터 명백한 두 개의 의미가 생겨난다.
  장윤미의 2021년 작 〈어떤 곳을 중심으로 하여 가까운 곳〉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은 보다 서정적이다. 어떤 동네의 로드뷰를 가만히 보여주던 영화는 “무수에게”라고 시작하는 편지-내레이션을 들려준다.

무수에게. 너는 오랫동안 내가 알지 못하는 이름으로 불렸겠지. 한때는 서준, 그리고 지금 나는 너를 무수라고 부르고 있어. 자꾸 이름을 붙이는 게 미안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너를 부를 수가 없으니까.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의 화자이자 감독은 계속해서 로드뷰로 동네를 살펴본다. 화면에 로드뷰를 위해 촬영된 골목길들이 보인다. 다음과 같은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계속해서 흐른다.

이 거리는 2020년의 봄에 찍힌 모습이라고 하네. 네가 살아 있을 때겠지만 아마 보지는 못했을 풍경이겠다. 나 역시 누군가 이미 촬영해둔 걸 보고 있어. 기억할, 너와의 추억이 없다. 사진 속 겁먹은 너의 얼굴, 우리 처음 만난 날 삶의 의지가 없어 보이던 너의 눈빛. 그런 것들만 한동안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것도 추억이라 할 수 있을까?

어떤 골목길에 당도해서, 화자와 관객은 로드뷰에 찍힌 노인과 고양이를 발견한다. 그 둘을 더 자세히 보려는 듯, 화자는 로드뷰 상에서 후진을 했다가 다시 그들 앞으로 돌아오고, 빨간 점퍼에 모자를 눌러 쓴 노인과 회색 고양이를 자세히 본다/보여준다. 물론 그 고양이는 무수가 아닐 테지만, 고양이는 고양이이고 우리는 무수를 떠올릴 수밖에 없게 된다.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 때는 어땠을까? 내가 너에 대해 아는 것. 겨우 아는 것. 그러니까 끝내 이것밖에 알 수 없는 것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이 나오면서 화면이 로드뷰 푸티지에서 감독이 촬영한 푸티지로 전환된다. 로드뷰 상에서 멈췄던 바로 그 지점의 풍경부터 감독이 촬영한 푸티지는 시작되고, 그는 무수가 살았던 동네를 걷는다.

할아버지와 살았다는 것. 그 할아버지가 죽고 나서 그의 가족 혹은 건물 주인이 너에 대한 포기 각서를 썼고 너는 한 동물보호소로 옮겨졌다는 것. 작은 철창에서 한동안 지냈고 발톱에 발버둥 친 듯한 상처가 있었다는 것. 췌장염을 앓았다는 것. 음식을 거부했고 더는 누구에게도 입양되지 않았다는 것. 곧 안락사를 앞두고 있었다는 것.

무수가 발견되었던 동네 부근, “어떤 곳을 중심으로 하여 가까운 곳”을 계속해서 걸으며, 지나가는 풍경들을 보여주며 내레이션의 화자이자 감독은 무수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한다.

무수는 우리가 보호소에서 구조한 지 일주일째에 세상을 떠났다. 가엾다는 연민만 강했을 뿐 막상 낯선 존재를 내가 책임지게 되었을 때의 두려움. 무수가 오랫동안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을 때의 부담스러움. 네가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났을 때의 이상한 안도와 그보다 긴―.

편지이기도 하면서 일종의 고백이기도 한 이 내레이션은 “이상한 안도”와 “그보다 긴” 뒤에 잠깐의 정적을 갖는다. 아마도 그 뒤에는 ‘슬픔’이나 ‘한숨’이 와야 했을 테지만, 그 대신에 오는 것들은, 들리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긴 나무, 긴 꽃, 긴 하늘, 긴 사람들, 긴 건물, 긴 땅, 긴 강. 네가 살던 동네에 갔는데 정말 좋더라.

영화 러닝타임의 절반쯤까지 계속되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은 여기까지 들리고 멈춘다. 그리고 영화는 끝날 때까지 조용히 무수가 발견된 곳 부근을, “네가 살던 동네”의 풍경을 보여준다. 때로는 감독의 시선으로 때로는 ‘너’의 시선으로. 그 과정은 어쩐지 긴 슬픔과 긴 한숨을 극복하려는 의지처럼 보이기도 하고, 애도하려는 노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짧은 영화의 서정성은 모두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곁에는 내레이션 전과 후에 적절히 도착하는 이미지들의 도움이 있다.
  〈바벨〉 〈철의 꿈〉 〈어떤 곳을 중심으로 하여 가까운 곳〉, 이 세 작품 모두 굉장히 서정적인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담고 있다. 이 작품들에서 내레이션의 내용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이야기에서 시작되는 사회비평처럼 들리기도 하고(〈바벨〉), 때로는 영화 전체의 구조를 잡아주는 지지대로 기능하기도 하고(〈철의 꿈〉), 이미지의 보조를 받아 영화 전체를 추동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어떤 곳을 중심으로 하여 가까운 곳〉). 단순한 해설이나 논평이 아니라 작가/감독의 감정과 생각이 복잡하게 얽힌 채로 투영된 이들 세 작품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담지하는 서정성은 새로운 길, 혹은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여러 갈래의 골목길들로 들어서는 방법을 제안한다. 그 길에는 서사 대신 픽션이 있는 것 같다고 항상 생각했다.
  이 글을 쓰며 샹탈 아커만의 〈집에서 온 소식〉(News From Home, 1976)을 다시 보았다. 거기엔 1970년대 뉴욕의 골목길 풍경이 조용히 담겨 있고, 그 위로 아커만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흐른다. 어머니로부터 온 편지를 읽는 목소리. 집에서 온 소식은 그렇게 뉴욕의 거리를 메운다. 편지라는 형식 그리고 편지의 내용은 서사를 만들지 않고 또 만들지 못한다. 대신에 한적한 뉴욕 뒷골목의 비슷비슷한 빨간 벽돌 건물들 여럿을 배경으로 하는 무빙-이미지가 스크린에 나타나고 동시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 영화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흐른다. “Today’s my birthday, and I feel sad.” 그 순간에 픽션이 발생했다고 느끼는 것은 착각일지도.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감각에 붙들려 있다.

*이 글의 제목은 〈바벨〉(김희천, 2015)의 내레이션 중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함연선

영상비평지 마테리알 편집인・발행인. 학부에서 영상이론을 공부했다. 영상 작업과 영화에 대해 비평을 쓰고, 예술과 관련된 출판물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2023/12/20
6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