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것들이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위험한 가능성들을 열어두자는 야심찬 의도로 출발한 만큼, ‘위험포럼’은 구상 초기부터 열린 구조를 가진 기획이었다. 계획 하에 달성해야 하는 과제와 도달하는 지점이 분명한 여행보다는, 몇 가지 원칙만을 세워두고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채로 떠나는 여정에 가까운 궤적을 그리는 것이다. ‘위험포럼’을 기획한 매개자들은 보편적인 발견을 목표하기보다 우연찮게 발생하는 상황과 상호작용들 자체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두껍게 기술하고자 했다. 창작자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배경과 작품 세계, 이들이 가지고 있는 요인들이 충돌할 때 어떤 상황이 일어나는지 목격하는 것이 ‘위험포럼’의 의미를 구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작가이자 장애인 운동가인 해리엇 맥브라이드 존슨에 따르면 이야기는 우리가 경험을 공유하게 하는 가장 친밀한 도구이자, 다른 사람들의 머릿속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서 있는 곳,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유일한 가능성이 아님을 깨치는 가장 근본적인 기회를 마련해주기도 한다.1)
  매개자가 목격한 ‘위험포럼’ 모둠의 김진주, 김민이, 신영은 작가는 각 창작자와 매개자가 구성한 단단한 세계의 외벽에 금을 내고, 역할을 뒤섞는 반가운 혼돈을 만들어냈다. 이 혼란스러운 경험은 모둠의 구성원들이 가진 서로에 대한 막연한 호의와 수용에 바탕을 두었다. 그러므로 다른 이들의 사적인 삶을 잘 알지 못하더라도, 좁은 틈으로 궁금함과 서로의 방법을 시도해보고자 하는 기꺼움이 오갈 수 있었던 것이다. 모둠을 이룬 세 명의 예술가는 몸담은 장르도, 사용하는 매체도 상이했다. ‘위험포럼’을 계기로 처음 마주한 작가들은 함께 창작을 하기 위한 공통분모를 개인의 삶이나 작업에서 찾기보다, 이들을 불러 모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다. ‘위험포럼’의 위험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각자에게 ‘위험’은 어떻게 정의되는가?
  연극의 극본을 쓰는 한 작가는 “아무런 가이드라인도 없이 자유롭게 공동창작을 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게 느껴진다”고 털어놓았다. 요구되는 마감과 기준이 없다는 데서 오는 불안이 위험으로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행정적이고 절차적인 조건들은 창작물의 효율적 생산을 돕기도 하지만, 창작 과정의 틀을 지어 예상 가능한 결과로 수렴하게 만들기도 한다. 창작자들은 국가나 재단의 지원을 받고 작품을 만들어내는 구조 안에서 이러한 기준에 익숙해졌고, 또 의지해왔기도 하다. 그런데 이제 특정한 형태의 작품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당연했던 영역에서 벗어나, 어떤 것도 정해지지 않은 미지의 공간으로 던져진 것이다. 어떤 기준을 만족시켜야 하는지 몰라 불안한 마음은 ‘전문적으로’ ‘잘’ 해야 한다는 부담과 맞닿아 있다. 프로 극작가, 미술 작가로서 기대되는 창작물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부담감일 것이다. 다른 작가 역시 그림을 ‘잘’ 그리는 것에 대한 압박에 대해 토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다시, ‘위험포럼’에서 정해진 것은 없다. 여기서는 시각 예술가가 회화 작업을 해야 한다거나 극작가가 연극을 만들어야 한다고 기대 받지 않는다. 창작자들이 ‘전문 분야’에서 벗어나 모르거나 해본 적 없던 일을 해도 되는 공간이다. 그렇다면 공동창작을 ‘잘’ 해낸다는 과제를 정면 돌파하는 대신, 가볍게 우회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작가들은 여기서 출발하기로 했다. 전문가로서 늘 해오던 영역을 벗어나 스스로의 새롭고 서툰 모습을 마주하기로 한 것이다. 이들은 각자 익숙하지 않은 서로의 작업 방식을 채택해보기로 했다. 시각 예술가는 극본을 쓰고, 극작가는 그림을 그린다. 전문적이고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부담감을 벗어나 오히려 가벼워진다. 이때 공동창작은 역설적으로 전업 작가이자 예술가, 창작자로서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과정이 된다. 여기에는 서로의 작업과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자리했다. 발로 식물의 섬세한 선을 그려내는 구족화가로 활동하는 작가는 늘 대담한 이야기를 써내고 싶어 했다. 한편 인간 내면을 표현하는 회화 및 설치 작업을 해온 작가는 신체의 다양성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작가는 사회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극본으로 써왔고, 시각예술과 전시라는 형식을 흥미로워했다. 마지막으로 예술로 정의되는 장 주위를 맴돌며 사람들을 연결하는 기획을 시도해온 매개자 역시 전에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인 창작에 매료된 사람이었다. ‘위험포럼’과 위험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전문가의 구획을 벗어나 초보로서 다른 방식을 시도하는 굽이진 우회로를 택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매개자인 나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이 얼렁뚱땅 공동창작의 여정에 매개자 역시 합류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단순히 기록자이자 관찰자의 자리에 머물고자 했던 매개자의 의도가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작가들은 거리낌 없이 매개자를 창작의 영역에 초대했고, 매개자 역시 이 모둠의 구성을 ‘위험포럼’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예술가들과 틀을 만들어 낸 기획자로 역할을 나누기보다 공동창작이라는 실험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모둠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점에 있어서 기획과 창작의 경계는 희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위험포럼’의 성격을 고려할 때, 매개자로 명명된 역할의 기획자들은 창작자들의 협업 과정에 어디까지 개입하고 협업할 수 있는 것인지, 또는 해도 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느새 ‘우리’가 된 모둠은 가볍게 가기로 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나이나 가족의 형식 등 사회적으로 고정된 명목에서 서로의 공통점을 찾기보다는, 호오와 생각하는 방식에서 교차하는 지점을 찾아냈다. 알고 보니 우리는 모두 찬찬히 둘러 걷는 산책을 좋아하는 이들이었다. 매개자 역시 복잡해 보이는 질문을 고민하느라 멈춰있기보다 가볍게 둘러가기로 했다. 우선 시도하고, 만들어본다.
  우리의 시도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하나, 모둠에 속한 다른 작가의 방식을 빌려 각 창작자가 기존에 해본 적 없는 창작 방식을 시도한다. 둘,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창작한다. 셋, 여기서 ‘모두’는 매개자를 포함한다. 넷, 방식은 ‘키워드로 희곡 쓰기’와 ‘다른 신체로 드로잉하기’이다. 다섯, 매주 써온 희곡을 역할을 정해 낭독하고, 남은 시간은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채운다. 위의 사항들은 우리가 합의해서 확정한 것이라기보다 재미있는 일들을 하다가 정착한 것에 가까웠다.
  우리가 함께한 방식 중 하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사용해본 적 없는 신체 부위로 드로잉을 하는 것이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신체를 사용해보면서, 정교한 작업에 손 대신 발이나 음성 인식 등 다른 방식을 사용하는 작가가 경험해온 사회적 의미의 장애를 창작 과정에 포함하고자 했다. 구족화가는 발이 아닌 손으로, 다른 사람들은 손이 아닌 부분으로 펜을 잡고 그림을 그렸다. 몇 번 서로를 크로키 하면서 이 방법을 테스트해본 작가들은 몸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여 함께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일종의 퍼포먼스로 전환하기로 했다. 커다란 종이를 이어붙이고 그 위를 구르고 기며 그림을 그려나가는 과정을 영상으로 촬영했다. 누운 채 머리 위로 손을 뻗어 눈으로 보지 않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구족화가의 방식을 따라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 사이에 펜을 끼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팔과 다리가 접히는 부분을 그릴 때는 몸을 땅바닥에 붙여야 했다. 새로운 방식으로 이용하는 신체는 생각보다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아 우리는 몇 번의 삐끗거림과 실패, 경직되고 고통스러운 신체를 경험했다. 이는 구족화가가 겪어온 시간과는 크게 다른 것이었지만, 그의 방식에 조금씩 익숙해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몸은 창작물을 제약하거나 구성한다. 그러나 그림은 몸이 그려내는 것임과 동시에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구현하는 과정이기도 하므로, 신체를 이용하는 방식만이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었다. 퍼포먼스가 끝나고 그림을 돌아보니 누가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바닥에 종이가 깔려 있고, 화면 왼쪽에는 김민이 작가가 머리를 아래쪽으로 향한 채 누워 있다. 그는 오른발 엄지발가락에 색연필을 끼우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작가의 오른쪽에는 사인펜 세트와 머리에 묶을 수 있는 고프로 카메라가 놓여 있다.
발로 그림을 그리는 김민이 작가

모둠이 함께 시도한 방식 중 다른 하나는 키워드를 정해 희곡을 써오는 것이었다. 모임 시간에 한 명씩 단어를 선정하고, 이 단어들이 모두 들어가는 극본을 만들어와 다음 모임에서 낭독을 해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한 주 동안 쓸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양의, 그러나 소소하지만은 않은 다양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졌다. 공동창작이라 하기엔 저자가 분명한 작품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개지는 부분이 있는 작품들은 여러 시리즈의 창작물들로 탄생하였다. 이들은 함께한 창작의 결과물이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작가들이 서로를 알아가고 세계관을 파악하며, 공동창작에서 함께 다룰 것들을 떠올리는 과정에서 표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우리가 모임에서 가볍게 나눈 이야기들은 희곡에 섞여 들어가기도 하고, 희곡에서 출발한 이야기들이 계속 이어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임의로 정한 단어들인 ‘캐나다’ ‘사과’ ‘머리카락’으로 희곡을 썼을 때, 누군가는 머리카락을 치우는 문제로 싸우다가 캐나다로 떠난다는 사실을 통보하고 사과를 하지 않는 연인들의 이야기를 썼다면, 다른 이는 이전에 나누었던 대화에 등장한 장애인 화장실을 주제로 한 희극적이면서도 번뜩이는 비판적 날이 서 있는 작품에 키워드들을 집어넣었다. 장애인 화장실이라는 꼭지가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에 문득문득 등장하다가 창작물의 주제가 된 것이다.

검은 옷을 입은 네 사람이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차례로 서거나 앉아 있다. 가장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은 가슴에 ‘해설’이라는 종이를 붙인 채 대본집을 손에 들고 낭독하고 있다. 왼쪽에서 두 번째 사람은 앉아 있고, 왼쪽에서 세 번째 사람이 들고 있는 종이를 함께 보고 있다. 왼쪽에서 세 번째 사람은 대본집을 보고 있으며, 가슴에 ‘젊은 남자’라고 쓰여 있는 종이를 붙이고 있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얼굴에 종이로 만든 선글라스를 쓰고 대본집을 들고 앉아 있다.
희곡을 함께 낭독하는 신영은, 김진주, 김재아, 김민이

모임 초반, 각자의 경험에 비추어 위험을 정의했던 대화에서 서울장애예술창작센터의 입주 작가는 센터 내 장애인 화장실에 관한 당혹스러운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동으로 잠기는 장애인 화장실을 이용하던 도중 그만 고장난 문이 열려버렸던 것이다. 이용하는 동안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는 시간을 약속하는 화장실 시스템의 붕괴는 충격과 민망함을 넘어 불신으로 이어진다. 사용자의 편의와 안전을 지켜줄 것이라는 당연한 믿음이 깨져버리는 것이다. 이후 화장실 문에 ‘고장, 문이 닫혀 있으면 열림 버튼을 누르지 마시오’라는 안내가 붙기는 했지만, 작가는 이후 센터의 화장실뿐 아니라 어떤 장애인 화장실을 이용하더라도 언제 문이 열릴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어야 했다. 마침 그 자리의 세 창작자 모두 화장실 문과 관련된 당황스러운 에피소드가 있었다. 나 역시 장애인 화장실을 이용하다가 밖에서 누군가 문을 열어버린 상황에 처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편리하게 쓸 수 있도록 고안된 테크놀로지들은 종종 실패하고, 열려버린 화장실 문처럼 우리의 삶에 황망한 구멍을 남긴다.
  위험에 대한 이야기들은 희미하게나마 작가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과 문제의식의 교차로를 드러내주었다. 우리는 장애인 화장실로 대표되는 사회적 장치들에 대하여 생각해봤다. 예기되는 위험과 불편을 줄이기 위해 도입되는 기술들은 매끄러워 보이지만, 사실 필요할 수도 있는 일상 속의 덜컹거림을 지워버린다. 편리해 보이는 닫힘 버튼과 널찍한 화장실 공간보다, 단순해서 한 손으로도 문을 잠글 수 있는 걸쇠와 언제든 잡을 수 있게 가까운 문이 더 마음 놓일 수도 있다. 카운터 앞의 긴 줄을 피하기 위해 키오스크를 사용하는 것이 어렵고, 직원에게 직접 주문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이 사회에서는 모두가 능숙하게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빠르고 효율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모두가 똑같은 상황과 신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화장실 사용은 가장 원초적인 욕구에 밀접한 행위이자, 사회적으로 인간답다고 대접받는 존엄에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가장 직관적이고 신체적인 문제들과, 문명사회에서 이를 처리하려고 동원하는 기계적 시스템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장애인 화장실을 희곡에 등장시킨 작가는 이 시스템이 실패할 때 발생하는 구멍들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위한다는 명목의 형식과 기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를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작품에는 화장실을 연구하기 위해 캐나다로 떠난 연구원들이 한국에서는 장애인 화장실 봉기가 일어났다는 심각한 사건을 전한다. 한편 작가들은 공통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어떠한 방식으로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을지 질문하기 시작했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을 충돌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 명의 작가들과 매개자가 공동창작의 시간 동안 사적인 이야기를 많이 나눈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같은 단어가 담긴 다른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우리는 서로가 가진 세계에 대하여 더 많이 알게 되었다. 동일한 단어들에서 출발하더라도 어떤 작가는 사람들 사이의 미묘한 감정 흐름에 대해, 어떤 작가는 평소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를 빌려, 어떤 작가는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구조적 문제와 관련하여 이야기를 만들었다. 각자가 만든 작품의 차이를 만든 바탕을 가늠해보는 일은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하는 일과 맞닿아 있었다. 어떤 이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별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궁금하여 물어보니, 그는 어렸을 때 천문학과를 가고 싶어 별들을 보고 공부했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지금도 별의 이름을 외운다. 식물들의 잎맥을 세밀하게 그려내는 작업에 깔린 밀도 높은 관심과 관찰력은 자연에 대한 앎의 집요한 열망에서 왔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서로의 현재 삶에 대한 세부 사항을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모임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다른 이들에 대한 이해의 범위를 넓혀 갔다. 이때 중요한 것은 창작자와 매개자 자신의 경험과 비슷하지 않더라도, 호의와 존중을 기반으로 한 느슨한 연대가 사적 영역에서 펼쳐졌다는 것이다. 이는 창작의 기반이 되는 작가 개인의 시간을 더 이해하고 존중하게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가족 구성원인 어린이의 건강이 좋지 않아, 누군가는 장애인콜택시의 엄청난 배차 간격과 불편한 이용 방법 때문에, 누군가는 생업에 종사하느라 우리는 정시에 모두 함께 만나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양해를 구하고 다른 이들은 기꺼이 다른 방식을 찾아보는 일을 거듭하며 우리는 더욱 유연한 공동창작의 과정을 밟아 나갈 수 있었다. ‘위험포럼’을 마주한 이 모둠의 방식을 가벼운 산책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직면한 위험을 피하거나 급진적으로 돌파하지 않고, 그 아래 위를 지나는 우회로를 함께, 가볍게 산책하는 것이다.

김재아

문화매개를 공부하고 다양한 장 사이를 오가는 독립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문화매개실천연구소에서 장애예술을 연구하고, 모두를 위한 디자인 콜렉티브 아인투아인ayinto ayin과 재미있는 사건을 궁리하고 있다.

2024/01/17
65호

1
Harriet McBryde Johnson, Too Late to Die Young: Nearly True Tales from a Life, Henry Holt and Company,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