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금까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남한 영화잡지에 실린 첫번째 만화는 1954년 12월 《영화세계》에 실린 김용환의 「코주부」다. 영화잡지에 그림으로 추상된 첫번째 캐릭터, 코주부는 당연하게도 영화를 보러가는 사람이다. 「코주부」의 내용은 코주부가 아나톨 리트박의 Act of Love(1953), 한국 개봉명 〈회상〉을 보러가는 내용이다. 개봉 당시 전단에 따르면 〈회상〉의 내용은 이렇다. “전장에서 돌아온 로바르 테라는 프랑스령 리베라 어촌 뷔타 후랑쉐에 왔다. 호텔 벨 리브의 양지바른 테라스에 앉아 있는 그에게는 전쟁 중에 이 프랑스에서 지낸 연애의 추억이 물밀듯이 가슴 한복판에 몰려오는 것이었다.” 잡지의 출간 시기와 〈회상〉의 내용을 포개어 놓으면―김용환의 코주부를 이미 알고 있다면 다르겠지만―아마도 당신은 전쟁 후라는 동일한 시대성에 근거해 다소 애상적인 코주부의 얼굴을 상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니다. “영화 구경을 가봐야겠다!” 1954년의 코주부, 영화 전단 따위 보지도 않았다. 코주부는 극장 앞에서 포스터를 보고 “오래간만에 다니-로팜 얼굴을 볼 수 있구나!”하며 〈회상〉을 택하고는 극장에서도 재빨리 빈자리 두 좌석을 점하고 옆 좌석에 “이뿐 여자”가 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이내 한 여자가 자리 비었냐고 물어보고 코주부는 자리를 내어주지만 웬걸, 그 여자는 노모의 자리를 맡아준 거였고…… 그러고서야 코주부는 스크린이 있는 정면을 본다. 이 부산스러운 과정 끝에 만나는 잔뜩 찌푸린 얼굴. 곧 영화는 시작할 테고, 이것이 남한에 처음 등장한 추상화된 관객의 얼굴인 셈이다.1)
  70년 전의 만화 한 편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는 코주부와 같은 모습을 분명 알고 있고 그보다 자주 경험하지만 이를 종종 잊거나 그보다 자주 잊기를 강요받기 때문이다. 어둠과―객석 뒤의 프로젝터를 통해서, 혹은 때때로 그 자체로―빛나는 하나의 스크린에 주변을 잊고 비치는 것에 스스로를 내맡기는 수동성이 영화관객의 표준적인 품행으로 여겨지고는 한다. 페둘라(Gabriele Pedullà)의 표현을 빌자면 다크 큐브(dark cube) 모델―바깥 세계와의 육체적인 단절, 거의 완전한 어둠, 주의집중하기 위한 침묵과 부동성의 부과, 거대한 화면, 이러한 조건을 강행하는 시각 공동체―에 부합하는 관객 말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초기 영화 시대의 관람은 정반대에 가까웠다. 시각적 볼거리를 제공하는 영화에서 관객은 몸을 움직여 반응했고 그것이 권장되곤 했다. “초기 영화 시대 영화 관람”에는 “떠들썩한 스펙터클의 경험”이 있었다.2) 그렇다면 지금은? 여러 창을 띄워놓고 휴대폰 액정을 오가는 여러 개의 스크린 환경―가령, 나는 이 원고를 쓰면서도 여러 영화를 함께 보고는 했다―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히려 수동적인 관객이 표준적인 유형으로 전제된 시기―페둘라는 그 시기를 1915년부터 1975년(텔레비전의 치세)으로 잡는다. 톰 거닝(Tom Gunning)은 1915년은 조금 이르고 1975년은 너무 늦게 잡았다고 지적한다3)―가 오히려 특수하다. 그리고 물론 부산스러운 코주부에서 볼 수 있듯, 상영 조건이 권유하는 것과 달리 부산스러운 코주부는 (영화에 흠뻑 빠졌을 수도 있지만) 아까 겪은 기대와 실망 탓에 영화는 제쳐두고 계속 푸념을 늘어놓거나 잠이나 늘어지게 잘지도 모른다. 무대 위의 배우에게 실질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기에 보다 정교한 관객 매너가 요청되는 연극과 달리, 스크린에 비치는 영화는 관객의 행동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러한 부산스러움이야말로 어떤 시기에서든 유지될 수 있는 영화관객의 특권일지도 모른다.


2.

당연하지만 영화관객은 다크 큐브의 시기에도 장치의 권유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가령 홍민키는 〈낙원〉(2023)에서 1970-80년대 한국 게이 크루징의 장소로 전유된 바다극장을 보여준다. 바다극장의 다크 큐브는 화면에의 주의 집중 혹은 부동성과는 전혀 다르게 작동한다. 바다극장 관객의 품행은 이렇다. “통로에서 두 칸 정도 띄우고 앉아줘야죠. 상대가 옆으로 올 수 있게. (…) 처음에는 [상대가] 바로 옆에 안 앉고요, 이 사람이 마음에 들면 아닌 척하고 한 칸 띄우고 제일 끝에 앉아요. 그런 다음에 살짝 옆으로 와요. 그러고 또 한참 있어요. (…) 건들기 쉽게 손잡이 위에 손을 올려놓아요. 건들기 쉽게 해주면 그 사람이 손을 조금 올려서……” 바다극장에서 어둠은 게이를 위한 공적 공간이 충분하지 않던 시절 바깥 세계에서는 숨기고는 했던 정체성에 충실한 움직임을 만든다. 화면은 보다 흐릿해지고 관객은 객석의 다른 관객에게 주의 집중을 기울인다. 물론, 이러한 극장 경험은 비단 크루징의 장소로 전유되지 않아도 가능하다. 오히려 지정좌석제가 정착되기 전의 일반적인 경험일지도 모르며, 지정좌석제가 정착된 현재에도 충분히 가능하다. 여하간 이러한 차원에서 다크 큐브가 권유하는 부동성은 그저 행동의 즉각적 실행을 지연시키는 간격, 달리 말하면 살짝 뜸 들이는 시간 정도로 변화한다. 이 간격에서 팔걸이에 올려둔 손의 감각은 잊히는 게 아니라 여느 때보다 활성화된다.
  물론, 이쯤에서 바다극장의 관객이 통상적인 의미의 관객(觀客)이 아니라고 지적할 수도 있다. 그들이 영화관의 객인 것은 맞지만 영화의 관객으로 볼 수 있을지는 경험적으로 미답의 영역이다. 한편 다크 큐브의 제약에서 보다 의식적으로 부산스러움을 행사한 관객도 있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물체(object)를 다른 맥락에 놓음으로서 사물(thing)의 신비한 특성을 되살릴 수 있다고 믿었던 초현실주의자들이다. 아도 키루(Ado Kyrou)에 의하면 스크린과 관객 사이에 가장 고양된 만남을 제공하는 것은 객관적 우연이며 객관적 우연의 렌즈를 거치면 가장 진부한 영화에서도 감흥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객관적 우연을 위해 앙드레 브르통은 어떤 영화가 상영중인지를 알지 못한 채 영화의 중간에 불쑥 들어가곤 했다. 가장 흥미롭고 당장 실행가능한 예는 만 레이가 제공해준다. 만 레이는 “영화가 지루하면 눈을 빠르게 깜빡이거나, 눈앞에 손가락을 움직이거나, 손가락으로 창살을 만들어 그 사이로 보거나, 혹은 반투명 천을 얼굴에 얹은 채로 영화를 보는 방식으로, 영화를 즉각 변형시켰다.”4) 바다극장 관객이 주변에 대한 의식으로 손의 감각이 활성화되었다면, 만 레이는 손을 활성화하여 영화를 갱신했다.
  이러한 의도적인 부산스러움으로 영화를 다시-프레이밍(re-framing)하는 초현실주의의 방법론은 결코 영화사에서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카메라의 조작자가 지향하는 대로가 아니라 카메라의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재생산이 의도치 않게 담아둔 사물을 비평적으로 특권화하며 역사적 시네필리아의 선두에 선 앙드레 바쟁과 그의 비평은 언제나 초현실주의와 지근거리에 있었다. 가령, 크리스티안 키슬리는―앙드레 바쟁이 지적 배경을 제공한―역사적 시네필리아의 기본적인 요소로 주변적 세부에 주목하고 매료되는 ‘파노라마 지각’(panoramic perception)에서 경험하는 ‘시네필리아 순간’(cinephiliac moments)을 꼽은 바 있다. 키슬리에 의하면 이 두 요소가 역사적 시네필과 영화광(moviegoer)을 구분한다. 이 구분은 납득이 가고 논지에 어긋나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과거 (산업화 시대의 문학(지망생) 출신) 평론가들을 시네필로 묶는 국면이 왜인지 분하므로…… 관련 논의를 조금 더 옮겨보겠다.

내가 읽은 대로라면 다른 사람들은 살면서 기억할 만한 순간을 마음에 새긴다. 파르테논신전에 올라 해맞이를 한 순간, 센트럴파크에서 사랑스러운 여자를 만나 달콤하고 자연스러운 관계를 맺은 여름밤, 책에서는 그렇게들 말한다. 나도 한차례 센트럴파크에서 여자를 만난 적이 있지만 별로 기억나는 건 없다. 내가 기억하는 건 〈역마차〉의 존 웨인이 먼짓길에 고꾸라지면서 카빈총으로 세 명의 사내를 죽인 순간, 그리고 〈제3의 사나이〉의 새끼 고양이가 문간에서 오슨 웰스를 발견한 순간이다.5)

인용한 대목은 워커 퍼시의 『영화광』 중 한 부분이다. 키슬리는 인용한 바와 같은 영화광이 시네필은 아니라고 쓴다. 남들이 삶이라고 하는 것에서 한 경험이 아니라 영화에서 받은 경험을 삶에서 “기억할 만한 순간”으로 꼽는 것은, “혹시…… 시네필이세요?” 같은 질문을 받기 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키슬리에 의하면 위 대목의 ‘나’는 시네필이 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조금 길게 인용하자. “시네필과 일반적인 영화 팬 모두에게 비상한 즐거움을 주는 영화의 순간들을 부정할 마음은 없지만, 이러한 즐거움이 내가 사용하는 의미에서 ‘시네필리아 순간’에 부합하는 건 아니다. 퍼시가 느낀 즐거움은 엄밀히 기억에 남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 장면들은 시각적으로 인상적이고 서사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역마차〉의 클라이맥스고, 〈제3의 사나이〉의 변곡점이다) 기억할 만하다. 내가 관심을 두는 순간들은, 그것들이 전혀 기억할 만한 것으로 설계되어 있지 않음에도 기억되는 것이다.”6) 키슬리에 의하면 역사적 시네필리아는 제작 주체에 의해 프로그램되지 않은 [주로 카메라의 광학적인 측면으로] 주변적인 요소―이것은 당대의 관객이 (멀티플렉스보다) 거대한 스크린을 봤다는 회복론적 시각을 경유할 때 더욱 절감할 수 있다―에 대해 느끼는, 거의 전달 불가능한 에피파니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시네필의 주변적 요소에 대한 매료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이하 MCU) 영화의 관객이 화면 구석에서 찾아내는 이스터에그와는 분명히 구분된다. MCU 영화의 화면 구석에 배치된 이스터에그 물건, 가령 〈아이언맨〉(존 패브로, 2008)에 삽입된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 같은 것은 분명 제작 주체에 의해 설계되었을 뿐 아니라, 사물이 덜컥 현현하는 느낌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MCU의 이스터에그는 위키 문서에 있는 하이퍼링크처럼 작동한다. 화면 도처에 있는 다양한 물건들은 이 작품보다는 이 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관을 충실히 연상하라고 깜빡거린다. 이러한 측면은 페이즈가 진행되고 부피가 커지면서 더욱 강화된 것 같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블랙팬서: 와칸다 포에버〉(라이언 쿠글러, 2022)를 볼 때는 영화보다 이 영화의 나무위키 문서가 더 흥미로울 것 같은데…… 같은 생각까지 이르렀다. 연결성을 강화해서 다른 콘텐츠까지 섭렵하라고 요구하는 MCU의 이윤 논리는 (아마도 2010년대의 가장 대단한) 애도-영화인 〈로건〉(제임스 맨골드, 2017)에서 죽은 울버린이 〈데드풀 3〉로 복귀하면서 ‘IP는 죽일 수 없다’로도 이어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MCU는 고전적으로 영화가 맺어온 비가역성을 가장 대중적인 부면에서 해체한다. MCU의 영화 한 편은 곧잘 위키 문서로 전환되(고자 하)며 죽은 캐릭터는 IP의 이윤 논리를 따라 언제든 되돌아올 수 있다. 과거의 스파이더맨을 모두 한자리에 모은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존 왓츠, 2021)은 이러한 MCU의 현재를 형식화한 영화처럼도 느껴진다. 스파이더맨과 닥터 스트레인지는 갈라진 세계의 틈을 메우고자 노력하지만, 세계는 이미 갈라졌고 그 갈라진 세계의 틈으로 끊임없이 닥터 옥토버스, 샌드맨, 고블린, 스파이더맨 등 과거의 IP들이 출몰한다. 이 IP들을 소환하기 위해 분산적이기 짝이 없는 〈스파이더맨: 노웨이 홈〉은 (한 철학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 시대 정신 분산의 교육자료로 손색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논의를 되짚어 시네필리아로 돌아오면, 역사적 시네필리아의 경험은 하나의 영화를 논리적으로 장악하고 이를 정합적으로 풀어내는 것과는 맞지 않았다. 오히려 제작 주체의 요구에서 벗어나려는 일탈성이 영화의 저류를 이루고 있다. 그들은 구체적인 영화에서는 잠깐 빛나며 개념으로서의 영화에 살짝 닿을 수 있었던 순간에 충실할 뿐이다. 이러한 일탈성과 충실성은 영화사의 하나의 (아주 중요한) 국면에서는 주도적인 발전의 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일반화된 도덕(과 그 장치)가 아니라 저 너머의 윤리에 몰두하는 시네필의 집단 규범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도미니크 파이니(Dominique Païni)가 랑글루아 사태의 해결을 두고 시네필리아의 승리인 동시에 끝의 시작으로, 시네필리아의 일탈성이 문화정치로 정리되는 사건으로 보았듯 말이다.7) 여기서 ‘우리’는 논의의 초점을 좁혀 스크린쿼터 운동으로 접속하는 게 필요하겠지만…….


3.

이쯤에서, 영화사에 빠삭한―그리고 인내심이 있는―독자라면 비명을 지를지도 모르겠다. 다 아는 이야기 좀 그만하라고. 부산한 관객의 옹호를 위해 부산한 논지 전개를 하는 것도 지겹다고…… 그리고 멀베이의 “지연된 영화”(delayed cinema)나 집중을 의도하지 않은 영화들, 가령 앤디 워홀의 〈잠〉과 〈엠파이어〉 혹은 “기분 좋은 선잠을 자길 바랐다”8)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파이브 Five: Dedicated to OZU〉(2005) 등을 거론하며 집중의 해체부터 해소(로서 수면)까지, 이미 비평부터 창작까지 충분히 형식화되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또 1970년대 어쩌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스크린 이론의 시대를 다루지 않은 것을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론은 (글이 다 끝나가지만……) 지금부터다.

「오늘의 관객 탐색: 독립예술영화관과 관객의 공생을 위하여」
: 독립예술영화관의 관객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토대로 분야별 현장에서 체감하는 관객의 특징과 모객을 위한 노력들을 나누는 자리.

《비유》로부터 청탁받은 주제는 ‘동시대 영화 관객의 특징’이었다. 나는 이 원고를 쓰는 와중인 2023년 11월 28일 열린 ‘전국영화상영자대회’의 토론자로 초대받았다. 초대 명목은 관객 대표였다. 개회사 이후에 이뤄진 토론에서 나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개회사에서 숫자로 취급받는 것에 대한 우려를 밝힌 직후에 발제와 토론 자리에서는 모객에 대해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물론 산업과 문화 양면에서 사람을 모으는 것은 중요하지만 모객을 위해 MZ 세대 관객의 집중력을 논의하는 순간 ‘관객’은 소비자와 구분하기 어려운 정체성이 되고 결국은 ‘독립예술영화(관)’의 지원 근거도 ‘K-무비’의 산실로 축소되며 형해화된다. 실무자에게 필요한 고민인 것과 별개로 이러한―독립예술영화가 실질적인 상품이 아니라는 점에서―긴축의 기조에서 그것은 언제든 오히려 부차적인 논의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중요한 건 오늘날의 독립예술영화 진영이 모객하고자 하는 ‘관객’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하는 게 아닐까? 어쨌건 이처럼 숫자로 취급되지 않는 문화와 숫자로 취급되는 시장의 양편에 이리저리 (편의적으로) 동원되는 곳에 나-관객-금동현이 앉아있었다.
  의뢰를 덜컥 받았지만, 이제 와서 동시대 영화 관객의 특징은 무엇일까? 잘 모르겠다. 독립예술영화관의 관객은 누구인가? 그것도 잘 몰랐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영화와 극장은 항상 관객을 미리 상상해왔지만 관객들은 그 기획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치근덕대고 손가락으로 창살을 만들어보곤 했다. 관객이란 언제나 상상되는 것인 동시에 그 잉여다. 오늘날 혹은 동시대는 그것을 말하는 순간 첨예한 담론 투쟁의 장에 접속하게 되는 단어며 관객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동시대 관객의 특징’을 하나로 벼려내는 것은 흥행을 위한 리포트가 아닌 이상 그다지 효용이 없으며 전국영화상영자대회 토론문에 내가 적은 다음의 구절 “한국 독립영화들은 위험보다는 오히려 획일화되고 남성화된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폭력으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갖고 있는 안온한 장소로 표상되는 것 같습니다”처럼 짜증나는 말밖에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동시대 관객의 특징’을 도출하고(실은 글을 통해서 은근히 몇 번 쓰기는 했다만……) 싶지 않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말해왔던 관객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어두운 극장에서 내 몸과 신경계 사이에서 영화가 ‘익어가는’ 시간”9)을 여전히 믿고 그런 믿음에 몸과 마음을 마음껏 내어주길 기다리는 관객이다. 다만 ‘오늘날의 관객 투쟁’이라는 담론 투쟁에는 부산스럽고 일탈적인 관객의 역사를 다시 강조하면서 등록하고 싶다. 오늘날 우리에게 합법적/공식적으로 주어지는 국면이 그것을 요하기 때문이다.
  관객 운동에서 시작된 90년대 시네마테크 운동은 현재 우리 영화계의 많은 제도와 인물을 남겼다. 기관이 만들어졌고 영화제가 생겼고, 누군가는 기관장이 되고 누군가는 위원장이 되었다. 그렇지만 정작 없어진 게 있으니, 바로 관객이라고 한다. 이 시기에 대구 지역 시네마테크 운동의 주축으로 활동한 한 선생님은 최근 이런 말을 했다. “지역에서 영화도 만들 수 있고 영화관도 생겼고 우리가 꿈꾸던 건 다 했네. 그런데 정작 관객이 없더라고……”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만 그 이유는 분명하다. 끈끈한 관객이 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와 낭만을 가질 수 있는 전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이혁래, 2023)에 즐거움과 끔찍함을 동시에 느낀다. 한 선생님의 말처럼 그들이 “르네상스도 열었지만, 동시에 지옥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의 상영관을 전전하는 관객들은 르네상스를 재현하는 동시에 지옥도 받아들이라는 요구를 받는다. 다시 한번, 관객은 상상되는 것인 동시에 그 잉여이며, 영화사의 핵심적이고 전통적인 관객은 언제나 일탈성과 친했다. 몸이 아니라 손을 활성화하라. 이것은 결론이라기보다 은밀한 제안이다.

금동현

1994년생. 대구 사람. 영화사연구자. 《마테리알》 편집동인, 오오극장 매거진 《삼삼오오》 편집장. 지금은 김기영 평전을 쓰고 싶다.

극장에서 〈하류인생〉(임권택, 2004)을 봤던 때를 기억하며 썼다. 비닐봉지에 뭘 담아 오신 할아버지 세 분, 하필 그 옆에 예민한 관객이 계셨고, 나는 그들 뒷자리였다. 화면에 글자나 인지 가능한 요소가 보일 때마다 할아버지들은 그 글자를 말하셨다. 임권택이 만들었네. 저기 어디 고등학교네. (비닐 만지는 소리) 근데 임권택이 살아있어? 옆자리에 예민한 관객은 한숨을 푹푹 쉬다 할아버지들이 말하실 때마다 한 마디씩 덧붙였다. 예, 임권택이 만들었습니다. 그게 뭐가 중요해요. 비닐, 좀...! 살아계셔요! 죄송하지만 〈하류인생〉을 대여섯번 본 나는 그 소리들이 너무 재밌었다. 와 저기가 어디 고등학교구나. 어른들이 발음하시는 ‘임권택’은 정말 입에 잘 붙네, 오 생각해보니 〈하류인생〉의 그저 흘러가는 형식은 판소리 같기도? 물론, 바쁜 와중에 보고 싶은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오는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그럴 때 소위, ‘관크’를 당하는 게 얼마나 짜증이 나는지 정말 안다. 그러나 가끔은 ‘관크’가 영화보다 재밌기도 하다. 〈하류인생〉은 걸작이지만…

2024/01/03
65호

1
김용환, 「코주부」, 《영화세계》, 1954년 12월.
2
정찬철, 「영화, 관객의 육체에 호소하다」, 《영화천국》 Vol. 50, 2016년 7월. 바로가기
3
한편 톰 거닝은 페둘라가 영화관의 기원을 일원화한 측면을 특히 비판한다. Tom Gunning, “Gabriele Pedullàs In Broad Daylight,” ARTFORUM, 2023. 02. 01. 바로가기
4
Ado Kyrou, “The Film And I,” The Shadows and Its Shadow-Surrealist Writings on the Cinema, City Lights Books, 2000, p. 131.
5
워커 퍼시, 이승학 역, 『영화광』, 섬과달, 2021, 7쪽.
6
Christian Keathley, Cinephilia and History or The Wind in the Trees, Indiana University Press, 2006, p. 33.
7
Ibid, p. 17.
8
Justin Remes, “The Sleeping Spectator: Non-human aesthetics in Abbas Kiaostami’s Five: Dedicated to Ozu,” Slow Cinema,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5, p. 235
9
Serge Daney, L’Exercice a été profitable, Monsieur, P.O.L, 1993, pp. 19-20. quoted in Raymond Bellour, “The Cinema Spectator: A Specual Memory,” Audiences, Amsterdam University Press, 2012, p. 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