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 근질근질할 때


    한 사람이 책상 앞에 앉는다. 가방을 의자 등받이에 걸어두고 필통과 신분증을 꺼낸다. 꺼낼 때 팔을 움직이다 팔꿈치로 오른편에 있는 벽과 살짝 부딪친다. 평소에 앉는 책상보다 조금 작게 느껴진다. 그러나 12년간 익숙했던 느낌이다. 스피커를 통해 한 여성이 말한다.
    “……수험 번호에 마킹해주시기 바랍니다.”
    영어 시험을 앞둔 그는 책상 앞에 반쯤 명상에 잠긴 채로 오른편 벽을 찬찬히 살펴본다. 그러다 다음의 단어를 발견한다.
    ‘시X’
    흑연으로 쓰인 한 단어. 그 자리에 앉아 그 단어를 쓴 사람―명확히 말해 그 학생―은 그 단어를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반드시 내뱉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정작 내뱉으면 또다른 XX같은 말을 들을 것 같아 샤프펜슬 혹은 연필을 쥐고 어렵사리 벽에 쓴 듯 했다. 그리고 그것을 지금 목격하게 된 한 사람은, 어떻게든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인간의 상태에 대해,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 손으로 쓰고자 하는 욕망에 대해 조금 더 고찰하고 싶었으나 시험이 시작되어 그런 생각은 집어치우기로 했다.
    그리하여 이번 화에서는 그 한 사람이 목격한 단어와 비슷한 방식으로 써진 것들을 살펴본다. 그 누구의 명령을 따른 것도 아니고 스스로 필기구를 찾아 끄적인 것들 말이다. 그런 일상 속 흔적을 보면서 그때 그 사람의 심정을 헤아려보기도 하고 공간과 사물에 얽힌 이야기를 상상해본다. 이것은 얼핏, 어느 날 수첩을 꺼내들고 떠오른 시 구절을 적는 누군가의 일상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쓸데없다. 금방이라도 지워지거나 쓰레기통에 던져질만한 것들이다. 그럼에도 그 순간, 결국 그렇게 써야만 했을 어떤 것일 테다.


“진~~~~~~~~~~짜로 맛있어요.” 감동이 긴 물결표만큼 깊다. 다른 사람들에게 찾아올 것을 홍보하기까지 한다. 그 아래의 이름들은 단체 손님인 듯하다. 사람들의 발자취가 글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A님 제보)

함께 온 것인지 혼자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의 낙서. 추측컨대 혼자 고뇌하며 쓴 것 같다. 누가 그 물음에 답해줄 수 있을지. 어쩌면 애틋한 사연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낙서는 오이도 등대로 올라가는 계단에 적혀 있다고 한다. (dongi님 제보)

왼쪽 아름다운 글자체로 ‘별이 떨어진다면 당신이 있는 공간으로’란 말이 쓰여 있고 한복판에 우주의 광경이 그려져 있다. 실제로 하늘에서 별이 떨어질 경우 사망 혹은 중경상을 입을 수 있지만 이때의 별은 그런 물리학적인 별이 아닐 것이다. 소중한 마음이 담긴 것이리라. 그러고 보니 이 벽 곳곳에 하트가 남발이다. 사랑이 넘치는 낙서들이다.1) 


문경 언니에게 문경이가 보낸다. 어린 내가 조금 큰 나를 부르는 느낌일까. 이름이 같은 사람을 부르면 신기한 느낌이 든다. 더욱이 같은 이름의 사람이 나에게 편지를 보낸다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하다. (문경님 제보) 


‘씁즙즙쯥’ 프로젝트를 아시는가? 비시각각 프로젝트에서 오른쪽 옆옆옆옆에 있는 프로젝트이다. (낭독을 꼭 한 번 들어보길 바란다. 기묘하고 새롭다. 여태껏 지구에서 체험하지 못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즙즙팀 효나님이 본인의 소설책을 보내주신 적이 있다. 봉투 입구에 ‘로사이드’라고 쓰여 있었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2) 문구 왼편의 동그라미 세 개는 눈 갖기도 하고 꽃잎 같기도 하다. 정체불명의 표식 때문에 한참을 생각해볼 수 있다. 


심심할 때 트위터에서 트윗을 날리는 것은 어딘가에 낙서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다른 점이라면 전 세계인들이 동시에 그 낙서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트윗 하나에 신생과 구원, 부활이 아이폰 액정 갈듯이 오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어쩌면 괄호에 쓰여 있는 것이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도 있다. 가끔은 가장 중요한 정보를 괄호 안에 담는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이런 아이러니다. (TB님 제보) 


 어느 날 친구로부터 받은 제보다. 그 친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가 아닌데 시 같아. 이것도 제보할 수 있니? 한 음 한 음 읽어봐. 아름다워. 처음엔 웃기려고 썼는데. 자꾸 읽으니까 음이 너무 예뻐. 어젯밤에 지었는데 오늘까지 생각나서 제보해봤어. 비시인데 그 음들이 시를 만들어. 비시가 읊조리면서 시가 되는 거야. 너도 자꾸 생각날 거야.” (YS님 제보) 


할머니 댁, 이모가 치는 피아노 위에 붙은 일정표다. 수면 이후 자유와 피아노가 반복된다. 아무 생각 없이 이 일정표를 줄줄 읊었는데 주변에 있던 가족들이 웃었다. 모든 일정의 마지막은 자유로 끝난다. 


    이것은 시인가 시가 아닌가? 

 


   나는 지난 날 네가 끄적인 것들을 알고 있다


   나에게는 별난 버릇이 하나 있다. 길 가다 받게 되는 전단지, 전시회나 콘서트홀, 극장에 있는 팸플릿, 교회 주보, 음식점 명함 등 어쩌다 손에 들어오는 종이들을 차곡차곡 모으는 것이다. 이것들은 베란다에 있는 큰 골판지 박스들 안에 마구잡이로 처박혀 있다. ‘나중에 더 자세하게 봐야지’ 하고 뭐든지 모아서 보관하는 바람에 이런 버릇이 생겼다. 이러한 버릇의 연장선으로 친구들이 준 편지나 쪽지들도 거의 전부 모아둔다. 책상 아래 유리장에는 작은 상자들이 있는데(예쁜 모양의 상자를 모으는 버릇도 있다), 그 안에 모아둔 편지와 쪽지들이 있다. 가끔 심심할 때 이것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도대체 언제 누가 어디서 날 부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언젠가부터 보관하고 있는 쪽지. 직접 부르지 않고 굳이 쪽지를 건네면서 내 이름을 강렬히 불러준 친구. 누군지 알 수 없는 그 친구가 그립다. 


짓궂은 장난은 짓궂은 장난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누군가를 위해 기도해주는 마음에 대해 고맙다고 느낀다. 애정표현을 쪽지로 하는 친구다. 이 친구도 그립다.

위의 쪽지는 누가 썼던 것인지 얼핏 기억이 난다. 우스운 말로 다른 아이들을 곧잘 웃기던 친구였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아래에 있는 쪽지는…… 누구지? 전혀 모르겠다.

    이밖에 사진으로 찍지 않은 편지와 쪽지들을 본다. 읽다가 재미있는 대목에서 웃기도 하면서, 무엇보다 친구의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반갑다. 그땐 그랬지, 하며 회상에 잠기기도 한다.
    쪽지에 쓰인 건 대개 쓸데없는 말들이다. 이를테면 ‘선생님 저거 브로치 누르면 변신해?ㅋㅋㅋ’ ‘SHIN HWA ZZANGㅋㅋㅋㅋ’ ‘아 열받어ㅡㅡ; 너 같은 경우에는 신뢰성도 있고 어쨌든 편한데 쟤는 물건 빌려주면 잃어버리기나 하고 돈도 안 갚고-_-;’ ‘공부해 ㄱ- 물어버리기 전에!!’ 같은 말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그 말들과 함께하고 있다. 교실에서 함께 우당탕 하던 말들. 어떤 말들은 단지 그 순간이 담겨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하다.


   비시 인터뷰 : 당신이 생각하는 시가 아닌 것


    다른 사람들은 비시(非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이번 화에서는 김기형3)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나무처럼 뼈처럼 밤처럼, 침묵의 얼굴처럼. 인제 자작나무 숲에서 김기형 시인.


    Q. 비시, 즉 시가 아닌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누군가 ‘시가 아닌 것이 있어?’라고 묻는다면 ‘그런 게 어디 있어?’라고 대답할 것 같고, ‘그럼 다 시야?’ 묻는다면 ‘어떻게 다 시야?’라고 대답할 것 같다. 만약 비시를 찾았다고 해도 그것이 시가 되는 지점은 조금이라도 있다고 본다. 따라서 명확히 대답하기 어렵다.

    Q. 결론 내리기에 어려워도, 본인의 체험 중 이것은 비시에 가깝다고 느낀 것은 없는가?


    문득 대자연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한다. 멋있는 자연 경치를 보면 시가 떠오르지 않아? 그러나 완벽한 시 앞에서, 그것을 시라고 명명할 수가 없다. 언젠가 여행지에서 동굴에 들어가게 된 적이 있다. 요즘 동굴들이 루미나리에처럼 꾸며져 있는 것과 달리 그 동굴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자연 그대로의 날것을 마주한 순간,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그 당시, 인간의 속은 어떻게 생겼을까 고민하던 때였다. 그런데 그곳에서, 동굴이 나의 속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입장권을 끊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망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시는 어떤 것을 떠올리고 상상하고 이미지로 가져올 수 있는 여지를 주지만 내 눈앞에 보이는 그 광경은 그럴 여지가 없었다.

    Q. 일종의 공포감인가?


    외형적 공포도 있었지만, 근원적 공포도 작용했다고 본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의 속이라면 그것을 끝까지 참고 생각하고 그릴 수 있을 것 같지만, 흠도 없고 견고하며 명확히 실재하는 그 무엇인가를 보았을 때는 무섭다고 느꼈다. 그것은 언어로 옮길 수 없는 것이었다.

    Q. 그렇다면, 오히려 사소하거나 인간이 만든 조잡한 것들이 시일까?


    일상의 공간에서 마주하는 것은 대개 인공적인 것이다. 거리에 심은 가로수조차 우리가 지정한 장소에 특정한 모습으로 있다. 결국 인간의 손이 닿은 어떠한 형태이다. 사람의 손이 닿았다는 것 자체가 가지는 불완전함, 불온함 때문에 시로 이야기할 것이 생겨난다. 지금의 나로선 그렇다. 그것의 본질, 원형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놓아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시로 이야기한다.

    Q. 혹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는가?


    앞서 동굴에 대한 공포를 말하긴 했지만, 사실 또 한편으로는 숲과 같은 공간을 사랑하기도 한다. 숲을 매우, 열광적으로 좋아한다. 얽히고설킨 그곳에 원형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곳에 머물면 시의 우물이 넓어지는 것 같다. 낯설게 만들어줘서 좋다.

양지윤

비시(非詩)에 대해 탐구합니다. 시가 아니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텍스트를 다룹니다. 직접 목격한 비시 텍스트를 상시 제보 받습니다. 관련된 생각과 일화도 보내주세요. 함께 나누며 생각하고 싶습니다. 메일 jiyangyoon@gmail.com, 인스타그램 @bisi_write

2018/03/27
4호

1
‘별이 떨어진다면 당신이 있는 공간으로’라는 말은 성동혁 시인의 시 「1226456」의 구절이기도 하다. (비)시가 무엇인지 또 고민하게 되는 지점이다.
2
인터넷을 검색하면 ‘로사이드’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나온다. 봉투의 표식과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로사이드와 관련된 사이트에 들어가면 “의미 없는 낙서 또는 장애에서 비롯된 증상으로 여겨져 버려지고 금지되던 예술 작업, 제도권 교육과 관계없이 지속되어온 독창적인 창작세계를 재조명하고 사회에 소개합니다”라고 쓰여 있다. 비시각각에서도 막 낙서에 대해 소개하던 참이었는데!
3
201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으로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