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나 아냐
8화(최종화) 담배 한 개비의 시간
담배 한 개비의 시간1)
박민정
실로 오랜만이었다. 집 밖으로 외출한 것도, 무대를 마주한 것도. 그곳은 한때 짧은 기간 동안 내 집이기도 했던 연희문학창작촌이다. 작가로 살아온 11년간, 무수한 추억을 만들었던 곳이다. 아직 보수정권 아래였던 (또 가난했던, 늘 슬펐던) 이십대에 언제나 결연한 마음, 투쟁하는 마음으로, 또한 언제까지고 깨지 않고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으로도 그곳을 오갔다. 그 무대에 올라본 적 또한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마치 그 무대의 전경화가 생전 처음인양 낯설었다. 아마도 2020년의 모든 풍경들이 그렇게 기억되리라. 평소 공연과 전시를 잘 다녀본 편도 아니었고 이른바 ‘집콕’은 내 오래된 생활양식이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강요받는 세상에서 일상은 위화감의 연속이었다. 객석에는 방석과 핫팩이 하나씩 놓여 있었는데, 노상공연이나 집회에서 이런 물건을 받아본 지가 언제였나, 잠시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창작집단 담의 공연은 성긴 일상의 틈에 끼어들었다.
평생 작품 읽고 작품 감상하는 데 시간을 쏟아온 사람에게도 공연이라는 형식은 너무 오랜만이어서, 본래 나는 이 작품들을 매개로 2차 창작을 하려고 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만 예술대에 재학하던 시절, 문학으로 뭔가 ‘보여준다’는 것이 가능하다면 무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생각했던 일이 떠올랐다. 자신들의 작품을 나무에 걸고 내다 팔기도 하는 다른 과들을 보면서 느꼈던 열등감은 연극을 보면 비로소 해소되곤 했다. 배우의 육체를 통해 빚어지는 무대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추상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써야 하는 소설가에게 꿈의 장소다. 탐나는 대사를 들을 때도, 캐릭터의 입체성이 배우의 몸을 통해 드러날 때도 바라왔던 모습을 비로소 보는 듯 설렌다. 〈우아한 연주〉의 윤성이 내내 앙칼진 표정으로 객석을 응시하다 “제발 내 퀴어니스를 도려내는 혐오를 멈춰줘.”라고 말할 때, 또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의 부부장검사 윤희(역의 배우)가 그 또렷한 발성으로 상대역의 이름을 부를 때, 〈파란 돌멩이가 굴러올 때〉의 은재가 말하는 ‘돌멩이’라는 3음절이 배우의 반짝이는 눈빛 위에서 공명할 때 역시 나는 그 장소에 가 있었다. 문학의 장소라고 내가 부르는 곳. 내가 만든 서사와 공간이 타인의 육체를 통해 현현하는 곳, 아마도 내가 그 장소를 더 오래 탐냈더라면 다른 장르의 글을 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십대의 한 자락에는 매일 잠자던 침대에서도 건너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웠던 극장에서 나는 오랜만에 가장 멀리 떠나는 경험을 했다.
*
먼저 〈우아한 연주〉 윤성과 수민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한때 나를 ‘지구상에 마지막 남을 헤테로 여자’ ‘인류 최후의 헤테로 여자’라고 조롱했던 게이 친구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누구에게나 편하게 커밍아웃을 했던 (혹은 그런 ‘세레모니’조차 거치지 않았던) 친구가 내게 거침없이 ‘게이’로 다가왔다는 점을 두고 나는 내가 퀴어 프렌들리한 인간이라고 착각했었다. ‘내게는 게이 친구가 있다!’는 것이 일종의 자랑 가깝기도 했을까. 내가 수없이 혐오발언을 할 때마다 ‘그건 백퍼센트 혐오다’라고 언제나 말해주면서도 나를 버리지 않았던 친구. 내가 레즈비언 부부의 이야기를 쓸 때 취재에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고, 또한 그 소설로 ‘정치적 레즈비언이다’라느니 ‘누가 봐도 헤테로인 작가가 왜 이런 소설을 쓰느냐’라는 비난을 받았을 때도 편을 들어주었던 친구. 세상이 바뀌고 나이가 들면서 많은 것들을 잃고 또 잊어간다고 생각하지만 친구와 주고받았던 사랑은 갈수록 또렷해지는 지금의 나에게 〈우아한 연주〉는 각별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두 여성 검사가 등장하는 작품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절망으로 허방 짚으며 지나왔던 길을 달려오는 후배 동생 자식을 보는 마음을 나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내가 겪어봐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러나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의 나약함과 비겁함뿐이라는 걸 윤희의 표정은 말하고 있었다. 고작 사십대 중반의 나이에 그걸 다 알아야 한다니 인생이 가혹하다는 것도. 언니니까, 언니라서 나를 이해해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언니는 절대 지금의 나를 알아주지 않으리라는 비정함이 유리에겐 있었다. 나랑 다른 길을 걸어가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는 언제나 쓰고 있지만 영원히 부치지 못하리라는 것도 나는 조금 알 것 같다. 아, 이제 겨우 서른여섯인데. 어른으로 너무 오래 살고 있다니 놀라운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 때 상상했던 나의 평균 수명은 서른 이전이었다. 이렇게까지 명줄이 길 줄도 몰랐건만.
다음은 나에게 너무나 특별했던 캐릭터 은재에 대해서 이야기해야겠다. 〈파란 돌멩이가 굴러올 때〉의 은재는 연애를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도 있다. 인생에 연애가 없는 사람. 정확히 말하면 그 모든 감정, 사건, 기분, 행동, 상황, 정황, 정서, 뉘앙스, 디테일이 그저 ‘연애’ 혹은 ‘연애감정’이라는 한 단어에 수렴되지 않는 사람. 그런 식으로 손쉽게 나의 모든 것을 연애라는 말로 요약하려 들지 않는 사람. 그러나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은 얼마나 퀴어한가. 연애 안에 사는 게 아니라, 연애 밖에 살고 있다는 사실도 끝없이 설명해야 하고 증명받아야 하고 납득받아야 한다. 은재 역의 배우가(어쩔 수 없이 배우의 육체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겠다, 은재 역의 배우 얼굴은 너무나도 은재였다!) 볼 위에 내려앉은 생기와 함께 ‘돌멩이’를 찾고 있다고, ‘돌멩이’라는 말을 발음할 때, 나는 은재와 수현이 이어지지 않기를 너무나 바랐다. ‘이어진다’니, 그렇게 함께 돌멩이를 찾아 연인이 되어 문밖을 나서다니 그건 너무 평범한 이야기니까. 은재는 그가 없어진 후 그에게는 사실 같이 찾을 의향도 없었던 돌멩이를 ‘진짜로’ 찾는다. 진정한 순간, 진정한 에피파니, 은재가 홀로 남는 결말이라 너무나 좋았다.
*
공연이 끝나고, 나는 연희문학창작촌에서 힘들게 흡연할 만한 장소를 찾아 담배 한 개비를 피웠다. 그러면서 공연에 대해 조금 이야기했던 것 같다. 내게 팬데믹만큼 큰 변화 중 하나는 집에서든 밖에서든 더는 담배를 자유롭게 필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한데, 그날 담배 한 개비의 시간도 아쉬운 만큼 소중한 시간이었다.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나는 내내 윤성과 윤희, 은재를 생각했다. 그 시간 속에서 그들은 ‘진짜로’ 있었다.
박민정
실로 오랜만이었다. 집 밖으로 외출한 것도, 무대를 마주한 것도. 그곳은 한때 짧은 기간 동안 내 집이기도 했던 연희문학창작촌이다. 작가로 살아온 11년간, 무수한 추억을 만들었던 곳이다. 아직 보수정권 아래였던 (또 가난했던, 늘 슬펐던) 이십대에 언제나 결연한 마음, 투쟁하는 마음으로, 또한 언제까지고 깨지 않고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으로도 그곳을 오갔다. 그 무대에 올라본 적 또한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마치 그 무대의 전경화가 생전 처음인양 낯설었다. 아마도 2020년의 모든 풍경들이 그렇게 기억되리라. 평소 공연과 전시를 잘 다녀본 편도 아니었고 이른바 ‘집콕’은 내 오래된 생활양식이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강요받는 세상에서 일상은 위화감의 연속이었다. 객석에는 방석과 핫팩이 하나씩 놓여 있었는데, 노상공연이나 집회에서 이런 물건을 받아본 지가 언제였나, 잠시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창작집단 담의 공연은 성긴 일상의 틈에 끼어들었다.
평생 작품 읽고 작품 감상하는 데 시간을 쏟아온 사람에게도 공연이라는 형식은 너무 오랜만이어서, 본래 나는 이 작품들을 매개로 2차 창작을 하려고 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만 예술대에 재학하던 시절, 문학으로 뭔가 ‘보여준다’는 것이 가능하다면 무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생각했던 일이 떠올랐다. 자신들의 작품을 나무에 걸고 내다 팔기도 하는 다른 과들을 보면서 느꼈던 열등감은 연극을 보면 비로소 해소되곤 했다. 배우의 육체를 통해 빚어지는 무대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추상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써야 하는 소설가에게 꿈의 장소다. 탐나는 대사를 들을 때도, 캐릭터의 입체성이 배우의 몸을 통해 드러날 때도 바라왔던 모습을 비로소 보는 듯 설렌다. 〈우아한 연주〉의 윤성이 내내 앙칼진 표정으로 객석을 응시하다 “제발 내 퀴어니스를 도려내는 혐오를 멈춰줘.”라고 말할 때, 또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의 부부장검사 윤희(역의 배우)가 그 또렷한 발성으로 상대역의 이름을 부를 때, 〈파란 돌멩이가 굴러올 때〉의 은재가 말하는 ‘돌멩이’라는 3음절이 배우의 반짝이는 눈빛 위에서 공명할 때 역시 나는 그 장소에 가 있었다. 문학의 장소라고 내가 부르는 곳. 내가 만든 서사와 공간이 타인의 육체를 통해 현현하는 곳, 아마도 내가 그 장소를 더 오래 탐냈더라면 다른 장르의 글을 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십대의 한 자락에는 매일 잠자던 침대에서도 건너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웠던 극장에서 나는 오랜만에 가장 멀리 떠나는 경험을 했다.
먼저 〈우아한 연주〉 윤성과 수민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한때 나를 ‘지구상에 마지막 남을 헤테로 여자’ ‘인류 최후의 헤테로 여자’라고 조롱했던 게이 친구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누구에게나 편하게 커밍아웃을 했던 (혹은 그런 ‘세레모니’조차 거치지 않았던) 친구가 내게 거침없이 ‘게이’로 다가왔다는 점을 두고 나는 내가 퀴어 프렌들리한 인간이라고 착각했었다. ‘내게는 게이 친구가 있다!’는 것이 일종의 자랑 가깝기도 했을까. 내가 수없이 혐오발언을 할 때마다 ‘그건 백퍼센트 혐오다’라고 언제나 말해주면서도 나를 버리지 않았던 친구. 내가 레즈비언 부부의 이야기를 쓸 때 취재에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고, 또한 그 소설로 ‘정치적 레즈비언이다’라느니 ‘누가 봐도 헤테로인 작가가 왜 이런 소설을 쓰느냐’라는 비난을 받았을 때도 편을 들어주었던 친구. 세상이 바뀌고 나이가 들면서 많은 것들을 잃고 또 잊어간다고 생각하지만 친구와 주고받았던 사랑은 갈수록 또렷해지는 지금의 나에게 〈우아한 연주〉는 각별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두 여성 검사가 등장하는 작품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절망으로 허방 짚으며 지나왔던 길을 달려오는 후배 동생 자식을 보는 마음을 나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내가 겪어봐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러나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의 나약함과 비겁함뿐이라는 걸 윤희의 표정은 말하고 있었다. 고작 사십대 중반의 나이에 그걸 다 알아야 한다니 인생이 가혹하다는 것도. 언니니까, 언니라서 나를 이해해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언니는 절대 지금의 나를 알아주지 않으리라는 비정함이 유리에겐 있었다. 나랑 다른 길을 걸어가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는 언제나 쓰고 있지만 영원히 부치지 못하리라는 것도 나는 조금 알 것 같다. 아, 이제 겨우 서른여섯인데. 어른으로 너무 오래 살고 있다니 놀라운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 때 상상했던 나의 평균 수명은 서른 이전이었다. 이렇게까지 명줄이 길 줄도 몰랐건만.
다음은 나에게 너무나 특별했던 캐릭터 은재에 대해서 이야기해야겠다. 〈파란 돌멩이가 굴러올 때〉의 은재는 연애를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도 있다. 인생에 연애가 없는 사람. 정확히 말하면 그 모든 감정, 사건, 기분, 행동, 상황, 정황, 정서, 뉘앙스, 디테일이 그저 ‘연애’ 혹은 ‘연애감정’이라는 한 단어에 수렴되지 않는 사람. 그런 식으로 손쉽게 나의 모든 것을 연애라는 말로 요약하려 들지 않는 사람. 그러나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은 얼마나 퀴어한가. 연애 안에 사는 게 아니라, 연애 밖에 살고 있다는 사실도 끝없이 설명해야 하고 증명받아야 하고 납득받아야 한다. 은재 역의 배우가(어쩔 수 없이 배우의 육체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겠다, 은재 역의 배우 얼굴은 너무나도 은재였다!) 볼 위에 내려앉은 생기와 함께 ‘돌멩이’를 찾고 있다고, ‘돌멩이’라는 말을 발음할 때, 나는 은재와 수현이 이어지지 않기를 너무나 바랐다. ‘이어진다’니, 그렇게 함께 돌멩이를 찾아 연인이 되어 문밖을 나서다니 그건 너무 평범한 이야기니까. 은재는 그가 없어진 후 그에게는 사실 같이 찾을 의향도 없었던 돌멩이를 ‘진짜로’ 찾는다. 진정한 순간, 진정한 에피파니, 은재가 홀로 남는 결말이라 너무나 좋았다.
공연이 끝나고, 나는 연희문학창작촌에서 힘들게 흡연할 만한 장소를 찾아 담배 한 개비를 피웠다. 그러면서 공연에 대해 조금 이야기했던 것 같다. 내게 팬데믹만큼 큰 변화 중 하나는 집에서든 밖에서든 더는 담배를 자유롭게 필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한데, 그날 담배 한 개비의 시간도 아쉬운 만큼 소중한 시간이었다.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나는 내내 윤성과 윤희, 은재를 생각했다. 그 시간 속에서 그들은 ‘진짜로’ 있었다.
박민정
소설 쓰는 박민정입니다. 장르 간 협업에 관심이 많은데 의욕이 넘쳤는지 이번에는 창작에 실패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2021/01/26
38호
- 1
- 지난 2020년 10월 24일, 25일 연희문학창작촌에서 ‘이거 나 아냐’의 확장형 프로그램인 낭독공연 <이게 나야>를 진행했습니다. <이게 나야> 속 세 편의 희곡에는 ‘이거 나 아냐’의 활동을 통해 만들어진 세 명의 인물들이 각각 등장합니다. (희곡의 자세한 내용은 《비유》 쓰다 36호(2020. 12)에서도 확인해보실 수 있습니다. 바로가기) 낭독공연 <이게 나야>를 관람한 박민정 소설가의 리뷰를 이번 화에 게재합니다. 독자분들께서도 동시대를 살아가며 인물의 재현에 관해 고민하는 다양한 창작자들의 목소리를 살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