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시나리오(2018~2022)
미자의 세계
[등장인물]
미자 (천미자, 34살)
수영 (한수영, 21살)
소녀 (여고생, 교복을 입고 있다)
[시간]
현대, 겨울
[무대]
여자교도소 수감실.
무대 왼쪽에(관객 기준) 앉은뱅이책상이 있다.
책상 위에는 작은 성모마리아상과 필기도구, 편지지, 책 몇 권이 놓여 있다.
무대 오른쪽 뒤에는 화장실이 왼쪽엔 가로로 긴 다섯 칸짜리 선반이 있다.
선반은 미자와 수영이 사용하는 칸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어 있다.
벽에는 빨랫줄과 선풍기가 걸려 있다.
방은 전체적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1
여자교도소 수감실.
미자,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편지를 쓰고 있다.
책상 위에는 작은 성모마리아상과 필기도구, 편지지, 책 몇 권이 놓여 있다.
미자, 편지지에 글을 써내려가다가 잠시 손을 멈추고 생각에 빠진다.
미자,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가 천천히 눈을 감으면,
교복을 입은 소녀가 무대 왼쪽에서 허밍을 하며 걸어나온다.
미자, 다시 눈을 뜨면 소녀, 허밍을 멈추고 객석을 본다.
사이.
소녀, 천천히 웃는다.
미자, 소녀를 따라 웃음 짓는다.
2
미자, 1장과 마찬가지로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편지를 쓰고 있다.
수영,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낱말 맞추기 책과 씨름 중이다.
수영, 고개 들어 앉아 있는 미자를 올려다본다.
미자, 답이 없자 수영, 책에 자기 얼굴을 파묻어버린다.
수영, 몸을 일으켜 앉는다.
수영, 미자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수영, 낱말 맞추기 책을 본다.
수영, 책상에 있는 편지지를 본다.
미자, 웃음으로 답을 대신한다.
들꽃과 잡초가 섞여 있는 엉성한 꽃다발을 든 소녀, 무대 왼쪽에서 등장한다.
소녀, 누군가를 기다리듯 먼 곳을 바라본다.
수영과 소녀, 미자를 본다.
미자, 손가락으로 건반을 두드리듯 천천히 책상을 두드린다.
수영 조금 더 미자 쪽으로 몸을 틀면, 미자, 책상을 두드리는 것을 멈춘다.
소녀, 무대를 천천히 돌아다닌다.
소녀에게 무대는 교도소가 아니다.
미자, 책상 위에 있던 물건을 살펴보다 지우개를 든다.
수영, 자리에서 일어나 선반을 뒤진다.
수영, 웃는 얼굴을 한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양말을 찾아낸다.
미자, 지우개를 책상에 내려놓으면 수영, 자리로 돌아온다.
수영, 자신의 손에 양말 한 짝을 씌운다.
미자,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말을 시작한다.
수영, 고개 들어 천장을 본다.
미자, 수영을 따라 고개 들어 천장을 본다.
소녀도 둘을 따라 고개 들어 천장을 본다.
수영, 미자를 보면 미자도 수영을 본다.
수영, 자신의 손에 낀 양말을 툭툭 쳐본다.
소녀, 무대 뒤쪽 선반에 등을 받치고 앉아 눈을 감는다.
꽃다발을 쥔 채로 눈을 감고 있는 소녀는 부케를 든 신부 같기도 하고 관에 누워 있는 시체 같기도 하다.
미자, 책상에 있는 작은 마리아상을 들어 수영의 앞에 놔준다.
수영, 마리아상에게 양말을 인사시켜 준다.
수영은 한동안 소꿉장난하듯 조각상과 양말을 가지고 장난을 친다.
미자, 누워 있는 소녀에게 한걸음 다가간다.
짧은 사이.
바람이 부는 소리.
소녀, 천천히 눈을 뜨고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미자에게 손을 뻗는다.
사이.
미자, 소녀가 내민 손을 조심스럽게 잡는다.
소녀, 다시 눈을 감는다.
취침 점호를 알리는 목소리와 함께 암전.
3
미자, 책상을 정리하고 있다.
수영, 미자 옆에 누워 심드렁한 얼굴로 편지를 읽고 있다.
미자,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낱말 맞추기 책을 살펴보다 피식 웃는다.
미자, 수영을 본다.
미자, 몸을 일으킨다.
미자, 선반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수영, 몸을 일으켜 선반 쪽으로 간다.
미자, 선반 위에 접혀 있던 젖은 수건으로 선반을 닦는다.
수영, 무언가 말하려다가 말고
미자, 선반 닦는 것을 멈추고 수영을 본다.
사이.
수영, 미자가 선반을 닦은 수건을 받아 화장실에 던져놓는다.
수영, 빨랫줄로 가 수건과 양말을 걷는다.
마른 수건과 양말을 끌어안은 수영, 자리로 가 앉는다.
미자, 그 옆에 앉는다.
미자, 손가락으로 건반을 두드리듯 책상을 두드리다가 멈춘다.
소녀, 무대 왼쪽에서 등장한다.
수영, 수건을 개기 시작한다.
미자, 수영을 따라 수건을 갠다.
수영, 미자 앞에 있는 수건과 양말들을 뺏어 자기 앞에 둔다.
수영, 빠르게 수건을 개고 양말을 묶는다.
소녀, 웃곤 무대 여기저기를 천천히 구경한다.
소녀에게 무대는 교도소 수감실이 아닌 공터다.
수영, 실수로 쌓아놓은 수건을 엎어버린다.
수영, 씩씩거리며 다시 수건을 갠다.
수영, 뿌듯한 얼굴로 미자에게 다 갠 수건을 보여준다.
미자, 수건을 토닥여준다.
수영, 수건과 양말을 품에 안고 일어난다.
수영, 선반에 수건과 양말을 정리해서 넣는다.
소녀, 웃곤 허밍을 한다.
1장에서와 같은 허밍이다.
미자는 무대 왼쪽에 소녀는 무대 오른쪽에 서 있다.
사이.
소녀, 미자에게 손을 내민다.
미자, 소녀에게 손을 내민다.
소녀, 미자의 손을 잡는다.
소녀가, 왼쪽으로 한 발자국 걸어간다.
소녀, 왼쪽으로 한 발자국 더 걸어간다.
소녀, 한 발자국 더 걸어간다.
미자, 웃는 소녀를 따라 슬쩍 웃는다.
5
미자, 홀로 앉은뱅이책상 근처에 앉아 있다.
작은 마리아상 옆에 ‘나’를 연기했던 수영의 캐릭터 양말이 놓여 있다.
미자, 그 둘을 보고 있다.
수영, 오른쪽에서 등장한다.
수영, 외투 주머니에서 편지 봉투를 꺼낸다.
수영, 미자에게 편지를 건넨다.
미자, 건네받은 편지를 한참이나 바라본다.
수영, 벗은 외투를 대충 접어 선반에 넣는다.
미자, 편지를 노트 사이에 조심스럽게 끼운다.
수영, 상의 앞주머니에서 색색깔의 실뭉치를 꺼낸다.
실은 굵기와 길이가 제각각이다.
수영, 미자의 옆으로 가 앉는다.
미자, 손을 내민다.
수영, 미자의 손목에 여러 가지 색을 대본다.
수영, 실뭉치에서 하얀색 파란색 실만 고른다.
수영, 이런저런 방법으로 미자의 손목 사이즈를 가늠해본다.
미자, 그 모습을 말없이 본다.
소녀, 무대에 등장한다.
소녀, 서 있기도 하고 앉아 있기도 하며 자유롭게 움직인다.
수영, 다른 색 실을 이번엔 자신의 손목에 대어본다.
수영, 미자를 본다.
소녀, 건반을 두드리듯 손가락으로 선반을 치다가 미자에게 말한다.
소녀, 위를 올려다본다.
짧은 사이
미자, 수영이 늘어놓은 실뭉치에서 노란색과 분홍색을 골라 수영에게 준다.
미자, 말없이 웃는다.
수영, 실뭉치에서 미자가 골라준 색들을 빼낸다.
무대를 돌아다니던 소녀, 뒤돈다.
소녀, 다시 무대를 천천히 돌며 얘기를 늘어놓는다.
수영, 실 팔찌 만드는 것을 멈춘다.
소녀, 미자의 옆에 앉는다.
소녀, 미자에게 기댄다.
사이.
미자, 고개 숙이고 있는 수영을 본다.
수영, 웃는다.
수영, 손가락으로 실을 만지작거린다.
사이.
수영, 고개 들어 미자를 본다.
수영, 미자의 얼굴을 보고 슬쩍 웃는다.
수영, 미자의 옆에 가 쪼그려 앉는다.
소녀, 눈을 감고 허밍을 한다.
수영, 미자에게 손을 내민다.
바람이 불어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
미자, 수영이 내민 손을 잡는다.
수영, 미자의 손을 꽉 잡는다.
6
미자, 책상 앞에 앉아 편지를 읽고 있다.
소녀, 뒤에서 미자를 끌어안고 있다.
미자, 편지를 읽어내려간다.
미자, 편지를 읽어내려가는 속도 점점 빨라진다.
소녀, 미자를 안고 있던 팔을 천천히 푼다.
소녀, 편지를 읽는 미자를 보다가 무대 왼쪽으로 퇴장한다.
사이
미자, 다 읽은 편지를 손에 쥐고 구긴다.
7
미자, 선반 앞에 서 있다.
수영, 담요를 끌어안고 실 팔찌를 만들고 있다.
수영, 흘깃흘깃 미자를 본다.
사이.
사이.
수영, 실을 잘못 엮었는지 다시 푼다.
수영, 미자에게 새끼손가락을 흔든다.
사이.
미자,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새 편지지를 본다.
수영, 실 팔찌 만들기를 다시 시작한다.
미자, 무대를 천천히 돌며 이야기한다.
수영, 완성되어가는 흰색과 파란색이 섞인 실 팔찌를 이리저리 살펴본다.
수영, 파란색과 흰색이 섞인 실 팔찌를 완성하지 않고 노란 실과 분홍 실을 꺼내 엮기 시작한다.
미자, 수영의 옆으로 걸어간다.
미자, 수영을 내려다본다.
수영, 미자를 올려다본다.
수영, 미자와 눈이 마주치자 웃어준다.
미자, 수영에게 손을 내민다.
수영, 미자의 손을 잡는다.
미자, 천천히 수영의 손을 놓는다.
수영, 다시 팔찌를 만들기 시작한다.
파란색과 흰색이 섞인 실 팔찌를 만들 때와 다르게 건성이다.
미자, 앉은뱅이책상이 있는 무대 왼쪽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수영, 어우 소리를 내며 실을 빠르게 엮는다.
미자, 수영을 본다.
미자,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사이.
사이.
무언가 무거운 것이 넘어가는 소리.
수영,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작은 마리아상과 웃는 얼굴을 한 양말을 본다.
미자, 점점 격앙되어간다.
미자, 수영을 본다.
사이.
미자, 어딘가 꿈꾸는 듯한 얼굴이 된다.
미자, 앉은뱅이책상에 놓여 있는 작은 마리아상을 들어 손에 쥔다.
수영, 조금 물러난다.
미자, 수영에게 천천히 걸어간다.
수영, 자기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 물러난다.
미자, 작은 마리아상을 쥔 손을 높이 든다.
미자, 작은 마리아상을 쥔 손을 천천히 편다.
조각상, 떨어져 바닥을 구른다.
사이.
미자, 몸을 숙여 수영과 눈을 맞춘다.
미자, 수영의 얼굴을 감싸쥔다.
미자, 웃는다.
미자, 수영을 밀어낸다.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
간수가 조용을 외친다.
무대 오른쪽에서 소녀가 등장해 둘을 본다.
미자, 소녀를 본다.
수영, 미자를 올려다본다.
수영, 앉은 상태로 서 있는 미자를 끌어안는다.
사이.
미자,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수영을 내려다본다.
수영, 미자를 더 꽉 끌어안는다.
미자, 다시 소녀를 보면
소녀, 미자에게 천천히 손을 뻗는다.
8
조명, 무대 가운데 서 있는 미자와 소녀만을 비춘다.
소녀, 웃는다.
미자, 소녀에게 손을 내민다.
소녀, 미자의 손을 잡는다.
소녀, 잡힌 손을 봤다가 고개 들어 미자를 본다.
소녀, 맞잡은 손을 보고 웃는다.
사이.
미자, 소녀와 눈을 맞춘다.
9
테이프로 감아놓은 작은 마리아상 옆에 수영의 양말이 있다.
수영,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그것들을 보고 있다.
무대 오른쪽에서 미자 등장한다.
9장에서 미자의 걸음걸이는 어딘가 불안하다.
수영,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미자에게 간다.
미자, 외투를 벗어 선반에 넣는다.
수영, 미자의 옷을 털어준다.
사이
미자를 보던 수영, 앞주머니에서 실 팔찌를 몰래 꺼낸다.
미자, 눈 감는다.
미자, 수영에게 손을 내민다.
수영, 미자의 손목에 하얀색, 파란색이 섞인 실 팔찌를 채워준다.
미자,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실 팔찌를 본다.
미자, 말없이 실 팔찌를 본다.
미자, 팔찌를 쓰다듬어본다.
수영, 환하게 웃는다.
수영, 미자의 얼굴을 보고 조금 당황한 얼굴이 된다.
미자, 고개를 젓는다.
수영, 걸음걸이가 불안한 미자를 잡아준다.
머리카락을 넘기는 미자의 손이 떨린다.
미자, 웃는다.
수영, 떨리는 미자의 손을 주물러준다.
미자, 기침을 한다.
사이.
미자, 목소리에 쇳소리가 섞이기 시작한다.
미자, 수영을 본다.
수영, 미자를 본다.
미자, 수영에게 웃어준다.
미자, 기침을 하면 손에 피가 묻어나온다.
미자, 피가 묻은 손바닥을 본다.
수영, 놀라 일어나려고 하면 미자가 붙잡는다.
미자, 수영에게 웃어준다.
미자, 다시 기침한다.
수영, 급하게 선반에서 수건을 꺼내 미자의 입가에 대준다.
수영, 어쩔 줄 몰라 하며 눈물을 뚝뚝 흘린다.
소녀, 무대 왼쪽에서 등장한다.
소녀에게 무대는 공터다.
미자, 수영을 본다.
미자, 수영의 얼굴을 한 번 쓰다듬어준다.
미자가 기침을 할 때마다 수영의 얼굴이 더욱더 일그러진다.
수영, 미자를 끌어안는다.
소녀, 작게 허밍하며 무대를 돈다.
미자, 자신의 손목에 감겨 있는 실 팔찌를 본다.
소녀, 허밍을 멈추고 미자를 본다.
수영, 울며 웃는다.
미자, 수영에게서 천천히 몸을 뗀다.
미자, 수영을 보고 수영, 미자를 본다.
소녀, 둘을 본다.
사이
미자, 웃는다.
미자, 울고 있는 수영에게 조심스럽게 입 맞춘다.
암전
기침 소리, 사람이 넘어가는 소리.
소녀의 허밍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하면 무대, 막 내린다.
끝
미자 (천미자, 34살)
수영 (한수영, 21살)
소녀 (여고생, 교복을 입고 있다)
[시간]
현대, 겨울
[무대]
여자교도소 수감실.
무대 왼쪽에(관객 기준) 앉은뱅이책상이 있다.
책상 위에는 작은 성모마리아상과 필기도구, 편지지, 책 몇 권이 놓여 있다.
무대 오른쪽 뒤에는 화장실이 왼쪽엔 가로로 긴 다섯 칸짜리 선반이 있다.
선반은 미자와 수영이 사용하는 칸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어 있다.
벽에는 빨랫줄과 선풍기가 걸려 있다.
방은 전체적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여자교도소 수감실.
미자,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편지를 쓰고 있다.
책상 위에는 작은 성모마리아상과 필기도구, 편지지, 책 몇 권이 놓여 있다.
미자, 편지지에 글을 써내려가다가 잠시 손을 멈추고 생각에 빠진다.
미자,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가 천천히 눈을 감으면,
교복을 입은 소녀가 무대 왼쪽에서 허밍을 하며 걸어나온다.
미자, 다시 눈을 뜨면 소녀, 허밍을 멈추고 객석을 본다.
소녀
너한테 나는 뭐야?
미자
……너한테 나는 뭔데?
사이.
소녀
천미자.
미자
천미자?
소녀
뭣도 아니고 뭣도 아닌― 그냥, 너.
소녀, 천천히 웃는다.
소녀
대답해 줘야지. 너도!
미자
나도, 그래.
소녀
너한테 나는 그냥 나야?
미자
응. 이 세상 단 하나뿐인.
미자, 소녀를 따라 웃음 짓는다.
수영,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낱말 맞추기 책과 씨름 중이다.
수영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밖의 다른 세상.
수영, 고개 들어 앉아 있는 미자를 올려다본다.
수영
별로 시작하는 세 글자!
미자, 답이 없자 수영, 책에 자기 얼굴을 파묻어버린다.
수영
이상해요.
미자
뭐가?
수영
(얼굴 들고) 방이 너무 조용하니까 이상해요. 어제만 해도 나랑 낱말 맞추기 하고 놀 사람이 넘쳐났는데.
미자
세 명이나 방을 옮겼으니까.
수영
희망방으로 간 거죠? 출소 전에 잠깐 가 있는단 거기. 좋겠다. 엄청 설렐 거야.
미자
무섭지 않을까.
수영
왜요?
미자
나를 뺀 모든 것이 달라져 있을까봐. 저 밖 말이야.
수영
뭘 그런 거까지 걱정해요. 언니는 생각이 너무 많아요.
미자
이 안에서 십삼 년을 보내고 나니까 그런 생각이 드네.
수영
언니는 며칠 남았죠? 출소.
미자
이 주일.
수영
희망방에 언니 자리 안 났으면 좋겠다.
미자
나도 희망을 좀 느껴보고 싶은데.
수영
마지막 날까지 나랑 여기 있어요.
수영, 몸을 일으켜 앉는다.
수영
무서운 얘기 하나 해줄까요?
수영, 미자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수영
낱말 맞추기 책이 열 장 밖에 안 남았어요.
미자
아주 열심히 풀었으니까.
수영
할 게 저런 거 밖에 없으니까 그렇죠.
미자
책을 읽는 건 어때.
수영
언니가 제 몫까지 읽어주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미자
별세계.
수영
네?
미자
(낱말 맞추기 책을 가리키며) 그거, 정답.
수영, 낱말 맞추기 책을 본다.
수영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밖의 다른 세상?
미자
응.
수영
아, 그렇게 한 번에 맞추면 어떡해요! 이거 한 칸 맞추는데 한 시간은 써야 하는 거 몰라요? 책임져요. 내 한 시간!
미자
어떻게?
수영
씨, 뭐…… 저번에 하던 얘기나 마저 해보던가요.
미자
재미없을 텐데.
수영, 책상에 있는 편지지를 본다.
수영
나한테 해줄 얘긴 없어도 편지에 대고 할 말은 많은가봐. 답장도 안 올 편지는 왜 맨날 쓰는 거예요?
미자, 웃음으로 답을 대신한다.
수영
뭐, 여기서 누가 재미로 얘길 들어요. 그냥 시간 때우려고 듣는 거지.
들꽃과 잡초가 섞여 있는 엉성한 꽃다발을 든 소녀, 무대 왼쪽에서 등장한다.
소녀, 누군가를 기다리듯 먼 곳을 바라본다.
수영
사실 언니가 무슨 얘길 해도 전 상관없어요. 난 언니가 하는 얘기는 다 좋거든요. 언니가 좋으니까 언니가 하는 얘기도 좋은 거지. 그러니까 빼지 말고 빨랑 내 한 시간 책임져요.
수영과 소녀, 미자를 본다.
소녀
해줄래, 네 얘기?
미자, 손가락으로 건반을 두드리듯 천천히 책상을 두드린다.
소녀
여긴 우리 둘뿐이잖아.
수영 조금 더 미자 쪽으로 몸을 틀면, 미자, 책상을 두드리는 것을 멈춘다.
수영
참고로 주인공 ‘나’의 탄생부터 열여덟이 된 지금까지, 들었어요.
소녀, 무대를 천천히 돌아다닌다.
소녀에게 무대는 교도소가 아니다.
미자, 책상 위에 있던 물건을 살펴보다 지우개를 든다.
미자
우리의 이름 없는 주인공 ‘나’.
수영
주인공은 여전히 이름이 없나요.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는데 이름까지 없는 혈혈단신의 ‘나’! 그래도 주인공인데 지우개가 뭐예요. 지우개가.
수영, 자리에서 일어나 선반을 뒤진다.
수영, 웃는 얼굴을 한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양말을 찾아낸다.
수영
‘나’.
미자
지우개랑 양말이 다를 게 뭔데?
수영
얘처럼 좀 웃으라고! 언니가 너무 웃을 일 없는 설정만 부어놨잖아요. 친구도 없고―부모도 없고―키워준 할머니는 애가 친손자가 맞는지 의심이나 하구.
미자, 지우개를 책상에 내려놓으면 수영, 자리로 돌아온다.
수영, 자신의 손에 양말 한 짝을 씌운다.
수영
‘나’ 혼자 할머니의 장례를 치른 데까지 들었어요. ‘나’와 ‘그애’가 공터에서 만나기 전에 끊겼고요.
미자
장례가 끝나고 할머니가 ‘나’에게 남기고 간 낡고 작은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자신이 완전한 혼자가 되었다는 걸 느꼈어. 하지만 외롭거나 슬프진 않았지.
수영
(양말을 보며) 거짓말. (미자를 보며) 분명 외로웠을걸요. ‘나’는.
미자
(양말을 가리키며) 맞아. 사실 좀 외로웠어. ‘나’는.
미자,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말을 시작한다.
미자
‘나’와 ‘그애’가 다니는 학교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어. 정문을 바라보고 섰을 때 왼쪽엔 학교가, 오른쪽엔 산과 이어져 있는 나무숲이 있었는데……
수영
와, 벌레 많이 나오겠다.
미자
공터는 정문 오른쪽에 있는 그 나무숲 안에 숨겨져 있었지. 나무가 촘촘히 나 있는 나무숲을 앞만 보고 걷다보면 낡고 허술한 모양새의 철조망이 나와. 철조망 가운데 나 있는 문은 잠겨 있을 때도 있었지만, 잠겨 있지 않을 때가 더 많아서 누구나 쉽게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어. 그리고 그 허술한 철조망 너머에……
수영
‘나’와 ‘그애’가 만난 공터가 있었겠죠!
미자
나무숲과 철조망, 그리고 산에 둘러싸여 있는 공터는 꼭 작은 섬처럼 보였지. 그 공터는 이상하게 인기가 없는데 아마 산짐승이 내려온다는 소문 때문일 거야.
수영
아, 사람 없을만하네요. 그래도 비주얼은 좋을 것 같은데. 나무도 많고, 꽃도 많고, 새도 많고, 동화 속 비밀 장소처럼 예쁜 그런 곳…… 어때요?
미자
그 반대. 잔디는 거칠고, 꽃보단 잡초가 많은 곳. 나무들은 옷을 입고 있을 때보다 옷을 벗고 있을 때가 더 많고. 대신 바람과 해는 아주 잘 들어오는 곳.
수영, 고개 들어 천장을 본다.
수영
그건 좋네요. 바람 불고 해 잘 들어오는 거.
미자, 수영을 따라 고개 들어 천장을 본다.
소녀도 둘을 따라 고개 들어 천장을 본다.
수영
가고 싶다.
미자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따뜻한 날.
수영
공터 한가운데 누워서 해를 받고, 바람을 느끼고!
수영, 미자를 보면 미자도 수영을 본다.
수영
그래도 무드는 좀 없다.
미자
‘나’가 공터를 좋아한 이유는 그곳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야. ‘나’에게 공터는 오직 ‘나’만이 존재할 수 있는 하나의 세계 같은 거였지.
수영, 자신의 손에 낀 양말을 툭툭 쳐본다.
수영
사회성을 너무 말아먹은 거 아녜요?
미자
하지만 또 가끔은 그런 생각을 했지. 누군가 이곳을, 아니, 이 공간 속 ‘나’를 찾아와줬으면.
소녀, 무대 뒤쪽 선반에 등을 받치고 앉아 눈을 감는다.
꽃다발을 쥔 채로 눈을 감고 있는 소녀는 부케를 든 신부 같기도 하고 관에 누워 있는 시체 같기도 하다.
미자
3월 17일, 점심시간. 공터 한가운데에 누워 있던 교복을 입은 여자애.
미자, 책상에 있는 작은 마리아상을 들어 수영의 앞에 놔준다.
미자
‘그애’.
수영, 마리아상에게 양말을 인사시켜 준다.
수영은 한동안 소꿉장난하듯 조각상과 양말을 가지고 장난을 친다.
미자, 누워 있는 소녀에게 한걸음 다가간다.
미자
……‘나’는 무언가에 끌리듯 ‘그애’에게 다가갔어.
짧은 사이.
미자
‘그애’는 두 손을 모아 배 위에 올려놓고 있었는데 손에 들꽃이랑 잡초를 섞어 만든 꽃다발 같은 걸 쥐고 있었어. 그 모습이 꼭 부케를 든 신부 같기도 하고 관에 누워 있는 죽은 사람 같기도 했지. ‘나’는 한참이나 ‘그애’를 바라봐.
바람이 부는 소리.
미자
그러던 중, 바람 소리와 함께 ‘그애’가 천천히 눈을 떴어. 현실과 꿈 사이를 오가고 있는 그런 눈이었지. 하지만 ‘나’는 알았어. ‘그애’가 보고 있는 게 그 누구도 아닌 ‘나’라는 걸. 그리고 ‘그애가’ 아주 천천히……
소녀, 천천히 눈을 뜨고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미자에게 손을 뻗는다.
미자
‘나’에게 손을 내밀었어.
소녀
도와줘.
미자
그 누구도 아닌, ‘나’에게 손을 내밀면서……
사이.
미자
도와달라고 말했어.
미자, 소녀가 내민 손을 조심스럽게 잡는다.
미자
나와 그애의 손이 맞닿던 그 순간, 나는 어떤 기묘한 감정을 느껴.
소녀, 다시 눈을 감는다.
미자
사랑.
취침 점호를 알리는 목소리와 함께 암전.
미자, 책상을 정리하고 있다.
수영, 미자 옆에 누워 심드렁한 얼굴로 편지를 읽고 있다.
수영
언제 나오냐고 나오면 만나자고 하네요.
미자
부모님?
수영
같이 나쁜 짓 하던 애들. (편지 접어서 바닥에 대충 던지며) 전 그냥 종이 한 장으로 끝인가봐요. 면회는 안 오잖아. 귀찮으니까.
미자
만날 거야?
수영
아뇨.
미자
좋은 생각이네.
수영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미자,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낱말 맞추기 책을 살펴보다 피식 웃는다.
수영
낱말 하나당 한 시간!
미자
알았어.
수영
태초의 상태? 이럴 때 쓰는 말 맞아요? 여하튼 그런 상태로 출소하고 싶어요.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서 그런가.
미자, 수영을 본다.
수영
모여서 나쁜 짓만 하긴 했지만 그래도 몇 년을 같이 몸 부대끼면서 살던 애들인데 이런 식으로 쌩까게 되네요. 가족이랑 연 끊은 것도 모자라서. 그러니까 언니, 출소하자마자 저 잊고 그러면 안 돼요. 저 오늘 자로 완전 혼자됐으니까!
미자, 몸을 일으킨다.
미자
그렇게 말하면 반대로 하고 싶어지는데.
수영
와, 너무해! 딱 달라붙어서 안 떨어질 거야!
미자, 선반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수영, 몸을 일으켜 선반 쪽으로 간다.
수영
오늘 저희 작업장에서 싸움 난 거 알아요?
미자
나야 모르지.
수영
옆옆 방에 새로 들어온 신입이랑 그 경미 아줌마 있잖아요. 키도 크고 덩치도 큰 아줌마! 둘이 밖에서 치정관계였대요.
미자
결판이 났어?
수영
거의 일방적인 구타였어요. 둘이 체급 차이, 기술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경미 아줌마 말리려고 간수가 셋이나 붙었다니까. 그거 보니까, 저 맞고 다닐 때 생각나는 거 있죠?
미자, 선반 위에 접혀 있던 젖은 수건으로 선반을 닦는다.
미자
(웃는다) 난 기억이 잘 안 나네.
수영
기억이 안 난다니 다행입니다.
수영, 무언가 말하려다가 말고
수영
그날 왜 날 도와줬어요? 언니가 방같이 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런 일에 나서고 그럴 사람은 아니잖아요. 말도 안 섞던 사이였잖아요, 우리. 언니 그때 제 이름도 몰랐을 것 같은데.
미자
그랬지.
수영
그래서 되게 놀랐었어요. 언니 소문도 좀, 좀, 많이 살벌했었고.
미자, 선반 닦는 것을 멈추고 수영을 본다.
미자
네가 나를 봤으니까.
수영
네?
미자
네가 나를 보고, 나를 불렀으니까.
수영
그게 다예요? 보기만 하면, 부르기만 하면 다 도와주는 거예요?
미자
아니.
수영
그럼요?
미자
너는 왜 하필 날 봤는데? 그때 구경하는 사람 많았잖아.
수영
그냥…… 언니가 보였어요.
미자
그래서 도와준 거야. (웃는다) 너무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이 안에서도 저 밖에서도.
사이.
수영
사실 누가 날 도와준 거 처음이었어요. 다들 말로만 도와준다 소리 하고 말았었는데. 저 밖에서도 이 안에서도.
수영, 미자가 선반을 닦은 수건을 받아 화장실에 던져놓는다.
수영
되게 만화 같은 소리긴 한데 그 순간 이상하게 언니 하나 밖에 안 보이던 거 있죠? 언니가 나한테 오는 게 슬로모션으로 보였다니까. 다른 사람들이 가끔 넌 왜 그렇게 천미자한테 친한 척을 하냐고 물어보고 그랬거든요. 안 무섭냐고. 아니, 나한테 손 내밀어준 사람을 어떻게 무서워하겠어요.
미자
그게 지저분하고 피 묻은 손인데도?
수영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영, 빨랫줄로 가 수건과 양말을 걷는다.
수영
이것도 걷으려고 했죠?
미자
잘 아네.
수영
세탁실에서 하루종일 일하고 와서 어떻게 또 청소하고 빨래를 해요? 난 못할 것 같은데.
미자
세탁실 일 별로 안 힘들어.
수영
거짓말! 자, 얘기나 마저 해줘요. 오늘 자 낱말 맞추기를 대신하여!
마른 수건과 양말을 끌어안은 수영, 자리로 가 앉는다.
미자, 그 옆에 앉는다.
수영
사람이 줄긴 줄었나봐요. 수건이랑 양말이 이것 밖에 없어.
미자, 손가락으로 건반을 두드리듯 책상을 두드리다가 멈춘다.
미자
‘나’가 ‘그애’를 다시 만난 건 일주일 뒤, 다시 ‘공터’였어. ‘나’는 ‘그애’가 공터에 있었으면 하는 마음과 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모두 가지고 공터로 가.
수영
‘그애’가 있었겠죠!
미자
아니, 없었어. ‘나’는 공터 한가운데, ‘그애’가 누워 있던 그 자리에 한참이나 서 있었지. 본인은 기다린다는 자각이 없었지만 그건 기다림이었어.
소녀, 무대 왼쪽에서 등장한다.
수영, 수건을 개기 시작한다.
수영
와, 어쩐 일로 이렇게 뽀송뽀송하게 잘 말랐지.
미자, 수영을 따라 수건을 갠다.
미자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 그리고 결국, ‘그애’를 다시 만나게 됐어. 햇살이 아주 눈부시던 날.
수영, 미자 앞에 있는 수건과 양말들을 뺏어 자기 앞에 둔다.
수영, 빠르게 수건을 개고 양말을 묶는다.
미자
‘나’는 웃는 얼굴로 햇살을 받으면서 ‘나’에게 걸어오는 ‘그애’를 봐. ……‘나’는 조금 무서워졌어. ‘그애’가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 같았거든. 공터에 쏟아지는 햇빛처럼 하-얗게 부서져서.
소녀
안녕!
미자
‘그애’는 다행히 사라지지 않고 ‘나’에게 다가왔지.
소녀
또 보네.
미자
얼굴에 뜨끈하게 열이 올랐어. 햇빛이 모조리 ‘나’에게 쏟아지는 것 같았지. ‘나’는 ‘그애’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소녀
천미자. (명찰을 손으로 가리키며 웃는다) 천미자라고 써 있네.
소녀, 웃곤 무대 여기저기를 천천히 구경한다.
소녀에게 무대는 교도소 수감실이 아닌 공터다.
미자
‘나’는 계속 공터에 찾아가. 점심시간, 방과 후, 석식 시간. 비 오는 날엔 우산을 쓰고 갔어. ‘그애’와 만날 때도 있었고 만나지 못할 때도 있었지.
수영
그래도 만나긴 만났네요. 만나서 뭘 했어요?
미자
아무것도 안 했어. 말없이 앉아서 혹은 누워서, 하늘 구경을 할 때가 많았지. 얘기를 하게 되면 거의 ‘그애’ 혼자 떠드는 식이었고.
수영
어우. 말 많은 남자보단 말 없는 남자가 낫다지만 좀 심하네요. 잘생겼어요? ‘나’.
미자
글쎄.
수영
잘생겼으면 말이 좀 심하게 없어도 괜찮은데.
수영, 실수로 쌓아놓은 수건을 엎어버린다.
수영
이거 저 말고 ‘나’가 엎었어요.
수영, 씩씩거리며 다시 수건을 갠다.
미자
‘나’는 아주 꾸준히, 그리고 아주 열심히 공터를 찾아갔어. 공터에 ‘그애’가 있기 때문에.
수영
아무도 없던 시절의 공터를 홀랑 까먹고!
미자
맞아. 홀랑 까먹고. ‘나’는 궁금해졌어. 쟨 왜 여기 오는 걸까?
수영, 뿌듯한 얼굴로 미자에게 다 갠 수건을 보여준다.
미자, 수건을 토닥여준다.
미자
왜 공터에 오는 거야?
소녀
여긴 잠이 잘 오거든!
미자
잠?
소녀
집에선 잠을 잘 못 자. 집이 나를 괴롭혀서.
미자
자려고 와?
소녀
예전엔 그랬는데 지금은 네가 있어서 와.
미자
……
소녀
너랑 여기 이렇게 앉아 있으면 꼭 이 세상에 너랑 나 단둘만이 존재하는 것 같아서 신기해.
수영, 수건과 양말을 품에 안고 일어난다.
수영
세상에, 세상에.
수영, 선반에 수건과 양말을 정리해서 넣는다.
소녀
난 공터가 좋아.
미자
나도……
소녀
응?
미자
나도 이곳이 좋아.
소녀, 웃곤 허밍을 한다.
1장에서와 같은 허밍이다.
미자
‘나’와 ‘그애’는 그렇게 공터 안에서 일 년을 보냈어.
수영
안에서요?
미자
공터 밖에선 만나지 않았다는 거야.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둘은 많은 걸 함께 하진 않았지만, 많은 걸 함께 해왔던 것처럼 가까워졌지. 그렇게 ‘나’와 ‘그애’에게 열아홉 살의 봄이 찾아와.
미자는 무대 왼쪽에 소녀는 무대 오른쪽에 서 있다.
소녀
미-자. 미자, 천, 미, 자. 합쳐서 아름다운 사람.
미자
아는 한자가 그것뿐이지?
소녀
아니, 아닌데!
미자
어디 가서 그런 얘기 하지 마. 다 비웃을 거야.
소녀
아무도 안 비웃을 걸.
미자
놀림감이 될 걸.
소녀
아니, 충분히 아름다워 너.
사이.
미자
아닐 미에 사람 자. 할머니가 지어준 이름이야.
소녀
(미자를 본다)
미자
웃기지? 할머니 눈엔 내가 사람 같지도 않았나봐.
소녀
그럴 리가.
미자
엄마가 짐을 맡기듯, 아니, 쓰레기를 처리하듯 할머니한테 나를 넘기고 사라진 그날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날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소녀, 미자에게 손을 내민다.
소녀
손.
미자, 소녀에게 손을 내민다.
소녀, 미자의 손을 잡는다.
소녀
(웃는다) 이렇게 따뜻한데 어떻게 사람이 아니야?
소녀가, 왼쪽으로 한 발자국 걸어간다.
소녀
그냥 예쁜 미자로 바꾸면 얼마나 좋아. 쉽고 뜻도 좋고!
미자
……
소녀, 왼쪽으로 한 발자국 더 걸어간다.
소녀
내가 그랬잖아.
소녀, 한 발자국 더 걸어간다.
소녀
(웃으며) 아름답다고, 너.
미자, 웃는 소녀를 따라 슬쩍 웃는다.
미자, 홀로 앉은뱅이책상 근처에 앉아 있다.
작은 마리아상 옆에 ‘나’를 연기했던 수영의 캐릭터 양말이 놓여 있다.
미자, 그 둘을 보고 있다.
수영, 오른쪽에서 등장한다.
수영
저 왔어요.
수영, 외투 주머니에서 편지 봉투를 꺼낸다.
수영
언니 편지도 왔고요.
미자
편지?
수영, 미자에게 편지를 건넨다.
미자, 건네받은 편지를 한참이나 바라본다.
수영
안 봐요?
수영, 벗은 외투를 대충 접어 선반에 넣는다.
미자, 편지를 노트 사이에 조심스럽게 끼운다.
미자
삼 년 만이네. 편지.
수영
안 읽어요?
미자
나중에 봐도 돼.
수영
마음의 준비가 안됐나봐요.
미자
그런가봐.
수영
가족?
미자
아니.
수영
매일 쓰는 편지의 주인공?
미자
응.
수영
……기분 좋아 보여요, 언니.
수영, 상의 앞주머니에서 색색깔의 실뭉치를 꺼낸다.
실은 굵기와 길이가 제각각이다.
수영
짜잔. 작업하고 남은 자투리 실을 챙겨왔지요.
수영, 미자의 옆으로 가 앉는다.
수영
손 줘봐요.
미자, 손을 내민다.
수영, 미자의 손목에 여러 가지 색을 대본다.
미자
뭘 하려고?
수영
실 팔찌 만들려고요.
미자
나 주려고?
수영
언니 하는 거 봐서요.
수영, 실뭉치에서 하얀색 파란색 실만 고른다.
수영
언니는, 파란색, 하얀색. 색이 다른 실 두세 개를 이렇게 저렇게 잘 엮어서 만드는 건데…… 남는 실로 만드는 거라 좀 허접할 거예요. 십자수 실로 만들어야 예쁜데 여기선 십자수 실을 못 구하니까.
미자
손재주 좋구나, 너.
수영
그 손재주를 자꾸 나쁜 데 써서 문제지만.
수영, 이런저런 방법으로 미자의 손목 사이즈를 가늠해본다.
미자, 그 모습을 말없이 본다.
미자
‘그애’가 손목에 멍을 달고 온 적이 있었어. 꼭 사람 손자국 같은 멍을.
수영
와, 얘기 시작해요? 이거 만들면서 들으면 라디오 듣는 기분이겠다.
소녀, 무대에 등장한다.
소녀, 서 있기도 하고 앉아 있기도 하며 자유롭게 움직인다.
미자
안 아파?
소녀
안 아파.
미자
아파 보이는데.
소녀
(소매를 걷어 보이며) 이거 꼭 팔찌 같지 않니? 색이 칙칙하긴 하지만.
수영, 다른 색 실을 이번엔 자신의 손목에 대어본다.
수영
거참 더럽게 재미없는 농담이네요.
소녀
표정이 왜 그렇게 심각해. 별 거 아냐. 엄마한테 손목이 콱 붙잡힌 상태로 잔소리를 들었더니 이렇게 자국이 남았어.
미자
왜?
소녀
왜?
미자
왜 엄마가 널 아프게 하는 거야?
소녀
(웃는다) 엄마는 자식을 아프게 하면 안 돼?
수영, 미자를 본다.
소녀
(손목을 들며) 자국이 남은 정도야.
미자
한두 번이 아닌 거 알아.
소녀
너 관찰력 끝내주는구나. 그래도 엄마가 나쁜 사람은 아니야. 내가 자꾸 땡깡 부려서 그래.
미자
또 집 나가고 싶다고 했어?
소녀
응. 그러니까 어디 가서 우리 엄마가 자기 자식 괴롭힌다고 소문내고 그러진 마.
소녀, 건반을 두드리듯 손가락으로 선반을 치다가 미자에게 말한다.
소녀
(손가락을 입에 대고) 너랑 나랑 이 공터만 아는 비밀이야.
소녀, 위를 올려다본다.
소녀
음, 날씨 좋다.
짧은 사이
미자
(수영에게) 비밀은 비밀을 물고 왔지. ‘나’와 ‘그애’는 공터에서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며 더욱더 가까워졌어.
수영
어떤 식의?
미자
‘그애’는 혼외자식이야. 소위 말하는 첩의 자식. 세컨드의 딸.
수영
어마어마한 부잣집?
미자
그 정도로 부자는 아니고.
미자, 수영이 늘어놓은 실뭉치에서 노란색과 분홍색을 골라 수영에게 준다.
수영
파란색이랑 흰색은 싫어요?
미자
너랑 어울리는 거.
수영
저요? 와, 완전 봄 색깔인데! 언니한테 나는 이런 느낌인가봐?
미자
그런가?
수영
내 것도 하나 만들어야겠다.
미자, 말없이 웃는다.
수영
‘그애’ 엄마는 어쩌다 첩이 된 거래요.
미자
아들을 낳으면 본처 자리에 앉혀주겠다는 말에 넘어갔지. 순진하게.
수영
‘그애’는 딸이잖아요?
미자
그래서 ‘그애’는 엄마에게 사랑과 저주를 동시에 받았어.
소녀
네가 아들이었으면 내가 지금 이러고 살지 않을 텐데.
미자
‘그애’의 엄마는 ‘그애’를 낳을 때 너무 고생해서 더이상 임신을 할 수 없는 몸이 됐거든. 그때부터 술에 손을 대기 시작했지. 술을 마시면 정신이……
소녀
오락가락해. 아빠랑 있을 때 빼고.
미자
‘그애’ 엄마의 가장 큰 걱정은 ‘남자’가 본처보다 빨리 죽는 거였어. ‘그애’ 엄마의 꿈은 남편이 죽기 전에 본처 자리에 올라가는 거였거든.
수영, 실뭉치에서 미자가 골라준 색들을 빼낸다.
수영
아, 얘넨 모자라네요. 내일 더 챙겨와야지.
미자
다른 색을 섞으면 어때?
수영
싫어요. 언니가 골라준 것만 쓸래. 그럼 걔네 엄마는 그냥 ‘그애’가 딸인 게 미웠던 거예요?
미자
아니. ‘너만 아니었으면’으로 시작하는 일장연설을 틈만 나면 ‘그애’에게 늘어놓긴 했지만 여자는 자기랑 꼭 닮은 ‘그애’를 정말 아꼈어. ‘그애’에게 폭력 아닌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한 건,
무대를 돌아다니던 소녀, 뒤돈다.
소녀
(웃는다) 아빠가 나를 여자로 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소녀, 다시 무대를 천천히 돌며 얘기를 늘어놓는다.
수영, 실 팔찌 만드는 것을 멈춘다.
소녀
내가 사랑하는 딸을 보는 아버지의 눈빛과 여자를 보는 남자의 눈빛을 구별 못 할 정도의 쪼다는 아니거든.
미자
그래서 엄마한테 아빠랑 남남으로 살게 해달라고 그러는 거야?
소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엄마한텐 아빠 밖에 없잖아. 내 말은 믿지도 않고. 그래서 그런 소리 씨알도 안 먹혀. 어때 개 같지!
미자
응. 개 같아.
소녀
와, 네가 그런 소리도 할 줄 알아?
미자
진짜 개 같아.
소녀
내가 그랬었잖아. 집에선 잠을 잘 못 잔다고. 무서워서 못 자는 거야. 엄마가 발작하면서 내 목 조를까봐, 아빠가 몰래 내 방문을 열고 들어올까봐.
소녀, 미자의 옆에 앉는다.
소녀
밤이 가고 아침이 올 때까지 누워서 그런 생각만 하는 거야. ‘누가 날 건져올려줬으면 좋겠다.’ 언제 문이 열릴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방 밖으로.
미자
……
소녀
혼자 도망갈 생각은 못하는 내가 바보 같지? 나도 내가 바보 같아. 그런데 어떡해,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밖에 못 배워먹었는걸.
소녀, 미자에게 기댄다.
미자
‘나’는 그렇게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해. 갇혀 있는 ‘그애’를 구해내는 백마 탄 기사님이 되는 꿈을.
사이.
수영
여기가 ‘나’랑 ‘그애’가 만난 그런 공터였으면 좋았을 텐데. 사방이 막힌 네모난 상자 같은 곳 말고.
미자, 고개 숙이고 있는 수영을 본다.
수영
나도 하고 싶어졌어요. 얘기. 언니랑 나랑 이 방 만이 아는 비밀.
수영, 웃는다.
수영
제가 어릴 때, 우리 엄마랑 아빠는 동네에서 소문난 잉꼬부부였어요. 그런데 친아빠가 엄청 젊은 여자애랑 눈 맞아서 집을 나갔어요. 그 쓰레기가 나랑 엄마를 뺀 모든 걸 가지고 튀었어. 어이없죠. 그때부터 좀 이상해졌어요, 우리 엄마.
수영, 손가락으로 실을 만지작거린다.
수영
‘그애’랑 좀 다른 얘기긴 한데 우리 엄마도 아빠를 너무 사랑해서 날 미워했어요. 아, 친아빠 말고 새아빠.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엄마랑 재혼한 아저씨. 어느 날부턴가 나랑 새아빠 사이가 예전이랑 달라진 것 같다는 거예요, 이상해 보인다는 거야. 그때가 열여덟 살 때였어요. 아빠랑 손잡고 튄 여자애는 스무 살 정도 됐었고. (웃는다) 너무 불쌍하죠. 우리 엄마.
사이.
수영
갈수록 정도가 심해졌어요. 그래서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집을 나왔어. 엄마가 나 때문에 불행해질까봐 무서워서. 엄마의 행복을 위해 사라진 거죠.
수영, 고개 들어 미자를 본다.
수영
아니, 엄마한테 더 미움 받게 될까봐 무서워서 도망쳤어요.
미자
보고 싶지 않아? 엄마.
수영
보고 싶어요. 그런데 안 보고 싶어요. 내가 그랬잖아요. 여기서 나가면 다시 시작할 거라고. 얜 뭔데 곧 나갈 나한테 이런 소릴 하나 싶고 부담스럽죠?
수영, 미자의 얼굴을 보고 슬쩍 웃는다.
수영
한 번쯤은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어요. 아무한테나 말고.
수영, 미자의 옆에 가 쪼그려 앉는다.
수영
여기 들어와서 맨날 이유 없이 시비 걸리고, 맞고, 괴롭힘당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진짜 감방에 처박히게 됐구나. 쪽팔려서라도 엄마한테 못 돌아가겠구나. 기운이 쭉 빠지더라고요. 그후론 뭐, 그냥 포기 상태였죠. 그런데 갑자기 누가 날 도와주는 거예요. 구석에 구겨져 있는 나한테 와서 손을 내미는 거야.
미자
……
수영
(웃으며) 천미자라는 사람이!
소녀, 눈을 감고 허밍을 한다.
수영, 미자에게 손을 내민다.
수영
내가 ‘그애’처럼 손 내밀면…… 잡아줄 거예요?
바람이 불어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
미자, 수영이 내민 손을 잡는다.
수영
언니가 손 내밀면,
수영, 미자의 손을 꽉 잡는다.
수영
내가 잡아줄게요.
미자, 책상 앞에 앉아 편지를 읽고 있다.
소녀, 뒤에서 미자를 끌어안고 있다.
소녀
사랑하는 미자에게. 그동안 나에게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
미자, 편지를 읽어내려간다.
소녀
긴 장마에 쏟아지는 비처럼. 바람에 쓸려가는 낙엽처럼. 해가 뜨면 녹아내리는 눈처럼……
미자, 편지를 읽어내려가는 속도 점점 빨라진다.
소녀
늦은 봄에 떨어지는 꽃잎처럼.
소녀, 미자를 안고 있던 팔을 천천히 푼다.
소녀
셀 수도 끌어안을 수도 없는 그런 일들이.
소녀, 편지를 읽는 미자를 보다가 무대 왼쪽으로 퇴장한다.
사이
미자, 다 읽은 편지를 손에 쥐고 구긴다.
미자, 선반 앞에 서 있다.
수영, 담요를 끌어안고 실 팔찌를 만들고 있다.
수영, 흘깃흘깃 미자를 본다.
수영
오늘의 날씨, 흐림이네요.
사이.
미자
출소하는 날 마중 나온다고 하네.
수영
편지 주인공?
미자
응.
수영
……그런데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요. (웃는다) 웃어요, 웃어.
미자
(작게 웃어준다)
수영
만나면 뭘 하고 싶어요?
미자
그러게. 만나면 뭘 해야 할까.
수영
편지를 너무 열심히 보내놔서 할말도 없겠다.
미자
정말 아무 생각이 안 나네.
수영
예전엔 뭘 하고 싶었는데요? 나가서.
미자
그냥 사랑한다고 말해보고 싶었어.
수영
……용기가 필요한 일이네요.
사이.
수영
저 밖에 언니가 그러는데 내일모레부터 방에 새로운 사람들이 온대요. 두 명, 며칠 뒤에 또 한 명, 언니가 나가면 또 한 명.
수영, 실을 잘못 엮었는지 다시 푼다.
수영
정말 얼마 안 남았어요, 언니 나가는 날. 아직 얘기도 다 안 끝났는데.
미자
곧, 끝나.
수영
그런데 그 얘기……
미자
그 얘기?
수영
아니에요. 결말은 아직도 생각 안 나요?
미자
응.
수영
……그럼, 저 밖에서 마저 해줘요.
미자
밖에서?
수영
저 출소 네 달도 안 남았어요.
수영, 미자에게 새끼손가락을 흔든다.
수영
결말을 듣겠단 빌미로 언니를 만나려는 저의 치밀한 계획이죠. 약속.
미자
……그래. 약속.
수영
밖에 나가서 꼭 내줘요. 결말.
사이.
수영
자, 이제 라디오 켜주세요. 뭐, 라디오가 저기압인 것 같으니 결방해도 괜찮고요.
미자,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새 편지지를 본다.
미자
‘나’는 자라면서 한 번도 받아본 적 없었던 관심, 애정, 기대 같은 것들을 ‘그애’에게 받았어. ‘나’는 ‘그애’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배웠지.
수영, 실 팔찌 만들기를 다시 시작한다.
미자, 무대를 천천히 돌며 이야기한다.
미자
졸업식 날, ‘나’는 ‘그애’에게 집주소를 적은 쪽지를 한 장 건네. 집 밖에도 머물 곳이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거든. ‘언제든 네가 찾아와도 좋아.’라는 의미였지.
수영, 완성되어가는 흰색과 파란색이 섞인 실 팔찌를 이리저리 살펴본다.
미자
졸업 후 취직한 직장에서 일과 사람 모두에게 치이고 또 치이면서 ‘나’는 힘들 때마다 공터와 ‘그애’를 생각했어. 해가 들지 않는 사무실도 언제나 어두운 집도, ‘그애’와 공터를 떠올리면 아주 환하게 빛났지.
수영
그렇게 보고 싶으면 연락이라도 해보지.
미자
‘나’는, ‘그애’가 찾아와주길 바랬어. 내가 ‘그애’가 있는 공터를 찾았듯 ‘그애’가 ‘나’의 공터를 찾았듯.
수영, 파란색과 흰색이 섞인 실 팔찌를 완성하지 않고 노란 실과 분홍 실을 꺼내 엮기 시작한다.
미자
‘그애’가 ‘나’를 찾아온 건, 졸업 후 반년이 조금 지난 어느 날이었어.
미자, 수영의 옆으로 걸어간다.
미자
색이 벗겨진 파란 대문 아래 쪼그려앉아 있는 ‘그애’를 발견한 건 해가 저문 초가을 저녁이었어. ‘그애’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 어둡고 지저분한 골목과 어울리지 않는 아주 말간 얼굴을 하고.
미자, 수영을 내려다본다.
미자
‘나’는 천천히 ‘그애’에게 다가가.
수영, 미자를 올려다본다.
수영, 미자와 눈이 마주치자 웃어준다.
미자
‘나’는 ‘그애’에게 손을 내밀어. ‘그애’가 나에게 손 내밀었던 것처럼.
미자, 수영에게 손을 내민다.
수영, 미자의 손을 잡는다.
미자
‘그애’의 손을 잡는 순간, ‘나’는 그런 생각을 했어.
‘나는 여전히 너에게 매여 있구나.’
‘나는 여전히 너에게 매여 있구나.’
미자, 천천히 수영의 손을 놓는다.
미자
그렇게 ‘나’와 ‘그애’의 동거가 시작됐지. 어둡고 낡은 ‘나’의 집이 공터가 된 거야.
수영
‘그애’는 왜 ‘나’를 찾아온 거예요?
미자
‘그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나’는 묻지 않았고.
수영, 다시 팔찌를 만들기 시작한다.
파란색과 흰색이 섞인 실 팔찌를 만들 때와 다르게 건성이다.
미자
그리고 ‘그애’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지.
수영
(고개 들어) ‘나’는요?
미자
‘나’는 ‘그애’의 그런 얼굴은 처음 봤어. 그래, 꼭 햇빛을 받은 민들레 꽃 같았지. ‘그애’가 좋아하던 공터의 노란 꽃.
수영
……화, 아니 질투 안났어요?
미자, 앉은뱅이책상이 있는 무대 왼쪽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미자
‘나’는 자신이 있었어. ‘그애’는 사랑에 빠진 게 분명했지만 그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였거든. ‘그애’를 상처 입힐 게 분명한 얼굴. 하지만 상관없었어. ‘그애’의 상처는 내가 핥아주면 되니까.
수영, 어우 소리를 내며 실을 빠르게 엮는다.
미자
그래도 ‘나’는 조금 무서워졌어. ‘나’에겐 ‘그애’ 밖에 없는데 ‘그애’는 그게 아니라는 그 상황이. 그래서 가끔…… 아주 유치한 생각을 했지.
미자, 수영을 본다.
미자
‘그애’가 나를 벗어나지 못하게 울타리를 칠 방법이 없을까?
미자,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미자
닫힌 방에서 탈출한 ‘그애’를 ‘나’의 공터에…… 다시 가둬버린다.
사이.
수영
‘그애’는 ‘나’를 사랑했어요?
미자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수영
그러다간 불행해질 거예요. (미자를 본다) ……‘나’.
미자
다시 시간이 흘렀지. ‘그애’는 여전히 그 남자와 교제 중이야. ‘나’는…… 행복? 그래, 행복했을 거야. ‘그애’가 내 곁을 떠나지 않았으니까. 일이 터진 건 ‘그애’가 아픈 엄마를 보기 위해 ‘나’와 함께 집에 찾아간 그날.
사이.
미자
‘그애’ 말대로 집엔 ‘그애의 아버지’가 있었어. ‘나’는 그 남자의 눈을 보고 알았어. 저 사람, ‘그애’를 건드렸구나. ‘그애’가 혹시 마주칠까 무섭다며 ‘나’를 데려가길 잘했지. 그는 ‘나’가 집 안에 들어오는 걸 허용하지 않았어. 가족 이야기를 남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다고 했지. 언제라도 ‘그애’가 도망쳐나올 수 있게 문을 열어놓고, ‘나’는 ‘그애’가 나오길 기다렸어.
무언가 무거운 것이 넘어가는 소리.
미자
안에서 큰 소리가 났지. 아주 둔탁한 소리.
수영,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작은 마리아상과 웃는 얼굴을 한 양말을 본다.
미자
문을 열고 뛰어들어간 ‘나’의 눈앞에 보이는 건, 바닥을 뒹굴고 있는 늙은 남자와 피 묻은 양주병을 들고 있는 ‘그애’.
미자, 점점 격앙되어간다.
미자
‘나’는 횡설수설하는 ‘그애’의 말을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애’ 안에서 쌓이고 쌓이고 쌓였던 것들이 한 번에 터져버렸다는 건 알 수 있었지. 술이 들어간 늙은 남자가 ‘그애’의 남자에 대한 질투로 돌아버리기라도 했던 걸까? 병신 같은 새끼. 그는 ‘그애’에게 저주를 퍼부어가면서 죽어가고 있었어. ‘나’는 다시 ‘그애’를 봤어. ‘나’와 ‘그애’의 눈이 마주친 그 순간.
미자, 수영을 본다.
미자
‘그애’가 ‘나’를 보며 말했어. 처음 만난 그날처럼.
사이.
수영
도와줘.
미자, 어딘가 꿈꾸는 듯한 얼굴이 된다.
미자
아…… 그건, 언젠가 ‘그애’가 ‘나’에게 손을 내밀며 내뱉었던 말이었어. 등 뒤로 소름이 돋았지. ‘나’는 계속 기다려왔던 거야. ‘그애’가 다시 ‘나’에게 손 내밀기를. 그 누구도 아닌 ‘나’에게.
미자, 앉은뱅이책상에 놓여 있는 작은 마리아상을 들어 손에 쥔다.
미자
‘나’는 ‘그애’의 손에 들린 양주병을 빼앗아. ‘그애’의 지문이 찍혀 있을 만한 곳들을 죄다 옷으로 깨끗이 닦았어. 그리고 양주병을 꽉 쥐었어. 내 손으로.
수영, 조금 물러난다.
미자
‘나’는 다 죽어가는 늙은 남자에게 걸어가.
미자, 수영에게 천천히 걸어간다.
수영, 자기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 물러난다.
미자, 작은 마리아상을 쥔 손을 높이 든다.
미자
그 남자의 머리를 내려치고, 또 내려쳤지.
미자, 작은 마리아상을 쥔 손을 천천히 편다.
조각상, 떨어져 바닥을 구른다.
미자
내가 죽인 거야. 너는 잘못한 게 없어.
사이.
미자
앓아누워 있던 ‘그애’의 엄마가 ‘그애’의 아버지와 ‘나’와 ‘나’의 손에 들려 있던 피 묻은 양주병의 목격자가 됐지.
미자, 몸을 숙여 수영과 눈을 맞춘다.
미자
내가 왜 그런 짓을 한 줄 알아? ‘그애’가 감옥에 가게 될까봐? 악당을 물리치는 건 왕자님이나 기사님의 몫이니까?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는 드라마 주인공이나 흉내내려고? 아니야.
미자, 수영의 얼굴을 감싸쥔다.
미자
나는 ‘그애’를 옭아맬 족쇄가 되기 위해 그 늙은 남자의 머리통을 날린 거야.
미자, 웃는다.
미자
나는 모든 걸 ‘그애’에게 맡기고 감옥에 들어가. 십오 년 형을 선고받았지. 모범수가 돼서 형도 줄였어. 그리고 매일 ‘그애’에게 편지를 썼지. 왜?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알리려고. 내가 너의 족쇄라는 걸 상기시키기 위해. 어느 순간 연락이 끊겼지만 상관없었어. ‘그애’는 나를 잊을 수 없을 테니까.
미자, 수영을 밀어낸다.
미자
출소를 얼마 남기지 않은 나에게 ‘그애’의 편지가 날아와. 무려 삼 년 만에! 나를 만나서 자기의 죄를 빌고 싶대. 충분한 사례도 할 거래. 사례? 내가 그딴 걸 바라고 이런 짓을 한 것 같아? 나에게 용서를 받고, 그 남자와, 떠날 건가봐. 나에게서. 아주 먼 곳으로.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
간수가 조용을 외친다.
미자
고작 십 년 만에 풀어질 족쇄인 거야? 내가? 안 되지. 그럼 안 되지. 이대로 날 잊게 둘 순 없지. 나를 떠나게 둘 순 없어. 응? 그럼 안 되잖아, 수영아.
무대 오른쪽에서 소녀가 등장해 둘을 본다.
미자, 소녀를 본다.
수영, 미자를 올려다본다.
수영
우리 여기서 제일 많이 듣는 말이 다시 태어나라는 말이잖아요. 맨날 듣잖아요.
수영, 앉은 상태로 서 있는 미자를 끌어안는다.
수영
다 잊고 다시…… 다시 태어나면 안 돼요?
사이.
미자
나는 못해.
수영
같이 하면 되잖아요.
미자,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수영을 내려다본다.
수영
내가 도와줄게요.
미자
……뭐든지?
수영
뭐든지.
수영, 미자를 더 꽉 끌어안는다.
미자, 다시 소녀를 보면
소녀, 미자에게 천천히 손을 뻗는다.
조명, 무대 가운데 서 있는 미자와 소녀만을 비춘다.
소녀
졸업하자마자 날 싹 잊어버리는 건 아니겠지 천미자?
미자
무슨 말이야?
소녀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잖아.
미자
……우리가 왜 멀어져?
소녀
나, 이 공터 밖의 너를 본 적이 없어. 너도 마찬가지지? 다른 곳에서 만날 시도를 해 본적도 없고. 이런 우리가 밖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소녀, 웃는다.
소녀
요즘은 이런 생각도 들어. 너는 내가 만들어낸 환상 같은 건 아닐까? 나도 엄마 따라 미쳐가는 거지.
미자, 소녀에게 손을 내민다.
미자
손.
소녀, 미자의 손을 잡는다.
미자
네가 그랬잖아. 손이…… 따뜻하다고.
소녀, 잡힌 손을 봤다가 고개 들어 미자를 본다.
미자
우리 둘 다 이렇게 따뜻한데 어떻게 너랑 내가 환상이야?
소녀, 맞잡은 손을 보고 웃는다.
소녀
살아 있구나. 우리 둘 다.
사이.
미자
나는 너한테서 멀어지지 않을 거야.
소녀
……
미자
그러니까
미자, 소녀와 눈을 맞춘다.
미자
너만 나한테서 멀어지지 않으면 돼.
테이프로 감아놓은 작은 마리아상 옆에 수영의 양말이 있다.
수영,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그것들을 보고 있다.
수영
아파 보인다. 너.
무대 오른쪽에서 미자 등장한다.
9장에서 미자의 걸음걸이는 어딘가 불안하다.
수영,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미자에게 간다.
수영
세제 냄새! 오늘도 세탁실에서 좋은 냄새를 달고 오셨군요.
미자
(웃는다)
수영
면회는 잘 하고 왔어요?
미자
(고개를 끄덕인다)
수영
면회 갔다가 바로 노역 간 거죠? 싫었겠다.
미자, 외투를 벗어 선반에 넣는다.
미자
출소날 일이 생겨 올 수가 없다네. 그래서 면회 온 거래.
수영, 미자의 옷을 털어준다.
미자
수영아.
수영
네.
미자
나 좀 도와줄래
?
수영
뭘 도와주면 되는데요?
미자
(웃는다) 오늘 하루 내가 뭘 하건 눈감아주기.
사이
수영
에이, 뭘 하려고요.
미자
싫어?
수영
상황 봐서요.
미자
나랑 약속했잖아.
수영
출소 코앞에 두고 형 늘어날 짓 하면 안 되는 거 알죠?
미자를 보던 수영, 앞주머니에서 실 팔찌를 몰래 꺼낸다.
수영
언니, 눈 감아보세요.
미자, 눈 감는다.
수영
손!
미자, 수영에게 손을 내민다.
수영, 미자의 손목에 하얀색, 파란색이 섞인 실 팔찌를 채워준다.
수영
자, 이제 눈 떠요.
미자,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실 팔찌를 본다.
수영
생각보다 허접하게 나오진 않았죠? 작업장 가서 마무리했거든요. 거긴 가위도 있고 튼튼한 실도 있으니까.
미자, 말없이 실 팔찌를 본다.
수영
원래 마지막 날 주려고 했는데, 언니가 언제 희망방으로 옮겨갈지도 모르고 해서.
미자
예쁘다.
미자, 팔찌를 쓰다듬어본다.
수영, 환하게 웃는다.
미자
정말 예뻐.
수영
까먹지 말라고 주는 거예요.
미자
(수영을 본다)
수영
나 까먹지 말라고.
수영, 미자의 얼굴을 보고 조금 당황한 얼굴이 된다.
수영
언니 어디 아파요? 밖에 언니 부를까요?
미자, 고개를 젓는다.
미자
출소를 얼마 앞두지 않은 ‘나’에게 ‘그애’가 찾아왔어. ‘그애’는 ‘나’를 보고 한참이나 눈물 흘려. 그리고 말했지. 너는 여전히 그대로구나.
수영, 걸음걸이가 불안한 미자를 잡아준다.
미자
‘나’를 보며 웃어줬어. 아주 따뜻한, 그 어떤 불안도 걱정도 없는 얼굴로.
머리카락을 넘기는 미자의 손이 떨린다.
미자
‘그애’는 아주 오랫동안 ‘그애’옆을 지켜준 그 남자와 결혼한다고 했지. ……내가 출소하면. 아주 우습지. ‘나’는 그 남자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었잖아.
미자, 웃는다.
미자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했어. 그래서 함께 기다린 거야 ‘나’의 출소까지. 결혼을 하고 외국으로 떠난대. ‘나’와 ‘나’에게 가진 죄책감을, ‘나’를 치워버리고 아주 후련해진 마음으로 떠나는 거야……
수영, 떨리는 미자의 손을 주물러준다.
수영
언니, 저랑 의무실 가요.
미자
공터는 말 그대로 공터가 됐대. 짓다 만 아파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넓은 땅. 나무숲도 철조망도 잔디밭도 나무도…… 아무것도 남지 않은.
미자, 기침을 한다.
미자
그뒤는 잘 기억이 안 나. 말하고 싶었던 것들도 다 잊어버렸어.
사이.
미자
(웃는다) 새롭게 시작된 그애의 인생에 유일한 오점은 나 밖에 없는 것 같았어.
미자, 목소리에 쇳소리가 섞이기 시작한다.
미자
나는 그애가 행복하길 바래. 그렇지만 나는,
미자, 수영을 본다.
미자
잊혀지고 싶지 않아.
수영, 미자를 본다.
수영
나는 언니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미자, 수영에게 웃어준다.
미자, 기침을 하면 손에 피가 묻어나온다.
미자, 피가 묻은 손바닥을 본다.
수영, 놀라 일어나려고 하면 미자가 붙잡는다.
미자
쉿.
수영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미자
(웃는다)
수영
미쳤어.
미자
뭐든지 도와준다며. 나 좀 도와줘, 수영아.
수영
싫어요. 사람 불러올 거예요. 소리 지를 거야.
미자, 수영에게 웃어준다.
미자
조금 있으면 식도가 녹아서 말도 못하게 될 거야. 위도 천천히 녹기 시작하겠지.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나을걸.
수영
……
미자
나를 산송장으로 만들 거야?
미자, 다시 기침한다.
수영, 급하게 선반에서 수건을 꺼내 미자의 입가에 대준다.
수영, 어쩔 줄 몰라 하며 눈물을 뚝뚝 흘린다.
수영
우리 저 밖에서 만나기로 했잖아요. 나랑 약속했잖아요. 저 밖에서 만나기로.
미자
나는 죽는 게 아니야. ‘그애’에게 남는 거야.
소녀, 무대 왼쪽에서 등장한다.
소녀에게 무대는 공터다.
미자
악몽처럼. 그림자처럼.
미자, 수영을 본다.
미자
끔찍하지? 평생 미움받을 거야. 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르겠네.
미자, 수영의 얼굴을 한 번 쓰다듬어준다.
미자
하지만 상관없어.
수영
나한테 너무 한 거 아니에요?
미자
너한테도 나는 끔찍한 기억으로 남겠지.
수영
나는요, 나는…… 이런 식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미자가 기침을 할 때마다 수영의 얼굴이 더욱더 일그러진다.
수영, 미자를 끌어안는다.
소녀, 작게 허밍하며 무대를 돈다.
수영
……언니한테 나는 뭐예요?
미자, 자신의 손목에 감겨 있는 실 팔찌를 본다.
미자
그냥 너…… 한수영.
소녀, 허밍을 멈추고 미자를 본다.
미자
이 세상 단 하나뿐인.
수영, 울며 웃는다.
미자, 수영에게서 천천히 몸을 뗀다.
미자, 수영을 보고 수영, 미자를 본다.
소녀, 둘을 본다.
미자
네가 몇 번이고 나를 죽여도 나는……
사이
미자
절대 사라지지 않아.
미자, 웃는다.
미자
(누구에게 말하는지 모를) 나는 너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 거야.
미자, 울고 있는 수영에게 조심스럽게 입 맞춘다.
미자
너의 가장 마지막까지.
암전
기침 소리, 사람이 넘어가는 소리.
소녀의 허밍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하면 무대, 막 내린다.
원소영
천미자의 이야기를 들어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2018/03/27
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