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시키-ㅌ
3화 이 눈 말고 이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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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의 눈을 녹이는 햇살 아래, 공기중에는 먼지가 가득했다. 여전히 날은 추웠고 눈이 따가웠다. 우리는 축축한 길을 걸어 연희문학창작촌에 모였다. 누군가 올 겨울엔 유난히 함박눈이 자주 내린 것 같다고 말했고, 매년 더 추워지는 것 같다고 다른 사람이 말을 받았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싸늘한 공간이 서서히 히터의 공기로 가득찼다.
“눈이 오면 기온이 조금 올라가잖아요. 눈 오는 날 그게 유일하게 좋더라고요. 서울은 눈이 많이 와도 금세 녹아서 빙판이 별로 없잖아요. 경기도는 아직도 큰 도로를 빼고는 빙하에요. 그래서 되게 온도차가 많이 느껴지더라구요. 역시 서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_단아
“대화를 하다가 ‘아, 내가 지금 이 대화에 집중을 못하고 있구나’ 하고 스스로 알면 상대편도 알잖아요. 그러면 의식적으로 상대방의 눈에 다시 한번 초점을 맞춰요. 마치 F5 버튼을 눌러 새로고침하는 것처럼, 그 사람 눈동자를 바라보는 거죠. 혹은 안과에서 시력검사할 때 빨간 풍선에 초점을 맞추잖아요. 그런 기분으로요.” _에이
“문득 이런 고민을 한 적이 있어요. 내가 보는 색상이랑 다른 사람이 보는 색상은 다른 거겠지? 그러면 내가 보는 색상이 정답이 아니면 어떤 게 정말 맞는 색상일까. 그러니까 남들이 빨간색이라고 얘기했을 때 내가 보는 것과 같을까, 내가 보는 빨간색이 진짜 빨간색인가?” _연복
“저는 가족이랑 살고 있거든요. 그래서 혼자서 살아본 적이 없었어요.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서 한 달 동안 혼자 살고 싶었어요. 딱 한 달만요. 그런데 학교도 다녀야 되는데 그럴 돈이 없잖아요. 아, 돈이 무서웠어요.” _기홍
“저는 어렸을 때부터 소셜미디어 아예 안 했거든요. 그런데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은 정말 이 사람한테만큼은 꼭 생일축하를 받고 싶다든지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제 생일을 잊지 않고 축하해주면 너무 기뻐요.” _서울
눈이 온 날은 아니었지만 눈처럼 차곡차곡 이야기들이 쌓여갔다. 컴퓨터는 대화의 주요한 토픽으로 ‘표정’ ‘소셜미디어’ ‘혼자’ ‘서울’을 뽑았다. 저번 모임과는 다르게 토픽과 토픽 사이의 관련성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 ‘눈’이 대화의 테마였지만 다의어이기 때문에 주요 토픽으로 선정되지 않았다. 또 눈(雪)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신체기관인 눈(目)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오갔고, 그와 간접적으로 관련된 단어들이 대화에 쓰였다(‘쌍꺼풀’ ‘근육’ 등).
다음은 선정된 토픽과 단어들을 시각화한 인포그래픽이다.
키-ㅌ 팀원들은 ‘표정’ ‘소셜미디어’ ‘혼자’ ‘서울’이라는 토픽과 함께 스크립트에서 각기 단어를 골랐다. 그리고 각자의 ‘시선 지도’를 만들고, 토픽에 대한 단상을 글로 남겼다. 각기 다른 지면에 떨어지는 눈송이처럼 우리의 시선 또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떨어져 지면에 녹아들어갔다.
A의 시선지도. 어디를 걸어도 우리가 흘린 눈빛들이 함박눈처럼 쌓여 있었다.
스물네번째 생일이었고 서울로 온 지 6년 만의 열한번째 이삿날이었다. 퍼즐이라도 맞추는 양 빈틈없고 매끄럽게 상자에 짐을 채워넣으면서 만일 네가 지금 여기에 있다면 뭐라고 할지 궁금해졌다. 분명 침대나 책상 끝에 걸터앉아 장난처럼 다리를 엇박자로 흔들면서 당연하다는 듯 나는 모르는 네 학교 친구들 이야기나 엊그제 갔던 새로 생긴 카페가 얼마나 예쁘고 비쌌는지에 대해 떠들어대지 않았을까.
너는 내가 맨 처음 알게 된 서울 사람이었다. 너를 만난 후로 서울은 나에게 더이상 막연히 환상적인 곳도 외로운 곳도 아니게 되었다. “이제 신촌 근처에 집을 구할 때도 되지 않았어? 그러면 더 자주 만날 수 있다니까.” 너의 미묘한 눈빛을 보면 나는 늘 거짓말 밖에는 하지 못했다. “에이, 너 매일 휴학하고 싶다고 노랠 부르잖아. 내가 신촌으로 가면 너 확 휴학해버리는 거 아니야? 안 갈래, 지금이 딱 좋아. 지하철 타면 어차피 30분밖에 안 걸리잖아.” 네 눈이 잠시 싸구려 구슬처럼 빛을 잃었다. 그 눈이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 결국 늘 찾아오는 건 나니까, 그 30분은 늘 내 몫이니까. 네가 나의 열번째 이삿짐의 마지막 상자를 테이프로 붙인 뒤 구두를 꿰어 신고 나갈 때에야 나는 살갗이 까져서 딱지가 앉은 너의 발목을 발견했다. 밴드가 상자 어디쯤 들어 있을 텐데, 열 번이나 이삿짐을 쌌으니까 그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아직 풀지 않은 열한번째 이삿짐 상자 위에 걸터앉아 습관처럼 핸드폰을 열어 너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접속했다. 무언가를 참는 양 의식적으로 입을 당겨 웃던 너의 얼굴이 신사, 망원, 성수, 이태원을 배경으로 줄줄이 박혀 있었다. 네 표정은 애써 잊으려 했던 우리의 시간을 자꾸만 되감았다.
너는 이미 여기 없는데도 여전히 당연하게 남아 있는, 너의 서울은 오늘도 네가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B의 시선지도. 단어 및 토픽들을 밤하늘의 눈처럼 표현한 후 털실을 이용해 연결했다.
부유스름한 그날의 기억을 가까스로 더듬어본다. 베이징인가 싶을 정도로 서울이 미세먼지로 뒤덮였던 날. 도심 일대가 수많은 사람과 확성기의 고음으로 마비되었던 날. 우리는 헤어졌다.
그런 날이어서 다행이었다. KF94 마스크는 못 봐줄 정도로 엉망진창인 표정을 가려주기에 안성맞춤이었고, 인파들 사이로 몸을 우겨넣어 머릿속을 날카롭게 긁어대는 온갖 잡생각을 애써 떨쳐낼 수 있었으니까. 그러다 지쳐서, 결국 집까지 ‘따릉이’를 탔다. 서울에서 몇 안 되는 비역세권에 사는 내게 딱하다며 자전거를 가르쳐준 사람이 너였으니, 마지막까지 너에게 신세를 진 셈이다. 분해죽겠는 와중에 열심히 페달을 밟고 있는 내 꼴이 우스워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 본 칼럼1)의 필자는 SNS가 ‘Sehnsucht & Saudade’의 약어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Sehnsucht( 그리움, 동경, 연모)와 Saudade(고독, 향수, 그리고 또다시 그리움). 이별하고 1년 남짓 지나서 네가 보낸 메시지가 떠올랐다. 나는 답장을 보내지 않은 채 계정을 삭제했다. Sehnsucht도 Saudade도 충분했으나 용기가 부족했던 탓이었을까.
사실 부옇게 흐려진 기억이 아니다. 아직도 KF94를 꺼낼 때마다 그날의 모든 게, 너의 변화무쌍한 눈썹 모양까지 똑똑히 생각난다. 기억은 또다른 기억을 불러온다고, 낡은 오락실에서 함께 KoF94를 하던 날들의 부스러기 기억까지 나를 엄습한다. 너의 SNS에 들어가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아낸다. 그저 내일은 서울의 공기가 맑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C의 시선지도. 단어를 자음과 모음으로 쪼개어 지점토로 만든 모형 주위에 둥글게 배치했다.
표정은 근육들이 움직이는 모양일 뿐이야. 그렇게 다짐했지만 A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을 때 L은 눈 녹듯 마음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많이 바빴어? 응. 조금. L은 옆자리의 가방을 치웠지만 A는 반대편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잠깐만. A는 핸드폰을 톡톡 두드렸다. L은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속으로 백을 세고 L은 억지로 운을 떼었다. 다시 서울로 올 생각은 없어? A는 고개를 들고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다시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글쎄. 여기는 공기도 안 좋고 집값도 비싸고…… 그렇구나.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A는 핸드폰을 탁자에 올려놓더니 입을 열었다. 있잖아 나…… L의 심장이 뛰었다. 눈이 마주치자 A의 표정이 난처해졌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 어, 그래. L은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는 언제나 A의 상냥한 표정 뒤 속내를 언제든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띠링’ A의 핸드폰이 울렸다. ‘ㅋㅋ끝냈어?’ 화면은 반짝이다 금세 꺼졌다. L의 마음에서도 무언가 꺼졌다. 자리에 앉은 A는 이제 가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잘 가. 다음에 보자.”는 말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집에 가는 길 L은 A의 인스타그램을 보았다. ‘서울 나들이:) 오늘도 즐거운 하루!’ 사진 속 A의 보조개가 찌그러진 별 모양 같았다.
“눈이 집중을 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나봐요. 이 길을 오래 기억할 것 같아요.” _망고
이 눈은 언젠가 녹아버려도 이 눈은 녹지 않을 것 같았다. 기나긴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다.
키-ㅌ
‘키-ㅌ’는 문학에 관심이 많은 세 사람이 기술을 도구로 문학을 재해석하기 위해 모인 팀이다. 무언가를 조립해서 만들 수 있도록 부품을 모아놓은 세트인 ‘kit’에서 착안하여, ‘키-ㅌ’는 이야기와 이야기, 사람과 사람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고자 한다.
2018/04/24
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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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회일, 「카톡」,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