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곡사라는 절의 화장실 맞은편 계곡. 거기에 노트북이랑 밥상 하나 들고 가서 소설을 씁니다. 저는 토(土) 기운이 많은 사람인데, 물가에 가면 수(水) 기운이 많기 때문에 머리가 잘 돌아가거든요.

   “수(水) 기운이요?” A는 ‘만세력’이라는 사주 어플을 켰다. 느릿한 경상도 말씨로 상생과 상극, 화수목금토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알고는 있었지만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A로 말하자면 대안학교이자 내 모교의 국어 교사. 그의 표현대로 ‘염불 외는 듯한’ 수업에 대부분이 졸았지만 A는 딱히 개의치 않았다. 부임 첫날에는 밥을 안쳐놓고 왔다는 이유로 환영 회식을 거절했다. 애고 어른이고 할 거 없이 각자 뭔가를 투쟁 중이던 그 학교에서 유일하게 전교조에 가입하지 않은 교사였고 힘겨루기를 해볼라치면 한 대 맞아주고 싱겁게 도망갔다. 롯데 자이언츠의 팬이며 소설을 쓴다고 했다. 의외로 A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A는 학생신문에 소설을 연재하기도 했다. 왜 학생신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학생들은 그의 진지한 소설을 읽기에는 너무 바빴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읽어주는 이가 없어도 꾸준히 소설을 쓰고 연재하는 사람이 있다는 점만큼은 기억에 남았다. 그로부터 몇 년 만에 인터뷰를 하자고 A를 찾아갔다. 쓰는 사람 이야기는 다 궁금하지만, 아무도 안 읽어주는 소설을 지곡사 화장실 맞은편 계곡에서 쓰는 사람 이야기는 특히나 궁금하니까. 글을 써온 역사를 묻자 A는 겸연쩍은 얼굴이 됐다.

   대학 다니면서 혼자 시를 썼어요. 교사가 되려는 사람들과 다른 나만의 세계가 있다는 게 좋았습니다. 제대하고부터 쭉 소설 습작을 했고, 결국은 교사가 됐지만 나쁜 짓 안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학기 중에는 구상을 하고 방학 때 써요. 작가 되면 학교 바로 그만두려고…… 교장쌤한테는 비밀입니다.

   A는 내 예상보다 훨씬 오랫동안 써왔고 완성작도 적지 않았다. 소설에만 전념하고 싶어 휴직을 했던 시기도 있었다. 시래깃국을 끓여서 2주씩 먹고, 매일 저녁 운동장을 뛰고, 그 외에는 틀어박혀 글만 썼다고. 벽에 전지를 붙여놓고 관계망을 그려가며 소설을 쓰는 동안 전혀 외롭지 않았다고 했다. 듣다보니 A에게 독자는 혼자 사는 집에 대뜸 찾아온 불청객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싶었다. A의 글세계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A 혼자서만 가득했다. A는 피드백을 받고는 싶지만, 작품을 보여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라고 했다. 이유를 묻자 ‘자격이 없다’는 대답이 나왔다.
   ‘진짜 작가’도 아니면서 남들한테 읽어달라고 하는 게 미안하다는 얘기. 등단을 바라는 것도 같은 이유. A는 계속 쓸 수 있는 정당성을 가지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A는 작가로 성공할 사주가 아니란다. 그래서 공모전에 낙선해도 받아들인다고, 아쉽지만 우주에 대한 나만의 표현을 가지고 있는 걸로 만족한다고 했다. 다만 그런 표현이 영영 말라버릴까봐 걱정이라고 했다. (A에 의하면 토(土) 기운이 많은 사람은 나이 들수록 총기가 마른다.) 사주팔자가 아니라거나 말거나, A는 어쨌거나 계속 쓸 거라는 사실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쓰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사람은 흔치 않다. 그에게 독자 한 명쯤 얻을 자격은 충분해보였다.

*

   그의 단편소설 「보컬 트레이닝」에 대한 소개를 부탁하자 그는 약자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답했다. 여성과 동물이 등장하고, 세상에서 소외받으며 살아가는 약자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겹쳐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그래서 X는 이 인물들의 마음을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보컬 트레이닝」 속 주인공과 비슷한 사오십대 여성, 작품 속 강아지가 겪는 비극에 좀더 이입하기 쉽도록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 작품을 읽고 삶의 비애가 더해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현재 삶에 만족하는 사람을 독자로 정했다. 마지막 조건은 ‘수(水) 기운이 많은’ 사람. 수(水) 기운이 많은 사람은 불안도 많은데 A의 토(土) 기운이 그것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제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줘서 고마웠습니다. 근데 집 가면서 너무 작가인척 했나 후회할 것 같아요.” 다시 머쓱해진 A를 보며 그가 용기를 냈다는 걸 알았다. 인적이 드물던, 그래서 편안하고 흐뭇하던 자신의 집에 A가 처음으로 손님을 초대하기로 했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

*

   X를 처음 만난 것은 내가 길잡이로 있는 중년 여성 글방에서였다. X는 말하자면 시니컬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사람, 무엇보다 글쓰기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다. A의 조건에도 부합했고, 그에게 좋은 독자가 되어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어느 늦은 저녁, A의 「보컬 트레이닝」을 들고 X를 만났다.
   X를 만나자마자 실례를 무릅쓰고 X의 생년월일시를 물었다. 만세력 어플에 입력하자 놀랍게도 X는 수(水) 기운을 타고 난 사람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X와 함께 사는 갈색 푸들 보슬이의 사진을 한참 구경한 뒤 ‘현재 삶에 만족하는’이라는 조건에 대해 물었다.

   만족스러워요. 아이만 키울 때는 답답했는데 요즘은 저에게 쓰는 시간 비중을 늘렸어요. 또 글방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쓰고자 하는 욕구가 다시 생겼죠. 내가 되게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았구나, 조금 움직여보니까 그걸 알겠더라고요.

   X는 많이 읽는 사람인 동시에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최근에는 브런치에 올린 글을 보고 삐진 남편이 집안일 좀 하라는 태클을 걸어온다는 근황을 들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에세이말고 소설을 쓰는 것 같다는 X는 A의 소설을 읽고 무슨 말을 해줄까. 기대를 갖고 A의 소설을 건넸다.


   X는 술술 잘 읽힌다는 칭찬으로 말을 시작했다. “특별히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장면과 상황들이 머릿속에 잘 그려져요. 그런 부분은 아주 좋은 점이죠. 눈에 거슬리는 단어 선택도 없어요. 너무 감성적이지도 않고요. 뻔한 단어를 반복하거나, 도식적인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요. 읽는 입장이어서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있지만, 한 편 완성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그러던 X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근데 공감은 안됐어요.

   “주인공 ‘은주’의 행동과 그 배경,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는 알겠는데, 차라리 은주가 평범한 여자였다면 이입이 됐을 거 같네요. 은주라는 인물은 제가 이입하기에는 특수한 캐릭터예요. 특히 중년 여성 섹스 운운하는 부분, 이게 제일 이상했어요. 그런데…… 작가가 남자에요?” 그렇다고 대답하자마자 X가 말했다.

   어쩐지! 뚱뚱한 여자 타령하더라니. 사람들이 사십대 중년 여성은 섹스하고 싶어서 환장한다고 착각을 해요. 되레 하자고 할까봐 걱정하는데.

   웃느라 잠시 자리가 떠들썩해졌다. X는 같은 세대, 같은 성별이라는 이유로 주인공에게 유대감을 느끼거나 이입하기는 어려웠다고 했다. 어쩌면 A가 잘 모르는 사람의 잘 모르는 이야기를 소설로 쓰신 것은 아닐지 짐작했다고. X는 잘 아는 이야기조차 쓰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열심히 상상해도 채워넣을 수 없는 구석이 너무 많다면 자신이 잘 아는, 잘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럼 X가 보고 싶은 인물, 궁금하고 응원하게 되는 이야기는 어떤 모습일지를 물었다.

   정말 평범하게 살아온 중년 여성의 이야기. 스스로는 평안하게 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유로움과 어긋나 있는 사람. 그런 게 좋겠어요. 우리 세대는 젠더 감수성이 좀더 예스럽고, 자기도 모르게 보수적으로 살고 있잖아요. 평범한 사람이 그걸 어떻게 깰 수 있는지가 궁금해요. 일상 속에서 조금씩 일어나는 균열. 아주 극적이거나 큰 거 말고요.

   X의 대답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할 수 있다면 X에게도 A처럼 방에 틀어박혀서 글만 쓸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해주고 싶어졌다. 마지막으로 A에게 주고 싶은 것을 물었다. X는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라는 영화를 추천했다. “옛날 영화인데, 비슷한 상황의 중년 여자들이 나오거든요. 그 이야기를 굉장히 잘 풀어냈다고 생각해요. 한번 보시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

   A는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이런저런 테크닉적 결함에 대한 보완 계획도 밝혔는데, 여기서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A는 X가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인지 몹시 궁금해졌다고 했다. 소설을 쓸 때 종종 멈칫하게 될 것 같다고도 했다. 몇몇 따끔한 지적들에 대해 묻자, 본인은 작가로서의 능력은 부족해도 평가에 가시를 세우는 옹졸함이 없다고 했다. A는 어쩌면 그 점이 자신의 부족한 점인지도 모르겠다며 웃었다.

   시에 대한 마음을 시심(詩心)이라 그러잖아요. 소설의 마음은 뭐라고 하는지 생각이 안 나는데. 다시 이를 깨워내서 좀더 좋은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의 마음. 그건 어떤 마음일까.

   평탄한 듯 흘러가던 주인공의 일상에 한순간 미세한 선이 그어진다. 이로 인해 주인공은 지금까지 가본 적 없던 곳으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 오랜 시간 혼자 써온 A의 일상에 X와 우리가 던져져 미세한 선을 긋는다면, 그러므로 이 만남이 소설적인 어떤 가능성이 될 수 있다면, 우리가 그에게 뭔가를 줄 수 있다면……
   좋은 의도가 있어도 그것과는 상관없이 좋은 이야기를 쓰기란 어렵다. X에게 A가 쓰려던 좋은 의도에 대해 구구절절 해명하는 건 불필요하다. 하지만 어쨌거나 좋은 이야기를 쓰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우리가 뭔가를 줄 수 있길, 그래서 그가 좋은 이야기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길 바랐다.

   X의 말을 곱씹어본다. 잘할 수 있는 이야기. 소설이든 뭐든 쓰는 사람이라면 모두 주의해야 하는 일이었다. 불가피하게 매달 남의 이야기를 하는 우리도 새겨들어야 했다. 서로에 대한 존중과 책임감을 가지고, 각각의 위치를 알고, 우리는 이따금 연결되지만 자주 서로에게 남이라는 걸 알고, 해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알고. 그러나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걸 믿으며.
   우린 마치 소설을 쓰는 거처럼 최선의 전개를 고민했다. A를 변화시키는 그 자리에 누굴 놓을까 궁리했고, 타인만이 만들어줄 수 있는 전환을 믿고 그 순간을 목격하길 바랐다. 내가 타인을 보는 곳에서 타인이 나를 보는 곳으로 이동하고, 타인이 나를 보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래서 그의 눈으로 나를 보게 되는 순간. 그것에 가닿는 길을 수차례씩 쓰고 지우며 다졌다. 놀리고 망신을 주고 싶은 마음을 덜어낼 때 조금 더 이 일을 잘 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어느 저녁, 오직 A만 있던 곳에 X가 들어왔다가 나갔다. A가 진짜로 옹졸하게 가시를 세우지 않을지, 아니면 몰래 투덜거릴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선이 그어졌다는 사실이다. X가 남기고 간 사소한 흔적들이 A를 오래오래 신경 쓰이게 만들기를 기대해본다. 미묘하게 자리가 바뀐 장식품이나 벗어놓고 간 슬리퍼, 컵에 진 작은 얼룩처럼 X를 은근히 신경 쓰이게 하면 좋겠다. 이제 남은 전개는 A의 몫이다. 화수목금토 오행 중 무슨 기운이 필요할지는 모르겠지만, 뭐든 필요한 기운을 전한다. 모쪼록 정진하시길.

   -나은의 에필로그

   스무 살 무렵이었다. 캠퍼스 가득 벚꽃이 피어 있었다. 봄볕을 받으며 강의실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다리를 꼬고 의자에 눕듯이 앉아 학생들이 제출한 글을 한 장씩 넘겨보던 선생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먹이를 뺏긴 불독 같은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야,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졸아?” 허겁지겁 일어나며 속으로는 ‘누구시길래?’ 했다. 누구시길래 감히 앞에서 졸면 안됐는지 모르겠다. 누구시길래 내 말만 잘 들으면 작가 된다고 큰소리를 치는지, 누구시길래 다들 눈에 들려고 애를 썼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많은 친구들이 그가 쓰라는 대로 썼다는 것은 안다. 널리 읽히기 위해서는 당장의 좁다란 문을 통과해야 했으니까. 능력, 권력, 폭력이 한 끗 차이였다. 펜을 들고 눈치 싸움을 하는 우리가 그렇게 서글플 수 없었다. 오랫동안 실망을 이야기했다. 이제는 허물어진 자리에 우리만의 것을 지으려 한다. 작가와 독자가 만나는 다른 경로를 상상하고, 새로운 선택지를 하나 더 보태는 것으로 숨통이 좀 트일 것 같다. ‘from A to X’를 시작한 후로 내내 되뇐다. 여전히 당신이 누군지 잘 모른다고. 몰라도 우리는 잘 할 수 있다고. 당신 없이도 우리는 계속 읽고 쓰고 만날 거라고.


근사(나은)

나래. 나은. 지원. 같은 학교에서 같은 허기를 느낀 세 사람이 작당 모의합니다. 냉소와 조롱과 뒷담화보다 근사한 일을 하고 싶습니다. 여전히 쓰고 읽는 당신이 궁금합니다. 문학 ‘하는’ 우리를 위해 움직입니다.

2019/12/31
2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