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비둘기는 종종 편지를 띄웁니다. 작은 종이 위에 크고 작은 결들을 새겨 보내는 일을 좋아하지요. 그 느리고 복잡한 일을 좋아하는 만큼, 누군가의 시간과 결이 담긴 편지를 받는 설렘도 무척 아낍니다. 이 편지談에서는 월간비둘기가 언젠가 받았던 편지를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당신의 기억 속 첫 편지는 어떤 편지인가요? 그 편지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였기에 하릴없이 지나는 시간 속에서도 당신 안에 살아 있을까요. 제 기억 속 첫 편지를 문득 생각해봅니다. 자그마한 쪽지였어요. 그 위에 적힌 말들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그 작은 종이를 두고 부유하던 마음들은 아릿한 흔적이 되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제가 어릴 적, 엄마는 제 방에 쪽지를 두고 가곤 했습니다. 어려서였는지, 여려서였는지. 저는 지나치게 말을 듣지 않고, 말을 나누려 하지도 않는 아이였습니다. 그 침묵의 방을 나올 때면 제 뿔로 엄마를 들이받던 아이. 쪽지는 그런 저와 대화를 하기 위해 걸어오는 엄마의 말이었습니다. 작은 균열에도 멀리 날아가버리는 새들에게 걸어가듯, 엄마는 조심스럽게 저의 모난 마음을 가만가만 만져주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그런 엄마의 말들을 읽으며 한참 울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제가 밀어내던 엄마가 제 마음에 닿아버린 것이 이상하게 화가 나서 얼굴을 붉히곤 했답니다.

    이따금 엄마의 편지에는 글씨가 번져 있고 종이가 울어 있었어요. 어린 저는 그 이유를 알았을까요. 그러고 보면 그 시절의 엄마와 저는 서로 다른 이유지만 같은 마음으로 얼룩진 밤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아끼는 마음이 없었다면 편지는 출발도 도착도 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저의 뿔도, 엄마에게 남은 흉도 쉬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엄마는 제게 계속 말을 걸어주었답니다. 당신의 말을 저의 시간 속으로 욱여넣는 것이 아니라, 새의 발목에 자신의 말을 달아 제 시간 한편에 두고 가는 방식으로. 그렇게 저는 제 시간 속에서 엄마를 만났습니다.

    물론 저는 여전히 결핍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저를 보며 엄마는 이따금 우스갯소리인 것처럼 “다시 빚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때의 엄마는 엄마도 너무 어려, 저를 어떻게 대할지 몰랐던 것 같다면서요. 하지만 그때의 엄마만큼 그때의 저를 잘 대한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침묵의 방 문을 열고 들어와 어긋나 있는 시간의 틈으로 엄마가 당신의 말들을 쏟아냈다면, 간극을 간극으로서 존중해주는 그때의 엄마가 아니었다면, 그 방문은 열리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엄마의 얼룩을 볼 수 있는 즈음이 되어서였을까요, 그 ‘첫번째 편지들’이 남긴 흔적들이 여전히 아릿해서였을까요. 엄마의 생일날 저는 오랜만에 엄마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엄마 아들, 제법 잘 자랐다고. 이상하게 구멍 많던 내 마음, 엄마가 두고 가던 말들이 조금씩 채워주어, 나름 저 좋아하는 일을 할 줄도, 저를 사랑해주는 이들 아껴줄 줄도 알아가는 지금의 내가 되었다고. 여전히 어려서 엇나가기도 하는 마음이지만, 그래도 이젠 그것이 엇나간 마음이라는 것을 아는 정도는 되었다고. 그냥 문득, 말하고 싶었다고.

    엄마는 울었습니다. 붉어진 눈으로 제 방에 들어와, 그러게…… 아들이 큰 것 같다고 말했고, 저는 가만가만 엄마를 안고, 그러게…… 시간이 흘렀나보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지금의 제가 저의 서랍 속 그때의 엄마를 안았고, 그렇게 잠깐 엄마의 시간과 저의 시간이 만났습니다.

    그러고 보면 편지는 각자의 시간 속에서 서로를 만나는 일이 아닌가 생각해요. 우리는 함께 살아가지만 각자의 속도가 달라,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갑니다. 모든 게 빨라진다는 요즈음의 세상에서는 오죽할까요. 그 속에서 서로의 시간을 바라보지 않은 채, 시간의 간극 속으로 자신의 말들을 욱여넣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말을 띄워 당신의 시간에 보내는 일. 서로의 시간을 기다려주는 일. 그렇게 잠깐, 나의 시간이 당신의 시간을 만나는 일. 편지란 그런 일이라 생각해요. 이는 아주 느린 일이 되기도 하기에, 점점 어려워지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서둘러서는 안 될 일이지요. 어릴 적, 엄마가 두고 간 편지에 답장을 하기까지 우리가 10여 년을 기다려야 했던 것처럼.


월간비둘기

월간비둘기는 손 편지 정기구독 프로젝트입니다. 정찬처럼 자리를 잡고 먹어야 하는 긴 글 덩어리 말고, 빵 쪼가리처럼 뜯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편지 한 장을 써서 띄웁니다. 그리고 우편함 속 전기세 고지서, 백화점 전단지, 예비군 소집 통지서, 슈퍼마켓 광고지 사이에서 우연히 사람이 쓴 편지를 발견했을 때의 작은 희열을 아낍니다.

2018/03/27
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