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결, 결의 시간
2화 벗지 말걸 그랬어
유치원 생일 파티, 원피스나 치마를 입고 가야 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청록색 꽃무늬 캉캉 원피스. 나는 그 옷이 싫어서 울며불며 유치원에 갔다.
아홉 살, 겨자색 카디건을 좋아했다. 소매가 닳은 체크무늬. 같은 아파트 1층에 살던 언니가 입던 옷이었다. “넌 이 옷이 좋아? 내가 이 옷 싫어해서 너 줬나보다.” 그 집 막내가 했던 말.
“양말 왜 안 신었니?” 낯선 이의 무심함. 결에게 하는 말인지, 내게 하는 말인지 모르겠는 말. 대답할 수 없는 말.
싫어하는, 좋아하는, 너나 잘 입으세요, 하고 싶은…… 입고 벗기는 오늘의 옷.
시간의 결
- 벗지 말걸 그랬어
나성훈 : 결이가 태어나기 전에 그림책 『벗지 말걸 그랬어』 재미있게 봤는데, 그때는 몰랐어. 옷 입히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은.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야 ‘아, 이게 실제 일을 그린 거구나’ 했지.
장은혜 : 나도 당황했어. 옷 입히는데 결이가 가만히 있지 않으니까. 기저귀 갈려고 하면 버둥대고, 뒤집고, 힘도 세서 처음에는 우리 둘이 같이 한 것 같아.
나성훈 : 팬티형 기저귀로 바꾸고 나서는 힘이 조금은 덜 들었어?
장은혜 : 밴드형이고 팬티형이고 다 입히기 힘들었어. 소파에 기대게 한 후에 갈아 입혀야 하는데, 말이 안 통하니 얘는 계속 움직이고……
나성훈 : 우리도 힘들지만 결이도 옷 입기 괴롭겠지?
장은혜 : 답답할 거야. 그림 그리고 있는데 기저귀 바꿔야 하고, 놀고 있는데 조끼 입으라 하고, 밖에 나갈 때는 두꺼운 옷으로, 들어와서는 얇은 옷으로…… 하기 싫겠지. 옷 입으려면 놀던 것도 멈춰야 하고.
나성훈 : 그래도 결이가 특별히 좋아하는 옷은 있지 않나?
장은혜 : 강아지 그려진 옷. 오늘도 스웨터 입혔더니 강아지 무늬 있다고 ‘멍멍, 멍멍’ 하더라고. 얘는 동물을 좋아하는 것 같아. 조끼도 토끼 그려진 옷만 입잖아. 모자는 고양이 모자 좋아하고. 동물 옷 좋아하는 건 오래가겠지?
결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고양이 모자
- 나가지 말걸 그랬어
나성훈 : 작년 여름이었나, 내가 결이 데리고 나갔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모자 왜 안 씌웠냐고 물어본 게?
장은혜 : 나는 그런 경우가 많았어. 유모차 끌고 가면 한 명 걸러 한 명씩 얘기하는데 “네, 네.” 하다가도 결국 화가 나. 어떤 사람은 양말 왜 안 신겼냐고 하고, 또다른 사람은 더운데 양말 신었다고 뭐라고 하고…… 땀띠 나서 약 바르는 줄도 모르고.
한번은 웬 할머니가 “아이고, 아기 예쁘다.” 하더니 갑자기 반말로 “모자 씌우지 마라. 머리 나빠진다.” 이러는 거야. 자기는 모자 썼으면서. 어이없어서 아무 말도 못했어.
나성훈 : 아는 사람도 아닌데 대체 왜 그러는 건지……
장은혜 : 겨울옷 두껍게 입힐 때는 양말 신기고, 우주복 입히고, 잠바까지 걸치는데, 길 가다보면 웬 모르는 사람이 결이 장갑 없다고 한마디 하고 가. 하나 사주고 그런 말하든가.
결의 출산을 앞두고 첫 빨래 한 날
- 홍학일걸 그랬어
나성훈 : 우리가 톰보이 스타일로 입히니까 아들이라고 오해도 많이 받았지. 나도 얘가 여자애라는 의식을 많이 하지는 않지만 자주 들으니까 기분이 썩 좋지는 않더라. 꼭 분홍색 옷을 입혀야 할까?
장은혜 : 나는 분홍색을 좋아하지 않고, 포인트 색 정도로만 생각해. 색으로 성별을 구분하는 문화도 별로야. 레이스 달린 옷이 좋다, 여자처럼 입혀야 한다 등등……
나성훈 : 여자애한테 분홍색 옷을 안 입히면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말하잖아. 그런데 어른이 분홍색 옷을 입으면 왜 그 색만 입느냐고 물어.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건지.
장은혜 : 어릴 때부터 색의 균형을 맞추는 것도 중요하거든. 여러 색과 디자인을 경험하게 해줘야지.
나성훈 : 나는 초등학생 때 남자아이들 중에 내 가방만 빨간색이어서 항상 부끄러웠어.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정말 멋진 가방을 갖고 다닌 거야.
장은혜 : 사회적 시선이 있으니까 어린 나이에도 자유롭지 못한 거지. 결이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결의 시간
무엇을 어떻게 입어도 모든 게 결이만의 아이템.
‘한 사람의 옷차림은 그 사람이 하루 동안 염원하는 감정의 총합이다.’(김현, 『아무튼, 스웨터』 중)
엄마의 시간
결, 나를 닮아 좋고 싫은 게 명확한 딸. 강아지 옷과 고양이 모자를 좋아하는 아이. 빨간 가방에 밀짚모자를 쓰고 ‘안녕’ 손 흔드는 친구.
입히기 편한 옷, 우리에겐 그게 좋은 옷이다. 다른 집도 비슷할 것이다. 이제는 간혹 특이하게 옷 입은 아이를 봐도 ‘저게 최선이다’ 생각한다.
분홍색, 예쁘지 않다. 적어도 내게는. 여성의 색으로 인식되는 것도 불편하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결이에게 분홍색 옷을 사주지 않는지도 모른다.
사랑스러운, 편안한, 얽매이기 싫은…… 입고 벗기는 오늘의 옷.
내일은 또 뭘 입힐까?
어떤 말을 듣게 될까?
마음대로 하면 좋겠어
돌 지나고부터 모자도 이거 아니면 안 쓴다고 하고, 샌들도 저 색깔만 신는다고 하고, 옷도 편한 것만 입는다고 했지.
결은 말을 잘 해주면 그냥 “응” 하는 것 같아. 오늘도 “우리 따뜻한 옷 입고 밖에 나가서 눈 볼까?” 하면 “응, 응” 하면서 적극적으로 대답했거든.
나는 엄청 튀는 옷이나 브랜드 있는 것보다는 수더분한 게 좋아. 결이는 성향과 상황에 잘 맞는 옷을 입는 아이면 좋겠어. 휘황찬란한 옷도 입겠지만, 시장에서도 자기에게 잘 어울리는 걸 고를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라. 자기 옷은 자기가 골라야지. 결이 인생이니까.
사진글방
사진글방
장은혜는 사진 찍고, 나성훈은 글 씁니다. 사진과 글을 도구로 세상의 작은 것들을 정성스럽게 담아냅니다.
2018/02/27
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