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시나리오(2018~2022)
원스 인 어 블루문 (Once in a blue moon)
[등장인물]
소영(29)
지원(29)
제나(29)
진우(29)
1
소영의 집. 소영,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벨 소리가 울린다. 심호흡을 한 뒤 문을 열어준다.
제나와 지원, 무대 여기저기를 다니며 구경한다.
제나, 잠시 퇴장한다.
제나, 손을 닦으며 돌아온다. 지원, 안방 문을 연다.
지원,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눕는다. 소영과 제나, 따라 들어간다.
소영과 제나,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간다. 지원, 침대에 누워 있다.
제나, 뚜껑 열고 피아노 건반을 눌러본다. 그 소리를 들은 지원, 일어나 피아노로 간다.
소영, 몇 개의 건반을 짚어본다. 앉는다. 가벼운 곡을 서툴게 연주한다.
지원, 젓가락 행진곡의 한 부분을 연주한다. 소영이 화음을 맞춰준다. 점차 빨라진다.
소영, 낯선 듯 몇 개의 음을 짚어본다.
제나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제나, 전화를 받으며 밖으로 나간다.
제나, 돌아온다.
소영, 밸런스 트레이너에 올라간다. 비틀거린다. 지원, 손을 잡아주려 한다.
소영, 지원의 손을 잡고 균형을 잡는다.
소영, 제나를 모로 눕히고 폼롤러로 허벅지 옆선을 민다. 제나, 소리 지른다.
지원, 폼롤러를 자신의 등에 대고 굴린다.
소영, 지원을 따라 한다.
제나, 엎드려 폼롤러를 대고 구른다. 지원이 와서 제나와 폼롤러를 같이 굴려버린다. 제나, 소리 지른다.
지원, 도망간다.
벨 소리가 들린다.
2
카페. 진우, 초조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다. 제나, 들어온다.
진우, 일어난다.
제나, 주문하러 간다. 진우, 제나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땀을 닦는다. 제나, 잠시 후 컵을 들고 돌아온다.
진우, 남아있는 커피를 단숨에 마셔버리고 벌떡 일어선다. 제나와 진우, 걷기 시작한다.
제나, 진우 사라진다.
3
여고 교실. 야자시간. 소영과 지원, 나란히 앉아 있다. 그 앞에서는 제나가 공부하고 있다. 소영, 엎드려 자고 있다. 지원, 연필을 돌리며 소영을 보고 있다.
지원, 소영 키득거린다.
지원, 소영의 손을 잡고 몸을 굽혀 몰래 나간다.
지원,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옥상 문을 연다.
사이
한참의 침묵.
소영, 주머니에서 통에 든 초콜릿 꺼내어 하나 입에 넣고 지원에게 준다.
소영, 지원 몸을 숙이고 제나와 진우를 바라본다.
4
귀갓길. 제나, 걷다가 멈춘다. 진우, 멈춘다. 제나, 다시 걷다가 서서히 멈춘다. 진우, 숨는다. 제나, 고개를 휙 돌린다. 진우, 숨으려다가 발각된다. 제나, 자판기 앞에서 멈춘다. 주머니에서 동전을 찾지만 없다. 진우, 동전을 흘린다. 제나, 돌아본다.
둘, 어색하게 음료수 마신다.
제나, 가방에서 모의고사 시험지를 꺼내 내민다. 진우, 펜으로 풀이를 적어준다.
어색한 침묵.
진우, 달을 바라보다가 괜히 운동화로 바닥을 비빈다.
진우, 주섬주섬 갈 준비를 한다.
진우, 가다가 인사를 안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뒤돌아본다. 손을 흔들며 웃고는 다시 달려간다.
5
소영의 집. 첫 만남에서 두 달이 지났다. 친구들이 오기 전. 소영은 잠깐 잠이 들었다. 꿈속. 지원, 화분 옆에 서서 분무기로 물을 뿌리고 있다.
소영, 장난스럽게 분무기를 빼앗아 지원에게 뿌린다. 지원, 안방으로 도망쳐 문을 잠근다. 소영, 문을 열려고 한다.
지원, 문을 연다. 소영, 장난스럽게 지원의 얼굴에 물을 한번 뿜는다. 지원, 자전거를 끌고 온다. 자신이 타고 무대를 한 바퀴 돈다. 제자리에 와서 소영을 태운다.
지원, 빠르게 무대를 돈다.
지원, 자전거 뒤를 잡고 따라간다. 소영, 비틀거리다가 점차 익숙해진다. 지원, 손을 놓는다. 소영, 지원이 손을 놓은 줄도 모르고 달린다. 점차 속도를 낸다. 점차 속도를 내 빠르게 달린다. 빠르게 돌다가 벽에 살짝 부딪혀 쓰러진다. 쓰러진 자리에서 뭔가를 발견한다.
소영, 꿈에서 깬다. 소영 옆에 임신테스트기가 있다. 소영은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본 후 내려놓는다. 달력을 찾아본다. 팔짱을 끼고 창밖을 본다. 초인종이 울린다. 소영, 문을 열어주러 가다가 임신테스트기를 바닥에 떨어뜨린다. 줍지 않고 발로 쓱 밀어둔다.
초인종 소리 울린다. 소영, 나가 문 열어준다. 지원, 들어온다.
지원, 주머니에서 초콜릿 통을 꺼내려는데 핸드폰과 지갑, 초콜릿 등이 바닥에 우르르 쏟아진다. 초콜릿 하나가 멀리까지 굴러간다. 지원,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 가 주우려다 임신테스트기를 발견한다.
(사이)
(사이)
셋, 작게 웃음 터진다.
지원, 주머니에서 초콜릿 통을 찾아 소영에게 초콜릿을 건네고, 임신테스트기를 집어 주머니에 넣는다. 해결되었다는 듯 양손을 펼쳐 보인다. 소영, 초콜릿을 먹는다.
소영, 초콜릿을 하나씩 계속 꺼내 먹는다.
제나, 소영, 지원, 잠자코 초콜릿을 먹는다.
6
조명이 어두워졌다 다시 밝아지면 시간이 흘러 있다. 소영의 집. 제나, 소영, 지원이 편하게 앉아 있다.
지원, 기타 줄을 튕긴다. 짧은 곡을 연주한다.
소영, 피아노를 친다. 지원, 듣고 있다가 소영의 연주에 맞춰 기타를 친다. 연주가 끝나자 제나가 손뼉을 친다.
소영의 변주가 잦아들며 어두워진다.
7
밝아지면 제나와 진우가 걷고 있다. 진우, 자판기 앞에서 멈춘다.
진우, 제나에게 지폐를 받아 실론티를 뽑는다. 제나에게 건넨다.
진우, 뭔가를 말하려다 그만둔다. 커피를 뽑는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진우의 딸꾹질이 시작된다.
분위기는 더 어색해진다.
제나, 가방에서 물통을 꺼내어 진우에게 준다.
진우, 벌컥벌컥 마신다.
그때 구르르륵 소리가 들려온다.
제나, 진우의 등을 토닥인다. 그때 진우에게서 오래 참다가 뀐 방귀 소리가 난다. 둘 사이에 정적이 흐른다. 제나, 힘겹게 웃음을 참는다.
사이
진우, 구두 신은 발로 바닥을 문지른다. 다 마신 커피 캔과 홍차 캔을 나란히 두고 떠난다.
8
소영의 집. 소영, 배가 많이 불러 있다. 지원의 무릎에 소영이 머리를 대고 누워 있다.
지원과 소영, 계속 오이를 먹는다.
9
카페.
제나, 화장실 다녀온다. 지원, 창문을 보다가 핸드폰으로 뭔가를 찾아본다.
10
소영의 집. 아기가 자고 있다. 제나가 뒤늦게 도착한다.
소영, 제나에게 휴지를 한 장 뽑아준다. 제나, 아기의 콧물을 닦아주고 휴지의 남은 부분으로 자신의 손을 닦는다.
지원, 기타 치기 시작한다.
소영, 아기를 안아 제나에게 건네준다. 제나, 건네받는다. 소영, 피아노를 연주한다. 멋진 연주다. 지원이 기타를 친다. 제나, 아이를 안고 옆에서 그 소리를 듣는다.
밤이 되었다. 아기 옆에 소영이 모로 누워 잠들어 있다. 지원, 소영에게 이불을 덮어준다. 불을 어둡게 한다. 어질러진 방을 치운다. 기저귀와 양말 등 빨래를 걷어와 기저귀를 갠다. 식탁을 정리하고 닦는다. 일을 마친 후 식탁 의자에 앉아 잠든 아기와 소영을 바라본다. 빨랫감 중 남자 양말만 남아 있다. 지원, 손톱으로 식탁을 두드리며 그 양말을 한참 바라보다가 갠다. 잠시 후, 퇴장. 제나가 등장한다.
소영,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처리한다.
소영, 지원에게 전화를 건다.
지원, 목에 전화기를 끼고 손에 케이크를 들고 들어온다. 제나, 잽싸게 불을 붙인다.
소영, 돌아본다. 지원과 제나를 발견한다. 제나, 지원 생일축하 노래를 부른다. 소영, 노래가 끝나자 초를 불어 끈다.
소영, 지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셋이 나란히 앉아 창밖을 본다.
조명 점차 어두워진다.
지원, 제나를 간지럽힌다. 제나, 일어나 도망친다. 지원, 그런 제나를 잡으려 한다. 그들의 이야기 소리가 계속된다. 완전히 어두워진다.
소영(29)
지원(29)
제나(29)
진우(29)
소영의 집. 소영,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벨 소리가 울린다. 심호흡을 한 뒤 문을 열어준다.
제나
소영아!
소영
둘이 같이 왔네?
제나
역에서 만났어. 지원이가 태워줬어.
제나와 지원, 무대 여기저기를 다니며 구경한다.
지원
집 엄청 크다.
제나
여기 봐봐.
지원
온 동네가 다 보이네.
제나
밤에 보면 야경이 예뻐. 화장실 어디였지?
소영
저기 현관 앞에.
제나, 잠시 퇴장한다.
지원
집 좋네. 전에 집은 좁았잖아. 사람은 많은데.
소영
지금은 너무 넓어.
지원
좋은 거 아냐?
소영
휑해. 큰데 비어 있어서.
제나, 손을 닦으며 돌아온다. 지원, 안방 문을 연다.
제나
침실인데 막 열어도 돼?
지원,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눕는다. 소영과 제나, 따라 들어간다.
소영
(뒤늦게) 괜찮아.
지원
(침대에 누워 등을 튕기며) 이거 나 줘라. 마음에 들었어.
소영
가질래?
제나
이렇게 막 주는 거야?
소영
이건 줘도 돼. 내 거거든.
제나
(의아하다는 듯, 그러나 농담처럼) 다른 건 남의 거야?
소영
집이랑 가구랑 다 오빠 건데 내가 침대만 사서 들어왔어.
지원
그럼 더더욱 날 주면 되겠네.
소영
자고 간다며. 한숨 자든지.
지원
그래야겠다.
소영
뭐 마실래?
제나
물 한 잔만. 얘는 여기 있으라고 하자.
소영과 제나,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간다. 지원, 침대에 누워 있다.
제나
피아노가 있었어?
제나, 뚜껑 열고 피아노 건반을 눌러본다. 그 소리를 들은 지원, 일어나 피아노로 간다.
지원
칠 줄 알아?
제나
아니.
지원
그럼 소영이가 쳐줘야겠네.
소영
안 친지 오래야. 그냥 갖다 놓은 거야. 치지는 않아도 차마 버리진 못하겠어서.
지원
한번 쳐 줘.
소영
조율 안 한 지 오래됐어. 소리나 날까 몰라.
소영, 몇 개의 건반을 짚어본다. 앉는다. 가벼운 곡을 서툴게 연주한다.
제나
좋은데?
지원
잘 친다고 했잖아.
소영
까먹은 줄 알았는데.
지원
손은 기억하지.
소영
치니까 소리가 나네. 그동안 내버려 둬서 악기인지 까먹었어. 가구인 줄 알았어.
제나
지원이도 잘 쳐? 둘이 같이 쳐 봐.
지원, 젓가락 행진곡의 한 부분을 연주한다. 소영이 화음을 맞춰준다. 점차 빨라진다.
제나
으으. 너무 뻔해.
소영, 낯선 듯 몇 개의 음을 짚어본다.
제나
이렇게 셋이 만나니 옛날 생각난다. 그때가 몇 년 전이더라?
지원
그때가 스물한 두 살 정도였으니까 7~8년 됐지?
제나
그땐 지금 이렇게 만나는 걸 상상도 못 했었는데.
소영
처음 만난 건 벌써 10년 전이야.
제나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제나
응, 잠깐만.
제나, 전화를 받으며 밖으로 나간다.
지원
진짜 옛날얘기네.
소영
아직도 기타 쳐?
지원
기억하네. 가끔.
소영
나는 이제 피아노 안 쳐.
지원
그래도 잊진 않았던데.
소영
(사이) 일은 할 만해?
지원
좋아. 하루에 몇 시간만 일하면 되고. 여기저기 다니니까 여행 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소영
어울린다.
지원
다다음주에 또 와. 넌 어때? 바빠?
제나, 돌아온다.
제나
있잖아. 우리 정기적으로 만나는 건 어때? 한 달에 한 번쯤 만나서 영화를 보든지, 옛날얘기를 하든지, 맛있는 걸 먹으러 가든지 그러자. 오빠 오시기 전까지.
소영
와도 돼. 내가 제나 얘기 많이 해서 궁금해하더라.
지원
내 얘기는?
소영
꼭 해야만 하나? (웃는다)
제나
오빠는 어떤 분이야?
소영
운동하는 사람이야. 그걸로 재활 같은 것도 하고.
제나
물리치료사 같은 건가?
소영
비슷하지. 운동으로 처방을 하니까.
제나
그래서 집에 이런 것들이 있구나.
지원
(운동 소도구를 가리키며) 너도 이런 거 해?
소영
가끔.
제나
이건 뭐 하는 거야?
소영
균형 잡는 건데, 이렇게 올라가서 한 발을 올리기도 하고…….
지원
(올라가 균형을 잡으며) 이렇게?
소영
너 잘한다? 나는 잘 못 하겠더라. 가끔 여기 올라가라 그러는데 그때마다 벌서는 것 같아.
지원
한번 해 봐.
소영
잘 안 돼. 균형이 안 잡혀.
지원
해 봐봐.
소영, 밸런스 트레이너에 올라간다. 비틀거린다. 지원, 손을 잡아주려 한다.
소영
아냐, 아냐. 혼자 서 있어야 효과가 있대.
지원
처음부터는 힘들잖아.
소영
그래서 난 거의 안 해.
지원
일단 잡아. 잡고 있다가 나중에는 혼자 하면 되지.
소영, 지원의 손을 잡고 균형을 잡는다.
지원
봐봐. 해볼 만하지.
제나
이건 뭐야?
소영
그건 근육 푸는 거야. 대고 굴리면 돼.
제나
(폼롤러를 종아리에 대고 굴리며) 이렇게?
소영
줘봐. 여길 밀어야 순환이 잘 된대.
소영, 제나를 모로 눕히고 폼롤러로 허벅지 옆선을 민다. 제나, 소리 지른다.
소영
엄청 아프지?
지원
이리 줘봐.
지원, 폼롤러를 자신의 등에 대고 굴린다.
지원
시원한데?
소영
그렇게도 할 수 있네. 되게 아픈 건 줄만 알았는데.
지원
너도 해봐.
소영, 지원을 따라 한다.
소영
오, 등 결린 게 풀렸어.
제나
나도 해볼래!
제나, 엎드려 폼롤러를 대고 구른다. 지원이 와서 제나와 폼롤러를 같이 굴려버린다. 제나, 소리 지른다.
지원
재밌는데?
제나
너도 이리 와. 어딜 가?
지원, 도망간다.
소영
하여튼 참 한결같으셔. (앉으며) 남자친구랑은 잘 지내고 있어?
제나
응.
소영
결혼은 안 해? 오래 만났잖아.
지원
(돌아오며) 그건 모르는 거야.
제나
있잖아. 혹시 그때 기억나? 우리 고3 때 그 남자애.
지원
남자애? 우리 여고였잖아.
제나
그러니까…… 나랑 같은 학원 다니던 애가 있었는데.
소영
어! 나 알아! 기억났어. 우리 같이 봤잖아. 옥상에서. 제나 뒤에 따라가던.
제나
옥상?
지원
아아. 생각났다. 걔. 이름 뭐더라……. 걔가 우리 졸업식 때 와서 꽃다발 줬잖아.
소영
왜? 걔가 다시 나타났어?
제나
응. (전화기를 들어 보인다)
지원
이제부터 재밌겠는데.
벨 소리가 들린다.
지원
누가 왔나?
소영
빨리 왔네……. 주차장에 차 들어왔다고 알림 오는 거야.
지원
나는 갈래.
소영
있어도 괜찮아.
지원
차 막혀. 있어도 어차피 가야 되는데 뭐.
제나
그럼 나도 지원이 갈 때 같이 갈래.
소영
정말 괜찮은데……. 이렇게 갑자기 가? 인사라도 하고 가.
제나
그래. 인사만 하고 가자.
지원
갈게.
제나
오늘 좋았어. 곧 또 보자.
지원
추워. 나오지 마. (손을 든다)
소영
(하이파이브하며) ……잘 가.
카페. 진우, 초조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다. 제나, 들어온다.
제나
안녕.
진우, 일어난다.
제나
(제지하며) 나도 뭐 마셔야겠다.
제나, 주문하러 간다. 진우, 제나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땀을 닦는다. 제나, 잠시 후 컵을 들고 돌아온다.
진우
안녕.
제나
오랜만이야.
진우
이게…… (목소리가 잘 안 나와 헛기침한다) 몇 년 만이지?
제나
처음 아닌가? 둘이 일부러 만난 적은 없었잖아.
진우
그럼 10년 만에 처음인가?
제나
그렇게 됐네. 어쩌다 보니.
진우
……놀랐어. 영영 못 볼 거라고 생각했거든.
제나
(웃는다)
진우
갑자기 왜……?
제나
그냥. 집에 가는데 보름달이 떴길래, 옛날 생각이 났어. (사이) 어떻게 지냈어?
진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고등학교 졸업부터 시작해야 하나?
제나
나는 아직 학교 다녀.
진우
나도.
제나
늦었네. 뭐하다가?
진우
재수도 하고, 학교도 다시 들어가고, 전공도 바꾸고 그랬어. 아직 끝나려면 한참 남았어. 이제 본과 들어갔으니.
제나
결국 꿈을 이뤘네. 진부하게.
진우
……남자친구는 있어?
제나
남자친구? 그런 거 없어.
진우
(자기도 모르게 웃는다)
제나
남편이 있지.
진우
아…… 어…… 언제……?
제나
너 몰랐구나. 미안. 먼저 얘기했어야 하는데.
진우
아…… 아니야. (사이) 그럼 아기도 있어?
제나
아직.
진우
……축하해.
제나
아기 없는 거?
진우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제나
그럼 뭘?
진우
결혼한 거.
제나
진짜 축하해?
진우
어? 어…….
제나
뻥이야. 아기도 있다고 하려고 했는데, 그럼 진짜 울 것 같아서.
진우
속았잖아.
제나
나는 오랫동안 만난 친구가 있어.
진우
……역시.
제나
나갈래? 산책이나 하자.
진우, 남아있는 커피를 단숨에 마셔버리고 벌떡 일어선다. 제나와 진우, 걷기 시작한다.
제나
여기서부터 내가 좋아하는 길이야. 이렇게 창경궁 따라 쭉 걸어가다가 안국 지나서 광화문 찍고 서울역까지.
진우
나 학교에서 자전거 타고 집에 갈 때 이 길로 다녔어.
제나
여기 길 잘 알겠네. 나는 큰길로만 가 봤어. 다른 길은 잘 몰라.
진우
여기로 가면 북촌이야.
제나
정말? 나 북촌 한 번도 안 가봤어. 가보고 싶긴 했는데, 길을 잘 몰라가지고.
진우
그럼 한 번 가볼래? 이 길도 괜찮아.
제나, 진우 사라진다.
여고 교실. 야자시간. 소영과 지원, 나란히 앉아 있다. 그 앞에서는 제나가 공부하고 있다. 소영, 엎드려 자고 있다. 지원, 연필을 돌리며 소영을 보고 있다.
지원
(깨운다) 야, 야.
소영
아, 왜에. (다시 엎드린다)
지원
왜 자다가 부르르 떨어?
소영
(덜 깬 채) 내가?
지원
어제도 엎드려 자다가 가위눌렸지?
소영
봤어? 그럼 좀 깨워주지. 어제 장난 아니었는데. (하품하며) 졸려 죽겠네. 왜 집에도 안 보내주고 이러는 거야, 누가 공부한다고?
지원
(턱으로 제나를 가리킨다)
지원
반장? 쟤 지금 공부하는 것처럼 보이지?
소영
열심히 하는데?
지원
(고개 젓는다) 내가 노트 좀 빌리려고 자리에 갔는데. 뭐가 빽빽하게 쓰여 있는 거야. 필기 되게 열심히 했나보다 하고 봤거든. 근데 그게 소설인데 내용이 아주 그냥…….
소영
어떤데?
지원
막…… 막……. (설명하려다 말고) 애들이 들으면 놀라서 안 돼. 이렇게 막…… 어휴……. (고개를 젓는다)
소영
작가 되겠다더니 그런 걸 쓰는 거였어?
지원
조용히 말해. 들려.
소영
안 들려. 지금도 손에서 불나도록 쓰는데?
지원, 소영 키득거린다.
소영
그래도 저러면 시간은 잘 가겠다.
지원
심심해?
소영
아오. 그냥 갈까. 아까 담임 퇴근하는 거 봤는데.
지원
어차피 잠깐 나가도 모를 것 같은데.
소영
어디 가게?
지원, 소영의 손을 잡고 몸을 굽혀 몰래 나간다.
소영
어디 가는데?
지원
따라만 와.
소영
야, 여기 들어가면 혼나.
지원
누구한테?
소영
……모르겠네.
지원,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옥상 문을 연다.
소영
이걸 어떻게 구했어?
지원
나한테 없는 게 어디 있냐?
소영
나 여기 처음 올라와 봐.
지원
어때?
소영
(웃는다)
지원
넌 누구랑 다녀?
소영
음…….
지원
밥은 누구랑 먹는데?
소영
제나랑. (사이) 별이 보이네. 많다. (손가락으로 별을 세어보며) 다섯 개도 넘겠는데?
지원
다섯 개 넘으면 많은 거야?
소영
요즘에 별이 그 정도면 많은 거 아니야?
지원
별이 쏟아질 것처럼 많다는 얘기 못 들어봤어?
소영
그거야 옛날얘기지. 요즘 그런 걸 어디서 봐.
지원
여기에서 안 보인다고 없어?
소영
넌 본 적 있어?
지원
아니. 뭐, 언젠가는 볼 수 있겠지.
소영
낭만적이네.
지원
넌 나중에 뭐 되고 싶어?
소영
몰라, 그런 거. 왜 웃어?
지원
나도 그런데!
소영
자랑이다.
지원
여기 괜찮지?
소영
응. 학굔데 학교가 아닌 것 같아. 풍경도 좋고.
지원
그리고 여기가 제일 조용해.
소영
조용해? 자동차 소리는 좀 들리는데.
지원
가만 있어 봐.
사이
지원
들었어?
소영
뭐?
지원
넌 아직 안 들리나 보다.
소영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지원
시곗바늘 소리 들어본 적 있어? 그거랑 비슷한 거야. 밖에선 안 들려. 잘 들어야 해.
한참의 침묵.
소영, 주머니에서 통에 든 초콜릿 꺼내어 하나 입에 넣고 지원에게 준다.
지원
너 초콜릿 되게 좋아하더라.
소영
먹을 때마다 맛이 달라. 어느 날은 쓰고 어느 날은 달고.
지원
그게 무슨 말이야?
소영
그럼 넌 항상 달아?
지원
어. 초콜릿은 단맛에 먹는 거 아니야?
소영
나만 그런가? (하나 더 먹는다)
지원
너 되게 이상하다. (하나 더 먹으려다) 아…… 이제 없다.
소영
(지원을 바라보며 웃는다)
지원
왜?
소영
아니야.
지원
뭐야? 왜?
소영
앞니에 초콜릿 꼈어.
지원
(입을 오물거리며 빼보려 한다) 나도 뭐 하나 알려줄까?
소영
뭔데?
지원
여기 올라와서 아래를 보면 돼. 어떤 날은 불빛이 반짝여서 예쁘고, 어떤 날은 불빛이 반짝여서 속상해.
소영
같은 풍경인데 왜 달라?
지원
같은 초콜릿인데 왜 달라?
지원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건네며) 너 줄게.
소영
(열쇠를 받아 유심히 바라보며) 나 줘도 돼? 넌 어쩌고.
지원
우리 둘 중 하나만 있으면 되지. (소영을 보고 웃는다) 야, 사돈 남 말 할래? 너는 여기 끼었거든?
소영
(혀로 이를 훑으며) 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끼고 난리야.
지원
어, 저기 반장 간다.
소영
진짜? 벌써 10시 지났나 봐.
지원
쟨 누구지?
소영
누구?
지원
저기, 저 남자애.
소영
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아, 제나랑 집에 갈 때 몇 번 봤어.
지원
어, 뒤돌아본다.
소영, 지원 몸을 숙이고 제나와 진우를 바라본다.
귀갓길. 제나, 걷다가 멈춘다. 진우, 멈춘다. 제나, 다시 걷다가 서서히 멈춘다. 진우, 숨는다. 제나, 고개를 휙 돌린다. 진우, 숨으려다가 발각된다. 제나, 자판기 앞에서 멈춘다. 주머니에서 동전을 찾지만 없다. 진우, 동전을 흘린다. 제나, 돌아본다.
진우
이게 뭐지? 여기 동전 되게 많다.
제나
아이……. 진짜.
진우
(약 올리듯) 이걸로 레쓰비 마셔야지. 불쌍하니까 너도 하나 줄게.
둘, 어색하게 음료수 마신다.
제나
수학 오답 노트 다 만들었어?
진우
만들 게 없어. 다 맞아서.
제나
(진지하게) 너…….
진우
(내심 흐뭇하게) 나 뭐……?
제나
재수 없다…….
진우
넌?
제나
난 못했어. 수학 너무 어려워서.
진우
너 문과잖아. 수1이 뭐가 어려워?
제나
수학을 못 하니까 문과에 온 거잖아.
진우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제나
너 확률 잘 해?
진우
확률이 제일 쉬운 건데.
제나
그럼 나 이거 답 좀 알려줘.
제나, 가방에서 모의고사 시험지를 꺼내 내민다. 진우, 펜으로 풀이를 적어준다.
진우
이건 좀 심했다. 확률은 0에서 1사인데 어떻게 이런 답이 나와?
제나
내가 생각을 해봤더니 이 정도 되는 것 같아.
진우
(의아하게) 문제를 풀어야지 생각을 왜 해? 아…… 아니야. 어떤 사건이 아예 일어나지 않는 0, 어떤 사건이 분명히 일어나는 1, 어떤 일이 일어날 확률은 아무것도 없는 0과 그게 분명히 발생하는 1 사이에 있을 수밖에 없잖아. 그런데 어떻게 이런 숫자가 나와?
제나
어떻게 그렇게 확신을 해?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닐 수도 있잖아. 그럼 아, 1이었구나 해도 사실 그건 진짜 1이 아니었던 거야. 그리고 0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1이 안됐을 뿐 0은 아니었을 수도 있잖아. 왜 그 가능성은 배제해?
진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제나
물론 책에서는 그렇겠지. 확률은 0과 1 사이에 있다고.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거나 그 사이에 있거나. 그런데 일어났는데 사실은 안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일어난 것일 수도 있다고.
진우
(머뭇거리며) 문과에서는 그렇게 배우나……?
어색한 침묵.
진우
너는 나중에 아나운서 해라.
제나
갑자기 웬 아나운서?
진우
넌 그런 게 어울려.
제나
쓸데없는 의견 감사합니다.
진우
그럼 넌 뭐가 되고 싶은데?
제나
나는…… 작가. 멋있잖아.
진우
그런 것보다는 아나운서가 어울려.
제나
어? 달떴다. 완전 보름달이네.
진우, 달을 바라보다가 괜히 운동화로 바닥을 비빈다.
제나
너는 뭐 하고 싶은데?
진우
의사.
제나
되게 진부하다. 멋있는 것 좀 해.
진우
의사 멋있는데…….
제나
하긴. 남의 꿈인데 싫을 건 없지.
진우
(풀죽은 목소리로) 남의 꿈?
제나
그럼 네 꿈이지 내 꿈이냐?
진우
‘고통을 기억하고 호소하는 일이 글을 쓰는 사람의 소명일 것이다.’ 네가 그렇게 썼잖아.
제나
방금 소름 돋았어. 뭐야, 너 그거 어떻게 읽었어. 너 내 일기장 봤지? (마구 때린다)
진우
아니야. 교지에 실린 거 봤어.
제나
(멈춘다) 아, 그래? 그걸 보는 사람이 있었어? 처음 알았네. (사이) 가. 이제.
진우
집까지 바래다줄게.
제나
됐네요. 빨리 가. (사이) 아, 그래서 의사가 된다는 거야?
진우
(못 들은 척한다)
제나
너 내가 쓴 거 끝까지 안 읽었지?
진우
다 읽었는데?
제나
시간 되면 한 번 더 읽어봐.
진우
가서 바로 읽을게.
제나
교지가 심지어 집에 있어? 대박…….
진우
아니? 응? 아니?
제나
가서 천천히 읽어봐. 아플 때 어떻게 해결하자고 했는지.
진우, 주섬주섬 갈 준비를 한다.
제나
뭘 또 그렇게 급하게 가?
진우
읽으라며.
진우, 가다가 인사를 안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뒤돌아본다. 손을 흔들며 웃고는 다시 달려간다.
소영의 집. 첫 만남에서 두 달이 지났다. 친구들이 오기 전. 소영은 잠깐 잠이 들었다. 꿈속. 지원, 화분 옆에 서서 분무기로 물을 뿌리고 있다.
소영
(일어나며) 언제 왔어?
지원
올 일 있다고 했잖아.
소영
깜빡 잠들었네. 마중도 못 나가고.
지원
어차피 주소 찍고 오는데 뭐.
소영
여기가 대중교통으로 오기가 애매해.
지원
너는 어떻게 다녀?
소영
오빠 있을 땐 차로 다니고 없을 땐…… 불편하지. 거의 안 나가.
지원
운전은?
소영
면허가 있긴 한데, 장롱면허라서.
지원
따놓고 왜 썩혀. 아깝게.
소영
그런가? 오빠가 나 운전하는 거 싫어해. 위험하다구. 싫어하니까 굳이 하기도 그렇더라.
지원
여기 길이 잘 뚫려서 자전거 타기도 좋겠다. 현관에 자전거 있던데.
소영
그 생각을 못 해봤네.
지원
자전거는 잘 타?
소영
그것도 잘. 돌아다니기 불편해서 안 나가는 것도 있어. 여긴 뭐 갈 데도 없고.
소영, 장난스럽게 분무기를 빼앗아 지원에게 뿌린다. 지원, 안방으로 도망쳐 문을 잠근다. 소영, 문을 열려고 한다.
지원
그렇다고 이렇게 집에만 있어?
소영
…….
지원
안 심심해? 가자.
소영
……어디로?
지원, 문을 연다. 소영, 장난스럽게 지원의 얼굴에 물을 한번 뿜는다. 지원, 자전거를 끌고 온다. 자신이 타고 무대를 한 바퀴 돈다. 제자리에 와서 소영을 태운다.
지원
(타라는 고갯짓)
소영
(자전거 뒷자리에 타며) 여기 타는 거 진짜 오랜만이다.
지원, 빠르게 무대를 돈다.
지원
이제 네가 타봐.
소영
뒤에서 잡아줄 거야?
지원, 자전거 뒤를 잡고 따라간다. 소영, 비틀거리다가 점차 익숙해진다. 지원, 손을 놓는다. 소영, 지원이 손을 놓은 줄도 모르고 달린다. 점차 속도를 낸다. 점차 속도를 내 빠르게 달린다. 빠르게 돌다가 벽에 살짝 부딪혀 쓰러진다. 쓰러진 자리에서 뭔가를 발견한다.
소영
이게 뭐야?
소영, 꿈에서 깬다. 소영 옆에 임신테스트기가 있다. 소영은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본 후 내려놓는다. 달력을 찾아본다. 팔짱을 끼고 창밖을 본다. 초인종이 울린다. 소영, 문을 열어주러 가다가 임신테스트기를 바닥에 떨어뜨린다. 줍지 않고 발로 쓱 밀어둔다.
소영
왔어?
제나
지원이는?
소영
오는 길이래. 뭐 마실 거 줄까?
제나
오면 같이 마시지 뭐. 그런데 있잖아. 나 궁금한 거 있었어. 마침 지원이 없으니까.
소영
뭔데?
제나
(조심스럽게) 다시 만나는 것 괜찮아? 결혼식 때 지원이 온 거 보고 좀 놀랐어.
소영
나도 그때 오랜만에 봤어.
제나
헤어진 다음에는 연락 안 했어?
소영
아니, 가끔 보기도 했어. 결혼하기 전에.
제나
그랬구나. 괜찮았어? 헤어진 사람이랑 다시 보는 거.
소영
나는…… 괜찮더라? (웃으며) 누가 내가 싫어졌다고 하면 그 사람이 나쁜 건가? 내가 좋아하는 마음 정리하고 만나면 되는 거지.
제나
그게 잘 돼?
소영
잘 된다기보다는…… 안 될 건 없지.
초인종 소리 울린다. 소영, 나가 문 열어준다. 지원, 들어온다.
지원
무슨 일 있었어? 안색이 안 좋아.
소영
그래?
지원
잠깐만.
지원, 주머니에서 초콜릿 통을 꺼내려는데 핸드폰과 지갑, 초콜릿 등이 바닥에 우르르 쏟아진다. 초콜릿 하나가 멀리까지 굴러간다. 지원,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 가 주우려다 임신테스트기를 발견한다.
지원
(엎드린 채) 이거…… 두 줄이네.
(사이)
지원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제나에게) 네 거야?
(사이)
소영
너 때문이야.
지원
나?
소영
너 때문에 임신했잖아.
지원
난…… 손만 잡았어.
셋, 작게 웃음 터진다.
제나
임신……? 난 지금도 고등학교 때 소영이가 머리 이렇게 묶고 다니던 거 생각나는데. 하도 높게 묶어서 (흉내 내며) 별명 오랑캐였잖아.
소영
하…… 내가 그땐 세상 무서울 게 없는 오랑캐였는데.
지원
옥상 기억나?
제나
무슨 옥상?
지원
(주머니를 뒤적이며) 내가 거기에서 소영이한테 열쇠를 줬거든.
제나
주머니에서 뭐가 그렇게 나오니?
지원
도라에몽 주머니야. 필요한 건 다 있어. 소영아, 그 열쇠 어디 있어?
소영
열쇠? 아…… 어디 있을 거야.
지원
어디 있는지 몰라?
소영
(약간 당황하며) 어, 없어진 건 아니고. 분명 나한테 있긴 있는데…….
지원
그래. 너한테 늘 있다니까.
지원, 주머니에서 초콜릿 통을 찾아 소영에게 초콜릿을 건네고, 임신테스트기를 집어 주머니에 넣는다. 해결되었다는 듯 양손을 펼쳐 보인다. 소영, 초콜릿을 먹는다.
지원
맛이 어때?
소영, 초콜릿을 하나씩 계속 꺼내 먹는다.
지원
처음엔 별이 열 개도 안 보였었어. 그런데 졸업할 쯤에는 별이 훨씬 많아졌다? 이상하지 않아? 별이 더 생길 리는 없잖아. 별의 개수는 정해져 있을 텐데. 넌 알겠어, 그 이유를?
제나
익숙해진 거 아니야? 별을 찾으려고 하다 보면 눈이 어둠에 적응해서 나중엔 더 많이 보이잖아.
소영
지원이 말로는, 별이 안 보이면 눈을 크게 뜨고 유심히 보래. 오늘 안 보이면 내일 와서 보고, 내일 안 보이면 모레 와서 보래. 그럼 안 보이던 별들이 나온대.
지원
그래. 눈도 어둠에 적응하지만, 별들도 나한테 적응하는 것 같아. 누가 매일 나를 보려고 그렇게 노력하고 있으면 너라도 한번 나가보지 않겠니. 그러다 보면 정들고. 그런데 가르쳐주면 뭐해. (소영에게 초콜릿을 또 하나 꺼내주며) 아직도 이렇게 못 끊었는데.
제나
나도 줘.
소영
응, 먹어.
제나, 소영, 지원, 잠자코 초콜릿을 먹는다.
조명이 어두워졌다 다시 밝아지면 시간이 흘러 있다. 소영의 집. 제나, 소영, 지원이 편하게 앉아 있다.
지원
그 이후엔 어떻게 됐어? 그 남자애.
제나
고등학교 졸업하고? 걔는 재수했다고 그러던데.
소영
걔가 졸업식 때 꽃다발 들고 왔던 거 기억 안 나? 그 안에 쪽지 넣어서.
지원
맞다. 제나가 그거 읽고 뭐라고 했더니 그 남자애 완전 초스피드로 사라졌잖아.
소영
대체 뭐라고 했길래?
제나
별말 안 했어. 그냥 미안하다고 했어.
지원
미안하다는데 왜 도망가?
제나
걔 마음을 내가 알겠니. 하여튼 그 이후로는 서로 소식 모르다가 오랜만에 다시 만난 거야. 그나저나 내 얘기만 했네. 너는 어떻게 지냈어?
지원
(소영을 본다) 나도 뭐…….
제나
일 때문에 여기 왔다고 했잖아. 무슨 일 하는 거야?
지원
내가 얘기 안 했어?
제나
생각해보니까 우리가 고등학교 때 만나고 대학 때 잠깐 보고 그 이후엔 못 봤잖아.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전혀 모르는 거야. 좀 이상하지 않아? 싸운 것도 아니고 얼굴 한 번 못 볼 정도로 바빴던 것도 아닌데 그 긴 시간 동안 서로 잊고 살았다는 게? 그러다 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이렇게 다시 만나고.
지원
난 잊진 않았었는데.
제나
(웃는다) 나만 그랬나?
소영
나도 가끔 생각했어. 그러고 보면 이렇게 다시 만났다는 게 신기하긴 하다.
지원
소영이 결혼 때문에 다시 만난 거지. 그런데 대부분 그렇지 않아? 싸운 것도 아니고 싫어진 것도 아닌데 그냥 연락 끊기는 사람들. 잠깐 알고 지내다가 조금씩 멀어지다가 나중에는 그냥 없어져 버리는 경우 많잖아.
소영
그렇게 말하니까 슬프다.
지원
(소영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제나
그래서 너 뭐 하는지는 비밀이야?
지원
뭐 할 것 같아?
소영
지원이는 돌아다니면서 수업해. 무슨 강사인데, 뭐더라?
지원
졸업하고 관련 일을 했었거든. 회사 다니다가 지금은 강의 나가. 여기저기 다니는데 이번엔 이쪽 지역으로 신청했어. 창작물을 보호하자, 뭐 그런 거야.
제나
창작물을 보호하자?
지원
그러니까 남의 것을 함부로 갖다 쓰지 말자는 거야.
제나
명쾌하네.
지원
말은 쉬운데. (자조적으로 웃으며) 실천이 어렵지…… 나 기타 갖고 왔다?
제나
너 기타 쳐?
지원, 기타 줄을 튕긴다. 짧은 곡을 연주한다.
소영
진짜 연습했네.
제나
알고 있었어?
소영
친지 꽤 됐어. 대학교 다닐 때부터 쳤지?
지원
한동안 손 놨다가 다시 꺼냈어.
소영
나도 오랜만에 연습 좀 했어. 옛날 생각나더라.
지원
약속했거든.
소영, 피아노를 친다. 지원, 듣고 있다가 소영의 연주에 맞춰 기타를 친다. 연주가 끝나자 제나가 손뼉을 친다.
소영
어떻게 또 소리가 나네.
지원
내가 말 했잖아. 원래 잘 쳤다고. 그럼 앞으로도 잘 칠 수 있는 거지.
제나
그러게, 소영이 잘 치면서. 다른 곡은 없어? 또 듣고 싶다.
소영
이것밖에 연습 안 했는데 어쩌지.
제나
(악보를 보며) D.S.부터 다시 쳐줘. 여기가 반복되는 부분이지?
소영
달 세뇨부터?
제나
이게 달 세뇨야?
소영
이게 일종의 도돌이표인데, 여기 보면 세뇨가 있잖아. 달 세뇨는 여기서부터 세뇨로 다시 돌아가서 연주하라는 거야.
제나
한 번 친 거니까 더 잘 치겠네.
지원
그러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소영
이번엔 조금 다르게 쳐볼까? 변주해서.
지원
악보가 정해져 있는데 마음대로 바꿔도 돼?
소영
안 해봤는데, 한 번 해보지 뭐.
소영의 변주가 잦아들며 어두워진다.
밝아지면 제나와 진우가 걷고 있다. 진우, 자판기 앞에서 멈춘다.
제나
이번엔 내가 사줄게.
진우, 제나에게 지폐를 받아 실론티를 뽑는다. 제나에게 건넨다.
제나
이거 좋아하는 줄 어떻게 알고.
진우
내가 왜 몰라.
제나
난 잘 모르는데.
진우
뭘?
제나
그냥, 너에 대한 것들.
진우, 뭔가를 말하려다 그만둔다. 커피를 뽑는다.
제나
넌 커피 좋아하는구나.
진우
홍차는 싫어해. 특히 실론티.
제나
안 먹어봤지? 나중에 한 번 먹어봐. 생각보다 괜찮아.
진우
(갑자기 홍차 캔을 한 입 마시고 순간 찡그리지만, 아닌 척한다) 나는 수학도 좋아해.
제나
맞아. 나한테 탄젠트도 가르쳐줬지.
진우
탄젠트? 시그마 아니고?
제나
다른 거야?
진우
아니.
제나
나는 달 보는 거 좋아해.
진우
것도 알아.
제나
지금 완전 보름달이야. 소원 빌어.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진우의 딸꾹질이 시작된다.
분위기는 더 어색해진다.
진우
나한테도 (딸꾹) 기회를 주면 안 돼?
제나
무슨?
진우
내가 (딸꾹) 뭘 좋아하는지 너한테 알려줄 기회.
제나
줄게. 그게 뭐라고. 넌 또 뭘 좋아하는데?
진우
(딸꾹) 아나운서.
제나
일관성 있네.
진우
난 아나운서가 (딸꾹) 좋더라.
제나
그래라 그럼.
진우
나한테 세 번째 (딸꾹) 기회는 없을 것 같아.
제나
지금이 두 번째 기회야?
진우
(딸꾹) 아니야? 나는 자신 있어.
제나
그래? 무슨 자신?
진우
나랑 있으면…… 돈 (딸꾹) 걱정은 안 해도 돼.
제나
지금 나한테 돈 자랑하는 거야? 네 딸꾹질 걱정이나 해.
진우
(못 들은 척) 진짜야. 그리고 네가 아프면 (딸꾹) 내가 고쳐줄게. 내가 학교에 왜 10년을 다니는데. (딸꾹)
제나
야, 누가 누굴 고쳐. 지금 네 코가 석 자야.
진우
(딸꾹) 안 아프면 글도 안 쓸 거라고 그랬잖아. 그런데 지금도 뭐 쓴다며.
제나
난 또. 그래서 네가 자꾸 그러는구나. 왜 자꾸 환자 타령인가 했네.
제나, 가방에서 물통을 꺼내어 진우에게 준다.
진우, 벌컥벌컥 마신다.
제나
나한테 뭐가 맞는지를 어떻게 알까?
진우
응?
제나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게 내 타입이고, 어떤 사람이 내 사람인지 넌 어떻게 알아?
진우
이유는 (딸꾹) 몰라. 그래도 난 확실히 알아. 내가 누굴 (딸꾹) 좋아하는지.
제나
맞아. 그런 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어. 어떤 음악을 들으면, 아, 이거 구나, 하고 알게 돼. 수많은 책이 있어도 어떤 책을 보면 바로 그때 알게 돼. 아, 이 책이구나. 사람도 그렇지. 그런 사람을 만나면 자연히 알게 돼. 아,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구나.
진우
(사이) 그런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딸꾹) 그래서 그런 느낌이 올 때까지 기다렸는데 만약 없으면 어떡해?
제나
없을 수도 있어.
진우
그럼 어떡해?
제나
없으면 할 수 없는 거고.
진우
있으면? (딸꾹)
제나
그건…… 운이 좋은 거고.
진우
뭐가 그렇게 복잡해? 좋으면 좋은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제나
이렇게 달이 뜨면 만나서 넌 커피를 마시고 난 차를 마시는 사이는 어때?
진우
그게 무슨 (딸꾹) 사인데?
제나
음…… 그런 사이를 뭐라고 부르지?
진우
남자 여자 사이에 그런 게 어디 있어.
제나
없으면 만들면 되지.
그때 구르르륵 소리가 들려온다.
제나
(진우 쪽으로 귀를 대며) 이거 너한테서 나는 소리야?
진우
어?
제나
너 속 안 좋구나.
진우
전혀. 무슨 소리가 난다는 거야?
제나
음료수 괜히 줬다. 그것 때문에 그러는 거지?
진우
그래? 맛있었는데? (말과는 다르게 속이 불편한 듯 몸을 움찔거린다)
제나
진짜 괜찮아?
진우
어, 어. 얘기 계속해.
제나
음…… 안 그래도 내가 남자친구한테 네 얘기를 했거든.
진우
(속이 불편한 듯 계속 몸을 흔들거리며) 뭐? 뭐라고?
제나
그 친구도 너처럼 싫어할 줄 알았는데. 그렇게 얘길 하더라. 자기와 나 사이에는 오랫동안 쌓아온 여러 겹의 층이 있대. 그래서 우리 사이에는 뭐랄까 어떤 연대 같은 것이 있다는 거야.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하지? 연인? 물론 연인이기도 하지. 그런데 그게 전부는 아니야. 말하자면 그건 꼭 무엇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아도, 그러니까 틀로 규정되지 않아도 서로의 삶에 존재하는 그런 관계인데…… 그건 말했듯이 큰 행운이지. 나는 그런 관계를 좋아하거든.
제나, 진우의 등을 토닥인다. 그때 진우에게서 오래 참다가 뀐 방귀 소리가 난다. 둘 사이에 정적이 흐른다. 제나, 힘겹게 웃음을 참는다.
진우
진짜 타이밍 왜 이러냐, 나는.
제나
아니야. 지금이 제일 좋은 타이밍이야.
진우
기억나? 확률은 0에서 1까지가 아니라고 했던 거. 지금이 그런 것 같네. 0도 아니고 1도 아니고.
제나
이과가 그렇게 말해도 돼?
진우
말도 안 되긴 하지. 그런데 가끔씩 그 말이 떠오르더라고.
제나
있잖아. 세상에는 어떤 숫자들이 있거든. 그 값은 이미 정해져 있어. 예를 들면 중력의 세기라든가…… 그런 게 모여서 지금 이 형태의 우주를 만들었대. 그 숫자가 어떻게 결정되는 줄 알아? 그건 차원의 형태에 영향을 받는 거거든. 내가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우리가 각자 다르게 진동하고 있는 것 같은 거야. 너는 네가 속한 차원의 영향을 받아 흔들리고, 나는 내 차원 안에서 흔들리고. 그러면서 자신의 패턴을 만들게 되고, 그 패턴은 다른 숫자를 만들어내고.
진우
너는 말을 어쩜 그렇게 잘 해?
사이
진우
그러니까 네 말은 그 값이 각자 다 다르다는 거지?
제나
응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기분이 이상했어. 각자가 가진 그 값들이 하나만 달라졌어도 지금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었겠구나 싶어서. 그런데 지금 깨달은 건, 그것의 패턴이 달라지고 값이 변화했다고 해서 거기에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야.
진우
그럼?
제나
지금과는 다른 게 있다는 거야.
진우
무슨 뜻이야?
제나
확률은 0에서 1까지가 아니란 소리야.
진우
그거 알아듣는 데 10년 걸렸거든.
제나
그래, 한 문제를 풀었으면 다음 문제로 넘어가야지. ……이제 가야겠다.
진우
데려다줄게.
제나
(고개를 젓는다)
진우
밤이잖아.
제나
(달을 가리키며) 밝아서. 진짜 간다. (퇴장한다)
진우
(고개를 떨군다. 참았던 방귀가 줄줄이 새어 나온다) 아, 정말!
진우, 구두 신은 발로 바닥을 문지른다. 다 마신 커피 캔과 홍차 캔을 나란히 두고 떠난다.
소영의 집. 소영, 배가 많이 불러 있다. 지원의 무릎에 소영이 머리를 대고 누워 있다.
소영
뭐 시원한 것 없을까?
지원
물 있어.
소영
마시는 것 말고 뭔가 아삭아삭한 것.
지원
오이 줄까? 야채 칸에 있던데.
소영
그거 좋다.
지원
(오이를 씻으며) 아기 이름 생각해 봤어?
소영
영원 어때? 소영의 영, 지원의 원.
지원
그렇게 지어도 돼?
소영
내가 짓겠다고 하면 그만이지.
지원
(오이를 들고 돌아오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소영
너무 빨리 물어보는 거 아냐?
지원
좀 묻기가 그래서.
소영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하냐?
지원
음…… 대학 졸업한 다음부터.
소영
(오이를 먹으며) 그때가 스물세 살이었으니까, 회사 들어갔지. 그리고 스물네 살에 오빠 만났고. 몇 년 연애하다가 결혼했고. 직장도 한번 옮겼고, 계속 엄마 일 도왔고. 그러다 결혼하면서 일 그만둔 건 알지. 너 만날 때부터 두통 심했었잖아. 출근만 하면 머리가 깨지겠더라. 그래도 일을 그만둘 수는 없으니까 계속 회사 다녔지. 결혼하니까 남편이랑 시댁에서 다 일 그만두라고 하더라. 임신하려면 마음 편해야 한다고. 막상 나는 전혀 생각도 없는데.
지원
결혼할 줄은 몰랐어.
소영
나도 몰랐어.
지원
결혼하고 싶을 만큼 좋았어?
소영
음…… 좋은 사람이긴 하지. 그런데 꼭 그래서라기보다는…… 그때 내가 우리 집에 좀 지쳐있었어. 독립하고 싶었는데, 알잖아. 우리 집 분위기. 나가 살려면 결혼밖에 길이 없는데 마침 오래 사귄 남자친구가 있었고, 결혼하자고 하고, 그 집 가족들을 만나보니까 사람들이 좋고, 오빠도 나를 집에서 꺼내주고 싶어 했고 나도 나가고 싶고. 그렇게 된 거지 뭐. 아, 어머님 아버님도 빨리 결혼하라고 하셨어, 계속.
지원
너는? 너도 하고 싶었어?
소영
내가 원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
지원
그런데 왜 했어? 원하지도 않으면서.
소영
그러게 왜 했지? (웃음) 그냥 그렇게 됐어. 다른 일은 안 그런가. 정신 차려보면 나 왜 여기 있지? 이 일이 일어날 거라곤 생각도 안 했는데, 그 일이 일어나 있고. 넌 안 그래?
지원
그래서 여기 와 있잖아.
소영
그렇게 됐어. 나도 하나 물어봐도 될까?
지원
뭔데?
소영
넌 그때 왜 나랑 왜 헤어졌어? 싸운 것도 아니었고…… 그냥…… 궁금했어. 대답하기 좀 그러면 안 해도 돼.
지원
어릴 때 탐정 놀이 해봤어?
소영
탐정 놀이는 뭐야?
지원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탐정 교과서라는 책을 봤는데, 거기 암호문 만드는 법이 쓰여 있었어.
소영
그런 책은 대체 어디서 났어?
지원
내가 없는 게 어디 있냐. 거기에 그런 내용이 있었다? 백지에 레몬즙으로 글씨를 쓰면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그런데 열을 가하면 글자가 생겨나.
소영
어디서 그런 얘기 본 것 같아.
지원
사실은 백지 안에 있었던 거야, 그 글자가.
소영
그러네.
지원
그치. 탐정은 알아. 아무것도 안 보여도 여기 뭔가가 쓰여 있다는 걸. 그리고 불을 쬐어주는 거야. 그러면 글자들이 이렇게 떠오르는 거지.
소영
그럼 암호문은 탐정 말고는 아무도 못 봐?
지원
누군가 불을 쬐어준다면 볼 수 있어. 그런데 그래야 한다는 사실을 탐정만이 알고 있으니까, 결국은 탐정이 나타나야만 볼 수 있지.
소영
그렇구나. 재미있겠다.
지원과 소영, 계속 오이를 먹는다.
카페.
제나
갔다 왔어? 좀 어때?
지원
괜찮아 보였어.
제나
다행이네. 놀랐잖아. 소영이 병원 데려다줬다 그래서.
지원
예정일보다 좀 일찍 들어가게 됐어. 의사가 바로 입원하라 그랬대.
제나
그럼 바로 낳는 거야?
지원
일단 유도해보고…… 봐서 결정하겠지.
제나
나도 병원 가보고 싶다.
지원
아기 낳으면 그때 가자.
제나
(창밖을 바라보며) 여기구나.
지원
계속 여기로 다녔어. 검진 갈 때마다 나랑 같이 갔거든.
제나
병원에서는 뭐래?
지원
안정하라지 뭐. 나보고 보호자냐고 물어보더라. 할 말이 없어서 가만있었어. 가족이냐고 그래서 ‘아뇨 저는…….’하고 말문이 막히는 거야. 친구라고 하기도 그렇잖아. 아기 낳는데 친구 손 잡고 입원하러 오진 않으니까. 직원이 그럼 보호자 언제 오냐고 묻는데 이따 올 거예요 했지.
제나
왠지 표정이 안 좋더라니. 그런데 진통이 안 왔는데 이렇게 입원부터 하는 경우도 있어?
지원
일단 유도분만 시도해보고 정 위험하면 수술한대. 수술 싫다고 그냥 낳아보겠다고 하는데…… 모르겠다.
제나
많이 아프려나. 그렇게 아프다던데.
지원
여기서 아무리 얼마나 아플까 얘기해봤자 소용이 없어. 우리도 겪어본 적이 없잖아.
제나
그러네. 그래도 우리가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면 소영이도 좀 덜 아플 것 같아.
지원
걱정해주면 좀 덜 아픈가?
제나
아플 때 누가 머리만 짚어줘도 좀 낫잖아.
제나
아 참. 아기 낳으면 산후조리는 어떻게 한대?
지원
조리원 예약해놨어. 집이 제일 편하긴 한데, 그럼 다른 사람들이 계속 들락거리니까.
제나
너도 집이 제일 편해?
지원
소영이네 집 좋잖아.
제나
그럼 오빠 오시기 전까지 집에 있다가 나오는 거야?
지원
아슬아슬하게 주차장에서 마주치기도 하고. 전에는 파우치를 놓고 온 거야. 남편이 이거 누구 거냐고 물어봤대.
제나
완전범죄는 아니었네.
지원
그래서 네 거라고 했어.
제나
잘 했어.
지원
20대 초반에 소영이 만날 때 말이야. 그때는 참 갈 데가 없었다? 밥 먹고 나와서 커피 마시고 또 나가야 하고…… 그래서 우리 둘만 있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얘길 자주 했었어. 작은 공간이 하나 있어서 거기서 맛있는 것도 해 먹고 낮잠도 자고 그러면 좋겠다고. 그런데 그런 공간이 생긴 거야. 밤이 되면 진짜 주인이 오긴 하지만…… 그 낮에 소영이랑 같이 밥도 해 먹고 음악도 듣고 낮잠도 자고 그러면…… 괜찮아.
제나
너는, 어때? 소영이 남편? 어떻게 생각해?
지원
뭐라고 대답해야 하냐. 일단 마주치고 싶지는 않아. 그건 확실해……. 소영이 말로는 좋은 사람이래.
제나
그건 아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지원
부럽지. 늘 같이 있고. 평생 그럴 거고. 전에는 한 번 둘이 같이 점심을 먹기로 한 거야. 그런데 소영이가 늦었거든. 그랬더니 짜증을 내더라. 그 얘기를 듣는데, 그 기분을 뭐라고 말해야 하냐?
제나
왜? 소영이한테 짜증 내서?
지원
아니. 당연해 보여서. 부부가 같이 밥 먹고, 와이프가 늦고, 그거에 짜증을 내고. 그건 진짜 평범하잖아. 어쩌면 나보다 소영이 인생에 더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제나
너보다?
지원
그치. 그래도 희망이 있어. 소영이가 이혼하면 나랑 결혼한댔어.
제나
나 축의금 또 내는 거야?
지원
그런데 이번 생에는 이혼을 안 할 것 같아. (웃는다)
제나
그러네. 야, 그런데 그때 왜 헤어진 거야? 네가 헤어지자 그랬다면서?
지원
막막해서. 대학 졸업을 딱 하고 나니까, 처음 든 기분이 그거더라. 막막하다. 자신감도 없었고. 이제 뭘 해야 하는지도 몰라, 집에 돈 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취업은 어떻게 하지, 나는 이제 뭐 하고 살지. 그리고 그때 방 같이 쓰던 룸메이트가 갑자기 몇 달 여행 간다고 방 비워서 소영이가 잠깐 들어와 살기도 했어. 헤어진 건 마 그 이후일 거야. 환경이 변해서…… 라고 변명하고 싶은데 실은 내가 달라진 거겠지. 그랬더니 소영이가 그러더라. “그렇게 생각하지 마. 헤어질 때가 되어서 헤어진 거야. 그건 우리가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아.” 그때나 지금이나 걘 그래. 어려운 문제를 그냥 풀어버리고, 쉬운 문제에서 고민을 해.
제나
소영인 나한테 그러던데. “지금 좋으면 된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해.”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제나, 화장실 다녀온다. 지원, 창문을 보다가 핸드폰으로 뭔가를 찾아본다.
제나
벌써 밤이 됐네.
지원
(기사를 읽는다) 이번 달에 블루문이 뜬대.
제나
블루문이 뭐야?
지원
(핸드폰을 보며) 달의 공전주기는 29.5일로 양력 한 달보다 짧아서 월초에 보름달이 뜨고 같은 달 30일, 31일에 또 달이 뜨는 경우가 있다. 이때 뜨는 달을 블루문이라고 한다. 블루문의 어원으로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벨(belewe)…… 이거 어떻게 읽어? 하여튼 비 이 엘 이 더블유 이. 이는 ‘배신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지금은 사라진 영어단어인데 서양에서는 보름달이 한 달에 두 번 뜨는 것을 불길하다고 여겨 배신자 달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제나
보름달이 한 달에 두 번 뜰 수도 있구나. 그건 되게 드문 경우 아냐? Once in a blue moon이라는 말도 있잖아.
지원
그게 무슨 뜻인데?
제나
극히 드문 일.
지원
그럴 것 같긴 한데 의외로 아주 드문 일은 아니래. 2~3년에 한 번?
제나
낮지만 0은 아닌 확률이네.
지원
재밌다. 블루문. 말일 날 기억했다가 꼭 봐야지. 소영이한테도 얘기해줘야겠다.
제나
그래. 그때쯤이면 영원이도 같이 보겠네.
소영의 집. 아기가 자고 있다. 제나가 뒤늦게 도착한다.
제나
지원이 먼저 도착했구나. (아기를 보며 속삭인다) 잔다.
지원
그냥 얘기해도 돼.
제나
(계속 속삭이는 목소리로) 나 얼른 손 씻고 올게. (손 씻고 돌아와 아기를 쓰다듬는다) 이거 뭐야. (손을 들며) 뭐 묻었어.
소영
어, 콧물이야. 여기.
소영, 제나에게 휴지를 한 장 뽑아준다. 제나, 아기의 콧물을 닦아주고 휴지의 남은 부분으로 자신의 손을 닦는다.
제나
오늘도 기타 가져왔네?
지원
오늘이 마지막이야.
제나
왜?
지원
소영이가 이제 바빠서 피아노 칠 시간이 있겠어? 그래도 괜찮아. 이제 안 까먹을 거야. 다시 치는 방법을 알았으니까.
제나
하긴…… 아기 보느라 정신없지?
소영
아직은 나도 낯설어서…… 그래도 다들 많이 도와줘.
제나
오빠가?
소영
그분은 맨날 12시에 들어와 자기 바빠.
제나
그럼 너 혼자 힘들어서 어떡해.
소영
매일 저녁에 일 끝나면 엄마가 이쪽으로 오셔. 마침 이모도 서울 올라와 계셔가지고 두 분이 같이 밤마다 나 대신 봐주셔.
지원
소영이 언니도 일 끝나면 오셔서 봐주시고.
제나
그나마 다행이네.
소영
주말엔 시어머니 오시고. 아기가 있으니 매일 집이 복작거린다.
제나
온 집안 여자들이 총출동이네. 오빠는 그럼?
소영
새벽같이 또 출근해야 해서. 아 참. 지원아. 이따 주소 적어놓고 가.
지원
우리 집 주소? 주소는 왜?
소영
오빠가 와인 좋은 걸로 하나 보낸대.
지원
왜?
소영
병원 데려가 주고 챙겨줘서 고맙다고.
지원
제나야. 이럴 땐 내가 뭐라고 해야 돼?
소영
준다고 할 때 받아.
지원
알았어. 그럼 다음에 가지고 올게. 다 같이 마시면 되겠네.
제나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오빠가 눈치가 좀 없으신 편이야?
소영
응? 아냐. 운동을 해서 그런지 직감 같은 게 되게 좋아. 눈치도 얼마나 빠른데. 너한테도 맛있는 거 한 번 산다 그러더라. 우리 셋이 만나면 뭐하냐고 맨날 물어봐. 어제는 그러는 거야. 친구들이랑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하냬.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까? 그런 얘길 하냬. 한참 웃었네.
제나
(웃으며)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까…… 어떡해.
지원
(웃으며) 왜, 중요한 주제잖아.
제나
그러게, 10년 동안 한 번도 그런 주제로 얘기해 본 적이 없다는 게 놀랍네.
지원, 기타 치기 시작한다.
지원
(기타에 맞춰 노래 부른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까. 너는 아니.
제나
쳐도 돼?
소영
괜찮아. 하도 많이 들은 소리라서 알 거야.
지원
소영이도 피아노 쳐줘.
소영
그럴까.
제나
너희 뭐 연습했구나. 어, 눈 떴다. 기타 소리 듣고 깼구나. 엄마 피아노 치는 거 들을래?
소영, 아기를 안아 제나에게 건네준다. 제나, 건네받는다. 소영, 피아노를 연주한다. 멋진 연주다. 지원이 기타를 친다. 제나, 아이를 안고 옆에서 그 소리를 듣는다.
밤이 되었다. 아기 옆에 소영이 모로 누워 잠들어 있다. 지원, 소영에게 이불을 덮어준다. 불을 어둡게 한다. 어질러진 방을 치운다. 기저귀와 양말 등 빨래를 걷어와 기저귀를 갠다. 식탁을 정리하고 닦는다. 일을 마친 후 식탁 의자에 앉아 잠든 아기와 소영을 바라본다. 빨랫감 중 남자 양말만 남아 있다. 지원, 손톱으로 식탁을 두드리며 그 양말을 한참 바라보다가 갠다. 잠시 후, 퇴장. 제나가 등장한다.
제나
자고 있었어?
소영
깜빡 잠들었네.
제나
노크했는데 안 들리는 것 같아서 지원이한테 전화했거든. 그랬더니 문 여는 법 가르쳐주더라? 걔네 집인 줄 알았어. 지원인 잠깐 요 앞에 나갔다 그러데?
소영
비밀번호 알려줬더니 막 들어와, 아주. 잠깐만.
소영,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처리한다.
소영
재택근무다 보니까 시간마다 확인을 해줘야 해.
제나
이거구나. 할 만해?
소영
다행히 나는 그렇게 일이 많지는 않아서 괜찮아.
제나
지원이가 좋은 일 소개해줬네.
소영
걔가 얼마나 나한테 일하라고, 일해야 한다고 잔소리를 하든지.
제나
아기 낳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일하래.
소영
그러게 말이야. 독해.
제나
그럼 이제 이게 네 의자네. 오빠는 뭐라셔?
소영
자세하겐 얘기 안 했어. 그냥 아르바이트 같은 거라고만 했어.
제나
잘 했어. 월급 다 말하지 말고 돈 잘 가지고 있어.
소영
별로 안 좋아하더라. 머리 아프다면서 왜 또 일하냐고.
제나
지금 그게 문제야? 이 세상에 내 의자 하나가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지.
소영
맞아. 그런데 얜 집에 갔니?
제나
전화해볼까?
소영, 지원에게 전화를 건다.
소영
응. 어디야? 놀이터? (창가로 간다) 어, 보여. (손을 흔든다) 거기 왜 나가 있어. 달? 그러게. 보름달이네. 이상하다. 얼마 전에도 보름달 뜨지 않았어? 블루문? 파랗진 않은데? (창가에 붙어 달을 유심히 본다) 파랗지도 않은데 왜 블루문이야? 잘 안 들려. 여보세요?
지원, 목에 전화기를 끼고 손에 케이크를 들고 들어온다. 제나, 잽싸게 불을 붙인다.
소영
들려. 이제는 너무 잘 들리는데? 옆에서 얘기하는 것 같아. 제나야. 이거 좀.
소영, 돌아본다. 지원과 제나를 발견한다. 제나, 지원 생일축하 노래를 부른다. 소영, 노래가 끝나자 초를 불어 끈다.
소영, 지원
생일 축하해!
소영
고마워! 어디 갔나 했더니. (불 켜려 한다)
지원
불 켜지 마.
제나
우와. 야경 보인다.
소영
어둡지 않아?
지원
불 켜면 잘 안 보이잖아.
제나
그래. 우리 여기 앉아서 야경 보자.
소영
불빛들 때문인가? 집이 꽉 찬 것 같아.
소영, 지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셋이 나란히 앉아 창밖을 본다.
소영
여기 이렇게 앉아서 보는 건 처음이네. 야경 너무 예쁘다.
제나
생일 또 축하해.
소영
고마워. 그러고 보니까 참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 같아.
제나
어떤 일을 생각도 못 했어?
소영
다. 여기 앉아서 이렇게 달 구경할 줄도 몰랐고.
지원
더 생각지도 못한 거 알려줄까?
소영
뭔데?
지원
너 이제 서른이야.
소영
아…….
제나
너도 마찬가지야.
소영
달이나 봐.
조명 점차 어두워진다.
제나
근데 있잖아. 나 너희 얘기 써도 돼?
지원
안 돼.
제나
벌써 썼어.
소영
우리 얘기를?
지원
아 참, 소영이 연수받았어?
소영
내가 시간이 어디 있어.
지원
빨리 받아. 나 있을 때. 운전을 해야 어디든 가지.
제나
하여튼 난 얘기했다.
소영
얘 잔소리하는 것도 다 써줘.
제나
다 썼어.
지원
진짜야?
소영
보여줘.
제나
(웃으며) 안 돼.
지원
얘 막 또 그런 거 쓰는 거 아니야? 막, 막 또 그런 거, 야한 거?
제나
그거 네가 제일 좋아했잖아.
소영
진짜? 지원이가 그랬어?
지원
소영아 그게 아니고…… 야아! 빨리 아니라고 해줘.
제나
아니긴 뭐가 아니야. 소영아, 그때 얘가 나한테 뭐랬냐면…….
지원, 제나를 간지럽힌다. 제나, 일어나 도망친다. 지원, 그런 제나를 잡으려 한다. 그들의 이야기 소리가 계속된다. 완전히 어두워진다.
정지현
철학을 전공했다.
지금은 희곡을 공부하고 있다.
2018/04/24
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