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결, 결의 시간
5화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단짝 친구’는 언제 생길까? 유치원이나 초등학생 때 만나게 될 듯한데…… 결이는 생후 6개월에 생겼다. 이름은 ‘몽키’. 이모 방 책장에 무심히 놓인 원숭이 인형. 누구도 눈길 주지 않던 존재였지만 결에게 몽키는 운명처럼 다가왔다.
몽키는 많은 역할을 한다. 엄마에게 혼날 때 위로자, 밥 먹을 때 밥 동무, 두렵고 무서운 행동을 할 때는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존재.
24개월을 물고 빨고 했으니 이제는 때가 안 빠지고 목 부분 터진 곳은 꿰맨 자국마저 너덜거린다. 그래도 결은 몽키를 여전히 아낀다. “귀여워”를 연발하며 마음껏 고백도 한다.
토드 셀비(Todd Selby)의 ‘The Selby House: #즐거운_나의_집’(대림미술관 전시)
시간의 결
- 몽키는 갈색, 갈색은 몽키 색
나성훈(아빠) : 결이랑 몽키가 여러 곳에 같이 갔지?
장은혜(엄마) : 제주도, 어린이집, 교회, 공원, 아쿠아리움…… 온갖 곳에 다 다녔지.
나성훈 : 페이스북을 살펴보니까 1년 전에는 물범 인형도 사줬더라고. 몽키 자리가 위협 받는 거 아니냐는 댓글이 달릴 만큼 환한 표정으로 좋아했는데 이제는 찾지도 않네. 다른 인형보다 몽키가 좋기는 한가봐. 함께한 시간이 증명해주잖아.
장은혜 : 어린이집에서 색칠 놀이 할 때도 갈색만 쓴다잖아. 자기가 좋아하는 몽키나 곰돌이 인형이 갈색이니까. 호불호가 정확히 있는 아이인 것 같아.
나성훈 : 다른 색깔도 좀 좋아해야 할 텐데……
- 나는 코알라 인형을 좋아했어.
장은혜 : 어릴 때 애착 인형이 있었어?
나성훈 : 결이만큼 어린 나이는 아니었지만 나는 코알라 인형을 좋아했어. 섬유 유연제 광고에 코알라 인형이 나왔는데 내가 그 캐릭터를 좋아했거든. 비슷한 인형 사달라고 해서 한동안 가지고 다녔던 것 같아.
장은혜 : 나는 곰 인형이나 몽글몽글한 것에 크게 애착이 있던 것 같지는 않아.
나성훈 : 어른들에게도 애착 인형 같은 존재가 있을까?
장은혜 : 사람마다 정서적 안정을 주는 시공간이나 물건이 있겠지. 나는 아이가 생기니까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해. 마트에만 혼자 가도 편안해. 결이 어린이집 보내고 혼자 밥 먹는 것도 외롭지 않아. 불 다 끄고 영화 틀어놓고 잠드는 것도 좋아.
나성훈 : 운전하면 혼자 있는 시간이 생기는 것 같기는 해.
장은혜 : 그래서 운전하는 엄마들은 일부러 아이들 재워 놓고 동네 한 바퀴 돌고 오기도 한데. 그게 많이 이해가 돼. 둘째 임신하기 전에 잠깐 자전거 타는 것도 정말 좋았거든. 아이가 애착할 대상을 찾는 것처럼 어른도 기댈 곳을 찾아 스트레스 푸는 거잖아. 그런 시간이 단 10분이라도 필요한 것 같아. 운동을 하든 맛있는 것을 먹든.
나성훈 : 나는 도서관에 가면 안정감을 느꼈어. 사는 게 정신없어도 도서관에서 책 읽고 별 일 없이 돌아다니면 마음이 편안했어. 현실 도피처가 되기도 했지만.
첫 생일도 함께한 몽키(위),
몽키 사진 찍으려고 폼 잡은 결(아래).
-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나성훈 : 결이는 몽키를 살아 있는 존재라고 느낄까?
장은혜 : 아니. 살아 있는 존재라고 느끼면 그렇게 대할 순 없어. 물고, 밟고, 던지고…… 인형이라는 걸 점점 알아가는 것 같아.
나성훈 : 다른 애들도 애착 인형이 있나?
장은혜 : 있겠지. 결이는 쪽쪽이(공갈 젖꼭지) 잃어버리고 나서 몽키에게 더 집착하는 것 같아.
나성훈 : 요즘은 가끔 놓고 다니기도 하던데?
장은혜 : 어린이집에서 사람 친구가 생겨서 그런 것 아닐까?
나성훈 : 선생님도 조금씩 떼어보자고 하더라고.
장은혜 : 떼는 게 낫지. 그러려면 나부터 고쳐야 할 게 있어. 결이 주의를 환기시켜야 할 때 ‘몽키 데려와, 몽키는 어딨어?’ 한다는 거야. 나도 몽키에게 기대고 있었나봐.
나성훈 : 우리도 몽키 없으면 불편하고 불안하니까. 잃어버릴까봐 겁나더라. 몽키 없으면 나도 슬플 것 같고.
장은혜 : 나도 그래. 잘 가지고 있다가 결이가 어른이 되면 보여주고 싶어.
나성훈 : 하나씩 멀어지는 게 성장의 과정이기도 한데 서글프기도 하네.
장은혜 : 몽키랑도 언젠가는 감정적으로 멀어지는 상황이 올 텐데 그때 너무 깊게 자기감정에 빠지지 않게 부모가 도와줘야지.
나성훈 : 한때는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관심이 없어지는, 하지만 버리기도 힘든…… 그때 느껴지는 감정이 서글픔인 것 같아. 친구 관계도 비슷한 것 같고. 결이와 몽키도 친구니까 서글픈 순간이 언젠가는 오겠지.
결의 시간
여름 휴가지에서 함께 전망을 즐기는 결과 몽키(좌),
자신이 아끼는 모자를 몽키에게도 씌워주는 결 (우).
결의 일상에 푹 스며든 몽키.
몽키와 함께라면 무엇이든 즐거운 결.
엄마 일기
얼마 전부터 몽키는 어린이집에 함께 등원한다. 매일 물고 빠는 존재라 친구들에게 균이 옮지는 않을까 걱정했으나, 그것도 나의 노파심. 몽키는 어린이집 등원과 동시에 사물함에 조용히 누워 결이를 기다리는 존재가 된단다.
37년을 살며 누군가를 이렇게 진심으로 순수하게 좋아하고 사랑한 적이 있나 자문하게 된다. 내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아도 아낌없이 내 것을 내어줄 수 있는 상대가 있었나.
바란다. 네가 몽키에게 하듯 나도 너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부모이길, 어떤 결정을 해도 늘 네 편에 서는 부모이길.
- 에필로그
어떤 면에서는 상업적인 것 같아. 인형에 ‘애착 인형’이라고 이름 붙어서 나오잖아. 코스트코 갔더니 ‘국민 애착 인형’이라고 까지 써 있더라고. 첫째 아이는 친구나 동생도 없으니까 함께 놀아줄 상대가 필요해서 어느 정도는 부모의 편의와 자본주의가 만나서 ‘애착 인형’이라는 게 태어난 것 아닐까.
몽키는 결이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첫 대상이잖아. 그러니까 뽀로로나 콩순이 같은 캐릭터를 대하는 것과 몽키를 대하는 게 다른 걸 거야.
사진글방
장은혜는 사진 찍고, 나성훈은 글 씁니다. 사진과 글을 도구로 세상의 작은 것들을 정성스럽게 담아냅니다.
2018/05/29
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