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소영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훔치려는 현대의 무명작가 여인.
     윌                 가난하고 초라한 젊은 시절의 셰익스피어.
     올리브          셰익스피어를 짝사랑하는 부유한 극장주의 딸.
     올리브 父     올리브의 아버지로, 돈이 많고 딸을 끔찍하게 아낀다.
     이벤트의 신  1400번째 같은 기도를 올리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신.

     그 외 소영母, 사회자 등.

     [무대]
     무대 중앙은 16세기 셰익스피어의 방이다. 왼편에는 나무책상과 나무의자, 낡은 책장과 책 몇 권이 꽂혀있다. 방 가운데에는 벽돌로 만든 벽난로가 있고, 기둥에 우스꽝스럽게 낙서 된 크리스토퍼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그 앞에는 베이지색 일인용 소파가 놓여 있다.
     무대 오른편은 현대의 시상식 공간이자, 윌의 방으로 가는 통로로 이용된다.
     무대 뒤쪽에는 언덕이 길게 늘어서 있다. 소영의 내면 공간인 동시에, 윌의 방으로 가는 뒷길로 활용된다.

     제28회 셰익스피어 희곡상 시상식. 무대 오른편, 단상을 비추는 탑 조명.


사회자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셰익스피어 희곡 문학상, 제28회 수상작 <한여름 밤의 꿈>의 작가이신 이소영 씨를 모시겠습니다.
소영
(단상 앞에 선다)
사회자
(꽃다발을 주며) 당선 축하드립니다. 이소영 씨.


     언덕 왼편, 소영母 탑 조명과 함께 등장.


소영母
(함박웃음) 내 딸, 소영이!
소영
(어두운) 감사합니다.
사회자
긴장을 하셔서 그런가요? (웃음) 세상을 다 가진 자의 얼굴이라기엔 너무 어두운데요?
소영母
이 엄마는 네가 자랑스럽다!
소영
(억지로 웃으며) 좋네요.
사회자
지방대에서 문학상 수상자가 나온 것은 처음인데요. 학교에서도 감사패를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소영
네……
사회자
글쓰기엔 학벌이 필요치 않다, 몸소 증명하신 거네요?
소영
전, 그저 열심히 썼을 뿐입니다……
(음성만) 오랜 시간이여,
소영
(놀라서 소리 나는 쪽을 찾는다)
사회자
항간에는 셰익스피어와 닮은 구석이 많다는 표절 의혹이 있었어요.
그대의 죄악에도,
소영
(혼란스러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아―
사회자
작가로서 그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 사랑 내 시속에서,
소영
(귀를 막으며) 아아―
사회자
이소영 씨?
언제나 젊게 살아있으리라.
소영
(괴롭다)
사회자
이소영 씨, 괜찮으세요?
소영
(정신 차리며)네? 네…… 괜찮습니다. 계속하세요.
사회자
8년 내내 꾸준히 문학상에 도전했지만 낙방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런 이소영 씨에겐 칠전팔기보다 팔전구기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것 같네요. 그 긴 시간은 소영 씨에게 어떤 의미였나요?
소영
깊은…… 아주 깊은…… 늪이요. 아무도 꺼내주지 않는.


      소영, 지난날을 회상하며 무대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 나온다. 단상부터 무대 중앙까지, 그윽한 조명이 길처럼 깔린다. 뒤편에 일인용 소파 희미하게 보인다.


소영
우체국을 제 집 드나들 듯이 들락거렸지만, 전화기는 울리지 않았어요. 처음엔 바보 같은 내가 밉더니, 그다음엔 가난한 우리 집이 밉고, 엄마 아빠가 부자가 아닌 게 원망스러운 거예요. 그러다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었어요. 그래서 신을 원망하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매일 밤 신을 향해 욕을 퍼부었어요. 그러다 번개라도 내리치면? (사이) 맞아 죽지 뭐.


     (음향 - 천둥소리와 함께 비 내리는 소리 들린다)


소영
(위를 향해) 어떻게 이토록 매정할 수가 있죠? 그렇게 위에서 구경만 하니 재밌습니까? 재밌어요? (술 취한 듯) 주연! 8년째 작가인 척! 만 하는 머저리. 조명! 영원한 암전. 무대? 보증금 200에 월 십팔만 원! 이렇게 슬프고 웃긴 연극이 어딨습니까. 이보세요, 8년 동안 공짜로 연극을 보셨으면 티켓 값이라도 주셔야죠~ 네? (실성한 듯 웃으며) 네네~ 이게 다~ 제가 못난 탓이죠. 네! 제가 못나서 그렇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정신 번뜩 드는) 아, 죄송해요. 반말은 못 들은 거로 해주세요. (무릎 꿇고) 신이시여, 이 불쌍한 영혼에게 대작 하나만 내려주세요. 제게 황금 펜을 쥐여주세요. 영혼이라도 팔라면 팔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제발 글 좀 잘 쓰게 해주세요! (절규) 제발!


     (음향 - 천둥소리) 무대 오른편에서 흰색 양복과 하얀 고깔모자를 쓴 이벤트의 신 등장. 지팡이로 기도에 잠긴 소영의 머리를 톡톡 친다.


소영
(뒤로 넘어지며) 뭐, 뭐야.
이벤트의 신
나는 이벤트의 신이네. 똑같은 기도를 1400번째 올린 사람들에게만 나타나지.
소영
(멍하다)
이벤트의 신
꽤 오랜만의 외출이야. 요즘 사람들은 밤낮으로 원하는 게 바뀌거든. 자네의 기도는 잘 들었네. (넥타이로 눈물을 훔치며) 꽤 감동적이었어.
소영
제 기도를 들어주시는 겁니까? (허탈) 아니 내가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이벤트의 신
나는 당신에게 줄 것이 없네. 다만 선택하게 만들 뿐이지.
소영
선택…… 이요?
이벤트의 신
당신은 앞으로 3일 동안 여행을 하게 될 걸세. 때가 되면 내 데리러 가지. 그럼 이만.
소영
(헛웃음) 정말 미쳐가는구나. 천재작가는 요절한다는데, 할 수 있다면 죽음으로라도 내 작품값을 올리고 싶다. (소파에 몸을 묻으며) 머저리 같은 놈.


     소영, 잠들면 천천히 어두워진다. (음악 - 경쾌하고도 신비로운 16세기 오페라)
     무대 중앙 밝아지며 윌의 방 드러난다. 밖에선 브레드와 윌이 싸우고 있다.


브레드
더 이상은 못해 먹겠어. 당신 때문에 처자식이 굶게 생겼다고!
브레드! 조금만 기다려주게. 주인공 없는 연극을 누가 보러오겠나?
브레드
자넨 모두를 굶겨 죽이는 최악의 작가야. 하긴, 처자식을 버리고 온 자가 가장의 무게를 알 리가 있나. 더 이상 인연이 없었으면 좋겠군.
브레드! 브레드! (혼자 넋두리하며) 아― 그 누가 내 마음을 알아줄까. 궁지에 몰린 생쥐야,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 강물에 몸을 던지려무나.


     윌, 방안으로 들어서면 소파에서 널브러져 잠을 자고 있는 소영. 코를 골고 있다.
     집을 잘못 찾아왔나, 다시 밖으로 나가 확인해보는 윌. 휘청거리며 소영에게 다가간다.


이젠 환각마저 보이는군. 죽음의 사자가 벌거벗고 온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윌, 소영의 맨 팔뚝을 조심스레 눌러본다. 낯선 손길에 잠에서 벌떡 깨는 소영.


소영
(소파 뒤로 숨으며) 꺄―악!
(뒤로 넘어지며) 아―악! 누, 누구시오!
소영
너야말로 누구세요!
내가 물을 소리! 당신은 누구길래 내 방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 있는 것이오!
소영
당신이야말로 왜 내 방에 허락도 없이 들어오는 건데!
(일어나며) 무슨 소리! 이곳은 영락없는 내 방이오. (다가가며) 내가 세 번이나 확인했단 말이오!
소영
다가오지 마! 한 번만 더 내 몸에 손댔다간,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경찰이 뭐요?
소영
뭐긴 뭐야, 112지! 콩밥 먹고 싶지 않으면 당장 꺼져요!
콩밥? 콩밥을 준단 말이오? (다가가) 어서 데려가 주시오. 난 무지 배고파.
소영
이런 또라이를 봤나.


     소영, 윌이 다가오자 위협을 느끼고 주변을 살피다 책상 위의 깃털 펜을 잡는다.


소영
(찌를 듯이) 한 발짝만 더 와 봐.
(뒷걸음질 쳐 벽난로에 바짝 붙는다)
소영
조금만 움직였다가는 머리에 구멍을 내버릴 거야.
(겁먹어) 목석처럼 있겠소.


     소영, 천천히 소파 앞을 지나 밖으로 뛰쳐나간다. (음향 - 길거리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 오페라 음악 소리, 개 짖는 소리) 사색이 되어 안으로 뛰어들어오는 소영.


소영
여기…… 여기가…… 대체 어디야.
어디긴 어디요. 대영제국의 수도, 런던이지.
이벤트의 신
(음성) 당신은 앞으로 3일 동안 여행을 하게 될 걸세.
소영
(주저앉으며) 이럴 수가……
당신은 누구요. 나를 데리러 온 죽음의 사자요? 아니면…… 소문으로만 듣던 마녀?
소영
(당황하며) 나, 나는,
마…… 마녀다! 내 방에 마녀가 들어왔어! 어쩐지 모양새도 이상하다 했어. 천 쪼가리를 걸치고 맨살을 보이며 남자들을 유혹하려는 거야. (두려워하며) 나를 태워죽일 거요? 아니면 개구리로 만들어 하루 종일 울게 할 건가?
소영
개구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전 당신과 똑같은 사람이라고요!
거짓부렁. 당신처럼 무섭게 화장을 한 여인은 보지를 못 했어. 이곳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아. 당신, 정체가 뭐야?
소영
저……저는…… (생각난 듯) 여행 중이에요!
여행자?
소영
네. 세계를 떠돌다 보면 바람에 옷깃이 삭기 마련. 작년에는 열대지방을 다녀오느라 바지를 자르지 않을 수 없었죠. 이 화장기술은 서울이라는 마을 원주민에게서 배운 거고요.
어느 나라에서 온 것이오?
소영
(책상 쪽으로 도망가며) 여행자에게 너무 많은 질문은 실례인 거 알아요? 저는 그저 순간에 머무는 사람일 뿐이에요.


     책상 위에는 종이들과 잉크단지, 펜이 널브러져 있다.


소영
당신, 글을 쓰나요?
맞소. 뭐, 잘나가진 않지만…… (들떠서) 그래도 헨리 6세는 런던에서 꽤 인기를 끌었다오. 내가 그중 한 대목을 읊어드리리까? (일어나 목을 가다듬는다) 내 그대를, 나의 기억의 책에 적어 두리다.
소영
(떨리는 목소리로) 당신…… 이름이 뭐죠?
셰익스피어오.
소영
윌리엄…… 셰익스피어?
딩! 동! 댕! (술을 들이켠다)
소영
당신이 정말…… 햄릿을 쓴 그 셰익스피어란 말이에요?
뭔 릿이요?
소영
햄릿이요. 비운의 왕자 햄릿!
(갸우뚱)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그래도 꽤 멋진 이름이오. 나중에 써먹어야겠군. (사이) 술이나 두 잔 하시겠소? 여긴 취하지 않고선 살 수 없는 곳이라네.
소영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러니까 아직, 당신 머릿속에 있다는 거네?
(머리를 만지며) 내 머리에?
소영
햄릿도, 로미오도, 줄리엣도! (웃으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거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윌, 소파에 몸을 파묻고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소영
(원고를 살피며 혼잣말로) 셰익스피어의 책상이라니…… 이 중 하나만이라도 내 것이 된다면!


     윌, 소영이 반응이 없자 소파에 몸을 파묻고 술을 마신다.


소영
(뒤돌아보며) 지금은 무슨 작품을 쓰고 있죠?
아무것도 쓰지 않소.
소영
(방백) 안 돼!
내 펜촉은 갈 길을 잃었다네.
소영
당신은 글을 써야만 해요!
2년째 역병이 거리를 떠돌며 행패를 부리고 있소. 보이지 않는 싸움꾼들이 푸줏간의 상인도, 길가의 꼬맹이도, 잠 많은 노인들도, 모두 데려가 버렸지.
소영
그렇다고 펜을 놓아요? 작가가?
펜을 잡으면 뭐 한단 말이오. 봐주는 사람이 없는데…… 런던의 극장들이 거의 문을 닫았소. 입을 벌리며 먹을 것을 달라던 배우들은 하나둘 떠나가 버렸지.
소영
(방백) 빌어먹을. 이딴 이벤트가 어디 있어.
이제…… 내가 설 곳은 없소.
소영
당신이 글을 써야만 내가 살아요.
작품을 원하는 것이오?
소영
(방백) 실수했다.
(의기소침하여) 그렇다면 크리스토퍼를 찾아가야겠구려…… 글이라면 그 자식이 더 잘 쓰니까.
소영
아니요! (윌을 책상 앞으로 끌고 간다) 저는 당신 작품을 원해요. 셰익스피어 작품을요. (윌을 의자에 앉히고 펜을 쥐여주며) 자, 어서 쓰세요. 대작을!


     윌, 표정이 상기되며 두려움에 가득 찬다. 떨리는 손과 입술.


소영
뭐해요? 어서요.


     윌, 억지로 펜을 움직여 보지만 곧 신음을 내며 그만둔다.


아…… 나는……
소영
뭐하는 거예요? 천하의 셰익스피어가 책상 앞에서 머뭇거리다뇨.
나는…… 너무 두렵소.
소영
(답답해하며) 대체 뭐가요.
유난히 말이 없던 내 벗, 로버트가 보여. 로버트는 내가 만든 이야기를 들려주면, 아무 대꾸도 없이 듣기만 했지. 그러고는 이야기가 끝나면 조용히 악수를 건네는 거야. ‘참 멋진 이야기야, 윌. 난 자네처럼 쓸 순 없을 거야.’ 천만에. 나는 로버트의 글을 참 좋아했어. 흥이 나고 신나진 않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양초가 켜진 것처럼 나를 참 따뜻하게 만들었거든.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작품이 따분하다고 했어. 그 안에 숨은 불씨를 보지 못하고 말이야.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외면할수록 그는 가난해져 갔어. 아무도 그를 받아주는 극장이 없었고, 몸은 나날이 말라갔지. 그리고 기어코 지난달, 나는 그의 죽음을 알리는 전보를 받고 만 거야. 의자 위에서 펜을 쥔 채로 굶어 죽었다더군. 아아― 내 벗 로버트여, 아름답게도 죽었구나. 하지만 용서해라. 너의 죽음을 채 슬퍼하기도 전에, 나 또한 너처럼 죽게 되진 않을까…… 커다란 두려움이 나를 삼키고 말았으니까.
소영
(침묵) 당신도…… 두렵나요?
난 책상 위에서 죽고 싶지 않아. 쭈글쭈글한 얼굴이 될 때까지 살다가 푹신한 침대에서 고요히 잠들고 싶어. 내가…… 그럴 수 있을까? 사람들이 나에게 빵과 우유를 먹을 수 있는 자격을 줄까?
소영
(앉으며) 당연하죠. 한 나라를 통째로 줘도 내어주지 않을 만큼,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 될 거에요. 도서관에는 당신의 작품들로 책장 한 편을 꽉 채우고도 남겠죠. 당신에 대한 비평문은 천장을 뚫고도 남을 거예요.
꼭 세월을 앞서갔다 온 사람처럼 말하는구려.
소영
비록 당신이 늙고 나약해지더라도, (윌의 손을 잡으며) 이 손으로 쓴 작품들은 세월을 이기고 영원히 젊게 살아있을 거예요.
이토록 아름다운 거짓말이 또 어디 있을까.
소영
그러니 믿으세요. 당신이 쏟아낸 수많은 단어를.
떠도는 바람이 나를 위로하는구나.


     올리브, 언덕에서 등장.


올리브
오 나의 태양!
(놀라며) 올리브! 안 돼.
소영
누구에요?
올리브
나의 햇살, 나의 운명!
잘 하는 것이라곤 고자질뿐인 고약한 소녀. 당신의 행색을 보면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도 남을 거야. (밖에서 무대의상 드레스를 가져온다)
올리브
나의 기적, 나의 숨결!
자, 어서 이거라도 입으시오. 어서, 어서 벗으시오.


     소영, 상의 단추를 풀기 시작한다. 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소영
(경악하며) 뭘 뚫어지게 쳐다봐요!
(고개를 흔든다) 그, 그냥 그 위에 입는 게 낫겠소.


     윌, 드레스를 뒤집어 소영에게 씌운다. 팔에 걸려 잘 들어가지 않아 애를 먹는다.


올리브
(방으로 들어서며) 나의 왕자……님……(분노하며) 내 님이 요망스러운 여우에게 홀리다니!


     올리브, 소영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난투를 벌인다. 처음엔 올리브가 주도권을 가져가는 듯했으나, 곧 소영이 그녀를 제압한다. 윌은 어느새 한 발짝 물러서 있다.


올리브
(머리가 잡힌 채로 애절하게) 나의 태양…… 도와주세요.
이보시오, 그 성난 손을 그만 내려놓으시오. 이 여인은 올리브. 날 이곳에 머무르게 해주는 극장주 딸이오.
소영
(올리브를 놓아주며) 무슨 황소도 아니고……
올리브
성난 투우는 붉은 천을 보며 콧김을 뿜지만, 나는 내 님의 조각난 마음만 봐도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걸.
조각난 마음이라니, 내 마음은 오래전부터 주인을 잃었다.
올리브
제가 주인이 될 순 없나요?
절대로.
올리브
아아― 주인이 아니라면 하인이라도 되겠어요.
내 마음의 방에 침대는 하나뿐.
올리브
(울먹이며) 나쁜 놈! 아버지에게 모두 일러버릴 테야! (뛰쳐나간다)
오……올, 올리브! (소영 바라보며 멋쩍게) 항상 저런 식이라오. 극장주의 딸이라는 명목으로 나를 쥐고 흔들지.
소영
총체적 난국이네요. (배에서 꼬르륵 소리) 아……


     윌, 책장 아래에서 종이에 싸인 빵조각을 들고 온다.


(펼쳐 보이며) 정말 굶어 죽겠다 싶을 때 먹으려고 숨겨 둔 것이오. 최후의 만찬이랄까.
소영
이거 곰팡이 아니에요?
발효된 거라고 칩시다.
소영
(빵을 떼어먹으며) 그런데 코는 왜 그런 거예요?
말 많고 힘만 센 도시의 하이에나들.
소영
하이에나?
빚쟁이들 말이오. 어젯밤에 쳐들어와서는 돈이 없다고 하니 주먹으로 내 코를 찌그러뜨려 버렸소. 그 바람에 입으로 숨을 쉬어야 한다오. (입으로 숨 쉬는 시늉을 한다)
소영
(웃음이 터진) 하하―
(같이 웃는다) 아아, 숨 차. 하하―
소영
근데 왜 이렇게 거지 같이 살아요? 원고료 있잖아요.
(크리스토퍼 초상화를 가리키며) 돈은 크리스토퍼 같은 놈이나 잘 벌지. 나 같은 삼류작가는 술값이나 메우는 정도라오.
소영
잠깐, 크리스토퍼가 더 잘나간다고요?
왜, 그 말을 들으니 당신도 저놈에게 마음이 가시오?
소영
억지 부리는 것 좀 봐.
그래요! 나는 글도 못 쓰고 가방끈도 짧고 키도 작다오. 마무리로 돈도 없지. (일어나 크리스토퍼의 초상화 앞에 선다) 난 크리스토퍼의 작품을 딱 한 번 읽어 보았소. 그는 작품이 탈고될 때마다 나에게 원고를 보내지. 마치 자랑하듯 말이야. 하지만 나는 편지 끈도 풀지 않은 채 저 벽난로 속으로 던져버렸어.
소영
왜요……?
(초상화에 펜을 꽂으며) 그 자식 작품은 나를 더 좌절하게 만드니까……!


     (윌의 환청 - 관객들의 환호 소리, 박수 소리 메아리처럼 들린다)


들리시오?
소영
무슨 소리요?
나를 향해…… 나를 향해 쏟아지는 관객의 함성! 최고의 극작가에게 보내는 박수갈채 말이오!
소영
윌, 여긴 고요해요……


     윌, 커튼콜의 배우처럼 앞으로 걸어 나가 관객을 향해 인사한다.


들었소? 저 중년 관객이 크리스토퍼의 작품보다 내 작품이 훨씬 멋지다는군! (손을 흔들며 여기저기 인사를 한다) 감사합니다!
소영
윌…… 대체 무슨 소리를, 정신 차려요.
올리브 父
(호통 치며) 윌―리―엄―!


     올리브 父, 무대 오른편에서 들이닥친다. 윌, 책상 밑으로 숨는다.


올리브 父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쓰레기만 만들어내는 놈. 창고에 숨어 내 재산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쥐새끼!
(겁먹은) 불쌍한 생쥐.
올리브 父
그럼에도 널 봐준 건, 순전히 올리브의 눈물 어린 간청 때문이었다. 한데!
(떨며) 헌데?
올리브 父
보기도 아까운 내 딸 눈에 또다시 눈물이 흐르게 만들어? 그것도 네 놈이, 적자만 내는 네 놈이!
(기어 나오며) 아닙니다, 극장주님. 좀 전에 분명 제가 환호성을 들었는걸요! 오늘 몇 명이나 왔습니까? 극장을 다 채우고도 남아 계단 바닥에 엉덩일 깔고 앉았나요?
올리브 父
멍청한 놈! 그것은 크리스토퍼 극장의 소리겠지! 내가 본 건 고작 떠돌이 개와 소젖 짜는 여인네 서너 명뿐이었다! 더 이상 나도 못 참는다. 너도 내 원을 하나 들어줘야겠다.
들어주지 않는다면?
올리브 父
(힘주어) 당장, 짐을 싸서, 저 괴상한 분칠을 한 여인과 함께 쫓아낼 것이다.


     (천둥소리) 윌, 내몰리게 되는 상황을 상상하며 두려움에 휩싸인다.


(방 안을 헤매며 혼잣말하듯이) 차가운 돌바닥이 싫어…… 고양이 친구들은 이미 많이 사귀었어…… 난…… 온기가 필요해. 촛불이 필요해, 글을 쓸 수 있도록. 얼은 손으로는 펜대를 움직일 수 없어.
올리브 父
(위협적으로) 올리브에게 꽃을 주거라. 그리고 신사답게 청혼을 해.
내 마음의 방에 침대는―
올리브 父
(멱살을 잡으며) 돈보다 힘이 센 것은 없지. 내 딸이 잡히지 않는 구름에 마음 졸일 바에야, 아예 없애버리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구먼. 올리브가 더는 웃을 수 없다면 (바닥에 팽개치며) 네게 줄 자비는 없다!


     올리브 父 퇴장한다. 소영, 쓰러진 윌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소영
괜찮아요?
(옷을 추스르고 천천히 일어난다) 도망가야겠어.
소영
(놀라며) 네?
억지 결혼을 하고 배부르게 살 바에는 차라리 길바닥을 떠도는 게 낫겠어.
소영
안 돼요! 그럼 글은 어디서 쓰게요.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쓸까요? 불면 사라져버리는? 당신에게는 책상과 의자, 그리고 종이와 펜이 필요해요. 당신은 글을 써야만 한다고요!
내가 왜 처자식을 버리고 떠나왔는데! 매일 밤 꿈속에 나타나. 걸음마도 떼지 못한 어린 아들이. 왜, 당신도 나한테 손가락질할 생각이오? 제 욕심만 채우기 급급한 천하의 이기적인 놈이라고! (책장에 기대 주저앉는다) 난…… 난 단지 글이 쓰고 싶었을 뿐이야. 단지 그것뿐이었다고……
소영
(생각에 잠긴다) 꿈을 위해선 이기적일 수밖에 없어요. 난 당신을 이해해요.
당신도 글을 쓰는 사람이오?
소영
(끄덕이며) 당신만큼 훌륭하진 않지만요.
떠도는 바람이 나를 울리는구나.
소영
(윌에게 다가가 앉아) 윌, 좋은 작품을 써요. 그것만이 당신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어요. 지금 도망치는 건, 수많은 명작을 무덤에 파묻는 꼴이에요.
명작!
소영
네! 지금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짐 싸는 게 아니에요. 여기에 머무르는 것, 그리고 펜을 잡는 것이죠.
당신 말이 옳아. 당신은 정말 따뜻한 사람이오.
소영
자, 이제 꽃을 꺾어 오세요. 그리고 거짓 청혼을 하세요. 이 방에 머물 수 있게, 연극을 시작하세요.


     윌, 밖으로 나가 꽃 무더기를 가져온다, 소영 앞에 서서.


그런데 말이오. 내가 글을 써 성공한다면, 나와 함께 떠나줄 수 있겠소? 같은 꿈을 꾸면서 바람처럼 함께 떠돌며 사는 것 말이오.


     소영, 고개를 끄덕인다. 올리브, 언덕 위를 걸어 나온다.


(소영에게) 나의 관객이여, 눈을 감으시오. 이보다 슬픈 연극은 없으니, 차라리 등을 돌리시오. (언덕으로 올라가) 아름다운 여인 올리브여, 나와 함께 결혼해 주시겠소?
올리브
(윌을 껴안으며) 윌리엄!


     무대, 천천히 어두워진다. 밝아지면, 윌은 책상 위에 엎드려 잠들어 있다.
     소영 잠에서 깨어 윌이 밤새 썼던 원고를 들여다본다.


소영
(독백) 겨우 네 장…… 이대로라면 내일 빈손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다른 거라도 찾아봐야겠어.


     책상 서랍과 책장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하는 소영. 그때, 장바구니를 든 올리브가 돌아온다. 소영이 방을 뒤지는 모습을 보고 바구니를 떨어뜨린다. 바닥으로 나뒹구는 과일과 채소들.


올리브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소영
(상황 파악 후) 제발 말하지 말아줘.
올리브
도둑고양이 같은 년. (밖으로 나가려는데)
소영
윌은 나를 사랑해!
올리브
(뒤돌아보며) 날 바보 취급하니? 아니면 눈뜬장님이야? 내가 청혼받은 걸 너도 봤을 텐데.
소영
그래, 거짓 청혼 잘 봤지.
올리브
말조심해, 거짓이라니!
소영
관객은 그저 무대 위의 이야기만 믿지. 정분난 배우들이 무대 뒤에서 서로 입맞춤하는 것도 모르고 말이야.
올리브
뭐야?
소영
지금의 안락을 지키기 위해 윌은 연극을 한 거야.
올리브
말도 안 돼…… 하지만 우린 결혼을 할 거야! 매일 같은 방을 쓰고 마주 앉아 밥을 먹다 보면 자연히 내게 마음이 생길 거라고.
소영
그래? 이상하네. 어제 분명히 윌이 나한테 이렇게 말했거든. (올리브에게 귓속말로) 우리 함께 짐을 싸서 도망칩시다!
올리브
아…… 아버지…… 아버지! (바닥을 기며 방을 나가려는데)
소영
네 아버지는 윌을 죽이고 말 거야! 네 그 가벼운 입 때문에 윌이 죽는다고.
올리브
(울먹이며) 내…… 내가……? 윌을?
소영
스스로 사랑하는 사람을 잠재우는 거지.
올리브
(고개를 저으며) 그럴 순 없어.
소영
그래, 넌 윌을 사랑하니까.


     올리브, 문득 화가 나서 바닥에 떨어진 오렌지를 던진다.


올리브
떠돌이는 다 그 모양이니? 사랑으로 장난질 치는 게 취미야?
소영
(막으며) 아―! 그만해.
올리브
(계속 던지며) 난 백일을 넘게 공들여도 되지 않던 것을 어째서 넌 한순간에 가질 수 있지?
소영
아프다니까!
올리브
마음까지 도둑질한 거니? (회심의 공격) 이 못생긴 도둑고양이야!


     소영,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오렌지를 던진다. 올리브의 머리에 정통으로 맞는다.


올리브
(흐느껴 울며) 돈이 필요하면 울 아버지 황금을 모조리 줄게. 먹을 게 필요하면 창고 열쇠라도 훔쳐다 줄게. 그러니 제발 떠나줘.
소영
(올리브를 일으켜 세우며) 내가 떠나준다면, 뭐든지 해줄 수 있어?
올리브
그래! 원한다면 영혼도 팔 수 있어.
소영
너무 막 나가지 말고.
올리브
(눈물을 닦으며) 그럼?
소영
날 좀 도와줄래?
올리브
윌의 마음을 홀리는 것만 아니면 뭐든지.
소영
윌에게 아직 발표되지 않은 원고가 있어?
올리브
(침묵)
소영
대답해! 발표되지 않은 원고가 있어?
올리브
그는 작품이 마음에 안 들면 곧장 불태워버려. 그러니 발표된 작품 말고는 남아있는 게 없지.
소영
그렇다면 새로 쓰는 것밖엔 없구나. (방 안을 서성인다)
올리브
원하는 게 그것이었구나……
소영
원고는 내일 중으로 마감이 될 거야.
올리브
무슨 수로?
소영
우리가 쓰게 만들어야지.
올리브
나는 필력이 없는걸.
소영
우리가 쓴다는 게 아니고, 그가 쓸 수 있도록 영감을 주는 거야.
올리브
난 자신 없는걸.
소영
괜찮아. 어차피 내 머릿속에 다 들어있으니까. 넌 맞장구나 쳐.
올리브
알겠어. 그건 내 전문이니까.
소영
좋아, 그런 다음 너는 내일 해가 뜨면 윌을 데리고 나가. 데이트를 하든, 춤을 추든, 한나절만 그를 묶어두면 돼. 그러고 나서 너희들이 돌아오면, 난 이곳에 없을 거야.
올리브
하지만……
소영
하지만?
올리브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분인걸. (울먹이며) 생각하니 또 서럽네.
소영
윌이 제일 좋아하는 게 뭐야? 그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거.
올리브
당연 술과 고기지. 그에게 술은 물이요, 고기는 쌀이라. 극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술집이나 푸줏간을 차렸을걸.
소영
(생각하다) 그래, 잔치를 벌이는 거야. 술과 고기가 넘치도록!
올리브
칫, 역병이 도는데 누가 미쳤다고 잔치를 벌여?
소영
돈보다 힘이 센 건 없어. 네 아버지 돈을 쏟아부으란 말이야.
올리브
그럼…… 정말 떠나 줄 거야?
소영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스스로 강에 몸을 던지겠어.
올리브
좋아. 하지만 마을 앞의 강은 안 돼. 윌이 볼 수도 있으니까.
소영
좋아. 윌의 사랑을 되찾고 싶으면, 이 약속을 꼭 지키는 게 좋을 거야.
올리브
(고개를 끄덕인다)
(잠꼬대) 아…… 안…… 안 돼……
소영
쉿―! (윌에게 다가가며) 윌?
(벌떡 일어나며) 안 돼―!
소영
왜 그래요.
악몽을 꿨소…… 올리브와 백년가약을 맺는 꿈을.
올리브
길몽이구먼.
소영
윌, 작품은 잘 돼가요?
중간에서 꽉 막혀버렸소.
소영
맙소사…… 윌, 이런 건 어때요? 연인 따라 죽음을 자청한 비극적 사랑 이야기.
(아무런 감흥이 없다) ……
소영
오, 윌리엄. 왜 그대 이름은 윌리엄인가요.
내 아버지가 윌리엄이기 때문이오.
소영
(좌절) 그래요…… 근데 당신 아버지가 숙부에게 죽임을 당했어요. 그럼 당신은 어떻게 하죠?
(무서워하며) 도망쳐야지.
올리브
맞아요, 그런 놈이 그 자식까지 죽이지 않으리란 법 없죠.
소영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맞고도 죽은 듯 참아야 하는가. 아니면 성난 파도처럼 밀려드는 재앙과 싸워 물리쳐야 하는가.
참아야지.
올리브
(끄덕이며) 그래야지.
소영
아니요! 햄릿은 그렇지 않아요! (올리브에게 속삭이며) 가만 안 있을래? 내가 윌이랑 살림 차리는 꼴 보고 싶어?
올리브
(기죽어) 알았어……
아, 햄릿이란 자의 이야기오?
소영
(한숨) 그럼 이거는요? 당신이 결혼을 했는데 아내 성격이 너무 난폭하고 거칠기 짝이 없는 말괄량이인 거야.
올리브
내 이야긴데?
소영
너무 막막해. 얘를 어떻게 길들이지?
(머리를 쥐며) 아아― 그만하시오. 말만 들어도 괴롭구려.
소영
윌! 시간이 없어요. 언제까지 행복을 먼발치에 두고 기다리게만 할 거예요?
그래! 우리 이야기를 쓰는 것은 어떻소? 권력자의 횡포에 궁지에 몰린 나약한 한 남자, 거짓 결혼을 앞에 두고 같은 꿈을 가진 여인과 함께 밤의 도피를 한다.
소영
불안이라는 숲을 떠돈다. 젊은 두 남녀는 길을 잃고 헤맨다.
단지 바란 것은 작은 행복뿐이었으나,
소영
그들의 앞길을 막는 안개는 너무도 막연하여 두렵고 또 두려워……
여행을 떠났으나 가는 길마다 정처 잃은 발자국뿐!


     윌,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서로 마주 보며 웃는 두 여인.


(마지막 장을 들고, 벌떡 일어나) 행복이 손에 잡힐 듯 가깝구나!


     무대 천천히 어두워진다. 밝아지면, 윌이 책상 위에 혼절해 있다.


올리브
(달려오며) 윌! 잔치가 열렸어요!
(침을 닦으며) 으응? 잔…… 잔치라고?
올리브
네! 아버지가 저잣거리에 술통을 쌓아놓고 잔치를 벌이고 계세요. 얼마나 많은지 성벽을 쌓고도 남을 지경이라니까요.
(벌떡 일어나며) 뭐! 성벽을 쌓고도 남아?
올리브
네네! 어서 가요. 고기가 다 타버리기 전에.
잠깐, 그 여인은?
올리브
변이 마렵다고 저 멀리 나갔어요. (손을 끌며) 자 빨리요, 시간이 없어요!
(끌려나가며) 그래도 대영제국의 술맛 한 번…… 맛봐야……


     이벤트의 신, 빈방으로 들어와 소파에 앉아 시계를 들여다본다. 잠시 뒤, 원래 옷으로 갈아입은 소영이 주변을 살피며 방 안으로 들어선다. 원고를 찾기 시작한다.


이벤트의 신
영혼도 도둑질할 수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그리 해야겠지만…… (고개를 젓는다)


     소영, 점점 다급해져 방을 더 거칠게 뒤진다. 책장 맨 아래서 상자를 발견한다. 상자를 열고 원고를 꺼낸다. 갈등하는 소영, 다시 원고를 넣고 상자를 닫는다.
     언덕 왼편에서 탑 조명과 함께 소영母 등장한다. 그사이 열린 문으로 윌이 소리 없이 들어온다.


소영母
(들떠서) 내 딸은 유명한 작가가 될 거예요. 그렇고말고요. 내 딸이 말이에요, 글쎄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지어줄 거래요. 네! 트로트 노래처럼 말이에요. 내 딸은 그런 아이예요.


     소영, 다시 상자를 열어 원고를 꺼내든다. 뒤돌아 일어서다 윌과 부딪히며 원고를 떨어뜨린다. 윌, 떨어진 원고를 줍는다. 주저앉은 소영. 긴 침묵이 흐르고.


소영
(간절히) 제게 주세요.
어째서?
소영
그것만이…… 저를 살려요. 부모님의 기대, 떠나 가버린 연인, 오랜 굶주림과 두려움, 이 모든 것으로부터 구해줄 유일한 것.
우리 약속은?
소영
여행자냐고 물으셨죠. 네, 맞아요. 하지만 저는 길 위를 걷지 않아요. 시간을걷죠. (손을 뻗으며) 당신은 얼마든지 또 쓸 수 있잖아요. 당신은 셰익스피어니까! 주세요, 제발.
이벤트의 신
(문밖으로 나가 있는다)
사실 당신이 내 방을 뒤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소. 난 가진 것 하나 없건만, 내게 뭐 그리 소중한 것이 있다고 이토록 찾아 헤매나 궁금했소.
소영
(고개를 저으며) 윌…… 난―
나를 알아준 유일한 사람. 그리고 나를 위로해준 유일한 사람.
소영
난…… 떠나야―
죽을 때까지 글을 쓰리다. 그 작품의 첫 관객은 항상 당신이 될 것이오. 그러니 발길을 멈추시오. 나와 함께 같은 꿈을 꾸오.
소영
(마음먹은 듯 단호하게) 여기서도 배고픈 삶을 살라고요? 굶주림과 추위, 집 없는 서러움을 또 느끼라고요? 난 이제 행복해지고 싶어요. 더 이상 휘청거리며 살고 싶지 않아.
내 가난이…… 죄요?
소영
네. 죄에요.
창고라도 털겠소.
소영
당신이 천 개의 단어를 쏟아낸들, 전 흔들리지 않아요. 떠날 거예요.
(원고를 움켜쥐며) 기어코?
소영
때론 꿈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그런 건 없소.
소영
그러니까 당신이 빌어먹고 사는 거야.
(원고를 벽난로 속에 던진다)
소영
(절규) 안 돼―!


     소영의 오랜 절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윌, 품 안에서 원고를 꺼내 바닥에 떨어뜨린다.


나는 글을 쓸 때 항상 두 권을 만든다오. 내가 제일 아끼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기 위해서지. 잘못 쓴 대사마저 그대로 남아있는 내 숨결의 흔적들을. (사이)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목이 생각나질 않아. 당신이…… 찾아보겠소?


     소영, 원고를 주워 품에 안고 일어난다. 그리고 힘겹게 발걸음을 떼어 방을 나간다.
     이벤트의 신, 소영을 데리고 무대 앞을 돌아간다. 윌의 시선은 소영을 쫓고 있다.
     이벤트의 신과 소영, 무대 왼편 끝에서 멈춰 선다. 올리브, 방 안으로 들어선다.


올리브
윌……?
세상 모든 만물이 시시해.


     윌의 방, 회색빛 조명으로 옅어진다. 소영, 윌의 방을 쳐다본다. 멈춰진 시간.
     천천히 암전. 단상에 탑 조명에 들어오면 소영과 사회자 서 있다.


사회자
이소영 씨? 간단한 작품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소영
이 작품의 이름은…… 한여름 밤의…… 꿈입니다. (사이) 이 작품은 오랜 시간 무명작가였던 한 여인이, 신의 장난으로 3일 동안 셰익스피어가 살던 시대로 여행을 떠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소영, 무대 중앙으로 걸어가면 단상 탑 조명 꺼지고, 윌의 방에 옅은 황금빛 조명 들어온다. 윌의 책상에 앉는다. 윌의 원고를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소영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손에 넣었지만 저의 기도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를 다시 한번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몇천 번이나 기도했지만, 신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윌, 무대 왼편에서 등장해 소파에 앉는다. 지난날을 잠시 회상하다 잠에 빠진다.


소영
매일 밤, 그가 고쳐 쓴 단어들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용서받지 못할 그 날의 기억을 되뇌어봅니다. 세월을 거슬러가는 택배라도 있었다면, 이걸 돌려주고 싶은데…… 그의 말대로 저는 이 작품의 첫 관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관객 또한 제가 되었습니다. (윌의 품에 원고를 내려놓으며) 어딘가 나와 닮았던 젊은 극작가여, 다음 생에는 서로 가난을 벗고 다시 만나기를. 연극이 현실이 되지 않기를. (퇴장한다)


     16세기 오페라 음악 천천히 흐르며, 천천히 암전.




김신희

사람들이 내게 빵과 우유를 먹을 수 있는 자격을 줄까?

2018/05/29
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