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시나리오(2018~2022)
D대 생물학과
〔나오는 사람들〕
안현아 D대 생물학과 과 사무실 계약직 직원
문주연 D대 생물학과 과 사무실 아르바이트생
홍인기 D대 생물학과 전문 연구원
육영민 D대 생물학과 전문 연구원
강두희 D대 생물학과 전문 연구원
〔무대〕
D대학교 생물학과 과 사무실. 사무용 책상과 의자가 있다. 구석에는 다과를 위한 탁자가 있다. 무대 중앙에는 동그란 테이블과 사이즈가 작은 삼인용 의자가 있다. 테이블 위에는 출근부 파일이 놓여있다. 사무실은 정리되지 않은 온갖 서류들로 지저분하고, 퀴퀴하기 짝이 없다.
막이 오르면 빗소리가 들린다. 현아는 사무실 전화기를 들고 통화를 한다. 주연은 본인의 몸보다 훨씬 큰 파란색 쓰레기통 안에 들어가서 우편물을 정리하고 있다.
현아
(애절하게, 그리운 사람을 부르듯) 인기씨! 왜 제 전화 안 받아요? 인기씨 제발…… 이제 제 앞에 좀 나타나요…… 보고 싶다고요……
천둥, 번개가 친다. 형광등이 깜박거리다가 꺼진다. 인기 등장.
인기
(우비 모자까지 뒤집어쓰고) 저 여기……
다시 형광등이 깜박이며 켜진다.
주연
(쓰레기통으로 쏙 들어가며) 악!
인기
악!
현아
(아랑곳하지 않고) 인기씨…… 왜 제 전화 안 받았어요? 제가 얼마나 찾았는데요……
02-2909-2114 이 번호로 제가 삼 주 내내 기다렸는데 어째서……
인기
아……그게 이 주 동안……
현아
네. 제주도에 이 주 동안 놀러 갔다 왔잖아요.
인기
놀, 놀러 간 게 아니라 몸이 아파서 요양하러 간 건데 그리고……
주연, 현아에게 정리한 우편물을 갖다 준다.
현아
고마워요. 아가.
인기
그건 제가 교수님께 말씀드렸는데…… 요.
현아
(끼어들며) 정확히 말하면 이 주 동안 연차를 쓰고 제주도에 갔잖아요. 연구원들이 일 년 동안
쓸 수 있는 연차 기간인데, 다시 말하면 인기씨는 연차를 모두 다 썼단 말이죠? 이해하셨죠?
인기
네…… 그런데 뭐가……
현아
(인기에게 점점 다가가며) 그게 문제가 아니라요. 제주도를 갔다 와서가 문제죠. 왜 일주일이나
연구실에 안 나왔죠? 어디서 무얼 했죠? 왜 제 전화 안 받은 거죠? 대체 무슨 속셈으로? 골탕 먹이려고?
인기
(고개를 위, 아래, 오른쪽, 왼쪽으로 피하며) 골탕…… 같은 게 아니라……
현아
저 좀 보시죠?
인기
(왼쪽 귀에 붙인 거즈와 오른쪽 팔목의 붕대를 보여주며) 요양을 하고도 다른 곳이 아파서 쉬었는데…… 요.
현아
인기씨, 병가도 연차에 포함되는 거 설명 못 들으셨나요? 아프면 아파서 못 나온다. 미리
연락을 하셨어야죠. 제가 제 할 일도 너무― 너무 많아서 죽겠는데 인기씨 졸졸 쫓아다니면서 이렇게!
인기
아, 저, 저기 실은……
현아
실은 뭐요? 설마 제가 모르는 또 다른 사실이 있는 건가요?
인기
시, 실은 엊그제부터 나왔는데……
영민 등장. 주연이 얼른 달려가 모나미 볼펜을 건넨다. 영민은 주연의 호의를 거절하고, 비싼 만년필을 꺼내 출근부를 작성 후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를 내린다.
현아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엊그제부터 연구실에 나왔다고요? 그럼 더 화가 나네요. 연구실 가는
길에 들르면 되는! 이 건물 정중앙에 있는! 과 사무실에 들러서 시간만 적으면 되는데 왜 출근부 작성을 안 하는 거냐고요! 정말 군대 끌려가고
싶어요?
인기
그러니까 나왔는데…… 이렇게 혼을 내실까봐 무섭고 그래서……
현아
아니 제가 잡아먹나요? 제가 인기씨 벗겨 먹냐고요!
인기
(너무 놀라 삼인용 의자에 털썩)
현아
(영민을 보며) 마침 잘 만났네요.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서야.
영민
(이어폰을 빼고 주연에게 삼천삼백 원을 보여주면서) 이거, 열 번 먹을 커피 값이요. 저금통에
넣기 전에 보여주려고요. 제가 지난주 수요일에 삼천 원 드렸던 거 기억하시죠? 몰랐는데 제가 어제는 공짜 커피를 마셨더라고요. 어제 커피값까지
삼천삼백 원 드릴게요. 제가 수첩에 다 적어놓긴 했는데 그래도 의심스러우시면 따로 팩트 체크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모두 다 공짜 커피를
마신다고 저까지 제 양심을 팔 순 없잖아요. 요즘 제가 연구하고 있는 꿀벌도 말입니다. 그들만의 사회가 있고, 그 안의 규칙이 있거든요. 그걸
지키면서 살려고 노력하는데 우리 인간들은 말이죠……
현아
육영민씨?
두희 등장. 사무실에 들어와서 출근부를 작성하고, 물통에 물이 없자 휘파람을 불어 주연을 부른다. 주연, 거친 숨소리를 내며 물통을 간다. 두희, 둥굴레 차 우릴 준비를 한다.
영민
네,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면요. 꿀벌 사회에도 계급이란 게 있습니다. 여왕벌과 같은 유전자를
가졌음에도 채택되지 못한 암컷은 여왕벌을 돕는 일벌이 된단 말이죠. 참고로 여왕벌로 채택되는 이유는 프라이머 페로몬 때문인데…… 아, 거기까지
들어가면 너무 어려우실 것 같네요. 그나저나 설탕 비율이 조금 달라졌나 봐요? 평소보다 확실히 더 달게 느껴진단 말이죠. 그런데 전 이것도
괜찮네요. 여름에는 땀을 많이 흘리니까 커피처럼 물보다 높은 농도의 음료를 마시게 되면 삼투압 현상으로 더 갈증이 나길 마련인데, 요즘같이
선선한 가을에는…… 어, 잠깐. (두희에게 다가가 팔목을 잡는다) 둥굴레 차는 여기 직원분들만 마시는 건데요?
두희
무슨 상관?
영민
뭐어? 무슨 상관?
현아
저기요? 제 말 안 들려요? 애기? 어떻게 좀?
주연
(두희와 영민의 팔목을 잡는다)
현아
애기 잘했어요. 의자로 모셔가세요.
인기
저기 저…… 제가 좀……
영민
무슨 일이시죠? 제가 커피값을 덜 드렸나요?
두희
힘보다 말로 하는 법을 배우면 어때?
인기, 영민, 두희 쪼르르 삼인용 의자에 좁게 앉아있다.
현아
세 분 잠시 이야기 좀 하시죠?
영민
제가 이렇게 일방적으로 시간을 빼앗길 만한 잘못이라도 저질렀나요? 저 지금 집에 가려던 참입니다. 급한 거 아니면 내일 이야기하셔도 되겠습니까?
현아
지금 출근 시간인데 왜 집에 가시는 거죠?
영민
그렇게 듣고 싶으시다면 이야기해드리죠. 그렇지만 지금은 곤란하고요. 오늘은 영 피곤하네요.
집에 가서 잠시 눈 좀 붙이고 나면 오후 일곱 시쯤 컨디션이 나아질 것 같은데 시간 어떠세요?
인기
그거 좋을 것 같아요. 저도 좀 급한 일이 있는데……
두희
다들 퇴근한 후에 와서 혼자 떠들려고?
현아
좀 조용히 하시고. (사이) 여러분은 죗값을 받게 될지도 몰라요.
셋
(흥분하며 따진다)
주연
쉿!
현아
오늘 갑자기 국방부에서 감사를 하겠다고 나왔어요. 말하자면 전문 연구 요원들이 열심히 출근을
하고 있느냐에 관한 거예요. 여러분은 군대 대신에 대학원에 와서 연구를 하고 있는 거잖아요? 엄연한 성인이고 직장인이니까 알아서 잘할 거라고
믿고서, 뒤늦게 출근부를 살펴보고 있는데 문제가 많더라고요. (사이) 전문 연구 요원직을 박탈당하고 군대에 끌려갈 수도 있어요.
셋
(흥분하며 일어서서 따진다)
주연
(빗자루로 세 명의 정수리를 차례로 누르며) 쉿쉿쉿!
현아
자자, 아직 결정된 건 아니니까 다들 증명만 된다면 경고 조치 정도로 끝날 수 있어요. 한 분씩 죄목을 말씀드릴게요.
영민
저기 선생님 죄목이라뇨.
현아
먼저 홍인기씨.
인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네, 홍, 인, 기……
두희
벌써 관등성명하고 앉아있네.
전화벨이 울린다. 주연이 잽싸게 달려가서 전화를 받고는 현아에게 달려가 귓속말을 한다. 현아는 인상을 쓰고는 전화를 받으러 간다.
현아
거기 잠시만 앉아 계세요.
두희
보니까 출근 제대로 안 해서 그런 거네. 나이 먹어서 군대에 끌려가면 관심 병사 된다던데. (인기와 영민을 보며) 음, 그냥 봐도 관심병사네.
영민
관심 병사? 그쪽도 잘못이 있으니까 여기 앉아있는 거면서 말이 많습니까?
인기
하…… 어떡해요? 그럼 이거 해결될 때까지 집에 못 가는 거죠?
두희
그게 문제야? 이 년 동안 집에 못 갈 수 있는데?
현아
(목소리를 키우며) 아니 그게 아니라요! 우리 학생들이 아주 조금, 살짝, 불성실하긴
했지만…… 그게 악의를 가지고 한 행동이 아니란 거 아시잖아요. 다들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건데…… 아니 그러니까, 그 사정을 들어봐야죠.
(사이) 하…… 네. 잘 이야기해보고 전달해드릴게요.
현아는 전화를 끊자마자 주먹을 쥐고 책상을 내려친다. 거친 면모.
현아
지금 하고 있잖아! 어?
주연
(찬물을 떠다 준다)
현아
(셋에게 다가가면서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지금 여러분 때문에 진짜! 지금부터 똑바로
대답하세요. 거짓말하시는 분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먼저 홍인기씨. 홍인기씨는 일주일 동안 무단결근을 하셨네요. 의무 종사 기간 중 통상 팔
일 이상 무단결근하면 군대 들어가는 거 모르세요? 제주도를 이 주나 다녀왔으면 됐죠. 왜 마음대로 결근을 하셨죠?
인기
아까도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핑계가 아니라 제가 많이 아팠어요. 그 후에는 학교를 나오긴 나왔는데…… 출근부 작성만 못 한 거라니까요……
영민
대한민국 대단하네요. 우리도 노동잔데 병가도 무단결근으로 처리한다니요. 꿀벌들도 아프면
동료들이 대신 일을 나눠 해주곤 하는데 말입니다. 이 나라에 인권이라는 게 존재하긴 합니까?
두희
저렇게 아프면 다 때려치우고 집에나 있지 제주도 돌아다닐 힘은 있나.
인기
저 놀러간 게 아니라 요양 간 거라니까요. 왼쪽 귀 청력에 문제가 생겨서 연차 내고
쉬었는데…… 다음에 오른쪽 팔목은 인대가 늘어나서 못 나온 거예요. 선생님 저 좀 믿어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급히 가야 하는 사정이 있는데……
현아
그렇게 아프셨으면 병원에 갔을 거고 그럼 당연히 진단서가 있겠네요?
인기
아…… 그게…… (배낭을 뒤적인다) 어디 있더라……
영민
그런데 좀 의문인 게 있습니다. 청력에 문제가 생겼는데 왜 귀에 거즈를 붙입니까? (인기의 귀를 만지려고 살며시 손을 뻗는다)
인기
(자기도 모르게 영민의 팔목을 제압한다)
영민
(인기의 팔목을 재빠르게 때리면서) 아! 아파요! 아파!
인기
앗, 죄송합니다.
두희
저 화려한 기술은 뭐야.
현아
다들 집중 좀! 인기씨 진단서도 없으면서 저보고 믿으라고요? 그런 변명은 국방부에서 통하지
않아요.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요. 다음, 육영민씨도 무단결근이지만 홍인기씨보다 더 악질이네요. 왜 허위로 출근부를 작성하셨죠?
연구도 제대로 안 하고 출근부 작성만 하신 거 아닌가요?
인기
(발 동동)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저 아직 얘기……저 좀……
영민
전 단 한 번도 연구실에 안 나온 적 없습니다. 다짜고짜 이렇게 범죄자 취급하면서 의심부터
하시는 거, 잘못된 거 아닙니까? (손목 털면서) 아오, 더럽게 아프네.
인기
죄송합니다…… 습관적으로……
두희
허위로 썼다면 완전 중범죄 아냐? 범죄자 취급이 아니라 그냥 범죄자네.
영민
지금 확인 절차를 거치고 있는 중 아닙니까? 그놈의 입 좀 다무시죠?
현아
육영민씨 몇 시부터 몇 시까지 근무하셨나요?
영민
그러니까……
주연
(녹음기를 가지고 나와 마이크처럼 대준다. 가끔 끄덕이면서)
영민
정확히 오후 열한 시에 연구실에 나와서 오전 아홉 시까지 연구했습니다. 심지어 저는 남들보다 한 시간이나 더 무료로 노동을 제공하고 갔습니다.
현아
왜 그렇게 늦은 시간에 나오신 거예요? 원래 출근 시간은 오전 아홉 시부터 오후 여섯 시까지인데요. 점심시간 한 시간 빼고요.
영민
이유를 말하자면 또 간단히 이야기할 수 없겠네요. 아마 다 듣고 나면 육영민은 그럴 수밖에
없었네, 이해를 해주실 겁니다. 아니! 이해를 넘어서 저를 동정하실지도 몰라요. 그러나! 저를 동정하진 마세요. 인간이라면 한 번쯤 겪게 되는
고뇌 같은 것이니까요. 어쨌든! 그 이유를 물으시는 거라면 백 번이고 설명해드릴 수 있습니다.
두희
아, 말이 너무 많아서 듣기 전부터 지치네. 누워서 들어도 되냐?
인기
선생님, 왜 영민 선배님 말은 다 들어주시나요?
영민
(인기 입술에 쉿) 너랑 나랑 같을 순 없잖아요. 선생님 저는요 단지 아무도 없는 곳이
필요해서 늦게 나온 겁니다. 그럴 때 있지 않습니까. 혼자인 것보다 같이 있어서 더 괴로울 때 말이죠. 원치 않는 피와 살을 물려받아서 괴로운
것 말입니다. 근래 연구를 하면서 어쩌면 저는 전생에 동료의 사체를 치우는 일벌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습니다. 잔상으로 괴로워 잠 못 드는 밤을
이해할 수 있달까요.
두희
여기서 꿀벌 연구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저렇게 잘난 척을 하냐.
인기
심지어 <다중 여왕벌로 인한 꿀벌 반란>은 제가 제시한 연구인데……
영민
선생님 저는 불성실한 홍인기 후배와는 달라요. 연구실도 안 나왔으면서 변명만 늘어놓는 꼴 제가
봐도 못 봐주겠는데 선생님은 오죽하시겠습니까? 그래요. 솔직하게 말할게요. 저! (사이) 수면 장애를 겪고 있습니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는
거죠. 사실 지금도 꿈인지 현실인지 잘 모르겠고 그래요. 수면 시간이 지났거든요.
두희
참 유별나네. 수면장애를 병으로 취급하면 여기 정상인 사람이 어디 있어.
영민
인생을 살다 보면 왜 이렇게 나만 불행할까 생각하게 되지 않습니까. 어두운 나무 구멍 속에
들어가서…… 사방이 막힌 방 하나를 만들고…… 그 옆에 또 하나의 방을 만들고…… 이제는 셀 수 없게 되어버린 빈 방 속에서…… 덩그러니……
정말 눈 뜨고는 차마 볼 수 없는…… 천성적으로 고독하게 태어난 제가 있단 말이죠. 연구실에 앉아서 윙윙― 꿀벌 소리를 들으며 나란 사람은 왜
다중 여왕벌이 아니라 일벌로 태어난 걸까. 어째서 이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로워만 하는 걸까 생각했다고요. 저 오랜 시간 꿀벌을 연구하면서
마음을 다잡곤 했습니다. 죽는 심정으로 살자고요. 매일 밤 연구실 안에서 유언 영상을 남겼습니다. 이걸로 저란 사람을 증명할 수 있다면……
부끄럽지만 제출하겠습니다.
인기
영민 선배님은 여왕벌 족속이잖아요.
두희
그러니까 굳이 증명이 필요한가. 아버지가 장관이면 어차피 군대 안 가는 거 아냐?
영민
그놈의 아버지, 아버지! 저기요. 쟤 입 좀 막아주세요.
인기
요즘 장관들 대통령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지정해서 한 자리씩…… 한 거 맞죠?
두희
(절레) 으음― 다른 사람 입맛이지. 그분은 드라마 보느라고 정신이 없거든.
영민
연구실에 앉아만 있어서 종일 말할 사람들 없으니까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한탕 해 먹으려고!
어! 아주 입이 터졌어! 정말 못할 말이 없고! 인간들이 정말 천박하다고!
현아
(괴로워하며) 그만…… 애기 이 사람들 좀……
전화벨이 울리고, 현아가 받는다.
주연
(테이프를 떼서 셋의 입에 붙인다)
인기
(테이프를 살짝 떼서 주연에게) 저기…… 언제쯤 끝날 수 있을까요.
주연
(다시 붙이라는 모션)
인기
넵…… (카톡 알람 소리)
영민
실내에서는 매너 모드로 하면 안 됩니까?
인기
넵……
현아
지금 학생들 이야기 듣고 있는데요. 증명할 만한 객관적인 자료는…… 아직 없습니다. (목소리를
키우고) 아니 왜 제 재계약을……! 지금 논하시는 건데요. 저도 최선을 다해서 학생들 관리하고 있다고요. 불성실한 학생들이 군대 가는 게 맞죠!
그게 제 잘못인가요? (사이) 제가 좀 흥분했네요. 죄송해요. 네, 학생들과 머리를 써볼게요. (수화기를 던지듯 내려놓는다) 왜, 대체, 지들이
뭔데! 어? 입 다물고 일이나 할 줄 알았어? 내가 시다바리냐고! 육영민씨!
영민
(졸다가 깜짝 놀라서) 네?
현아
지금 저랑 장난해요? 여기가 유치원이야? 초등학교야? 그딴 동영상으로 대체 뭘 증명하겠다고! 난 여기 있어서 정신병 걸리겠다고!
두희
이런 게 정신병이야. 수면장애 같은 게 아니라.
인기
(끄덕) 아…… 확실히 알았어요.
현아
(흥분을 가라앉히고) 부모님께 연락이라도 드릴게요. 아버지께서 영민씨가 학교에 왔다는 증인이
되어주신다면 제가 어떻게 해서든 군대 막아드릴게요. (수화기를 들고) 전화번호 좀 불러주시죠?
영민
안 돼요. 그건 절대 안 돼요.
두희
물어보기만 한다잖아.
영민
그래도 안 돼요. 저한테 문제 있는 거 아시면 아버지 난리 날 거예요. 아버지랑 같이 있는
시간 피하려고 그런 건데…… 이 사실 아시면 그 날처럼 저한테…… 아뇨, 그냥 제가 어떻게 해서든 증거를 가지고 올게요. 연락은 제발. (영민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린다) 그것만은……
현아
영민씨가 군대 가는 게 문제예요? 지금 저까지! 아니, 지금 영민씨 울어요?
두희
박수, 박수. 연기 대상감이야. 생물학과에서 연기하지 말고 차라리 연극영화과를 가. 전과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고.
현아
육영민씨가 어린 애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면 뭐가 해결돼요?
인기
(울고 있는 영민을 달래고, 자리에 앉혀준다)
두희
생물학과에 온갖 찌질이 다 모였나 봐. 가만히 앉아서 동식물만 관찰해서 그런가. 사회성도
떨어지고…… 밖에 나가서 바람도 좀 쐐. 사람들도 좀 만나고.
주연
(영민에게 휴지 한 장 갖다 준다)
영민
(눈물, 콧물 닦으며) 지도 생물학과면서.
인기
(격한 끄덕임)
두희
너 지금 끄덕였냐?
인기
선배님도 생물학과 맞다 구요…… 그거 끄덕인 거예요.
영민
그거 자격지심이야.
두희
하? 자격지심? 내가 너희한테? 자격지심을 갖는다고? 황당하네. 지금 싸우자는 거야? 주먹 쥐어봐?
주연
(스마트 폰으로 무언가를 현아에게 보여주며 속닥속닥)
현아
정말 머리가 아프네. 인기씨 잠시만 나와 보시죠?
인기
저요? 갑자기 왜?
현아
애기?
주연
(끄덕, 이내 영민에게 다가가며)
현아
(대사) 우니까 더 예쁜데?
주연
(립싱크, 영민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영민
뭐, 뭡니까?
현아
(대사) 가서 한잔할래?
주연
(립싱크, 영민에게 질척질척)
영민
(겁먹고) 왜, 왜 이러는 건데요.
현아
인기씨, 하시죠?
인기
(고뇌, 발연기) 아저씨! 숙녀분께 그러시면 안 되죠.
영민
나? 숙녀?
현아
(대사) 이건 또 뭐야?
주연
(립싱크, 주먹으로 인기를 치려고 한다)
인기
(주먹을 피하다가 주연의 등을 받쳐주고, 이내 바닥으로 쿵, 떨어트리고)
주연
아.
인기
죄송해요. 제가 실수로……
두희
방금 둘이 뭐야? 주고받는 시선 봤어?
영민
(두희 어깨에 기대서) 몰라 난. 그런 거. 놀래서 심장 멎는 줄 알았다고.
두희
(어깨를 튕겨서 영민 얼굴을 치우고) 심장은 그렇게 쉽게 멎지 않아.
현아
(호들갑, 비꼬는) 인기씨! 티비 특종 이런 일이에서 하신 것처럼 제대로 실력 발휘는
하시네요. 무술도 무술인데 연기를 정말 잘하세요. “아저씨 숙녀분께 그러시면 안 되죠.” 듣는 제가 다 위협적이었달까? 인기씨 이러다가 배우로
데뷔하는 거 아니에요?
인기
(현아에게 90도로 인사) ……고맙습니다.
현아
이틀 전에 방송이 나갔으니까 못해도 이주 전에는 녹화를 하셨겠네요? 그때 아파서 제주도 요양
갔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결론은 제주도도 안 간 거네요. 전문 연구 요원은 군인 신분이어서 상업적 활동을 하면 안 된다는 것도 몰랐다고
거짓말하실 셈이세요? 해명 좀 해보시죠?
인기
그게…… 개인적으로 나간 게 아니라 무술 동아리에서 같이 한 거예요. 몇 가지 동작만 간단하게
하면 된다고 해서 간 건데…… 혹시나 해서 모자도 썼는데 어떻게 저를…… 그리고 그 돈은 녹화 끝나고 동아리 회식해서 받은 것도 없고…… 정말로
상업적 활동을 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두희
뭐가 다 이렇게 아니래. 누구처럼 다 모른다고 하네.
영민
(김기춘 성대모사) 잘 모르겠읍니다. 기억이 안 납니다.
두희
이제 보니까 귀에 붙인 거즈랑 팔목 붕대도 무술 하다가 다쳐서 한 거 아냐?
인기
(말 빠르게, 또박또박) 아니에요. 정말 아파서 그런 거예요. 꿀벌 소리 듣기가 힘들었고……
제주도로 요양을 가려고 비행기 표까지 끊었는데…… 무술 동아리에서 조금만 도와달라고 하기에 가보니까 방송국이었고…… 겨우 몇 가지 동작만 한
거고, 정말로 어떤 이득을 취하려고 한 게 아니고……
두희
쟤 저렇게 발음이 좋았나. 그거 해봐. 그 있잖아.
영민
내가그린기린그림은잘그린기린그림이고
현아
대체 그 말을 제가 어떻게 믿어요? 군대 안 가는 대신에 연구하라고 했지 누가 무술 하라고
했어요? 그럼 체대를 가시지 왜 생물학과에 오셨을까? 증거를 가져오라고 했더니 모든 게 거짓말이라는 증거를 만들어오셨네요.
영민
인기 후배 아까 들었죠. 전과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요.
두희
앞으로 힘쓰는 일 얘나 시키면 되겠네. 이따가 에이 포 용지 연구실에 옮겨 놔줘.
인기
저도 이게 제 적성이 아닌 줄 알았으면 생물학과에 안 왔겠죠! 적성이 뭔지 모르겠으니까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는 중인데 왜 뭐라고 하세요! 그, 그리고 무술은 무식하게 힘만 쓰는 게 아니라고요! 엄청난 노력과 시, 시간이
필요하다고요.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놀람)
현아
지금 따지시는 거예요? 인기씨 군대 가는 건 그렇다 쳐도 제 입장은요? 교수님이며, 학교며, 국방부에 변명하는 건 저인데!
인기
(주저앉으며) 아…… 귀야…… 귀가 너무 아파요. 제…… 제발 소리 좀.
영민
(인기를 일으켜 세우며) 이번엔 내가 옮겨줄게요.
두희
너는 수면장애가 아니라 다른 곳이 아픈 것 같아. 머리라든가.
주연
(분무기로 화분에 물을 뿌린다)
현아
애기! 내가 잎에 물 뿌리지 말라고 했죠? 그럼 금방 시든다니까? 물 얼마 만에 준 거예요?
화분에 물 제때 안 주면 내가 부장님한테 욕먹는다고 몇 번을 이야기해요? 여기 놀러 온 거 아니잖아요. 한 번 이야기한 거는 좀 제대로
기억했으면 좋겠는데?
주연
(죄송하다고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고)
현아
아주 사사건건 내 손이 안 닿는 구석이 없어. 다음 강두희씨. 두희씨 변명 들어볼게요.
주연
(현아에게 급히 파일 갖다 주고)
현아
애기 좀 빨리 갖다 주지? 두희씨는 출결을 다 하셨네요.
두희
그러니까 나 왜 안 보내 주는 거야.
현아
본인 것만 하면 되지 대리 출석은 왜 해줬어요? 그것도 두 명이나?
두희
연인 사이에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나.
현아
네? 최다윤씨 한 분, 김현우씨 한 분인데요.
두희
(낭송)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은 꿈이었다”1) (감상) 아…… 여기 이 문장 너무 아름답네.
현아
저기 강두희씨? 지금 시 낭송할 때예요? 왜 두 사람 대리출석 했냐고요.
두희
나이가 들면 이해를 잘 못하나. 이러니까 보수 꼴통 소리 듣는 거지. 둘 다 내 애인이라서
해줬다니까. 한 명은 조금 늦장 부리는 스타일이라서 적어줬고, 한 명은 아침에 요가를 배워서 출근 카드 대신 찍어줬어.
전화벨이 울리고, 주연이 받았지만 현아가 수화기를 빼앗는다.
현아
애기! 알아서 받으면 안 돼요?
인기
(카톡)
영민
거 참 카톡 좀. 뭐 애인이 둘이나 있습니까?
두희
응. 둘 다 내 애인.
영민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한다는 게 말이 돼?
인기
그럼…… 그 선배님, 그러니까…… 그 양성…… 애자 이런 거죠?
두희
질문이 무례하네. 그렇게 꼭 구분을 지어야 하는 거야?
인기
그건 아니지만요……
두희
너희한테 내 성적 취향이 그렇게나 중요해? 질문이 많아.
영민
중요하진 않죠.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성적 취향을 옳다 그르다 합니까?
두희
오랜만에 맞는 이야기 하네. 걱정 마. 너희 둘 다 내 취향 전혀 아냐.
현아
(통화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엄마, 왜 회사로 전화해. 지금 일하는 중인데 어떻게 휴대폰을 받아.
두희
그 둘은 나를 운명이라 느꼈대. 억지로 노력해서 만나 왔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나를 평생 옆에 두고 아름답게 여기며 지켜주고 싶대 나.
현아
(통화) 선 안 본다고! 안 본다고 말했잖아! 엄마가 공유 닮았다며. 이 세상에 머리 벗겨진 공유가 어디 있어!
두희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에 빠지기 쉽지 않아. 겁이 많아져서 이것저것 따지게 되니까. 결국 그
나물에 그 밥이 되겠지. 점점 더 사랑을 포기하게 될 거고.
현아
(통화) 내가 싫다는데 왜 자꾸 잔소리하냐고! 내가 다 알아서 만날 거라니까!
두희
아니, 나중에는 시작하고 싶어도 못한다니까? 본인만 몰라.
현아
나도 내 주제 안다고! 알아! 엄마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두희
사실 외면하고 싶겠지. 현실과 이상의 괴리, 자기 주제 파악…… 뭐 그런 거?
현아
(전화 끊고) 그러니까 지금 당신 애인 둘, 뒤처리해주느라고 이렇게 일을 꼬이게 만들었다는
거죠? 그래 그게 중요하지 않지. 둘은 학교도 안 나왔으면서 돈을 따박따박 받아간 게 문제지!
두희
그 문제가 있었네.
현아
두 사람은 이 사실을 알고 있어요?
두희
어떤 걸 묻는 거야. 대리출석 해준 걸 아느냐고 묻는 거야 아니면 내가 동시에 사귀는 걸
아느냐고 묻는 거야? 대리출석 해주는지는 알고, 내가 동시에 사귀는지는 모르지. 왜 당연한 말을 길게 하게 만들어?
영민
뭐? 난 또 합의 하에 이뤄진 줄 알았더니. 이거 완전 윤리 의식도 없는 새끼 아닙니까?
두희
여왕벌도 여러 마리의 수벌이랑 교배하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인기
선배가 지금 여왕벌이라는 거예요?
두희
안 들키면 되잖아. 너희만 입 다물면 돼.
현아
(흥분) 누구는 사랑 하나 찾기도 힘든데! 평생 한 명 만날까 말까 하는데! 두 사람한테
거짓말하면서! 어떻게 사랑 앞에서 그런 태도를 취해요? 네?
두희
(티백을 채워 넣고 있는데)
현아
애기! 저번에 내가 메밀 차 시키지 말라고 했는데 또 메밀 차 시켰어요? 메밀 차 먹으면 몸이
차가워져서 여자한테 안 좋다니까! 내 말 이해 못 해요? 빨리 메밀 차 치워버려요.
영민
윤리 의식에 어긋나는 인간을 어떻게 그냥 넘어가.
인기
두 사람 다 상처받으면 어떡해요?
현아
그때는 두희씨가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요!
두희
그래 니들이 내 사랑을 이해할 수 없겠지. 나는 여기 주전자에 담긴 둥굴레 차처럼 사랑이 너무
많아. 그런데 물을 너무 마시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어. 물을 마시기 위해 누군가는 유리컵을 들고 왔고, 어떤 사람은 밥그릇을, 또 다른
누군가는 컵이란 게 아예 없어서 손바닥을 모아 마시겠대. 나의 둥굴레 차는 어디에 담기냐에 따라서 모양이 달라지지만, 그 맛이 달라지진 않잖아.
나는 물을 줘서 행복하고. 사람들은 물을 마셔서 행복하고, 그뿐이야. 너무나 당연하게 믿고 살아왔던 것들이 꼭 답은 아니라고 알려준 사람들이야.
(사이) 나는 누구보다 사랑이 귀하고, 어렵고, 무겁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단 한 번도 쉽게 생각해본 적 없어. 그래서 이제껏 괴로웠다고
나는…… 그러니까 내 사랑을 함부로 비꼬지 마.
사이, 인기와 주연 홀린 듯 박수 친다.
영민
또 그렇게 말하니까 논리가 있긴 하네.
현아
애기? 지금 박수 칠 때예요? 빨리 대걸레질해요! 힘이 없어요? 빡빡, 빡빡 좀 못 닦아요?
그 정도밖에 힘이 없어요? 문주연씨 이리와 봐요. 내가 동생 같아서 잘 해줬는데 너무 하네요. 다른 학교 다니면서 우리 학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거 내가 배려해줘서 가능하다는 거 몰라요? 이런 식으로 불성실하게 일하면 우리 일 오래 못 해요. 지금 이 시급으로 어디서 쉽게 일할 수
있겠어요? 안 그래요?
현아의 태도에 셋,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젓는다. 곧 현아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고.
현아
네 부장님. 제가 무슨 수로 군대를 막아요. 왜 저한테만 뭐라고 하세요? (사이) 부장님께서
저한테 하실 말씀은 아니죠. (울먹) 저 이 사무실 안에서 차별받으면서도 꿋꿋이 일한 사람이에요. 같은 학벌인데 저는 여자라고 무기 계약직으로
뽑아놓고, 진급이며, 연봉까지 차별 받고 있는데. 그것뿐이에요? 여자는 금방 그만둬서 안 된다 그래서 결혼도 미루고 열심히 일했더니 성격에
문제가 있다, 온갖 꼬투리 잡고! 도대체! 지금 학생들은 온통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 변명만 늘어놓고 있다고요! ……(눈치) 저도 어떻게 방법
찾을 시간을……
현아, 통화하며 밖으로 뛰쳐나간다. 빗소리만 들리고.
영민
(눈을 감고) 정말 어디든 조용한 곳은 없어요……
인기
어디든 문제가 있으니까요……
두희
곯은 곳은 터트려야 한다니까. 그래야 다신 안 곪지.
사이
영민
(인기의 무릎에 누워서) 무릎 좀 빌릴게요. 생활 패턴이 망가지면 주체할 수 없는, 상상
이상의 피로가 몰려와요.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사실 잘 모르겠어요…… 지금 머리가 아프고…… 이럴 때는 꿈도 너무 험하게 꾸고……
그래요. 상황이 나아지면 깨워주세요……
주연 꾹 참고 대걸레질을 한다. 그러나 아까보다 힘이 없다. 인기는 영민의 머리를 의자에 내려놓는다. 주연이 하고 있던 대걸레를 빼앗아 열심히 대걸레질을 한다. 그러나 곧 생각에 잠긴다. (사이) 두희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 목소리. 두희의 애인 현우다. 현우는 무대에 등장하지 않고 목소리만 나온다.
현우
두희야.
두희
(출입문 쪽으로 다가가서 다정하게) 어……? 언제 왔어? 추운데 내 후드티 입고 나오지. 내가
서랍에 개어놓았는데…… 밥은 먹었어? 내가 콩나물국한 건 봤어?…… 아니…… 군대 문제 때문에 잠깐 모이라고 해서.
영민
(문밖의 두희를 훔쳐보고) 애인…… 애인!
셋, 두희에게 모여들어 훔쳐본다.
영민
(내다보며) 두, 둘이
인기
와……
영민
강두희, 대단하다 대단해. 우리 과에 저런 애가 있었나.
주연
(부러움)
인기
(격한 끄덕임) 그러게요.
영민
생긴 걸 보니 우리 둘은 탈락이다.
두희
(다시 돌아오고) 관음증 있어? 왜 남의 사생활 훔쳐봐.
두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문밖에서 여자 목소리.
다윤
오빠!
넷, 매우 당황, 소름, 주저앉는 등…… 매우 놀란 모습.
두희
(당황, 달려나가며) 어! 어? 다윤아. 비 와서 춥지? 너 주려고 차 우렸어. 옷은…… 옷은 안 젖었어? 내 카디건 벗어줄까?
영민
(주저앉으며) 나 이번엔 진짜 잠깐 심장 멈췄던 것 같아……
인기
어떻게 살아요? 전 저렇게 못 살아요.
주연
(발 동동)
두희 다시 무대로 돌아오고, 입술에 립스틱.
인기
선배……그 입술에……
두희
어? 뭐? 아……(둥굴레 차에 비친 자신을 보며 입술을 닦는다)
영민
인간아! 만약에 여자친구 먼저 왔으면 립스틱 자국 그거! 어떡할 뻔했어!
두희
안 걸렸잖아. 뭐.
영민
안 걸렸잖아? 비둘기도 아니고 구구구구! 공공장소에서 하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데! 이놈의 부리 하나 관리 못 하고. 어!
두희
너 그 부리를 밥 먹을 때랑 쥐뿔 아는 것도 없으면서 떠들 때나 쓰지. 그러다가 함몰돼. 퇴화한다고.
영민
(절레절레) 뻔뻔하다 뻔뻔해. 그래, 양다리는 저런 인간이나 걸칠 수 있는 거야.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라고. 난 정말 모르겠다.
두희
적어도 나는 행복하기라도 하지 너는 행복하지도 않잖아.
영민
(의자에 누우면서) 그래요…… 난 안 행복해요.
두희
포기하지 말고 방법을 좀 생각해봐. 생각이란 걸 하라고. 쓸데없는 데 말고.
사이
인기
(대걸레질)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죠. 행복을 포기한 게 아니라 방법을 몰라서 가만히 있는 걸 수도 있어요…… 아직 고민 중인 거라고요. (카톡)
영민
또 카톡이 왔다고요…… 제발…… 실내에서는……
인기
그런데 저는 너무 늦어버린 것 같아요.
영민
매너모드 하기에는 안 늦었다고요……
인기
너무 꼬여 버려서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봉술 대회 나가려고 거짓말하고 학교를 안
나온 것부터가 잘못일까요…… 아니면 부모님 말씀 따라서 적성에도 안 맞는 이 학과를 온 게 잘못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행복하려고 마음먹은 것부터일까요. 저는 제 인생을 미리 다 살아본 것 같아요. 내가 생각하는 범위 내에서…… 살겠죠. 이대로 있기에는 너무
뻔해서 무서워요.
두희
이제부터 안 들으면 되지. 뻔하면 재미없잖아.
영민
어떻게 보면 안전하다는 의미이기도 하지……
인기
인생 전체를 이렇게 살아와서 잘 모르겠어요.
두희
꼬인 데부터 잘라버려. 눈 딱 감고.
영민
너무 많이 자르지는 말고……
인기
잘랐는데 후회하면 어떡해요?
두희
버리고 새로 사. 그럼 더 근사하잖아.
영민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니까 힘들긴 하지만……
인기
(대걸레를 들고 망설인다) 이제 대회까지 한 시간 반 남았어요.
두희
오늘 하루 더 빠지고 가봐.
영민
(하품) 군대에 한 걸음 더 가는 건 맞지만……
인기
그럼…… 저 연습한 거 한 번 봐주세요.
주연
(박수)
영민
(발 박수)
인기
(조금 신이 나서 옷을 벗는다) 사실 제 주특기가 봉술이에요. 연구실에 앉아서 가만히 벌
소리를 듣다가 (봉술을 한다) 봉을 딱 잡고 돌리면 막 바람 소리가 들리는데 이건 제가 내는 소리라서 좋아요. (무대에서 뛰어다니며 다양한
무술을 보여준다. 이내 부끄러워서 옷을 다시 입고) 이건 제 생각이 아니라 봉을 잡던 첫날 사람들한테 남다르다는 이야기도 들었다니까요. 아직까지
초보자이긴 한데……
주연
(호들갑스럽게 박수)
영민
(윗몸 일으키기) 그거 봉술인가 하면 배에 근육이 원래 그렇게 생기는 거야? 아니면 운동을 따로 하나?
두희
(영민을 턱으로 가리키며) 같은 찌질인 줄 알았더니 약간의 오해가 있었네.
영민
이제 홍인기도 가능성 조금 생겼나 봐. 축하해.
두희
(얼굴 스캔하면서, 단호) 그건 아냐.
인기
제가 어디가 어때서요! 완전 수컷 냄새나는 늑대인데. 상남자. (멋진 포즈)
주연
(주연 주먹을 쥐고 얼굴을 가린다)
두희
이러니까 늑대가 멸종 위기라는 거야. 쯧.
인기
아닌데 괜찮은데 생각보다. (핸드폰 꺼내서 셀카 찍듯이 조명을 찾아서, 주연에게) 저…… 괜찮지 않나요?
주연
(몸 비틀기, 부끄럽다)
현아, 힘없이 등장. 문 앞에 서 있다.
두희
그래,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지. 사랑하는 마음은 뭐든 좋지. 아름답잖아.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게 더 쉽잖아. 노력하지 않아도 되니까.
인기
(현아를 발견하고는 당황해서 대걸레를 놓친다)
모두 현아를 바라보고, 현아 조용히 훌쩍,
암전
다음 날, 출석부를 쓰기 위해 서 있는 두희, 인기. 주연은 청소 중, 현아는 통화 중이다.
모두 현아를 바라보고, 현아 조용히 훌쩍,
암전
다음 날, 출석부를 쓰기 위해 서 있는 두희, 인기. 주연은 청소 중, 현아는 통화 중이다.
현아
(수화기 구멍 막고) 애기, 아까 프린트 부탁한 것 좀 갖다 줘요!
주연
(빠르게 갖다 준다)
영민 만년필을 돌리며 유유히 들어온다.
두희
이거 또 늦네.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영민
(인기를 밀치고 출석부 작성) 이거라니. 말이 심하네.
인기
(이 와중에 영민에게 모나미 볼펜 건네고)
영민
노 땡스.
두희
이 와중에 그걸 또 건네냐? 너 지금 새치기당했잖아.
현아
네, 잠시만요, 여기가 봉술 대회장이에요? 왜 이렇게 시끄러워요? 애기!
주연
(대걸레 봉 들고 영민, 두희에게는 위협적으로, 그러나 인기에게는 부끄러워서 귀엽게) 쉿……
두희
뭐야. 왜 우리한테만 위협적으로 해.
인기
(두희 입 막고) 쉿 할게요.
영민
쉿 하니까 생각나네. 강두희, 저번에 우리 앞에서 완전 쇼한 거야. 애인이랑 둘이 있을 때는 다르더라.
두희
쉿 하라고 했지. 다윤이라도 들으면 어쩌려고. 우리만 아는 사실이라니까.
인기
왜요? 어땠는데요?
현아
(통화) 사실이 그렇다 해도, 어떻게 학생들 사생활을 까발려요? 학교 측에서 학생들을 보호해줘야지, 우리가 나라의 개예요?
영민
아니 진짜 애교를, 애교를! 나 정말 (웃음)
두희
이런 식으로 하면 나도 너 수치스러운 거 까발린다.
인기
그래서요? 어떻게 했는데요?
영민
뭐, 뭐라고 했더라. 두희 치즈버거 사주세요. 네? (두희 막으려고 필사적으로)
인기, 주연
(우엑)
현아
(통화 중) 저도 지금 구역질 올라올 정도로 힘들어요.
두희
야 닥치라고! 오바이트 주워 담으라고.
인기
(주연 오바이트 받아주는 척, 마치 꽃다발 주는 자세로)
주연
(부끄러워서 인기를 귀엽게 주먹으로 밀치고)
인기
(백 텀블링)
두희
저 퍼포먼스는 뭐야? 둘이 정말 무슨 사이인데.
영민
보기 좋구만. 같이 꿀꺽하면 되겠네.
인기
(웃음) 뭘 둘이 꿀꺽해요.
영민
뭐랄까.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그런 거 말야. 술과 사랑을 섞는…… 뭐 그런 거…… 그 에로스적인 측면에서 보는…… 뭐 그런……
두희
뭐 그런 거 뭐. 뭐. 하여간 아는 것도 없으면서 막 갖다 붙여. 내가 그러다가 부리 함몰된다고 했지.
시끌벅적, 암전.
문주영
샌드위치 모임 주최자. 학교는 가끔 가고 최저시급을 받으며 샌드위치 사 먹을 돈을 벌고 있다. 일을 하고 나면 배고픈 것도 잊고 도무지 사랑할 기운도 없고 슬펐던 오늘을 쓰는 건 내일로 미룬다. 노력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는 변명만 남은 젊음이라니. 그래도 살겠다면 샌드위치를 먹어야지. 인생의 마지막 목표가 있다면 쉬림프 아보카도 샌드위치가 되는 것.
2018/06/26
7호
- 1
-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 「무화과 숲」, 민음사, 2012